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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땅(Landlocked Country)은 바다와 접하지 않는 나라를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내륙국은 여러가지 면에서 불리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낚시 등을 통해 해양 자원을 얻을 수 없는 것 뿐 아니라,
바다를 통한 무역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개 해안 지방은 내륙에 비해 더 부유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내륙국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해 왔습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앙골라를 양분하는 4 km의 짧은 해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네움 지역 인근의 21 km 해안을 통해 크로아티아를 양분하며 아드리아 해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국제 하천인 다뉴브 강을 통해 바다로 나갈 수 있습니다.
폴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발트 해로 연결되는 폴란드 회랑(corridor)이라는

좁은 통로를 확보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독일은 동프로이센과 나머지 지역이 나뉘게 되어

이 회랑확보가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의 불씨가 되게 됩니다.

바다로의 통로가 막히는 것은 그 나라에 있어 큰 타격이 됩니다.
볼리비아는 칠레와의 태평양 전쟁(1879-1884)에서

바다로 가는 통로를 잃어버렸습니다.
1993년 에리트레아가 독립하면서 에티오피아는 내륙국이 되었습니다.
몬테네그로는 2006년 5월 22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서 분리되어

세르비아는 내륙국이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이 북극해와 접해 있어 대부분 얼음으로 인해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러시아가 발트 해, 흑해, 태평양 등으로 확장을 해 온 것은

부동항을 얻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저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카스피 해나 아랄 해와 같은 내륙해와 인접한 나라는

이 바다 (또는 호수)를 해상 무역에 이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카자흐스탄은 갇힌 땅 곧 내륙국으로 분류합니다.

현재 전 세계 국가 가운데 44개 국가가 갇힌 땅[Landlocked Country]

곧 내륙국입니다.

네팔, 니제르, 라오스, 레소토, 룩셈부르크, 르완다, 리히텐슈타인, 마케도니아 공화국, 말라위, 말리, 몰도바, 몽골, 바티칸 시국, 벨라루스, 보츠와나, 볼리비아, 부룬디, 부르키나파소, 부탄, 산마리노, 세르비아, 스와질란드, 스위스, 슬로바키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아프가니스탄, 안도라, 에티오피아, 오스트리아, 우간다, 우즈베키스탄, 잠비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짐바브웨, 차드, 체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라과이, 헝가리

44개국 가운데 [스탄]의 국가가 6개국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 가운데

아주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겪었던 국가들이 보입니다.

다음 4개국은 자신의 나라가 갇힌 땅임을 불인정하는 국가입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남오세티아, 트란스니스트리아,티베트
결국 이 국가들은 바다와 접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리히텐슈타인과 우즈베키스탄은

갇힌 땅에 한번 더 갇힌 이중 내륙국(Double Landlocked Country)입니다.

이 나라에서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두 나라를 거쳐야 한답니다.

또한 다음 나라는 바다로 연결된 좁은 회랑(Corridor)을 가진 나라입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요르단, 이라크, 콩고 민주 공화국, 토고



사랑하는 지체여러분!

지금 갇힌 땅... 아프가니스탄에... 사랑하는 우리 지체들이 갇혀있습니다.
지금 갇힌 땅... 아프가니스탄과 수 많은 나라 가운데

주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야할 주의 백성들이 갇혀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갇힌 땅들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주의 백성들을 일으키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갇힌 땅에서 우리 지체 두 명의 고귀한 피가 흘려졌습니다.
주께서 주신 동산에 씨를 뿌리며 땀을 흘리다 못해 피를 흘린...
이 시대의 두 스데반들을 주께서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주의 군사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결박을 풀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1:9,10,19)

사진 1은 갇힌 땅(Landlocked Country)의 분포도입니다.
사진 2는 아프가니스탄의 위성 사진입니다.

