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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ТА АДИСЛААЧ

              

 

 

몽골인에게서 들은 현대 몽골의 이런저런 이야기.

 

직장이 직장이다보니 때때로 일이 많아질 때 인력을 용역업체를 통해 충원해서 사용합니다. 대부분 외국인으로, 함께 일하다 보면 간혹 정직원으로 채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지난 몇년간 함께 일했던 몽골아줌마가 그런 경우였죠. 몽골에 대해서라면 칭기즈 칸의 위명도 있어 관심도 많으므로,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그를 통해 몽골의 많은 사회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자료와 진지함을 동원한 연구는 아니지만, 칭기즈 칸이라는 환상에 둘러싸인 현대 몽골의 모습을 몽골인 자신의 시각으로 본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흥미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부르는 몽골어는 <솔롱고스>입니다. 몽골어로 <무지개 나라>라는 뜻으로, 무지개는 <솔롱고>라고 하더군요. 생각보다 괜찮은 이름인데, 13세기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 몽골제국의 역사서 <집사> 에서도 고려를 <솔랑카>라고 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 온 모양입니다. 원래는 한반도 북부만을 일컫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역사인식

역사적인 인식으로는 그냥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 공물을 바쳐왔던 나라들 중 하나" 정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도 나온다고 하더군요. 그 이외에 몽골인과 한국인은 똑같이 생겼다면서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몽골아줌마는 2000년에 한국에 왔는데, 남편은 먼저 한국에 와서 일을 하고 있었고, 그때 마중나온 남편에게 "어머 저 아저씨 우리 옆집의 그 아저씨야! 맞지! 맞지!" 하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남편은 "한국에는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많아!" 라고 하며 면박을 주었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한국 생활
한국인들의 태도도 호의적이어서 사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는데, 하필이면 처음 들어간 공장의 상사가 아주 고약했던 모양입니다. 20대의 �은 남자였는데, 성질이 더러워서 걸핏하면 소리를 치고 아줌마들을 면박을 주며 군대고참급으로 갈구었다고 합니다. 아저씨와의 담판으로 그 다음부터는 조용해졌는데, 하필이면 얼마 후 2층에서 물건을 나르다가 지상으로 추락하여 허리가 손상을 입어 하반신이 마비되었지만, 한국 병원의 치료로 재기할 수 있었는데, 형편이 형편이다보니 계속해서 일을 하게 되어 허리가 문제가 좀 있었고, 05년 당시 그 문제가 조금씩 나오던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몽골 정부측에서 한국의 병원에 몽골인을 치료해주는 것을 부탁하고 병원비를 몽골 정부측에서 부담하여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허리를 치료받으러 갔는데, 그곳에서 말끔하게 수술에 성공하고 현재는 다른 일을 잘 하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중고 소나타 2를 모는데, 타본 결과 어느 �은이가 튜닝한 차였습니다. 아마 튜닝후 기름값이 후달리니까 중고로 팔아버렸고, 그걸 아저씨가 사게 된 모양입니다. 원래 몽골에서 택시 기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전 실력은 제법 괜찮습니다.

 

칭기즈 칸

칭기즈 칸의 이름은 거의 절대적이더군요. 아줌마의 말에 의하면 "만일 우리에게 칭기즈 칸이 없었다면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았을 거고, 몽골이라는 이름도 다른 나라처럼 아무도 몰라주었을 거야. 칭기즈 칸이 있었기에 모두 우리를 몽골이라고 하면 모두 알고 있어. 그래서 칭기즈 칸에게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하기야 칭기즈 칸이 없었다면 아무도 몽골을 기억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도 거의 신 급으로 숭배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시절에는 칭기즈 칸의 이름을 부르거나 찬양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지당했고, 그랬다가는 바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칭기즈 칸을 사람을 많이 죽인 학살자, 히틀러와 버금가는 폭압과 약탈의 파시스트로 가르쳤는데,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도 속으로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언제나 마음 속에는 칭기즈 칸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했지만, 아무도 입밖으로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몽골에게 200년식민지를 당하고 지금도 대몽항쟁을 제1차 대조국전쟁으로 찬양하며 모스크바가 몇번씩 초토화당하고 수만단위로 대학살을 당해 원한이 뼈에 사무친 러시아의 영향이 있었을 거라고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만, 아줌마는 그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만 공산주의 붕괴 이후에는 모두 마음껏 칭기즈 칸을 찬양할 수 있었다는 점을 좋아하더군요. 언젠가 몽골에서 술을 가져와 모두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몽골 제일의 술이라는 그 술의 이름도 칭기즈 칸이었습니다.

지금은 독립영웅 수크바토르의 동상을 가려버리는 거대한 칭기즈 칸 동상이 있고, 자본주의화 이후 정체된 몽골인들의 희망으로써 마치 서구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듯 언젠가 칭기즈 칸이 부활하여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타파하고 다시 옛날의 그 영광된 시절로 되돌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티무르

차가타이 한국에서 일어나 4한국중 3개를 뒤집어 엎어버린 투르크화된 몽골족 티무르. 아줌마는 티무르라는 이름을 듣자 상당히 반갑게 반응했습니다. 일반인인지라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지만, 몽골의 후계자로 칭기즈 칸의 제국을 거의 재건할 뻔한 용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카라코룸? 하라호른!
우리가 아는 몽골어 발음과 실제 발음은 엄청나게 차이납니다. 어느나라든 자국에서 하는 외래어가 실제 발음과 어느정도 차이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몽골어의 경우는 더 심합니다. 잡담을 하다가, 카라코룸은 요즘 어떻냐고 물어보니, 도저히 못 알아듣더군요. 결국 몽골제국시대의 수도 등등 손짓 발짓을 해가며 설명하자 "아아! 하라호른!" 이라고 하면서 제 어깨를 팍 치는 겁니다. 하라호른은 울란바토르의 남방에 있는데 사람은 별로 살지 않는답니다. 이 발음 차이 때문에 네이버 검색해보면 사전 지식 없이 몽골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들은 대로 <하라호른>이라고 쓰고, 몽골역사에 대해 쓰여진 글들에서는 <카라코룸>이라고 하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록시스(Xerxes)와 크세르크세스(Xerxes) 의 차이 같습니다. 중국의 한자어 음차와 영어식 발음을 받아들여 온지라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외에 다른것도 엄청 많은데
쟈무카 - 쟈뭇
티무르 - 토무르
토곤티무르 - 톡혼 토무르
쿠빌라이 - 후빌라이
홀돈 - ㅋ호르똥
투멘타이 - 토멘트
수부타이 - 스베트
울란바토르 - 올랑바타르
수크바토르 - �흐바타르
야율아보기 - 줄룬치 아바키

등등입니다.

 

중국

중국에 대해서 최소한 몽골(외몽골)인들은 내부적인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줌마도 그랬는데, 중국을 노골적으로 싫어하지는 않지만, 별로 좋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국은 한때 몽골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유린했던 나라였고, 이후로는 청조 이래로 식민 지배를 당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몽골 지역은 만주족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지역이었던 만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은 중국의 팽창주의가 더해져 반중감정이 상당한 편으로, 얼마 전에는 몽골 거주 중국인 추방령이 내렸다는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내몽골

내몽골에 대해서도 상당히 시큰둥합니다. 남북한이 나뉘어 반드시 통일해야 한다고 이를 가는 우리와는 다르게 거의 남 취급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청나라의 지배를 알아서 받아들였고, 그 이전에도 외몽골과는 다르게 타타르라는 국명으로 분열된 역사도 있는데다, 청조 후기에는 한인들이 대량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결국 "우리를 배신하고 따로 나갔다" 는 표현을 쓰더군요. 서로 사이도 별로 좋지 않고, 내몽골 사람을 만났었는데 몽골어가 몽골어 같지 않다더라며 투덜대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잡담을 하다가, "60년대에 내몽골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오겠다고 사정한 적이 있었어. 우리나라는 그 사람들한테 좋다고 나갈 땐 언제고 이제와서 온다고 하느냐, 안 된다라고 해서 결국 안 받아들였어. 잘했지?" 라고 하더군요.
분명히 그때면 문화대혁명으로 내몽골의 몽골족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하던 시점인데, 그걸 또 안 받아주고, 잘했지라고 물어보는데 참 뭐라 대답해야 될 지 모르겠더군요. 그만큼 감정이 있다는 소린지....

 

불교
몽골은 오랫동안 티벳의 라마불교를 믿었습니다. 원나라 때부터 믿었는데 나머지 3한국이 죄다 이슬람으로 간 거와는 대조적이죠. 공산주의 혁명 이전까지 불교를 믿었는데 혁명이 시작되면서 불교믿는 사람, 중들은 죄다 끌려가고 사원은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몽골아줌마의 아버지는 아줌마가 36인데 비해 아버님 나이는 작년에 돌아가실대 98세-_-;; 로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팔팔했고 칸 시대, 공산혁명을 경험하고 노몽한 전투에도 참전하여 보여준 사진에는 전통 복장에 훈장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분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아줌마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중들이 모조리 끌려가고 사원이 파괴되는지라 아버님은 곧장 집안에 놔둔 불상과 불교용품을 모조리 모아다 태워버렸고, 이후 군인들이 와서 "당신, 불교믿어?" 라고 묻자 "나는 불교 안믿습니다" 라고 말해서 죽음을 면했다고 합니다.

 불교를 하루이틀 믿는 것도 아니다 보니 곳곳에서 불교를 버릴 수 없다는 사람들이 고집을 피워 그런 사람들은 결국 총에 맞아 죽거나 어딘가로 끌려갔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잘했지?" 하는데 그냥 잘했다고 했습니다. 살아야 빛을 보죠. 그러나 다른 건 다 버렸어도 불경만큼은 몰래 숨겨놓아 끝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다시 불교를 믿기 시작했고 불교적 전통이 오래되서 그런지 기독교를 믿는 아줌마도 차 안에는 움마니반메훔등이 씌여진 불교 악세사리를 달고 다닙니다.

노몽한 전투
일본 관동군이 몽골 국경을 찝적대다가 소련-몽골 연합군에게 미친듯이 박살난게 노몽한 전투입니다. 이 싸움으로 관동군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던가, 소련측도 무댓뽀 기갑운용으로 은근히 피해가 심했다던가 하는 것과는 반대로, 몽골아줌마는 아버지가 참전한 전투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병으로 참전한 아버지의 경우 소규모 교전을 빼고는 전투 없이 죽은 사람만 신나게 보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굉장히 많이 죽었고, 후룬바일이라는 곳에 가면 아직도 죽은 사람들의 해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녹슬은 탱크나 자동차도 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이 그거 보러 많이 온다고도 하더군요.

 

수크바토르

풀 네임은 지금도 모르는데 몽골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존경하는 지도자가 수크바토르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도끼 영웅>-_-;;; 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아줌마의 증언에 의하면 짜르파 러시아군이 몽골에 들어와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괴롭혔기 때문에 분노한 수크바토르가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고 사회주의 교육을 받고 레닌과 함께 몽골을 독립시켰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지폐에 수크바토르의 제복차림의 모습이 찍혀 있었고, 요즘 화폐에는 전통복장을 한 수크바토르의 모습이 소액권 지폐에 찍혀 있다는 모양입니다. 고액권은 칭기즈 칸이 차지하고 있다는군요.

