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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예수영화" / "Jesus" 中国語

 
 
"예수"영화(中國語) The Jesus Film (Mandarin-China Version with Subtitles) (耶穌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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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ese Audio: The Life of Jesus Christ
Chinese:
The story of the Life of Jesus, His birth, life, death and resurrection. How he suffered and died to save You.
 
 
 
 

  어린이를 위한 성서 영화 "예수"

 

 

 

 

 CHINA "예수영화" / "Jesus" 中国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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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내 일생 주를 찬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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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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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로버트 모리슨 (Morrison, Robert)


    ■ 중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Morrison, Robert, 1782.1.5 ~ 1834.8.1] 



       로버트 모리슨 목사는 영국 런던선교회가 중국에 파송한 첫 개신교 선교사로 중국명은 마리쑨(馬禮遜)이다. 그는 중국에서 25년간 사역하며 10여명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했지만 선교 열의는 누구보다 뜨거웠다

       모리슨은 1782년 1월 5일, 영국 노덤벌런드(Nothumberland)에 있는 모패드(Morpeth)에서 스코틀랜드의 혈통을 이은, 청빈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로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리슨이 어릴 때에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생활을 받으며 성장 할 수 있었다.

       모리슨이 태어난 가정은 그의 아버지가 신발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 비교적 가난한 가정환경이었으나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엄격히 지도했다. 1802년 모리슨의 나이 20세 되던 해 모리슨은 일생 처음으로 인생의 슬픔이란 것을 체험했다. 그것은 이 세상 가장 가까이서 가장 존경하던 어머니와의 헤어짐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모리슨의 마음은 공허로 가득 찼지만 그러나 평소에 어머니가 자상하게 가르쳐 준 성경들을 기억하면서 슬픔과 외로움에서 금방 벗어나 위로를 받으며 살아 갈 수가 있었다. 
    모리슨은 열 두살 때에 성경에서 가장 긴 분량의 시편 119편을 하룻밤에 다 외울만큼 총명했다. 어머니가 지나간 세상, 그 어두운 밤의 외로움들을 시편 119편을 외며 잠이 들곤 했다.


       어느 날 모리슨이 그의 인생에 가장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선교사가 되어, 인생을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각오한 것이었다. 모리슨의 이 각오는 그로 하여금 마음을 불타게 했다. 그것은 순간적인 충동이 아닌, 어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강한 도전이었다. 어머니를 여윈 마음의 아픔도 가시기 전 그해 바로 런던으로 간 것이다. 런던에서 모리슨이 혹스톤 아카데미를 거쳐서, 1803년 고스포트(Gosport)의 선교사 아카데미(The Missiona- ry Academi)에 전입하게 되었다. 여기서 모리슨은 중국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중국에 가서 복음을 선교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전신을 사로잡았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중국대륙에 뛰어 들기로 각오한 것이다.

     

       마침 1805년, 모리슨의 나이 23세 때, 런던 선교회에 중국선교를 위한 신청서

    를 제출한 것이다. 그 이듬해 런던 선교회가 모리슨을 중국선교사로 내정하고 본격적인 선교사 훈련을 시켰다. 특히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중국 서적들을 통하여 현지훈련을 하고, 의학 및 천문학 지식까지 갖추게 되었다. 1807년 1월 8일에 목사로 장립을 받고 그 달 31일에 25세의 애띤 나이로 레미탠스(Remitance)호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 배의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었다. 레미탠스호는 모리슨을 싣고 미국을 향하고 있었다.


