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 7. 10-1564. 5. 27)
John Calvin
1509.7.10-1564.5.27
루터(1483-1546)와 쯔빙글리(1484-1531)를
개혁 1세대라고 한다면,
칼빈은 개혁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이 1509년 출생하였을 때,
루터는 이미 4년이나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칼빈이 겨우 읽기를 배우고 있을 때,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강의하고 있었다.
칼빈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루터는 95개 조문의 항의문을 게시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루터와 칼빈에게 적당한 시간차(25년)를 두셔서
당신의 일을 적절하게 수종 들게 하셨음을 볼 수 있다.
칼빈과 루터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인물이었다.
칼빈은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반면,
루터는 사교적이며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칼빈은 가끔 갑자기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를 제외하면
성품이 치밀하고 과묵하며 꼼꼼하고 대찼던 반면,
루터는 자유분방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친하게 어울리는 호탕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러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신앙이 같다는 데에
뿌리박은 상호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1539년 루터는
칼빈의 작품
「왜 종교개혁이 필요했는가에 대해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주는 공개서한」
(Open Letter to Cardinal Sadoleto on Why the Reformation Was Necessary)
을 읽고 그 마음에 큰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1545년 4월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한 책방에서
칼빈이 저술한
「신앙의 교훈과 고백」(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
을 사서 읽고
“이 저자야말로 학식과 경건을 겸전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만약 외콜람파디우스와 쯔빙글리가 처음부터 이처럼 명료했다면
그처럼 좋지 못한 논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
이라고 논평하였다.
루터는 쯔빙글리가 피상적이었던 것만큼이나
칼빈은 심오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칼빈은 항상 루터를 변호하였는데,
쯔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가
늙은 루터를 비난하자,
“부디 루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며,
얼마나 용기 있게, 강건하게, 유능하게, 학식 있게, 효과적으로
구원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적그리스도를 쳐부수느라고
계속 열성을 기울였는가를 보십시오.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한 대로
아래와 같은 입장에 추호도 변화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나를 가리켜 악마라고 한다 해도,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하나님의 뛰어난 종이라 부르겠습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와 같이 루터와 칼빈은 서로 아끼고 존경하는 사이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아 교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1.출생과 초기 교육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97km 떨어진
피카르디 지방의 노용(Noyon)에서
신흥 중산층이었던 제라르 코벵(제라드 칼빈,Gerard Calvin)과
어머니 쟌느(즈앤) 르 프랑스(Jeanne Le France)의
다섯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노용시의 칼빈생가
현재는 ‘칼빈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코벵은
대대로 이어내려 오던 와즈(Oise) 강 뱃사공 일을 하다가,
1500년경에는 퐁 레베크의 고향집을 떠나 노용에 와
노용 시의회 의원의 딸인 쟌느와 결혼했다.
그 후 그는 장인 덕분에 노용 시청 서기가 되었고,
그 후에는 대성당의 교구 서기로서의 일을 보았는데
이때 칼빈이 태어났다.
칼빈의 어머니 쟌느 르 프랑스는
당시 교양이 높은 가문으로 알려진 노용의 캉브레 호텔업자의 딸이었다.
쟌느 르 프랑스는
매우 아름답고 영리하며
학문과 경건과 신앙심이 돈독한 여인으로 알려졌는데,
칼빈은 외모와 지성 그리고 종교성 모두가
어머니 쪽으로부터 유전 받은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으므로
칼빈은 어머니 없이 아버지의 보살핌과 사랑 가운데 자라났으며,
열한 살 때는 노용 성당에 있는 라 게진느(La Gesine) 채플의 사제 보조직에
임명되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칼빈은 아버지 덕분에
그 지방 출신의 상류계급의 자녀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으며
그들과 친한 친분 관계를 갖게 되었다.
칼빈은 노용에서 그의 형 챨스(Charles)와 그의 동생 안토니(Antony)와 함께
초등학교인 카피츠 학교(School of the Capettes)를 다녔다.
그는 타고난 지성과 판단력으로
학우들 사이에서 뛰어난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칼빈은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몸이 허약하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화를 잘 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사리를 판단하는 데에는 정확했다.
그리고 그의 지적 능력은 아주 뛰어났으므로
아버지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게 되었다.
2. 대학 생활
칼빈은 노용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1523년 8월 파리로 유학하여
라 마르셰(La Marche) 대학에 등록하고
라틴어의 대가인 마두린 코디어(Mathurin Cordier)를 만나
라틴어를 배웠고,
인문주의 사상에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아버지의 강력한 권고로
사제가 되기 위하여 몽테귀(de Montaigue) 대학으로 전학하여야만 했다.
몽테귀 대학 시절의 칼빈
에라스무스와 로욜라도 이 학교 출신이다.
몽테귀 대학은
금욕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는 대학이었다.
하루 일과는 아침 4시에 시작되었으며
수업은 아침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금욕주의적인 삶과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몽테귀 대학에서 칼빈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옥캄주의자였던
존 메이저(John Major)를 만나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메이저는
“대 영국사”(History of Great Britain, 1521),
“복음서 주석” (Commentary on the Gospel,1529)
과 같은 책을 써서
위클리프, 후스, 루터의 개혁 운동을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비판은 어린 칼빈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칼빈은 1528년 초반에
몽테귀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칼빈은 몽테귀 대학 생활 동안에
많은 친구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특히 당시 왕의 주치의였던 윌리암 콥(William Cop)의 아들
니콜라스(Nicholas) 콥과 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종교 개혁의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에 자크 르 페브르(Jacques Le Fevre,1450-1537)는
바울 서신 주석(1512년)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교리를
공공연히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칼빈은 당시 신학계에 일고 있던 이런 변화를 간파하고 있었다.
5년 간의 대학 생활을 마친 뒤
1528년에 그는 사제 훈련을 위한 다음 단계로써
신학 연구 자격 시험에 통과하였다.
교구 성직록(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한 칼빈은
1528년 초반에 몽테귀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18세의 아들에게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칼빈의 아버지가
1529년 3월 노용의 참사회와 불편한 관계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법조계의 직업이
부와 명성을 얻게 하는데 확실한 보장이 되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효자였던 칼빈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률을 공부하기 위하여
오를레앙(Orleans) 대학으로 전학하여
당시프랑스 최고의 법학자인 피퍼 타이잔(Peter Taisan) 문하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에서 만난
현실적인 보수주의자
피에르 드 레스트왈르(Pierre de L’Estoile) 교수에게서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나
엄청난 정신적 영향을 받아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인문주의 사상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또한 칼빈은
헬라어를 가르치던
멜쉬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칼빈이 볼마르 교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볼마르 교수가
당시 유명한 이태리의 르네상스에
사상적 영향을 끼친 법학자들이 모여 있는
부르쥬 대학(Universites de Bourges)으로 전근 갔을 때,
거기까지 그를 따라서 학교를 옮긴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칼빈이 1년만에 오를레앙 대학에서 부르쥬 대학으로 전학한 것은
이탈리아의 법학자 안드레아 알키아티(Andrea Alciati)의 명성을 듣고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이기도 했다.
볼마르 교수는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신약성서 원문을 가지고
칼빈 등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가르쳐 주었다.
그 결과 칼빈은 헬라어 고전은 물론
신약 성경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칼빈은 이 부르쥬 대학에서
언어학, 문학, 고대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되었다.
쟈끄르 페브르 교수로부터
종교개혁 사상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청년 칼빈은,
볼마르 교수로부터 신약 성경 원문을 배우면서
이러한 사상이 더욱 자라게 되었다.