흰부분을 보면서 한마리 피닉스(불사조, 봉황)가 불을 뿜으며

동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 담아온 글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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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너무 보고 싶어요” 피랍자 가족 눈물의 호소


출처 donga.com
KCMUSA 제공 (원문보기)
[2007-07-26 0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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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대책]  Daum 뉴스 http://med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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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

 

원본 / 아프가니스탄 Daum 검색자료:~

http://search.daum.net/cgi-bin/nsp/search.cgi?nil_profile=g&nil_Search=btn&sw=tot&q=%BE%C6%C7%C1%B0%A1%B4%CF%BD%BA%C5%BA

 

희망의 오병이어

아프리카 미얀마 인도네시아 기아난민 돕기 캠페인

 

영상출처: http://cts.tv

http://cts.tv/sub_design/africa/index.asp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윌리엄 캐리선교사-

 

구두 수선공이 위대한 Vision의 선교사로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어려서 꽃과 나무와 새 그리고 곤충을 벗하며 자라난 전형적인 촌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주특기는  나무타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  대한 욕구도 강했습니다.

당시 문맹률이 매우 높던 시절,  그는 끈질긴 도전으로 글을 깨우쳤습니다.
더 나아가 외국어인  라틴어와 헬라어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한후 캐리는 아버지의 압력으로  구두수선공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두발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구두수선은  유망직종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평생 신발만 어루만지다 죽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의 인생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1779년 캐리가 19살 때, 한 기도모임에서
히브리서 13장 13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는 이 한 말씀을 통해 그동안의 세상과 타협하여 살던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과 능욕을 받고자하는 분명한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그는 다른 어떤 학문보다 성경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구두공장 공장장에서  예수님의 선전부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당시 영국은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가  이끄는 영적 부흥운동이 전 영국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세계선교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비레인 교회에서 목회에 전념하고 있던 캐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캐리가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 라는 책을  읽고있을 때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인생을 바꾸어 놓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쿡선장은 미지의 세계를 항해하며 태평양의 알려지지 않은 섬들과
원주민들의 원시적인 삶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놓았습니다.

문명의혜택을 못받아 옷도 없이 코난과 포비처럼 살아가는 부족, 사람을 맛있게 먹는 풍습을 지닌 부족등...  
그리고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해 주려고 하지않습니다. 거기에는 명예도 유익도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책을 읽고 있던 청년 캐리의 가슴은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맥박은 힘차게 고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냐인의 끈질긴 외침을 들었습니다.

그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내가 여기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결단했습니다.

그 때부터 캐리는 세계지도에 이미 알려진 나라의 인구,종교등을 표시하며
선교지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도는 그의 기도 목록이었습니다.
그는 세계지도를 꼭 껴안고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기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교회는 캘빈주의의  영향으로 선교운동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선교는 예수님이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사명으로 국한 시켰습니다.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 된 캐리는  
교회안의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야겠다고 방향잡았습니다.

어느날 목사들의 모임에서  캐리는 해외선교에대한 그의 원대한 계획에 대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러자  한 원로목사가 일어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그만 열내고 자리에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한다면
자네나 우리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수 있을걸세.'

이것은 그의 선교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캐리안에 불붙은 세계선교에 대한 vision과 성령의 불은 더욱 크게 타올랐습니다.

캐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유언적 명령이  곧 우리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1792년 봄 그는 '이교도 개종에 대한 크리스챤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세계선교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임을 역설하였습니다.

이책은 루터의 95조항과 함께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세계선교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 캐리는 침례교회연합회 모임에서
이사야서  54:2,3 '네 장막터를 넓히라.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항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곳이 되게 할것임니라' 말씀을 전하며,
간절한 기도가운데 여러목사들에게
하나님의 비젼을 심었습니다.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통해
위대한 세계선교의 역사를 이루실 때인 것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시도하라했습니다.

그의 비젼이 넘치는 메시지에 감동을 받은 목사들이
당장에 그 다음날로 유명한 침례교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7년동안  아무도 그를 이해하거나 도와주지 않고 배척했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으로
현실에 절망치 않고 끈질기게 도전하였을 때,

18세기의 타락한 영국을 구원하였을뿐 아니라 세계각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였습니다.