       모리슨이 레미탠스호를 타게 된 이유는 당시 영국과 중국의 외교관계는 동인도회사 독점으로 관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동인도회사가 대중국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인도회사가 재중국 무역의 전매특권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영업상의 이익보장을 위하여, 다른 목적으로 회사 배를 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모리슨이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다. 모리슨이 레미탠스호를 이용한 것은, 미국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가기 위한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으로 가는 우회길은 멀고도 험했다. 꼬박 110여일 간,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4월 20일 드디어 뉴욕항에 닿은 것이다. 레미탠스호의 항해는 장차 중국대륙에서 겪을 선교사의 길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워싱턴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제임스 매디슨으로부터 중국 광동주재 미국 영사에게 전달하는 소개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매디슨은 모리슨이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모리슨은 매디슨의 소개장을 깊이 간직하고 5월 12일, 트라이던트(The Trident)호에 올랐다. 이 배의 기항지가 중국대륙이다. 대양의 거친 파도를 헤집고 트라이던트호는 중국, 그 수천 년의 역사로 다져진 대륙을 향하여 조타기를 움직였다. 모리슨은 감격에 겨웠다. 매디슨의 소개장보다 하나님이 그를 소개하는 성경이 그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붙들어 준 것이다. 그러나 이 젊은 영국 청년이 장차 세계선교 역사에 큰 금을 그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1807년 9월 트라이던트호는 마카오에 다달았고 모리슨이 그렇게도 그리워하였던 땅이며 죽기로 가오한 땅, 그 중국 대륙에 닿은 것이다. 대륙의 진한 흙 냄새가 풍기는 땅을 모리슨은 힘있게 밟았다. 대륙의 냉기가 모리슨으로 하여금 이방지대의 정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아무도 모리슨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모리슨이 처음부터 그런 형식 같은 것을 생각지는 않았다. 사실 그를 맞아 줄 사람도 거기에는 없었다. 이런 격식은 차차하고 동인도 회사 마카오 주재 대표부의 모리슨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를데 없이 오만하고 거칠었다.

       ‘동인도 회사 소속 상인 이외, 그 누구도 이곳에서 머물 수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왔을 테죠’ 모리슨은 갈 데가 없었다. 돈독히 든 동인도 회사 사람들과는 얘기 상대가 안되었다. 게다가, 이미 마카오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로마 천주교 신부들은 모리슨이 마카오에서 어정대는 것을 눈의 가시같이 여겼다. 9월 7일, 그날은 주일이다. 마카오를 떠나, 광주에 도착하니 밤 8시였다. 거기에는 외국인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이관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오랑캐를 이족이라 불렀다. 이 말을 외국 사람들에게 붙여서 쓴 것은 외국인들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관은, 곧 서방인으로서 중국에 밀입국하였거나 또 입국 목적이 분명치 않는 외국인들을 임시 수용하는 곳이다. 그날 밤 모리슨은 이 이관에 들었다. 이관은 당국의 감시가 엄격한 데다가 여기저기 나붙은 이관 규칙들은 이 젊은 영국 나그네를 더욱 긴장되게 했다. 모리슨이 훑어본 이관의 규칙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외방인이 멋대로 광주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② 외방인의 경우 상무관계로 광주에 머무는 때는, 상관 내에 거주지를 제한한다.
    ③ 외출은 매월 세 번 할 수 있으나 매월 8일, 18일, 28일로 제한하고 매번 10명 이내로 한다.
    ④ 외방인이 이관 내에서 부부의 정을 나누는 것을 금지한다.

       선교사로서의 삶을 꿈꾸고 바치기로 한 땅, 중국 대륙에서, 모리슨은 오랑캐 신세가 되어 수용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온 이상, 이런 것쯤이 문제되어서는 안된다. 얼마 후 수용소를 나온 모리슨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중국인과 같이 행세했다. 중국인의 옷을 입고 그들의 음식을 즐겨 먹으며 부지런히 중국 사람을 만났다. 모리슨의 이런 행동을 철없는 젊은이의 부질없는 모험이라고 하자. 모리슨은 그때까지만 하여도 중국 대륙의 현지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청조는 외국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① 중국인이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
    ② 비상 외인이 광주에 오래 머물 수 없다.
    ③ 외국인에게 서적류를 파는 것을 금한다.
    ④ 마카오 로마 천주교 선교사가 기독교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

       모리슨은 사면초가였다. 그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했던가를 알 수 있었다. 돈이 없었다. 먹을 것도 문제지만 등 댈 곳 조차 없었다. 다행히 화물 창고 지하실 방 한 칸을 세로 얻을 수 있었다. 습기가 차고 창 하나 없는방에서 생활을 했다. 중국 선교 첫 선교사의 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고, 화물창고, 지하실, 그것도 넉넉잖은 공간이었다.


