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의 인천 차이나타운

 

오후 늦게 4시쯤에 집을 떠나서 오랜만에 우리 한가족이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찾게 되었다.

성탄절의 만남이라는 의미속에 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인천 송도를 거쳐서 인천항을

지나 월미도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자유공원 방향으로 인천 차이나타운에 도착했다.

영하의 날씨 속에 인천의 바다바람까지 온몸을 꽁꽁 얼게 만들고 찬바람이 얼굴을 따갑게

스쳐가니 차이나 타운을 구경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를 "청관거리" 차이나타운 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부앤부,연경, 청관, 공화춘  등 정통중국요리 전문점과 함께 시작한 거리 초입엔 쏭(송),과

향만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멋스런 분위기가 정말 사진찍기 좋은 장소라 할 수 있다.

 

 

 차이나 타운거리를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중국박물관이 보여 차창 밖으로 한컷을 잡아 보았다.

 

 중국절 의선당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차이나 거리의 모습.......  넘넘 추워서 덜 덜 덜....... 

 

 너무나도 차가운 바람과 추위때문에 타운 정상엔 올라가지 못하고 희선문(喜鮮門) 앞에서 멈추었다.

 

 거리에 나온 관광객들이 모두가 추워서 어께를 움추리고 목도리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구경하고.....

 

 

추운날씨이지만 한식구가 오랜만의 외출이니.... ㅎㅎㅎ

 

두딸들과 아내가 구경도 좋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추우니까 음식을 먼저 먹고 구경하자고

하여 중국식과 현대식으로 갖춰진 "연경"이라는 중국집으로 들어 갔다.

 

 따듯한 물을 먹고 나서 음식메뉴를 보니 코스요리는 경제적으로 부담(?)되어서...ㅋㅋㅋ

사실은 우리식구가 중국음식을 별로 좋아 하는편이 아니라서.......ㅎㅎㅎ 

삼선짜장면과 삼선짬봉이 각각7,000원이고 탕수육이 17,000원이여서 주문하여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아삭 아삭 잘 튀겨진 돼지고기와 함께 탕수육의 소스가 새콤달콤한 것이 일품이였다.

 

 

중국요리하면 누구나 쉽게 짜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짜장면의 뿌리가 “한국이다” “중국이다.” 여러의견

들이 분분하다. 즉, 출생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짜장면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중국음식으로 알려져있다.
인천에 1884년 화교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중국음식점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를 처음으로 접했던

서민들은 신기한 맛과 싼 가격에 놀랐으며, 이때 부터 청요리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짜장면은 '차오장멘'이라 불리우며, 단지, 중국식 된장(춘장)을 볶아 국수에 얹은 것을 말하는데

화교들이 이것에 야채와 고기를 넣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짜장면을 만들게 되었고, 춘장에 캐러멜을

섞어 만들면서 고소하면서도 맛있는 짜장면을 만들었다고 전해 지고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짜장면은 우리나라에서는 고급 음식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세월이 가면서  가격과

맛이 변하면서 짜장면은 서민들의 추억어린 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짜장면이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만들어 졌는지를 밝혀줄 만한 자료는 거의 없지만, 정식으로

짜장면이란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은 1905년 개업한 "공화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렇게 "공화춘"이 성업을 이루자 화교 유지들은 인근에 청요리 많이 생기게 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각지의  미식가들이 자주 찾아와 중국요리를 즐겼다고 한다.

짜장면의 맛은 춘장의 맛에 따라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짜장면의 맛을 음미  할 수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면 원조짜장면의 담백한 맛을 느껴 볼 수  있다.

 

★ 지금은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기하게 되어 있으나 일상의 말에선 짜장면으로 통하고 있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을 골고루 먹구 나와보니 벌써 어둠이 갈려 차이나타운의 성탄절 밤이 붉게 빛난다.

 

 북경요리의 전문점으로 사천짜장과 사천해물탕이 유명한 정통중식요리집으로 맛이 좋다고......

 

 

  쏭의 맞은 편에는 중국 예원이 있는데 다른 곳들처럼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물건이 있는곳이다.

거리에는 그 밖에 많은 상점들에서 중국 상품들을 만끽할 수 있었으며, 중국본토에서나 구입 할 수 

있는 것들을 이곳에서도 살수 있어 잘만 골라보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홍등의 의미는 여러 의미가 있다. 중국에서는 옛부터 글을 모르는 백성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홍등의 숫자로서 그곳이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 집인가를 알려 주는 간판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홍등의 숫자가 많아 질 수록 술과 음식 그리고 여자가 함께 어울어 지는 환락유흥가로 알려져 있다.

 

 

 

   이집 앞 오른편 마지막 기둥 용머리 위에는 중국식 발음으로 '빠꽈'라 불리는 보통 풍수지리의 조사에

사용되는 나침판같은 물건이 매달려 있는데 이는 좋은 기운을 다 빨아들인다는 소망으로 달려있단다.

메달린 빠꽈의 가운데 유리부분을 보면 움푹 들어갔는데, 이곳이 동그랗게 튀어 나온 것은 '나쁜 기운을

내 몬다는 의미'이며, 여기서 처럼 안으로 들어간 것은 '좋은 기운을 다 들여 보낸다'는 의미라고 한다.

 

 

 

 

 

 

                          돌 사자상의 의미

           

차이나타운을 거닐다 보면 건물 앞에 있는 한쌍의 돌사자를 종종 만나게 될 것이다. 

빨간 헝겊으로 치장을 하고 있는 돌사자를 자세히 보면 분명 그 두마리는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돌사자를그런데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두 사자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데 한마리는 발 밑에 새끼사자가 있어서 후손의 창성을 바라는 의미라는데

그 사자가 바로 암컷이다. (위의 사진에서 검은색사자상이 암컷이고 흰색이 숫컷이다.)

 수컷의 발밑에는 공이 쥐어져 있는 이 공의 의미는 "권력"을 상징한다고 한다.