위대한 시도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러자 그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 였습니다.
캐리의 이야기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무모한 일처럼 보였기 때문에
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둘째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문맹의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그녀는  캐리에게 '여보, 인도는 절대로 안돼요, 제발 우리 아기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

그러나 캐리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이제 돌이킬 수가 없소.'  

캐리는 사랑하는 가족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셋째는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하비레인 교회의 성도들은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으로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절대로 목사님을
보내지 않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캐리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인도땅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선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힌두의 과부들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함께 불에 타야했고,

갠지스 강가에선 'Gunga mai kai jai (갠지스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그런 미신이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또, 당시 인도는 동인도 회사의 점령아래 있었고, 선교를 절대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캐리는 추방을 면하기위해  내륙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은 말라리아 창궐한 곳이었습니다.  
아내 도로시와 큰아이  2명은 이질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한 아들을 잃게 되었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습니다.
캐리는 멋지게 선교를 하려던 이상적인 꿈이 산산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캐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때, 나의 모든 근심을 내어 맡길수 있었습니다.

내가 설사 이곳에서 생명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나에게 이 고귀한 사명이 맡겨진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습니다.'

캐리는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결코 본국의 선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디고 공장의 감독으로 취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캐리는 충분한 선교비를  벌면서 선교의 기초가 되는 인도어 정복에 온힘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1년후부터  그의 위대한 시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캐리는 성경번역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고 또 여러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벵갈에서 7년간 땀흘렸지만 단 한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습니다.
큰 아픔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인도  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르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쉬나 팔이라는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했습니다.
그가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명의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승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세람포르 역사가 흥왕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합심동역에 있었습니다.  

캐리와 워드와  마쉬만,
그들은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불리웠는데
23년간 팀을 이루어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의  교제로
힘을 얻으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대형 화재로 인해 수년간 작업하여 완역한
성경원고와 두권의 문법책,다국어 사전들이 소실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캐리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총사는 팀웍을  새로이 갖추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캐리는 편지에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유익이  될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다시 시작했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 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이처럼 그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캐리는 1834년 73세의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던 인도 세람포에 묻혔습니다.

윌리암캐리는 그의 그칠줄  모르는 열정과 도전으로
18세기 침체된 영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학적 업적, 교육적인 공로, 목회사역뿐 아니라
과부의 화형이나 유아살해 같은
인도의 나쁜 관습을 폐지하고 좋은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는데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도 국외적으로도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 공회가 창설되어
오늘날 선교의 기틀이 되게 한 중요한 업적이 있습니다.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댕긴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근대선교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선교황금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인도의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 근대 선교의 문을 활짝 연 근대선교의 아버지였습니다.

 

         "역경을 이겨내는 윌리엄 캐리 선교사의 기도"

  나중에 버마(미얀마)로 가서 헌신적인 선교사로 일한 미국의 아도니람 저드슨이 인도에서 일하고 있던 영국의 위대한 선교사 윌리엄 캐리를 1812년에 방문하였다. 저드슨은 캐리 선교사와 정원을 함께 거닐면서 캐리 선교사의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했다.

캐리 선교사는 세 차례에 걸쳐 살해당할 뻔했고, 인도 정부의 갖은 선교 방해를 받았으며, 수고와 땀으로 이룩해 놓은 원고와 인쇄 도구들과 서류들이 거의 다 불타 버리는 화재를 경험했었다.

저드슨은 어떻게 이러한 수많은 역경들을 견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그 용기와 믿음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그러자 캐리 선교사는 저드슨을 안내하여 정원의 한 편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말했다.

"여기가 바로 나의 예배 장소이자 기도와 묵상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닥쳐온 고난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매일 새벽 5시마다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저 꽃들을 바라보며 묵상을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6시 경에 들어가서 아침을 먹고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저녁이 되면 밥을 먹고 나서 손에 성경을 들고 다시 이 자리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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