수크바토르는 큰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30대도 못되서 요절하는데, 몽골인들은 몽골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중국이 수크바토르를 독살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더군요. 영화에서도 그렇게 묘사되는 모양입니다. 여하튼 수크바토르는 �어서 요절한 덕택에 좋은 이미지만 남기고 영웅으로써 존경받고 있고 그 뒤는 그의 친구라는 초이발상이 이었답니다.

윰자긴 체덴발

잡담 중에 나온 몽골의 지도자 중에 야리꾸리한 인물로 말해준 것이 <윰자긴 체덴발> 입니다. 굉장히 더디게 진행되던 몽골 목축업의 사회주의화를 완성했는데, 이 사람이 제법 장기집권을 한 모양입니다. 아줌마는 울란바토르 출신으로, 어렸을 때에 혁명 기념일 등에 거리 퍼레이드 행진에 동원되었던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증언에 의하면 북쪽의 김정일 아저씨의 머리를 올빽으로 하고 양복 입힌 다음에 뿔테 안경을 씌우면 똑같다고 합니다. 처음 김정일을 봤을 때 생긴 것이 비슷해서 웃겼다고도 하더군요. 아줌마의 경우 다른 때도 비슷했지만, 이 때에도 말을 잘못했다간 큰일나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간혹 총을 든 몽골 군인이 밤중에 불시로 나타나서 근처의 어디집으로 들어가 사람을 끌고 가는 경우를 본 적이 있었고, 다음날이면 소문이 파다했다고 합니다. 유목생활을 하는 몽골인들이야 초원 한복판에서 체덴발을 외치든 개덴발을 외치든 상관 없었겠지만, 화장실도 공동으로 쓰는 낡은 소련식 아파트에서 다닥다닥 붙어 사는 밀도 높은 울란바토르 주민들에게는 발없는 말이 천리길인지라 부모님도 조심할 것을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체덴발은 80년대 초반 몽골인민혁명당에 의해 쫓겨나게 됩니다. 몽골인들의 경우, 체덴발은 러시아의 꼭두각시이며, 그의 아내도 러시아인이었다고 합니다. 몽골을 위하는 게 아니라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소련에 충성한 괴뢰 지도자, 독재자, 대충 이정도로 인식하고 있더군요. 몽골 아줌마가 말해준 체덴발의 최후는 이렇습니다. 당의 탄핵을 받고 갈데가 없어진 체덴발은 몽골인들도 그를 싫어하는 터라 결국 아내와 함께 러시아로 탈출했다고 합니다. 러시아가 마련해 준 집에서 망명해 살고 있던 그는 러시아의 병원에서 주사를 맞다가 죽어 버렸다고 하는데, 이 점을 두고 러시아가 죽였다, 무언가 비밀이 있는데 드러나는게 두려워서 러시아가 암살했다던가, 혹은 쓸모가 없어진 인형은 더이상 필요가 없어져서 죽였다 등, 당시는 물론 지금의 몽골인들에게도 꾸준한 화제거리라고 합니다.

 

사회주의 붕괴

몽골아줌마는 80년대 후반부터 나이가 찬 고로 의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옷을 만드는 기술, 재단 기술을 배우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그때는 사회주의의 모순이 극에 달하여 막장으로 치닫던 시점이었죠. 하지만 막 20대가 된 아줌마에게 사회주의 모순이고 그런 걸 알 리가 없습니다. 당시 울란바토르 시내에서는 공공연히 암시장이 열렸고, 많은 사람들이 생산물을 내다 팔거나 사 오고 하는 등 시장 경제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기업소에서야 그런 걸 막으려고 했고, 아줌마가 다니던 공장에서도 아침마다 암시장 가다 걸린 직원들을 사람들 모아 놓고 "이 사람은 공산주의를 안 지키고 암시장 간 나쁜 사람" 이라고 혼을 냈다고 합니다. 혼내는 걸로 끝났다는 걸 보니 기업소에서도 불가항력이란 걸 알긴 했던 모양이더군요. 여하튼 몽골아줌마는 막연하게 시장경제가 나쁜 것인줄만 알고 있었는데 아줌마의 어머니가 시장에 옷가지를 내다 팔고 있었다고 합니다. 

몽골아줌마는 사정을 잘 모르고 그냥 시장경제는 나쁘다 라는 식으로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지라 "엄마, 왜 물건을 팔어? 그건 나쁜 짓 아니야?" 라고 묻자. 그 어머니는 아줌마를 끌어안고 "내 딸아... 세상에는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단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결국 사회주의가 철폐되고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나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달라진 건 암시장이 시장이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는군요. 

 

거리의 소년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몽골에서 일거리가 갑자기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배급제로 운영되던 식량 공급도 갑자기 자율화되어 당과 국가에만 의존하던 사람들은 큰 뒤통수를 맞게 됐죠. 일찍부터 암시장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물품이 귀해져서 가격이 팍팍 올랐고, 밥도 이젠 자기가 알아서 찾아먹어야 하는데다, 일거리까지 줄어버렸으니 당과 국가에만 의존하고 별 생각 없이 널럴하게 살던 사람들은 뭘 어떻게 할 줄도 몰랐고 어쩔 도리도 없었죠. 그런 이유로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이 구 유럽식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하수도 속에서 살면서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도둑질, 강도, 협박 등 못하는 게 없고, 아줌마의 말에 의하면 "이 아이들이 이제 다 컸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된다." 며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시원한냉면님의 경우 몽골을 여행하며 울란바토르 치안의 문제점에 대해 호소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이런 거였죠. 

 

도시와 대비되는 농촌 

농촌이라고는 하지만 농사는 안짓고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영위하는 시골은 사정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지금가지는 국가 소유의 양이나 말, 소나 돼지를 관리하는 관리인 정도의 역할만 주어졌지만, 사회주의가 철폐되고 양이나 말같은 가축들이 갑작스럽게 사유 재산으로 지정되어 시골의 유목민들에게 공짜로 주어졌다고 합니다. 양이나 말을 키워 그 젖과 고기로 식량을 삼으니 애초에 식량이 부족할 일도 없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졸지에 큰 부자가 되었고 그걸로 자동차를 장만하고 TV를 사며 도시민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시원한냉면님이 몽골여행을 하면서 시골사람들은 착해서 좋았다는 말을 하셨는데, 생활의 여유가 그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무기력한 사람들

몽골인들은 대체적으로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다... 가 몽골을 다녀온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평가에 대해 칭기즈 칸의 몽골제국만 생각하다 충격을 받거나 놀라게 되는데, 일단 도시민들중 극빈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위에서 나온 거리의 아이들을 포함하여, 사회주의 70년간의 세상에서 살면서, 노동의욕도 사라지고 당과 국가가 알아서 다 해주는 세상에서 살다 보니, 그 세상에 완전히 적응하여 급격히 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변하지 못하고 과거와 같은 성격을 고치지 못한 채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그런 사람들이 아이를 버리거나 범죄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게 한두개라면 모를까, 높게는 정치권부터 낮게는 민중들에게 이르기까지 만연하고 있고, 과거 한국처럼 나는 죽어도 아들은 대학 보낸다 이런 마인드도 없습니다. 자본주의 세력이 조금씩 들어오며 몽골의 겉모습은 변해가고 있으며, 자본주의가 계속됨에 따라 이런 사람들도 점차적으로 줄어 간다고는 합니다만, 과연 실상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P.S. - 이런 경향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다만 북한은 95년이후 본격적인 고난의 행군으로 더이상 당과 국가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죽음으로 깨닫게 되면서, 요즘은 군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내 목숨은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의식이 만연해 있다고 합니다. 민중은 텃밭을 일구고, 군은 대형 농장을 자기 세력권 안에 두고 과거 봉건제와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몽골과 대비되는 이런 의식 변화가 장차 통일 한국에는 플러스가 되겠지만, 그 변화 과정에서 받은 엄청난 희생을 생각하면 씁쓸합니다. 

 

변해가는 시가지 

최근의 몽골은 이마트와 같은 곳도 들어오고 수도 울란바토르의 모습은 꾸준히 바뀌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도입 이후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한국, 일본 등의 지원도 활발해지고 도시에 자동차의 숫자도 계속해서 늘어나 지금 울란바토르에서는 출퇴근길 교통 체증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커다란 빌딩도 세워지고, 러시아가 다시 살아나면서 나름 시너지 효과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울란바토르가 안정화되고 경제력과 부가 몰리면서 사회주의 붕괴 초기와는 다르게 경제수준이 역전되고 있는 듯,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점차 수도 울란바토르에 집중되어 과거 우리의 달동네 생성 시절과 같이 울란바토르 시 외곽에선 그렇게 올라온 사람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와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판잣집에서 살았지만, 그들은 유목 가옥인 겔에서 살고 있다는 점 정도가 다를까요.

개인적으로 알아본 결과 몽골은 이제 기지개를 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몽골 국토 동서를 종단하는 거대 고속도로의 개발 계획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접근조차 하지 못했던 금광이나 기타 지하자원에의 접근도 활발해질 모양입니다. 비록 지금은 많이 미흡한 모습이지만, 미래의 몽골이 다시 칭기즈 칸 시대의 영광에 조금이나마 근접할 지는 약간은 희망을 품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이 몽골에 대한 실제 모습을 많이 알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http://history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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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선교 가시려는 분 필독사항
선교사 비자를 너무 고집하지 말라
몽골에 오려는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한다.

1. 선교사 비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은 비공식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 신문이나 잡지에 광고를 내는 것은 좋지 않다. 현재 한국에 있는 몽골 정부의 사람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면 비자는 나오지 않으며 입국해서도 문제가 된다.

2.선교사 비자를 너무 고집하지 말라 우선 이곳에서 언어훈련을 해야 하니 학생 신분으로 입국하라. 이곳 대학의 초청장을 받거나 관광으로 들어와서 학교에 등록하는 절차를 밟으면 된다. 입국 6개월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 초청장이 꼭 있어야 한다. 이곳으로 연락을 하면 초청장 발부가 가능하다. 영문 이름과 생년월일,그리고 입국하고자 하는 날짜를 연락하면 된다. 참고로 통신의 보안을 위해서 힘써 줄 것, 목사, 선교사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참고로 외국인들은 1년에 한번씩 거주 비자를 받아야 한다.이것을 받지 않앗을 경우 하루에 1$씩 벌금이던지 추방이다.

3.외국어 대학이나,국회 도서관에 가면 [몽,영,일,사전]이 있다. 그 사전을 복사해 와야 된다. 현재 몽한 사전이 없기 때문에 영어 사전이나 일어사전이 필요하다. 언어를 준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몽골 대사관에 문의해서 대사관 식구들에게 약간의 수업을 받을 수 있다.물론 약간의 사례를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일본어나,소련어를 공부하면 된다. 그러나 언어는 현지에 와서 직접하는 것이 가장 좋다.