       숨막히는 공간에서 젊은 선교사 모리슨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향하여 가슴을 넓게, 더 넓게 편다. 돈도 없지만, 배고픔을 참아 가며 현지어 공부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몸은 쇠약하여 마침 곤경을 헤맨다. 화물창고, 퀴퀴한 냄새가 저려진 지하실 셋방에 누가 그에게 냉수 한 그릇 받혀 줄 사람이 없었다. 이 때 모리슨은 인간적인 비참과 삶의 좌절이 교차하는 공간을 꺼질 듯 꺼질 듯한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는 모리슨이 광주에 온 지 8개월, 이때 모리슨이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그 절박한 환경에 처했던 모리슨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어제 자네의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네. 나는 그 동안, 최소한 200통의 편지를 썼다네. 그러나 내가 회답으로 받은 편지는 고작 두 통 뿐이야.’ 모리슨의 이 편지에는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서 피할 수 없었던 그 고독한 환경이 엿보인다. 이것은 또 호사스러운 감정이라고 하자. 선교사에게는 항상 추방당할 수 있는 불안과 그런 압박감이 있는 것이다.


       청조가 쉽사리 모리슨을 받아 줄 여유를 가진 것도 아니고, 동인도 회사 역시 무역 이익상 한푼 어치의 도움이 없는 모리슨을 감쌀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마카오 주재 포르투갈 천주교 신부들은 모리슨이 빨리 쫓겨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모리슨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여 있었다. 이 현실의 늪을 헤어나야 한다. 어느날 그는 중대한 단안을 내렸다. 그것은 중국 대륙을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는 동인도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다. 1809년 2월 20일, 모리슨은 동인도 회사 통역 사원으로 정식 입사했다. 그러나 모리슨은 자기 현실에 대한 모순과 심한 갈등으로 다시 방황했다. 이때, 모리슨의 심정이 그의 일기에 그려져 있다.
    ‘나의 선교사 직책은 나의 모든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물며 선교 직무와 관련 없는 다른 각종 사무는 나의 감정과 상반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모리슨이 본의 아니게 동인도 회사에 취직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이런 일방적인 조치는 선교사로서의 신변보장에 대한 안전을 추구한 것이고, 다분히 경제적 타개책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모리슨은 최근 그의 신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즉시 런던 선교회 본부에 보고했다.

    ① 나의 취직은 중국에서 안전하게 거류할 수 있는 신변조치이며,
    ② 본인의 맡은 통역 일은 나의 현지어 학습에 도움이 될 것이며,
    ③ 나의 선교활동에 대한 영국 교회에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일이며,
    ④ 이로 인하여 동인도 회사 주재 직원들이 선교사인 본인을 경원시하 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임.

       모리슨의 이 보고는, 런던 선교회가 모리슨의 동인도 회사 취직을 문책한 데 대한 그 해명으로 보여지며 따라서 이 일로 선교사에게 가해질 수 있는 행정적인 조치를 고려해 주기를 바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모리슨의 동인도 회사 취직 문제는 현지 선교사와 본부와의 적지 않은 파문을 가져오게 했다. 이 일은 모리슨에게 결국 무거운 부담이 되고 말았다.


       모리슨이 동인도 회사에 취직하던 날, 마카오 주재 영국 상무의 일을 보는 모르톤의 딸 메리와 결혼했다. 모리슨이 중국에 온 지 만 1년 5개월 되던 때였다. 그렇게 길고 외로웠던 중국 생활이 끝나고 모리슨은 사랑하는 아내와 같이 마카오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모리슨의 회사 안에서의 일이 1년 중 최소한 6개월은 광주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런 사정을 모리슨은 고난 중에서 만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잔잔한 신혼의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으로 1834년까지 근무하면서, 1818년 말라카에 외국인에 의한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영화학당을 세우는 일을 해내기도 했으며 인쇄소를 설립하여 정기간행물을 발행하였다. 1827년의 재직기간 동안 광둥 ?말라카 ?마카오를 왕래하면서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서의 삶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그 외에도 《중국어사전》(3권, 1815~23), 한역 신구약성서인 《신천성서》(밀른과 공동번역, 1813) 등을 남겼다.