 

 건물 앞에 세워놓은 이유는 우리나라 건물 앞에 해태를 세워 놓는 것과 같은 이유인 화재를

막아준다는 믿음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 암수를 대부분 입구 오른쪽에 수컷이, 왼쪽엔 암컷이 세워진다고 한다.

 

차이나타운에는  있는 돌사자는 과연 몇마리나 있을까? 궁금해 진다.

그리고 딱 한곳만 암수의 위치가 바뀌어 설치 되어 있다고한다 . 그곳도 한번 찾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날씨도 넘넘 춥고 어두운 날씨로 인하여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 안타까움과 함께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의선당은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자는 교훈을 주는 뜻이다.

개항후 중국 산동성을 중심으로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건너온 중국인들이 이국땅에서 잘 살도록

하기위한 화교들의 교화기관이 필요하였고, 이국땅에서 단합하며 살아가는 화교들의 끈기와 생명력이

담겨있는 문구다.

해방이후 점차 쇠퇴해지고, 70년대 화교사회의 위축과 함께 거의 폐쇄되었고, 무당파 팔괘장 전수도장으로

80년대까지 운영되었다고 한다. 이후 거의 문을 열지못하다가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2006년

5월 대대적인 수리 후 다시 문을 열게되었다고 한다.

정청에는 관음상을 중심으로 흙으로 만든 5개의 상이 모셔져있다.

섬세한 솜씨로 만들어진 토상은 청나라말기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의선당

1.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2가 9번지

2. 설립시기 : 1893년경

3. 지정번호: 인천광역시 지정문화유산 제1호

 

 의선당 관광상품 판매점에서 기념품을 고르고 있다.

 

       의선당 내부 전경

 

 

추위와 싸우며(?) 차이나타운의 구경은 어둠이 짙어지니 힘들어 지고  의선당 앞에서 일정을  마감한다.

     (아빠~~~~~~!!  넘넘 추워요~~!  빨리 가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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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탄절의 인천 차이나타운

 

오후 늦게 4시쯤에 집을 떠나서 오랜만에 우리 한가족이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찾게 되었다.

성탄절의 만남이라는 의미속에 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인천 송도를 거쳐서 인천항을

지나 월미도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자유공원 방향으로 인천 차이나타운에 도착했다.

영하의 날씨 속에 인천의 바다바람까지 온몸을 꽁꽁 얼게 만들고 찬바람이 얼굴을 따갑게

스쳐가니 차이나 타운을 구경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를 "청관거리" 차이나타운 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부앤부,연경, 청관, 공화춘  등 정통중국요리 전문점과 함께 시작한 거리 초입엔 쏭(송),과

향만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멋스런 분위기가 정말 사진찍기 좋은 장소라 할 수 있다.

 

 향만성의 홍등이 휘황찬란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게 한다.

 

 기념품판매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인형이 매우 인상적이고... 중국사람들은 재화(財貨)와 보물(寶物)

에 많은 관심이 있는것 같다. 신년새해에 복을 불러오는 소원으로 재화를 불러오고 보물이 앞으로

전진하여 가득히 쌓이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이것 저것 구경하고 중국의 문화도 체험하고..... 재미있는 쇼핑~~~!!

 

 십리향이라는 항아리만두집은 인천광역시 북성동 차이나타운의 유명한 집으로 소문나서 KBS-TV에서

방송이 나간 후 더더욱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족이 갔을 때도 늦은 저녁시간인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있었고, 추위때문인지  상점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에, 길옆에

차를 주차시키고 차안에서 대기 하다가 옹기병만두가 다 될 무렵 나와서  항아리 만두를 사서 먹는 것이였다.

 

 주인 아저씨인 "곡창준(曲昌俊) " 씨가 옹기안을 점검하고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 숯불을 조절한 다음

잘 빗은 만두를 항아리 내벽에 하나하나 만두를 붙여 놓고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주문해 놓고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 길옆 차안에서 기다리는 사람 등등.....

 

  점포 안에서는 만두를 굽기전에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만두종류는 3가지로 고기만두, 호박만두, 고구마만두를 만들어 팔고 있었으며, 각자 기호에 맞추어

주문하면 되는데 만두 1개에 1,500원하는 비교적 고가의 만두이지만 만들기만 하면 팔려나가는데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집은 대단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마치 찐빵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서 항아리의 속에서 구워나오는 군만두의 맛은 먹어보지 않고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3가지 종류별 만두의 각기 다른맛이 ...... 호떡?,아니 군만두?,찐빵? 암튼.....

 

  항아리 내부를 들여다 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만두들이 나란히 나란히 붙어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조잘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잘 구워져서 나가면 사람들이 금방우리를 먹어 치우겠지~~!! ......ㅎㅎㅎ)

 

 아이~~!! 따습다~~!!

이곳 항아리 속은 참숯에서 나오는 원적외선과 열기로 만두들의 합창이 이루어지고 약 7분정도

지나면 맛있게 구워진 고기만두, 호박만두, 고구마만두가 탄생되어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한다. 

 

 곡창준(曲昌俊)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날씨가 추우니까  항아리 입구에 손을 대고있는

나한테만 (최 진학) 보너스를 주고 있다고 너스레한 웃음으로 선물해 준다.

 

 자~~!! 이제 다구워졌어요....   줄을 서시요~~~~~~!!!

맛있는 옹기만두 나갑니다~~!!   모두들 순번에 맞추어 고소한 냄새를 맡으면서 만두를 사간다.

 

 발길을 돌려서 조금 언덕으로 올라가면 희선문(喜禪門)올라가는 왼편에 중국제과(中國製菓)라는

손으로빗은 월병과 일명"공갈빵"이라는 중국식 빵의 전문점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곳엔 "담종발"이라는 아저씨가 주인장인데 건장한 체구에 마음씨가 좋게 생겼으며, 주인 아주머니가

아주 상냥스럽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제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여 주어 관광객들로 부터

좋은 호감을 가지게 한다.

