가. 연해주에서 의 독립운동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 (자료출처 : 독립기념관)
우리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은 1900년을 전후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만주, 러시아의 연해주 등지에 근거를 두고 일제와 여러차례의 독립전쟁을 수행한 독립군단들은 1920년 10월 만주 봉오동과 청산리 지역에서 독립운동사상 전무후무한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과 수많은 의열사들도 조국 광복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전쟁
1910년 전후 민족운동가들은 만주·노령 및 미주 등지에서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단을 조직해 활동하였다. 특히 3·1운동 후에는 만주·노령지역의 독립군들은 강력한 독립군단을 조직해 국내진공 작전을 감행하였는가 하면, 만주까지 침입한 일본군을 맞아 대규모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독립군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모진 수난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수많은 한인과 독립군이 목숨을 잃은 경신참변(1920, 庚申慘變)과 자유시참변(1921, 自由市慘變)은 나라 잃은 민족의 비애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국의 수난도 독립군의 의지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독립군은 1922년부터 흩어진 전열을 재편하면서 남북 만주에서 통합 군단(軍團)인 통의부(統義府) 및 대한독립군을 성립시켰고, 이후 참의(參議)· 정의(正義)·신민부(新民府)등 3부(府)로 재정비하여 독립전쟁을 늦추지 않았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괴뢰정부를 세우게 되자 독립군은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3부 통일운동의 결과 성립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까지 계속 항전을 이어가다가 일부는 중국 본토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통의 인사들은 계속 만주에 남아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또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등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이끌어 갔다. 그런가 하면 중국 본토로 이동한 인사들은 그곳의 민족운동 세력과 힘을 합쳐 1940년 9월 중경(重慶)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을 조직해 광복의 그 날까지 대일항전을 펼쳤다.

재만(在滿) 민족운동계 대표들은 1910년대 후반에 '대한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독립전쟁 실천의 시기가 왔음을 각성시켰다. 그리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노령·미주 등에 이주한 동포들도 이에 호응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해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과시하였다. 이어 지금까지 준비한 독립군기지의 무력(武力)을 전투체제로 정비해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돌입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만주와 노령지역 독립군기지에는 망명 민족운동가들의 노력에 의해 무장투쟁력이 결집된 50여 개의 독립군단이 조직되었다. 이들 독립군단의 독립군들은 압록·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 침략자 일제를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들의 주공격 대상은 일제의 주재소·헌병대·도청과 같은 침략기관과 한국인들을 괴롭히는 침략의 원흉들이었다. 독립군들의 이 같은 국내진입 항일전은 한국을 영구히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이에 일제는 독립군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작전계획을 세워 독립군기지인 서북간도까지 침입하여 공격을 펼쳤다. 하지만 독립군들은 굴하지 않고 줄기찬 항전을 펼쳤다.
1920년 6월에는 간도의 봉오동(鳳梧洞)에서,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물리쳐 독립전쟁 사상 빛나는 양대 승첩을 기록하였다. 이 같은 신명을 바친 독립군의 무장투쟁은 1920년대 중반에는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의 활동으로 이어졌고, 20년 후반과 30년대 전반기에 북만주에서는 한국독립군, 안만주에서는 조선혁명군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계속하여 중국 관내와 만주지역에서 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동북항일연군 등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어 조국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1. 독립국가연합(CIS) 동포현황

연해주의 도립운동기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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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출처 : 사랑과 용서
글쓴이 : 망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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