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가경(Apocrypha) 헬라어‘아포크리포스’로 번역하면‘숨긴 것’이란 뜻이다.그러므로 가경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책들을 가리킨다.공개되지 않은 이유는 그 내용에 문제성이 많기 때문이다.그 문제성 가운데 그 저작들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과 그 책들의 교훈이 진리에서 이탈되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다. 2.개연론(Probabilism)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이 없을 때 확실한 것처럼 보이는 것,즉 개연성만이 신념이나 행동의 유일한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도덕적으로는 어떤 행위가 올바를 수 있다는 개연적인 의견이 그 행위를 행하기 위한 충분한 동기가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3.가현설(Docetism)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물질적인 몸과 인간성을 갖지 않았고 단지 유령의 몸,즉 인간의 환영만을 가졌다고 가르치는 이단교리이다.그들은 예수의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은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가현설은 영지주의 이론의 당연한 결과였고 마르키온,마니교,무하맛 등이 주장 혹은 인정했으나 명확한 사상체계라기 보다는 하나의 경향으로 구체적인 종파는 없었다. 4.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 개혁주의 신학은 일명 칼빈주의라고도 하고,역사적으로는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되는 기독교 사상체계로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의 부흥이라고도 한다.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을 통해서 이해된 성경교리 사상체계가 개혁파 교회들에 의해서 채택된 공적 신앙고백들과 칼빈을 따르는 대표적 신학자들의 고전적 저서들을 통해서 개혁주의 신학은 발달하였다. 개혁주의 신학 체계의 원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다.이들의 근본사상은 하나님 중심에 있으며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신다 라고 한다. 개혁주의는 기독교 유신론이며,가장 순수하고 고상하며,복음주의적이다라고 할 수 있다. 5.경건주의(Pietism) 역사적으로 기독교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경건주의는17C독일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당시의 독일은30년 전쟁의 여파로 정통적 교회의 대부분이 그 복음적 생명성을 잃어버리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에 루터교 목사인 스페너는‘경건을 동경함’이라는 책을 통하여 영적 부흥을 일으켰는데,그는 기도모임과 성경공부를 강조했고,또한 전통적인 교리와 규정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순결하게 생활할 것을 강조했다.이 사상은 벵겔,칸트,레씽,요한 웨슬리,무디 등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경건주의는 개인의 영적 생활의 내성 체험에 대한 강조는 쉽사리 주관주의,자유주의,신비주의에까지 전락케 되는 위험을 주고 있으며,정치,사회,혹은 노동의 분야에 대한 기독교의 막중한 임무를 보지 못하여 이를 등한시 한다. 6.계시(Revelation) 계시란 하나님의 역사속에 활동하시며,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인격적으로 나타내시고,그들에게 구원의 의지,목적 그리고 그들의 삶에 대한 요구 등을 전달하시는 과정을 말한다.그러므로 계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하나님의 임재,하나님의 말씀을 총 망라하는 것이며,본질적으로 인격적이며 제안적인 것이다.계시는 하나님의 원천적 행위,자아 현현,교통하심을 언급하는 것이다. 7.글리온(Glion)선언(1988년) 1988년11.23-25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캐나다,미국,프랑스,서독,소련,영국,일본,체코,화란의 교회 대표들과 조선 기독교 연맹 대표7명과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대표11명이 참석하여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와 평화를 구축하고 한민족의 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룩하는 과업에 대한 세계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이때 한민족의 평화와 통일이 이룩되기 위해서 여러 원칙들을 재확인하고 몇가지 실천적 과제들을 위해서 공동으로 노력할 것에 합의했다. 8.교회협의회(Church councils):W.C.C. 세계 교회 협의회의 약칭W.C.C.는1948년 암스텔담에서44개국147교인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되었다.W.C.C의 에큐메니즘은 첫째,신학적 자유주의 및 혼합주의를 면치 못할 뿐 아니라 둘째,구령 사업보다 사회 참여를 고조하며 세째,복음적인 면보다는 성례전적인 면에 더 치중하는 결과를 초래함. 9.교회협의회(Church councils):I.C.C.C. 국제 기독교 협의회는1948년 암스텔담에서29개국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되었다.I.C.C.C.는 강한 근본주의 신학에 기초한 전투적인 연합 운동으로서W.C.C와 공산주의를 대항해서 전통적인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해,성경 장로교회의 설립자이며 또한 미국FCC를 대항해서1941년 성경 장로 교회를 주축으로 구성된 미국 기독교 협의회의 창설자이기도 한 맥킨 타이어 박사에 의해 제창됨. 10.구속(Redemption) 구속이라 함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에 대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지불하시고 율법의 저주와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행동을 말한다. 11.구원사(Heilsgeschichte) ‘구원역사’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사를 가리키는데 성경은 단순한 말씀이나 추상적 진리를 담은 것이 아니고‘창조’라는 큰 역사적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재창조의 반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의 일련의 행동사. 12.근본주의(Fundamintalism)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근본원리(성경의 영감설과 무오설,삼위일체,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인간창조와 타락,그리스도의 대속,그리스도의 육제 부활과 승천,부활과 재림 등)을 파수하고 소위 현대주의라 불리우는 위험한 신학에 대응하기 위하여 최근래에 생겨난 신학운동이다.이 교의는 어떤 특정한 개신교단의 원리가 아니며 개혁주의 노선을 따르는 모든 교파가 지향하는 기독교 복음진리를 포괄한다. 13.기독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 기독교의 사회적 원리들을 구조적으로 사회에 적용할 것을 주장하는 여러 다양한 교리들과 운동들을 지칭하는 말.근대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의 기본적 목적과 기독교의 신앙적 윤리적 확신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지칭하는데 사용. 14.기독교 논쟁(Christological controversy) 그리스어 사용권의 형이상학적,플라톤주의적 사고형을 가진 알렉산드리아학파,로마 사람들의 정치적,법률적 사고형을 가진 라틴학파,그리고 히브리적 사고를 가진 안디옥 학파가 있었는데,이 세학파의 알력,충돌,대화속에서 기독론 논쟁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대 기독론 노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은 안디옥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의 사이에 학파적대립을 근거로 하여 안디옥의 총주교와 알렉산드리아 총주교 사이에 대립,알력이 벌어짐으로 서이다.그것은 알렉산드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로고스로서의 존재를 더 확고히 견지하는데 반해서 안디옥에서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애매하게 만들지 않고,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역시 흐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이와같은 관심의 차이가 결국 마리아를‘하나님의 어머니’로 보아야 하는가,‘사람의 어머니’로 보아야 하는가의 논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15.네스토리우스 주의(Nestorianism, 성육화된 그리스도 안에 두개의 격,즉 신격과 인격이 있다는 주장을 신봉하는 교리와 교회,성육화된 그리스도 안에서 신이며 동시에 인간인 하나님의 격이 있다는 정통 교리에 의해 이단으로 비판받음. 16.다신론(Ploytheism) 여러 신들에 대한 신앙,돈독한 유일 신관을 지닌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앙 체계가 바로 다신론의 범주에 속해 있다.하나이상의 신의 존재를 믿거나 숭배하는 것으로 일신교 또는 유일신교와 대조됨.다신론은 피화된 형태이다. 오늘날 다신교에는 서물 숭배,정령 숭배,배성교 세 가지가 있다. 17.무신론(Atheism)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상.‘하나님이 없는’이라는 뜻의 헬라어ATHEOS에서 유래한 이 말은 성경 중 엡2:12에서 단 한번 사용됨.원래 이 말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거부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18.범신론(Pantheism) 범신론은 신과 자연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 일원론이다.그리하여 우주의 모든 현상은 단일의 실체인 신이 변화한 모습이 되며 신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신이 된다. 19.단성론(Monotheism)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하나의 성,즉 인간이 된 신성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단설이다.유티케스가 주창했으며 알렉산드리아 총 대주교 디우스코르스가 지지함.이 교리는451년 소집된 칼케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배척됨. 20.만인 구원론(Universalism) 엄격한 의미에서 만인 구원설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포함한 하나님의 전 창조물의 궁극적 회복을 의미한다.교리사적으로 이말은 가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화해 사역의 넓이와 그 깊이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일만적으로 모든 인류는 비록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을 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다 구원받게 된다는 설을 말한다. 21.무구회태설(Immaculate Conception) 성모 마리아는 다른 아담의 자손들과는 구별되는데,그 순결한 영혼이 육신과 결합하는 순간부터 일체 모든 죄악에 오염되지 않았다.이렇게 원죄의 오염을 받지 않는 이는 전 인류중 다만 성모 마리아 한분 뿐이라는 것이다.이 특별한 은혜는 교회의 선언과 같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에 의한 것이다. 22.교황 무 오류성(Papal Infallibility) 교회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그 권위를 교황에게 부여하면서 교황 무 오류설을 주장함.계시된 진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말 23.무교회주의(Non Church Movement) 일본의 우찌무라 간죠와 그의 문화생들에 의해 형성된 신앙과 주장.교회의 의식,전례,신조,교회당을 제도적인 것에 메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서만 주어지고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신앙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24.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일명 배화교는BC600년 경 현재의 폼페이 부근에서 창시되었고 독창적인 종교로서의 창설보다는 페르시아 원래의 고대신앙을 개혁한 것이다.유일한 최고 신으로 천지창조주로 고백되는‘아후라 마스타’를 신봉하는 유일 신교이다.다만 그 대칭되는 악신으로‘알리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견제하는 종교적 관념을 지님으로써 이원론 혹은 이신론 일수도 있다.세계를 선신과 악신의 전장으로 규정하며,인간은 선신을 숭배할 의무를 지녔다고 규정함. 25.스콜라주의(Scholasticism) 스콜라주의란 용어는 일반적으로7C부터16C까지 서구의 모든 학문적 신앙을 총칭하는 말이다.신앙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옹호하려는 시도에 대한 총칭.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중세학교에서 표현된 신학적,철학적 사변의 종합적 체계화를 가리킨다.원래 스콜라는 중세의 학교를 의미했고,이곳에서 강의로 형성된 학문을 가리켰다.그러나 엄밀하게는11-15C에 성황을 이룬 서방의 기독교 철학세계를 가리킨다. 스콜라 주의의 특징은 신앙과 이성의 일치,포괄적인 체게수립,철학의‘신학의 시녀화’라고 할 수 있다. 26.복음주의(Evangelicalism) 복음주의는17C이후 독일에 있어서 루터교회의‘죽은 정통’에 반발하여 발생한‘경건주의’운동에서 파생된 것이다. 복음주의란 말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에도 적용되며,성경에 나타난복음을 중시하는 신학적 입장이다.하지만 이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첫째,카톨릭에 대한 개신교신앙 둘째,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보수주의 셋째,신학적 탐구보다 생활적 체험을 강조 27.불가지론(Agnosticism) 초월적 존재나 본잘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는 철학적 입장.가장 일반적인 의미로써 부라지론은 신이 있는지 없는 지 모른다는 것으로,인간 정신의 극복할 수 없는 한계들 때문에 신에 대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8.사벨리우스 주의(Sabellianism) 삼위일체에 대해서 그릇된 개념을 주장한 것.삼신의 뜻을 제어하려는 입장에서 성부,성자,성령의3위를 하나님이 관게하시는 목적에 따라서 단일한 하나님의3가지 성격,양태,관련성으로 떨어뜨림.이로써 하나님은 영원히 본질적으로 한분 이시지만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성부,성자,성령의 형태를 취했고 그렇게 일컬음을 받았고 섬김을 받았다는 주장. 29.신비주의(Mysticism) 신비주의란 외부의 세계에 대해서는 수동적으로나 능동적으로 가능한 최대의 유보를 행사하거나 비밀을 유지함으로써 고도의 헌신을 이룩하려는 것이다.혹은 신비주의란 외부의 세계에 대하여 수동적으로나 능동적으로 유보나 제한을 가하는 것과 동시에 고도를 헌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30.신유(Divine healing) 신유란 일반 의학적인 치료와는 달리 특별한 영적인 은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치료를 말함. 31.신인 협동설(Synergism) 사람이 거듭나고 구원을 얻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는16세기의 신학설이다.이 설은 인간이 완전한 죄인이기에 하나님을 도울 수가 없고 따라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루터 및 아우구스티누스 계통의 주장과 반대됨. 32.신정통주의(Neo-Orthodxy) 신 정통주의란 칼 바르트와 에밀 부루너의 연구 저작과 관련된20세기에 가장 두드러진 신학 사조를 말한다.19세기의 자유주의와17세기의 신앙고백적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일어난 신 정통주의는 인간의 죄의 실제,하나님의 지식에 의한 신앙과 신적 은총의 우월성,전제적 교시의 전달보다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서의 하나님의 초월성에 강조를 둔다. 33.신학(Thelogy) 광의로 말할때는 전 신학적 체계의 주체적 사실을 의미하며,협의에서는 신론을 의미한다.신학은 하나님의 존재,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속성,그리고 삼위일체를 다룬다.다른 정통에 의하면 신학의 본질과 관련해서 작정과 예정교리를 다루기도 한다. 34.실재론(Realism) 철학적 의미에서 실재론은 우리의 인식 대상이 인식 작용의 의식이나 주관에서 독립하여 그 자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고 그것에 대한 인식은 그것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을 말한다.따라서 실재론은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의식을 강조한다. 35.