4. 학비는 학교마다 차이가 있다.
* 국립대학-250$ 매달(6개월차로 선불하라고 요구함)
* 사범대-100$(에스페란토-110$ 매달)
* 아카데미-150$(에스페란토-210$,매달)
* 도서비-매달 30-40$
* INTERNATIONAL SCHOOL-매달 300$(1년치나 6개월치를 먼저 내면 할인이 된다. 유치원 과정과 국민학교 1-3학년 수준)


경제현황

이곳의 경제 현황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참고로 몽골은 물가 상승이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번에 300-600% 정도 오른다는 것을 감안하라.신문을 통해서 발표되는 것은 1$당
400TG(투구럭)이나,은행에서는 380원으로 계산해 준다(94년11월9일 기준).
* 버스요금-30투그럭
* 택시요금-1KM당 130투그럭
* 호텔투숙비/울란바트로,바이앙골호텔
- 1인2일 최저 40$-120$
* 식사료-보� 1인당 1끼에 5-10$
* TV-350-600$
* 자동차-10000-40000$
* 집세-1개월당 200-500$
* 전화-몽골에서 한국으로, 호텔에서 1분당 7$
그외에 $로 살 수 있는 식품류(별로 없지만)는 한국과 비슷한 가격이라고 생각하면 됨.
* 4인가족의 생활비/매월 500-600$정도(교육비와 주택비를 포함하지 않은 지수)
* 마늘 한쪽 60TG(가끔 마늘이 나오지만 이들은 음식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에 비싼 편이다).

몽골의 정치

1921년 소련 다음으로 공산화한 몽골은 현재 자유 시장경제 제도로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실제로 몽골 내에서는 공산권으로 다시 돌아가자,선교사들을 내보내자는 등의 말들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당은 MARP의 집권당 외에 5개의 야당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당이 야당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공산당의 집권 체제 속에서 싹튼 나눔의 관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 바로 민족주의다. 정부는 민족주의로 인도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하루 속히 징기스칸의 무덤을 찾아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전세계에 내보이자고 주장한다.민주주의라고 선포는 했지만 아직도 멀고도 먼 나라가 몽골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인을 추방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할 것이라고 보지만 나 자신은 이 나라가 너무도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게 못하리라 본다. 현재 몽골 정부는 갈피를 못잡고 있다. 자주 바뀌는 헌법과 경제적인 상황들이 정치인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고 각 기업이나 학교의 선생님들,노인들이 계속하여 항의하고 데모하고 있다.

의료현황

이곳에는 몇 개의 병원이 있고 의과대학도 있지만 이들의 수준은 극히 낮다고 볼 수 있다.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고 의료장비들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지난 70년 동안 러시아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전해 준 것은 하나도 없다. 이곳에는 기본적인 약품 등이 부족하다. 특별히 포도당이나 항생재,피임약 등이 부족하다. 이곳은 인구정책으로 인하여 다산제를 도입하고 있고 겔(몽골인들의 집)에서 부모들의 성생활을 눈으로 보면서 성장하기 때문에 성에 대해서 상당히 개방적이다. 현재 AIDS가 몽골에 들어 왔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다. 특별히 이곳에는 특이한 성병이 있다. 몽골 정부의 발표는 15%라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성병이 걸리면 2개월만에 죽는다고 하는 것이 UN 측의 말이다.그러나 성병전문가이신 한국의 교수님을 통해서 들은 바로는 그런 강력한 성병은 없다고 한다.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지난 2년동안 주몽골 미국 대사관의 직원 2명이
이곳에서 죽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병이었다고 하는 관계자의 말이다.

현지인들과 만나는 가운데 이들이 가장 많이 앓는 부위는 신장이다. 특별히 약하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고통 중에 있고,울란바타르의 경우 인구의 1/3이 결핵 보균자라고 하는 발표도 있다.또한 몽골인들 가운데 치아가 정상적인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치과 시설 또한 열악하기 때문에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난 한국의 의료선교단이 이곳에 와서 진료하는 가운데 치과병원은 끊임없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의 식수 사정이 좋지 않다. 많은 사람들의 말로는 석회질이 많다고 한다. 어느 날은 욕조에 담아둔 물이 새파랗게 물들고 어느 날은 황토색 물로서 흙같이 나온다. 이곳은 건조한 지대라 그런지 하수도가 없다.또한 러시아 부대에서 많은 것을 실험하고 그대로 강물로 버린다. 지하수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것이 몽골인들의 치아와 속을 버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어떤 부위의 의사들이 필요할까?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 치과의사,내과의사,소아과 의사,예방학이나 공중 위생분야등이 필요하다.
* 간혹 약품을 보내주는 경우가 있으나 통로를 정확하게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써 공급한 약들이 다음날 시장에서 판매되고 만다.
* 이곳의 모든 외국인들은 주로 6개월에 한번씩, 북경이나 모스크바,홍콩을 다녀온다. 그것은 소위 말해서 풍토병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이다. 지금의 전전 미국대사가 이곳에 근무하다가 본국에서 대사일을 하겠다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직위해제 됐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후원회에서의 이해 부족으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니지 못하고 있다. 외국 선교사들이,한국선교사들에 대하여 많은 우려를 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 감사한 것은 이곳에 연세친성병원이 설립됐다는 것이다.

매스컴

이곳의 매스컴은 상당히 자유롭다. 지난 11월 1일 기준으로 280개의 신문사들이 있다. 그들은 신문윤리위원회라는 것도 없고 자신들이 기사를 써서 내놓는다. 때문에 신뢰성에 상당히 문제도 있지만 숨김없이 사실대로 나온다. 한국의 신문에 비교하지 말라. 큰 회사의 것은 주로 신문지 4-8페이지 정도의 규모이고, 작은 것은 백모지 1장의 규모도 있다. 1주일에 보통 1-3번 정도 출판된다. TV쪽은 몽골 방송국이 1개,러시아 방송국이 1개, 그리고 영어 방송을 받아서 하는 작은 방송국 하나가 있다. 주로 오후6시부터 시작해서 10-11시까지 방송되는데 주말의 개념은 없다.
라디오는 공산주의 특유의 방식대로 각 가정에 라디오 케이블이 들어 있다. 라디오의 잭을 꼽으면 몽골방송이 나온다. 단파 방식이며 1개의 채널밖에는 없다.

실제로 몽골에 오는 분들께

필수사항(장기적으로 정착하고자 하는 가정) -
겨울옷(한국에서의 겨울용은 이곳에서 가을에 입을 수 있다)
약품상자(특별히 콧물감기,설사,마이신,소독약,대일밴드 건조하기 때문에 상처가 잘나고 아물지가
않음,비타민 다량,알러지 약, 소화제,주사기 마늘 솜). 음식 - 캔 종류의 �잎,김(건조해서 누지지
않음),미역,다시다, 라면,인스탄트 채소국(농심의 배추국),밀가루,그 외에 한국인이 꼭 섭취해야 하는
음식 중에 캔과 썩지 않는 것.
전자제품 - 이곳에서는 기대하지 말것.특별히 자녀들 교육을 위하여 비디오 테이프를 준비하려면
한국에서 준비해오던지 이곳에서 비싸지만 멀티시스템을 준비할 것, 한국과 씨스템이 다름. 세탁기는
크지 않지만 국산이 있음. 청소기(훨타 많이),히터,도란ㅅ (220-110),가습기,전기장판(220V용).
문구용품 - 종이(이곳은 종이를 생산치 못한다),화첩,매직,공책, 어린이용,문구...등 자신의 사역에
맞게 준비할 것.
책 - 성경공부 교재, 신앙인을 위한 소책자 등등....

읽으면 도움이 되는 책

* [몽골어와 퉁구스어]/김방한,김주원,정제문,86,10,31 믿음사 6,000원
* [몽골민족]/권오성,김선농,김태곤,임동권,정병호,92,1.30.복조리4.000원
* [몽고문화사]/D.마이담,N.츄르뎀,김구산 역,91.3.10.동문선문예신서
* [몽골사회제도사]/주채혁 92.대한교과서 주식회사 9.500원
* [징기즈칸]/르네,그룻세,최호연 역 83,2.10 정음문화사
* [만두하이]/얀달자빈,나차구도루지 90.5.10설영환 역,문학출판공사
* [소설 징기스칸]/바실리 얀,최종수 역 푸른산
* 우편상태-이곳의 모든 통신은 도청당합니다. 또한 우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포를 보낼 수
있습니다. 1KG당 5000원이며 2주일 걸립니다. 그 소포 안에 소식을 전하십시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편으로 ..소포는 1개단 10KG이 한계입니다. 포장을 상당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결론 : 몽골의 복음화는 한국교회가

몽골은 인구가 적고 땅이 넓다. 그러기에 선교에 소홀할 수가 있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의 선교센타로 이용하고, 전세계를 정복했던 징기스칸의 후예들을 복음화시켜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힘쓰도록 기도하고 헌신한다면 이곳은 어마어마한 선교의 시장이다. 과거 역사 속에서 한국을 100년동안이나 지배했던 나라, 몽골, 그러기에 더욱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왜 한국교회가 몽골의 복음화를 책임져야 하는가?

1.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흡사하다.
2. 언어의 구조가 같은 알타이어에 속하여 유리하다.
3.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4. 한국의 초대교회의 상황과 비슷하다.
5. 한국교회의 복음에 대한 빚이 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천강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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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문화 알아보기

몽골에 단기선교여행을 가실려면 몽골문화를 먼저 알아야죠.

                  <<<<<<<<몽골文化>>>>>>>>
몽골인들을 처음 만나게 되면 우선 그들의 모습이 우리와 많이 닮았기 때문에 별로 낯설지 않고 친근하며 부담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된다. 그들 역시 우리를 별로 낯설지 않게 생각하며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면 더더욱 친절하게 대해준다. 그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무척 좋다. 그들은 현재의 몽골이 가난하며 발전하지 못했고 또한 몽골인들의 국민성이 나태하고 게으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 행여 상대하는 외국인들이 어떤 불편을 겪지 않나 혹은 무슨일이 생기지 않을까 무척 염려하며 잘 챙겨주는 편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가를 별로 바라지도 않는다. 고위직에 있거나 많은 젊은 지식인들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잘 하는 반면 영어를 잘 하지 못하므로 러시아어를 모르는 우리들이 그들과 만나 사귀는데 몽골어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친절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만났을때의 그 친절함이 관공서나 기타 업무에 관련될 때에는 무척이나 불친절하다. 다시말해, 서비스 정신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권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이지만 그들은 자기의 일은 자기만의 특권이라는 인식이 강해 보잘것 없는 곳에 보잘것 없는 직책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업무관계를 떠나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금방 가까워지고 그 다음부터 업무관계로 다시 그를 찾아가면 어느 누구보다도 일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정이 지나쳐 터무니 없는 것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적당한 변명으로 거절하면 된다. 여하튼, 처음에는 다가가기 서먹서먹한 사람일지라도 조금만 친해지면 금방 오랜 친구처럼 대하는 몽골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 보다도 더 정에 약한 사람들인것 같다.
그러나, 이처럼 정이 많은 몽골인을 만나는 데에는 최소한 지켜야할 예절이 있는데, 몽골인과의 교류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적어본다.

