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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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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읽기] 함태경
국민일보 종교부 기자 
북경대학교 정치학 박사 
차이나네트워크연구소(CNI) 실행이사
[2006.07.19] 
 
▣오프닝
현재 중국정부는 삼자교회에 대해 ‘지도와 감독’, 가정교회에 대해 ‘단속과 탄압’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국 기독교는 지역별로 현지 상황과 정부의 세부정책에 따라 삼자교회와 가정교회가 공존하는 곳, 서로 경원하는 곳,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곳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하나의 잣대로 중국교회를 진단할 때 혼선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본론
삼자교회는 중국정부의 통일전선에 의해 당의 일원화된 지도를 받는 전국적인 형태로 세워졌습니다. 이를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1949년 가을 베이징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개최됐는데 이 때 종교계인사 8명, 기독교 5명, 불교 2명, 이슬람교 1명이 참여해 종교정책에 관해 토론을 벌였습니다. 회의 결과로 나온 공동강령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이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종교 내면에 숨겨진 부패와 악습, 그리고 제국주의 요소를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공산당과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저우 총리와 좌담회를 마치고 상하이로 돌아온 중국기독교 대표단은 여덟 차례에 걸친 수정 끝에 40여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서명을 받아 ‘신중국 건설에 있어서 중국 기독교의 노력의 길’이라는 문건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침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중국 교회 및 단체는 반드시 최대한의 노력과 유효한 방법을 통해 신도들에게 제국주의의 죄악상을 알리고 제국주의와 그들의 음모를 경계시켜야 한다. 동시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정부의 토지개혁정책을 철저히 숙지하도록 교육한다.

둘째, 중국 교회와 단체는 반드시 유효한 방법으로 일반 신도들에게 애국민주정신과 자존의 심리를 배양시켜준다. 중국기독교가 제창한 삼자애국운동의 원리를 성취해야 한다.

국가는 공식적으로 종교자유를 인정하고 종교집단을 제도권 안에 공인해주면서 교회로 하여금 중국 공산당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적극 선전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서 활동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중국기독교는 한국전쟁기간에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지원하는 것)의 지지활동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1950년 12월 미국의 경제지원을 받는 문화교육 구제 기관과 종교단체에 대한 처리방법을 밝히고 미국과 관계를 끊는 한편 중국과 외국인 선교사의 여행 및 선교문제에 대한 지시를 발표했습니다. 모든 외국인 선교사의 중국내 여행과 선교가 불허됐으며 공산당은 1951년 3월 ‘종교혁신운동의 적극적 추진에 대한 지침’을 공포하고 기독교와 가톨릭의 자립혁신운동은 하나의 중요한 정치의식을 가진 군중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기독교 인사들은 1951년 4월 베이징에서 정무원 종교사무처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기관을 처리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 회의에 전국 기독교 종파와 기독교 단체에 속한 대표가 참석했는데 이때 기독교 인사들은 삼자선언의 임무와 기본방침을 재확인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애국정신을 재확인했습니다. 아울러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이용해 중국을 침략하려는 음모에 대해 공소대회를 열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기독교협진회는 천인공소대회와 만인공소대회를 가졌습니다. 공소대회는 1952년 전국에서 169차례나 열렸고 이어 1952년 화동지역의 신학원을 합병, 딩광쉰 주교를 원장으로 하는 남경금릉협화신학원이 설립됐습니다. 이듬해 4월엔 화북지역의 7개 신학원을 통해 연경협화신학원을 설립했고 그 후 중국기독교항미원조삼자혁신운동준비위원회가 베이징에서 중국기독교전국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우야오종은 중국교회의 7대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294명의 대표들은 ‘전국동포에게 고함’을 채택하고 삼자혁신운동이란 이름을 삼자애국운동으로 바꾸고 중국기독교삼자애국 운동으로 확정했습니다. 이 정신에 따라 13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중국기독교삼자 애국운동위원회(삼자회)가 설립됐습니다.

1922년 각 교파와 기독교 기구대표들로 설립된 중화기독교협진회가 삼자회로 인해 전국 교회를 연결하던 기능을 상실해 1955년 문을 닫게 됐습니다. 삼자교회는 그러나 1958년부터 전개된 인민공사운동, 대약진운동 실패와 당권을 둘러싼 중국 공산당내 권력투쟁 등으로 인해 정부의 강력한 관리와 통제를 받았습니다. 1961년에는 교회 주일학교가 금지됐는데 제국주의 사상으로 아동을 해치고 문화의 침략 도구가 된다는 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각 부서활동도 폐지됐습니다. 교역자와 교인의 노인개조와 정치학습 등으로 정상적인 종교활동이 점차 어렵게 됐습니다. 특히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삼자애국운동에 동참한 삼자교회 소속 목회자들조차 6개월간 정치학급을 받았고 자신들이 착취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자인하며 공장 농장 등에서 노동개조를 받아야 했습니다. 교회당은 파괴되고 성경은 불태워졌습니다. 그러던 중 개혁개방정책이 시행되면서 삼자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85년 ‘애덕기금회’를 설립하면서 해외교류를 통해 신학교 확충, 신학서적 보급, 교회지도자 양성 등 삼자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대외에 천명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교회에서도 리더십 교체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습니다. 중국정부가 공인한 기독교인민단체인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삼자회)’와 ‘중국기독교협회(기협)’는 2002년 베이징에서 제7차 중국기독교전국회의를 갖고 지젠홍 장로(70)를 삼자회 주석에, 차오성제 목사(71)를 기협 회장에 임명하는 등 대폭적인 인사 개편에 나섰습니다. 이 대회는 특히 중국교회가 전체적으로 젊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참석자들의 평균연령은 49.6세로 지난 대회에 비해 3세가 낮아졌고 여성의 참여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체 참석자의 230%가량이 여성이었으며 이는 지난 대회에 비해 1.1%가 늘어난 것입니다. 앞으로 목회자의 연령은 더욱 젊어질 것입니다. 노목회자들의 은퇴는 가시화되고 40∼50대 소장파로 세대교체가 되고 있습니다. 베이징지역 교회의 주임목사는 60대 이하로 모두 바뀌었습니다. 물론 잡음 또한 있습니다. 즉, 중국기독교협회와 성급 기독교협회가 지방화를 추진하면서 인사·교회운영 등을 둘러싼 중앙과 지방의 갈등, 지방 삼자교회 지도자들의 개인주의 배금주의 대두 등이 불거져 나오고 있습니다.


