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정착지원 혜택 못받는 탈북자 있다!

북한인권정보센터, ‘비보호 북한이탈주민 적응실태 현황 및 정책제언’ 세미나 열어

 

북한이탈주민 중에는 정부의 정착지원 제도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비보호’로 지정된 북한이탈주민들이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12일 오전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비보호 북한이탈주민 정착실태 및 정책제언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 북한인권정보센터는 12일 오전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비보호 북한이탈주민 정착실태 및 정책제언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konas.net

 통일부 자료에 의하면 2003년 이후 국내 입국한 북한이탈 주민 중 비보호 대상자는 172명으로 집계됐다.

 북한인권지원센터 부설 정재호 정착지원본부장은 이날 발제에서, 비보호 북한이탈주민들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에서 벗어남으로써 정착에 상당한 적응문제가 발생하고, 사회문제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들의 적응현황과 실태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비보호 대상으로 결정되는 북한이탈주민은 첫째, 국가정보원장이 ‘국가안전보장에 현저한 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사람’으로 결정한 경우와 둘째, 「북한인탈주민대책협의회」(이하 협의회)의 심의에 의해 결정된다.

 북한이탈주민 보호 결정기준은 1. 항공기 납치, 마약거래, 테러, 집단 살해 등 국제형사 범죄자 2. 살인 등 중대한 비정치적 범죄자 3. 위장탈출 혐의자 4. 체류국에 10년 이상 생활 근거지를 두고 있는 사람 5. 국내 입국 이후 1년이 지나서 보호신청한 사람 6. 기타 보호 대상자로 지정하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대통령령으로 지정한 사람 등이다.

 

 이에 대해 정 본부장은 4∼6호의 경우를 1∼3호의 범죄와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비보호 대상자 10명을 심층 조사한 결과, 비보호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같은 북한이탈주민들로부터 국제형사범죄자, 중대범죄자, 위장탈출 혐의자와 동일하게 취급받는 것에 대해서는 불합리한 처사라며 억울해 한다고 덧붙였다.

 비보호로 결정되면 정착도우미, 취업지원, 교육지원, 주거․생계급여, 의료지원, 신변보호 등 정부의 모든 공식적인 지원체계에서 제외 돼 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상대적 박탈감과 정서적․심리적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 본부장은 대한민국이 비보호 북한이탈주민들을 거부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수용한 만큼 비보호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접근방법을 처벌의 관점이 아닌 사회통합적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을 처음부터 정착지원제도에서 배제해 사회통합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통일을 지향하는 정부의 입장에서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정 본부장은 또 비보호 대상자들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사회적응교육 시스템과 하나원과 하나센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원체계, 초기 정착과정 동안 최소한의 생활지원과 의료지원 서비스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무지로 인해 국내 입국 이후 1년이 지나서 보호신청을 해 비보호자로 결정된 북한이탈주민 2명이 증언자로 나섰다.

 김미선(가명, 여) 씨는 “비보호에 대한 규정을 명확히 명시해 누가 봐도 이해될 수 있도록 해 달라”며, “법을 위반하지 않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조금만 보호해 달라”고 당부했다.

 

 또 다른 증언자 김혜숙(가명, 여) 씨도 “아무런 지원없이 사회에 내보내는 것은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열심히 일하고 떳떳하게 세금도 내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정책을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세미나에 앞서 북한인권정보센터 박종훈 이사장은 “북한이탈주민 가운데 비보호 대상자가 있다는 사실은 북한인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주제는 아니다.”며, 이들의 남한사회 적응 및 정착 안정을 위한 정책방안을 제안하려 한다고 이날 세미나 개최 취지를 밝혔다.

(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43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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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woman_era/womenera-09172015132116.html

워싱턴-이원희 leew@rfa.org
2015-09-17

 

 미주 탈북 동포들이 달라졌어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머틀비치 모습.                                     AFP PHOTO

 

 

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미주 두리하나 선교회 에서 주관하는 미주탈북 동포 수양회가 지난주 초 9번째로 열렸는데요, 올 해는 미국 동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컬럼비아 한인 연합 장로교회 수양 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서: 예전에는 뭐하는 사람들인가 왜 나를 도와주는가 하고 놀란 표정이었다면 이제는 수양회를 즐기시더라고요

미 연합감리교회 버지니아연회 조영진 감독이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미주 두리하나 선교회는 해 마다 미 전국 각지에서 탈북자들이 모이는 수양회를 통해 신앙과 미국 생활 정착을 서로 나누며 격려하고 있는데요, 올해 수양회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실무를 담당하는 서재진 행정 간사로 부터 들어봅니다.