1. 존칭사용
몽골말에는 상대방을 부를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너와 당신을 의미하는 2가지 말이 있다. 우리말의 너는 ‘치’, 당신은 ‘타’로 발음이 되는데, 친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치’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2 살만 위인 사람에게도 대부분 ‘당신’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몽골사람들은 6~7년 정도의 차이는 대개 서로가 ‘치’라고 반말을 한다. 이는 버릇이 없다기 보다는 상대와 그 만큼 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자기에게 반말할 때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버릇없는 것에 화가 나거나 다시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가 않은데 그러한 마음을 일찌감치 버리고 상대방이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혹은 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또 하나의 이유는 외모상 한국인들은 몽골인들보다 훨씬 어려보인다. 항상 건조한 곳에서 생활하여 피부가 꺼칠해지고 따가운 햇볕에 피부가 그을려 그들은 상대적으로 한국인들에 비해 5~6살 혹은 열살이상 나이가 많아 보인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일찍 결혼을 하므로 아무래도 남자들은 더 빨리 늙는것 같다. 따라서, 그들은 나의 나이가 상대방 몽골인 보다 훨씬 많아도 겉으로 느끼질 못하므로 처음 만날때 자기소개를 하면서 자연스레 내 나이를 얘기하는 것도 괜찮다.
많은 몽골인들은 친구들의 연령차가 정말로 다양하여 7,8살씩 차이가 나도 내 친구 운운하며 서로가 잘 어울린다.
가끔 멋모르는 한국인들이 어린놈이 반말한다고 분을 삭이며 그들을 버릇없는 놈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그들과 대화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상황에 따라 xx 씨라고 불러야 할 때가 있는데 고아이(Mr.)라고 부르면 자연스럽다. 선생님에게는 바크샤 라고 부르는것이 예의고 나보다 나이가 5~15여살 많고, 내가 정말 친해지고 싶을때는 상대방을 아하(형)라고 부르는 것도 꽤 친밀감이 있어서 좋다.
실례로 몇년전 삼성의 한 직원이 이곳의 한 거래선에 상담을 하러왔다가 하루종일 상담을 해도 결말이 나지 않고 지치자 통역에게 몽골어로 형이 무어냐고 묻고는 상대방에게 아하! 한번만 도와주세요 라고 말했는데 한치의 양보도 없던 상대방이 그 얘기를 듣고는 호탕하게 큰 소리로 웃으며 우리가 원하는 가격에 상담을 마쳤다고 한다.
물론, 그들의 관계는 그 이후에도 항상 형과 동생처럼 이어진 것은 물론이다.

2. 식사시 예절
몽골사람들은 수태차라고 하는 차를 즐겨 마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몽골인들은 수태차를 마시는 것이다.
수태차는 끓는 물에 우유가루와 짭짤한 맛을 내는 약초를 섞은 것으로 익숙해지면 보리차 마시듯이 마시게 된다.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인들은 물이 가깝고 건초가 많은 곳에 겔을 짓고는 가축을 방목하였다. 따라서, 항상 물을 길어다가 조금씩 아끼며 사용했으며 겨울에는 아예 얼음덩어리를 집에다 갖다놓고 그것을 깨서 끓여먹었다.
그러다 보니, 물이 깨끗할 리가 없고 또 추운날씨를 이기기 위해서는 항상 물을 끓여 먹어야 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몽골인들은 항상 육식을 하므로 그 기름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중화시키는 무언가를 먹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수태차인 것이다.
수태차는 육식을 하는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고 젖냄새에 익숙해 있는 그들에게는 아주 향기로운 차인 것이다.
몽골인 집을 방문하면 이들은 항상 테이블위에 대개 겉이 빨간 길쭉한 보온병이 놓여있는데 이 안에는 항상 따뜻하게 보온이 되어있는 수태차가 들어있다.
손님이 오면 몽골인들은 먼저 상대방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다음 수태차를 사기그릇에 따라주며 두손으로 건내준다. 이때, 받는 사람 역시도 두손으로 정중하게 받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한다(바야르랄라). 그리고는 바로 입에다 대고 조금이라도 마셔야 하는데 한번에 다 마실 필요는 없지만 남겨서는 안된다. 실례가 되는 것이다.
처음 마실때는 젖냄새도 나고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며 가끔은 우유 찌꺼기가 다 풀어지지 않아 뭉쳐 있는 것이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몸에 나쁘지 않으니 꾹 참고 천천히 마신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수태차가 마시고 싶을때가 있다. 몽골인들은 차나 술을 상대방에게 권할때 항상 오른손가락을 모아 잔 밑부분을 받쳐 들고 왼손으로는 오른 팔꿈치를 받들면서 권한다. 하지만, 권하는 사람이 왼손잡이 일때는 반대로 해도 상관 없지만 받을때는 항상 왼손으로 오른팔꿈치를 받들며 잔을 받아야 한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몽골의 전통옷인 델은 소매가 길어 가만히 팔을 내려놓으면 소매가 손을 덮는다 -이는 추운겨울에 손을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가운데 고기들과 술잔이 놓여있는 상위에서 음식을 먹거나 술을 따르고 권할때 소매가 유난히 크고 길어 중간부분을 끌어당기며 받쳐주지 않으면 음식을 먹는데 아주 불편할 뿐 아니라 옷이 음식물에 닿아 옷과 음식이 더러워 진다.
음식을 먹을때도 주인이 권하면 역시 두손으로 받아 감사의 표시를 하는데 이때는 잔이 아니라 그릇이므로 두손을 내밀며 그릇을 정중하게 받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음식이란 상대방의 성의를 생각하여 많이 먹는 것이 좋으나 상황에 따라 이미 배가 부른 경우나, 혹은 느끼해서 도저히 먹지를 못하겠다면 음식을 하나 입에다 넣어 맛을 본 후 적당한 핑계를 대며 음식을 내려놓는 것이 좋다. 맛을 본 것 자체가 예의를 지킨 것이므로 구태여 들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간신히 먹을 필요는 없다.

3. 몽골 가정 방문
몽골인 가정을 방문할 경우에는 하찮은 것이라도 반드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예의다. 대개 보드카 1병과 초콜렛이나 사탕 정도면 된다. 그러나, 상대방의 부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을때는 화장품 정도가 괜찮다.
설사, 시간이 없고 가게가 문을 닫아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돈을 주는 것도 일반화 되어있다 (깨끗한 돈으로 2,000 투그릭 정도면 알맞음).
집에 들어가서는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부터 ‘사잉 밴오?’(안녕하세요) 라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면 된다.(명절날은 다름) 그리고, 주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아 주인이 권하는 수태차를 받는다. 가끔 몽골인들은 외국인이 불편할 까봐 신발을 신고 들어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벗고 들어가는 것이 예의이다.(아파트나 목조건물등에서)
그리고, 몽골 게르 방문시 다음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1)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인사말을 한다.
2) 중앙의 난로옆에 좌우로 2개의 기둥이 나란히 놓여있는데 왼쪽 기둥의 바깥쪽에 서서 주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는다. 두 기둥사이로는 오고 가고 할 수가 없다.
3) 자리에 앉아서는 그들이 주는 수태차를 정중하게 두손으로 받아 마신다.
4) 용무가 끝나고 나올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로 되돌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앞쪽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나와야 한다.
5) 절대 문지방을 밟아서는 안된다.
6) 인사말을 한다
* 명절날에는 인사할때 서로가 팔을 벌리고 껴안으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의 뺨에 자기 코를 갖다대도 냄새를 2번정도 마신다.

4. 몽골인의 시간관념
몽골인들은 시간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다. 보통 30분 정도 늦는 것에 별로 미안해 하지 않는다. 이는 급할 것이 없는 민족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우리마저 그럴 수는 없는 일로써 그들에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도록 약속시간을 정확히 지켜주는 것이 좋다.

5. 복장
1) 정장은 양복 과 흰색 긴팔 와이셔츠에 넥타이 이다.
2) 명절때는 몽골 전통옷인 델을 입는 것도 괜찮다.
3) 평상시 너무 어리게 입거나 추잡하게 입지 아니한다.
4) 명절때(신찔, 차강사르) 방문시 항상 모자를 착용한다. 이들은 명절때 손님이 올경우 주인이나 손님이나 모자를 쓰고 상대방을 맞는것이 예의이다.
5) 몽골인과 밖에서 만날때는 절대로 반바지를 입지 말며 부득이한 경우에 츄리닝을 제외하고는 삼가는 것이 좋다.

6. 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지 마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언가를 가리킬때 검지손가락을 사용하는데 이는 몽골에서는 대단히 실례되는 행동으로써, 상대방을 죽이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인 모르게 이러한 행동을 했다면 즉시 사과를 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를 가르킬때는 손바닥을 펴서 가르킨다.

7. 음주 예절
몽골인들은 손님이 오면 항상 준비해둔 보드카 및 여름철에 시골에서 가져온 마유주(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로서 막걸리와 비슷한 맛임) 등을 권하는데 보드카는 조그만 잔을 이용하지만 마유주는 커다란 대접에다 가득 담아 준다.
술을 주고 받을 때는 보드카의 경우 차를 마실때와 같이 왼손바닥으로 오른팔꿈치를 받쳐 잡으며 오른 손가락을 모아 술잔을 받으면 되고 마유주는 대접에다 주므로 두손으로 대접을 받으면 된다.
마유주는 처음 마시면 대개 설사를 하게 되는데 위장을 깨끗이 해준다고 하며 설사후에는 몸이 아주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마유주를 마시면 별로 취하지는 않고 배가 불러오는데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된다.
또한 보드카나 몽골 아르히등을 마실때에는 왼손으로 술잔을 잡고 오른손의 네번째 손가락을 술에 대어 술을 묻힌다음 얼굴앞으로 갖다대어 먼저 하늘을 향해 엄지손가락으로 튀기고 다음엔 앞을 향해 그리고는 땅을 향해 튀긴다음 입에다 갖다대는 것이 예의인데 마유주를 마실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는 하늘과 땅에 감사하고 또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몽골인들은 술을 마실때 끊임없이 술을 권한다. 그렇다고 다 받아 마실수는 없으므로 보드카의 경우는 조금만 입에 대어 예의를 표하고 술을 못한다고 정중하게 얘기를 하면 괜찮은데 마유주는 약하므로 최소한 1 대접 정도는 마셔야 한다. 몽골인들 얘기로는 술을 받을때 3잔까지는 기본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 예의라고 하지만 적당한 핑계를 대고 정중히 거절하면 된다.
또한 한국은 술잔을 완전히 비우면 술을 따르지만 몽골에서는 술잔이 조금만 비워도 술을 따른다. 참고로, 몽골인들은 보드카나 마유주를 잘 받아 마시면 무척 대견스러운 듯 흡족해 하며 아주 좋아한다.

8. 흡연
몽골에서 흡연은 몇몇 장소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므로 주위를 살펴 금연표시가 없는 곳에서 피는 것이 좋다.
몽골 가정을 방문하다 보면 나이드신 어른들이 있는 경우 인사를 할때 그들은 소매춤에서 조그만 옥돌로 된 병을 꺼내어 정중히 건네준다.
이것은 하마링 타미흐(코 담배)로서 두손으로 정중히 받아들어 뚜껑을 열고 두껑에 붙어있는 귀 청소기 처럼 생긴것을 구멍속에 밀어넣어 재(잎을 곱게 갈은 것)를 왼손가락위 (보통 둘째 및 넷째 손가락)에 조금 묻힌다음 엄지손가락과 함께 비비면서 코로 들이마시면 되는데 진짜 들이 마시지 말고 시늉만 내는 것이 좋다.-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대개 들이마시는데 재채기가 끊이지를 않는다.-
그리고는 다시 뚜껑을 닫아 정중히 두손으로 건네준다. 또한 공공기관에서 흡연 구역일지라도 옆 사람의 동의를 구한 후 피우는 것이 무난하며 손윗사람 앞에서는 담배를 되도록이면 삼간다. 이곳에서는 여성도 자유스럽게 담배를 피우며, 저항감을 표정에 담지 않도록 한다.