▣클로징
삼자교회는 계속해서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일 것입니다. 중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삼자교회성도는 1600만명이고 현재 일시에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교회가 등장할 정도입니다. 5000여명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은 지난해 5월 새롭게 건축된 저장성 항저우시 기독교 충이탕(崇一堂)으로 삼자교회(정부공인교회) 가운데 최대 규모입니다.
충이탕은 원래 1866년 항저우시 칭타이가에 처음 세워졌지만 1958년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 등으로 인해 주변 토지와 교회당이 병원 및 일반 민가로 사용됐었습니다.
무조건 삼자교회는 관변교회라면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내부자적인 관점을 갖고 삼자교회가 형성 발전하게 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는 한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삼자교회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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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① 
 
동서문명의 동맥 난주의 실크로드
 
 네스토리우스는 AD 431년 에베소 세계 공의회에서 ‘기독론 시비’에 휘말려 정죄 추방이 된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였다. 이 사건은 교회사의 중심에 자리하여, 세계 기독교의 기본틀을 흔들어버렸다.
네스토리우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수리아 사막으로 쫓겨 가서 묶인 몸이 되자 에뎃사에 집결하여 아시아 기독교를 개척하기로 결심을 굳힌다.
우리가 차분한 마음으로 초대, 중세로 이어가면서 세계로 뻗어가는 기독교의 흐름을 보면 재미있다. 초기 바울사도의 제 2차 전도여행기 중 사도행전 16장을 펴면 바울이 아시아 방향으로 가고자 했다. 그때 바울을 지도하시는 성령께서는 한사코 바울의 아시아행을 가로 막으셨다. 하는 수 없이 바울은 유럽행을 결단하고, 마케도니아의 빌립보로 건너갔다. 그날 이후 바울은 유럽 기독교의 선봉이 되어 기독교 유럽시대의 아버지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아시아는 복잡하다. 우리가 앞서 지적한대로 바울의 아시아행을 결코 용납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많은 이들은 바울이 지목한 아시아가 어디냐를 놓고 시비하는데 그건 매우 싱거운 문제이다. 당장은 에베소 아시아이겠으나, 곧이어 아나톨리아에서 북방으로 카스피해를 비켜 가면 중앙아시아, 옆으로 가면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파미르 고원이나 히말라야를 넘으면 대륙아시아, 아시아의 본토인 중원 대륙까지가 아시아가 된다.
광역 아시아에는 바울 당시에 이미 종교와 철학의 황금기를 이루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아시아로 진격해 가면서 황홀경을 느꼈던 지혜와 철학의 보고가 아시아였다.
그런 아시아를 향하여 아직은 철학적 기틀도 바로 세우지 못한 바울의 기독교가 덤벼든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을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은 아시아의 길을 열었다. 열 두 제자 중 다대오와 도마가 페르시아의 타브리즈와 인도의 마드라스까지 갔다. 물론 도마의 경우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일설에 의하면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인도까지 간 선원이 그의 배에 승선한 도마를 확인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인도행 선교단이 지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아시아 행 선교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AD 280년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아르메니아는 로마 제국 영역 밖의 세계였다.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만 일삼던 카타콤 시대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아르메니아를 ‘동 기독교’로 교회사는 분류하고 있다.
`동 기독교'는 `아시아 기독교'로 호칭할 수 있다. 필자는 `아시아 기독교'로 분류한다. 아시아 기독교(동 기독교)는 아르메니아를 제외하고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타직스탄, 박트리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기독교가 확산되어 갔다.
필자가 금번 중국 서안에 도착한 날은 5월 26일, 그날부터 6월 2일 귀국하는 시간까지 짧은 한 주간을 난주에 들러 황하의 물줄기를 보았으며, 난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16시간 주변 풍광을 살필 수 있었다. 물론 밤시간은 침묵과 기도의 시간이었다. 난주는 서안 당나라 수도(장안)에서 콘스탄티노플이나 로마로 가는 Silk Road의 사실상 출발지다. 서안에서 800km로 짧지 않은 거리이기는 해도 난주는 시하허(夏河)로 거쳐서 돈황까지의 험난한 길을 가기 위한 주요한 길목이다. 다시 말하면 서안(장안)에서 출발한 중국 대륙의 물품 등을 재정리하여 수만리 먼 길을 가고 오려면 별도로 관리해야 하는 세관이 있어야 했다. 시내 중심을 가로 지르는 황하(黃河)를 바라본다. 서울의 한강만큼의 강폭은 아니어도 5,464km 강의 흐름이 만만치가 않다. 물론 강의 길이는 황하가 앞설 것이다. 그리고 황하 문명은 아시아권 인류문명의 출발점으로 기록될만큼 유명하다. 난주 시립 박물관에 갔을 때 황하에서 발굴한 진귀한 돌들을 전시한 방에 들어가 보았다. 별도의 관람료를 받을 만큼 형형색색의 돌들에서 황하의 흐름과 강변 따라 이루어지는 문명의 이야기를 암시 받을 수 있었다.
개항기 중국의 지도자 손문 선생을 기념하여 최초로 놓은 현대식 중산교(中山橋)를 마주 바라보며 앞산 높은 곳에 위치한 백탑사에서는 난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중산교를 중심으로 왼쪽 끝부분에 세관의 자리가 있다. 엄청난 물량이 로마나 페르시아를 향해서 가고, 또 그들의 문물을 중국으로 가져오는 동서 문명의 동맥이다. 장안의 예비 기착지 난주는 그래서 나의 관심 지역이다.
물론 장안(서안)에서 난주를 경유하지 않고 시하허로 가는 길도 있다. 그러나 대상(Caravan)들이 대륙을 오갈 때 사실상 당나라를 전후로한 시대에는 난주를 거치게 되어 있다.
나는 일정이 모자라서 난주의 백령사 탐방은 뒤로 미루었는데 난주에는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적지 않은 흔적이 있다. 감숙성의 중심인 난주, 그러나 나는 시하허(夏河)를 잠시 다녀오려고 일정을 계획하다가 1박 2일의 난주 일정만 소화하고 밤 기차를 타고 서안으로 돌아갔다. 버스 16시간 보다 밤 기차 9시간으로 충분한 수면을 취했다.
서안 시내를 다니면서 당나라 시대의 성벽을 관찰하고, 서문 쪽으로 가서 궁성으로 들어갔다. 당태종 시대에 건축을 시작하여 그의 아들 이치, 곧 당 고종 2년에 완공한 궁성의 위치를 보았다. 북경의 자금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서점이나 박물관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당나라 시대의 궁성은 물론 대신들과 세력가들이 살던 위치들도 확인했다.
내가 오늘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알로폰(Alopen) 페르시아 출신 주교(감독)가 AD 635년 (정관 9년)에 황제를 대신한 방현령(房玄齡)의 영접을 받으면서 당나라에 공식적으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전파하는 출발점의 분위기를 살피는 중이다.
나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AD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이단 정죄되어 추방된 이후 그들이 중심이 되어 아시아 선교를 실천했던 약 1천년 현장을 찾고 있다.
방현령이 국빈의 예로써 한 사람 기독교 지도자를 영접한 이후 당나라 2백여 년, 송나라, 징기스칸의 후예들, 그리고 바그다드에서 잠적(소멸)해 가는 네스토리안들의 역사를 복원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일은 경교사를 찾아가기로 한다.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아시아 기독교, 이교도들의 틈새에서 자기 모습을 확실히 드러내지 못한 네스토리안의 오늘 모습도 재구성해 볼 수 있을까?
조효근 목사/본지 발행인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⑪ 중국 내몽골 조효근 목사 2007/11/12 10:44 30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⑩ 조효근 목사 2007/11/05 11:23 48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⑨ 타지키스탄→내몽골 조효근 목사 2007/10/29 13:33 53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⑧-타지키스탄 조효근 목사 2007/10/29 13:30 43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⑨ 타지키스탄→내몽골  조효근 목사 2007/10/29 13:27 34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⑦ 조효근 목사 2007/10/15 11:04 69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⑥ 조효근 목사 2007/10/08 11:33 84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⑤  조효근/본지 발행인 2007/09/19 15:37 113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④  조효근 목사 2007/09/03 10:14 113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③  조효근 목사 2007/08/22 14:43 193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②  조효근 목사 2007/08/20 11:57 186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①  조효근 목사 2007/07/11 16:46 219
■ 페르시아 순례 ⑥  조효근 목사 2007/07/04 15:42 261
■ 페르시아 순례 ⑤ 2007/06/13 12:40 262
■ 페르시아 순례 ④ 조효근 목사 2007/06/11 10:06 286
■ 페르시아 순례 ③ 조효근 목사 2007/05/23 13:36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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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들소리신문 /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6/board.php?board=toboard&command=body&no=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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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선교 계산법