공갈빵이 많은 인기를 차지 하고 있었으며, 이곳도 1개당 1,500원으로 판매되고 있었으며, 항아리 만두는

식기전에 먹어야 제맛이지만, 공갈빵은 뜨거울때나 식었을 때나 언제든지 그맛이 좋다고 자랑이 이만저만

아니다.......ㅋㅋㅋ

추운 날씨인데 우리가족들이 고생 했지만 그래도 성탄절날 좋은 추억을 만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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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북성동 `차이나타운 거리`

김영주

항구도시 인천의 허파 역할을 하는 북성동. 항만과 부두가 접해 있어 바깥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인천의 문화를 바다에 싣는다. 항구에서 내륙으로 들어서면 신포동. 구한말부터 인천 상권의 핵심으로 옛것과 새것이 교차하는 다원주의 문화의 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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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간이역처럼 오래 된 1호선 인천역 앞. 역사를 나오자마자 붉고 푸른 중국식 지붕인 패루(牌樓)가 차이나타운의 솟을대문처럼 솟아 있다. 차이나타운은 제물포항이 개항한 이듬해, 청국 영사관이 설치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영사관 주변으로 청국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중국 음식을 파는 대중음식점이 하나둘 생겨난 것. 또한 인천항이 가까운 이곳에서는 부두 근로자를 상대로 싸고 간편한 음식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먹는 자장면이다. 자장면을 처음 만들어 팔기 시작한 곳은 ‘공화춘’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허름한 외관만 남아 있다.

1990년대 초반 대부분의 화교 상인들은 이 거리를 뜨기 시작했다. 인천의 상권이 신포동에서 주안, 부평 등 내륙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결국은 ‘풍미’라는 중국집 한 곳만 남았는데, 이때부터 중국 음식점 풍미의 주인을 비롯한 주민들과 자치단체가 새로운 차이나타운 조성에 나서게 된다. 특화된 외국 음식 거리가 많지 않던 때라, 매스컴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북성동 차이나타운은 이태원 거리와는 분명 느낌이 다르다. 외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화교들은 많지만 겉모습은 한국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거리가‘색깔 없는 동네’라는 말은 아니다

차이나타운은 중국의 전통 색인 붉은빛을 고수한다. 인천역 앞에 우뚝 솟아 있는 패루의 붉은 문양은 화려하기 그지없고, 드문드문 퍼져 있기는 하지만 10여 곳의 중국 요리점 간판과 대문 또한 붉은빛이다.

음식을 나르는 화교 종업원들의 의상 또한 붉은색이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중국의 전통 가옥과 중국 서점, 토산품 및 전통 의상 등을 판매하는 화상(華商)들도 ‘온통 중국 색’은 아닐지라도, 낯선 방문자에게는 분명 이국적이다.

 

차이나타운의 솟을대문 <패루>

차이나타운에는 패루가 두 곳에 있다. 인천역 바로 앞 차이나타운을 알리는 패루와 자유공원 계단을 빠져나와 인천항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서 있는 패루. 마치 영화 속의 한 컷처럼 패루 그 자체는 볼 만한 광경이지만 길거리에 덩그렇게 혼자 서 있어 왠지 외로워 보인다.
원조라서 다르다 <공갈빵>

중국의 명물, 공갈빵. 손가락으로 콕 찌르면 푹 꺼지는 빵이 중국 고유의 공갈빵이다. 공갈빵은 차이나타운에서도 흔한 음식은 아닌데, 화교 학교 앞 복래춘은 매일 12시에 새로 구운 빵을 내놓는다. 서울 시내 거리에서 흔히 보는 공갈빵은 납작하게 눌린 ‘종이 모자’ 같지만, 이곳에서 만나는 원조 공갈빵은 안에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찬, 그야말로 제대로 된 공갈빵이다. 밥을 좋아하지 않는 화교들이 간식용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가장 중국적인 골목 <화교 학교>

차이나타운 2길에는 화교 협회와 화교 학교가 있는데, 이곳이 가장 ‘중국 색’이 강한 골목이다. 겉으로 봐서는 한국의 중고등학생들과 전혀 다름없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데, 들리는 것은 온통 중국 말. 지금의 화교 학교 자리는 구한말 청국 영사관 터로 영사관이 철수한 후 화교 자녀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중국풍이 물씬 풍기는 건물은 몇 번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여전히 중국식 건물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이색적인 길거리 풍경 <중국 가옥>

전국에서 유일한 중국인 거리답게 특유의 ‘중국풍’을 느낄 수 있다. 자유공원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차이나타운 2길’에 자리잡은 이 중국 가옥 또한 그렇다. 녹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2층 목조 건물로, 이 건물 하나만 보면 영락없이 중국을 보는 듯하다.

북성동의 독보적인 중국 요릿집 <풍미>

풍미는 그저 중국 음식점일 뿐이지만 이 거리를 대표하는 곳이다. 10여 년 전 이 거리에 달랑 하나 남은 중국 음식점이었기 때문.

이곳에서 나고 자란 주인이 가업으로 4대째 잇고 있는 풍미는 전통 중국 음식 맛과 한국인의 입맛을 조화롭게 융화시켰다.

전통 자장면은 담백한 면발과 기름기 적은 소스가 비결이다. 많이 먹으면 느끼한 게 자장면이지만, 이곳의 자장면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소마면’이라고 하는 맵지 않은 짬뽕 또한 진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시뻘건 짬뽕 국물만 먹어본 사람들에게는 사골 국물처럼 우윳빛이 도는 짬뽕이 생경스럽기까지 하다. 단돈 3,000원 남짓이면 푸짐한 중국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이곳이 지닌 커다란 매력이다. 저렴한 세트 요리도 갖춰놓고 있는데, 세 가지 요리에 3만원 선이다.

●032-772-2680 ●09:00∼12:00 ●주차 가능 ●전통자장면 3000원, 안매운짬뽕 3000원, 세트메뉴(3인) 3만원, (8인) 10만원

100년 전통 자장의 손맛 <자금성>

이곳 또한 유래가 깊은 중국 음식점이다. 이곳의 주인 손던준씨의 할아버지가 개항 이후 문을 연 초기 중국 요릿집 ‘중화루’의 마지막 요리사였다고. 어린 시절 보고 배운 눈짐작으로 향토 자장면을 복원했는데, 1년간 숙성시킨 춘장에 일반 시판용 춘장을 섞어 독특한 자장면을 만들어낸다. 일반 자장 소스는 면을 다 먹고 나면 소스가 남지만, 향토 자장면은 모든 재료를 채를 쳐 넣기 때문에 남는 것이 없다.

