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끝자락에서 만난 국경도시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러시아와 국경이 맞닿은 내몽고자치구의 만주리(滿洲里)는 주말이면 중국인보다 자동차를 끌고 국경을 넘어온 러시아인들로 북적거린다. 카자르스탄과 국경을 마주한 신장의 국경도시도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물건을 대량 구매해 가는 보따리상에서부터 달랑 작은 여행용 가방 하나 끌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국경을 넘어야 하는 긴장감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운남성 남단 시쌍반나의 나무야 게스트 하우스는 육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려는 한국인들로 붐비는 곳이다. 이곳에서 한국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서로가 가진 여행 정보를 교환하며, 앞으로 만날 미지의 세계에 대해 아름다운 꿈을 꾼다. 여권과 비자만 있다면, 비행기와 배를 타지 않고도 중국의 국경도시를 통해 얼마든지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할 수 있다.
분단의 현실은 건널 수 없는 다리를 만들어 내고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우리의 한반도. 그나마 대륙으로 향하는 길목은 그 어떤 견고한 연장으로도 허물 수 없을 이념의 장벽 휴전선이 완전히 가로막고 있다.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 중국의 변경도시에서 벌어지는 자유로운 왕래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건널 수 없는 다리를 만나기 전까지.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도문(圖們)의 다리
백두산 관광객들이 거쳐가는 필수코스 도문. 여름이면 어김없이 우르르 몰려드는 한국인들로 잠시 생기가 감도는 곳이다. 이미 인파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오후에 바라본 두만강 다리는 고즈넉하기만 하다.
국경의 경계선 위로 성큼 올라서 본다. 걸어서도 충분히 건널 수 있는 다리는 중국측을 빨간색, 북한측을 파란색 페인트로 국경이라고 표시해 놓았을 뿐이다. 빨간색 경계선 끝머리에서 북한초소의 모습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속력을 다해 힘껏 질주한다면 10초 안에 닿을 거리에 북한이 있다.
북경 초소에서 트럭 한 대가 국경을 넘어올 채비를 한다. 북한 표지판을 단 트럭이 다가오는 순간 내 몸은 빳빳하게 굳어져버린다. 트럭이 날 해칠 것도 아닌데, 트럭은 이미 중국으로 들어섰는데, 나는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로 다리 위에 주저앉아 한동안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억 속의 단상 하나 – 유년시절의 반공교육
초등학교시절, 너른 교정의 중심에는 두 개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무장공비에게 무참히 죽어가면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용감히 외쳤다는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 그 소년은 정말 공산당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을까?
매달 15일이면 어김없이 실시되는 민방위 훈련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실소를 자아낸다. 교실에 달린 커튼은 모조리 쳐서 어두컴컴하게 만들고, 걸상을 책상 위에 올린 다음 30분을 꼼짝 않고 책상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반공교육이 모든 교육의 우선이던 시절이었다.
단지 북한에 적을 둔 차량 한 대가 지나간다고 이렇게 얼어버리다니. 반공이데올로기는 아직도 나의 자유로운 사고조차 가로막고 있다.
단동(丹東)과 신의주(新義州)를 연결하는 다리
단동에 도착한 첫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다음날, 비가 걷히고 희뿌연 안개 속에서 바라본 도시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그렇게 느껴진 것은 단동의 참모습이 아니라, 잠시 후 만날 평안북도 신의주를 먼저 마음속에 그려보았던 나만의 생각일 게다.
신의주와 마주한 단동의 압록강 공원에 싱그러운 생기가 가득하다. 아침 일찍 운동에 나선 중국인들이 단체로 부채춤을 추기도 하고, 절도 있는 동작에 맞춰 태극권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압록강 건너 어슴푸레 보이는 신의주의 아침은 적막했다. 안개에 시야가 좁아져서 인지 인적은 보이지 않고, 한 줄로 길게 늘어선 공장의 몇몇 굴뚝에서 뿜어내는 짙은 회색 연기가 자욱하다.
압록강 공원에 앉아 하염없이 신의주를 응시해 본다. 강 건너 저편에 나와 닮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때마침 단동과 신의주를 잇는 철길 위로 기차 한대가 지나간다. 저 기차를 타면 신의주를 지나 평양까지 갈 수 있겠지. 평양에서 부산까지 기차가 연결되는 그날이 오면 저 기차를 타고 신의주에서 내려, 맞은편 중국의 단동을 바라보며 지금의 이순간을 회상하리라.
해가 저물고 다시 찾은 압록강 공원. 때아닌 크리스마스 전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공원 곳곳에 오색전등이 화려하게 빛난다. 강 건너 반대편을 마주한 순간,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해버린 신의주는 아침에 보지 못했다면 그곳에 신의주가 있다는 것조차 몰라볼 지경이다. 그 흔한 가로등 불빛조차 보이질 않는다. 생각보다 더 빈곤해 보이는 북한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오고,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기억 속의 단상 둘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 않았다
고교 시절, 사소한 것도 늘 함께 나누며 즐거워했던 친구가 있다. 등하교 길에서는 꼭 두 손을 맞잡고 걸었고, 독서가 취미였던 우리는 경쟁하듯 책을 읽고 감상을 이야기하며 논쟁을 벌이곤 했다. 대학에 진학하면 어려운 이들을 위해 함께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자 다짐했던 친구는 환한 미소만큼이나 심성이 고운 아이였다.