9. 여자에게 나이를 묻는것은 실례
몽골에서 처음 만났거나 친하지도 않은 여자에게 나이를 묻는것은 실례이며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이때, 끈질기게 여자의 나이를 물어보거나 혹은 무슨 띠인지 물어보는 것은 무례한 짓이며 상대에게 여간 부담을 주는 행동이 아니다. 생일등은 물어봐도 상관없으며 정 상대의 나이가 알고 싶으면 친숙해져서 부담이 없어지면 그때가서 나이를 물어볼 수는 있다.

10. 거리에서
1) 몽골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좌측통행이다. 횡단보도를 건널때는 반드시 신호를 지키며 보행신호시에도 차가 오면 일단은 경계를 하는 것이 좋다.
몽골은 우회전 하자마자 횡단보호가 나오면 대개 차들이 서지않고 바로 지나간다.
2) 택시 이용시에는 가능하면 콜택시를 이용한다.(야간)
3) 무단횡단 하지 않는다(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단횡단을 한다.)
4) 큰소리로 사람을 부르거나 이야기 하지 않는다.
5) 야간에 혼자 택시를 이용하지 않는다.(특히 여자의 경우)
6)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니지 않는다.

11. 호텔에서
1) 시내 고급 호텔의 경우 종업원의 서비스를 받으면 1$정도의 팁을 주나 지방에서는 팁을 줄 필요가 없다.
2) 방에 비치된 호텔 안내책자를 먼저 읽어본다.
3) 노출이 심한 복장으로 복도나 로비에 나오지 않는다.
4) 방에 현금이나 귀중품을 놓지 않는다.
5) 방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12. 식당에서
1) 음식값 계산은 후불이며 계산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몽골의 대부분의 식당 및 호텔 그리고 상점에서는 컴퓨터가 있다 할지라도 컴퓨터로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가 종업원이 계산기로 계산을 하므로 착오가 있을 수가 있다.)
2) 음식값을 계산한 후 반드시 영수증을 받는것을 습관화 한다.
3) 음식값을 계산할때 반드시 현지화를 준비하였다가 계산한다.(환율상 손해를 보게 되어있다.)
4) 식당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앉지 않는다.(반드시 종업원에게 동반자 수를 말하고 안내를 기다린다.)
5) 종업원을 부를때 큰 소리로 부르지 않는다.(손만 조용히 들어도 된다.)
6)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 수저, 포크, 젓가락등은 다시 집어 사용하지 않는다. (종업원을 불러 새 것으로 가져오도록 시킨다.)

13. 운전시
1) 여름엔 강렬한 태양빛을 피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반드시 착용한다.
2) 일방 통행로가 있는 곳이 종종 있으므로 교통표지판을 유의해서 본다.
3) 교통법규 위반시 잘못했음을 시인하고 경찰의 지시에 따르는데 조용히 겸손한 자세로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다. 몽골의 경찰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므로 본인이 귀찮아 그냥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4) 도로사정이 좋지 않고 군데군데 뚜껑없는 맨홀들이 도사리고 있어 가능한 밤에는 천천히 달리며 그러한 지점을 외워두는 것이 좋다.
5) 이곳의 인건비가 싸므로 운전사를 고용하는 것도 사고예방의 차원에서 괜찮다. 운전사의 월급은 보통 월 100불내 이다.
6) 출장자의 경우 가능하면 직접 운전하지 않는다.
7) 몽골의 도로에서 좌회전 차선은 오로지 1차선 밖에 없다. 2차선에서 좌회전을 시도하다가 경찰한테 십중팔구 적발되므로 직진을 하다가 되돌아 오는 것이 낫다.
몽골에서 좌회전은 신호등에 좌회전 표시가 있으면 신호를 받아 가면 되지만, 신호가 없을 경우에는 비보호 이므로 도로 중간에서 좌회전 할 수가 있다.
8) 밤에는 가로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내가 어두우므로 앞에 사람이 있는지를 잘 관찰하며 천천히 운전을 해야한다.
9) 교통사고 발생시 직접 협상하지 말고 교통경찰을 부른다.(대부분 손해를 보기 일쑤이다.)
10) 고물차 뒤는 되도록이면 뒤 따라가지 않는 것이 좋다. 가령, 차가 갑자기 서는 경우가 많아 사고의 위험성이 있다.
11) 횡단보도 앞에서는 일단 차를 세워 행인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가진다.
12) 느긋하게 운전하는 습관을 가진다. 몽골인들은 운전할때 차들이 대개가 고물이므로 천천히 달리며 많은 차들이 사이드 밀러가 없어 주행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때 짜증이나 화를 내기보다는 여유를 가져 그들과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 좋다.

14. 선물
1) 선물은 적당한 가격의 한국적인 상품이 좋다
2) 가정방문시 남자에게는 보드카 1병, 부인에게는 화장품류, 아이들에게는 사탕이나 초콜렛등이 좋다.
3) 꽃을 주고 받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으며 꽃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가끔 꽃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꽃만을 선물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 가령, 특별한 날, 남녀의 선물에 있어서 보드카 혹은 초콜렛이나 사탕등을 비닐종이로 싸고 장미꽃 조화 1송이를 꼿은 선물들은 흔하게 볼 수 있다.
4) 선물을 주고 받을때는 일어서서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는다.
5) 선물이 준비되지 않았으면 돈으로 줘도 무방하다.(2~3천 투그릭 정도)
6) 고가품, 고액의 선물은 피한다.

15. 파티
1) 초청장을 필히 지참한다.
2) 작은 선물을 준비하여 주최자에게 준비한다.
3) 자기 소개를 할 명함 등을 준비한다.
4) 초청자 이외에는 추가 동반하지 아니한다.
5) 사전통보 없이 무단 불참하지 아니한다.
6) 무리하게 술을 마시거나 권하지 않는다.
7) 담배는 지정된 곳이나 양해를 구하고 핀다.

16. 종교
1) 몽골인들은 대부분 티벳 불교인 라마교를 믿으므로 타 종교와의 논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2) 사원 같은 곳에 가서 내부 및 신자들이 절하는 모습등 촬영은 가급적 삼가도록 한다. 한번은 울란바타르 시내의 명소인 간단사원에 들렀다. 규모와 위용에 감탄을 하며 갖가지 시설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경내에는 항상 비둘기가 많이 몰려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모이를 먹고 있다.
한쪽에는 신도들이 절을할수 있는 사람체구만한 긴 널판지 몇장이 운동기구 처럼 열을 맞춰 놓여있었다. 한 신도가 그 널판지에 사지를 쫙펴고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다.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 그 신도모르게 사진을 몇장 찍고는 돌아나오는데 그 신도가 나를 부르더니 자기 사진을 허락없이 찍었으니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도 아니고 아주머니가 그런얘기를 하다니...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전혀 몽골어를 모르는 사람처럼 의아해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것처럼 대했더니, 결국은 몇마디 뱉더니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다.
역시 위기에 처하면 전혀 대화가 안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신성한 경내에서도 몇몇 신도의 마음엔 돈의 유혹이 꿈틀거릴만큼 현재의 삶이 어려운 것이 또하나의 몽골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17. 쇼핑
물건을 살 경우 돈을 지불하는 방법은 상점에 따라 크게 2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하나는 국영 백화점과 같이 여러종류의 가게가 한 주인에게 속해있는 경우에는 물건을 고른후 그 물건의 가격을 종업원으로부터 받아 직접 계산대에 가서 돈을 치루고 그 영수증을 다시 종업원에게 갔다 주어야 한다. 이때, 종업원으로부터 영수증을 받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한가지는 슈퍼나 시장과 같이 개인이 자기 가게를 운영하는 경우에는 물건을 고르면서 돈을 지불하면 되는데 대형 슈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영수증이 없다.
몽골에서는 아무리 물건을 많이 산다해도 깍아주거나 덤으로 서비스를 주는 법이 없으므로 애석해 하지 말기를 바란다. 또한, 하르자흐나 텀자흐처럼 사람이 아주 많이 몰려드는 곳에 갈 때는 도둑을 맞기가 쉬우니 돈 간수를 잘해야 하며 그들과 부딪힌다 해도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낼 필요가 없다.
이곳에는 많은 몽골인들이 값싸고 좋은 물건을 사기위해 항상 장사진을 이루는데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정도로 사람이 많고 접촉이 심해 한번 갔다오면 옷이 더러워져 빨아야 한다. 그리고, 계산시는 항상 다시 검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몽골인들은 계산할때 거의 계산기에 의존하여 계산기가 없이는 정확한 계산이 나오지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계산기 사용방법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