●032-761-1688 ●09:00∼22:00 ●주차 가능 ●일반자장면 3000원, 전통자장면 4000원

▶ 차이나타운 지도 보기
INTERVIEW

“최근에 다시 차이나타운이 살아나는 분위기죠!”
유서지씨(50·복래춘 주인)

사실 이 거리가 차이나타운으로 지정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그 전엔 그냥 화교들 집성촌 정도였죠. 하지만 최근 인천시에서 적극적으로 ‘특색 있는 거리’로 홍보하면서 많이 활성화됐지요. 중국 요릿집이 몇 군데 없었는데, 요즘은 중국 상점도 많이 생겼어요.

화교들한테는 저희 집이 없어서는 안 될 가게죠. 화교들은 쌀밥을 한국인들처럼 좋아하지 않거든요. 점심 정도는 우리 집에서 만든 빵으로 해결해요. 주말이면 홍콩이나 대만에서 들어오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려요.

차이나타운, 지도 없이 길을 헤매보자.

방콕에 머문다면 특별한 이유없이 한번쯤은 가게 되는 곳이 차이나타운이다.
인간 사는 모습이 여실이 보여지는 그 번잡함은
방콕의 무더위와 참으로 잘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차이나타운의 동문에 해당하는 홍예문이다.


지도를 봐도 찾을 수 없는 길들은,
걷다보면 길을 잃었다가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곳.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아주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의 모습이 대단한 볼거리가 되는 곳이다.

차이나타운은 단순히 화교들이 사는 곳 만은 아니다.
차이나타운 입구에는 인도인들이 사는 파후랏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 길을 거닐고 있으면 불연 듯 인도가 그리워지면서, 아듯한 향수병같은 것이 인다.
인도가 고향이 아니면서도, 인도에 대한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취재 여행이 한창이던 그때도, 파후랏을 갔다.
터번을 쓰고, 콧 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가득하던 그 거리.
웬지 모르게 짜이 한 잔을 마셔줘야할 것 같았고,
싸구려 짜이 한잔 마시면서 괜시리 혼자 즐거워한다.

세상이 참으로 다양한건지,
내가 참으로 다양해진건지,
방콕의 차이나타운을 가던길에 짜이 한잔 이라니.
그리고 나마스테라는 한마디가 반갑게 들리다니.


저 잘생긴 청년은 누구다냐?
이쁘장하게 생긴 것이 비슈누인 것 같은데,
코브라를 두르고 있는 걸 보니 시바 같구만.



힌디 영화.
포스터만 봐도 흥겹다.



인도 사람인긴한데, 한국과 비슷한걸 보면
어디 시킴이나, 네팔 이런쪽에서 왔나?



차이나타운을 가기 위해서는 매번 보트를 탔는데,
선착장 바로 앞은 빡크롱 시장이라는 꽃시장이있다.
운하 끝트머리라는 뜻이라나 어떻대냐?
과거의 방콕은 쥐방울 만한 크기였는데,
도성으로 들어가던 꽃과 야채들이 이곳에 모여있었다고 하는군.


한다발에 50밧이라니 싸긴 싸다.


사원이야 뭐 어딜까나 흔하다.
저 정도면 제법 잘 만든 건데, 관광객들은 별 관심이 없다.



빡크롱과 파후랏을 지나 차이나타운에 들어서면,
인간들이 나온다. 인간들 인간들이 좁은 골목에 넘쳐난다.
거리는 온통 시장이고 무언가를 팔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줌마 딱봐도 화교처럼 생겼어.


보기에도 더워 보인다.


스님이라고 맨손으로 사는 것은 아닐터.


중국 사원 앞의 꽃파는 아저씨.
남들 소원을 이루게 해주려나.



차이나타운이 중국임을 느끼게 하는건 거리 간판이다.
더불어 중국 식당과 금방들.
타논 야왈랏은 방콕의 작은 중국이리라.


중국성.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에서 유명한 육포집이다.


복. 복. 복.


차이나타운이라면 먹을 걱정은 하지 말자.
그곳에 가면 딤썸을 먹어야하지만,
엽기음식도 가득하니,  미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보자.


오리구이 훈제던가?


음. 보기만해도 좋네!


파오차이. 온갖 절임과 젓갈이 가득.


차이나타운에 가면 한번쯤은 들리는 몽아저씨네 굴요리, 어쑤언


차이나타운이니 당연히 중국절이 많다.
우리네와 비슷한 문양의 사원에는 기와가 올려져있고,
용이 장식되어 있으며, 대웅보전이라는 현판도 선명하다.


왜 저런 승복을 보면, 소림사가 생각나냐.


여기도 사진은 못찍게 했지만, 한 컷은 건졌다.


역시나 촬영 금지였는데, 도촬도 이젠 제법 스릴넘친다.


길을 걷다가, 금가루로 길조를 써주는 서예가를 만났다.
사진 한 장만 놓고 본다면 중국이라고 해도 알 게 뭐냐?




나는 위쪽 아저씨 서체가 마음에 든다.


차이나타운은 해가 지면 파장분위기다.
상점들이 하나둘 철수하던 시간,
아직 못산 물건을 사대느라 누군가는 분주했다.










어디에 넣어야할지 몰라서 뒤로 밀린 사진들이다.


엄밀히 말해 차이나타운은 아니지만,
차이나타운을 가는 길에 스치게 되는 라마 1세 동상이다.
싸판 풋이라는 방콕 최초로 만든 다리에 동상을 세웠다.


한약방이다.
100년은 족히 넘었을 집인데,
사진 기술이 없어서 내부 사진은 그 느낌이 안난다.