음악:

미주 두리하나 선교회에서는 올해도 미국 여러 곳 에서 참여하는 탈북자들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했었다고 해요.

서: 수양회의 자금 문제는 항상 어렵죠. 이번에는 수양회를 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하고 결정을 못 내렸었는데, 그때 마침 컬럼비아 한인 연합 장로교회 김동영 목사님께서 교회 창립 40주년 행사를 탈북민 수양회 돕는 일로 결정하시어 그 교회 수양 관을 무료로 빌려주셔서 이번 수양회가 가능했었어요.

수양관은 호텔 수준으로 3시간 거리의 유명한 휴양지, 머틀 비치 바닷가에서도 탈북 민들이 수영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하는 군요

서: 수양관이 너무 좋았어요. 근처에 있는 머틀 비치도 갔어요 큰 관광버스를 빌려서 같이 이동했기 때문에 그 시간도 좋았어요.

이번 수양회는 모두 29분이 참석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기거나 비행기 사정으로 못 오신 분도 있고 해서 탈북자 22분과 동행한 임원들까지 모두 36명이 모였습니다.

서: 유타에서도 오시고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텍사스 등지에서 다 오셨어요. 미국에 오신지 2-3년 된 분들 네다섯 분 또 미국에 오신지 오래 되신 분들 중에서도 수양회에 대해 잘 모르다 이번에 참석한 분들도 다섯 분정도 계셨어요.

처음 참석하신 분들은 미국에 이런 탈북자들의 모임이 있었느냐며 애써 잊으려던 탈북의 기억들이 탈북자들을 구출해 미국에까지 직접 인도한 천기원 목사님의 탈북과정이 담긴 비디오를 보며 설교를 듣는 순간 다시 생생하게 떠올라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전합니다.

서: 마지막에 탈 북 했던 과정을 천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전부 우시더라고요. 몇몇 분들은 울음을 통제를 못해서 중간에 나가 대성통곡 하시면서 우시는 분들도 계시고... 이렇게 힘든 과정을 겪었는데 미국에 살면서 안이 하게 된 것을 돌아보며 삶의 불평이나 힘든 점이 있었는데 탈북과정에서 겪은 것 보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본인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감사하다고 많이 말씀 해 주셨어요.

최근에 오신 탈북자중에 그렇게 기다리던 수양회 참석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며 마음 아파합니다.

서: 1년 반 되신 분은 수양회에 너무 오고 싶다며 신청서 까지 다 보내셨는데 폐암이 재발되는 바람에 수양회 한 달 전에 돌아 가셨어요. 아직도 가족은 중국에 계셔서 생활비를 보내드리는 형편이었는데 그 와중에 페 암이 재발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직접 들어온 비교적 오래 된 분들은 미국생활이 많이 안정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도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탈북자들도 있다고 서 간사는 안타까워합니다.

서: 기반을 잡아가시는 분들도 계시고 여전히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또 하시던 사업이 기반을 잡았는데 사기당해 힘들어 하시는 분도 오셨고, 하지만 힘든 상황에서도 잘 견디고 있다는 분들도 있어요.

어느 곳 이나 사람들 사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탈북자들도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건이나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는데요, 그런데 살아보니 미국에서 가장 좋은 점은 역시 기회의 땅 이라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서: 미국에 처음에 오셨을 때 1-2년 정도 될 때 까지 내가 왜 미국에 왔나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다시 갈 것을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4-5녀 정도 되니까 미국이 훨씬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생활비도 비싸고 여건도 힘들지만 이제 미국에서 삶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시점 이라고 봐요.

북한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고 느끼지 못했던 기회의 땅 임을 체험하고 나니 미국 생활이 훨씬 친숙해 지고 자신이 생겼다는 가명의 김현민 씨의 얘기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공감 했다고 서 간사는 전했습니다.