실존주의적 신학(Existential Theology) 신정통주의자들이 사용한 용어.실존주의란 개인적인 신앙행위에 대한 인보를 의미한다.실존적 신앙이란 신앙의 주체와 신앙의 대상간에 실제적 관계를 갖는 신앙을 나타내며 이러한 신앙은 자유로운 도덕적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온다. 36.실증주의(Positivism) 그 자체를 경험적인 것들과 실제적인 것들과 확실한 것들에다 제한한다는 것으로,이ㅘ같은 제한적 원칙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모두 거짓으로 한다. 37.알미니안 주의(Arminianism) 알미니안주의란 일반적으로17세기 초의 화란의 레이던대학의 신학 교수로 있었던 알미니우스와 반칼빈주의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신학입장을 지지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의 일련의 신학적 체계를 말한다.이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죄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서로 대립시킴으로 신인협력의 구원관을 가지고있다. 38.계약(Covenant) 계약은 두 당사자가 서로를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하기로 한 구속력을 가진 약속이다.심학적인(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사용되는)계약이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특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이 약속안에 포함된 의무들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체결하신 은혜로운 약속이다. 39.오이쿠메네(oikoumene) 이 단어는 명사의 뜻으로‘사람이 사는 세상’을 가리킨다.그리고 여기서부터 로마제국을 가리키는 당러로 사용되었다.일반적인 의미(마24:14)와 정치적인 의미(눅2:1)도 있다. 40.왈도파(Waldenses) 왈도파는 자기들의 신앙의 모범을 사도적 교회에 두었다.그들은 자국어로 된 성경을 사용했으며 간단한 옷을 입고서 두사람씩 짝지어 다니며 말씀을 전파했다.그들은 미사의 효능과 연옥의 실재를 부인함.사제적 독신생활을 함. 41.엣센파(Essenes) 이들은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여 쿰란 부근을 근거지로 활약했으며 독자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엄격한 계율하에서 수도적인 공동생활을 했다.이들은 네 계층이 있는데 제사장,레위족,성원,초심자등으로 나누어져 있다.이들은 정치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동물에 의거한 희생 제사와 예루살렘 성전과 그 예배에 반대입장을 취했다. 42.유니테리안 주의(Unitarianism) 아리우스는 삼위일체의 정통교리를 부인하면서 그리스도는 경배를 받을만한 분이지만,성부와 동일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43.의(Righteousness) 구약에서의 의는 어떤 윤리적,심리학적 규범에 일치하는 행동이나 처신을 가리키기보다는 어떤 관계에서 요구되는 규범과 조건들을 이행 또는 성취할 때 의로 간주되었다.신약에서의 의는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하고 그의 뜻에 들어맞는 올바른 행동,하나님 앞에서의 생활의 성실성,하나님 심판 앞에서의 정당함 등으로 총괄 할 수 있다. 44.이원론(Dualism) 절대가치로서의 대립된 두 원리를 가지고 실제의 모든 부분을 설멸하려는 입장 45.자연신론(Deism) 자연신론은 유신론,다신론,범신론과 구벌되어 우주를 창조하셨으되 그것을 간섭하지 않으시는 인격적 신의 존재를 믿는 교설이다. 46.자유주의(Liberalism) 후기 계몽주의적 신학사조로 신학은 신학문에 조화시키려는 것이다.이 자유주의는 성경의 계시와 영감을 믿는 역사적인 교리들은 부인하고,성경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들을 신뢰함. 47.자유의지(Free-Will) 자유의지란 어떤 외부적 영향 없이 인간 스스로가 구원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48.재침례파(Anabaptists) 재침례파는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한 분파로서 좌파운동,과격운동으로도 불리워진다.그 뜻은 세례를 다시 받는 다는 뜻을 의미한다.이들은 또한 유아세례를 반대한다. 49.적그리스도(Antichrist) 예수님으로부터 떠나있는 자,주님을 부인하는 자 50.정경(Canon) 정경이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지고 신자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 절대적 규범이 되는 규범적 성경 목록을 가리킨다. 51.정통주의(Orthodoxy) 정통은 옳은 의견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이단이나 이설과 반대되는 올바른 의견,신앙을 뜻한다.정통이란 기독교의 계시적 진리 내용이 정확히 구현되어 있기 때문에 본질상 보편적 교회에서 규범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이 개념은2세기 이후 영지주의와의 투쟁과 삼위일체 논쟁 및 기독론 논쟁을 통하여 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52.조명(Illumination) 조명은 회심을 경험케하는 비춤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진리를 알게 하며,또한 미래의 심판에 대한 성격을 알게 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53.종말론(Eschatology) 신학적으로 정의할 때‘마지막 일들’이라고 한다.이것은 개개인과 관련된 것이며 이세계도 관련된 것이다.이것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말로 표현될 때 이 의미 속에서 발견되어 져야 한다.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심판과 구원이 연결되어져야 한다. 54.천년왕국설(Millenarianism) 일반적으로 천년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고 번영할 것을 믿는 신앙을 뜻한다.천년왕국설은 전천년설과 후천년설이 두가지가 있다. 55.칭의(Justification) 칭의는 의롭게 하다라는 뜻으로 의견을 표명하고,승인하고,판단하는 것이다.칭의는 죄를 벌하고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죄인들을 용서하고 그의 자비와 그리스도를 통하여,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조화를 이루어 양쪽 습성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낸다.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 56.케류그마(Kerygma) 케류그마는 전파하다의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케류그마는 우리가흔히 생각하는 전도나 전파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때때로 이 말이 교회의 공적 메세지인 설교를 지칭하기도 한다.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사도적 설교라 할 수 있다. 57.토착화(Indigenization) 토착이란 말은 본래 식민주의적 용어이나 식민지 점유국의 사람과 문물들에 대칭되는 식민지 고유의 사람이나 문물을 가리켜서 이 말이 사용된다. 58.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는 같은 말이다.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 또는 지배와 주권에 관한 구약 성경의 관념에서 발단되어 신약 성경에서 궁극적인 형식으로 표현되 신약의 용어이다.이것은 영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 지상의 통치자로서 군림하는 것과 또는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의 실현을 의미한다. 59.하나님 형상(Image of God) 창1:26이후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때 하나님을 닮게 창조하신 것을 의미한다.주전1세기 부터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시에 잃었던 본래의 영을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렀고,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된다고 하셨다. 60.화해(Reconciliation, 화해는 일반적으로 소원 또는 적대관계에 있던 두 당사자가 그들 사이에 있어 왔던 그소원과 적대감의 원인이 제거되고 해소됨으로써 이전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거나 서로 다시 연합하는 것을 가리킨다.화해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참여에 관계없이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 대한 자기 사랑의 확증을 위해 마련하신 자기 아들의 단회적이고 역사적인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객관적 사건이다.그것은 지속적 사건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성취되고 완결된 사역이다. 61.화체설(Transubstantiation)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미사에서 행하는 성찬예식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것을 먹고 마시는 순간 그 본질이 변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가르 침이다. 62.휴머니즘(Humanism) 휴머니즘은 인간의 능력,존엄성,주체성을 고조,강조하는 사상이다.사람이 사람을 아끼고사랑하자는 박애사상,인도주의,인본주의,유교의 인사상,우리 나라의 인내천사상과도 공통성을 가진 사상이다.성경에서의 휴머니즘은 인본주의로 단정된다.그래서 휴머니즘의 참뜻은 신본주의,자연 중심주의,기술줄심주의 등과 비교,대조할 때 그 내용이 정확히 파악될 수 있다. 63.비 신화화(Demythologization) 현대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볼트만은1941년 그의 작은 논문<신약 성경과 신화론>에서 신약의 순수한 케류그마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신화론적으로 표현되어져있는 성경을 비신화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의 모든 저서에는 그의 성경이해원리인 비신화화를 계속 발전시켰다. 하나님이 세계 사건의 진행에 있어서의 초자연적인 힘,기적,구속사건,곧 성육,죽음,부활,승천,재림 등도 모두 신화론적 서술로서 신화론적인것은 성경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64.사신신학(The Death of God Theology) 1966년 알타이저에 의하여 제창되었던‘기독교 무신론의 복음’은 사신신학의 효시가 되었다.알타이저는 그의 책에서 분명하게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창조적 부정을 통하여 생명적 근거를 찾을 수 있는‘오늘에 사는 신학’을 제창했다. 사신신학의 사동아는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종교적 체험이 없는 기독교,개인의 회개가 없는 기독교,성경이 없는 기독교이다. 65.사순절(Lent) 이것은 부활절 전40일 금식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되어 부활 절 전야에 끝는다.그런데 이 기간 중6번의 주일은 축제일로 지켜지므로40일에는 계산되지 앟았다.오늘날에는 사순절이 부활절을 준비하기 위한 절제,구제,헌신의 기간으로지켜지고 있다. 66.사해문서(The Dead Sea Scrolls) 1947년 이후에 사해 서편 속에서 발견된 맣은 문서들을 사해사본이라고 한다. 이 문서는 아라비아 목동들에 의해 발견ㄷ하옸더래 문서의 내용은 성경의 사본들과 종교적인 것과 예배에 관한 것이 가장 많고,상업에 관한,재정에 관한 것과 군대에 관한 것도 있다. 67.삼위일체(Trinity) 성경의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위격과 하나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교리니다.실지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없고,그후 교회가 신학적으로 표현한 용어이다.삼위일체론적 신의 개념은 성경적 구속사에 있어서 기초적이요,지배적인 사상이 되어 있다. 68.샤머니즘(Shamanism) 원시종교의 한 형태로 신령이 실제하여 샤몬이라고 부르는 주술사에게 붙어서 악마와 요정을 쫓아내고 그 부하인 인간에게 복지를 가져온다는 민간신앙이다. 샤머니즘은 한마디로 귀신을 섬기는 잡신교라고 할 수 있다. 69.선험론(Transcedentalism) 칸트의 인식방법의 방법론적인 성격을 규정한 명칭입니다.선험적 방법은 인식에 있어서의 선천적 요소의 발견과 이 가능 근거의 해명의 두 조작이 포함된다. 칸트는 선험적이란 객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선천적으로 가능한 객체 인식의 양식에 관한 인식이다 라고말했다. 70.섭리(Providence)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을 말한다.이것은 모든 사소한 일에와 악인의 악한 일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일이다.섭리의 교리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과 우리들의 삶이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며 하나님께서는 섭리에 대한 자신의 목적을 그의 아들의 성육신 속에 완전히 드러내셨음을 알 수 있다 71.성부수난설(Patripassionanism)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한 형태로200-250년경에 노에투스,푸락세아스 등에 의해서 주장되었다.성부수난주의자들은 삼위일체의 삼위를 혼동했으며,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 두 본성이 연합되어 있음을 부인했다.노에투스는 그리스도는 성부였는데,성부가 태어나시고 고,고난 당하시고,십자가상에서 죽스셨어요. 72.성서무오설(Infallibility of the Scripture)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함께 성경의 축어적 영감교리를 가졌다.성경은 그 전체가 축자 영감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교회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저각하신 하나님의 책이라고 믿어왔고,거기있는 말씀들은 실수없는 진리요,실패없는 권위의 말씀이 되도록 하나님이 저작하신 줄로 믿어왔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하나님 자신의 창조곡 산물이다. 73.성서비평(Biblical Criticism) (93.하등,92고등) 모든 비평에는3가지요소가 있다.(비평의 대상,비평하는 자,비평의 기준) 이 세가지 요소가 달라짐에 따라 비평위 내용과 성격이 달라지게 된다. 비평하는 일이 성경연구에 적용되면서 성경비평학이라는 명칭을 가지는 동시에 성경연구와 신학 사상에 중요한 연구분야로서 알려졌다. 1)하등비평(Lower Criticism):본문의 전승이 보여주는 역사적인 자취를 연구하여 현재의 본문의 방언적,문장적 문제점들을 살펴서 그 본문의 본래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2)고등비평(Higher Criticism):성경의 저자,저작시기,본분 구성 등을 통해서 성경 책들의 단일 저작설을 부인한다.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성경의 신빙성을 파괴하는데 힘쓰는 학문이다. 74.성서 신학(Biblical Theology) 성서신학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아계시의 과정을 취급하는 주경신학의 한 분야이다.즉,신적활동으로서의 계시를 취급한다.그러므로 계시과정의 성격 및 방법은 자연히 신적 사엿 그 자체의 양상과 밀접한 연락을 취하게 된다. 성경신학의 특징은 역사적이며,신적인 것을 기초로 하는데 신성을 취급하며,구속적이며,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 지식을 성경에서 취하는 것이다. 75.성서영감론(Inspiration of the Scripture)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앙과 행위를 위하여 특별한 권위를 가진다. 영감론에는 기계적 영감설,역동적 영감설,축자영감설등이 있는데 성경는 축자 영감설로 씌어진 것이다. 76.교리문답(Catechism) 원어의‘응답한다’라는 말이‘가르친다’라는 말로 발전하여 생겨났다.교리 문답은 기독교교리를 요약하여 초신자들에게 기독교의 가초적인 신앙을 학습시키고,신앙의 체계를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소요리문답,제네바 요리 문답서,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등이 있다. 77.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 1643-1647까지 영국 웨스트민스트에서 개최된 성직자 대회에서 장로교회의 신앙에 관한 내용을 법규로 제정한 고백서이다,전문33장으로 이루어짐.교리적입장은 청교도적,칼빈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특히 강조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하나님의 주권,양심의 주권이다. 78.성육신(Incarnation: 성육신은 태초에 성부와 함께 계셨던 말씀은 성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본체시나 성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본래 성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을 오히려 내어 놓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태를 가지고자 사람과 똑같은 육신을 입으신 것을 의미한다. 79.