기념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면, 여고생들.
흥쾌히 모델이 돼준다.
저 포즈들을 보시라. 만점!


차이나타운에 가면 꼭 들리는 커피 집.
노땅들의 명예의 전당같은 곳으로 그들의 복장이 압권이다.
마치 주성치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글/사진 안진헌 www.travelrain.com



열리는 ‘21세기 실크로드’… 중화경제 ‘오지’에서 ‘요지’로



《올림픽을 맞아 세계의 이목이 중국 베이징()으로 쏠리고 있다. 수도에서 화려한 잔치를 벌이는 동안 수천 km 떨어진 변경 무역도시에서는 중국의 경제력이 소리 없이 주변국으로 팽창하고 있다. 중국 동() 서(西) 남()의 대표적 첨병 무역도시인 헤이룽장() 성의 쑤이펀허(),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우루무치()와 훠얼궈스(곽), 광시좡쭈(西)자치구의 핑샹(빙) 등 변경 무역도시 3곳을 다녀왔다. 주변국으로 뻗어 가는 중국의 ‘경제영토 확장’ 현장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중앙 에너지 수입위한 가스망 연결 박차

작년 주변5개국 수출 6년전보다 12배 급증

한국상품 전문상가도 개장 ‘한류’ 교두보로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가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맞댄 훠얼궈스.

우루무치 서쪽 670km에 있는 훠얼궈스는 과거 북쪽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낙타가 지나던 곳이다. 지난달 중순 방문한 이곳은 이제 중국 국경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가는 화물 트럭의 끝없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가 교차하는 우루무치

훠얼궈스는 국경을 통과하는 도시로, 교역은 주로 우루무치에서 이뤄지고 있다.

우루무치 시 중심인 시홍둥(西)로에는 ‘신장화링공마오(貿) 집단’이 운영하는 ‘화링국제무역광장’ ‘화링상가’ ‘화링건자재상가’ 등 대형 상가 3개가 밀집해 있다. 연면적 140만 m²에 크고 작은 점포가 1만4000개에 이른다.

위구르족이 세운 화링집단은 불과 10여 년 전 작은 건자재 가게에서 출발해 우루무치에서 최대의 유통업체로 성장했다. 인구가 불과 280만 명에 불과한 우루무치에서 화링이 이렇게 급속한 성장을 하게 된 것은 우루무치가 중국의 상품과 중앙아시아의 넓은 시장이 만나는 길목으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궈상양() 화링그룹 부총경리는 “지금까지 화링이 성장한 것은 80% 이상은 중앙아시아 시장 때문”이라고 말했다. 화링 상가에 찾아오는 중앙아시아의 단골 바이어만도 1년에 8000명이 넘는다고 소개했다.

우루무치의 또 다른 ‘변경무역 상가’인 옌안()로의 볜장()빈관 상가. 3개 동 약 4만 m² 넓이의 상가에는 크고 작은 ‘벌집’ 같은 상점 800여 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상점 크기는 작지만 중앙아시아와의 무역으로 큰돈을 번 ‘알부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전시해 놓은 물건을 그저 구경도 못 하게 하고 사진도 아예 못 찍게 한다. 대신 ‘상당 규모의 구매 의욕을 가진’ 바이어만 점포 안으로 들여보내는 배짱도 부린다.

중국 해관은 화링이나 볜장빈관처럼 대형 상가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2류 커우안()’이라는 내륙 세관을 설치해 통관 업무를 처리한다.

○고속도-철도 건설 곳곳 대역사

활발한 변경무역에 힘입어 신장자치구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03년 9828위안에서 지난해 1만6860위안으로 70% 이상 늘었다. 특히 중국의 중앙아시아 5개국에 대한 수출은 2001년 31억7500만 달러에서 2007년 408억770만 달러로 12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우루무치∼훠얼궈스 구간을 가로막았던 험준한 톈산()산맥이 물류의 병목이었다. 이곳에는 이제 ‘21세기판 실크로드’라 일컬을 만한 대형 공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사리무() 호수에서 훠얼궈스에 이르는 159km 구간 312번 국도는 고속도로로 바꾸는 공사가 한창이다. 2005년 8월에 착공해 2009년 말 완공 예정이다. 또 징허()에서 훠얼궈스 286km 구간에는 2004년 11월 철도가 착공돼 이르면 올해 말 완공될 예정이다.

고속도로와 철도 건설이 끝나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멀리는 유럽까지 이어지는 물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훠얼궈스는 중앙아시아의 에너지를 중국에 전달하는 길목으로서 중요성도 한층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시작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거쳐 건설되기 시작한 1801km의 천연가스 수송관이 중국 내의 가스관과 연결될 예정이다. 내년 말까지 단선, 2010년에는 복선의 가스 수송관이 완공될 예정이다.

중앙아시아의 가스관과 중국 내 4859km의 서기동수(西·서부의 가스를 동부에 수송) 가스관이 연결되면 6660km의 세계 최장 가스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에도 ‘기회의 땅’

우루무치의 국경 무역시장에 한국 상품도 파고들고 있다.

‘화링국제무역광장’에는 7월 초 ‘한국성()’이라는 3만 m² 규모의 한국제품 전문 상가가 문을 열었다. 중소기업청 산하 중소기업유통센터도 중소기업의 경쟁력 있는 제품을 공급함으로써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한 중국 서부와 중앙아시아 시장에 문을 두드릴 예정이다.