서: 특히 공부를 시작하거나 공부를 하는 분 중에서 기회의 나라라는 얘기를 많이 해요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시는데 본인이 가진 것은 없고 또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시간에 맞추어서 가고 결근 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데 그러다 보니 소스를 만드는 일까지 하게 되었데요 그런데 처음에 소스를 잘못 만들었나 봐요 본인은 그렇게 만드는 줄 알고 계속했는데 두 달 동안 아무도 그분한테 잘못 만들었다고 말씀을 안 하더래요 그런데 두 달이 지나 본인이 잘못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책임자인 매니저한테 물었죠. 왜 그동안 아무 소리도 안 했는냐고...모든 직원들이 다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묵인해 준 이유는 딱 한 가지, 성실하고 열심히 일을 하기 때문에 매니저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얘기를 안했다고 하더랍니다. 북한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실수를 해도 열심히 하면 실수를 기회로 바꾸어 주는 나라라고 얘기했어요.

이런 경험을 했던 김현민 씨는 이제 영어 코스 다 마치고 영어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라도 미국 레스토랑에서만 일을 해 지금은 영어도 잘 하고 학교도 다니고 있어 미주 두리하나에서 장학금을 지원해 준다고 하는 군요. 이와 함께 수양회에 계속 참석 하신 분들의 변화된 모습도 소개 해 주었습니다.

서: 연세가 좀 있으셨던 분인데 지금 신학교를 다니시고 교회 전도사님으로 사역도 하시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김일성 체제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과연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 건가 하는 의문점부터 시작 하셨다고 해요

지금 전도사를 하면서도 확신이 안 들 때도 있다며 그래도 한 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나간다고 자신의 생활을 함께 나누어 주셨고, 또 수양회이 여러 번 참석 하셨던 한 탈북민은 수양회 때마다 느끼는 것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북한 사람들을 위해 이런 수양회를 왜 하는지 의문이 들었는데 이제야 알 수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서: 이번에 수양회 4번째 참석하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다른 사람들 도와주기 위해서 김밥을 만들어 돈을 마련하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나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본인하고 자기 가족이외는 다른 사람을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나도 남을 조금 도와야 되지 않나, 남을 위해 나의 삶을 좀 드려야 되지 않나,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는 계신 것 같다고 간증을 하셨어요.

서재진 간사는 탈북동포 수양회 실무를 담당하면서 탈북자들이 자신의 삶이 질적으로 좋아 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한 인생의 진급 이라고 설명합니다.

서: 어떤 지위에서 과장에서 부장이 되고 부장에서 부사장이 되고 이어 사장이 되는 것도 진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삶의 질을 따져 본다면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에서 왜 나를 도와주었지 하고 생각했던 분들이 나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하는 자체가 삶의 질이 달라지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번 수양회에서 가장 빛났던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하나님의 손길 이었다며 서 간사는 놀라워합니다.

서: 컬럼비아 한인 연합 장로교회 목사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스스로 김치 삼겹살, 저희들 한국음식 좋아하니까... 여선교회에서 새벽 예배가 끝나자마자 모여서 손수 만드신 음식에서부터 주일 예배 끝나고 나서 교회당에서부터 식당까지 한 줄로 쫙 서서 전 교인과 악수를 했어요. 수양회 이 일을 미주 두리하나에서 어떻게 꾸려 나가나 걱정을 했었는데 이제는 짐을 반씩 덜어주시면서 이렇게 동참하게 하시는 구나 하는 하나님의 큰 역사에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컬럼비아 한인 교회에는 탈북자들이 한사람도 없어 탈북자들의 상황을 잘 모르는 교인들이 탈북자들의 경험과 신앙 간증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합니다. 이와 함께 탈북자들이 수양회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과감하게 전달하는 등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한편으로는 놀랍고 또 반가웠다며 이런 점 역시 탈북자들의 달라져 가는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서: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탈북자 들이 계획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하셨는데 저는 이제 이분들도 많이 성장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주 좋았어요. 수양회를 통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잖아요 저희가 계획한 프로그램 외에도 탈북 민들이 자체적으로 하는 프로그램 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탈북자 수양회 프로그램에서 건강 상담, 탈북자들을 위한 세미나, 강의 등의 특별 순서가 있었는데 올해 특별 순서는 바닷가에서의 수영이었다는데요

서: 그동안 콜로라도에 가서 산도 구경을 했고 버지니아 쪽에서는 낙엽도 보았고 그 외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아직 바다를 가보지 못 했어요 바닷가에서 자유 시간을 드렸는데 정말 다들 수영복을 가지고 오셔서 바다 속에 들어가서 즐거워하시더라고요

음악:

아직도 푸른 바다의 파도를 타고 흰 모래 사장을 걷는 기분이실 것 같아요. 여성시대 RFA 자유아시아 방송 이원희 입니다.