성 찬(Eucharist) 성찬은 기독교의2대 성례중의 하나인데,세례가 기독교에 입교한 것이고,단회적이라면,성찬은 기존 신앙을 강화하여 보다 밀접한 교제를 갖기 위해 반복된다. 주께서 친히 제정하신 목적은 주님의 죽음기억,전파,교제를 위하여 이다. 80.성화(Sanctification) 구원에 이르는 최후의 도정을 성화라고 한다.루터는 믿음으로 말마암아 의롭게 되며 의롭게 된 자는 거룩한 생활을 통하여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따라서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을 말한다. 81.영화(Glorification)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중생과 칭의로 구원이 보장되었으므로 이는 과거적 구원이며,성화는 진행중이므로 현세적 구원이고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한 해방이 되어 성결한 자리에 이르는 영화는 미래적 구원을 의미한다, 82.세속화(Secularization) 20C후반에 들어와 전통적인 보수신학에 전면으로 맞서는 파격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급진 신학이 본격적으로 출현하디 시작했다.위기감이 돌고 있다. 세속화 신학의 문제점은 첫째,출발점이 합리주의임,둘째,주관적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장함,셋째,교회와 사회의 명백한 분리선이 없다.넷째,구원보다 사회개혁이 우선한다. 83.속죄(Atonement) 속죄라는 뜻은 둘을 하나로 만든다는 뜻이다.예수께서 지상에서 하신 두 가지의 큰 목 적은 저주의 제거와 회복이다.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화해시키셨다.화해시키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속죄라 하면 이 속죄 교리가 복음의 핵심이다. 84.숙명론(Fatalism) 숙명론은 일명 운명론이라고도 한다.모든 사물은 미리 정해진 운명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상으로 기독교의 예정론이나 결정론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예정론에서는 신의 의지를 절대시하지만 운명론에서는 운명을 절대시한다. 숙명론은 하나님의 인격과 인간의 자유를 배격하는 비성경적 사상이다. 85.시간 1)어떤 일의 수행을 위한 특정한 시점,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 영원한 것들을 특정한 순간에 드러내는 것 2)일정한 기간의 시간, 자신의 목적에 따라 모든 시간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계시해 주는 것 86.시대주의(Dispensationalism) 1830년경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그 신학 체계를 가지기 시작한 전천년주의자 중의 일부 무리에게 붙여진 이름.시대주의자들은 모두 전천년주의자들이지만,전천년주의자가 모두 시대주의자인것은 아니다. 시대주의자들은 항상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고집한다. 87.신복음주의(New Evangelicalism)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수정주의 운동으로20C중엽부터 미국 신학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운동이다.보수신앙의 학적 방어와 보수주의교회의 자기반성을 촉구함과함께 학적수준의 향상,복음의 사회적 적용,보수 신학의 변증 등을 주장한다. 88.역사비평(Historical Crticism) 어떠한 인간의 사건,문화제도,철학이라도 역사적인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18세기 요한 헤르러 중심 학파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역사를 비평하는 개념이다. 89.내재(,Immanence) 내재는 초월해 있다는 개념에 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세상의 진행과정속에 내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하나님의 활동은 초자연적이라기보다는 자연적인 것으로 무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것들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90.영감(Inspiration) 신학에서 말하는 영감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직접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특별한 인가나 보증을 가지는 것을 전통적으로 의미한다. 91.친교(Koinonia)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사교적 관계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일에 협력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친교는 외적이고 일시적인 차이점들을 초월한 본질적인 유사성을 그 필수요건으로 한다.참된 교제는 참된 신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94.애찬(Love feast) 신자들이 나누는 공동식사 95.마리아론(Mariology)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로서,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이다. 둘째,마리아는 평생 동정이시다. 셋째,마리아는 무원죄 잉태(무구회태설)이시다. 넷째,마리아 피승천 96.은유(Metaphor, 두 상이한 것들 사이의 은근한 비교를 행하는 것. 97.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는 라틴어‘밋씨오 데오’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성삼위께서 몸소 예비하신 방도 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선교행위들을 지칭하는 말이다.그러므로‘하나님의 선교’란 전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시고,또한 성부와 성자가 함깨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루어주시는 것이다. 98.유명론(Nominalism) 보편적인 개념 혹은 본질들은 분리되고 독립적인 실재성을 갖지 않으나,비슷한 특성아 있는 개별적인 사물을 하나의 부류로 조직하기 위하여 정신적으로 사용하는 단순한 명칭이라고 주장하는 지식에 관한 학설이다. 99.편재(Omnipresence) 하나님께서 어디서나 함께 계신다는 본질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그의 창조성과 능력은 모든 것에 작용한다. 100.종교 다원주의(Post-modernism) 포스트 모더니즘은 탈 근대주의,탈 현대주의로 표현한다. 특징을 몇 가지 알아보면, 첫째,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는 것이다. 둘째,미래에 대한 불안이 종전의 낙관주의를 대처하게 되었다. 셋째,다원주의 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믿음의 첫발걸음을 내딛고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하고, 영접 이후에 주님과 동행하며 죄로부터 떠나는 모든 과정속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과정을 <성화>라고 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죄의 존재로 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주님과 같이 거룩한 형체로 순식간에 변화되는 과정을 <영화>라고 합니다. 이것을 <구원의 3양상>이라고 합니다. 먼저 결론부터 표로 정리하고 이 세가지 진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7.성화(Sanctification) -> 8.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
9.영화(Glorification) 로 이어집니다.
* 구원의 3양상
양상
말씀
의미
방법
태도
결과
이해
1.칭의
엡2:8-9
롬3:24
구원을 얻었다
(과거)
믿음
(영접)
감사
죄의 <형벌>
로 부터 해방
주님을
모심
2.성화
빌2:12
벧전2:2
구원을 이루라
(현재)
믿음
(순종)
겸손
죄의 <권세>
로 부터 해방
주님을
닮아감
3.영화
롬13:11
고전15:
51-52
구원이 가깝다
(미래)
믿음
(재림)
순결
죄의 <존재>
로 부터 해방
주님과
하나됨
1. 칭의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칭의(Justification)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불신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로 방향전환(회개와 영접)을 함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는 의로운 존재가 아닌데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우리의 어떠한 행위나 의지나 선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는 <구원의 출발점>이 되며 마치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가 한 가정의 양자가 되듯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과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하늘의 모든 축복과 하나님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접의 의미는 단순히 복음을 머리로 가볍게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드시 마음을 찢는 애통함과 나의 죄로 인한 아픔, 지옥불에 떨어질 정도로 심각했던 나의 죄로 인해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과 마음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회개가 없는 영접은 진정한 칭의라고 볼 수 없으며 천국과 영생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접의 과정은 사람에 따라 단번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빨리 걸리든 오래 걸리든 반드시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진정한 칭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머리로 복음을 이해하고 형식적으로 영접기도 드리는 것은 진정한 칭의가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복음으로는 거세게 사망으로 흘러가는 죄된 옛 생활의 흐름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쪽으로 방향전환을 한 사람은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되어 그동안 내가 지은 죄, 지금 짓고 있는 죄, 앞으로 짓게 될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로부터 용서받습니다.
단지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만으로 내가 저지른 죄악들이 전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칭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공로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회개와 영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2. 성화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
"그러므로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2)
죄로부터 확실하게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마음에 모셔들인 사람에게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권세와 통치, 영생, 죄사함, 구원의 여러가지 축복들이 단번에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갓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많은 경우에 영접하자마자 갑자기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주님과 대화해 본 적도 없으며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맺어져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 자주 대화하며 동행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주님과의 관계가 발전되고, 주님의 성품과 약속과 주님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누려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더 깊이 맺어지면서 주님을 향한 갈망과 주를 닮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나도 싫어하게 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나도 기뻐하며 즐거이 순종하게 됩니다.
성화(Sanctification)란 이미 칭의를 통해 얻은 완전한 구원의 선물가방의 지퍼를 열고 다양한 구원의 축복들을 하나씩 꺼내어가면서 누려가는 즐거운 과정입니다. 죄사함, 거듭남, 천국시민권, 영생, 의롭게 됨, 기도의 특권, 주님보좌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무한 통행권 등... 셀 수 없는 수많은 구원의 축복들을 누리며 열매맺는 과정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뜻과 상반되는 이전에 누리던 옛사람의 잔재들을 하나하나 포기하고 버려가는 아픔이 수반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칭의의 과정에서 진실하게 마음을 찢고 회개함으로 영접한 사람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기 때문에 기꺼이 그 아픔을 감수하며 옛사람을 포기하고 버립니다. 그리고 더 깊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속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단계의 초기에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성장통의 과정을 겪지만, 그 단계를 지난 후에는 이제 다른 사람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내가 받은 구원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이제 내 중심의 시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마음 아파하며 하나님과 동일한 관심으로 전도하고 양육하며 다른 사람의 믿음을 붙들어주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화단계의 최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갈2:20)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이미 칭의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진리입니다. 단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결국 나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Nothing임을 깨닫게 되고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가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진리를 깨닫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가능하다면 칭의의 과정에서 이 진리를 빨리 깨달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현재 처음 믿음을 갖는 자들에게 믿음의 첫단추를 (갈2:20)로 끼워주려고 노력하는데 마음만큼 잘 되지는 않네요.^^;;
성화는 서서히 죄의 권세로부터 멀어지고 주님의 권세와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정말 경이로운 과정입니다. 성화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3. 영화 (죄의 '존재'로부터 해방)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롬 13:1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영화(Glorification)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홀연히 이루어지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마지막 나팔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순식간에 믿는 자들이 다 변화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죽은 자들이 일어나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되고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도 이어서 변화된다고 합니다. 이 날은 (살전4:16-17)에 나오는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여 영원토록 주와 함께 거하게 되는 천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첫날(휴거일)이 될 것입니다.