     

      揭开“东方金字塔”─西夏王陵之谜(组图)
    http://www.chinareviewnews.com 

    西夏王陵三号陵是西夏王陵九座帝王陵园中占地最大的和保护最好的一座,考古专家认定其为西夏开国皇帝李元昊的“泰陵”。
      中评社银川5月2日电(记者 罗德仪)对西夏王陵的调查作为中国20世纪100项考古大发现之一,一直受到世人的瞩目。西夏王陵位于宁夏回族自治区银川市西约30公里的贺兰山东麓。是西夏王朝的皇家陵寝,在方圆53平方公里的陵区内,分布着九座帝陵,253 座陪葬墓,是中国现存规模最大、地面遗址最完整的帝王陵园之一。 1988年被国务院公布为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国家重点风景名胜区。被世人誉为“神秘的奇迹”、“东方金字塔”。

      西夏是十一世纪初以党项羌族为主体建立的封建王朝。自1038年李元昊在兴庆府(银川市)称帝建国,于1227年被蒙古所灭,在历史上存在了189年,经历10代皇帝。其疆域“东尽黄河,西界玉门,南接萧关,北控大漠,地方万余里”,最鼎盛时期面积约83万平方公里,包括今宁夏、甘肃大部,内蒙古西部、陕西北部、青海东部、新疆东部及蒙古共和国南部的广大地区。前期与北宋、辽平分秋色,中后期与南宋、金鼎足而立,被人形容是“三分天下居其一,雄据西北两百年”。
      
      西夏王陵内现存9座帝陵,为裕陵、嘉陵、泰陵、安陵、献陵、显陵、寿陵、庄陵、康陵,坐北面南,按昭穆(古代宗法制度)宗庙次序。左为昭,右为穆;父曰昭,子曰穆)葬制排列,形成东西两行。有254座陪葬墓。北端有一处三进院落建筑遗址,为陵邑(或宗庙)。东部边缘有砖瓦窑、石灰窑遗址,为陵区窑坊。

      西夏王陵不仅吸收了秦汉以来,特别是唐宋皇陵之所长,同时又受到佛教建筑的影响,使汉族文化、佛教文化与党项民族文化有机地结合在一起,构成了我国陵园建筑中别具一格的形式。西夏陵规模宏伟,布局严整,每座帝陵由阙台、神墙、碑亭、角楼、月城、内城、献殿、灵台等部分组成。

      西夏王陵每座帝陵陵园均是一个完整的建筑群体,占地面积在10万平方米以上,坐北朝南,平地起建。高大的阙台犹如威严的门卫,耸立于陵园最南端。碑亭位于其后,这里曾停放着用西夏文、汉文刻制的歌颂帝王功绩的石碑。碑亭后是月城,南墙居中为门阙,经门阙入月城,这里曾置放有文官、武将的石刻雕像。月城之北是陵城,陵城南神墙居中有门阙,经门阙入陵城,陵台偏处陵城西北,为塔式建筑,八角形,上下各分为五级、七级、九级不等,外部用砖包砌并附有出檐,为砖木瓦结构。陵台是陵园中的主体建筑。在中国古代传统陵园建筑中陵台一般为土冢,起封土作用,位墓室之上。但西夏陵台建在墓室北10米处,不具封土作用,其形状呈八边七级、五级、九级塔式,底层略高,往上层层收分,是塔式陵台,为夯土实心砖木混合密檐式结构,且偏离中轴线矗立,这在中国建筑史上无前例,是党项族的创造。塔式陵台前有献殿,用于供奉献物及祭奠。陵台至献殿有一条鱼脊梁封土,封土下为墓道。帝陵墓室在墓道北端,位居陵台南10米处,为三室(主室,左右耳室各一)土洞式结构,墓室四壁立护墙板,墓内有朽棺木,为土葬。陵城神墙四面居中有门阙,神墙四角有角台,表明了陵园的兆域地界。有的帝陵还圈有外城,有封闭式、马蹄形式和附有瓮城的外城。基本格局在仿宋陵的基础上有所创新。

