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중국 조선족 선교
한국교회의 중국 조선족 선교 [임희모 교수]
1)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종교 정책
(1)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조선족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의 하나로서, 중국의 민족정책에 따라 정치적으로 평등한 지위와 권리를 보장받고 국가의 통일을 지키며 민족들 사이에 단결과 합작 및 공동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마르크스주의의 민족이론을 토대로 중국 혁명 과정에서 습득된 것이다. 소수민족 정책은 1928년 민족 자결을 강조함으로시작되었는데 그 후 여러 강령을 통하여, 그리고 1984년에는 민족구역자치제도가 헌법과 민족구역자치 법을 통하여 제도적으로 확립됨으로서 발전되었다.
민족구역자치 원칙은 민족구역자치지방의 자치기관 (자치구, 자치주, 자치 현의 인민대표대회와 인민정부)을 구성하고 자치기관의 민족 화를 실시하는 것이다.
첫째 간부의 민족 화를 실현하고,
둘째 본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셋째 민족의 전통과 풍속과 문화를 체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 화를 통하여 소수민족은 민족경제발전정책과 민족종교정책 등 자치권을 실시한다.
중국 조선족은 역사적으로 동북지구를 중심으로 땅을 개척 개발하고, 중국공산당과 공동으로 반봉건 반제 운동을 하였고, 국 공 내전 시에 공산당의 해방전쟁을 도왔다. 이러한 연유로 조선족은 집거지에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만들고 자치를 실시하고 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 실시이후에 조선족도 대외개방과 민간외교를 펼치고 있다. 특히 재외 조선인 교포들을 중심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교류와 왕래를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80년대 후반부터 재미교포들이 조선족을 왕래하면서 조선족 선교를 시작하였고, 한국교회는 1990년에 들어 조선족을 상대로 선교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족 일부 지도자들은 이러한 교류와 왕래를 통하여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 "침투"가 일어나고 있다고 경계를 강조한다. 침투란 중국의민족적 단결 곧 국가의 통일을 허물 수 있거나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활동을 말한다. 조선족과의 교류 관계에서 두 가지 관점이 강조된다.
첫째, "나라와 나라간의 관계를 민족 간의 관계와 구별"하는 것인데, 같은 조선민족일지라도 조선족은 중국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무산계급의 조국 관과 자산계급의 조국 관을 구별"을 강조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조선인과 사회주의하의 중국 조선족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적 감정을 앞세워, 사회주의 하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으로서) 조선족에게 침투해 오는 사상적 문화적 종교적 교류와 왕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중국의 종교 정책과 기독교
중국은 전통적으로 국가가 종교를 지배하는 정교관계를 유지하였고 1949년 사회주의화 이후에도 이 관계는 변함이 없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종교관을 가지고 종교를 기본적으로 부정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종교를 행정적으로 억압하여 없애려고 하였고, 한편으로 사회주의의 건설로 인하여 자연히 소멸되기를 기대하였다. 이러한 기본 입장에도 불구하고 당의 통일전선 사업의 일환으로 종교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하나의 자원으로 보았다.
이러한 두 가지의 모순적 태도는 중국 종교관계 종사자들의 종교에 대한 성격 규정에 함축되어 있다. 이들은 종교란 다섯 가지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즉 장기성, 군중성, 민족성, 국제성, 복잡성이다. 이러한 성격은 마르크스주의의 종교관과,종교의 새로운 상황과 문제를 고려하여 정리된 것으로, 이를 정치적, 군중적, 정책적 관점에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적절하게 처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공민은 종교 선택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또한 믿지 않을 자유도 있다. 1982년 이후 중국 정부에 허가등록을 거친 종교활동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은 법률적 보호를 받는다. 허가된 활동장소 밖에서 진행되는 활동은 "비정상"인 것으로 "불법"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종교입법과 종교활동에 대하여 불확실성이 있다. 즉 이 입법이 종교신앙의 자유를 더욱 신장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종교에 대한 관리를 정책화나 제도화나 법률화하는데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입법으로 인하여 종교활동이 사회에 기여하는 점 (학교, 병원, 노인센타, 사회봉사 기관 건립 등)에 있어서 그 수가 많아질까 아니면 적어질까? 이러한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중국 내에 기독교 세력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은 점점 커질 것이고, 이에 따라 종교정책은 때로는 강성을 때로는 유연성을 드러내며, 종교의 사회주의에의 적응과 사회주의의 종교에의 적응 (적응-부적응-재적응)이 상호간에 일어날 것이다.