영화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입니다(딤후4:7-8).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죄와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스스로 믿음을 버린 자들, 믿음을 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배교하는 자들, 양심이 굳어져 믿음에서 파선한 자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영화는 죄의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벗어버리고 주님과 같은 썩지 아니할 완전한 몸을 입게 되는 과정이기에 죄의 존재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순간이 바로 영화입니다.
지금껏 20여년간 예수님을 믿고 생활하면서 배우고 누린 구원의 개념을 위와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구원을 스스로 확증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를 부모로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녀의 마땅한 도리이자 부모님께서도 당연히 원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교만하게 구원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반박할 지 모르지만, 그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맺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아주 무식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고후13:5)말씀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확증하라고 하셨고,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버리운 자라고까지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거두절미하고, 많은 크리스찬들이 고민하고 헷갈려 하는 구원의 확신문제에 대해 제가 지금껏 사랑하고 섬겨온 주님과의 관계속에서 경험한 진리를 토대로 조심스럽게 종지부를 찍어봅니다.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원인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한 가지 이유로 압축됩니다.
한마디로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을 진짜 사랑하는데 연약해서 자꾸 넘어지고 죄의 유혹에 빠져서 구원의 확신이 흔들려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용납하지 못하시고 내가 자꾸 죄를 지으면 구원을 취소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주님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십자가로는 내 죄를 씻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없는 참람한 고백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부터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고백이 진짜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지속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되었고, 원수되었을 때에도 목숨버려 사랑해 주신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단지 머리로가 아닌, 가슴과 삶으로 체험하고 느끼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연약함과 넘어짐 속에서도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주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반석위에,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고 나아가 자백하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단 한가지 근거도 역시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주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압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도 세세하게 다 압니다. 주님과 친하니까... 주님을 못견디게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주님의 눈빛과 제스처만 봐도 그분의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평생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살아왔는데 천국문턱에서 갑자기 주님이 정색을 하시면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말씀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아는 사람은 매일매일 주님과 손잡고 동행하며 에녹처럼 살아가다가 그 모습 그대로 천국문턱을 넘어 즐거이 노래를 부르며 여유있게 걸어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자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이 얼마나 온유하시고 선함이 가득하시며 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기에 자신이 지금 당장 죽더라도 주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것을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이제 더 이상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로 계속 세월을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행복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깊이깊이 맺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24시간 내내 종일 손을 벌리며 우리가 달려가 그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실시간 대기상태에 있기 대문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바로 지금 내 모든 상황들을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주님께 아뢰며 마음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사탄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제 그 본색을 드러내며 대놓고 진리를 짓밟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훼방하며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미혹하여 넘어뜨릴 것이며, 지금 전세계적으로 그 가증한 일들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탄이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오실 모든 준비를 마치시고 이제 구름을 타고 계시는 듯 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무척 어둡고 수심에 가득차 계십니다. 이제 더이상 스스로의 구원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영적인 갓난아이 수준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주님과의 사랑에 푹 빠져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주님의 제자와 일군, 그리스도의 군사, 주님의 순결한 신부로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주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사탄이 주는 이생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어두운 세상속에 푹 빠져서 살아갈 시간이 없습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7-8)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가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날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었던 내가, 주님을 이토록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먼저' 내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루터의 성만찬에 대한 입장은 초기에는 화체설에 가까운 이해를 가지고 있다가 후에 쯔빙글리와의 논쟁을 거쳐 공재설(Consubstantiation)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루터가 이야기하는 성만찬의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성도의 교제이다.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은 것은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들의 교제와 연합의 확실한 표지는 받는 것이 된다.
둘째는 사죄의 은사를 말한다.
루터는 성만찬때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은 우리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며, 또 그리스도께서 거기서 우리들의 죄사함을 성취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만찬을 통해 이미 획득된 용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따라서 성만찬안에는 죄의 용서가 있다고 말한다.
셋째, 성만찬이 죄악속에서 괴로워하며 비탄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힘과 위로를 준다는 것이다.
루터는 성만찬 예식을 통해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단할 수 있도록 아주 빈번히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같이 루터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신앙을 돕고 촉진시키는 표적에 불과한 것이며
성만찬의 효과는
자체의 작용에 의해서가 아닌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한다.
루터가 사용한 성만찬 예전(독일미사예전)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
입당송 또는 독일어찬송 / 키리에(Kyrie eleison) / 인사와 집도문(collect) /
서신서낭독 / 독일어 찬송 / 복음서 봉독 / 사도신경(이때 성물이 준비된다) / 설교
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 Room)
주기도문 해설 / 권면 / 성찬제정사(이때 성체분할과 배찬이 이어짐) /
성만찬 참여 / 성찬후 기도 / 아론의 강복선언(축도)
이처럼 루터의 예전은 중세교회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그레고리성가' 대신 독일어 회중 찬송인 '코랄(Chorale)을 사용하였다. 루터는 서방교회의 예전을 많이 보존하려 했으며 성만찬 예전에 있어서 봉헌순서를 없애고 주기도문 해설을 넣었으며 성찬제정사는 그대로 둔 반면 봉헌기도, 감사기도, 중재기도등은 순서에서 제외시켰다. 성만찬을 나눌 때는 삼성송(Sanctus)이나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을 불렀으며, 성만찬 후에는 루터의 기도문을 낭송하고 아론의 강복선으로 예전을 끝맺었다.
쯔빙글리는 무엇보다도 말씀에 강조를 두었고, 성서일관는 간소화하고, 성자축일에 관계된 기도문 등을 없애버렸다.
성만찬예전에 있어서는 봉헌과 서송을 제외시겼으며, 서문경(preface)과 삼성송은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루터의 성만찬 예전과 비교해 볼 때 쯔빙글리의 예식에는 시편교송이 들어가 있는 반면 축도가 없이 "성찬 후 기도"로 끝을 맺고 있다. 이처럼 쯔빙글리의 예배의식과 내용은 매우 간략하다. 특히 성도간의 교제를 강조하던 개혁자중 하나인 쯔빙글리의 예배의식에는 공동으로 참여하여 교제하는 순서가 어디에도 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쯔빙글리의 신학은
지금의 성만찬 경시풍조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칼빈의 성만찬
칼빈이 1542년 제네바에서 발간한 칼빈의 예배의식
-1542년 제네바 예배의식-
말씀의 예전 (The Liturgy of the Word)
예배의 말씀 / 죄의 고백 / 용서를 구하는 기도 / 운율시편 / 성령임재를 구하는 기도 /
성경봉독 / 설교
다락방 예전 ( The Liturgy of the Upper Room)
구제헌금 / 중보기도 / 성물준비 / 사도신경 / 봉헌기도 / 성만찬 말씀 / 권면 /
성체분할 / 분병분잔 / 성만찬 참여 / 성찬후 기도 / 시므온의 찬미 / 아론의 축도.
이 제네바 예배의식은 칼빈이 매주 교회의 예배속에서 고대교회의 단순하고 간결한 성만찬 예전을 회복하려 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경봉독과 설교는 고대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예배에서 오직 말씀만 회복시키려는데 관심을 둔 것만은 아니고 성만찬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즉 칼빈은 예배의 핵심적 요소를 말씀과 성만찬으로 보고 가능하면 초대교회의 예배내용을 살리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칼빈의 예전은 키리에(Kyrie)나 영광송(Glora)등을 생략한 반면 예배의 부름, 용서를 구하는 기도, 성령임재를 구하는 기도, 중보기도, 시므온의 찬미, 아론의 축복등을 포함하고 있다.
성만찬은 먼저 집례자가 받고 그 다음 다른 교역자들과 회중의 순으로 받도록 하였으며 성만찬에 참여할 때는 성찬대(Holy Table)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거나 또는 선자세로 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예배의식은 후에 대륙지역에서는 프랑스, 스위스, 남부독일, 네덜란드, 덴마트등지의 칼빈계열교회들의 예배모범이 되어졌다.
4. 웨슬리의 성례관과 성찬
1. 성례관
"그리스도의 가시적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이 교회에서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에 따라 성례전이 정당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웨슬레가 1784년 미국 감리교회를 위하여 제정한 25개 신조 안에 있는 교회의 정의이다. 여기서 성례의 정당한 집행이 교회의 본질로서 강조되어 있다.
웨슬레는 성례전은 "내적인 은혜의 외적 표상이요, 그것을 받는 수단이다"고 표현한다. '은혜의 수단'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그는 제도적인 은혜의 수단으로서 기도, 성서탐구, 그리고 성만찬의 3가지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2. 성찬
성찬의 중요성에 대하여 웨슬레는 성찬은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법으로서 "성령의 모든 은총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에 전달되는 큰 통로"라고 하였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자주 성찬에 참여해야 되는 이유로써 첫째,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 전에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고 하셨다. 둘째, 신자들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난 죄를 용서받고 현재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하는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떡과 포도주로 강하게 되듯이, 영혼은 그리스도의 몸과 표지에 의해서 강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찬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다.
웨슬레에게 성찬은 현재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대속을 상징하는 표적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적용하여 확증케 하는 인증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의 성육신과 고난이 주는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동시에 성찬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가질 천국 잔치에 대한 보증이 된다.
나아가 우리는 성찬을 통해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져오는 성령의 적극적인 현존 때문에 성례에도 이 신앙적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특 수한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웨슬리 예문
개회의 예배
전주 / 예배의 부름-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기도 / 입례송
참회의 예배
참회의 성경말씀 / 참회의 부름 / 공동 참회 기도 / 용서의 기도
말씀의 예배
예전 / 구약의 신앙고백 / 구약의 찬송 / 구약성서봉독 / 하나님의 예전 / 신양성서 봉옥 /
신앙의 찬송 / 신양의 신앙고백 / 설교
성찬의 예배
봉헌 / 대화-경건과 감사 준비로서의 대화 / 서언 / 기도 / 성별의 기도 / 성찬분급 /
주기도문 암송(영창) / 감사와 헌신의 기도 / 찬송 / 축도 / 후주
2) 고고학 : 비문, 고문서, 동전, 예술적 작품 등 수집된 자료를 통하여 성경의 배경 연구에 도움을 준다.
3) 인종학 : 인류를 민족과 국가로 구분하고 세계에 그들의 분포 상황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그 종족의 기원, 연관성, 정신적 도덕적 특성, 그리고 이런 특성들을 이루게 한 요인들을 알려준다.
4) 비교언어학 : 인류 언어의 자연적인 그룹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언어와 방언의 기원 및 관계를 찾아내고 또 인류 역사의 시작에까지 올라가, 현재는 분리되어 있는 종족들의 단일성과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진 명의 자료들을 찾아내는 학문으로서 성경의 배경 연구에 도움을 준다.
5) 비교종교학 : 모든 이방종교의 역사, 신앙, 원리, 제도, 실제적 특성들을 연구하고 비교하는 학문으로 이들이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게시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하여준다.
6) 철학 : 철학은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려는 학문으로서 인간의 모든 학문 가운데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철학은 고대, 중세, 현대의 모든 철학 학파들의 기원, 발전사와 그 원리, 방법, 주장 내용 등을 비교 연구하는 일을 포함한다. 이로 말미암아 철학과 신학은 그 공통적인 과제 (인생의 궁극적 질문)에 대하여 상호 어떤 영향을 끼쳐 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신학 연구에 도움을 준다.
7) 심리학 : 개인적 의식과 행동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 심리의 행동법칙을 밝히는 학문으로서 간의 종교활동을 설명하는데 관련을 갖는다.
8) 미학 : 음악, 수사, 건축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미의 법칙과 모든 예술의 원리 및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간의 종교 생활의 표현방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 외에도 물리학, 통계학 등이 신학에 도움을 준다.