18. 衣食住
   1. 생활 스타일
물가수준에 비해 급여수준이 너무 낮아 대다수의 몽골인들은 문화, 여가활동을 즐길수 없는 형편이지만 발레나 연극, 극장등은 보편화 되어있어 가족단위로 즐기는 편이다. 이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시골에 가서 쉬던지 혹은 가족과 시간을 보내던지 한다.
몽골어로 토요일을 하가스 사잉 어더르(반쯤 좋은 날), 일요일을 부그트 사잉 어더르(완전히 좋은 날)로 부를 만큼 주말을 충분히 즐겨 주말에는 시내가 한산해 진다.
   2. 衣服
몽골인들은 대개 여름에는 반팔과 청바지 및 운동화 그리고 모자와 썬글라스등을 착용하며 봄과 가을에는 점퍼차림, 겨울에는 양털로 된 겉옷이나 두껍고 긴 점퍼등의 파커류 에 짐승의 털로 된 사각형의 털모자 및 장갑 그리고 무릎까지 오는 부츠등을 착용한다.
노인들은 대부분 계절에 관계없이 몽골 전통 옷인 델을 입는다. 겨울에는 대개 어두운 느낌을 주는 색깔을 즐겨입고 계절이 따뜻해지면서 색깔은 점점 밝아진다.
젊은이들은 서구의 문화에 민감하여 이곳에서 쉽게 접할수 있는 CNN 및 홍콩의 Star TV를 통해 서구풍의 자유분방한 옷들을 즐겨입는다. 청바지가 흔하고 여자들은 여름에 과감히 노출된 옷을 즐겨입는 것도 특색이라 하겠다.
   3. 飮食
몽골인들은 전적으로 육식에 의존하는 민족이다. 이들은 음식을 먹기전에 항상 수태차로 목을 축이고 고기와 야채를 섞어 만든 스프 혹은 밀가루를 얇게 썰어 고기와 함께 삶아 먹거나(칼국수와 비슷함) 삶지 않고 기름에 튀겨먹으며 보즈라고 불리는 고기만두를 아주 즐겨먹는다. 이 고기만두는 우리나라의 만두와 다를바가 없으며 양고기나 소고기를 넣어 만든다.
간단히 먹는 음식으로는 밀가루에 고기와 야채를 넣어 얇게 만들어 튀겨먹는 호쇼르가 있다.
이들은 손님의 방문을 받으면 대개 보즈라는 고기만두를 만들어 대접을 하며 차강사르와 같은 명절때는 한 집에서 보통 2,000~3,000개의 만두를 준비한다.
또는, 양고기나 소고기의 한 부분을 크게 썰어 감자와 함께 뼈까지 삶아 소금으로 간을 한후 세수대야 같은 곳에 삶은 고기를 모아놓고 먹을 만큼 가져다가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잡고 한손으로 고기를 잡아 능숙한 솜씨로 잘라먹는다.
이들은 식사를 할때 숟가락과 포크를 이용하지만 요즈음은 젓가락도 많이 사용한다. 이들은 식사시 따로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응접실에 있는 탁자위에 음식을 올려다 놓고 식구들이 둥글게 앉아 고기를 손으로 깨끗하게 발려 먹거나 만두나 칼국수등을 먹는다. 따라서, 고기를 먹을 경우에는 테이블 위에 마치 야수들이 초식동물을 잡아먹고 난 것처럼 뼉다귀들이 널려있다.
대개 음식은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짭짤하며 고기냄새가 난다. 몽골인들의 음식은 종류가 많지 않으며 고기를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고 할 만큼 고기를 좋아한다.
우리들이 몽골인들은 늑대처럼 고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하면 그들은 한국인들은 염소처럼 풀만 먹고 산다라며 놀려댄다. 양고기를 먹으면 몸이 따뜻해져서 추운 겨울을 지내는데 좋다고 한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름기 많고 고기냄새가 나는 몽골음식을 좋아하지 않아 그들이 전혀 먹지 않고 버리다 시피하는 소꼬리나 소족등을 사다가 여한 없이 먹곤한다.
이들은 가축이 많아서인지 소꼬리나 소족등은 입에 대지도 않는다. 따라서, 소꼬리나 소족등은 500투그릭 정도면 서너개를 시장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데 지금은 한국사람들이 이를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 포장도 하고 조금 고급스럽게 보이게 만들어서 조금 비싸게 받는 곳도 생겨났지만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형편없이 싸다.
또한, 몽골인들은 몽골산 소세지 및 러시아산 혹은 유럽산 소세지를 날것으로 잘라서 식빵에다가 오이와 함께 먹는다. 이들은 여행을 갈때 항상 이렇게 준비하여 빠른 시간내에 간단히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다.
이곳에서도 한국음식을 쉽게 먹을 수가 있다. 이곳에는 2곳의 한국식당이 있는데 그 중 서울레스토랑은 몽골에서 가장 좋은 뷔페식 레스토랑으로 이름 나 있다. 이곳에는 한국의 유명호텔에서 주방장으로 있었던 사람이 음식을 만들고 있어 음식도 꽤 괜찮고 홀도 넓으며 잔잔한 음악과 함께 분위기 있게 식사를 할 수 있다. 이곳은 뷔페와 함께 설렁탕 및 꼬리탕과 같은 탕류와 해물탕이나 김치찌게 같은 찌개류를 팔고 있으며 가격은 대개 음료수를 포함해 10~15불 정도면 된다. 음료수 값은 보통 2불정도이다.
또 한군데는 레인보우라는 식당인데 이곳에서는 된장찌게/김치찌게/라면/소꼬리 찜/불고기/갈비/삼겹살 등을 먹을 수가 있으며 가격은 8불에서 15불까지 이다. 이 식당 안에는 노래방이 하나 있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가끔 이곳에 들러 한국의 노래를 마음껏 불르기도 한다. 입장료는 1인당 5불이다.
요즘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전문 노래방인 채플린이 외무부 뒷편에 생겨 한국노래와 외국 팝송 및 몽골노래등도 있어 매일 많은 사람들이 애용한다고 한다.
또한, 일본식 식당인 하나마사에서는 소고기를 로스구이 해먹거나 샤부샤부를 해 먹을 수가 있어 양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고기로 배를 채우곤 한다.
요즘엔 북한 사람이 개점한 시화랑이란 일식점이 생겼는데 회도 먹을 수가 있고 음식 자체가 조선식이므로 이곳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가격은 비싸지 않은 편이며 반찬 하나하나에도 값을 받고 있으며 이것저것 많이 주문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단점이다. 1인당 대략 10불 내외면 배를 채운다.
몽골인의 음식문화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이들이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라마교에서는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중들이 육식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서 먹을 것은 육식밖에 없는 이들로서는 금기시 할 음식이 자연스레 물고기로 넘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한가지 이유는 몽골에는 바다가 없기 때문에 물고기 문화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 조차도 바다냄새가 나서 처음에 거부반응을 일으킬 정도인 것이다. 이들의 음식은 우리나라 처럼 반찬이 없으며 가끔 오이를 절인 것과 무를 절인것등을 시장에서 쉽게 볼수 있다.
몽골인들은 냉수를 잘 먹지 않고 항상 수태차나 뜨거운 차를 마시며 식당에서도 냉수대신 스프라이트나 콜라 쥬스 및 맥주를 즐겨 마신다.
   4. 飮酒
몽골인들은 스미로프등의 러시아산 보드카나 칭키스칸등의 몽골산 보드카를 즐겨 마시며 계속해서 따라주며 술에는 인색하지 않다. 따라서, 아무리 어려운 형편이라도 손님이 방문하면 술을 준비해 두었다가 대접하며 대체로 안주는 먹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과 술을 대적할 때는 금방 취하기가 쉽상이여서 절제를 요한다.
보드카는 40도 정도의 독한 술로써 3잔 정도 마시면 조금씩 혀가 말을 듣지 않으므로 자신의 분수껏 마시기를 바란다.
여름철에는 가끔씩, 마유주 및 몽골 아르히(가축의 젖으로 만든 요구르트를 끓여서 증발시킨후 액화시킨 술로써 투명하며 알코올 농도가 약하고 맛이 고와 정종과 비슷하지만 젖냄새가 나며 많이 마시면 은근히 취하는 고급 술이다.)를 대접하곤 한다.
이들은 술을 마시면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노랫가락이 우리의 정서와 흡사해 구슬프게 들린다. 어머니를 그리워 하거나 자연과 가축을 찬양하는 노래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왠만해서는 손님앞에서 술이 취하지를 않으며 술은 마음을 드러내 놓고 상대방을 사귈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은 이렇듯 사람을 정으로써 엮어주므로 몽골인들이 술로써 대접을 한다는 것은 결국 예와 공경으로써 대접하는 것이므로 이쪽에서도 허심탄회하게 진실로써 상대방을 대해야 한다.
    5. 住居
몽골인들은 크게 3개의 주거형태를 갖고 있다. 첫째는 아파트로서 도시나 아이막의 터우에서 흔히 볼수 있다. (어런소츠라고 함) 둘째는 도시외곽이나 아이막의 솜에서 흔히 볼수 있는 나무판자를 울타리(하샤)로 하고 그 안에 나무로 지은 집을 짓거나 마당에 게르를 설치해 놓은 게링아일, 세째는 초원위에서는 언제든지 볼수 있는 몽골전통 이동식 천막집은 게르(ger)이다.
도심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여름의 휴가철을 이용해서 항상 시골 친척집 혹은 도심 외곽지대에 휴양지(조슬랑)에서 여름을 나고 돌아온다. 다시말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도심외곽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단 부유하지만, 시골에서 게르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부유하다고 말할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몽골에서 부는 가축을 몇마리 가지고 있느냐로 따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도심 외곽의 나무 판자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초원위에서 게르를 치며 가축을 기르고 있는 사람들이 물질적, 혹은 정신적으로 훨씬 풍요하다는 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아파트, 한, 게르 모두 벽치장을 카페트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파트건 어디건간에 몽골의 혹심한 겨울에 벽의 찬바람을 막는것과 동시에 인테리어의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다 준다.
아파트는 보통 2칸, 3칸, 4칸으로 구분되는데 대개 응접실도 방수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2칸짜리 아파트는 방 하나에 응접실이 하나인 아파트를 의미하는 것이다.
방에는 항상 침대가 있으며 응접실에는 소파가 있다. 마루건 방이건 간에 항상 커다란 카페트가 깔려있는데 이는 추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실내에서는 항상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착용한다. 부엌에는 전기레인지(피렐테크(러), 갈조흐(몽골어))가 있으며 테이블과 조그만 의자, 찬장이 놓여있다.
응접실에는 TV및 장식물들이 놓여있으며 테이블에는 대개 수태차가 들어있는 빨간색의 긴 보온병이 있다. 이들의 아파트는 대개가 두꺼운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는데, 이는 공산주의시절 지어진 탓에 단단하게 지어져 30년이 지난지금까지도 벽에 금하나 안가있으며,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창문도 2중으로 되어있다. 바깥벽의 두께가 보통 30cm 가 넘어 얼마나 단단하게 지어졌는지 알수 있다.
그리고, 응접실과 모든 방에는 '파르'라고 하는 보일러가 있는데 이는 겨울에 정부에서 공급해준다. 다시말해, 개인들이 난방을 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울란바타르 시의 화력발전소에서 동시에 공급해 주는데, 연료사정이 좋지 않아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에는 그 열이 너무 미약해서 대개 잠을 잘때는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자야한다. 요즘에는 전기담요 및 전기 보일러등을 사서 밤에 틀어놓고 자면 되지만, 돈이없는 일반서민들은 가끔씩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완전히 추운겨울 바깥외출할때 입는 방한복을 껴입고 잠을 자기도 한다.
나무로 만든 집들도 거의 비슷하나 이들은 나무나 땔깜으로 난방을 하는데 더워진 물들이 방마다 설치된 파이프를 통해 열을 전달하나 추위를 이기기엔 너무도 미약하다. 대개 화장실은 바깥 마당에 놓여있는 것이 일반 아파트와 다르다. 초원위의 게르역시 가축의 똥이나 나무로 불을 떼우나 자기전에 때운 열로 아침까지 견딘다. 대개, 양털로 된 옷을 입고 양털로 된 두꺼운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잔다. 아파트나 나무집과는 달리 게르는 방이 하나이므로 이 안에 침실과 응접실과 부엌이 공존해야 한다. 따라서, 게르안 왼쪽에 침대가 둘 정면에 소중한 물건들을 놓는 장식대가 있고 오른쪽에 침대가 또 두개가 더있다. 그리고, 게르 오른쪽엔 초라한 부엌이 있으며 중앙 난로뒤에는 조그만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있어 손님이 오면 접대하는 곳이다. 게르안 바닥은 대개 나무로 만든 마루가 둥그렇게 놓여있어 습기를 막아준다.
그리고, 초원위에서는 화장실이라는 것이 없다. 아무데고 볼일을 보면 되지만 대개 집뒤에 가서 볼일을 본다. 남자들은 괜찮으나 여자들은 대개 긴 옷을 입고는 앉아서 볼일을 본다. 누가봐도 별로 게의치 않는다.