역사가 프로리몽 드 레몽(Florimond de Raemond)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서 말하기를
"볼마르야 말로 칼빈에게
‘이단 교리의 달콤한 맛’을 최초로 맛보게 한 사람이었다."
고 단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은 나바르 왕비의 관할지인 부르쥬에서
멜쉬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 교수를 만났는데
이는(칼빈에게는) 불행하고도 불운한 만남이었다.
볼마르 교수는 그리스문학을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언어학에서는 매우 박학하고 탁월한 교수였다.
그는 칼빈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를
이끌어 준 사람이었다.
볼마르는
“칼빈의 기억력은 매우 탁월했으며
정신력은 활발했고,
강사의 의도를
자기 나름대로의 언어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서 표현해 낼 줄 알았으며,
그것을 다시 더 쉽고 더 아름다운 언어로 정확하게 옮겨 놓는 데
매우 탁월하고도 섬세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고 했다.
그래서 그를 가까이 두었으며
다른 학생들보다 더 깊이 사랑했다.
하루는 함께 산책을 하는 중,
볼마르 교수는 칼빈에게
신학에 헌신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유스티니안(Justinien)의 법전을 그만두고
모든 학문 중의 학문이요, 학문의 여왕인
신학 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으며…
볼마르는 또한 그에게
루터교의 비밀 교리에 대해서도 몇 가지를 들려주었다…
(칼빈이 노용으로 간 후에는) 편지로 내왕을 했고,
그가 독일로부터 입수한 서적들(개혁 사상이 담긴 서적들)을 보내주었으며,
칼빈에게 주님의 교회를 계몽하는 사업을
계속할 것을 부탁했다.
칼빈은 그 위대한 사업(종교개혁을 뜻함) 가운데로
자기를 밀어 넣었던 사람이 볼마르라고
여러 차례 고백했다.’
1531년 5월 26일 봄에
칼빈은 법학사 학위를 받고
1532년 1월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법률 공부를 더 해서
1535년에 법률 면허증을 받았으나
법학 박사학위는 끝내 거절하고 받지 아니했다.
그러나 이렇게 갈고 닦은 그의 고도의 법학 지식은
후일에 그가 표현하는
교리의 정확한 언어 구사와 논리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1531년 5월 부친이 세상을 떠나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자,
칼빈은 다시 인문주의자가 되기를 꿈꾸면서
파리 왕립 대학(Royal College) 에 옮겼다.
친구 니콜라스 콥과의 우정을 다지는 한편,
삐에르 당느(Piere Danes) 교수로부터
고급 헬라어를 거의 완성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배우면서
프랑소와 바따블(Francois Vatable) 교수로부터는
히브리어를 배웠다.
이것이 후일 그가 구약과 신약 성경을 주석하는 데
필요한 어학 실력의 기초가 되었다.
넓은 범위에 걸친 그의 인문학의 지식 섭렵의 경지를 두고
귀빠뗑(Gui Patin) 같은 이는
칼빈을“유럽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방대한 양에 해당하는 그의 주석을
자세히 검토해 본 사람이라면
칼빈의 박학다식한 지식의 바다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는 1532년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Commentary on Lucious Anneas Seneca’s Two Books on Clemency)
을 출판하였다.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의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무참하게 박해하는 것에 대하여
스토아주의적 입장에서
네로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마음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칼빈이 주해서를 쓴 것은
프랑스 왕 프란시스1세(재위:1515-47)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의분 속에서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유창한 라틴어로 이 책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칼빈은
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소개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였다.
이어 3가지 종교적인 질문,
곧 이교와 기독교, 미신과 진정한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인간 영혼의 기원과 성격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 통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칼빈의 이와 같은 종교적인 질문은,
베틀즈 교수(Ford Lewis Battles)가 지적한 것처럼,
이미 그가 바른 종교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은 주석을 통해
학자들의 호평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돈을 만질 수 있게 되자,
신학을 연구하여 학자가 될 계획을 세웠다
3. 칼빈의 회심과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
1533년경 칼빈은
프로테스탄트가 되었으며
종교개혁운동에 합세한다.
그러나,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회심의 중대한 전환점이 정확하게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시편 주석」(Commentary on the Psalms)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으로 보여 진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갑자기 회심시키셔서
나의 마음을 복종시키시고
보다 교훈하기에 쉽도록 인도하셨다.
당시 나는 어렸을 때보다
심정이 보다 강퍅한 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진정한 신적 경건의 맛과 지식을 약간 음미하게 되자,
나는 즉시 이 방면에
보다 큰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에 불타게 되었다.
내가 이전에 하던 공부를 아주 저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열심은 식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칼빈의 갑작스런 회심은
'사돌레토 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나타난다.
칼빈은「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판한 후
오를레앙 지방에 1년간 머물다가
1533년 8월에는 노용을 방문하고,
10월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만성절(All Saints Day) 날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마튀렝(Mathurins)교회에서
파리 대학교 총장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을 칼빈이 초안하였다.
이 '기독교 철학'이란 제목 하의 연설은
어느 정도 루터의 산상수훈 설교를 반영하고 있다.
이 연설은 루터가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해서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박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검이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교회의 평화,
모든 학문의 유용성,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개혁
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과 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는 자들을
이단, 미혹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 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 분은‘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콥의 학장 취임 연설은 왕실의 진노를 초래하였다.
대노한 프란시스 Ⅰ세는
12월 10일 의회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우리의 사랑하는 도시 파리,
우리 왕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심히 불쾌합니다.
우리 왕국의 최고 대학에는
저주받을 루터파 이단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모든 대책을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
19세기 칼빈 연구가 아우구스트 랑(August9Lang)의 저서
‘칼빈의 회심’(Die Bekehrung Kalvins, 1897)에 의하면,
니콜라스 콥은
루터가 이미 1522년 만성절 설교에서 사용했던
본문(마 5:3)과 제목을
다시 사용하였다고 했다.
파리의 소르본느(Sorbonne) 신학부 교수진과 로마 카톨릭 고위 사제들은
이 원고가 이단자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칼빈과 콥은 당국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소환에 응하면 처형될 것을 짐작한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은 경찰들이 갑작스럽게 그의 집을 포위하자
침대보를 꼬아서 옆 빌딩으로 도망한 후 피신한 후
파리 남서부 250일에 있는 앙그렘(Angouleme)에 있는 친구 뒤 티에의
집에 은신처를 정하였다.
뒤 티에의 집에는 4천여 권의 장서가 있어서
연구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계속 연구하면서
그의 불후의 명저 ‘기독교강요’의 체계를 세웠다.
칼빈은 1534년 5월 4일 노용에 가서 사제직을 반납하므로,
공식적으로 로마교회와 결별했다.
두 차례나 잠시 동안 투옥 당하는 경험을 맛보았으며,
파리에도 들르고 오를레앙과 포이티에르도 방문하였는데,
포이티에르 근처의 한 석굴 속에서
최초로 개혁주의 신조에 따른 성찬식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판판한 돌을 성찬상 대신 사용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칼빈은
그의 사촌 로베르 올리베땅(Robert Olivetan,1506-1538)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의 서문을 썼다.
올리베땅의 성경은
1년 뒤인 1535년 뇌샤텔(Neuchchatel)에서
인쇄되어 출판되었다.