      西夏王陵三号陵茔域面积15万平方米,是西夏王陵九座帝王陵园中占地最大的和保护最好的一座,考古专家认定其为西夏开国皇帝李元昊的“泰陵”。为了让海内外人士了解西夏历史,探究西夏文化,在不断加强西夏王陵陵区文物保护工作的同时,着力开发了以三号陵为中心的游览区,相继建设了西夏博物馆、西夏史话艺术馆,西夏碑林等能够展现西夏深厚历史文化的景点。西夏王陵成为人们了解西夏历史、探寻西夏文化的一处重要文物旅游景区。

      明代诗人云:“贺兰山下古冢稠,高下有如浮水沤。道逢古老向我告,云是昔年王与侯……”。位于银川西部贺兰山下的神秘的西夏王陵是领略西夏文化、寻古探幽的旅游胜地,它以诱人的魅力和与中原地区迥然不同的西夏文物古迹而具有无限的吸引力。
    西夏王陵每座帝陵陵园均是一个完整的建筑群体,占地面积在10万平方米以上,坐北朝南,平地起建。
    图为进入墓室的通道(墓道)。帝陵墓室在墓道北端,位居陵台南10米处,为三室(主室,左右耳室各一)土洞式结构,墓室四壁立护墙板,墓内有朽棺木,为土葬。
    西夏陵规模宏伟,布局严整,每座帝陵由阙台、神墙、碑亭、角楼、月城、内城、献殿、灵台等部分组成。图为碑亭。
    图为西夏王陵三号陵砖雕。
    以三号陵为中心的游览区建设了西夏博物馆、西夏史话艺术馆,西夏碑林等能够展现西夏深厚历史文化的景点。图为西夏博物馆。
    西夏开国皇帝李元昊雕像。
    在这座屡经盗掘的西夏王陵里,考古工作者从盗墓者尸骨堆中发现了一只“牛角”,从而带出了一只旷世独有的“鎏金铜牛”。它身长1.2米,重188公斤,全身散发着柔和的金光,四腿呈内屈跪伏状;牛首高抬,两角弯出优美的弧度,颈部宽厚有力,皮肤皱痕明显;尤其是双眼炯炯有光,却又呈现温驯之态。经考证,这只铜牛是王陵的陪葬之物,后被定为国家级文物。
    这是西夏王陵博物馆展出的珍贵文物红陶迦陵频伽。
    西夏王陵被世人誉为“神秘的奇迹”、“东方金字塔”。

     

     

     

     

     

    宁夏西夏王陵三号陵文物修复后面世[组图]

     

        这是在宁夏西夏王陵文物博物馆展出的已修复的珍贵文物琉璃迦陵频伽(又称妙音鸟)(摄于3月25日)。宁夏西夏王陵三号陵第一期工程于2000年3月开工清理,出土了数以万计的珍贵文物。由于当年自然、战争、人为等原因的破坏,大部分出土文物已支离破碎。经过考古工作者的辛勤工作,近万件文物修复工作已全面完成。近日,修复好的部分文物已正式在西夏王陵博物馆展出。 新华社记者 王广壮 摄

    3月25日,文物讲解员(右)在宁夏西夏王陵文物博物馆为观众讲解出土的鎏金铜牛。

    这是在宁夏西夏王陵文物博物馆展出的已修复的珍贵文物红陶迦陵频伽(又称妙音鸟)(摄于3月25日)。

    这是在宁夏西夏王陵文物博物馆展出的已修复的珍贵文物龙首鱼(摄于3月25日)。

    这是在宁夏西夏王陵文物博物馆展出的已修复的珍贵文物琉璃套兽(摄于3月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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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这是宏伟神秘的西夏王陵(5月6日摄)。 西夏王陵位于宁夏银川市西郊约35公里的贺兰山东麓中段。凝聚着西夏党项族智慧结晶的西夏王陵是西夏王朝的皇家陵园,在方圆50平方公里的陵区内,9座帝王陵排列有序,200余座陪葬墓星罗棋布,陵区出土国宝级文物鎏金铜牛及红陶伽陵频迦、狻猊、鸱吻等一批珍贵文物,是我国最大的西夏文化遗存和重要的历史民族文化遗产。

    神秘的“东方金字塔”