19. 몽골의 신찔(신년. 12월31일)
교통사고 목격건으로 분주한 하루를 보낸후 몽골인 가족의 초대를 받아 10시쯤 그 집으로 갔다. 몽골의 신찔에는 모든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모든 출가한 자식들이나 친척들-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을 선보이고 보드카를 마시며 덕담을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새해를 맞아 건강하게 그리고 하는 모든일이 잘되기를 기원한다. 우리가 설에는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만 빼고 몽골의 신찔은 우리의 신정이나 구정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날 만큼은 그들은 모든것을 아끼질 않는다. 돈이 없어도 빚을 내어서라도 음식을 만들어 놓고 자기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해 접대를 한다. 12시가 지나면 그들은 보드카를 건배하며 신찔의 절정을 만끽하며 새해를 맞는다. 이때 수흐바타르 광장을 가보면 광장주변에 전기불꽃들로 된 장식들이 여기저기 걸려 분위기를 고조하고 중앙에 놓여있는 밝게 빛나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는 가족 및 연인혹은 친구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환호를 치며 희망찬 새해를 맞기위해 기원한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모여 크리스마스 트리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쌍쌍이 데이트도 즐기는데 12월 31일부터 1월 3일까지 휴식을 취한다.

20. 몽골의 신찔 전야
이 날은 내일(12. 31)이 몽골의 신찔(신년)이기 때문에 모든 관공서나 회사가 이때 종무식을 겸한 파티를 한다. 이때는 거의 모든 레스토랑이나 Bar를 예약 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파티손님들로 붐비는데 대개 부부동반이나 파트너를 데리고 파티에 참석한다. 따라서, 이날 파티에 초청을 받으면 정장에 넥타이를 메야하며 파트너가 있는 경우는 함께 가도 무방하다.

21. 몽골의 차강사르(음력 1.1~1.3)
우리의 구정과 같은 몽골의 차강사르(하얀 달). 진작부터 이때에 준비하여 몇몇 스케쥴을 잡아 놓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 모두 5집의 몽골가정을 방문했는데 처음만 어색할 뿐 나머지 4집을 방문하기는 아주 쉬었다. 그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처음 몽골인 집을 방문하기 전에 선물이나 돈을 준비한다.(돈은 500투그릭이나 1,000투그릭이면 되는데 1,000투그릭 정도가 알맞다.)
2)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모자를 준비해야 한다. 집에 들어가서 모자를 쓰고 인사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주인도 집에 있다가 손님이 오며는 인사를 하기위해 모자를 쓴다.
3) 몽골인 집에 들어가서는 먼저 가장 윗분부터 인사를 해야하는데 먼저, 아마라 밴오? 혹은 사이항 시넬쯔 벤오? 라고 말하면서 마주 안고 얼굴을 갖다 대면서 서로의 옆볼에 키스를 한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 1번씩) 이때,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이많은 사람들은 키스를 하는 것이 아니고 흡흡 하면서 코로 냄새를 맞는데 이것이 서구화 되면서 요즈음은 볼에 입술을 갖다댄다. 이때, 주의할 것은 볼에 입술을 갖다만 대야지, “쪽”하고 키스를 하면 안된다.
4) 그리고, 준비해온 선물이나 돈을 주고, 모든 식구들과 인사를 한다음 그들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는다. 여기서 돈은 자기보다 연상인 사람들에게 주는것이 상례이므로 나이어린 사람들에게는 주지않아도 된다.
5) 자리에 앉은 다음에는 성인남자들이 항상 갖고 다니는 조그만 옥병을 건네준다. 그 옥병속에는 까만 가루들이 들어있는데 탐히(담배)라고 한다. 그 병을 받아들고서 검지손가락에 조금 뭍힌다음 코에 들이대고 흡흡하고 들어마시는 시늉을 한다. 그러지 않고 완전히 들어 마시면 재채기가 끝없이 나오게 된다.
6) 그리고, 그들이 주는 수태차(우유차)를 두손으로 받으면서“바야르랄라”(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음 가능한한 다 마시는 것이 상례이다. 다 마시지 않고 내버려두면 그것은 커다란 실례가 된다.
7) 음식이 차려진 긴 상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앉는데 그 상위에는 전통적으로 양이나 소의 몸통부분을 삶아서 갖다 놓고 그 옆에 그것을 자를수 있는 칼을 놓는다, 그 주위에는 우유(젖)로 만든 빵이나 과자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놓고 맨위에는 사탕들을 갖다가 놓는다.
8) 그리고, 그들이 주는 음식은 모두가 다 한번씩은 입에 대는 것이 상례이며, 만약, 먹기 싫거나 배가 부르면 지금 배가 불러 먹을 수가 없으니 미안하다 라고 말하면 된다.
9) 그들은 술을 좋아하는 민족이므로 손님이 오면 항상 술을 대접을 하는데 술의 종류는 주로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그들이 자랑하는 몽골산 보드카 징키스칸(우리의 고량주와 비슷함)과 아이락(구니수 라고도 한다. 이것은 말젖을 발효시킨 것으로 우리의 막걸리 맛과 비슷하며 처음 이것을 마시게 되면 설사를 하게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속이 아주 깨끗해짐을 느낀다. 장 청소를 시켜준다고 한다.) 이 있다. 아이락은 커다란 대접에다가 막걸리처럼 주는데 차강사르때를 대비하여 그 전에는 먹지도 않고 준비를 한다.
10) 그리고, 술을 먹고는 그들이 권하는 대로 고기를 칼로 살짝 떼어 최소한 한번쯤은 맛을 봐야 한다.
11) 그리고 돌아올때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사이항 아마랄라레(편히 쉬십시요.), 바야르랄라(감사합니다.) 바야르테(안녕히 계십시요)라고 말하는데 이때, 그 집주인은 방문객에게 하타크라로 하는 파란 긴천을 두손으로 길게 잡고는 그위에 손님에게 줄 선물을 올려서 준다. 이때, 거절하면 실례가 되므로 두손으로 정중히 받으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온다.
이것만 지키면 몽골의 차강사르때 몽골집을 방문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없을것이다. 몽골의 차강사르는 우리네와 흡사한 면이 많았다. 우리는 구정때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고제사를 지낸다음 친척집에 인사를 가던지, 손님을 맞이하여 오랜만의 회포를 푸는데 비해 그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인양 가족끼리 먼저 새해인사를 나눈다음 이집저집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정을 돈독히 한다. 그리고, 이때 몽골의 모든가정은 손님맞이를 위해 만두(보즈 라고 함)를 만드는데 그 수가 가히 놀랄만하다. 각 가정마다 보통 2,000개에서 3,000개의 만두를 만드는데 우리의 만두와 겉모양이 똑같으나 속에는 양고기 혹은 소고기를 갈아서 넣어 만든다. 하루종일 이집저집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전통과 아주 흡사한 면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웃과의 정을 돈독히 나누는 정이 넘치는 그러한 가족적인 사회가 아직도 몽골의 저변에 깔려있어 점점 이기주의적인 사회가 되어가는 우리네와 구별이 되었다. 그리고,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휴가기간은 3일이지만 그 다음주까지 그들은 계속해서 이집저집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기분을 만끽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분명 일을 하기는 하지만,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에는 별로 신경을 안쓰고 퇴근중이나 후에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여 마치 차강사르기간이 열흘정도 되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 기간중에 일 관계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다. 여하간, 그들의 집을 방문하면서 그나마 한국의 구정을 그리워했던 그 순간들 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http://dsch.or.kr/ytboard/view.php?id=free&page=6&sn1=&sn=off&ss=on&sc=on&no=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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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에르덴조 사원

 

고비사막

 

고비사막의 낙타

 

 

전통과 과학이 공존하는 도시

울란바타르(UlanBaator)

 

 



한국시간 2007/07/12 10:55:35
울란바타르 2007/07/12 09:55:35
(한국시간 -1시간 0분)
서머타임 2001/04/27 02:00 ~ 2001/09/28 03:00
도시명
07/12(목) 07/13(금) 07/14(토)
울란바타르
맑고 때때로 구름조금
맑고 때때로 구름조금
맑으나 때때로 소나기
23~27°C 15~27°C 16~25°C
울란바타르는 몽골의 수도이자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이다. 외국인들에 의해 흔히 UB로 불리는 울란바타르('붉은 영웅'이라는 뜻)는 1950년대 을씨년한 유럽의 한 도시를 연상시키는 모습과 느낌을 보여준다.

구소련제 자동차들은 점차 최신형 일제 모델로 바뀌고 있는데, 다른 한 곳에서는 여전히 소떼들이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염소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이 발견된다. 또한 몽골의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과 서구화되어 세련된 복장을 한 사람들이 거리에 혼재하고 있는 장면도 발견할 수 있다. 7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 중 2/3는 젊은이와 어린이들이다.

1649년 라마묘(廟)를 창건한 이래 몽골은 라마교 본산으로서 발전하였고, 18세기는 러시아 ·청(淸) 양국의 중계무역지가 되어 더욱 번창하였다. 1911년는 외몽골의 독립과 함께 그 수도가 되었고, 1921년 혁명으로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라마교적 색채는 거의 사라지고 겨우 절 하나만 남았다. 1924년에 울란바타르로 개칭하고 몽골의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재미있는 볼거리 중 하나가 거리위의 수많은 한국자동차다. 울란바타르도시의 전체 자동차 중 약 70%가 한국산 자동차라고 하며 이를 보아도 이곳에서의 한국열기를 짐작할수 있다. 그 종류도 소나타, 갤로퍼를 비롯해 승합차, 시내버스까지 한국산 일색이다. 심지어 00학원, 00중학교 등 한국에서 스쿨버스로 쓰이던 버스들이 글자도 지우지 않은 채 다니는 차들도 많다.



기후
일교차가 매우 심해서 여름의 낮에는 34-35℃까지 올라갔다가 밤에는 15℃로 내려간다. 날씨는 매우 맑은 편인데, 대부분의 비가 6월 말과 7월 사이에 집중되어 있고 강수량 또한 적어서 대단히 건조하다. 낮이 매우 길어서 현지시간으로 저녁 9시가 되어도 환하며 완전히 해가 질 때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린다. 7, 8월에는 가끔 백야현상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울란바타르를 중심으로 한 주변에 볼거리들이 많은데, 몽골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울란바타르 서쪽 300㎞지점에 있는 고도 하라흐름으로 13세기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한 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운 도시다.

이곳에서 몽골은 200여년이라는 시간동안 동서양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적지로 100개의 보석이라는 뜻의 에르덴죠라는 대사원이 유명하다. 하라흐름에서 80㎞ 떨어진 후르후레는 오르홍강 상류에 있어서 초원과 강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으로, 특히 장대한 폭포가 아릅답다.

또 울란바타르와 하라흐름 사이에 있는 바양고비에는 사막과 대초원이 함께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는 말타고 초원을 달리며 유목민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고비사막도
둘러볼 만한 곳 중의 하나인데, 이곳은 울란바타르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1시간30분 거리에 있으며, 사막에는 희귀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낙타를 타고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이곳은 공룡서식지로 화석도 많이 발견돼 고고학 유적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울란바타르"의 평균적인 기후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C) -26 -22 -11 0.5 8.3 15 17 15 7.5 -1.7 -13.7 -24
평균강수(㎜) 1.5 2.0 2.2 7.2 15.5 49 72.5 47.5 24.5 6.0 3.5 1.6

광활한 거친땅 '고비사막(The Gobi desert)'

초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후손들이 살고있는 몽골.. 몽골하면 떠올리는 곳이 바로 고비사막이다.
고비사막의 고비란 몽골어로 "풀이 잘 자라지않는 거친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막이라고 해서 대부분 모래사막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되지만, 모래사막보다 암석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고비사막내에는 넓은 초원지대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고비사막은 원래 과거에 내해가 있던 곳이 침식과 건조로 이루어진 사막이라고 한다.

