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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에 잠긴 댐 싼샤댐은 언제나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 싼샤댐 때문에 생기는 심한 안개는 댐 뿐만 아니라 수몰지 전체를 삼켜버렸다. |
ⓒ 모종혁 |
벌써 4시간이 지났다. 오전 10시 40분에 이창(宜昌)으로 떠나기로 한 비행기는 이창 일대의 심한 안개에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충칭(重慶)공항 곳곳에 설치된 TV에서 흘러나오는 이창의 일기예보는 맑은 날씨에 안개가 조금 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탑승구 앞에서 반나절이 다 되도록 앉자있는 필자는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지만, 다른 중국인 승객들은 한가로이 낮잠을 자거나 트럼프 놀이를 하는 등 별다른 동요가 없다.
창장(長江)싼샤공정개발공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한다는 허웨이(何薇, 여)는 이 같은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했다. 그는 "싼샤(三峽)댐 건설 이후 이창에서 안개가 출몰하면서 항공편의 연착이 다반사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충칭에서 이창까지의 거리는 660㎞. 거대한 중국 대륙에서 본다면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현재 이 지역에서는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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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공사중 싼샤댐 프로젝트의 모든 공사는 2008년에야 끝난다. |
ⓒ 모종혁 |
13년 대공사... 소양강댐 15배에 달하는 저수용량
오후 4시가 가까워서 도착한 후베이(湖北)성 이창시. 공항 건물 외벽을 화려한 전통문양으로 장식한 이창공항의 정식 이름은 '싼샤'국제공항이다. 한적한 양자강 변의 작은 도시였던 이창을 후베이성 수도인 우한(武漢) 다음으로 발전시킨 싼샤댐의 공로를 기리는 것일까. '싼샤'가 이창을 대표하는 명칭이 되어버린 듯하다.
공항에서 싼샤 댐을 가려면 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야 한다. ?b샤댐 건설을 위해 1997년 개통된 전용도로는 험준하고 수려한 양쯔강 변을 끼고 놓여져 있다. 하지만 도로 주변의 산들은 곳곳이 흉측하게 파헤쳐졌다. 택시기사 만이(滿毅)는 "싼샤댐 건설에 필요한 석재와 토사 채취를 위해서 댐에서 가까운 석질과 토질이 좋은 산들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 무장경찰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몇몇 검문소와 초소를 지나 드디어 싼샤댐이 눈앞에 위용을 드러냈다. 중국 문명을 꽃피운 양쯔강을 가로막고 선 싼샤댐은 1994년 12월 공사가 시작되어 1998년부터 댐 축조에 들어갔다. 흔히 만리장성 이후 2300여년 만에 이뤄진 중국 최대의 역사(役事)라 할만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위치한 나이아가라폭포가 높이 48m, 폭 900m로 웅장한 위용을 뽐낸다지만, 높이 185m, 길이 2309m, 너비 15m인 싼샤댐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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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선 신도시 건설 싼샤댐 후면에서는 접항 시설과 싼샤댐 공사인력을 위한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다. |
ⓒ 모종혁 |
지난 5월 20일 싼샤댐은 13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준공됐다. 착공 전 중국정부는 총공사비로 약 108억달러를 산정했지만 현재까지 약 210억달러가 투입됐다. 소양강댐의 15배에 달하는 390억t의 저수용량과 초당 10만2500t의 방류량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싼샤댐이 축조되었다지만 댐 현장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이는 댐 전체구조 가운데 양쯔강 물길을 막는 본체 공사만 끝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체 전력생산의 30%에 달하는 1820만㎾의 설비용량을 자랑하는 발전시설과 양쯔강 상하류의 선박을 오가게 하는 통항구조물은 지금도 건설이 한창이었다.
맑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댐 주위를 자욱하게 물들인 안개 때문에 윤곽이 분명치 않은 싼샤댐의 건설 현장은 분주해 보였다. 수없이 움직이는 타워 크레인과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싼싸댐 공사를 담당하고 있는 창장싼샤공정개발공사 차오광징(曹廣晶) 부총경리는 "발전설비와 수로공사, 수위조절 등에 박차를 가해 당초 계획보다 1년 빠른 2008년에 모든 공사를 완료될 예정"이라며 "댐의 구조가 각기 독립적으로 설계되어 7급 이하의 지진이 일어나거나 핵공격을 받아도 댐이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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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은 차오르는데... 현재 수위는 140m, 올해 10월에는 156m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적지않은 수몰 마을에는 아직도 이주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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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인대 사상 가장 많은 반대표 나와
홍수는 중국인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한나라 이후 2천년동안 10년 단위로 200번 이상의 큰 홍수가 양쯔강 주변에 사는 사람과 마을을 덮쳤다. 양쯔강을 수시로 황폐화시키는 홍수는 왕조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했다. 쓰촨성 사회과학원 궈홍(郭紅, 여) 교수는 "역사적으로 양쯔강 유역의 홍수는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 있어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면서 "홍수를 다스리지 못하면 민심이 동요하여 민중 반란이 일어나고 왕조가 붕괴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런 홍수를 예방할 싼샤댐의 건설은 중국인의 뇌리를 떠나지 않던 오랜 염원이었다. 1919년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孫文)은 홍수를 예방하고 수력발전을 촉구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양쯔강에 댐을 건설하는 구상을 선보였다. 쑨원에 이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실천에 나서 1932년 싼샤지역을 측량하여 댐 건설에 위한 실질적인 조사를 벌였다.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낸 중국 공산당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홍수를 해결하고자 1950년 창강(長江)수리위원회를 설립하여 대책에 나섰다.