 중국선교는 쉽지 않다. 선교 장애 요소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중국은 우선 외형부터가 큰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수십 배가 더 되는 영토는 물론 문명의 선진을 주장한다. 한국인이 중국의 한자 문화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에게 중국은 큰 나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과 관계가 좋을 때, 또는 무난했을 때는 상국(上國)이라 호칭했다. 더 좋을 때는 형님의 나라, 아버지 나라, 심하면 상전의 나라라고도 했다. 그러나 등 돌리고 하는 말은 ‘뙈놈들’이었다.
 우선 중국은 ‘제국’의 틀을 2천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그 주변의 종족들을 복속시켜 중국화 하는데 성공한 친화력을 가진 나라이다. 원나라, 곧 몽골 족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준 일은 있으나 다시 중국화 되었고, 만주족에게도 국호와 황제의 자리를 내준바 있으나 만주 족은 철저하게 중국화 되어 그 근거도 사라진 오늘의 형국이다.
 한 때는 중국보다 더 큰 나라였던 티벳을 굴복시켜 자치구로 만들어 버릴 만큼 공룡의 힘보다 더 큰 세력이다.
 그런데 세속과는 별개로 중국은 본디 기독교를 좋아했던 민족이었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유럽세력과 큰 갈등을 가져오면서 어려운 선교 현재를 맞이하고 있다.

 1. 근대 중국선교의 개척자

 로마 가톨릭의 선교역사는 마테오 리치를 선두로 한다. 리치는 155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583년 중국에 처음 상륙한 예수회 선교사이다. 그는 〈천주실의〉등의 저자로 중국명 리마두로 불린다.
 마테오 리치는 단순(순수) 선교사라기보다는 동서 문화 사상사에 이름을 올려야 할 만큼 다양한 업적의 인물이다. 그는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했고 서양에 중국사상을 전해준 인물로서 ‘진정한 세계인’이라는 호칭을 가지고도 있다. 일단 그는 이름이나 복장부터 중국 이름이요 중국 선비들과 같았다.


 2. 기독교의 중국교회

 

 기독교의 경우는 영국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년)이다. 그는 영국 노덤 벌런드(Nothum Berland) 모페드(Morpeth)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혈통을 지닌 청빈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3년 런던 고스포드 선교학원(Gosport Missionary Academy)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804년 중국선교를 결심했다.
 1807년 1월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of Society)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갔다. 1807년 뉴욕을 경유, 드디어 그해 9월 4일 중국의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중국에 도착한 모리슨은 중국어 익히기에 주력,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통역요원으로 일하면서 선교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모리슨은 1818년 영화서원(Anglo-Chinese College)을 설립하는 데 공헌하였고, 7년 동안 노력 끝에 1822년 화영자전(華英字典)을 간행했다. 이는 최초의 영중사전이었다. 1834년 별세할 때까지 중국 선교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모리슨의 요청으로 1813년 영국에 파송을 받은 런던선교회 소속 밀레(William Milne, 1785~1822년) 선교사와 양발(梁發, 1789~1855년) 목사의 활동도 만만치 않다. 그는 중국인 최초의 전도인이며 목사이다.
 중국 선교는 순조롭게 발전해 갔으나 영국이 중국의 목을 조여 오는 것을 중국은 알고 있었다. 중국 뿐만 아니다. 영국은 1819년 싱가폴 지배, 1842년 홍콩을 지배했다.
 중국은 청나라(1644~1912년)와 중화민국(1912~1949년) 과정에서 서구 열강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다. 영국은 중국 중부 황해지역, 불란서는 중국의 남부지역, 독일은 상동성, 러시아는 북쪽의 몽골지역, 일본은 만주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마치 큰 황소 한 마리 잡아놓고 여럿이 뜯어먹는 형국이었다.