     这是宏伟神秘的西夏王陵(5月6日摄)。西夏王陵位于宁夏银川市西郊约35公里的贺兰山东麓中段。凝聚着西夏党项族智慧结晶的西夏王陵是西夏王朝的皇家陵园,在方圆50平方公里的陵区内,9座帝王陵排列有序,200余座陪葬墓星罗棋布,陵区出土国宝级文物鎏金铜牛及红陶伽陵频迦、狻猊、鸱吻等一批珍贵文物,是我国最大的西夏文化遗存和重要的历史民族文化遗产。新华社记者 刘泉龙 摄

     

    这是西夏王陵博物馆展出的珍贵文物红陶迦陵频伽(5月6日摄)。

     这是西夏王陵博物馆展出的珍贵文物红陶迦陵频伽(5月6日摄)。西夏王陵位于宁夏银川市西郊约35公里的贺兰山东麓中段。凝聚着西夏党项族智慧结晶的西夏王陵是西夏王朝的皇家陵园,在方圆50平方公里的陵区内,9座帝王陵排列有序,200余座陪葬墓星罗棋布,陵区出土国宝级文物鎏金铜牛及红陶伽陵频迦、狻猊、鸱吻等一批珍贵文物,是我国最大的西夏文化遗存和重要的历史民族文化遗产。2006年7月,西夏王陵入选首批中国国家自然与文化双遗产预备名录。新华社记者 王鹏 摄

     

     

    5月6日,游客在西夏王陵景区游览。

     5月6日,游客在西夏王陵景区游览。西夏王陵位于宁夏银川市西郊约35公里的贺兰山东麓中段。凝聚着西夏党项族智慧结晶的西夏王陵是西夏王朝的皇家陵园,在方圆50平方公里的陵区内,9座帝王陵排列有序,200余座陪葬墓星罗棋布,陵区出土国宝级文物鎏金铜牛及红陶伽陵频迦、狻猊、鸱吻等一批珍贵文物,是我国最大的西夏文化遗存和重要的历史民族文化遗产。新华社记者 王鹏 摄

     

    5月6日,一名记者在拍摄西夏王陵。

    游客在西夏王陵博物馆观看展出的珍贵文物鎏金铜牛。

     5月6日,一名记者在拍摄西夏王陵。西夏王陵位于宁夏银川市西郊约35公里的贺兰山东麓中段。凝聚着西夏党项族智慧结晶的西夏王陵是西夏王朝的皇家陵园,在方圆50平方公里的陵区内,9座帝王陵排列有序,200余座陪葬墓星罗棋布,陵区出土国宝级文物鎏金铜牛及红陶伽陵频迦、狻猊、鸱吻等一批珍贵文物,是我国最大的西夏文化遗存和重要的历史民族文化遗产。2006年7月,西夏王陵入选首批中国国家自然与文化双遗产预备名录。新华社记者 刘泉龙 摄

     

     

     

     

    这是西夏王陵博物馆展出的珍贵文物西夏木俑(5月6日摄)。

     这是西夏王陵博物馆展出的珍贵文物西夏木俑(5月6日摄)。西夏王陵位于宁夏银川市西郊约35公里的贺兰山东麓中段。凝聚着西夏党项族智慧结晶的西夏王陵是西夏王朝的皇家陵园,在方圆50平方公里的陵区内,9座帝王陵排列有序,200余座陪葬墓星罗棋布,陵区出土国宝级文物鎏金铜牛及红陶伽陵频迦、狻猊、鸱吻等一批珍贵文物,是我国最大的西夏文化遗存和重要的历史民族文化遗产。2006年7月,西夏王陵入选首批中国国家自然与文化双遗产预备名录。新华社记者 刘泉龙 摄

     

     

    拉利貝拉岩石教堂

     

     

     

     

     File:Bet Giyorgis church Lalibela 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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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拉利贝拉是在埃塞俄比亚北部的一个城镇,是埃塞俄比亚东正教的一个圣城。据2005年人口普查,拉利贝拉有居民14,668,全都为东正教教徒。拉利贝拉有不少用岩石凿出来的教堂,为奇景之一。

    拉利贝拉自公元4世纪开始归信基督教东正教会。在耶路撒冷穆斯林所占据后,拉利贝拉更一度被提倡为新的耶路撒冷城。

     http://newspic.cn.yahoo.com/science/article/gallery_show/p_101936/

     