(3)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에 대한 기독교 선교
예샤오원에 의하면, 종교는 소수민족에 대하여 이중작용을 한다.37) 종교는 타민족이 자기민족을 압박할 때 저항하여 자기민족을 단결케 하는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또 한편 종교는 민족문화 발전과 민족 각성과 계급 각성을 장애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을 이용하여 국제적 적대세력이 서장 티"各 경우 달라이라마 종교와 연계하여 민족분열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소수민족과 종교에 대한 정책은 복합적인 절차를 요구한다. 소수민족 정책은 통일전선정책 하에서 중앙의 통일전선사업부, 국가소수민족위원회, 국무원종교사무국이 공동으로 집행하고 있다. 종교 문제와 소수민족 문제를 동위선상에 놓고 이들을 긴밀하게 연계시켜 해결하려는 접근방법이다.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의 경우, 종교와 민족이 굳게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조선족은 민족분열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4곳 (서장의 달라이라마, 신강의 이슬람주의, 내몽고, 조선족)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족은 중국 공안당국으로부터 예의 주시를 받고 있는데, 특히 기독교 활동이 관리와 감시를 받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관리 하에서도 조선족에 대한 선교는 두 가지 면에서 가능성이 열려 있다.
첫째, 개혁개방 이후 자치권을 갖는 소수민족은 대외 개방과 교류와 왕래를 통하여 경제개발을 시도하고 사회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서 조선족은 재외조선인들에게 개방하고 교류함으로서 자치권을 활용하게 되었다.이러한 틈새를 비집고 재미교포 기독교인들과 한국 교회가 선교를 통한 경제적 지원과 사회봉사 적 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둘째, 소수민족 정책이 민족 간부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한국 교회는 민족간부들과 "관계 망"을 열고 관계 적 선교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묵인 하에 선교 활동이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민족이 지닌 종교적 심성을 조선족이 공유하고 있음에 따라 이러한 심성을 활용하여 기독교 선교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민족 정책과 종교정책을 감안할 때 한국 교회는 국적과 민족의 갈등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중국 공안당국은 한인기독교회가 "동북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복음으로 삼만리강산을 통일하자" 등의 큰소리를 치며 "침투활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38) 이것은 일면 종교압박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통전정책과 소수민족정책을 이해할 때 한국교회가 혹은 한인기독교회가 신중하게 선교 적 접근을 했어야 했다. 중국의 조선족에 대한 선교는 이러한 소수민족정책과 종교정책을 감안하여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에 대한 선교 방안이 지혜롭게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2) 중국조선족 교회의 형성과 전개
(1) 교회개척과 복음전도
중국조선족에 대한 선교 역사는 18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주 목단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 관심을 가짐으로서 시작되었다. 맥킨타이어 (John MacIntyre)가 이응찬 등 4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884년 즙안현에 조선인교회가 세워졌다.
만주조선인 교회는 복음전도를 실시하였다. 조선장로교회는 만주에 남만노회, 동만노회, 북만노회, 봉천 (심양)노회, 영구노회, 안동 (단동)노회 등을 조직하였는데, 1940년 교인 수는 4만 명이 헤아려졌다. 이외에 감리교회, 성결교회, 안식일교회, 동아기독교 등이 존재하였고, 후에 감리교에서 조선기독교가 파생되었다. 이들은 복음을 이민해온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개척을 하였다. 교파간 특히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간의 전도구역쟁탈전이 치열하여 1929년과 1934년 협상이 시도되었지만 결렬되었다.이후 교파간의 내분과 모순으로 인하여 항일을 둘러싸고 친일파와 반일파로 나뉘어졌다. 위만 시기 이후의 교회의 진행은 조선내의 교회의 진행과 같은 궤를 달렸다. 일제의 종교 정책의 성공, 예컨대, 종교에 대한 통제와 이용, 제한과 탄압 등이 성공한 것이었다.