 3. 중국식 기독교 시대

 드디어 중국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때가 왔다.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1949년 10월 11일)와 동시에 중국에 거주하는 135개 선교단체에 소속된 기독교 선교사 5천943명이 위기에 몰렸다. 그들은 1950년 1월 안에 선교사 전원 추방령을 내렸다. 간신히 사정하여 1950년 10월 14일까지 3천 1백명의 선교사가 떠났고, 나머지 선교사들도 중국의 신자들을 위하여 비인간적 대접을 받으면서라도 남아 있으려 했으나 1952년 안에 전원이 중국을 떠나야 했다.
 우리는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를 알고 있다. 그가 1865년에 세운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는 1934년에 1천368명의 선교사를 관리했으나 그들도 1950년까지 6백명을 제외하고는 중국을 떠났으며, 나머지 선교사들도 1952년까지 모두 추방 당했다.
 1978년 이후 지하(가정)교회는 물론 소위 3자(三自)교회가 공식화되어 중국의 선교가 진행되고 있으나 중국의 3자신학(三自神學)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교회는 손을 쓰지 못하고 있으며, 지하교회들은 전체를 균형 있게 관리해낼 시스템이 없어서 고전하고 있다.
(편집국)

 

중국선교 200주년, 보완돼야 할 부분 산적
 올해로 중국선교가 시작된 지 200년이 된다. 선교 200주년을 맞아 중국교회는 ‘선교중국’비전을 위한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선교연구원(대표 인병국 목사)은 “선교중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선 중국기독교가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성장해야 한다”며 “중국기독교는 세계교회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충분한 잠재력이 있으므로 중국선교의 방향을 세계선교와 세계 복음화에 두고 동반자적 입장에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가 자생력을 가지고 세계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힘써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1807년에 시작된 중국의 기독교는 그 후로 중국 내에서 크게 성장하지 못하다가 문화혁명(1966~1976년)을 거치고 난 1978년부터 본격적으로 부흥이 일어났다. 30여 년 동안 중국의 기독교는 크게 부흥하여 현재 신자의 수가 1억 명에 이르고 있다.
 선교 200년을 맞는 중국교회는 새로운 복음의 물결이 일고 있다. 도시의 청년 지식인들에게 복음이 강력하게 전해져 복음의 청년화, 지식화를 바라보고 있고 한쪽에서는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사도 바울 이후 서쪽으로 계속 이어진 선교 릴레이에 중국 선교인들이 동참해 기독 선교정신을 예루살렘까지 전하는 데 뜻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는 아직 넘어야 할 선교적 과제가 많이 남아있다. 동 연구원에 따르면 “삼자교회는 교회내부 부패현상이 심화되어 복음사역보다는 교회의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권력다툼에 열을 올리고 있고 심지어는 성경말씀을 고쳐서 세속의 이익을 취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것. 또 가정교회는 중국의 기독교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해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으로의 위험성을 안고 있으며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교육 또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으로 알려졌다.
 이런 시점에서 선교중국을 빠르게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목회자 배출을 위한 체계적인 신학교육 △중국교회를 위해 헌신할 건전한 청년 지식인들의 배출 시급 △유^초등부 및 청소년 교육 사역을 위한 교회시설 확충 △교회의 체계적인 조직력 강화로 일부 책임자들에게 치우친 조직체계 정비 △성경안내서, 주석, 기독교서적 보급 등 문서선교 활동 필요 △중국교회의 헌금문제 해결 △세속화되고 느슨해진 영성 회복 등이 보완돼야 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세계 최대의 미전도 지역인 중국은 현재 법률상 외국인이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사실상 드러내놓고 선교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이런 시점에서 중국선교연구원은 “200주년을 맞는 중국기독교는 지금껏 주님의 뜻으로 주도되어 왔으며 선교중국으로 가는 길도 함께 하여 주실 것”이라면서 “앞으로 우리는 선교중국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중국교회를 섬기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원본:들소리신문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6/board.php?board=maboard&page=2&command=body&no=278

중국의 기독교 역사 .

기독교 특히 개신교 선교사들은 1807년에 처음으로 중국 꽝조우에 도착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내지에 들어가 전도할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1858년 <천진조약> 이 체결된 후에야 비로소 서양 선교사들이 대량으로 중국 내지에 들어와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1807년 부터 1842년 사이에 재화(在華) 신교 선교사는 24명, 세례받은 신도는 20명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 뒤 1900년에는 선교사 약 1500명, 신도 9만5천명이 되었고 1920년에는 신도수가 약 36만명에 이르렀으며 1935년에는 51만명에 이르렀다. 1949년에는 전국의 기독교 신자가 70만명에 달하였다. 1807년 부터 1949년 사이의 백여년간 서양교회에는 중국 전도를 위하여 대량의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여 중국에 기독교를 심어 놓았으나 실제로 기독교화를 실현하는데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다.

    1949년 부터 1978년까지 약 30여년간 중국 기독교의 발전은 둔화되었으며, 특히 문화대혁명 사이에는 거의 교회가 사라진 듯 하였다. 1978년 개혁 개방이후 기독교 신앙의 열기가 중국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1982년에 전국의 신도가 300여만명에 달하였으며 1987년 말에는 이미 400여만명에 이르렀고 그 증가속도가 같은 시기의 다른 몇개의 주요 종교 신자의 증가속도에 비해 훨씬 빨랐다. 그 때 이미 기독교가 전파되었던 지방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빠른 회복과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동시에 그 당시 선교사들의 사역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지역에서는 경제의 발전과 사람들의 이동에 따라 일반 기독교 신자와 자유 전도인에 의하여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서남 지구 일부 소수 민족 가운데서는 기독교가 원시종교를 초월하여 지방적 종교로 대체되었으며, 결국 전 민족의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90년대 이래 기독교는 계속하여 빠른 성장을 보였고, 전국 신자의 수는 해마다 늘어나 현재 약 천만에 달하였으며, 신도의 평균 연령 또한 낮아지고, 문화정도도 평균적으로 높아졌다.

    기독교는 중국에서 갈수록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으며 점차적으로 중국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종교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어떻게 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중국 기독교를 인식할 것인가? 이것은 참으로 진지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는 과제인 것이다.

기독교가 중국에서 전파된 두 개의 경로

  중국 전통 사회는 대개 사(士), 농(農), 공(工), 상(商) 등의 계층으로 나눌수 있으나 실질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단지 사(士)와 비사(非士)의 두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사(士)는 바로 유생(儒生) 즉 지식인이다. 그들은 어려서 부터 유가(儒家)와 경전(經典)을 배우며, 과거시험이나 기타 경로를 통해 통치 계층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한다. 중국의 사(士)와 비사(非士) 두 계층은 문화적으로 각각 사(士)를 중심으로 하는 아문화(雅文化)와 비사(非士) 계층을 상대로 하는 속문화(俗文化)의 두 개의 계층을 이룬다. 중국의 종교 전통은 상하로 구별된다. 천자(天子)는 제천제조(際天際祖)하고, 지식인은 유가학설을 닦으며, 유학(儒學)에 탐닉하거나 또는 열성적으로 사회에 뛰어 들기 때문에 종교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사(非士) 계층을 주체로 하는 중국에서는 조상을 숭배하고 자연을 숭배하며 또한 유(儒), 불(佛), 도(道)의 여러 종교를 수용하는 민간종교 (통속 종교라고도 부른다)가 성행되었다.