9) 문화인류학 : 오늘날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문화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한다. 석기를 사용하는 문화에서부터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가족, 친족관계, 경제생활, 정치생활, 종교생활과 같은 여러 문화적 생활을 연구하여 해당 사회의 내적 규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2.성경신학
A. 구약학
1) 히브리어 : 구약성경을 원문으로 해독하기 위한 학문이다.
2) 모세오경 : 문서설과 그 밖의 비판적 학설을 평가하여 모세오경의 신비성과 저작권을 성경적 입장에서 밝힌다.
3) 구약사 : 구약의 창조시대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족장시대의 문화와 풍속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포로에서 귀국하는 시기까지에 걸쳐 개괄한다.
4) 구약서론 : 구약의 편집, 연대, 저자 및 배경과 사상등의 개론 문제를 취급한다.
각 사본과 고대 역본들과 외경에 관한 문제도 취급 비평한다.
5) 시서총론 : 히브리 백성의 시의 본질과 지혜문의 내용들을 취급한다.
그 범위는 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및 아가서이다.
6) 대선지서 : 대선지서를 특히 성경신학적 면에서 연구한다.
7) 구약신학 : 구약신대의 하나님의 계시의 과정을 개괄하여 구약 내용의 신학적인 문제와
구약의 종교적 제도 등을 취급한다. 특별히 구약의 내용을 사상적, 신학적 체계 밑에서 파악하도록 한다.
8) 성서고고학 : 성경연구에 도움이 되는 고고학이 제공해 주는 자료들을 연구한다.
9) 소선지서 : 포로 전후의 여러 소선지서의 시대와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면서 그 내용과 사상을 주경학적으로 연구한다.
B. 신약학
1) 성경 해석학 : 성경해석의 원리를 연구한다.
2) 신약해석 : 신약의 각 책을 다루는 과정으로서 특별히 필요한 구절을 해석하며, 각 책들의 구조와 주된 테마를 정립한다.
3) 신약서론 : 신약의 배경, 정경론, 사본학 등 신약 각 저자 및 중요한 내용을 검토하면서 연구한다.
4) 헬라어 : 신약 성경을 원문으로 해독하기 위한 학문이다.
5) 신약신학 : 복음서를 중심으로 필요한 귀절을 해석함으로써 천국의 개념을 예수님의 사역과 연관시켜 구체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6) 복음서 : 예수님의 지상생애와 사역을 중심으로 복음서들의 증언과 복음서 비평의 역사적 발전을 다룬다.
7) 사도사 : 사도행전 기록과 내용에 대한 비평적인 연구에 대하여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정립하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초로 왕국과 성경과 복음전도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3.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교의신학)
1) 변증학 : 본 과목에서는 비기독교 철학 사상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유신론 신앙을 이론적으로 변호하는 방법론을 연구한다.
2) 험증학 : 본 과목에서는 비기독교적 과학사상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유신론의 신앙을 변호하는 방법론을 연구한다.
3) 조직신학 서론 : 신학의 본격적이며 조직적인 연구에 앞서서 그 서론적인 이해를 도모하고 교의연구의 기초를 제시하는 학문이다.
4) 신론 :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연구한다. 하나님의 존재에서는 하나님의 명칭, 속성,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고, 하나님의 사역에서는 작정, 창조, 섭리를 다루게 된다.
5) 인간론 : 인죄론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다루게 된다.
원시상태의 인간,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 은혜언약 안에 있는 인간으로 구분하여 연구한다.
6) 기독론 : 기독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되게 하시어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7) 교회론 : 교회론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단체인 교회 안의 종교 생활을 성령께서 지도하시는 사역을 다룬다.
8) 구원론 : 구원론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효과를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방법론은 다룬다.
9) 종말론 : 종말론은 개인 종말론과 일반 종말론으로 구분된다.
개인 종말론은 개인의 사망으로부터 부활 사이의 인간 상태를 다루며, 일반 종말론은 세상 종말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10) 현대신학 : 현대신학 사조를 연구한다.
11) 기독교 윤리 : 본 과목에서는 기독교 윤리사상에 대하여 연구한다.
개인 윤리에서는 기독교인의 품격 조성 문제와 시험, 고난, 행복 및 신앙과 덕행문제 등을 연구하고, 사회윤리에서는 기독교인과 가정, 직장, 국가 등의 문제를 다룬다.
4. 역사신학
1) 초대교회사 : 기독교의 발생, 교회와 로마 정부와의 관계, 변증가들과 교부들의 신학사상에 비추어진 초대교회의 당면문제들, 교회의 예배와 생활, 이단운동, 신학파들의 비교연구 등이 다루어진다.
이 질문은 수 세월 동안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에 의해서 던져졌던 질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명확하게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자체는 그 어느 부분에서도 완전치 못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유인원으로부터 진화되었다고도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럴싸한 자료들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들은 오로지 한 분이신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도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주의 다른 모든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은 피조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한 창세기 2:7의 증거는 인간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로 말미암은 것이며 어떤 선행적 생물체로부터 진화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피조물들 사이에서 보면 인간은 모든 다른 피조물들과 뚜렷이 구별되며 모든 피조물들 위에 세워졌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말씀하셨으며, "온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주셨습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은 인간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얼굴 모습이나 신체모양을 갖고 계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와의 교제 속에서 더불어 사는 특별한 관계 속에 두시고자 창조하셨으며 그러한 관계에 합당한 성품을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돌이나 막대기나 인형이나 기계와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피조물로 인간이 선택받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처음 인간은 아담과 하와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사랑 받는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그 동산의 모든 식물과 동물들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귀중한 역할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오용함으로써 스스로 불행을 초래하였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이 행동은 불가피한 것이나 강제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그저 한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과 악의 유일하신 입법자요, 기준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자 한 교만이 불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고 그에게 순종해야 하는 피조물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 이 교만이 또 하나의 죄의 본질이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부패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습니다. 첫 사람의 범죄는 온 인류에게 영과 육, 이성과 의지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의 부패를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부패한 본성을 따라 실제로 어떤 죄적 행위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 앞에 죄인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죄인이란 것은 이미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먼저, 질병입니다. 인류 문화가 발달하고 의학이 고도로 발전을 했지만 인류에게 따르는 고질적인 질병을 근절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름도 알지못하는 질병들이 하루가 다르게 생성, 발전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릅니다. 아담이 죄의 유혹을 받을 때는 하나님과 같이 지혜로와질 것을 꿈꿨지만, 죄를 지은 후에 꿈은 사라지고 종신토록 땀흘려 수고하며 가시밭길을 헤쳐가야 했습니다. 그리하여서 남자는 종일토록 일해야 하며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갖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노동과 종족번식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었지만 인간의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노동의 수고와 해산의 아픔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것 말고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모든 고통들이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셋째, 필경은 사망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때문에 결국 맨 마지막으로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죄의 값으로 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에는 3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영의 죽음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육적인 죽음입니다. 인생의 근본은 생로병사라고 하여 죽음을 자연의 현상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육체가 늙어 죽는 것도 죄값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영원한 형벌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비참하고 두려운 일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 앞에 있는 영원한 형벌의 죽음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을 등한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종국에 가서 영원히 면할 수 없는 가장 엄청나고 무서운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죄 가운데 있으며 죽음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서 그 죄의 결과를 받고 있음도 알았습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은 영원히 이 죄의 멍에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죽을 수 밖에 없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피조물보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그 인간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인간들을 다시 원래대로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게 하는 축복의 손길을 내미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의 보증으로 갖고 있으면 그를 통해 인간의 죄사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으로 복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영원히 죄인으로 고통 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스스로 누릴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을 믿기만 하면 다시 하나님의 축복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다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더욱더 구체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여러가지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예배드리는 자들은,그 를 대함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어떤 일정한 형태를 가진 분을 대하는 것 같이 할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려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활동적이고 살아 계시며 인격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신 후에 어머니가 그 자녀를 염려하는 것보다 더 힘있고 진지하게 우리들 하나하나를 염려해 주시고 항상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처음과 나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언제나 변치 않으십니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의 모든 물체는 끊임없이 변하고 삼라만상은 시시로 달라지나 하나님만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무미건조한 성품이나 부동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점과 완전하고 절대적인 성품을 지니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그의 능력에 의하여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인간들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아시며, 또한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감찰하고 계십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에게는 "불가능"이란 말이 있을 수 없고 또 원하시는 것을 성취 못하심이 결코 없으십니다.
일곱째,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영원 가운데서 어느 일정한 장소에 뿐만 아니라 모든 장소에 모두 계십니다.
여덟째,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완전무결하심을 나타내 주십니다.
아홉째,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며 모든 판단에 있어서 공평하시고 편벽됨이 없으십니다.
열 번째, 하나님은 모든 환경에 있어서 믿음직하며 우리가 마음 전체를 바쳐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직 그만이 변절함이 없는 성실성을 소유하고 계시며 언제나 인간들에게 새 힘과 소망을 주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러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창세기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가운데는 천사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도 있으며, 사람과 짐승과 여러가지 생물들처럼 볼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며 관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만물들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이와 같은 질서가 세상 끝나는 날까지 게속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 인간을 가장 사랑하셔서 인간을 위하여 특별히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은 인간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과 행해서는 안될 것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으로서 십계명 가운데 명시되어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을 죄의 권세 속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이 그의 죄 값으로 마땅히 당하여야할 고난을 대신 당하시고 대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을 속죄하시는 업무가 완성되었으며, 인간을 위한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하나님은 과연 우리 인간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무엇때문에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집 나간 방탕한 아들을 날마다 애타게 문밖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그 부친의 아들을 향한 父情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도록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애타게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 인간들이 구원받도록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유일하게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원하십니다.
셋째,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본래의 모습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지중해 동편 해변에 자리잡고 있는 유대 -오늘의 팔레스타인 혹은 이스라엘 -나라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방 약13km, 해발 775km 지점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중앙 산맥지대에 속하는 산간 거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습니다. 이것은 의학상으로는 불합리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초자연적인 방법입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으므로 로마 군대의 갖은 행패를 다 받았고, 식민지를 다스리는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식민지 정책 밑에서 사는 나라와 국민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유대인들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대나라의 작은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이란 동리에서 자라나셨습니다.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의 아들로서 목수 일을 배우면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성하여 33세가 되시기까지 유대 나라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기는 하셨지만 다른 나라를 방문하거나 먼 여행을 하신 일은 없으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서 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말은 '구조자' 또는 '구원자'란 뜻으로 어떤 국가나 개인이 위기에 처하여 있을 때 거기서 구하여 낸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아'란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으로 제사장과 왕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의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신적인 본성과 인격적인 본성을 둘다 갖추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은 신이신 분이 인간의 고난을 대신 지시고 죽으신 참 신이시자 참 인간이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당시의 선지자들의 역할이었던 설교와 예언을 하셨으며, 오직 제사장만이 할 수 있었던 하나님과의 중재 역할을 하셨으며,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한 왕의 직책도 가지셨습니다.
첫째,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된 자리를 떠나 친히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오시어 여려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받으였습니다. 심한 오해와 질투와 시기 속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셨고 심지어는 가장 혹독한 형벌인 십자가형에 처해져서 육신 적 , 정신적 피로등 모든 어려움을 친히 체험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후 장사지내졌고 그 후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은 실패가 아니라 완전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사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 분은 오직 인간이 죄악 가운데 헤매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모든 업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셋째, 우리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 향한 통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이후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인간들의 죄악 됨을 손수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구원의 열쇠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참 신이시지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왜 수난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 분이 그 수난을 물리치고 이겨낼 힘이 없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인간에게 있는 병의 뿌리를 알아내야 합니다. 병의 근본적인 치료를 위하여서는 그 병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의 병은 죽음의 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인간이 지고 있는 죽음을 담당할 수 있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라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병에 걸린 인간을 대신하여 죽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분만이 인간의 참다운 구주인 것입니다.