1954년 20세기 최대의 홍수가 양쯔강을 휩쓸어 수십만 명이 죽고 천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1956년 마오쩌둥(毛澤東)은 댐 건설을 정식으로 결정하고 양쯔강을 직접 시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대형 댐을 건설하기 어려운 낮은 토목기술과 건설재원 확보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건설 계획을 보류됐다. 1970년 이창에 연습용 댐으로 거저우(葛州)댐을 착공하여 중국은 댐 건설의 의지를 다시 드러냈다. 1980년에는 덩샤오핑이 충칭에서 지금의 싼샤댐이 자리잡고 있는 싼떠우핑(三斗坪)까지 순례하면서 사업 추진의 급류를 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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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출 위기의 절경 샤오싼샤 디취샤의 절경. 싼샤댐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까지 삼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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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차원에서 싼샤댐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이 수립된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 사회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댐 건설능력에 대한 회의에다 싼샤댐이 가져올 수많은 재앙을 우려한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이 격렬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듯, 싼샤댐 건설안이 통과된 1992년 4월 전국인민대표회의(全人大)에서는 투표 참가자 2608명 가운데 1767명만이 찬성하고 33%에 이른 841명이 반대하거나 기권했다. 중국 전인대 역사상 가장 많은 반대표와 기권표가 나온 전무후무한 투표 결과였다.
당시 전인대 대표로 회의에 참가하여 반대표를 던진 레이헝순(雷亨順) 충칭시 고문 겸 충칭대 명예교수는 "전문가들은 싼샤댐 건설을 심의하기 전부터 많은 문제가 유발될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의석상에서 반대 의견을 냈지만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댐 건설의 문제점을 지적한 여러 자료들도 공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인대 통과후 싼샤댐 건설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리펑(李鵬) 당시 총리는 논쟁의 종식을 선언했다. 하지만 싼샤댐을 우려하는 중국 내부의 목소리는 그 후로도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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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에 포위된 도시 가파른 산턱에 건설된 우산 신도시. 지반을 다지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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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와 안개에 시달리는 주변 주민들
충칭에서 만난 싼샤댐 전문가들은 "싼샤댐은 이창 사람들에게는 축복을, 충칭 사람들에게는 눈물과 한을 남겨주고 있다"고 말했다. 수몰지 주민들의 이주문제와 생태환경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충칭과 달리 이창은 댐 건설과 더불어 지역경제에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싼샤댐에서 만난 이창 주민들의 기대는 어느 때보다 컸다.
관광 가이드로 일하는 장천(張琛, 26)은 "싼샤댐 건설이후 이창이 중국 11대 관광도시로 발전하면서 400여만 명이 싼샤댐을 찾았다"면서 "해마다 관광객이 10% 이상 늘어나고 5월 노동절 연휴기간에만 7만 명이 싼샤댐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광둥(廣東)성에서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는 천샤오칭(陳燒慶, 여)은 "이창의 도시 면모가 찾을 때마다 다르게 번화하고 발전한다"면서 "싼샤댐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데다 최대의 건설 규모로 이창 주민들의 큰 자랑거리"라고 말했다.