    불교 교리가 외부에서 유입된 후 아문화(雅文化)와 속문화(俗文化)의 두 단계에서 각각 중국 문화와 접촉하여 발전되었다. 장기간의 역사 발전을 거쳐 중국 사회에서 상하가 구별된 경전불교(經典佛敎)와 민속불교(民俗佛敎)로 형성되어 갔다. 불교경전는 중국의 지식층들의 열성적인 번역과 깊은 연구와 토론, 아울러 불교교리에 관한 역대 고승(高僧)들의 노력으로 도가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불교는 중국에서 중국 문화 특색을 지니고 여러 종파와 파벌을 형성하였으며 그 중심을 철학에 두었다. 불교철학은 특히 송조(宋朝), 명조(明朝) 때 유학의 흡수, 융합을 거쳐 중국 사상과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경전불교(經典佛敎)가 중국 문화 사상에 가져다 준 영향은 아주 크다. 그와 동시에 불교는 속문화(俗文化) 단계에서도 원만한 발전을 가져왔다. 불교는 중국인의 요구와 이해에 따라 발전, 개조되고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중국의 민속불교(民俗佛敎)로 형성되었으며,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어 민간 풍속의 일부분이 되었다. 중국 경전불교와 민속불교는 비록 상하가 구별되기는 하였지만 상호 협조하며 보충하였다. 경전불교는 교의(敎義)의 순수성을 유지하였고, 민속불교는 종교발전과 전파를 강조하였다. 양자는 서로 상호 보완하고 도와가면서 함께 중국 사회에서 생존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근대 중국의 기독교 도입은 두 단계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이제마태(Timothy Richard, 1845-1919)를 대표로한 일부 선교사들은 주로 중국의 지식인들과 사회 고위층 인사들을 목표로 전도하였다. 그들은 서양 과학과 문화를 소개하고, 병원과 학교를 세우며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서양의 과학, 문화, 지식에 관한 서적을 번역하며, 심지어 중국의 정치생활에 참여를 통하여 더욱 광범위하고 높은 차원에서 중국 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발전의 적합한 문화환경을 마련하여 중국에서 기독교화(基督敎化)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중국의 최초 서양식 학교와 병원은 모두 개신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것이다. 1905년 광서(光緖) 황제는 유지(諭旨)를 내려 과거를 중지하고, 학교를 보급할 것을 지시하여 서양식 학교가 전국 각지에서 잇따라 설립되었으며 전통적이며 낡은 교육제도를 점차 새롭게 바꾸었다. 현대적 교육 제도의 설립은 서양 문화를 보편적인 국민 교육에 침투시켜 외래문화를 중국문화의 일부분이 되게 하였다.

    선교사는 과학자가 아니었으며, 그들이 서양의 과학과 문화를 소개했던 목적은 전도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희망과는 달리 비록 중국사회는 서양의 과학과 문화를 광범위하게 흡수하긴 하였지만 적합한 환경에서의 기독교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무엇보다 먼저 서양 선박의 견고함과 대포의 위력을 뼈저리게 경험하였기에 서양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부득불 서양 학문을 배워 산업을 진흥시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목적을 이루려 하였다. 또한 그들은 서양 정치제도에도 참고할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뒤 무술변법(茂戌択法), 신해혁명(辛亥革命) 등을 통하여 정제 개혁을 시도하였다.

    중국에서는 서양문화의 부단한 신임과 중국 지식인들의 서양 유학으로 인하여 일부 서양 학문을 통달한 중국인들이 문화, 심리등 여러면에서 국민정신을 개선하여야만 근본적으로 중국을 개화시킬수 있다고 인식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5. 4 새문화 운동이 발생할 수 있었다.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이래 '태평천국(太平天國), 양무운동(洋務運動), 무술변법(茂戌択法),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부터 항일전쟁, 중국인민혁명에 이르기까지 줄곧 기독교는 지속적으로 문화적 영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영향력 있게 주도한 사상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5. 4 새문화운동에서 전반서양화(全磐西化)를 제기한 저명한 중국학자에 의하면 胡造 등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하였다. 5. 4 지식계에서는 중국에서 민주화와 과학을 토대로한 새문화, 새사상, 새도덕을 건립하며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 날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더우기 1922년에 시작된 [비기독교 운동]은 청년 지식인들 가운데서 아주 큰 영향을 일으켰으며 [기독교]란 세 글자가 일반 청년과 학생들 가운데서는 상당한 반감을 사는 단어로 인식되었다.

    기독교는 유*문화 측면에서 중국 사회에 대한 영향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비록 많은 지식인 및 사회 고위층 인사들도 기독교에 귀의하고 있었고 또한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중국 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었으나 총체적으로 말해서 전반적 중국 문화에 대하여 영향을 줄 수 있는 기독교 지식인 계층이 형성되지 못하였으며, 종교적 측면에서 기독교의 영향력 있는 작품들이 매우 적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는 국외에서는 기독교 교파가 매우 많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처럼 중국의 특색을 지닌 여러 종파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똑같은 외래 종교라 하더라도 기독교는 불교처럼 중국에서 경전 기독교 (經典 基督敎)의 높은 문화현상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중국에서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Timothy Richard와 동시대의 선교사 아덕생(James Hudson Taylor, 1832-1905) 등은 전도의 목표를 사회 하층에 두었으며, 순회전도, 의료전도, 개인전도 등 직접적인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중국 내지인 변강, 소수 등 민족지구에 깊이 들어가 선교하였으며,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전도소를 세우고 선교사업을 확장하였고 심지어 제일 험난한 지역에 까지 선교를 감당하였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부터 시작하여 중국 전지역으로 기독교를 확장하였다. 이 일을 위하여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중화내지회'를 창건하였으며 서양교회에 선교사를 중국에 파견할 것을 호소하였다. 내지회는 고등교육을 받은 선교사를 받아 들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정규적 교육을 받지 않고 목사 신분을 갖지 못한 선교사를 받아 들여 중국에서 전도하게 하였다. 선교사는 국적과 교파를 따지지 않고 단지 기본적인 교의(敎義)를 지키면 곧 내지회에 가담하여 중국에 가서 전도할 수 있었다. 내지회를 제외하고 19세기 말 신교의 몇 개 종파 즉 성결교(信義宗), 장로교(長老宗), 성공회(聖公宗), (公理宗), 침례교(侵禮宗), 감리교(監理宗)등이 모두 이미 중국에 선교사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전도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건설하였다. Hudson Taylor가 말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속세의 작업은 모두 우리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며' '만약에 의료사업으로 복음 전파와 설교를 대체한다면 이것은 극히 잘못된 것일뿐 아니라 만약 학교와 교육으로 성령의 능력을 대체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개화한다면 이것 또한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의화단 운동(義火團 運動) 후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중점을 자선, 위생, 교육 사업에 두었으며 다만 내지회 선교사들만이 예전과 같이 편벽하고 낙후한 지역에 내려가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이런 지역의 신도들은 비록 경건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문화수준이 높지 못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 결국 그들의 신앙은 중국 민간 종교와의 마찰을 피할수 없었다.