몽골을 크게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는며, 내몽골지역에는 게르라는 민속가옥이 있다.원통형의 벽에 지붕이 덮혀있으며, 쉽게 조립과 분해가 된다고 한다. 내부안에는 화덕과 침구 불단등이 있으며, 연령이나 성별에 따라 앉는 위치가 다르다고 한다.


 

 

고비사막

 

고비사막

 

고비사막

 

고비사막의 양떼

 

고비사막의 낙타

자이산 승전 기념탑

자이승 승전탑은 소련이 몽골 연합국과의 2차 세계대전 승리와 몽골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 몽골에 기증한 탑이다. 탑이 있는 자이산은 울란바타르 시내와 톨 강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기념사진을 찍기에는 최고의 추천 장소이다.

 

자이승승전탑

 

자이승승전탑

         복트칸 궁전(Winter Palace of Bogd Khan)

 

1893-1903년에 걸쳐 지어졌다. 8명의 복트칸 중 마지막 왕이었던 복트칸 8세가 1924년에 죽을 때까지 20년을 살았던 곳이다. 복트칸이 끝나게 된 것은 공산주의 체제의 몽골 정부가 어떠한 윤회도 금지를 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의 몽골 불교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박물관 영토내에는 6개의 사원이 있다. 궁전 자체는 외국 고위 인사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수집하고 있다. 다른 건물들은 또한 저장된 전시품들과 인테리어로 인해 방문할 가치를 지닌다.

 

                         

                          간단테그친렌(Gandantegchilen) 수도원

 

간단수도원은 몽골 라마교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27m에 이르는 금불입상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 불상은 무려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제작된 것으로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라마불교를 공부하려 승려들이 기숙하면서 생활한다. 따라서 이곳은 작은 사찰과 기숙사, 불교대학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안에서 생활하는 라마승은 약3백 여 명이다.

19세기 초 울란바타르에는 약 100여 개의 티벳불교 사원과 수도원이 있엇다. 그러나 스탈린의 침략으로 대부분의 사원, 수도원이 파괴되었는데 간단테그친렌 수도원은 공산주의자들이 외국인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효과용으로 남겨 두었었다. '완전한 기쁨을 위한 위대한 장식'이라는 뜻의 Gandan은 울란바타르의 볼거리 중 하나이다.

 

                               

 

공룡 화석으로 유명한 자연사박물관(Museum of Natural History)

수크바토르광장의 북서쪽으로 한 블럭 떨어진 자연사 박물관도 역시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이 곳에서는 고대 식물과 동물의 화석을 전시하고 있는데, 무척추 동물에서부터 공룡의 뼈대, 고대 포유동물의 잔해 등과 같은 자연의 발달사 동안에 있었던 독특한 전시품들이 모두 있다.


몽골 영토에서 발견된 육식과 초식의 공룡 화석은 종류가 다양하며, 육식 공룡이 세계에서 최초로 발견된 곳이다. 같은 시기의 것으로 알려진 일곱 개의 공룡 중에서 다섯 개가 몽고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다양한 형태와 크리의 공룡 산란관 화석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 외에도 고대 코뿔소의 뼈대, 매머드, 들소, 말의 잔해, 고대 거북이, 코뿔소의 발자국, 나무 화석 등도 볼 수 있다.

 

종교적 억압을 이겨낸 몽골의 유일한 사원, 간단사(간등사원)

17세기에 설립된 간단사는 라마불교 사원으로 정식명칭은 '간등테그친른 히드'이며 '완전한 즐거움을 주는 위대한 사원'의 뜻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1930년에 있었던 공산정권의 종교적 억압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원으로 유명하며 울란바타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라마불교의 대표적 중심사원이기도 하다.

간단사 내에는 24미터의 불상과 몇 개의 작은 절 그리고 학승들이 공부하는 종교대학이 자리잡고 있으며, 약 150 여명의 라마승들이 거주하고 있다. 울란바타르의 중심사원인만큼 연중내내 다양한 종교행사가 열려 볼거리가 많아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사원 내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네 개의 신성한 산봉우리(Four Holy Peaks)

몽골인들은 울란바타르를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산봉우리를 매우 신성하게 여기고 있다. Tsetseegum, Chingeltei, Songino Khairkhan, Bayansurkh 등 네개 산의 산봉우리는 나침반의 동서남북 4극과 거의 일치한다. 이 산들은 하이킹을 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낙엽송 나무들이 우거진 숲과 잔디 그리고 야생염소(Ibex), 검은 영양(Sable) 등과 같은 멋진 새와 동물들 때문에 매우 인기가 높다. 그 중 Tsetseegum이 가장 장대한데 2260m인 이 산의 봉우리는 복트칸 산맥 중 최고로 높은 봉우리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여행은 6월초에서 9월말까지가 적합한데 울란바타르의 남쪽 15km 지점에 있는 보그드칸 국립공원(Bogdkhan National Park) 입구에서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한다. 남쪽을 이용해서 만지르(Manzshir) 수도원을 경유해 Tsetseegum으로 올라가는 루트가 가장 쉬운 루트로 여겨지고 있다. 여하간 이 곳을 여행하려면 허가가 꼭 있어야 하고 나침반, 충분한 물과 식사, 언제 몰아칠지 모르는 폭풍우에 견딜 수 있는 방한복이(이 곳에는 한여름에도 폭풍우가 내린다) 필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몽고의 독립을 선언했던 수크바토르 광장(Sukhbaatar)

울란바타르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바로 이곳에서 1921년 7월 '혁명영웅' 담디니 수크바토르(Damdiny Sukhbaatar)가 중국으로부터의 몽고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 광장은 1989년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첫번째 민중집회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비둘기들과 카메라를 손에 든 사진작가들만이 일에 몰두하는 차분한 곳이다.

몽골 역사박물관

과거 석기시대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점의 역사적 유물을 통해 몽골의 역사와 문화, 전통,생활모습 등을 한번에 배울 수 있는 곳이다.

4만년 전 동굴 벽에 그린 말타는 모습의 그림과 몽골 사람들의 다양한 형태의 전통 복장, 400여 종에 달하는 몽골의 모자, 우리나라 박물관에서 많이 본 듯한 전통 악기, 유목민들의 독특한 생활용품, 무엇보다 몽골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조상 칭기스칸에 관련된 자료들이 매우 많다. 실물 모습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 칭기스칸을 보는 재미도 색다르다.
울란바타르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몽골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있다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 몽골의 전통 이동식 가옥인 게르 옆에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게 '접시'와 오토바이가 나란히 서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생활의 편의를 향유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급작스럽게 바뀌는 몽골의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이 저며 오는 이유는 왜일까요. 도대체 인간은 얼마나 더 빨라지고 넓게 봐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 푸른깨비 최형국
드넓은 대륙을 말발굽 소리로 뒤흔들던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거센 파고에 휩싸여 급속도로 서구화되어 가는 몽골을 바라보면서 진한 서글픔이 밀려오는 것은 왜일까요.

물론 생활의 편의를 비롯한 산업화의 다양한 혜택은 그들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지만, 너무 급격하게 변화하는 몽골을 바라보며 무조건 빠르고 편한 것이 최선의 길인지 다시금 고민하게 만듭니다.

말과 함께 거닐며 느림의 미학을 즐기던 초원길에는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흙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달려가고, 끝도 보이지 않았던 울란바토르의 하늘은 화력발전소의 매연으로 조금씩 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던 태초의 공간이 파괴되면 그 모든 재앙은 인간에게 고스란히 날아옵니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역사발전의 모습인지 아니면 역사소멸의 시작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내 나름대로 '오래된 미래'를 볼 수 있어서 몽골의 하늘과 땅에 고마워했는데, 이젠 조금씩 변해가는 그들을 느끼며 잠시 상념에 잠깁니다.

▲ 몽골 결혼식에도 이젠 차에 풍선을 달고 달리나 봅니다. 신랑 신부가 탈 웨딩카에 노란 풍선이 몽골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자유롭게 흔들거립니다. 왠지 그 옆에 서 있는 말이 초라해 보입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 몽골에도 자동차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기름 값이 천정부지로 솟구치고 있습니다. 2-3년 전 만해도 300-400원대의 기름 값이 이젠 900원을 돌파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기름 값 상승률이라면 몽골의 서민들은 더 큰 박탈감을 느끼겠지요.
ⓒ 푸른깨비 최형국

▲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 시내의 작은 파출소의 모습입니다. 자동차의 이동량이 급격하게 많아지면서 이젠 곳곳에 경찰관들이 진입해서 교통 통제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겨울이되면 거의 모든 몽골 사람들이 울란바토르로 몰려들면서 최고의 정체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 고압선 사이로 한쪽에는 아파트가 서 있고, 다른 편 언덕에는 게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이미 울란바토르의 인구수요가 한계를 넘어서면서 새롭게 도시의 삶을 꿈꾸며 초원의 삶을 포기한 사람들은 또 다른 도시 노동자가 되어 언덕위에 작은 게르를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네 달동네처럼...
ⓒ 푸른깨비 최형국

▲ 양털로 예쁘게 만든 게르 인형입니다. 그 안에서 별을 보며 지냈던 시간들이 그리워 자연스레 눈길이 갖다가 갑자기 언덕위의 다닥다닥 붙어 있던 게르의 모습이 연상이 돼서 차마 손대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전통까지도 상품화시키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되어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것. 과연 그 세계화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 푸른깨비 최형국

▲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몽골은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입니다. 그러나 현재 모든 전승국 중 가장 빈곤하게 사는 나라가 바로 몽골입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원 자이산 전망대에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바라봅니다. 톨가강 너머로 화력발전소의 엄청난 매연이 이지 저리 도시를 휩싸고 있습니다. 바람이 적은 날에는 호흡하기가 곤란할 정도입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 노을이 물든 울란바토르도 우리나라처럼 퇴근길 정체가 심합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던 몽골의 삶도 이젠 수도로 사람들이 급격히 몰려들면서 다양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뭔가를 얻으면 또 다른 뭔가를 잃어야 하는 세상의 법칙이 떠오릅니다. 지금의 몽골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요.

ТА АДИСЛААЧ
타 애뜨쓰라~치



 
칭기스칸의 편지   

한국의 젊은이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땅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비린내만 났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탓하지 말라.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 데 동원한 몽골 병사는
적들의 100분의 1, 200분의 1에 불과했다.

나는 배운 게 없어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됐다.

- 김종래의 ≪ 밀레니엄맨-
미래를 꿈꾸는 또다른 칭기스칸을 위하여≫ 중에서-



* 이 책 저자가 칭기스칸의 이름을 빌려
가상으로 쓴 칭기스칸의 편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적(敵)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누구나
칭기스칸이 될 수 있습니다
.

 

                                                                     영혼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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