    傳說12世紀埃塞俄比亞第七代國王拉利貝拉夢中得神諭:“在埃塞俄比亞造一座新的耶路撒冷城,並要求用一整塊岩石建造教堂”。於是拉利貝拉按照神諭在埃塞俄比亞北部海拔2600米的岩石高原上,動用2萬人工,花了24年的時間鑿出了11座岩石教堂,人們將這裏稱為拉利貝拉。從此,拉利貝拉成為埃塞俄比亞人的聖地。至今,每年1月7日埃塞俄比亞耶誕節,信徒們都將彙集於此。

    這些教堂坐落在岩石的巨大深坑中。精雕細琢的教堂像龐大的雕塑,與埃洛拉的廟宇一樣從堅硬的岩石中開鑿而成。它們外觀造型驚人,內部裝修獨特。是12和13世紀基督教文明在埃塞俄比亞繁榮發展的非凡產物。始建於西元前1000年左右,有“非洲奇跡”之稱。1979年列入世界遺產名錄。

    拉利貝拉的教堂中最引人注目的或許是耶穌基督教堂,它長33米,寬23米,高11米,精雕細刻的飛簷由34根方柱支撐。這是埃塞俄比亞唯一一個有五個中殿的教堂,據16世紀葡萄牙使館派往所羅門宮廷的神父法蘭西斯科·阿爾瓦雷斯教父說,過去的阿克森姆大教堂也有五個中殿。聖喬漢教堂是拉利貝拉唯一被鑿成十字架的教堂。

    相鄰的聖瑪麗亞教堂比耶穌基督教堂的面積小些,高度為九米。牆上的窗戶為阿克森姆風格,裏面有三個中殿,它們從上到下都覆蓋著代表幾何圖案(希臘十安、萬字飾、星形和圓花飾)和動物(鴿子、鳳凰、孔雀、瘤牛、大象和駱駝)的裝飾性繪畫及按福音書描繪耶穌和瑪麗亞生活場景的壁畫,但大多均已損壞。一些專家認為這些繪畫可追溯到紮拉·雅各國王(1434-1465)統治時期。另外主門之上是一個描繪兩個騎手殺死一條龍的淺浮雕。

    在拉利貝拉有兩處主要的教堂群,這些教堂憑藉地下通道相互連接。這些教堂的建成使拉利貝拉城成了一個宗教中心。從公路或空中都很容易到達拉利貝拉。由於埃塞俄比亞夏季多暴雨,教堂的建造者們把地基開鑿在斜坡上。這樣可使雨水流走,避免水患的威脅。

     

    拉利貝拉整岩教堂

      衣索比亞,拉利貝拉整岩教堂,文化遺產,1978年列入世界遺產tzh名錄。

      這是13世紀時在衣索比亞北部山區的山崖中開鑿出來的整體岩石教堂,共有11座,與開鑿的山洞教堂不同,在全世界絕無僅有。中世紀時被基督教稱為新耶路撒冷。

      拉利貝拉整岩教堂位於衣索比亞北部山區的拉利貝拉城,南距首都亞的斯亞貝巴300多千米。教堂1978年被列入世界遺產名錄。

      關於拉利貝拉整岩教堂的歷史背景可追溯到西元330年基督教進入衣索比亞的阿克蘇姆王國。至5世紀末,安蒂奧克的傳教師來此傳播基督教,但衣索比亞的基督徒卻忠於原來的科普特教會。9世紀時,阿克蘇姆王國在伊斯蘭和貝賈人入侵的壓力下解體,加上拜佔廷帝國的衰落,信仰基督教的衣索比亞愈見孤立。阿克蘇姆王國瓦解後,農民起義和政治與宗教中心逐漸南移,12世紀出現札格維王朝。札格維王朝加強了與科普特教會的聯繫,鼓勵傳教活動。札格維王朝的王公拉利成為國王后,定都在原名羅哈的古老小城,並改名為拉利貝拉。 拉利貝拉篤信基督教,為了顯示對上帝的虔誠,特招募全國約5000名一流的工匠,在地下岩層中鑿刻而不許使用粘物質(灰沙漿),並在建築家錫迪?梅斯奎爾的率領下,花了近四分一世紀的時間,在拉斯塔高原的大片紅色火山石灰岩上開鑿了11座整岩教堂,它的建成象徵12至13世紀基督教文明在衣索比亞的繁榮發展。13世紀穆斯林征服北非,中斷了非洲朝拜者通往基督教聖地耶路撒冷的道路,因此整岩教堂象徵建設一座"新耶路撒冷"。