물속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내기 위하여는 물로 뛰어들어야 하고, 또한 그를 구하지도 못하고 같이 물속에서 허우적 대다가 죽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사 인간의 근원적인 병인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적인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란 용어에는 아직 익숙치 않습니다. 알 것 같으면서도 그 개념이 명확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이란 무슨 개념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성부이신 하나님과 또한 성자인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3가지 위격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제 일 위는 아버지 하나님이며, 제 이 위는 아들이신 하나님이며, 제 삼위는 성령이신 하나님입니다. 이 세위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하나님이 3분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성령은 삼위 하나님으로 계시지만 항상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입니다. 여기에서 나오신다는 뜻은 서열, 우열, 순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신 것입니다.
첫째, 성령은 부르십니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인을 부르십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귀에 들리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고집스럽고 교만하던 중심이 무너져 내리며 회개하게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이루게 합니다.
둘째, 성령은 가르치십니다. 제한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노력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에게 영적인 빛을 비추시며 영원한 진리를 배우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일고, 성경의 가르치심으로 설교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은 거룩하게 하십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께 죄로 부패하여진 인간이 결코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회개한 심령에 성령님이 오셔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일을 하십니다.
넷째,성령은 인도하십니다.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인생은 만경창파에 항해하면서 수많은 외적인 문제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은혜와 진리와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다섯째, 성령은 기도를 도와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이 대화하는 일이므로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더욱 간절하게 도와주십니다.
여섯째, 성령은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십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의무요 본분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성도는 행실을 보아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별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령이 우리에게 가능하게 하여 주십니다.
일곱째, 성령은 보증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믿는 자의 보증인이 되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성령충만이란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12장 1-2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구원으로 택함 받은 성도들의 몸과 마음은 이미 하나님께로 향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의 모든 생활과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즉, 성령 충만한 생활이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매우 오래된 책이면서도 늘 새롭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록했으며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존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쳤습니다. 맨처음에는 돌판위에 씌어졌으며, 다음에는 두루마리 같은 것 위에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말씀하심에 따라서 그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영감으로 사람들의 심중에 말씀하셨으며, 이것을 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뜻을 기록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서가 된 것입니다.
성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속해 있었으며, 구약성서 부분은 지금도 히브리 민족의 성서로 되어 있습니다. 희랍어만 사용하게 된 유대인들이 그 히브리어 성서를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70명의 학자들에 의하여 히브리어에서 희랍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번역된 구약성서는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셉투아진트는 "70"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인간으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어 팔레스타인에 사실 때 그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도들은 새로 세워진 교회들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문서들이 "신약성서"부분이 된 것입니다. 주후 400년경에는 신구약 성서가 하나로 합해져 "성경전서"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성경 자체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란 말이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받아 기록한 저자들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총 66권을 40여명의 저자가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한번도 한자리에 모여서 내용을 논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천 육백년에 걸쳐서 기록된 것입니다. 또한 저자들의 지적 수준도 매우 다양합니다. 그들중에는 왕도 있었고 제사장, 목자, 어부, 의사, 군인 등 여러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책 전체가 하나의 오류도 없이 놀라운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접했던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성서가 가르치는 숭고하고 고차적인 윤리성은 행동의 결과보다 오히려 그 동기를 중시합니다. 모든 윤리의 최선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여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과연 선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현대과학이나 법률이나 의학이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를 성경은 다루고 있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았고, 방탕하던 사람이 성자가 되었으며, 과학자들이 지혜를 얻었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읽혀지고 있는 고전이며, 가장 많이 팔려서 읽혀지고 있는 베스트셀러가 성경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성경이 어떤 책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첫째, 성경과 다른 책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의 감동으로씌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뜻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계시의 책이며,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구원하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둘째, 성경은 완전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므로 부족하거나 틀린데가 없으며, 믿음의 기준으로 완전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중에서 어떤 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하여 버리거나, 어떤 부분은 수정하여 내용을 보충하여서는 안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성경은 저자가 40여명에 이르며 그들은 여러 층의 사람들로서 1,600여년에 걸쳐 기록한 66권으로 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다양하고 방대하면서도 그 내용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야(예수)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고, 신약은 그 예언이 성취되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메시야(예수)가 이미 오신 것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주전 1,500년경부터 주후 100년경까지 약 1,600년 동안에 결쳐 여러 사람들(약 40명)에 의해 쓰여졌다고 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는데, 구약은 히브리 말로 신약은 희랍 말로 쓰여졌습니다. 구약은 옛 약속(혹은 계약)이란 뜻이며, 신약은 새 약속이란 뜻입니다.
1.구약성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39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 구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은 그 전체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그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과 심령의 정체를 밝히 볼 수 있는 거울과 같고 인간의 영혼의 병을 위한 약의 역할을 하며 인간에게 빛이 됩니다. 성서는 내용상으로 보아 다음의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역사"는 성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우주의 역사, 하나님에 의하여 특별히 선택되어 사용된 히브리 민족의 역사, 교회의 시작과 복음전파의 역사 등이 성경에 수록되어 있으며, 더 의미 깊게 본다면 인간 구원의 역사가 구약과 신약에 걸쳐서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가 성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 있습니다. 우주와 인간의 창조로부터 죄와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사업, 영원한 생명 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그 자신과 그의 뜻과 그가 하시는 일의 목적을 인간에게 알게 하시는 기록이 성서의 중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셋째, 성경은 예언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며, 신약은 그 예언의 성취에 관한 기록인데 곧 그리스도께서 그 예언을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신약을 예언한 것이며, 신약은 구약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것과 그의 탄생의 방법, 생애, 행적, 그의 사업의 목적 등에 관한 사실이 구약 성서 가운데 미리 언급되어 있습니다.
넷째, 교리적인 면으로 보아 성서는 율법과 복음의 기록이며, 예언과 예언의 성취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 인간들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복음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해야할 것, 해서는 안될 것을 명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명하심을 지키지 않는 자나 회개치 않는 자를 벌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행하신 일 즉 인간의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시라는 은혜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다섯째,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특별한 기록이므로 그리스도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일한 길이시며 참된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책의 유일한 주인공이십니다.
성경의 첫째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크리스챤"이 되게 하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안내도와 게시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함 이니라"(요 20:31)
둘째,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회피할 수 없는 죄를 깨달아 알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법이 없는 곳에서는 잘못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법은 인간이 넘어서는 안될 한계선을 명시하여주며, 범법에 따르는 무서운 결과를 동시에 명시하여 줍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자녀들인 인간들에게 생활 지침이 될 윤리와 도덕 및 규율을 성서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준하여 합당한 길을 걷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7)
성경을 참으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경을 읽는 방법에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서에는 시도 있고 산문도 있어서 문학서로 알고자 연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소위 고대의 여러가지 종교에 관하여 쓰여있다고 하여 종교 학자들 중에는 비교 종교의 입장에서 성서를 연구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것만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것만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본래의 목적은 문학도 아니요 인생철학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영생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유일한 책이 곧 성서입니다.
책 중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다른 책들과는 전혀 판이하게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서"와 "내"가 대등하게 서서 성서를 이해하려고 한다든지 또는 "내"가 "성서"보다 높은 데서 서서 성서를 알아보려고 한다면 완전히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을 때에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성서 가운데는 어떤 말할 수 없이 강한 권위 있는 분이 계셔서 그가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며 읽고, 읽어가며 기도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점차로 깨닫게 되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어두움이 걷히고 밝아오는 듯한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서를 읽으실 때에는 반드시 이와 같은 태도가 중요한 것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한사람이 어떤 사실을 참으로 인정하고도 그것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들은 모든 것을 다 믿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이로운 것까지도 믿습니다만 이 역시 그것 자체만으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이라고 성경말씀에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는 한 사람이 믿음을 갖는데 다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계시하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이 사실들을 믿어야 하고 그것들이 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셋째, 그는 이 사실들을 그 자신을 위해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들이 말하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믿음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하시며, 우리를 향하신 약속이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자기를 의뢰하는 자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바로 이점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마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종교성이 다 있습니다. 천태만상으로 갖가지의 종교가 많이 있는데 이들을 종합하여 분석해 볼때 공통점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으니 곧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복을 달라며 우상에게 절하고 혹자는 믿음으로 인생의 수레바퀴를 돌리고자 고행의 길을 걸어 갑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에는 아무 종교나 다 믿으면 천당가는 것이니 다를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너무 다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누런 것이라고 해서 다 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짜일수록 더 빛이나고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입니다.
한 개의 못이 하늘로 못 올라 가지만 큰 자석이 오면 그 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자석이 위에서 끌어 올리려 해도 은이나 놋으로 그리고 나무나 금으로 만든 못은 못 올라갑니다. 오직 끌어당기는 자석에게 접착될 수 있는 성분의 못이라야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종교마다 믿음이 있지만 참으로 위에서 부르실 때 올라갈 수 있는 그 성분에 맞는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절대로 기독교의 믿음과 다른 종교의 믿음과는 가는 길이 다릅니다.
우리가 어떤 약을 복용할 때, 우리는 그 약이 우리를 도와줄 것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버스를 타는 경우에도 우리는 버스 운전사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를 가고자 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줄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게 되기 위해 필요한 믿음의 유형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롬10:17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것은 단지 우리의 귀로 말씀을 듣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나 다른 책이나 소책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듣는 것로만 생긴다고 하면 청각장애자는 구원받을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올바른 믿음은 전적인 신뢰를 동반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 가운데서 안전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기만 한다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떤 다른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커다란 축복의 선물일 뿐입니다. 오직 믿기만 하는 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놀랍습니다.
첫째,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의롭다 하심이란, 죄사람을 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믿음을 가질 때 기뻐하십니다. 그는 그의 말씀을 단순히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오는 것을 매우 즐겨하십니다.
셋째,거룩하게 하심을 받습니다. 온전히 거룩한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의 자녀들도 그로 인해서 거룩하게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는 변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까지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나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되는 현상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하는데 이 회심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마음을 돌이킨다"고 하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회심에는 죄를 슬퍼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일의 두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인간에게 주신 "구원의 사실"을 믿을 때에만 우리의 죄가 어떻게 하나님을 근심시켰는가를 알 수 있게 되고 마음으로 민망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은 단지 하나님의 노하심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접함으로 되는 것인데 이러한 슬픔이 구원에 이르는 참 회개를 가능케 합니다.
죄를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대할 때에 일어나는 인간의 당연한 반응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의 잘못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참 회개는 성서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 가운데 끓어오르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곧 회심인 것입니다.
구원이란영어로는 "Salvation" 으로서 의미 그대로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극심한 괴로움이나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제삼자가 건져내 주는 일을 말합니다.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 둘이서 하루는 강가에 목욕을 갔습니다. 그들은 얼마동안 재미있게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그만 실수하여 깊은 곳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친구를 불렀습니다. "사람 살려! "라고, 깜짝 놀란 친구가 그를 구하려고 물 속에 뛰어 들었습니다만 결국은 두 사람이 다 물 속에 빠져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을 본 지나가던 사공이 손을 내밀어 그들을 구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평범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만 이 이야기 가운데서 심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물에 빠진 사람의 손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이 죄 가운데 빠진 다른 사람을 구할 수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구원의 손"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롬 11:36) 고 하신 말씀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손은 사람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주변에 아직 하루의 생존에 어려움을 느끼며 사는 이웃들이 있지만, 경제성장을 거듭하여 오는 동안에 "보릿고개"라는 말은 이제 먼 옛날 전설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매사에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자만심에 마취되어 감각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항속의 금붕어는 내노라하며 뽐내고 좁은 물속을 비집고 다니지만 어항을 주관하는 주인처럼, 인생의 전체를 관망하시는 주님의 눈에 비친 어떤 부자도 가련한 부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고 외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하고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죄와 그로인하여 받아야 할 형벌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만든 다음 그것을 내버려두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우리의 생활의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악의 함정에 빠져서 자신을 구할 수 없게 된 것을 보시고 인간의 불의를 벌하시면서도 역시 죄인인 우리 인간을 구하여 내는 길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부터 오는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은혜로써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여 주시는 겁니다.
영화가 아직 지금과 같이 유행하지 않던 수십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뉴스 영화에 찍히게 되었습니다. "내 모습은 대체 어떠할까? "하는 흥미를 가지고 시사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떠하여겠습니까? 아마도 자기의 모습은 훌륭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신을 보고는 그만 스스로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여지는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죄된 모습입니다. 그것은 실망정도가 아니라 처참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 그 벌을 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시고 상처가 생기면 그것을 "고쳐주시는 하나님" 이신 것입니다.