 
 
 https://www.youtube.com/v/QxOkH1Mj8DY?
 
 
 

게시일: 2014. 12. 2. *"탈북자들 앞에서 북한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기사 바로 가기 →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

탈북여성들이 최근 ‘종북 토크쇼’ 논란을 빚고 있는 신은미, 황선 씨에게 맞짱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3일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이순실 씨를 비롯한 김정아, 송지영씨 등 탈북 여성 3인은 기자회견을

열며 이들의 발언을 반박했다. 북한군 간호장교 출신으로 8번 북송과 9번의 시도 끝에 탈북에 성공한

이순실씨가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인신매매로 딸을 팔아야 했던 피맺힌 엄마의 절규를 아는 지를

신은미, 황선씨에게 물었다.

/ 조인원 기자

https://www.youtube.com/watch?v=QxOkH1Mj8DY

 

 

 

 

 

 

 

태어나 처음 써본 글, 나의 탈북 이야기 (30)

by 주성하기자   2015-06-13 12:29 pm

나는 아직까지 글을 써본 경험은 없다. 북한에서 학교시절 글짓기를 할 때 펜만 쥐면 글줄이 꽉 막혀 버리곤 했었다.

 

그러나 지옥 같은 땅 북한을 탈출하여 천국과도 같은 대한민국에서의 생활과정은 내게 이글을 쓰게 만들었다. 밤새 도로를 누비던 차들의 불빛도 사라지고 우짖던 새들의 소리도 그친지 오랬고 소리 없이 내린 강한 서리로 하여 풀잎과 나뭇가지들은 허옇게 번들거린다.

 

두만강 연선 도로로 달리는 택시안에 우리식구가 타고 있었다. 꿈이냐?> 생시냐? 잘 믿어 지지 않아 줄곧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나는 내 자신에게 묻곤 했다. 아들과 딸과 함께 가슴 치는 물살에 휘말려 떠나갈 번했던 방금 전의 일, 아차 실수하면 죽는 것은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과 어깨 겪고 사생결단으로 강을 넘어서는데 성공했다. 분명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했다.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생각에 마음은 평온했지만 일은 이제부터였다. 10월도 다 가는 때라 강서리가 내려 젖은 옷이 달라붙은 몸은 추위로 덜덜 떨렸지만 단 한시라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 날이 새면 중국 변방대에 발각될 수 있다.

 

아이들은 내 얼굴만 쳐다본다. 나는 아무내색을 하지 않고 “어머니가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아이들을 진정 시켰다. 속으로는 걱정이 태산 같으면서도. 빨리 움직이는 것이 살길이라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약간의 몸 운동을 시키고 몇 가지 주의를 준 다음 도로에 나섰다. 재빨리 걸었다. 차들의 통행이 뜸할 땐 달리고 차가오면 도로 옆에 몸을 숨기고 그렇게 반복하며 숨 가삐 달렸다.

 

그런데 도로에 나타나는 차가 너무 많았다. 그만큼 숨바꼭질을 하는 우리는 너무 힘들었다. 갑자기 많이 달리니 다리가 뻣뻣해지고 아이들도 점점 힘을 잃는다. 신발 코가 터져 발가락이 나와 나뭇가지에 찔려도 그 아픔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불 밝은 건물. 도로 옆에 몸을 숨기고 살펴보니 국경 경비대 건물 같았다. 오던 길을 되돌아 또 얼마간 달려 도로 옆에 몸을 숨겼다. 시간이 많이 흐르니 차들의 통행이 뜸해지기 시작하였다.

 

“에라, 살든지 죽던지 운명에 맡긴다.” 독한 마음을 먹은 나는 도로에 나서서 달리는 차마다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모두 찬바람만 일구며 그대로 지나쳤다. 야밤삼경에 웬 여자가 차를 세우니 불안감에 안 세우나 하는 생각에 딸은 숨겨놓고 아들 손을 잡고 달려오는 두 대의 택시 앞에 나서며 손을 흔들었다.