      組成整岩教堂的11座教堂都是用一整塊岩石雕刻鑿成,所以它的佈局、比例、風格各有特色。總括而言,每座教堂均有古老的阿克蘇姆式石碑尖頂,鑿空雕成的內部結構和裝飾,如石柱形雕鑿走廊、鏤空透雕的門窗及塑像、浮雕和祭壇。各教堂之間有地下過道和岩洞相通。

      整岩教堂的建成是十分艱巨的。首先,人們要把覆蓋在岩層上的土壤除掉,然後,在岩層上從四週垂直往下開鑿以削出深達12至15米的巨大石塊,最後在石頭上外削內鏤,而整個教堂的內部結構和裝飾都是在裏面刻出來。 門窗是從裏往外鏤空透雕而成,整岩教堂矗立於7-12米深的環狀通道的中央,雕刻從頂部的穹頂、天花、拱門和上層窗戶開始,一直延續至底部的地板、門和基石。為了使夏季影響拉利貝拉的大雨能順暢排出,教堂各處的水準面都有所傾斜,而建築物突出部分,包括屋頂、飛檐、過梁和窗臺突出程度視雨水方向而定,可見教堂建築大師曾經匠心獨運,解決難題。開鑿工程分階段進行,一些人負責開鑿獨石, 將它與周圍岩石分離,另一些則負責製作成型,碎石則是經過窗門搬運,所使用的都是鎬和杠桿等簡單工具,可見工程的艱巨。

      11座整岩教堂中最具特色的是梅德哈尼阿萊姆教堂, 即救世主教堂。它是衣索比亞唯一一個有五個中殿的教堂,其中三個中殿分別面向東、北和南面,這是按長方形廊柱大廳式基督教堂所修建。教堂呈東西向,隔成八間,支撐半圓形拱頂的支柱成行排列其間。另外還有與它相鄰的瑪利亞教堂,它的內部建築精美,天花和拱門用紅黃綠色幾何圖案從上到下覆蓋,如希臘十字、萬字飾、星形和圓花飾。另有壁畫題材有動物,如鴿子、鳳凰、孔雀、大象、瘤牛,以及聖母瑪利亞的生活場景。而主門上是兩個騎手殺死一條龍的淺浮雕,是衣索比亞聖所中少見的珍貴雕塑。

      另外聖邁克堂、各各他教堂和三位一體教堂組成教堂群。而各各他教堂在兩個中殿的墻壁上雕刻它的7個真人大小的牧師系列像,在它的壁龕中還有一個基督墓。

      戈爾塔教堂是拉利貝拉國王的葬地,那裏保存他的遺物,包括凳子、檔板和大十字架。 聖喬治教堂的形制特別,從上至下像放在地上一個厚大的大字架。埃曼紐爾教堂是一個有3個中殿的長方形教堂,內有如木柱式的石雕,墻壁構成線條分明的幾何圖形。利巴諾斯教堂有整岩教堂和地下教堂的特點,四邊被一個環繞四週,內部挖空的長廊與山體分開,由壕溝、橋梁、涵洞相互接通構成一個個的內院。 各各他教堂的基督墓、十字架教堂、聖餐麵包教堂、亞當墓和天使像排列于拉斐爾教堂前,被當地稱為"彼拉多的普列托裏姆"的平臺,意即所有這些遺址集中于一地,這些說明,拉利貝拉旨在重現新的聖城耶路撒冷的決心。整岩教堂的建成是非洲地區這個歷史時期的典範,也是人類創造力傑作的力證。

      由於年代的久遠以及氣候和人為因素,所有這些建築都有不同程度的損壞。氣溫的變化和巨石高度的變化,使教堂出現了裂縫。規模宏大的修復工程在20世紀上半葉已經開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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