이 구원의 확신은 자칫하면 자신의 느낌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느낌은 자신이 영생을 가졌다는 것을 확신케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이 구원받은 것같이 착각할 때 본인이 느끼는 행복한 기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얻을 수가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믿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 (요일 5:9) 이 말씀이 교훈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다면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증거가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롬 8:16)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성령께서 또한 그렇게 말씀하심을 압니다. 우리 안에 임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서 우리가 구원받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 안에 하시는 하나님의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 (요일 5:10)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가 영원함을 그들에게 말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란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를 못합니다. 교회라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도시나 농촌에 여기 저기 우뚝 우뚝 서 있는 벽돌 건물이나 시멘트 집 등 높이 세워져 있는 큰 건물을 연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십자가를 세운 건물 자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당(예배당 또는 성전)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헬라어로"교회"란 말은 '에클레시아'(ecclesia)인데 그 말의 뜻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세상에서 불려내진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을 말합니다.
또한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교회는 지상에 있는 모든 믿는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다시말해서 각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을 모신 한개의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과연 언제 시작하였을까요? 분명히 구약시대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이후에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시고 이 땅에서 40일 동안 머무르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생긴 모임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는 그곳에 예수님께서 부활이후 보내시겠다는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 성령은 불의 혀같이 임하셨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후로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된 것입니다. 그날을 가리켜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날이 교회가 처음 생기게 된 창립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교회의 모체가 되어서 그 후로 수많은 박해와 핍박속에서도 예수의 말씀을 믿고 증거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성도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교회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다른 일반 모임이나 단체들과 구별되는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창안과 노력에의하여 이루어졌거나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인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둘째,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일반 단체들이 회장이나 설립자가 주인인 반면에 교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세워졌습니다. 곧, 오직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신 점이 다릅니다.
셋째, 교회는 복음의 선교를 위한 기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으로 이룩된 교회는 예수님을 전하는 대변자로서 세상에서 할 일을 부여받았습니다. 다른 단체들처럼 물질적인 이익이나 지위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넷째, 교회는 신앙의 사귐으로 이루어집니다. 두 세 사람일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주님께서 계시는 곳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같이 계시는 곳, 그의 이름으로 기도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리며, 그의 말씀을 공부하고 명상하며, 주님의 성례를 시행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다섯째, 교회는 성만찬을 중심한 공동체입니다. 성만찬의 예식을 통하여 주 안에서 형제 자매로서 사랑의 경험을 나누며, 하나로 결속하는 공동체입니다.
여섯째, 교회는 세계적이며 거룩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어떠한 단체나 모임들도 이처럼 세계적으로 분포하며 또한 오랜 역사위에 세워진 공동체가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새신자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집에서 가까운 교회나 아니면 건물이 크고 성도수가 많은 교회를 쉽게 찾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십자가를 걸고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모두다 참교회는 아닙니다. 그중에는 일반교회들과 겉은 똑같이 해서 모르고 찾아오는 성도들을 이단이나 거짓으로 이끄는 교회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우선, 말씀이 올바로 전파되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이며 말씀 전파가 근본적으로 진실되어야 하며, 신앙과 행위에 지배적인 감화를 주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인위적으로 수정하거나 첨가한다면 그 교회는 참교회가 아닙니다.
두 번째는, 성례라고 불리우는 세례와 성만찬이 정당하게 집행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례는 말씀의 합법적인 사역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에 따라, 신자들과 그의 자녀들에게만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 성례에는 규칙이 있고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하는데 만약, 교회의 자의대로, 또는 목사의 임의대로 함부로 바꾼다면 그 교회는 참교회가 아닙니다.
세 번째는,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권징이라고 하면 교회를 순수하게 유지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권고하고 징계하는 일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에 주신 법도이므로 권징을 등한히 하는 교회는 곧 진리의 빛을 상실하게 되고 거룩한 것을 남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열거한 것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위의 세가지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세가지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교회는 참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달고 있다고해서 다 같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염두해 두시고 교회를 선택하고 신앙생활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에는 두 가지 대 예전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성례"(Ordinances)라고 합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을 말합니다. 이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귀중한 방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용서와 생명의 구원을 인간들에게 주시고 확증하시려는 방편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많은 율법적 규례들을 주셨는데 그 중에서 이 두가지 규례를 성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오직 우리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의식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을 통해 그의 백성을 하나로 묶기를 의도하셨습니다.
그런 만큼 이 성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소중하면서도 거룩한 의식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례는 기독교 성례전의 하나로서, 입교하려는 사람들에게 물을 사용하여 베풀어 씻는 예식입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친히 세례를 베푸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도 세례가 베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기독교 초기부터 중요한 교회의식의 하나로서 존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전통적인 세례가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례를 줄 수 잇지만, 질서와 공중의 덕을 위하여 교직자(목사)가 없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사나 그 밖의 교직자가 세례를 베푸는 것이 보통입니다.
세례에 사용하는 물은 보통 물이기는 하나, 다른 한편 단순한 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포함된 물 곧 그의 말씀과 연결된 물이므로 특별한 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의미의 성례인 세례를 받아야만 교인의 자격이 주어지며, 세례는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그의 인생을 시작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태어나 제2의 생을 출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는 아주 귀중한 경험입니다.
세례라는 원래 말 뜻은 "씻는다"는 말 가운데 내포되어 있습니다. 죄를 씻어 거듭난다는 뜻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의 힘은 결코 물을 적용하는 어떤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내용에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인지하면서 세례의 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의 형식은 대개 침례와 산수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을 뿌림으로 행하는 세례를 산수례라고 하며 몸을 물에 잠금으로 행하는 세례를 침례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물을 붓거나 물로 씻는 세례가 있으나 오늘날 그렇게 행해지지는 않습니다. 보통 일반 기독교에서 행하는 세례는 산수례이며, 침례교에서 행하여지는 세례는 침례입니다.
그러나, 세례에는 어떤 형식이나 사용할 수 있으며 반드시 어느 일정한 형식만이 참된 세례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면 모두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의 중요성이 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죄의 용서를 받게 되고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된 그 능력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찬의 성례는 세례의 성례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고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6-28)
성찬식은 성단의 성례, 주의 만찬, 주님의 식탁, 성례,떡을 뗌, 성만찬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집니다. 성찬에서 사용되는 것은 가루로 만든 떡과 포도 열매로 만든 발효시킨 포도주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것자체가 지닌 의미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서 하늘의 선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것으로 성찬에 참가하여 포도주와 떡을 들 때마다 주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공급받고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갖난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듯이 하나님나라에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나라의 양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성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려면 학습과 세례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럴려면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 학습교인은 13세 이상되는 원입교인으로 학습 문답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지망하고 배우는 교인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배워야 합니다.
학습교인은 준교인이기 때문에 교인의 생활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온 학습교인은 예배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고 연구하며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하며 교회의 사업과 선교사업을 위하여서 헌금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세속주의의 생활을 버리고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개인적으로 가족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학습교인으로서 6개월 이상 잘 한 다음에는 세례문답을 하고 완전한 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학습교인이 된 사람은 세례교인, 즉 입교인이 되어서 일생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세례교인은 학습교인으로서 6개월 이상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잘 한 다음 당회에서 문답을 받습니다. 당회에서 그를 입교인으로서 가합하게 여기면 교회에서 신앙고백과 서약을 한 다음 당회장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완전한 입교인이 됩니다. 입교인이 되면 성찬에 참석하게 됩니다.
입교인은 완전한 교인으로서 교회의 전체회인 공동의회 회원이 되어서 교회의 일을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교인은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개인적으로 가족적으로 철저히 해야 합니다.
세례교인은일생 동안 교인으로서 교회의 모든 일을 잘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인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인은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의 일에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의 에배에 잘 참석할 것은 물론 교회의 사업과 선교사업을 위하여 헌신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공통적으로 사후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기에 죽음이라는 주제는 늘 조심스러우면서도 예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후의 부분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상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종말의 날에 임하실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재림(SecondComing)이란 말은 이 시대의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위해 처소를 준비하러 갔다가 그들을 그와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시 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재림에 관해 전파한 최초의 사람은 아담의 7대손이 에녹이었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 1:14)
신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말씀은 그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신약 27권의 거의 모든 저자들은 재림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해서 신약의 216장 중 318개의 절에 걸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 25절마다 한 번씩 나오는 셈으로 성경의 5분의 1이 예언이고 그중 3분의 1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며 신약성경의 20분의 1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양의 성경구절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곳곳에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였는데,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크게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주장이 사실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예수께서는 이처럼 그가 지상에 다시 오실 것을 여러 번 하신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들을 하늘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자란 구약의 성도를 포함한 오늘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무덤에 누운 이미 죽은 자들도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사악한 통치자들을 멸하시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때 지상의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모든 자들은 사단과 함께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되며, 자신의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떠한 모양일까요? 예수께서는 처음 베들레헴의 허름한 말구유에 누우신 연약한 모습의 인간으로 오실까요? 아니면 지금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처럼 영으로 임하실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성경구절이 답변을 해 줍니다.
"이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9-11)
성경은 또한, 하늘 구름이 그의 마차가 될 것이며, 천사들이 그의 호위자가 되고, 천사장은 그의 전령이 되며,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의 영광스러운 수행자들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로 오셔서,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원수들을 그의 발 아래에 두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임하심에는 세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의 형태는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유대나라 말구유에 오셨던 예수입니다. 둘째는 영으로 오심이요, 셋째는 영과 육이 합쳐진 완전한 인격으로 오심입니다.
처음에 육체로 오셨던 그리스도가 이제는 영으로 와 계십니다. 다시 말해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로 오신 것도 불완전한 것이요. 영으로 오신 것도 불완전한 것이기에 영과 육이 합쳐진 완전한 인격이 필요합니다. 완전한 인격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가지시게 될 인격체로서 그것만이 완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완전한 인격체로 다시 오시는 것, 그것이 재림입니다.
첫째, 다른 사람을 위하여 지극히 적은 일이라도 선을 베품으로 의를 뿌렸을 때입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 11:18)
둘째, 우리가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자를 도와 주었을 때입니다.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 14:14)
셋째, 우리가 열심으로 은밀하게 기도하였을 때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데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넷째, 우리가 어떤 한 그리스도인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었을 때입니다. "누구든니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리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14)
다섯째,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되었을 때입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2-23)
여섯째,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을 때입니다. "모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룻2:11-12)
일곱째,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잘 돌보았을 때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로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요2 1:8)
"너희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 3:13)
우리는 주님께서 불현듯 오실 것을 늘 명심하고 지내야 합니다. 그러한 의식은 우리를 순수하고 거룩한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날은 도적같이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빈집에 도둑이 들어올 때 미리 '내가 오늘 너희 집을 털겠다'고 예고를 하고 오지 않습니다. 불쑥 아무때든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임하시는 재림의 날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날에 불현듯 임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베드로전서 4:7) 우리는 열심으로 예수를 믿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날이 임할 때 주님 앞에서 잘했다 칭찬받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전 15:58)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신앙을 키우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꼭 해야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도 매주마다 빠지지 말고 해야하는 것이 바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대화하고 교제하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배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주시며,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마음에 헌신과 충성을 새롭게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예배에 참석한 우리들은 예배를 통하여 믿음, 소망, 사랑, 이해, 용서, 온유, 겸손 등이 함양되어 우리의 변화된 생활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의 건강을 위해서 하루에 3끼 밥을 먹듯이, 영의 건강을 위해서 매주 예배에 참석하여야 합니다. 어제 밥을 먹었기 때문에 오늘 밥을 안먹어도 된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번 주에 예배를 드렸는데 이번 주에도 왜 꼭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는 옳지 못한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공식예배인 주일예배, 찬양예배, 삼일기도회에 참석함으로써 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처음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가장 당혹한 순간이 예배의 순서를 제대로 모르거나, 앉고 일어서는 부분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예배의 순서는 각 교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아래와 같은 공통의 순서를 따라 예배를 드립니다.