1994년 7월 8일 남북정상회담을 얼마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화창한 토요일 하교 길에 친구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과일가게 앞에 서서 뉴스속보를 볼 때까지, 앞으로 친구에게 벌어질 일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때아닌 이념논쟁이 다시금 붉어져 나왔고, 주사파를 가려낸다는 명목으로 학교 안까지 형사가 들이닥쳤다. 당시 풍물패였던 친구는 우리와 함께 수업을 하는 대신, 며칠간 형사 앞에서 영문도 모르는 진술서를 강요 받았고 그 충격 때문인지 친구는 한동안 웃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21세기를 코 앞에 두고도 이념의 괴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때였다. 책에 쓰인 내용 전부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친구와 함께 감명 깊게 읽고 ‘우리도 균형된 시각을 갖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하게 했던 리영희 선생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그러나 분단의 땅에서 자란 현실 속의 새는 여전히 한쪽 날개만 펄럭이며 위태롭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고구려의 땅 집안(集安)과 만포시(滿浦市)를 연결하는 다리
우리민족의 기상을 느끼고 싶어 찾았던 집안에서는 머무는 내내 우울하기만 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장군총에서도, 환도산성에서도 한국관광객의 동태를 살피느라 보안요원이 귀찮으리만큼 졸졸 쫓아다닌다.
고구려 유적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전시해 놓은 집안 박물관에서 ‘고구려는 중국동북 지방에 자리한 소수정권’으로 시작하던 문구는 잊을 수가 없다. 동북공정 작업을 하는 중국에 분노하지만, 정작 왜곡된 역사하나 바로 잡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게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집안의 압록강가에 서서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켜본다. 잔잔히 흐르는 저 강물처럼 왜곡된 역사도, 끝나지 않은 이념의 논쟁도 함께 흘려 보낼 수 있다면. 세상만사가 낮은 곳으로 흐르는 저 강물처럼 자연의 이치를 따를 수 있다면.
강 건너 먼발치로 줄을 지어 뛰어가는 북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생명이 모두 소중하듯, 아이들은 모두가 사랑스럽다. 건널 수 없는 국경을 마주하면 늘 가슴이 무거웠는데, 씩씩하게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니 ‘그래, 저곳에도 희망은 있구나’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나와 닮은 정감 어린 아이들을 보며 기억 저편 추억 속으로 다시 한 번여행을 떠난다.
기억 속의 단상 셋 – 그래도 우리는 통일을 염원한다
대학시절 나는 ‘졸업하면 꼭 여행사에 취업할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대학 4학년 여름방학 운 좋게 원하던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정말 열심히 일을 배웠다. 직장 생활은 3년째가 고비라더니, 정말 만 3년을 딱 채우고 나니 그동안 마음속에만 간직했던 꿈 하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감히 가방을 꾸려 중국 천진에서 1년간의 짧은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생에 처음으로 북한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두 명의 북한 아저씨. 두 분 모두 북한의 공업대학에서 교수님으로 재직 중이라고 하셨다.
학기초 우리나라 학생들이 말을 걸어도 모르는 척 하시던 두 분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까지,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끔 같은 말을 하면서도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던 사투리 때문에, 북한을 찬양하는 이야기들에 대화가 단절되고는 했지만, 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늘 달고 다니시는 김일성 뺏지를 기념으로 선물해 주시면 안되겠냐는 농담도 웃으며 받아주셨다.
수업의 마지막 날, 아저씨들은 몸 건강하고 돌아가서도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와 함께, 통일이 되어 북한에 오면 꼭 진짜 평양의 옥류관에서 냉면을 사주시겠다는 약속을 남기셨다.
이념의 장벽을 허물고 우리도 하나가 되리라
중국의 어머니 강으로 상징되는 황하는 청해성을 시작으로 중국대륙을 5,464km 굽이굽이 돌아 발해(渤海)로 흘러 들고, 우리 민족의 강 압록강도 803km의 여정을 마치고 황해로 흘러 든다. 강은 자신을 낮추어 바다로 흘러 들고, 바다는 험난한 여정을 마친 강을 자연스레 포용하며 받아들인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한반도. 건널 수 없는 다리 위에서 비로서 우리의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멀지 않은 훗날 여권 하나 들고 한반도를 가로질러 중국 국경초소를 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바다와 강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처럼, 이념의 장벽을 허물고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우리도 하나가 되는 날을 염원해본다.
http://www.travie.com/traviest/traviest_view.asp?content_code=01&grade=B&idx=7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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