(2) 민족주의운동을 하는 교회
한편, 만주조선인 교회는 민족운동, 항일무장저항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제 합병 당하자, 독립인사들이 만주로 몰려들어 만주 조선인교회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띄고 발전하였다. 먼저 만주조선인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장로교인리상설은 서전의숙을 세웠고, 그 이후 기독교 학교가 다수 세워졌는데 민족교육이 실시되었다. 특기할 것은, 장로교인 양기탁의 학교운동과 무장독립운동이다. 양기탁은 1910년 신흥강습소를 세웠는데, 후에신흥중학교로, 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발전되었는데, 이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서로군정서>가 창립되어 본격적인 항일무장대오를 갖추었다. 1919년 장로회국민회는 대한독립군을 조직하여 홍범도 장군의 훈련 지도를 받아, 1920년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무장항일투쟁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 <경신년대토벌>을 통하여 궤멸하고 말았다.
또한, 만주조선인 장로교회 지도층 일부가 1925년 전후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교회의 지도층 내부가 나뉘어졌다.41) 일부 마르크스 레닌주의들은 반종교 운동과 반일투쟁을 벌여 혁명 운동에 나섰다. 1926년 이후 기독교는 일제의 종교탄압과 반종교 운동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심하게 겪었다. 만주 조선인 교회의 지도자들이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일제가 이들에 대한 토벌작전을 전개하자, 이들이 중국관내로 이동함으로서 교회의 지도력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조선인교회 안에 친일파가 생기고 득세하여 교회는 친일적 교회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1930년 이후 만주에서 모택동의 공산주의운동이 득세함으로서 조선인 사회의 지도력과 조선인교회의 지도력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이끌어졌다. 그리고 1945년 일제의 패망이후 만주 조선인 기독교인들, 이들의 대부분이 민족주의자들이었는데, 상당수가 남한으로 귀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 1948년 이후 연변지역 교회들의 활동
1948년 4월 동북인민정부가 시정강령을 통하여 종교신앙자유를 천명한 후43) 만주 조선 기독교인들은 연길, 용정, 도문, 화룡 등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2년 9월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창립될 때 기독교인 리영 장로가 인민대표로 당선되었다. 1953년에는 연길중앙교회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을 방문하여 리영 장로 남명섭 장로가 성경학습회와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동년 9월에 연변 10여곳의 조선족교회대표들이 연길시에서 모임을 갖고 연변조선족기독교장로회조직련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리영 장로를 선출하였다.
1954년 연변에는 10개의 조선족 교회에 670여명의 교인이 있었다. 이듬해4월에 김응필 등 3명을 장로로 선출하여 안수하였다. 1957년에는 연변 기독교대표자 회의를 열고 중국기독교연변조선족자치주교구회를 창립하고 리영과 리보국을 목사로 선출하였고, 리보국 목사는 46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958년 9월, 연변기독교계는 대표자 회의를 열어 연변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애국공약을 제정하였는데, 리영 목사가 애국회 주임으로, 김보은 장로와 장영희 전도사가 부주임으로, 김원배 집사가 비서로선출되었다. 1959년 3월 현재, 연변기독교는 목사 2명, 장로 9명, 교인 860여명이 있었다. 문화혁명기간과 그 이후 기독교 활동은 중지되었다.