 

한대는 통과하고 두 번째 택시도 통과 하는가 싶었는데 다시 후진하여 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기쁨보다도 심장이 멎는 듯 했다. “경찰이 내리는가? 아니면 북한에서 중국으로 온 간부가?” 정신을 가다듬고 차에 다가가니 택시기사와 손님 한명이 있었다.

 

운전기사는 한족인 듯 했다 “돈 내라”하고 발음 부족한 조선말을 겨우 한다. 미리 준비해 가지고 있던 중국 인민폐 100원을 주었더니 뭐라 말하는데 어디로 가겠는가고 묻는 것 같았다.

 

우선 가고 보자는 식으로 손짓을 홰홰 했다. 떠나면서 외웠던 전화번호에 전화해볼까 하여 핸드폰을 빌려 달라고 하려다가 조금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범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참 달리던 차는 불빛이 대낮같은 거리에서 멈추었다. 창밖을 보니 “훈춘 조선족 여관”이라고 쓴 간판이 걸려 있었다. 택시기사는 내려서 전화도 하고 자고 가라고 손시늉했다. 우리와 그냥 함께 가면 자기는 죽는다는 시늉도 한다.

 

가만 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펜과 종이를 달라고 하여 전화번호를 적어주니 자기 핸드폰으로 얼른 연결해 주었다. 그리하여 다시 연길 쪽으로 방향을 돌려 우리가 목적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은 차창 밖을 내다보며 꿈인지 생시인지 잘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감수하며 “하늘이 도왔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생사기로에서 헤매던 사람들을 품어내고도 아는지 모르는지 내색 없이 유유히 흘러만 가는 두만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새벽닭이 우는 조용한 농촌 마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이들과 함께 연길에 있는 자택 교회에 머물면서 하느님을 우리의 구주로 모시고 마음의 평온을 찾고 새 삶을 얻었다. 폐쇄된 북한 땅에서 깊은 밤이면 남편과 가만히 라디오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 본 나로서는 수많은 군중들이 공개적으로 십자가 앞에서 기도 행사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무척 부럽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나 처음으로 떳떳하게 영생의 삶을 주시는 우리의 주님을 알게 되었고 믿음도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인간만을 숭배하라고 내리 먹이며 이르는 곳마다 사적 관들과 연구실들을 지어놓고 우상화의 사상을 주입하는 강 건너 지옥의 땅, 내 조국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도 가슴 저리게 생각했다.

 

브로커의 안내를 받으며 중국-캄보디아 행을 하면서 줄곧 차창 밖을 내다보며 거리로 오가는 사람 모두를 북한 땅의 사람들과 자꾸만 대비해 보게 되는 것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금방 빨아 입고 나간 옷도 바로 꺼멓게 되는 저 북한 땅, 지금 이 시각도 거리에서 한 끼 끼니를 위해 무언가 들고 팔리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얼굴, 그런 사람들을 마구 압박하여 불법매매라며 빼앗으려 하고 또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아우성 소리가 그칠 새 없는 거리, 자기 노력보다 남의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하는 자가 더 번성하고 장사길 떠나며 화물자동차라도 잡아볼까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거리가 자꾸 대조되어 안겨들었다.

 

어쩌다 한대씩 오는 차에 서로 오르려고 다투며 돈 주고 타는 것도 운전기사의 박대를 받으며 타야 하는 너무나도 기막힌 현실이다. 마치도 저 북한 땅에 대한 표상은 거세찬 바람에 가로수가 휘청거리고 낙엽이 진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사람들이 날려 갈까봐 겨우 자기를 지탱해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늘높이 날아오른 아시아나 항공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불야성의 도시들을 보며 어둠속에 묻힌 북한 땅, 주민들의 한숨이 하늘 끝에 닿는 북한을 또다시 생각한다.

 

돈 있는 사람들은 공장과 연구실로 들어가는 전기선을 따내어 불을 보고 그다음 힘 있는 사람들은 배터리를 공장에 들고 가서 충전하여 불을 보고 등잔기름마저 돈 주고 살 힘이 없는 사람들은 해가지고 뜨는 것에 맞추어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오늘날 북한 땅의 현실이다.

 

그처럼 바라고 바라던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어 매일 매일 다양한 메뉴의 음식상을 마주하면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삼삼 떠올라 저절로 목이 메었다.