    1949년 중국대륙이 해방된 후 외국의 선교사들은 모두 중국을 떠났으며, 중국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와 완벽한 단절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기독교는 독자적으로 중국 사회에서 발전하였다. 몇십년 동안의 정치운동, 특히 1957년 후 기독교는 큰 발전이 있을 수 없었고, 특히 문화 대혁명 가운데서는 완전히 소멸되다 싶이 하였다. 각 지역에 흩어진 평신도들은 장기간 각종 조건의 제한으로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심도있는 연구와 토론을 할 수 없었다. 무신론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회환경에서 기독교 지식인들은 보다 높은 문화, 공개적 장소, 학술 논단 등에서 기독교 신학을 변론, 연구, 토론하여 통속적 기독교 신앙을 인도하여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릴 능력과 조건이 되지 않았다. 객관적 역사와 현실적 상황이 중국 기독교를 다만 민간문화에 의지하여 보존되어 발전되도록 방치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 기독교는 몇십년의 소강상태를 거쳐 개혁과 개방 이후 주목할 만한 발전을 하고 있다. 세례받고 입교하는 신자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고 일부 가정 모임도 나타났다. 한족(중국인) 농촌 지역에서 기독교 발전은 매우 빨랐다. 운남의 소수민족 가운데서 귀주 서북부의 묘족(苗族), 이족(邇族)의 경우 원시종교는 급속히 쇠퇴되고 기독교가 모든 종교중에서 가장 발전이 빨랐으며 사회적 영향도 날로 뚜렷하게 전개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중국 기독교 신자 80%가 농촌에서 생활하며, 그 중 절대다수는 여성 신자들이다. 기독교 - 이 순수한 외래종교는 중국에 전수되어 비록 중국사회에서 [경전 기독교]와 같은 높은 단계의 문화현상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중국에 정착하여 민간에서 발전하였다. 필자는 이것을 [중국 민간 기독교]라 호칭한다.

 

근대 중국 민간 기독교의 발전

중국 민간 기독교는 근 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수많은 신도를 갖고 있다. 전문가의 의견에 의하면 중국의 기독교는 수년내에 획기적인 성장을 도모하리라 본다. 하나의 순수한 외래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중국 사회에서의 끼친 영향은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기독교가 중국의 지식 계층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고 또한 중국적 신학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는 기독교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불리하다고 볼 수 있으며 전체 기독교의 신앙을 북돋우는데도 상당히 부정적인 요소로 자리 잡을수 있는 것이다. 어쩌며 이것이 중국 기독교의 가장 부족한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에서는 기독교가 문화수준이 낮은 민간에 편중되었는데, 이는 특수한 역사적, 현실조건에 기인한 것이다. 세계의 기독교와 비교하여 볼 때 중국 기독교는 뚜렷하게 저급하고, 거칠며, 그리고 미신적이고, 낙후되었으며 그 발전 또한 맹목성을 띄고 있다. 만약 이것이 민간 봉건 미신과 결합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선교사로 자칭하는 자들과 불순분자들에게 의하여 대중을 미혹시키는 역할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강권(强勸), 포함, 불평등 조약등이 수반되었다. 아편전쟁부터 의화단 운동(義和團)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지에서 수백차례의 교란이 일어났으며 (그 중 천주교로 일어난 교란이 다수를 차지함) 사건의 결말은 모두 중국 사람들의 심령에 치욕과 상처만을 남기고 말았다. 근대에 있어서 서양의 침략은 중국으로 하여금 국민이 궁핍해지고 국가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였으며 기독교의 사랑의 교리는 현실 생활에서 증오와 아픔만을 남기게 되었다. 여기에 대한 역사를 회고하면 중국 지식층이 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냉담하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 당시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왔올 때 중국의 전통문화는 거대한 보수적 기질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기독교 문화와 중국 문화 사이에 얼마간 충돌점이 있었다. 기독교는 평등한 태도와 대등한 입장에서 중국의 위대한 문화전통을 대하지 않았고, 그들의 국력을 바탕으로 높이 앉아 내려다 보듯이 하였으며, 기독교 문화로 중국 전통 문화를 대처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중국 지식층의 배척을 받게 되었고 양자간에 상호이해 또는 나아가서 상호수용, 흡수, 융합은 근본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 결과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중국 유문화 단계에서 경전기독교 (經典基督敎)의 높은 단계의 종교 문화현상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는 중국 기독교가 분명하게 반성해야 할 점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대단히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각종 사상과 문화가 상호간에 깊은 영향을 행사할 뿐 아니라 상호 연합되고 흡수되는 추세에 있다. 강권을 믿고 한 문화를 다른 문화에 이식하고 대체하려는 시도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현재 세계의 각종 문화들은 모두 세계무대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려고 애쓰고 있다. 긍정적으로 말해서 생명력 있는 종교란 우수한 문화들을 능숙히 수용, 흡수해야만 강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증언함과 동시에 나아가서 독특한 그들의 전통문화도 보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도 대단한 변화를 가져 왔다.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중국사회의 물질, 생활방식, 문화형태, 지식구조 등의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중국 문화는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장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중단되지 않은 문화체계이다. 비록 근 300년 사이에 뒤떨어졌기는 하였으나 백년간의 노력을 걸쳐 이미 점차적으로 서방 선진국들의 발걸음을 따라 잡았다. 개혁과 개방후 중국 사회는 더욱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으며, 경제와 문화 역시 세계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세계로 나아가자]는 것은 현재 중국사회의 조류이며 시대적 요청이다.