1948년 이후 연변 조선족 기독교는 중국 기독교의 정책을 따라 조직 (삼자애국회)를 만들고,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하였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인으로서 국가 공무원이 되어 나라 일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기독자 대표들이 목사와 장로들을 선출하여 안수하고 교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가능하면 성경공부를 시키고 기도회를 여는 등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3) 개혁개방 이후 한국 교회의 중국조선족 선교
(1) 1979년 이후 중국조선족 교회의 재건
1979년에 중국 종교국이 업무를 개시하고 교회가 재건되기 시작하였다.중국조선족 교회들도 재건되기 시작하였는데, 심양서탑교회가 1979년 9월에 최초로 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재건 운동은 서탑교회를 중심으로 인근 요녕성 교회들로부터 시작되어, 길림성과 연변자치주에 있는 교회로 확산된 것 같다. 흑룡강성의 교회들은 재건이 늦어졌는데, 교회의 지도력이 해방 후 대거 귀국하여 지도력 공백이 생긴 탓이다. 한편, 중국조선족 가정교회들도 활성화되었는데, 이중에는 개혁개방 이후 자생적으로 생긴 것도 있다. 이들 자생적 가정교회에 출석하는 조선족들은 신앙년수가 아주 짧은 것이 특징이다.
연변지역의 교회재건을 살펴보면,1980년 연길시기독교회를 시작으로 용정 도문 화룡 등에서 활동이 재개되었다. 기독교와 천주교인 20여명이 시와 현의 인민대표 혹은 정치협상회의대표로 당선되어 일을 하였다. 1983년 7월 연변 기독교는 제2기 대표대회를 열고, 새로운 삼자애국조직과 교무기구를 조직하였다 (연변기독교3자애국운동위원회: 주임 김원배, 연변기독교협회: 회장 김원배). 그해 김성하 목사를 초빙하여 교인들의 신앙생활 문제를 해결하고, 의무전도원학습반을 만들어 의무전도원을 훈련하였다. 1985년 연변에는 교회 8개, 예배처소 9개, 목사 1명, 교인 1,270명이 있었다. 1986년에 기독교는 제3기 대표대회를 열고, 3자애국운동위원회 (주임: 김원배)와 기독교협회 (회장: 김성하)의 임원을 뽑았다. 연변 교회는 경로원을 위문하고 재해지구를 지원하는 등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성을 보였고, 경제건설에 이바지하였다.
요약하면, 연변기독교는 중국 기독교 정책에 따라 기독교 기관 (삼자애국회와 기독교협회)을 만들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인민대표로 선출되어 국가에 봉사하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더 나아가 연변기독교는 전도요원을 양성하여 전도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사회봉사에도 선교 적 관심을 보여 지역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2) 한국교회의 조선족 선교 현황
한국교회의 조선족 선교는 김응삼 목사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968년예장 (통합) 교회의 파송을 받아 대만에서 사역하고, 1979년에 홍콩으로 옮겨 중국선교에 헌신하다가 1994년에 은퇴하였다. 그는 조선족 선교에 있어서 선구자적 노력을 하였고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인병국에 의하면, 그는 4가지 업적을 남겼다.
첫째 중국에 거주하는 그의 친척을 통하여 1979년부터 연락망을 구축하여 조선족 기독교인들과 접촉하여 조선족교회에 도움을 주었다.
둘째, 해외교포선교사들 약 20명에게 중국에 들어가 선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셋째, 서신을 통하여 조선족교회를 지도하였는데, 1979년부터 1981년까지 227통의 편지를 썼고, 편지를 통하여 신앙 지도를 한 조선족교회만도 80여개가 된다.
넷째, 조선족 교회에 선교비와 성경과 찬송가를 보내어 조선족 교회 성장에 기여하였다.
한국교회의 조선족 선교는 1990년 이후에 시작되었다. 한국교회 목사들이 직접 방문하여 조선족 교회 지도자들을 단기간 훈련시키는 방법으로 시작하였고, 나중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한국교회의 조선족 선교는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진행되었다. 몇 년 전 통계이긴 하지만, 조선족 200만 명 중 12만 명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김진선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7가지 모습으로 선교가 진행되고 있다.
i) 교회의 설립 (전통적 선교방법),
ii) 사회사업을 통한 선교,
iii)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
iv) 순회 (비거주) 선교,
v) 대규모 선교집회,
vi) 신학교 설립,
vii) 삼자회와의 교류 등이다.