한편, 재침례교도에 의하여
“영혼 수면설”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자,
칼빈은 이에 “영혼 수면설”에 반대하여
1534년「영혼 수면설에 관하여」(Psycho pannychia)라는
소책자를 써서
영혼이 천국에서 육체의 부활 때까지 잠자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프랑스 내에서는 날로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상태였던 차에
마침 발생한 플래카드 사건(the Affair of the placards)으로
드디어 문제는 폭발하게 되었다.
1534년 10월 18일 과격파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황제 아래서 실시되는 미사의 잘못된 사용에 관한 조문’
으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 및 기타 다른 도시들에 붙이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암보아즈(Amboise)에 있는 왕궁 안 왕의 침실 문 앞에까지
붙어 있는 형편이었다.
프란시스 1세는 이 사태를 더욱 극화시켜서,
이러한 더러움으로부터
다시 파리시를 정화시킨다는 의미로
촛불을 켜들고 노트르담 사원까지
엄숙한 행렬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교의 저택에서 벌어진 향연에 참석한 국왕은
자기 영토에서 이러한 해독을 제거시키겠노라고
서약하기도 하였다.
그 후 발생한 일반 대중들의 폭발을 더욱 조장하듯이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을 투옥하고,
이중 35명을 화형에 처하였으며,
칼빈의 친형제 중 하나를 처형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교황 바오로 3세의 마음을 보다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이단들을 완전 섬멸하겠노라는
칙령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그들에 대한 박해 이유는
로마 교회의 미사와 교리 그리고 성직자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다.
칼빈도 결국 망명자로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4. 기독교 강요 출판
‘기독교 강요’ 저술에 열중하는 칼빈
1535년 1월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가서 친구인 콥을 만났다.
그리고 뒤 티에의 서재에서 쓰기 시작한
‘프랑스 당국에 의해 고난 받는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 문답서요,
그리스도인의 실상을 왕에게 밝히는 변증서‘인
<기독교 강요>의 탈고를 서둘러 1535년 8월 23일에 완성했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1536년 3월 바젤의 인쇄업자 토마스 플랫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출판하였다.
‘기독교 강요’ 초판본(1536)의 표지
1536년 3월 바젤에서
라틴어로 출판된 <기독교 강요> 초판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율법, 2장: 신조 문제, 3장: 기도(주기도),
4장: 성례, 5장: 다른 성례들, 6장: 기독교인의 자유).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발행하면서
이 책의 저술 동기를
“우선 주님께서 보실 때에
너무나도 값진 내 동생의 죽음의 의미를
의롭지 못한 자들 앞에서 옹호하며,
또한 똑같은 위협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 놓여 있으므로
이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위로하기 위해서”
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국왕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헌정사를 썼다.
“고명하신 왕이시여,
제가 처음 이 일에 착수하였을 때는
나중에 폐하께 헌정할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단지 경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경건으로 덕을 세우기에 적합한 기본적인 책을
써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노력은
특히 저의 동포인 프랑스인들에게
유익을 줄 생각으로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악한 사람들이 맹위를 떨쳐
폐하의 나라로부터
건전한 교리를 추방해 버린 것을 알았을 때
저의 저작을 폐하 앞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삼음으로써
폐하로 하여금 그 교리가
저 악한 사람들이 불과 칼로써 그토록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당신이
들을 가치가 있고 알 가치가 있으며 판단할 가치가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죄인들이며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는
세상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설 것이며
세상의 모든 권세에 의해 정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적들은
우리의 교리가 새롭고 불확실하며
기적들에 의해 확증되지 않았고
교부들의 일치된 목소리에 상반되며
유구한 관습에 반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의 교리를 새로운 것이라고 함으로써
저들은 그 거룩한 말씀을 새로운 것이라고 비방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가 저들에게 새로운 것임은
저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에 바울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고 말씀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그 어떤 새로운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저들이 우리의 교리의 불확실성을 조롱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저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면,
우리는 저들이 자신들의 교리에 어떤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알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고백하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공포나 하나님의 심판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기적들을 요구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온갖 기적들에 의해 확증된 복음을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옛 교부들과 대립시키는 것은
마치 교부들이
우리의 대적들의 악한 행위를 선동하기라도 한 듯이 말하는 것으로써
중상모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들이 관습에 호소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만약 인간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면,
선한 사람들은 이전의 관습들을 마땅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다수가 더 나은 길을 선택한다는 보장이 없음에도
다수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이내 관습으로서의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저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이단이거나 교회가 여러 세대 동안 죽어 있었다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함으로써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에게 많은 괴로움이 되지 않습니다.…
끝으로 저들이 우리의 교리의 전파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주장하며
비위에 거슬리게 소요들과 소동들과 분란들을 열거하는 행위에는
전혀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왕이시여,
다시 폐하께 말씀드리오니,
우리의 대적들이 이른바 ‘새로운 복음’은
단지 폭동을 선동하고 악을 방종 되게 행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넌지시 얘기하는 말에 동요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은 분열이 아니라 화평을 가져오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서 진보를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순결, 관용, 자비, 절제, 인내, 중용을 비롯한
모든 미덕의 본보기로서 우리를 중상모략 하는 자들을 섬길 것입니다.…”
칼빈은 이 책을 출판하면서
신변 보호 차원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마르티누스 루카니우스(Martinus Lucanius)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5. 제네바에 오기까지의 칼빈
<기독교강요> 출판 이후 칼빈은 친구 뒤 티에와 함께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한 후원을 얻기 위해서
이탈리아 페라라(Ferrara)의 공작부인이요,
공주인 르네(Renee)를 만나려고
페라라를 방문하였지만,
그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종교적 관용 조처가 내려지자,
파리로 돌아와 신변을 정리하고 공부를 더하기 위해
그의 동생 앙뜨앙느(Antoine)와 이복 여동생 마리(Marie)를 데리고
1536년 6월 스트라스부르그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때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 독일의 찰스 1세사이에
제3차 합스부르그-발로아(Habsburg-Valois) 전쟁이 발발하여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직행로가 차단되었다.
그러므로 제네바를 거쳐 가는 우회 도로를 택하여 1536년 7월에
제네바에 도착했다.
칼빈은 제네바에 머문다는 소식을 뒤 티에로부터 들은
제네바의 개혁자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
칼빈을 찾아와 제네바 개혁에의 동참을 권유했다.
그러나 칼빈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파렐은
다음과 같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의 학문 연구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오.
만약 당신이 이 주님의 사역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저주하실 것이오."
결국 칼빈은 그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칼빈을 개혁 사역에 끌어들인 파렐의 강권
나중에 칼빈은 그 날 밤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 때 나는 파렐의 무서운 명령에
감당하기 어렵도록 몸을 떨었다.
그의 음성은 마치 높은 보좌에서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과 같았다."
칼빈은 또한 당시의 기억을
시편 주석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파렐은 나를 제네바에 머물도록 강권하였다.
그가 사용한 수단은 상담이나 권면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나는 이러한 폭언을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신 손을 내밀어
나를 붙드시는 것과 같이 느꼈다.
그 당시 내가 은신처로 정한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지름길이
전쟁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단 하룻밤만 제네바에서 묵고 급히 떠날 결심이었다.…
비열하게 신앙을 버리고 로마 천주교회로 되돌아간 한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를 알리는 바람에
나의 존재가 드러났다.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에 매여 있던 파렐은
나를 붙잡아 두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나는 개인 연구에 전력할 것을 결심한 뒤여서,
다른 일에는 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간청 정도로 아무 소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일 내가 긴급한 시기에 도움을 주는 것을 거절하고 무시한다면,
하나님이 내가 추구하는
은둔과 평온한 학문 생활에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나는 마침내 계획하였던 여행을 단념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칼빈은 파렐의 강권에 의하여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계획을 단념하고 제네바에 정착하였다.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여
프랑스와 이태리와의 교역 중심지로 사보이(Savoy)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16세기 초반 프리브르그(Fribroug)와 베른(Berne)의 도움으로 독립을 했고,
1534년 부도덕한 생활로 악명이 높던 주교를 몰아내었다.