    기독교 세계도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다. 20세기 40년대 말부터 50년대에 이르기 까지 중국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의 주류에서 이탈되어 단독으로 중국 사회에서 발전하고 있을 때 세계 기독교 신학에는 이미 여러 가지 새로운 사조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신정통 신학, 위기신학, 변증신학, 존재주의 신학, 과정신학 등이다. 일부 저명한 신학자들은 모두 그들 나름대로의 신학의 정상을 정복하고 있었다. 20세기 60년대에 일종의 급진, 세속적인 기독교 신학이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른바 급진적 세속신학 혹은 사신신학이라 불리웠다. 세속신학의 핵심은 당대의 세속적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의 가치는 절대적으로 내세만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현세를 가르킨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도 역시 현세의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만약 종교가 직접적으로 사회문제를 관심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미신적인 것이며 위험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세속적이며 현세적 생존이야말로 인간이 유일하게 관심 또는 주목할 대상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인식과 판단기준이 반드시 인간이 생존하고 있는 세상의 체험에서 오는 것이지 단순히 성경의 계시를 바탕으로한 교회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급진적인 세속 신학가들은 신으로서의 예수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지 않고 역사적, 인간적 예수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았고 이웃을 위한 봉사 역시 그의 중요한 사역중 하나였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삶을 따른다고 하면 반드시 이웃의 고난과 고통을 자기의 고난과 고통으로 승화하여야 할 것이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젊은 기독교 신학자와 일반 신자들은 한결같이 세속신학의 관점에 동조하고 기독교의 가치관을 반드시 현세적 삶에 돌려야 하며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중국이 변화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도 변화하고 있다. 중국 문화와 기독교 문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양자는 모두 적극적으로 사회에 뛰어들어 세계를 아름답게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국 기독교가 이러한 측면에서 현대 기독교 신학과 맥을 같이 할 수 있을까? 중국 기독교가 만약 자원하는 마음으로 당대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흡수하여 자체의 경전 기독교화 한다면 중국 민간 기독교를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 시킬수 있으며, 또한 자아 완성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위대한 작업은 반드시 중국의 신도들에 의하여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민간 기독교의 의의와 특징

중국은 개혁과 개방이래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생활 수준이 보편적으로 높아졌으며, 사회가 안정되고 대중 문화 생활이 날마다 새로워 지고 있다.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래 중국사회는 오늘과 같이 번영태평한 시대를 나타낸적이 종래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점차 소실된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급속한 발전의 추세를 보여주었다. 중국 민간 기독교의 발전은 종교 발전의 보편적인 현상을 나타내었다. 즉 중국 민간 기독교의 증가는 민중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정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현대 종교학자들은 종교에 대하여 일종의 공통적인 현상으로서 종교통합이나 공존을 주창하고 있다. 종교적 공존이란 일반적으로 의, 질서, 총체성을 가지고 인간의 가치있는 생활을 이루는 도구로 이해하고, 이것을 참된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

    기독교는 현실 초월적 현상과 적극적으로 사회에 몰입하는 이중적 특징을 갖고 있다. 신약성경는 하나님의 계명을 아래와 같이 두가지로 귀결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骕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목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30-31). 기독교의 하나님은 全知, 全能, 全善하며 형상이 없고 우상 숭배하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인간이 마지막 날에 대한 추구와 무한에 대한 동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들이 만약 한계와 무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과 일치하려면 오직 자신을 끊임없이 향상시키고 자신을 완벽하게 향상시켜야 한다. 사람은 신앙이 없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자신의 정신적 안식처가 있어야 한다. 사람은 그 자신에 대하여 내재적인 감화력을 갖고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향상케 하는 최종목표를 선택한다. 만약 한 사람이 선택한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면 그가 마음으로 부터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생활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외에 인간은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직면한다. 이에 대한 기독교의 계명은 이웃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며,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고, 또한 지속적인 노력을 거쳐야만 가능할 수 있다. 만약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에 따라 생활한다면 세상의 충돌과 싸움은 점차 없어지며 하나의 보편적 사랑이 넘치는 나라로 건립되어질 것이다. 사랑은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며, 현실을 변화시키는 시발점과 종점이다. 기독교가 갖고 있는 초월적 신앙, 사상적 추구,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특징적 요소는 종교적 위안이 필요하고 적극적 사회 활동에 관심을 가진 중국 민중들에게는 매우 강렬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즉 신앙의 만족을 얻을수 있으,며 또한 이런 신앙을 통하여 자신과 현실을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전통적인 다신신앙(多神信仰)에서 하나님 한분에 대한 신앙적 변혁은 신앙의 격변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신교는 유럽 종교개혁의 산물이고, 신교의 윤리와 도덕 또한 유럽 자본주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세계와 타지방에서도 산업화의 과정에서 많은 민중들을 흡인하고 있다. 일부 신진 공업국에서도 근 몇 십년간 신교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개혁과 개방 이후 윤남성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는 다양한 측면에서 원시종교와 각종 봉건 미신활동과 비교해 볼 때 현대 사회 생활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기독교는 세계를 향한 높은 단계의 문화 현상으로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낙후 상태에 처해있는 농촌 사회에 돌파구를 열어 놓았고 농민들로 하여금 개방의 길로 나아가게 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기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어서 대단한 유익을 끼쳤지 결코 해로움이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다신을 믿지 않으며 살생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개념과 다신 신앙에서 탈피하게 한다. 중국 민간 기독교는 특히 십계(十戒)를 중히 여기고, 담배와 술을 금하며, 도적질과 살인을 엄격히 금지하고, 도박을 하지 말기를 요구하며 또한 계획생육을 할것과, 과학 기술 문화를 배우고 정부관리에 복종할 것 등을 강조한다. 대중적 신앙활동을 통하여 사회의 일부 낙후한 풍습과 습관을 점차 변화시킴으로써 사회를 안정시키고 산업을 발전시키는 등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기독교 전통은 단체생활을 중히 여긴다. 특히 교회 단체활동은 기독교 생활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교회의 예배의식, 명절활동 등은 신도들의 종교적 요구를 만족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을 다스리며 연락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사회 결속을 가져왔다. 전통적 가족 개념이 점차 소실되는 중국사회에서 교회의 활동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동감과 귀속감을 얻게하였다.

    교회에서는 종교 활동외에 사회봉사를 강조한다. 신도사이에 상호관심, 상호이해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이런 봉사를 사회 전반에 널리 보급하였고 다리를 보수하고 길을 닦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노인, 약자, 병인, 불구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여러 종교들은 모두 '선하게 행동하라'고 가르쳤으나 기독교는 한층 더 나아가서 단체적 시각에서 '선하게 행동'하는 교리를 실천하였다. 이렇게 중국 민간 기독교의 사회적 봉사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근본적으로 교회가 존재하는 의미와 이유를 살펴 볼 수 있다.