여기에 나열된 선교 모습은 거의 대부분이 실현가능성이 없거나 비합법적 선교 방법이다. 특히 대규모 선교집회와 신학교 설립 선교는 중국 사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함으로서 생긴 난센스이다. 대규모 집회를 시작하려다가 쫓겨나고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신학교 설립을 한다고 광고를 통해 헌금을 걷었다면 이것은 완전한 사기 극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선교 모습은 중국 선교현지에서 수많은 문제를 만들고 중국조선족 교회에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고 있다.
이벤허에 의하면 중국 조선족에 대한 선교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진행되었다.
i) 현지 방문을 통한 교회 지도자 단기 신학훈련 실시,
ii) 선교지 답사 형식의 사역, iii) 교회개척 사역,
iv) 전문 직업인으로서 선교사역,
v) 제자훈련,
vi) 조선족을 한국에 초청하여 신학교육을 시킴,
vii) 학교 설립,
viii) 극동, 아세아 방송 선교,
ix) 성경과 신앙서적을 보급,
x)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3) 한국교회의 조선족 선교의 문제
인병국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조선족에 대한 선교는 실패이다. 그는 그 이유로 10가지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즉,
i) 조선족과 조선족교회에 대한 이해 부족,
ii) 조선족 교회가 처한 상황과 형편을 이해하지 못함,
iii) 선교동기가 감상적이고 식민주의적임,
iv) 큰 교단과 교회가 삼자교회와만 교류,
v) 조선족 교회에 대한 선교적 진단과 접근이 없다 (목회적 접근만 있다),
vi) 조선족 교회의 육성 전략이 없다.
vii) 선교역량이 없는 선교사가 파송됨,
viii) 선교 비전문가가 선교를 주도함,
ix) 현지 브로커와 국내 중국 브로커에게 오도되고 있음,
x) 선교사와 선교단체 및 후원교회간에 협력이 안됨으로서 정보부재, 불필요한 중복과 경쟁, 선교자원의 낭비와 부작용이 계속되고 있다.
김진선은 선교의 문제점으로
i) 잘못된 동기,
ii) 선교정책의 문제,
iii) 교단과 목사 선교사 위주의 선교,
iv) 전문인 선교, 평신도 선교사에 대한 인식 부재,
v) 실적위주, 교회건축 위주의 선교,
vi) 파송 선교사의 선발, 훈련, 자질과 영적 관리,
vii) 조선족에 치우친 선교의 방향 등을 열거하였다.
김진선의 이러한 선교 문제점 지적은 세 가지 면에서 그 한계를 갖는다.
첫째, 그는 선교의 개념을 매우 협소한 틀 속에서 언급하고 있다. 복음 전도를 선교와 동등하게 보는 관점이다.
둘째, 그는 선교사 파송만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i) 잘못된 동기" 로 부터 "vii)조선족에 치우친 선교 방향" 까지 모든 항목이 선교사 자질과 훈련과 파송에 대한 비판적 지적이다.
셋째, 김진선은 상황이나 문화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는 오로지 복음전도를 일방 통행적으로 수행할 때 일어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김진선의 지적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사회주의하의 중국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하의 통전적 선교의 틀 속에서 수행되어야 하고, 또한 복음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문화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하여 최소한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선교를 수행해야 한다.
인병국의 진단은 김진선보다는 폭넓은 안목을 가지고 있지만 그 역시 한계를 갖는다.
첫째, 식민주의적 선교 동기를 언급함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선교관도 선교사가 지배적이고 조선족 교회가 종속적인 위치를 갖는 것이다. 언제나 선교사는 가르치고 육성하고 훈련시켜야 하는 존재이고 조선족 교회는 배워야 하고 성숙되어야 하고 지배받아야 하는 입장을 말하는 선교를 말하고 있다.
둘째, 인병국은 문화로서 그리고 상황으로서 중국사회주의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고 있다. 또한 그는 조선족의 역사적 경험과 조선족의 사회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조선족과 그 교회가 실존적으로 관계를 갖는 중국 사회주의를 이해하지 않고는 조선족에 대한 선교는 명백한 한계를 갖는 것이다.
인병국 역시 김진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아닌, 교회 중심 혹은 선교사 중심의 선교관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 하에서 선교사 중심의 선교관은 사회주의 당국으로부터 언제나 갈등과 박해를 불러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