제네바의 행정은
200인의 귀족으로 구성된 대 의회와 25인으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관할하였고,
시민들로 구성된 총회는
4인의 평의원과 재정관을 선출하여 시정을 행사하였다.
제네바 시의회가
로마 천주교회 신앙을 옹호하는 사보이에 대하여
정치적인 반란을 시도한 것과는 달리,
시민들은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교황제의 노예 상태에 매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렐의 설교를 통하여
제네바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파렐은 1489년 프랑스 도피네 지방의 가프(Gap)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인문주의자 르페브르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는 1521년 온건한 개혁자인 브리소네의 비호 아래
설교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후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유랑 생활을 하다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마틴 부쳐(1491-1551)를 만나 교제하였다.
그는 1532년경부터 제네바에 와서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네바에 도착한 파렐은
제네바 시민들이 예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격렬한 설교를 감행했기 때문에
도리어 시민들의 감정에 자극을 주게 되어,
하마터면 생명까지 빼앗길 뻔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친구들과 같이 제네바 시를 떠날 수 있었다.
파렐은 일단 퇴거했다가
베른(Bern)에 있는 친구 프로망(Antoine Froment)을
제네바 시에 파송하였으나 그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실패의 원인은
당시 제네바 시민들이 개혁 신앙의 참 뜻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은
파렐의 설교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렐은 이에 힘을 얻어 프로망과 함께 다시 제네바로 향하였고,
1534년 3월 1일 제네바 시 당국으로부터 설교권을 얻기에 이르렀다.
파렐, 올리벳탄, 젊은 안톤 프로망 등은
제네바 속에서 설교 및 선전공세를 통해
그 분위기를 일신시키고자 하였다.
이미 운이 다했다고 할 수 있는 주교측에서
제네바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을 때에,
그는 제네바 시가
자유와 안보를 위한 투쟁과 복음주의적 사상 사이에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535년 6월 장기간 계속된 교리논쟁을 통해
파렐과 비레(1511-1571)는 무능한 가톨릭 측의 대변자들을 물리치고,
중앙 성당을 비롯한 여러 교회들을 과감하게 차지하였다.
성상 파괴론자들(Iconoclasts)은
교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을 부수고
성자들의 조각들을 우물 속에 빠뜨려 버렸다.
그해 8월 대 의회에서는 미사집전을 중지시켰으며,
그 후 수개월 간 카톨릭 성직자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니,
프로테스탄트 측 지도자들이 그 자리를 메꾸게 되었다.
1536년 1월 프로테스탄트인 베른 시는
사보이가를 격퇴시키고 점령하였으나,
오랜 논란 끝에 이 도시를 독립시키는데 합의하였다.
1536년 5월 21일 스위스 직접 정치에 따라,
각 가족들의 남자 가장들이 대성당에서 총회를 소집하고
만장일치로 복음주의적 형태의 예배를 실시하기로 가결하였다.
교회 재산은 시의회에서 감독하기로 하였으니,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실시한 바와 같은
국가 - 교회 형태의 제도가 성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 시기에 파렐은 제네바에 들른 칼빈을 강권하여
이 도시의 개혁에 참여하도록 붙잡은 것이었다.
6. 제 1차 제네바 사역
칼빈은 1536년 8월 말부터
성 피에르(St. Pierre) 교회에서
바울 서신을 강해하는 일로 제네바 개혁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제네바 시 당국은 칼빈을
그 이름조차도 거명하지 아니하고 ''저 프랑스인’이라고 불렀다.
제네바에 도착한지 한달 후 인 10월 1일부터 8일까지
로잔에서 카톨릭과 개혁자 사이에 성찬론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칼빈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원고없이 교부들의 글을 인용하여
로마교회의 오류를 반박하여 승리함으로써
제네바 당국과 시민들에게
큰 인정을 받게 되었다.
1537년 1월 교회의 개혁을 기대하면서
파렐과 함께
‘교회 행정에 관한 조례’(Articles Concerning the Government of the Church)
를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조례는 4개 조항의 개혁안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① 바울의 가르침대로 찬송할 때 시편을 사용할 것,
② 매주일 성찬을 행할 것,
③ 어린이를 위한 교육을 실시할 것,
④ 결혼법을 개혁할 것
등 이었다.
칼빈은 예배의 개혁을 위하여
어린이 성가대를 조직하고,
어른들도 찬송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고,
결혼에 관한규정을 마련하였다.
칼빈은
로마 천주교회와 재침례교도의 교리가
매우 위험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곡된 사상이 기독교 신앙을 붕괴할 수 있다고 본 칼빈은
제네바를 신앙적인 공통점을 가지는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교훈과 신앙고백」(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
이라는 신조를 작성하여 발표하고,
모든 시민들은 10명씩 그룹을 지어
이 조문을 준수할 것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의 노력은 1537년의 포고령이 제정됨으로써
그 절정을 이루었다.
칼빈은 세속 정부도 하나님에 의해 수립된 것은 인정하였으나,
정부가 교회의 고유한 특권을 침해하거나
순수하게 영적 문제들에 대해 상관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점차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 조직을
정비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특히 사치를 금하는 각종 법규 및 윤리에 관한 규칙들을 통해
전통적으로 시의회에서 취급하던 도덕에 관한 문제들은
사실상 교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주요 인물들을 시의 모든 구역에 배치, 임명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예방하고 악덕한 행위를 보고하도록 시켰다.
마태복음 18장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포고령은 규정하기를,
만약 잘못을 범하는 신자가 있을 때에는
우선 형제의 사랑으로 권면하도록 하고,
그 후에도 개선의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에 알리도록 하였다.
만약 계속 죄를 범할 경우에는
목사가 공개적으로 그 자를 비난하고
회중 가운데서 축출시킨다는 것이었다.
지구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자기 신자들의 도덕 생활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반동적 경향을 보이는 반대파의 세력들이
그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제네바 시민들은
칼빈이 본래 프랑스인이라는 사실과,
시내에 프랑스계 난민들의 숫자가 점차 증가해 간다는 데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정서적으로 불안전한 경향을 보이던
로잔의 목사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는
그곳에서의 비레의 활동을 흠잡기 시작하였다.
카롤리는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칼빈에게 반삼위일체적 경향이 있다는 중상을 하기 시작했다.
베른 시의회는 칼빈의 입장을 두둔하는 한편,
그곳 영내에서 카롤리가 설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로 되돌아갔으며 결국
다시 카톨릭으로 재 개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칼빈의 위치는 약화되었으며,
제네바 내에서 그의 권위도 손상되었다.
한편 제네바 자체 내부에서도
쟝 필립페(Jean Phillipe)의 지도 하에
강력한 반대당이 결성되기 시작했으니,
그는 개혁을 반대하고
목사들이 도덕문제를 취급하는 것과
강제로 신앙고백을 시키는 것 등을 반대하였다.
1538년 2월
칼빈의 반대자들로 보강된 시의회(4인중 3인은 칼빈과 파렐 반대)는
교회 문제에 대하여 베른 시의 주장을 따랐다.