   하나의 종교가 한 민족으로 부터 다른 민족에로 전파될 때 여과없이 전수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반드시 원래의 전통을 살리면서 기타 문화 전통을 흡수하여 자체의 내용과 형식을 포함하고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 적응해야만 올바르게 전파하였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여러 전통 문화의 수용과 흡수가 용이하며 매우 강한 적응성을 갖고 있으므로 이는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로 자리할 수 있는 필수적 요건을 갖춘 것이다. 중국문화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특히 중국 민간 기독교는 유(儒), 불(佛), 도(道) 등 여러 신령(神靈)을 용납할 수 있고 아울러 인격을 신적 위치에서 이해함으로써 도약하는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 기독교가 중국에서 발전하면서 문화적 단계가 비교적 낮은 민간에 편중하였으며, 아울러 한족(漢族-중국인)의 종교 관념이 장기간 귀신을 믿고 선조를 공경하는 등 비교적 원시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미신과 운명사상이 이들의 보편적 신앙사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민간 기독교는 많은 미신과 구술적 내용이 융합되어 있으며, 세계의 기독교와 비교하여 볼 때 많은 미신적 성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지역이나 신자의 신앙성격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경제와 문화적 지위가 높은 신도가운데는 지식층 신자의 비율이 비교적 높으며, 정규적인 신학훈련을 받은 교회 지도자가 있는 연해지구와 대중성시의 교회의 성도들과 그 신앙은 비교적 전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와 문화가 상대적으로 낙후하고 봉쇄된 농촌 또는 변강 소수 민족 지역의 많은 기독교 가정 모임의 신자들은 당연히 민간 전통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보편적으로 말하면 중국 민간 기독교는 기독교 전통신앙 즉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을 믿으며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믿고 있으며 [성경]을 신앙의 근거로 하고 있고 상당 부분 중국화(中國化)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하나님 관
강서성 무님현(江西省 武媡縣)이 기독교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지방 기독교 신도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인과보응(因果報應)의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다.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하나님을 믿으면 보우(保佑)받고 그렇지 못하면 징벌을 받는다. 현실생활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드리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어 인간의 요구를 곧 만족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또한 요괴와 악마를 붸아낼 수 있으며 앓는자로 하여금 건강을 회복하게 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하나님 앞에 너무 비천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근심될 때는 선교사에게 부탁하여 대신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대중들은 선교사들이 대신하여 기도하는 것이 더욱 효력이 있다고 믿는다. 특히 집안에 환자가 있을 경우 더욱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선교사도 등급이 있으며 대중에게 덕망이 높은 선교사들이 하나님과 더욱 쉽게 왕래할 수 있어서 그들이 대신하여 기도하면 더욱 효력이 있는 것다고 믿는다.

2. 삼위일체(三位一體)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원래가 심오하여 파악하기 어려운 교리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원래 일체(一疜)로서 상이한 형태로 나타난다. 비록 하나이지만 또한 셋으로, 또한 비롯 셋이지만 하나로 이해된다. 이는 매우 추상적이며 신비감을 소유하고 있다. 한번은 외지에서 선교사라고 자칭하는 세사람이 방문하였는데 그들은 각각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분장하고, 신도들에게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라고 강요하면서 이것이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공경히 인사 올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3. 성경
농촌 기독교 신도 가운데는 문맹이 다수를 차지하며, 조사에 의하면 농촌 기독교 신도 60%가 문맹이며 성경을 읽을수 없는 사람이 90%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앞다투어 성경을 사고 성경을 붉은천으로 싸서 궤짝밑에 소중히 간직한다. 만약 앓는 사람이 있으면 성경을 머리맡에 놓고, 외출시에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데 악마를 누르고 귀신을 붸으며 사람을 보우하며 무사태평하게 한다고 확신한다. 또 다른 지역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절대 다수 신도들이 문맹 혹은 만문맹 상태에 처하여 있으며 종교신앙 수준이 비교적 낮고 온 마음에 '현령'(성령) '승천'의 이념으로 꽉 차 있으며, 때로는 직업을 포기하고 집단적으로 산에 올라가 '승천 구원받기-성령'을 기다린 사건도 있었다. 또 현령(顯靈), 승천(昇天), 그리고 귀신을 몰아낸 이야기는 여러곳에서 여러번 들은적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어긋나며 민간의 봉건미신과 매우 비슷하다.

4. 기독교 윤리 도덕의 중국화
중국 기독교는 십계명을 매우 중히 여기며, 지역에 따라 그 내용도 달라진다. 운남지역의 십계명은 술 마시지 말고, 담배 피우지 말며, 도박을 해서도 안되며, 살인을 하지 말고, 매매 혼인을 하지 않고, 사람을 편애하지 않으며, 사람을 꾀어 팔지 않고, 귀신을 믿지 않으며, 위생을 지키고, 일부일처제를 실시한다. 운남 지역 연강의 십계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일부일처제를 실시하며, 사람을 꾀어 내어 팔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고, 서로 사랑해야 하며, 살인하지 않고, 음란한 짓을 하지 않으며, 도박을 하지 않고, 귀신을 믿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중국 교회의 십계명은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 중국인 지역의 십계에는 '우상을 공경하여 모셔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중국 민간 전통은 조상을 공경히 모신다. 중국의 민간 기독교는 양자의 모순을 조절하였으며 신도들의 말 그대로 '만약 마음속으로 오직 유일한 하나님만 믿는다면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는 형식적으로 절하여도 큰 문제로 삼지 않는다.

5. 기독교 의식의 중국화
도시교회의 기독교 의식은 예배적 차원에서 볼 때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농촌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선교사 시대로부터 노래와 춤에 능한 소수민족의 특징에 근거하여 이른바 [희락 예배]를 드리며 있다. 그들은 영가를 부르고, 영무(靈舞)를 추며, 민족언어로 찬송가를 부르며, 소수민족들의 삶 즉 그들이 즐겨 듣고 보는 형식을 기독교 의식에 융합하였다. 예배일 혹은 교회 명절 때 여러 소수 민족 마을에서는 여기 저기에서 찬송가 소리가 끊임없이 울러 퍼져 농후한 종교적 분위기를 이루었으며 이러한 종교감정을 통하여 사회단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중국 기독교는 기독교의 기본신앙을 보존함과 동시에 내용과 형식상에서 어느 정도 중국 민간 종교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문화 전파 과정의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민간 기독교를 미신적 신앙으로부터 구별하고 나아가서 미신을 제거하며 건전하게 발전시키는가 하는데 있다.

*추가자료참고: 중국역사와 문화 (중국어문선교회; http://www.chinatogod.com/main/35.php?ctg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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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http://www.cornerston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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