 

고난의 2007년. 앞가슴에 훈장을 더는 자리가 없어 달지 못하셨던 외조부모님을 땅에 묻고 너무도 기가 막혀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술 한 잔도 제대로 부을 수 없던 너무도 째진 가난이 야속해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첫 공산당원이였던 외할아버지와 할머님은 죽는 순간까지 당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셨다.

 

조선로동당에서 “비사회주의 현상” 이라고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셨다. 그처럼 당만을 믿고 살아오셨건만 운명직전엔 수수 겨로 쓴 죽도 변변히 못 드시고 땅에 묻히셨다. 오늘도 행여나 국가에서 배급을 주려나 기대하며 이것이 운명인가보다 하고 순종했던 사람들은 무두 다 다시 오지 못할 그 길을 갔다.

 

그러한 참상을 목격하면서 나는 당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해야 산다는 것을 뼈 속 깊이 알게 되었다. 시아버님과 함께 온 하루 쑥을 뜯어 일곱 식구 밀가루 두 컵 섞어 떡을 하면 하루 먹기 어려웠다. 얼마나 그 쑥떡에 질렸던지 그 이 후로는 한 번도 쑥떡을 해먹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맛있게 한 쑥떡을 보면 그때의 생각이 나며 그토록 그리시던 이 좋은 세상에 오시지 못하시고 땅에 묻히신 시부모님생각에 마음이 아파온다. 우리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군대들을 보면 지금도 북한 땅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 병사들을 생각한다.

 

청진-온성 행 열차에 아들을 태워 보내고 돌아서려는데 나에게로 다가오는 한 병사? “돈200원만 있으면 좀 주세요.” 너무도 여위여 군복은 남의 것을 빌려 입은 것 같고 몸은 뼈에 가죽을 씌운 것 같았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500원이 있었다. 그것을 주니 고맙다고 몇 번이고 인사하고는 빵을 사가지고 정신없이 먹는 것이었다.

 

만일 너의 부모가 네 그러는 모습을 본다면? 나는 그 병사를 불러 고향은 어딘가, 부모님은 계신가고 물었다. 부모님은 평북도 어느 농장원이고 자기는 장남이라 했다. “너를 군대에 내보내고 장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님을 생각해 봐라 살겠으면 강심을 먹고 훔쳐 먹고서라도 살아라. 그런 악이 없으면 넌 결핵 결려 죽는다.”고 말하니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살아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아이들이 간식을 받아가지고 들어오면 눈물이 절로 솟아났다. 2008년 9월 청진시의 어느 과수원의 수확을 끝낸 배 밭에서 이삭을 줍다가 너무도 허기져 일어나지 못하던 한 할머니 생각이 났다.

 

며칠째 배를 삶아 끼니를 에우고 그것마저 떨어져 끝내 돌아가신 그 할머니, 그 역시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시어머니었다. 눈물로 얼룩진 많고 많은 사연들을 어찌 다 적을 수 있으랴.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건물들과 거리의 모든 것은 함부로 밟을 수 없다. 무심히 스칠 수 없는 알뜰한 손길과 정성스런 마음이 그대로 스며있는 대한민국의 도시와 마을은 북한에서는 꿈속에서 그려볼 수 있는 이상의 도시다.

 

장애인들을 위하여 무료봉사에 나서고 탈북자들을 위하여 봉사의 길에 나서신 고마운 분들. 북한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금식기도와 중보기도 하시는 분들, 자기만이 살기에 급급하여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이 살아온 나에게는 너무나도 상상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의식주 걱정 없이 자기 능력껏 벌어 살 수 있는 이 땅이 천국이 아니고 어디가 천국이랴! 지금 내가 아이들과 함께 즐기며 지내는 하루하루의 귀중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오늘도 억울하게 수용소에 잡혀가고 있을 사람들, 다음날 식량을 마련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뛰고 또 뛰는 북한 동포들에게도 이 같은 밝은 빛이 비치어 다 같이 천국에서 즐기며 살 그날은 가까워 오고 있다.

 

통일을 앞당기는 길은 우리 탈북민들이 이 땅에 제대로 뿌리박고 무성한 아치를 쳐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 생각한다. 날은 밝기전이 가장 어두우며 어두운 밤이 지나가면 새날이 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일 것이다.

 

2015년 1월 고명화 : 출처 탈북자동지회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10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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