문제의 발단은 성찬식에 사용하는 떡이 문제였다.
1538년 제네바 시의회는
베른시에서 사용하는 떡을 사용하도록 결의했다.
베른에서 사용하는 성찬은 로마 교회와 같은 점이 많았다.
당시 제네바 교회에서는
일상적인 빵을 성찬에 사용했는데 이것을 금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례식을 거행 할 수 없다고 칼빈과 파렐은 주장했다.
이로 인해 소동이 발생했고
시의회는 칼빈과 파렐에게 설교를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활절에 칼빈과 파렐이 설교를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시의회는 모임을 갖고
칼빈과 파렐에게 사흘 내에 제네바를 떠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제네바를 떠나 베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취리히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이곳에서 교회의 체제, 치리문제 등에 관한
자기들의 입장을 밝히고 일반적인 호응을 받았다.
파렐은 뇌샤텔로 돌아갔으며,
칼빈을 바젤로 각각 향하였다.
7.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개혁운동
칼빈이 교회 사역을 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스트라스부르그는 그를 초청했다.
스트라스부르그에 대하여
독일의 종교개혁사가인 보른캄(Heinrich Bornkamm)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종교개혁이 가능하도록
여러 조건이 이곳보다 잘 갖추어진 곳은
유럽 어느 곳에도 없었다.
동시의 위정자들은 종교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였고
그것을 정치적 입장에서 능란하게 처리했다.
그 결과 스트라스부르그는
저 위대한 시장 요한 스트룸(John Strum)의 지도 하에
비록 제국도시 가운데서
최대의 위용과 부를 자랑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면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드나드는 인문주의자들의 무리,
학문과 교양이 풍부한 시민들,
독일 신비주의운동이 남겨 놓은 내적 경건의 전통,
라인 강으로 인해
예부터 문명의 통로가 개통되어 자유로운 정신이 교류되던 곳이었다.
이와 같이 약동하는 생명력은
부쳐 라는 한 개혁가의 영혼 속에
깊숙이 흘러 들어가 용해되었으니
축복 받은 환경이 아닐 수 없었다.’
고 하였다.
이와 같이 스트라스부르그는
사가들에 의하여
‘종교개혁의 안디옥’ 또는
‘서남 독일의 비텐베르그’라고 불려 질만큼
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스트라스부르그는 많은 프랑스 종교 망명자들의 피난처였다.
칼빈은 개혁가였던 부쳐(Bucer,1491-1551)의 추천으로
1538년 9월 8일 프랑스 난민 교회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실행할 수 없었던
교회와 국가의 분리 문제를 실행할 수 있었다.
칼빈은
1538년 9월부터 1541년 여름까지
스트라스부르그에 체재하는
3년 동안을
주로 목회와 상담과 저술로 시간을 보내는 한편
제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개혁의 견문을 넓혔고
부쳐와 교제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
권징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부쳐의 예배 방식을 따라
예배 의식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난민 교회를 섬겼다.
특히 교회 음악에 있어
영창이나 오르간 음악보다는
시편 찬송을 더 선호하여, 시편 중 18개를 작곡하였고,
찬송을 편집하여「찬송가」(Book of Music)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찬송을 기도와 함께 공적 예배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 칼빈은
공적인 기도가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것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여
예배에서 찬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예배 사상은
나중에 개혁 교회의 예배 모범이 되었다.
칼빈이 목회한 스트라스부르크의 ‘성 니콜라스 교회’
칼빈의 프랑스 피난민 교회는
약 500여 명의 교인이 모이곤 하였는데,
한 방문객의 말을 빌리면,
그의 교회는
‘노래하는 공동체’(singing community)
라고 표현할 정도로 찬양을 중요시하였다.
칼빈은 부쳐의 영향으로
교회 연합에도 깊은 관심을 표하였다.
칼빈은 성서의 근본적인 진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한
어디서나 누구하고도 협동할 수 있다는 것과
자유로운 협동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칼빈은
1539년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기독교 연합을 위해 소집한
프랑크푸르트 회의에 참가하였고,
1540년 부쳐와 함께
하게나우와 보름스에서 열린
교회 연합을 위한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541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의 공식 사절로
레겐스부르그 회의에 참석하여
콘타리니 추기경과 멜랑히톤(1497-1560)을 만나기도 하였다.
이때 멜랑히톤과 교제한 후 루터의 종교개혁의 진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무는 동안
기독교 교육에도 관심이 많이 기울였다.
그는 목회하는 가운데 틈틈이
1539년 2월부터
네덜란드의 개혁자 요한 스트룸이 세운 중등학교에
출강하여 신학을 강의하면서 교육적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스트라스부르그의 경험은
나중에 제네바에서 매우 유용한 개혁의 수단이 되었다.
칼빈은 친구들의 권유함을 받아
이곳에서 결혼하였다.
칼빈은 언제나 무리하여 일을 하는 편이었으므로
친구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도 결혼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이 생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마치 희랍인들이 트로이를 공격한 것처럼,
오직 아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카톨릭과 싸웠다는 중상을 듣기 싫다.”
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칼빈은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신부를 찾는데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칼빈의 내조자의 조건은
“겸손하고 소박하고 평범하고 인내심이 깊어야하고
내 건강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이었다.
이델레트 드 부레(Idelette de Bure)
1540년 8월 칼빈은 부쳐의 소개로
세 자녀를 둔 과부 이델레트 드 부레(Idelette de Bure)와 결혼하였다.
이델레트는 네덜란드에서 박해를 피해 온 재침례교도였으나
부쳐의 영향을 받아 개혁주의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이 그리 좋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순복의 성품으로 죽을 때까지 칼빈을 도왔다.
그들은 1542년 아들을 하나 얻었으나,
일찍 잃게 되었다.
그때 칼빈은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신다.”
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고,
사람들이 그에게 자녀가 없음을 비방할 때,
“나는 무한히 셀 수 없는 영적인 아들을 가지고 있다.”
고 응수하여 자녀에 대하여 초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델레트는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549년 3월 사망하였는데,
후에 칼빈의 적들이 그를 모함하기 위해
‘그녀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
고 악평하였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편이었으며
생활은 매우 단조로웠으며
결혼 생활은 비록 짧았지만
행복했고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곳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1539년 7월에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8월에는 <기독교 강요> 제 2판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출판했다.
이 2판은 초판보다 약 3배정도 큰 것이었으며
루터도 이 재판을 읽고 매우 기뻐했다고 전한다.
1541년에는 프랑스어판 <기독교강요>를 출판했다.
그리고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간행했다.
이외에「로마서 주석」을 간행하였고
「기도서」그리고「성찬론」등도 집필하였다.
8. 제네바로의 귀환
칼빈과 파렐이 떠난 뒤,
제네바는 로마 천주교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개혁자들이 빠져나가자,
1539년 추기경 야콥 사돌레토(Jacob Sadoleto, 1477-1547)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편지를 보내
“성령께서 계속하여
교회의 칙령과 종교회의들을 인도하셨으므로
로마 천주교회에 오류가 없으니,
오류 없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선동하였다.
그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전체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하여
교회의 칙령과 교회법과 성례를 지키던가,
아니면 분열과 계략을 일삼는 인간들을 따르던가”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촉구하였다.