KOTRA 베이징무역관 관계자는 “우루무치에도 한국 드라마가 널리 알려져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높고 한국이나 한국 제품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기순 ‘화링 한국성’ 사장은 “우루무치에는 중국 전역의 모든 제품이 쏟아져 들어와 대형 트럭 단위로 몇 t씩 팔려나간다”며 “제품만 잘 발굴하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손 사장은 “국경무역을 하는 점포를 가보면 크기는 불과 몇 평짜리로 손바닥만 하지만 중앙아시아 바이어와 한 번 거래가 성사되면 엄청난 양을 판다”며 “중국 제품보다 조금 더 고급 고가의 한국 제품들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유통센터 심인창 중국진출 TFT 팀장은 “우루무치의 큰 성장 잠재력을 보고 한국성에 25개 업체의 견본품과 카탈로그 사진을 보냈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유망 업체와 제품을 발굴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루무치=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
 
 
 
출처 : 생생소호무역
글쓴이 : 새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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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人물결로 해가 지지 않는다 [조인스]
[창간기념 특별기획] 중국 이우市場을 가다




“이우에 없으면 세상에 없다.” 중국 사람들이 남방의 작은 도시 이우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액세서리ㆍ완구 등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잡화류의 30%가 이곳 이우를 거쳐 수출된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라면 이우는 ‘세계의 시장’이다. 중국 저장성 한가운데 있는 이우는 시내가 온통 시장이다. 상주 인구 68만 명 중 3분의 1이 상인이다.


“이우(義烏) 물건이 15일만 끊기면 한국의 물가가 오를 겁니다. ”중국 저장성 닝보(寧波) 공항에서 첫 대면한 중국동포 가이드 허학룡씨는 이우시에 대한 한국 경제의 높은 의존도를 한마디로 뭉뚱그렸다. 올해 서른넷인 허씨는 여행업을 하면서 무역도 함께하고 있다. 그는 액세서리의 경우 한국에서 유행하고 나서 중국에 들어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과거엔 3년이나 시차를 두고 유행한 적도 있지만 요즘은 한국에서 뜬 지 두어 달 후면 중국에서 유행합니다. ”

그에 따르면 이런 유행엔 패턴이 있다. 홍콩에서 디자인한 액세서리를 이우에서 만들어 한국에 팔고 나면 다시 중국에서 유행하는 식이다. 그 연결 고리가 한국 드라마다. 중국인들이 한국 드라마에서 목격한 액세서리를 찾기 때문이다. 한·중 간 유행의 시차가 단축된 데는 한류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그는 분석한다.

취재 중 만난 왕쑤에훙 절강중국소상품성집단공사(상청그룹) 당위 부서기는 한류 스타 원빈과 이영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상청그룹은 이우의 간판 격인 푸톈(福田)시장의 오너다.

“여기 사람들은 한국 스타일의 옷을 좋아합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자기 또래의 출연자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 유심히 봐뒀다가 시장에서 같은 스타일의 옷을 사죠. ”

그는 “한국의 로제화장품 에슬리를 3개월째 쓰고 있는데 가격에 비해 만족스럽다”고 털어놓았다. 마음에 드는 한국 제품으로 그는 화장품과 커피잔을 꼽았다.

기자가 이우에서 묵은 빈왕루 인두호텔 뒤 한 식품점 간판에선 또 다른 한류 스타 장나라가 활짝 웃고 있다. 그의 얼굴 옆엔 ‘한국 인기 우상’이라고 한자로 적혀 있다. 한류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중부에 자리잡은 현급 도시 이우에서도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라면 이우는 세계의 시장이다.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잡화류의 30%가 이우를 거쳐 유통된다. 중국 내수시장에서 팔리는 잡화의 60%가 이우 물건이다. 이우는 규모 면에서는 저장성 내 7위에 불과하다. 시라고는 하지만 인근 진화(金華)시의 예하 도시로 진화시의 행정지도를 받게 돼 있다.

이우 시정부는 그러나 진화를 거치지 않고 성 정부에 직접 보고를 한다. 이우의 성장 속도가 빨라 진화시가 관리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이우시에 따르면 이우의 성장률은 연 25%에 이른다. 이우의 인구는 68만 명이다. 그런데 그보다 많은 73만 명의 외지인이 이우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이우시 푸톈 시장


대부분 다른 도시나 다른 나라에서 온 상인들이다. 이우(義烏)는 ‘의로운 까마귀’다. 전설에 따르면 한 효자가 이곳에 살았다. 노모를 모시고 있었는데 엄동설한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그러나 장례 치를 돈은 고사하고 땅을 팔 도구 하나 없었다. 마침 한 무리의 까마귀들이 날아와 부리로 땅을 팠다.

그 덕에 장례를 치렀지만 땅을 파느라 몸을 상한 까마귀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이 이 까마귀들을 기려 이곳을 ‘의로운 까마귀’라고 불렀다. 그 이우가 가난한 세계 시민을 위한 글로벌 시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우는 시내 전체가 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주 인구 중 20여 만 명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상가 수는 5만8000여 개. 상가당 10초씩만 둘러봐도 족히 20일은 걸린다. 시장의 면적은 총 78만6500여 평으로 여의도 면적에 육박하는 규모. 연간 교역액은 248억 위안(약 2조9760억원)에 이른다.

2000~3000원짜리 MP3도

대표적 시장은 푸톈 시장으로 통하는 국제상무성이다. 서울로 치면 강남에 해당하는 신시가지. 이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 시장으로 중국 국가품질감독총국으로부터 전국에서 유일하게 “품질을 중시하고 신용을 지키는 시장(守信用 重質量)”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점포 수는 2만4000여 개에 이른다. 이 밖에 신발·벨트 등 경공업 제품을 파는 소상품 시장이 있다. 이우 최초의 도매 시장이다. 의류·침구류 등을 파는 빈왕 시장, 4000여 개의 점포로 이뤄진 양말 시장도 있다.

황원로에 있는 내의 전문시장에 들러 러닝 셔츠를 하나 샀다. 40대 중반의 내의 가게 여주인은 도매가 900원짜리 러닝 셔츠를 2160원에 팔았다. 그는 100벌부터 도매 시세로 판다고 말했다. 모자 가게에 들러 샘플을 구입하고 싶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 집도 최소 단위는 100개였다.

이우에서 거래되는 대표적 상품으로는 액세서리, 공예품, 완구, 문구, 양말, 지퍼, 와이셔츠 등이 있다. 한마디로 잡화다. 중국에서는 이들 잡화를 소상품이라고 한다. 이우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종류는 총 40여만 종에 이른다. 유엔에 공식 등록돼 있는 상품 종류 50여만 종에 육박하는 규모다.