먼저묵도를 하는 것으로 예배가 시작하며, 이때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예배에 임하는 경건한 자세를 갖도록 합니다. 이어서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다같이 드립니다. 다음으로는 찬양(찬송)을 다같이 부르는데, 대개 일어서서 찬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장로님이나 기도를 맡은 자가 회중을 대표하여서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를 같이 드립니다. 그리고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서 성경봉독을 하는데, 성경을 찾아서 그 구절을 사회자가 봉독하거나, 같이 교독을 합니다.
그리고는 성가대의 찬양이 있는데, 이때는 모든 성도를 대신하여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의 찬양을 조용히 듣습니다. 이후 말씀을 목사님이 전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분명하게 해석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주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마무리 기도가 끝나면, 찬양을 부르면서 헌금을 하는 순서인데, 이때는 미리 준비한 헌금을 정성스럽게 드립니다.
그리고는성도의 교제를 위한 광고의 시간이 있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인 축도를 목사님이 하시면, 공식적인 예배가 끝납니다. 그리고 축도송을 성가대가 부르는 동안 오늘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1주일 생활에 대한 간구를 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예배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준비가 중요합니다. 일주일동안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모든 죄들을 모아서 기도로써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또한 일주일동안 굶주렸던 영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시간에는 적어도 10분 전에는 도착하여서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의 예배순서지를 보면서 미리 찬송과 성경봉독할 부분을 찾아서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자신과 설교자와 모든 순서맡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며, 예배당 안에서는 불필요한 언행을 삼가해야 합니다. 반가운 사람을 본다고 해서 큰소리로 인사를 나누거나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행동은 모두 다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교회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리고드릴 헌금은 미리 깨끗하게 준비하여서 성경책이나 찬송가에 끼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헌금시간에 꼬깃꼬깃한 돈을 주머니나 지갑을 뒤져서 찾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렇듯 예배를 준비하는 모든 마음자세가 경건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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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복장이나 외모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우리는 귀한 손님들을 대접할 때나 어려운 어른들을 만나뵙는 자리에 참석할 때, 양복이나 정장을 입음으로써 예를 표합니다. 그리고 결혼식이나 축하할 자리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멋있는 옷으로 입고 갑니다.
하물며 인간들을 만나는 데도 이처럼 예의를 갖추고 복장에 한껏 멋을 부리는 데, 우리를 만드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데에 입고 갈 옷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일주일동안 자기가 평소에는 아껴두었던 옷을 정성스럽게 다리고 깨끗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화려하거나 비싼 옷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차림이 아닙니다. 비록 누추하고 볼품이 없는 것이지만 깨끗하게 손질해서 입고 하나님의 잔치자리에 참석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각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들에 맞는 색깔과 피해야 할 색깔의 옷들이 있으니 그것은 절기를 참고해서 입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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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교회 주보는 어떻게 활용합니까?
교회문 앞에서 안내하는 분들이 주보를 나누어 주는데, 이 주보는 그 날의 예배를 안내하는 순서지입니다. 여기에 예배의 순서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예배시작하기 전에 미리 펴서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오늘의 성경말씀을 찾아서 갈피를 꽂아서 표시를 해두고, 찬송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는 광고나 교회소식들을 읽도록 합니다. 그 란에는 한주간에 교회안에서 있었던 행사나 경소사들이나, 또 자치회 모임들이 안내되어 있습니다. 교회생활에 빨리 익숙해지고 교인들과 친교를 나누고자 한다면 이 광고를 주의깊게 살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주의 말씀이나 성경공부의 란은 집에서 매일 매일 성경을 직접 찾아가면서 묵상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하루라도 말씀을 거르지 않고 읽어가는 일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렇듯 주보를 잘 활용하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주보를 그냥 버리고 오거나, 낙서나 다른 용도로 써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도는 그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감사하고 또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서 특별히 나와 나의 가정, 그리고 교회와 이웃을 위하여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이 나누는 대화입니다.
옹알이를 하는 귀여운 자식이 물을 달라는 것인지,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것인지를 알고 사랑으로 그 원하는 것을 해주는 부모의 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물며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간절히 원하는 바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를 아버지께서 어찌 못 들으시겠습니까?
악인도제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할 때 돌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언제나 기도로써 그들의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 주시길 원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서 우리의 신앙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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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인 기도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것들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추어서 기도의 시작에서 끝마무리로 이어집니다.
우선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경말씀과 생활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존중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를 사례하되 영적인 은혜와 육적인 것, 개인적인 것이나 단체적인 일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자복(회개)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에 걸리는 죄악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간구를 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자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구하며, 하루동안의 필요한 것까지도 구합니다.
그리고는다른 이를 위한 기도(중보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 곧, 온세계 모든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교회와 주의 일꾼들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아멘"이라는 말로 끝맺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높이고, 나의 죄를 자백하였다 하더라도 기도의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뿐임을 기억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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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기도는 언제 합니까?
기도란 독수리가 올라가지 못하는 곳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간디는 런던에 있을 때 회의를 하다가 기도드릴 시간이 되었으므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바닥에 꿇어 앉아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원의 한 위원회 석상에서도 회의를 하다말고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는 아침과 저녁 때 해가 질 무렵 하루에 두 번씩 기도를 하였습니다.
"네가 숨을 쉬지 않고 사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것 같이 기도 없이는 기독신자 됨을 볼 수 없느니라"고 헬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때, 모든 경우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라고 성경말씀에 씌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인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식사전과 잠자리에 들기 전과 아침에 깨었을 때, 또한 어려움이 닥치는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도와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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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기도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습니까?
기도에는그 모이는 인원수에 따라서 개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공중 기도)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개인기도는 자신의 생활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모든 일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속상하고 어려운 일들에 부딪혔을 때 집안에서나 조용한 곳에서 홀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는 기도입니다.
주로 신앙생활을 성숙시키는 역할을 하는 기도로서, 소리내서 할 수도 있고, 조용하게 속으로 바라는 바를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공적인기도는 공중 기도라고도 하는데, 예배 중에서와 어떤 모임에서 전체를 대표하여 하는 것으로서 그 예배와 모임과 형편에 따라 기도합니다. 대표자가 기도하는 경우 그 내용을 같이 맘속으로 아멘으로 경청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자가 그 모임의 모든 회중들의 기도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는 삼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적인 기도중에서 통성기도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가 한 맘으로 소리내어서 한 주제를 놓고서 같이 합심으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이때는 자신의 맘속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간구와 소원들을 소리높여서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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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기도시에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자신이 범죄하고도 그것을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있다면 그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기를 거절할 때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조그만 잘못도 용서해 주지 못한 입으로 어떻게 자신의 커다란 죄를 하나님께는 모두다 용서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기도를 그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인 사욕을 위한 소원과 옳지 못한 것을 바라는 기도는 하지 않음만도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에 대한 자세가 옳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성경말씀에 씌어 있습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심에 확신이 없이 의심을 하면서 기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때 그 기도는 진정으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교회에 처음 나온 새신자들이 당혹스러운 것 중에서 하나가 바로 이 헌금에 대한 것입니다. 헌금함이 돌려지는 것을 보고서 과연 내가 내는 헌금이 어디에 쓰여지고 또 왜 내야하는가에 대해서 한번쯤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렇다면 헌금의 정의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달이면 한달동안, 이모양 저모양으로 돌봐주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또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으로서,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가진 건강, 지혜, 재능 등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전부 그의 것이며 잠시 우리에게 맡겨진 위탁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중 일부 혹은 전부를 다시 그에게 돌려 보내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또한 헌금의 중요한 의미로는 신앙조직의 집단이며 공동체인 교회생활을 하는 교인의 의무입니다. 헌금이 쓰여지는 선교활동이나 구제사업에 동참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헌금생활은 개인생활의 기도와 성경공부 및 믿음에 힘쓰는 것을 기반으로 해야만 온전하게 성취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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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헌금은 왜 드립니까?
헌금을 드리는 가장 기본적 이유는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과 ,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는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 16:2)고 하셨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말 3:10)고 하셨으므로 순종의 의미에서 드리며, 교회의 기능중에 하나인 구제와 봉사를 실천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말고도 교회의 행사와 운영을 위하여서도 헌금은 필요한 것이며 특히 복음전파를 위해서 헌금의 뒷받침은 매우 긴요합니다. 금전은 인격시험의 시금석입니다. 금전에 대한 자세로 그의 인격과 믿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감사하고 헌금할 줄 아는데 따라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하는 교인의 올바른 마음자세는 모든 주어진 선물은 자기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위한 선물인고로 당연히 가난한 형제에게도 분배되기 위하여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과 성령으로 건설하는 것을 권하고 있는 한 교회 내에 말씀의 사역자를 위시하여 개개인에게 직분을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면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헌금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 또는 국내외 전도를 위하여, 또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 규칙있게 계획적으로 헌금하는 행위는 성경에서 분명히 명하고 있는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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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헌금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각교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모든 신자가 매주일 예배 때마다 공통적으로 드리는 헌금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십일조는 하나님의 구별하신 것으로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헌금입니다. 예를 들면, 수적인 의미로 100만원 소득이 있는 사람은 90만원을 다쓰고 10만원을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100만원 수입 후 10만원을 먼저 드리고 나머지 90만원을 쓰는 것입니다.
가축에도 십일조가 있으며 농작물에도 십일조가 있습니다. 농작물이나 가축의 경우 처음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하에 가장 좋은 부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축복을 분배한다는 형제 사랑의 도리에 근거를 둡니다.
그리고 일반헌금으로는 매주일 낮 예배시간에 모든 신자가 드리는 주일헌금을 들 수 있으며, 하나님께 받은 여러 가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헌금인 감사헌금이 있습니다. 생일이나 입학, 취직, 승진등의 감사한 일에 대한 헌금을 말합니다.
그 외에도 절기헌금, 특별헌금, 구역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등의 기타헌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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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헌금은 어떻게 내야 합니까?
헌금이란 잘 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에게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잘못 드리면 하나님께 욕되고 사람에게는 징계가 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헌금을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우선헌금은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세무서에 납부하는 것처럼 헌금의 정당한 수납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바치는 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사회사업이나 정치자금 같은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정성껏 준비하는 것입니다. 결코 인색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액면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득(이익)을 얻은대로 그에 비례해서 합당한 헌금을 내야 합니다.
헌금을통하여 즐겁게 자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각자의 형편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손수 수고한 것으로 드려지는 것이 더욱 값지며, 주님 일에 풍족하도록 하는데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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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헌금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헌금은 교회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의무적인 면에서도 꼭 시행해야 하지만 바치는 자에게도 크게 축복이 되므로 이를 시행함이 유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큰 축복이 됩니다.
고린도후서8:4-6에서는 "이 은혜와 서로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쫓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하는 것이 은혜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신자가 주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드릴 때 기쁨을 체험케 되며, 또 마음에 있는 악의 뿌리를 제거시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십일조 헌금을 하면 적극적으로는 넘치게 축복을 받게 되고(말 3:10) 소극적으로는 재난이 없어지며(말 3:11), 열방이 인정한 만큼 복을 받게 됨을(말 3:7) 성경에서 증언하십니다.
진실한마음으로 바치는 자는 그들의 자원을 더욱더 넉넉하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 이 말씀이 경제 원칙에는 위배될지 모르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명시해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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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헌금은 어디에 사용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은 여러 가지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헌금은우선 복음사역과 선교사역에 필요한 자금으로 적극 활용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일학교 각 부서 활동비 및 교육비로 조달됩니다.
또한 교역자 및 유급 직원들의 생활비(보수)로 충당됩니다. 말씀의 교역자가 그의 가정의 생활비로 인하여 그 직에 전념할 수 없다면 이것은 결코 교회의 바람직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비 명목으로,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돕는 부조금으로 사용됩니다. 그 외에도 교회 내부의 각종 관리비, 수리비 및 시설 확충비, 교육관 운영비 등으로도 쓰여집니다.
이것이외에도 교회의 사업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역자 양성기관, 전도사업, 교육사업등 이것이 활발히 실행되어지기 위해서 헌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교회란 돈이 안 드는 교회가 아니라 본래의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