이에 제네바 당국은 칼빈에게
사돌레토에게 답신을 써줄 것을 부탁했고,
요청 받은 칼빈은 답신을 썼는데
이는 가장 뛰어난 종교개혁 변증문인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당시에 프랑스와 베른이 제네바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었기에
제네바는 용기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또한 추기경 사돌레토에게 칼빈이 서한을 보낸 후
사돌레토와 로마 교회가 일언반구 논박을 하지 못했다.
1540년에는 분쟁과 혼란으로 인해 네 명의 목사중 두 명이
제네바를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제네바는 칼빈을 필요로 했다.
개혁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칼빈에게
“어두움이 지난 후에 빛을 소망한다.”
라는 말이 겉봉투에 쓰여진
간절한 내용의 재 청빙 서한을 보냈다.
‘제네바 시장과 시의회는
우리의 훌륭한 형제요,
탁월한 친구인 칼빈 선생님께 편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말씀의 확장만이
당신의 바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제네바시의 대·소 의회와
총 의회(총 의회는 자신들의 이름이 여기에 쓰여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 줄 것을 매우 간절히 우리에게 부탁하였습니다.)의 이름으로
정중하고도 간절하게 당신을 초청합니다.
우리들이 당신을 절실히 요청하는 이곳에서
당신의 옛 직무를 다시 맡아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어떤 어려움이나 곤란도 느끼지 아니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면에서 당신을 예우하고자 합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의 삶이
죽음과 같이 힘든 과정이었으므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내가 하루에도 수천 번씩 죽어야 하는 그런 십자가보다는
일백 번 죽는 다른 길을 택하고 싶다.”
고 심경을 토로하면서 갈등하였다.
초청장을 받고도 결정을 하지 못한 칼빈은
파렐에게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파렐의 편지를 받은 것은 2월 말이었다.
파렐의 단호하게 강권했다.
"제네바의 돌들이 오라고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겠느냐?"
이와 같이 벼락같은 편지에 칼빈은 굴복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파렐의 경고와 권면 때문에
1541년 9월 13일 제네바로 돌아올 수 밖 에 없었다.
칼빈이 돌아오자 제네바 시의 모든 민중들은
공개적으로 그의 귀환을 환영하였고,
제네바 시의 소위원회는 연봉으로
250 플로린스(florins), 12섬의 밀, 1,000리터의 포도주를 책정하고,
칼빈의 계획대로 제네바를 개혁할 것을 약속하였다.
9. 제네바 개혁운동
스위스에 다시 돌아온 칼빈은
제네바를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깨끗한 도시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교회 헌법을 만들기를 원해,
이를 위한 위원회 구성에 시의회가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제네바 개혁을 위하여 시의회의 협조을 요청하는 칼빈
소위원회는 칼빈을 돕기 위해
6인의 위원을 임명하였고, 3주 만에 헌법 작업을 마쳤다.
위원회는 그 초안을 시의회에 제출하였는데,
소위원회와 중위원회를 거친 후,
마지막 단계로 11월 20일 총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제네바 교회 헌법’(The Ecclesiastical Ordinances of Church of Geneva)이다.
‘교회 헌법’은 지역 교회의 자율과 평등사상을 강조함으로
감독 정치에서 볼 수 있는 위계질서 사상을 배제하였고,
신약의 가르침대로 장로 정치의 골격을 유지하였다.
칼빈은 치리법원을 세워
세속 정부와는 별개로 파문권을 행사함으로써
정부가 교리 및 교회 내 치리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하였다.
33세 때의 존 칼빈의 모습을 조각한 은메달과 그의 친필
이곳에서는
도시 내에서 각종 부도덕한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치리법원은
아주 사소한 범죄까지도 검토하고 재판하였으며,
음탕한 춤, 가슴을 깊게 판 여인들의 의상, 카드놀이, 술 취하는 것 등도
심한 제재를 받았다.
제네바는 당시
악명 높은 매춘의 도시로 꼽히고 있었으므로
칼빈은 이에 대해
매서운 태도를 취하고자 보다 호된 처벌을 주장하였다.
칼빈의 주장에 의해
술집들은 일단 문을 닫고,
보다 깨끗하고 질서 있는 카페들을 다시 열어
이곳에는 심각한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참고삼아 찾아보도록 하기 위해
프랑스어판 성경을 비치하도록 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소비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다시 술집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마술, 이단, 간음, 신성모독, 난동 등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심각한 범죄들은
세속정부에 이관되었다.
어떤 시민은 자기 개를 칼빈이라고 이름지었다가
감옥에 가기도 했다.
이러한 법 집행 과정에서는
고문에 의해 자백을 얻어내는 사례도 허다하였는데,
4년 동안 58명이 처형당하고 76명이 유배당하였다.
칼빈은 법률에 대한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공공질서에 관한 부문에도 밝았기 때문에
순전히 세속적인 문제들에 관하여도
의회들과 평의원들의 자문에 응하였다.
10.개혁의 반대자들
칼빈의 제안대로
‘교회 헌법’이 시정부에 의하여 통과되었지만,
제네바 개혁에는 많은 어려움이 산재해 있었다.
다수의 시민들이 칼빈의 도덕적인 개혁에 대해
불만을 품고 대항했다.
그 대표적인 세력인 방종파(Livertines)는,
칼빈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엄격한 윤리 생활을 요구하자,
칼빈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카드놀이 제조업자였던 피에르 아뫼(Pierre Ameaux)는,
칼빈의 개혁 운동으로 유흥을 멀리하는 풍조가 일어나
막대한 재정적인 손실로 파산지경에 이르자,
1546년 1월부터 칼빈이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다고
중상 모략하였다.
칼빈을 제네바로 초청하는데 앞장섰던 아미 페린(Ami Perrin)도,
부도덕한 그의 장인과 아내가 장로 법원에서 치리받자,
칼빈의 개혁 운동에 대하여 사사건건 반대 하였다.
특히 그는 1553년 원로원 회원으로 당선되자,
장로 법원이 가졌던 출교권을
시의회로 환원시키려고 하여 칼빈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칼빈은
반삼위일체주의자였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의 도전도 받았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에서 궁정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사라고사(Saragossa)와 툴루즈(Toulouse)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이태리와 독일을 여행하면서 필립 멜랑톤과 마틴 부쳐를 만났다.
그는 개인적인 성경 연구를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을
‘삼위일체 오류론’(De Trinitatis Erroribus)
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그 후 그는 파리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1541년부터 1553년까지 비엔나의 대주교 주치의로 일하였다.
이때에 그는 칼빈과 교제하게 되었지만,
얼마 못 가서 그의 정체를 발견한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세르베투스는 1553년 익명으로 쓴
‘기독교의 재건’(Christianismi Restitutio)
에서 그의 모든 사상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부인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프랑스 리용에서 체포되어 화형 선고를 받았지만,
형 집행 전에 탈출하여 제네바로 향하였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제네바로 온다는 말을 듣고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칼빈의 적들이 많으므로
그들과 합하면 칼빈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제네바로 왔다.
그러나 제네바 시 당국은 그가 도착하자마나 체포하였고,
이단과 신성모독 죄로 정죄하였다.
당시의 법 형평상,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사상은
성도의 영혼을 죽이는 염병으로 간주되어
화형에 해당되는 벌을 받곤 하였다.
세르베투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제네바 시가 세르베투스에게 화형 선고를 내리자,
칼빈은 좀 더 인간적인 방법을 취할 것을
시의회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적대적이던 시의회는
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칼빈은 2개월 13일간 세르베투스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온갖 방법으로 그의 개심과 수정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1553년 10월 27일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다고 비난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르베투스 사건 이후,
칼빈과 제네바 시 당국은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1515-1563)의 도전을 받았다.