이우는 국제 물류 도시다. 국내 250여 개 도시와 운송 라인을 갖추고 있고, 매일 1000개 이상의 컨테이너가 이우 세관을 통해 세계 200여개 국에 수출되고 있다. 수출 대 내수의 비중은 7대 3이다. 이우 상품의 가격경쟁력은 저가품 소비지인 중동·아프리카·동남아의 바이어들이 이곳에 몰려들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우 시장에서 파는 물건값은 얼마나 할까?


조현석 이우 한인회 수석부회장은 “도매 가격이기는 하지만 단가가 우리 돈으로 몇 원짜리부터 있다”고 말했다.

“2000~3000원짜리 MP3에, DVD 플레이어가 2만원도 안 됩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종류의 저가품을 소량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컨테이너용 카턴 박스 1~2개 물량도 살 수 있으니까요. ”

이 값에 물건을 팔 수 있는 것은 물론 저임금 덕이다. 이곳 공장 근로자의 급여는 월 12만~13만원, 잡역부의 시간당 임금은 3~4위안(360~480원) 수준이다. 많은 공장이 구내식당도, 경비원도 없다. 당연히 간접비도 그만큼 덜 든다. 근로자들은 200원이면 한 끼를 해결한다.

이우는 국제화된 도시다. 외국인은 시장은 물론 거리에서도 구경거리가 아니다. 이우에서 활동 중인 외국인은 1만여 명, 출신 국가는 100여개 국에 이른다. 특히 중동 사람들은 수적으로 한국인을 능가한다. 반면 서유럽·미국 등 선진국 상인들은 드물다. 이런 사실은 이우 물건이 품질 면에서는 떨어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100여 개 국서 1만여 명 몰려

이우 상인들도 품질과 브랜드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우시 청구공업구(靑口工業區)에 자리 잡고 있는 액세서리 회사 신광집단에는 “브랜드를 만들어 사회에 복무하자(創造名牌 服務社會)”는 캐치프레이즈가 적혀 있다. 이 회사의 장쩌린 사장 특별보좌역은 “우리 회사는 자체 브랜드로 수출할 뿐만 아니라 브랜드 가치도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다른 대도시에도 소상품 도매 시장은 있다. 이들 도시에 진출한 상인 중 다수가 이우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물건 값은 이우보다 1.5~2배 비싸다. 랴오닝(遼寧) 성의 선양, 후베이(湖北) 성의 우한 등에는 이우 같은 대형 도매 시장이 있다. 그러나 점포 수, 시장 면적, 거래액 등의 면에서 이우에 크게 뒤진다. 이들 세 도시는 중국의 3대 도매 시장으로 꼽힌다.

이우의 간판 상품은 액세서리다. 액세서리류는 본래 광둥(廣東) 성 성도인 광저우가 본산이었다. 광저우는 화난(華南)지방 최대의 무역도시로 광저우 박람회는 한때 소상품 전시장으로 통했다. 당시엔 이우에서 만든 액세서리도 광저우에서 광저우 산으로 팔렸다.

그러던 것이 가격경쟁력을 잃으면서 액세서리 명가로서의 명성을 이우에 넘겨줬다. 이우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은 7000명 선으로 추정된다. 2005년 말 중국 공안국 출입경관리국은 이우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4800명이라고 발표했다. 7000명은 무등록 거주자, 상시적으로 왕래하는 기업인을 포함한 것이다.

이우의 한국인들이 종사하는 업종은 제조, 임가공, 운송, 도소매, 무역 대행 등으로 다양하다. 이우에 거주하는 중국 동포(조선족)는 3만~5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인 무역업체는 대부분 3인 이상 10인 미만의 사업장이다. 이우 한국상회에는 250여 업체가 정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이우 제품의 품질을 높이는 데는 한국 상인들이 한몫했다. 한상들은 대체로 주문량이 적다. 더욱이 단가는 낮추려 들고 제품 질에 대해서는 고품질을 요구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과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이우 상인이 꽤 있다고 한다. 반면 중동 상인은 주문량이 많고 품질에 대한 요구도 그리 까다롭지 않다. 이우 상인들로서는 중동 상인을 선호하는 것이 당연하다.

▶푸톈 시장 내 액세서리 시장.

한국 상인들, 품질 향상에 기여

고희정 이우 한인회장도 그런 일을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럴 때면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면 나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이 사 준다”고 중국인을 설득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한국산 액세서리는 품질이 뛰어나다”는 장쩌린 신광집단 사장 특별보좌역은 “한국인의 의지력을 높이 평가하고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한인 사회와 중국동포 사이에서는 미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취재 중 만난 한 한국 상인은 아예 “중국동포를 채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말이 통하는 대신 여러 가지 마찰이 생깁니다. 능력은 오히려 떨어지는데 급여를 두 배 요구한 적도 있습니다. 중국어가 되면 중국동포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요. ”

김대석 이우 국제상무성 한상관 운영위원회장은 그와 입장이 달랐다. 그는 “중국동포의 도움은 절대적이다”고 말했다.

“중국인 직원과의 사이에서 귀와 입 노릇을 합니다. 중국 비즈니스와 중국동포는 불가분의 관계예요. 개중에 동포에게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

이우 시내는 외제 승용차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인력거와 삼륜 자전거 사이를 고급 외제 승용차가 누비고 다닌다. 1960년대와 21세기가 공존하는 도시. 한 한상은 “BMW가 하도 많이 팔려 본사 사장이 다녀가기까지 했다”고 전해줬다.

취재차 들른 북원공업구(北苑工業區)의 내의 회사 펜리의 주차장엔 롤스로이스가 주차돼 있었다. 김대석 한상관 운영위원회장은 “돈이 많다 보니 거리는 무질서한데 좋은 차들이 넘친다”며 “비싼 차 많기로는 중국 전역에서 최고 수준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우는 그러나 과거에는 해먹을 것이 없는 지역이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장터를 열었다. 그 장터가 오늘날의 대형 시장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우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강인하다. 또 신용을 중시한다. 신용이 떨어지는 거래처와는 상담도 하려 들지 않는다. 경향 각처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이우 상인 중에는 이들 외지인과 거래하다 피해를 본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강인하고 신용을 중시하는 것은 이우의 상인 정신이라 할 만하다. 이우시가 무역 도시라는 정책 목표를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정신적 유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우 사람은 교육열도 높다. 초등학생의 90% 이상이 중·고에 진학하고 젊은 세대의 42%가 대학에 다닌다.

젊은이들의 차림은 자유분방하다. 시내를 활보하다 보면 펑키나 울프컷 헤어 스타일로 한껏 멋을 낸 젊은이들과 심심치 않게 마주친다. 이들의 관심은 돈을 버는 것에 맞춰져 있는 듯했다.

젊은이만이 아니다. 이우 인근의 주지시에서 만난 허이원 제기신화의침유한공사 회장은 중의(한의사) 출신이었다. 20년 경력의 의사인 그는 “의사 시절이 더 편했지만 아들에게 탄탄한 사업기반을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30여 분 그를 인터뷰한 회사 샘플실은 손이 곱을 만큼 추웠다.

이우가 발전한 데는 시정부의 일관된 정책도 한몫했다. 시정부의 이니셔티브를 보여주는 좋은 예. 외환관리법상 외국인의 월 환전 한도액은 5만 달러다. 이런 규제가 시장 상인들이 외국인에게 물건을 파는 데 제약이 되자 시정부가 성정부에 정책 변경을 건의했다.

마침내 이우에 대해서는 환전 한도액을 풀어 준다는 특별유예 조치를 이끌어냈다. 주변에 소상품 공장이 모여 있는 것도 이우의 발전을 부추겼다. 이우시 처우쩌우씨루에 있는 액자 메이커 화홍공투집단 궁핀쭝 사장은 “1998년 회사를 설립할 때 판로로서 이우 시장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다.

“설립 초 80% 선이었던 이우 시장에 대한 의존도는 20%까지 낮아졌습니다. 현재로선 더 내려갈 가능성이 큽니다. 대형 바이어들은 이우 시장을 통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조달을 하기 때문이죠. ”

관공서 문턱은 여전히 높아

궁 사장은 이우 상인들이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제품의 고급화가 나아갈 방향입니다. 그러자면 국제영업 등에 경험이 있는 인재를 뽑고 관리도 국제적 수준으로 높여야 합니다. ” 항저우에서 만난 강응철 항주창행인무역유한공사 사장은 “수출할 물건은 이우에서 조달 못한다”고 말했다.

“퀄리티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죠. 내가 쓰고 버릴 물건은 이우 것을 쓰지만 수출할 물건은 충칭(重慶)·칭다오(靑島) 등에서 주문자 상표 부착생산(OEM)으로 조달합니다. 말하자면 이우에서는 제품의 다양성을 보는 거죠. 정보는 이우에서 얻고 조달은 다른 데서 합니다. ”

그는 CJ홈쇼핑·LG홈쇼핑 등엔 이우 물건이 거의 없다고 귀띔했다.

이우에서는 해마다 80여 회의 각종 전시회가 열린다. 연중 전시회가 열리는 셈이다. 10월에 열리는 이우 국제 소상품 박람회는 중국에서 셋째로 규모가 큰 전시회다. 이 박람회는 1995년 처음 열렸다. 이후 한국을 비롯해 대만과 서남 아시아권 상인들이 몰려들면서 이우는 국제 무역도시로 꽃을 피우게 된다.

3.5㎢였던 시내의 규모는 현재 45㎢로 지난 10년 새 13배 가까이 커졌다. 2003년 이우의 사회경제 종합발전지수는 전국 17위를 기록했다. 성장 속도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이우는 교통의 요충이기도 하다. 철도는 북쪽으로는 저장성 성도 항저우를 경유해 장쑤(江蘇) 성 상하이와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장시(江西) 성 난창을 거쳐 남방으로 달린다. 저장성 내 다른 도시엔 고속도로로 3시간 이내에 닿을 수 있다. 광저우·선전·싼토·샤먼·베이징·우루무치 등은 국내선 항공편으로 이동할 수 있다.

시내엔 광통신망도 깔려 있다. 이우 시내 4성급 호텔방에서 기자는 인터넷을 별 불편없이 쓸 수 있었다. 성장은 그늘을 남긴다. 고속 성장일수록 그 그늘도 짙게 마련이다. 취재 중에 만난 한 상인은 공무원의 부패 문제를 지적했다. “공무원 봉급으로는 그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 저녁이면 고급식당에서 외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관공서의 문턱은 높다. 인허가 업무를 맡은 공무원은 불친절하고 2~3번씩 퇴짜놓기 일쑤다. 이우에서는 의장권·실용신안권이 보호받지 못한다. 항저우에서 만난 이성근 LG화장품유한공사 사장은 “‘짝퉁’을 우려해 이우엔 절대 물건을 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자는 이우 취재 후 일정을 변경해 산둥성 칭다오로 향했다. 이를 위해 국내선 항공권을 사고 귀국편을 항저우 발에서 칭다오 발로 바꿨다. 그런데 이우 시내의 항공여행사는 마스터카드도, 달러도 받지 않았다. 국제선 항공권을 자국 화폐로만 살 수 있는 현실은 국제도시로서 이우의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기자가 묵은 인두호텔 뒤쪽으로 저녁이면 야시장이 섰다. 주변 건물들은 시터우청(洗頭城)으로 불야성을 이뤘다. ‘머리를 감겨 준다’는 업종명과 달리 시터우청은 유사 성 매매업소다. 5층 건물에 다섯 집이 문을 연 곳도 있었다. 한 곳은 간판에 한국 여배우 문근영의 대형 사진이 프린트돼 있었다. 한류를 비추는 일그러진 거울이랄까? 한류는 이우의 뒷골목에서도 중국과 한국을 이어주는 가교였다.
출처: 중앙일보
출처 : 차이나 내사랑
글쓴이 : 白 頭 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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