그는 사보이 출신으로
154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을 만나 개종하였으나,
인문주의적인 사상 때문에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1544년 아가서를 성경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이단적인 사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자,
바젤로 가서 신학을 가르치던 중
‘이단에 관하여-그들은 박해받아야 하며, 어떻게 취급되어야만 하는가?’
라는 글을 써서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대해 비판하면서
종교적인 관용을 주장하였다.
카스텔리오는
삼위일체론, 예정론, 자유의지론, 신론, 천사론 그리고 종말론 등을
구원과 관계없는 교리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로
추방하거나 구속, 투옥, 화형, 교수형을 선언하는 것은
교권의 횡포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교리보다 중요한 것이 도덕적인 생활이므로,
교회가 교리적인 문제로 성도를 박해하는 것은
위선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1551년 칼빈은
로마 천주교회에서 개종하여
제네바 근교에서 의원을 개업한 볼섹(Hieronymus Bolec,?~1585)의 중상모략을 받았다.
그는 원래 파리에 소재한 카멜파(Carmelite) 수도사였으나,
이태리에서 의학 수업을 받은 후
프랑스의 샤블레(Chablais)에서 생활하면서 칼빈과 교제하였다.
그는 1551년 제네바에 도착하여,
칼빈의 예정 교리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든다고 주장하며
칼빈을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네바 당국은 그를 중상모략 죄로 체포하고,
바젤, 취리히, 베른의 교회들과 함께 정죄하였고,
그 해 12월 제네바에서 영구 추방하였다.
그는 샤블레에서 칼빈에 대한 인신공격을 계속하면서
예정 교리를 비판하던 중,
1562년의 오를레앙 교회회의와 1563년의 리용 교회 회의에서
정죄를 받은 후,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칼빈의 반대자들은
신학적으로 그릇된 사상을 주장하며
정치적인 세력으로 대항할 뿐만 아니라,
야비한 방법을 동원하여 칼빈을 괴롭혔다.
그가 자주 다니는 골목에 사나운 개를 풀어놓는다던가,
예배 중에 교회를 향하여 총을 쏜다던가,
그가 설교할 때 크게 기침 소리를 내어 설교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네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곳으로 만들어 나아갔다.
11.강해설교자 칼빈
성 피에르(St. Pierre) 교회당과 칼빈이 설교하던 강단(아래 사진 우측)
칼빈은 강해설교를 통해 종교개혁의 뜻을 펼쳐갔다.
그의 설교들은 종교개혁시대의 모든 나라에 알려졌고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어 목사들에게 읽혀졌다.
심지어 목회자가 없는 교회에서도 그의 설교가 읽혀졌다.
그러므로 강해설교자로서의 칼빈이 분명하게 평가될 때
비로소 종교개혁자로서의 전체의 면모가 밝혀지리라고 본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중요성을
그의 저서들을 통해 수없이 주장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인류를 돋보이게 하는 뛰어난 수많은 은사들 가운데서
그가 사람의 입술과 혀를 성별하셔서
그를 섬기도록 의도하시고
그의 음성이 그들에게 들리도록 하신 것은 특별한 특권이다.”
(기독교강요 4권 1장 5절)
라고 했다.
설교는 주의 종들에게 주신 특권이라는 것이다.
또 칼빈은 말하기를
“교회가 진리를 지키는 것은
설교를 통하여 진리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모든 지혜의 원천이며
성경으로부터 목사들은
자신들의 양떼 앞에 세워 둔 모든 것을 이끌어 내야 한다."
(목회서신 중에서)고 했다.
설교학자들은 대게 칼빈을 가리켜서
“말씀의 종으로서의 칼빈(Calvin als Bedinaar Des Woords)"
이라고 한다.
칼빈의 설교들은
현재까지 약 2000여편이 남아 있다.
칼빈은 1년에 280여회의 설교를 했고 180여회의 신학강의를 담당했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설교자로서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칼빈의 조직적이고 냉철한 의지 그리고 천재적인 암기력,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고자 한 그의 열정은
그를 강해설교자로 세웠을 뿐 아니라
바로 그가 외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 곧 강해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칼빈의 설교에 수사학적인 기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의 설교는
간단 명료하고 단순하고 직접적이었다.
칼빈의 설교에는 지적인 명석함과 논리적 강점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진지한 확신은
조용한 말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더해갔다.
칼빈의 설교속도는 느렸기에
필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없었다.
그의 설교와 강의들은 언제나 청중을 사로잡았다.
칼빈은 오랜 시간동안 연구에 몰두했다.
칼빈의 주석책도 따지고 보면
강해설교와 신학강의의 열매라고 볼 수 있고,
그의 설교는 주석을 확장시키고 적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의 주석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의 어조는 항상 분명하고 활기차고 예리했다.
그는 미사여구를 꾸미지 않았지만
설교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물론 칼빈은
루터처럼 당당한 풍체나 풍부하고 낭낭한 음성, 유창한 웅변력을 지니지 못했지만
어떤 육체적인 힘이나 재능이 대신해 줄 필요가 없을 만큼
강력한 의지와 지속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의 설교에서는
모든 개혁자들의 설교방식인 해석설교 또는 강해설교가 강조되었다.
설교의 대부분은 각 구절을 강해하는 방법이었는데
그 속에는 사상의 흐름이 있었고
논리적 연속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단순한 주석이 아니었다.
신속한 지각, 확실한 감각, 능력 있는 표현들이 어우러져서
성경의 깊은 뜻이 드러났으며
기교적인 면이 없이도 깊은 인상을 청중들에게 심어주었다.
칼빈은 강해설교가인 동시에 주석설교가였다.
그는 노트를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칼빈의 설교준비는 종교개혁 동지들의 책을 읽는 일이었다.
그는 초대교부들의 작품, 스콜라 철학자들의 작품,
심지어 학문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주해서들도
깊이 있게 탐독했다.
또한 그의 탁월한 성경원어 실력과 라틴어 지식, 그리고 놀라운 성경지식이
성경본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강해설교는
간단한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풍성한 성경지식과 원어지식,
그리고 성경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과
청중들에게 올바르게 적용하고자 애쓴 그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칼빈이 당시의 설교자들에게 권고했던 설교준비 방법은
다음과 같다.
즉 설교준비는 지나치게 체계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설교는 미리 작성된 설교문을 준비해서 원고를 암송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설교는 결코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항상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란 성령님의 영감이 계속되는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는 연속적인 문장을 연구할 때
각 절씩, 혹은 각 구절씩 설명과 주를 달면서 본문을 대하곤 했다.
늘 원문대로 설교하면서도
성경 각 권과 각 장의 중요성을 철저히 고려했다.
즉 강해설교의 원리는
언제든지 성경은 성경으로 강해되고 해설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해설교자로서의 칼빈은
실제로 설교를 전개할 때
본문자체의 구조 외에는 특별한 구조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는
처음부터 설교자의 어떤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는 제목설교와는 크게 달랐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은
최대의 강해설교자요 순수한 강해설교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칼빈 강해설교의 특징들을 살피는 것은
보다 성경적인 설교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칼빈의 설교는 말 그대로 강해설교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두드러진 교리를 붙들었으며
그런 신전의식(신전의식)은
그의 목회생활 전반에 걸쳐,
특히 설교에서 항상 나타났다.
칼빈은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으로 설교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첫 장에 나타난
신지식(신지식)에 대한 내용은
하나의 명제(명제)로서가 아니라 감동적이며 경험적인 것이다.
칼빈의 신학서에는
인간을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 세우려는 노력이
어디에든지 나타나 있다.
물론 그러한 입장은 칼빈의 강해설교 가운데도
너무나 명백히 나타나 있다.
칼빈이 어떤 설교를 하든지
5분 정도 지나면 이러한 사상이 보여진다고 했다.
그는 성경본문 해석에서
인간이 어느 곳에 있든지 말씀을 통하여
그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칼빈의 설교를 듣는 사람은 누구든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확신 없이는
교회당을 떠나지 않았다.
칼빈의 강해설교에서 특기할 만한 것을
세 가지 정도로 지적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장소는
바로 성경의 말씀이 설교되어지는 곳임을 분명히 가르쳤다.
이런 강조는 그의 강해설교에서 계속 설명되고 발전되고 논증되었다.
둘째로, 칼빈은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된 수사학적(Rhetorical) 도구를 채용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수사학적 방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 증거의 효율성을 위해서 적절히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특히 칼빈은 설교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실제로 설교(Homily)의 본질은 말이 아니다.
그는 성경의 뜻을 밝히 깨닫고 적용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도록 한다는 개념을 취했다.
셋째로, 칼빈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책임감을 지니고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의 편에 서서
지속적인 깨달음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은
칼빈이 교리를 취급하는 성경구절을 설명할 때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대한 특수한 문제를 해결하는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나
변함없이 나타났다.
그는 어떤 모습으로든지 인간이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생동감 있게 설교하였다.
1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제네바의 개혁을 위한
14년 간(1541-1555)의 계속된 투쟁은 칼빈의 승리였다.
1555년 2월 선거에서
소 의회의 행정관 4명 모두 칼빈파에서 선출되었으며
200명의 의회도 절대다수가 친 칼빈파에서 선출되었다.
자유파에 속하여 칼빈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페랑과 버틀러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도
세르베투스의 죽음으로 제네바를 떠났다.
장로회는 정부의 간섭 없이
출교시킬 수 있는 영구적인 권한을 승인 받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동지들과 함께한 칼빈(좌로부터, 파렐, 베자, 비레, 칼빈)
칼빈이 제네바 개혁 사역의 목표는
(1)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교회 사역의 질서와 규율의 고수
(2) 제네바 시에 좋은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것
(3) 다른 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
민족과 국경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1559년 제네바 시는
칼빈에게 시민권을 줌으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학술원 설립 허가를 받았다.
그 해 6월 5일에 학술원이 공식으로 개원되었으며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1519-1605)가 원장으로 피선되었다.
5명의 교수진과 함께 칼빈은 신학을 가르쳤다.
이제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한 그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처음에는 162명으로 개원했으나
5년 만에 1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칼빈의 신학 강의를 들으러 몰려왔다.
이 제네바 아카데미는 오늘날 제네바 대학의 전신이다.
칼빈 당시의 ‘제네바 아카데미'
칼빈의 개혁 운동은
그의 생존시에 이미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그노(Hugnote) 들은
1559년 파리에서 프랑스 최초의 위그노 총회를 열고
‘프랑스 갈리칸 신조’라는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칼빈주의자 브라이(Bray)에 의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그의 제자 존 낙스등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영국 교회는 칼빈주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했고
곧 청교도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지역은 칼빈주의 일색으로 변하여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이 칼빈주의를 따르게 되었다.
또 여러 곳에서 폭정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영향력과 그 지배 아래서
안전한 거처를 찾아 제네바로 이주하였다.
영국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온 영국의 개혁자들은
1560년 ‘제네바 성경’이란 영어 성경을 출판했다.
말년의 존 칼빈
칼빈은 죽을 때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일하였다.
칼빈은 중간키에 창백한 안색이었으며,
검은머리와 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특히 그의 광채 나는 눈동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의복은 소박하였으며 음식도 약간만 먹었고 잠도 적게 자는 편이었다.
굉장히 재치가 있었고 관찰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놀라운 천부적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명랑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익살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웃음을 자아내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보통 그의 태도는 엄숙하였으며,
어조는 단순하고 직접적이었고, 심사숙고한 후 심각하게 말을 꺼내곤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소위원회에서는,
하나님은 칼빈에게
‘당당한 위엄을 갖춘 성품’을 부여하셨다고 회상하였다.
몸이 약했던 그는 13가지나 되는 병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움직이는 병동’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였다.
여러 해 동안의 과로와 피곤과 교회를 위한 근심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장시간 집무를 계속하였다.
부디 휴식을 취하라고 권하는 친구들에게 그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걸 보시면 어떻게 하지?”
라고 답하였다.
너무나도 몸이 쇠약해져서
정상적인 업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자기가 미처 처리하지 못하는 서기의 급료를 받기를 거부하였다.
그의 수입은 상당한 편이었으나
주로 구제사업을 위해 이것을 바쳤기 때문에
재산은 불과 얼마 되지 아니했다.
병이 깊어졌을 때에는
들것에 실려 교회당에 가서 강단에 앉아서 설교하곤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에 진력을 다하던 칼빈은
1564년 2월 6일에 마지막 설교를 하고 병석에 누었다.
5월 2일에는 최후의 편지를 뇌샤텔에 있는 파렐에게 보내어
빨리 제네바에 와서 함께 마지막 날들을 지내자고 부탁하였다.
칼빈은 임종시까지도 ‘여호수아 주석’을 집필하던 가운데 있었는데,
결국 이를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격이 되었다.
데오도르 베자는 칼빈의 마지막 날들을 묘사하여
“겨우 영혼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고 하였다.
칼빈의 임종
칼빈은 1564년 5월 27일 55세를 일기로
베자의 품에 안기어 임종하였다.
다음날 사람들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플랭-팔리에(Plain-Palais)의 일반 묘지에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매장하였다.
칼빈의 무덤
초라한 묘지석은 후대에 갖다 놓은 것으로,
칼빈이 묻힌 곳을 표시하기 위해
존 칼빈의 약자 "J. C." 라고만 적어놓았다.
칼빈은 진정 위대한 용기와 완전한 헌신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베자는 기록하였다.
“나는 칼빈의 생활을 16년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 결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죽음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첨가할 수도, 감할 수도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완강한 고집, 성급함, 갑자기 폭발하는 분노,
충동성과 너그러움과 개방성의 부족 등
모든 인간적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기독교권의 위기에 나타난 영적 거인이었다.”
19세기의 온건한 회의론자 에른스트 르낭(Ernst Renan)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칼빈은 당대 제일의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
만약 칼빈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사실과 다르거나 혹은 너무도 막연한 판결이라 판단하였을 것이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1536년에 시작된 칼빈의 종교개혁은
한때 실패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좌절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개혁 운동을 전개함으로
1555년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그 틀이 잡히게 되었다.
성경이 가정, 교회와 국가 영역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고,
인간적인 권위는 사라지고
성령의 지도에 따라 교회가 운영되었다.
이렇게 개혁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낙스는,
“제네바는 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였다.
나는 다른 곳에서 전례를 본 적이 없다.”
고 기술하였고,
영국의 개혁자 존 베일은
“제네바는 내게 놀라운 비밀로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고,
가난 가운데서도 살 수 있는 성소와 같았다.”
고 증언했다.
칼빈 당시의 제네바
인구 1만 3천에서 많을 때는 1만 6천으로 당시로서는 큰 도시였다.
최고의 종교개혁자.hwp
출처 : 청교도를 사랑하는 모임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