이창을 떠나 다음 날 도착한 충칭시 우산(巫山)현은 댐 건설로 잠기는 수몰지구의 고민을 보여주는 곳이다. 본래 싼샤는 양쯔강 상류의 3대 협곡인 시링샤(西陵峽), 우샤(巫峽), 취탕샤(瞿唐峽)를 일컫는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랄 만큼 아름다운 절경인 싼샤는 이창에서 충칭 펑제(奉節)현 백제성(白帝城)에 이르는 192㎞ 구간이다. 우산은 싼샤 가운데 중간인 우샤의 상류 시작점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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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태위태 우산의 건물들은 가파른 산 위에 위험하게 건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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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주민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불청객은 지독한 안개와 높은 습도, 변화무쌍한 날씨다. 댐 건설이후 싼샤가 유속이 거의 없는 거대한 호수로 변모하면서 협곡으로 둘러싸인 우산은 사시사철 심각한 연무(煙霧)가 발생하고 있다. 일기예보가 필요없을만큼 하루에도 수차례 변하는 날씨에 주민들은 항상 우산을 휴대하고 다닐 정도다. 작은 동력선을 운행하는 푸뤼윈(傅?運)은 "싼샤댐 건설이후 안개가 많이 끼고 습도가 높아져 여름에는 찜통처럼 후텁지근하고 겨울에는 뼈가 쑤실 정도로 찬 습기가 전신을 엄습해서 축농증이나 관절염, 기관지염 환자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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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에 잠긴 '잔도'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견뎌온 잔도도 싼샤댐의 위력에는 어쩔 수 없다. 샤오싼샤에 남아있는 20㎞ 잔도는 물 속으로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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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항 부두에서 작은 동력선으로 갈아타서 양쯔강의 지류 중 하나인 따닝허(大寧河)에 들어서니, 싼샤의 아름다움만 모아놓았다는 샤오싼샤가 반겨왔다. 1997년 필자가 처음 싼샤를 찾았을 때만 해도 샤오싼샤는 수위가 얕았고 중류부터는 수많은 첸푸(?夫)들이 활동했었다.
9년 전 필자에게 강렬한 느낌을 주었던 깎아지는 협곡과 험준한 준령의 장관은 급상승한 수면 탓인지 이번에는 그 위용이 반감(半減)되었다. 영롱했던 따닝허의 맑은 물도 역류된 양쯔 강물 때문에 조금씩 썩어가고 있었다. 수몰되어 비어가는 마을과 농가, 도굴까지 되어 방치된 분묘, 절벽에 길을 놓아 만든 20km 길이의 잔도(棧道)가 잠기는 모습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샤오싼샤 계곡 안에 자리잡은 따창진(大昌鎭)에서는 이주 공사가 한창이었다. 3세기부터 군사요충지의 둔전(屯田)마을로 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한 따창진은 마을 전체가 국가문화재이다. 명·청대부터 축조된 성벽과 옛 민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충칭시 정부는 올해 10윌 수몰될 따창진을 12㎞ 떨어진 신도시로 고스란히 옮기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4천여 명의 주민들을 강제로 소개시키고 가치있는 문화재를 철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일부 주민들은 떠날 생각을 않고 있다. 올해 초부터 단전, 단수 조치가 내려진 가운데 300여 명의 남은 주민들은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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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된 마을 강제이주와 철거가 진행중인 따창진. 이주를 거부하는 주민들을 압박하기 위해 단전, 단수 조치까지 이뤄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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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로한 노인들은 이주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옌자원(嚴家運, 82)은 "조상대부터 2천년동안 따창진에서만 살았다"면서 "물이 잠기더라도 여기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아 신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의 사정도 그리 낫지 않다. 따창진과 주변 수몰 마을의 주민들 1만여 명을 정착시키기 위한 따창신진(大昌)은 또 다른 건설 공사로 여념이 없다. 조금씩 신도시의 면모는 갖추어 가지만 정부가 이주민들에게 제공한다고 약속한 아파트는 여전히 공사 중이다.
따창신진 중심광장의 간이막사에서 거주하는 황센장(黃顯章)은 "농사를 짓다 신도시로 이주한 뒤 일거리가 없어 아내가 충칭으로 나가 식당에서 일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다"면서 "한 가구당 46㎡씩 할당해서 준다는 아파트도 준비가 안 돼 벌써 네 달째 천막살이 중"이라고 푸념했다. 옆 막사에 사는 40대 여성은 "몇 달째 식수 공급을 해주질 않아서 물을 사먹었는데 이제는 돈도 없어 빗물을 받아 먹을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거리에서 자판을 벌여 먹거리 장사를 하고 있는 탕웬수(唐雯淑, 여)는 "뤼핑진(廬平鎭)에서 농사를 짓다가 강제이주당했다"면서 "새벽 7시부터 시작해서 밤 10시까지 일하지만 20위안(약 2600원) 정도를 벌 뿐"이라고 말했다.
수몰지역 이주민의 현황을 조사한 충칭대 정쩌건(鄭澤根) 교수는 "수몰지역 이주민들이 신도시로 갓 이주했을 때는 나아진 거주 환경을 만족스러워 하지만 매달 45위안(약 5600원)에 불과한 정부의 생활 보조금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회류이민(回流移民)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면서 "정든 고향을 떠난 이주민들이 새로운 생활환경에 적응하고 돈벌이를 할 일자리를 찾는 것이 이주정책의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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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에서 천막으로 수몰지에서 따창진으로 이사한 이주민에게 제공된 것은 오직 간이천막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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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마음을 안고 따창신진을 떠나 차를 타고 1시간을 달려 산간마을인 핑후(平湖)에 도착했다. 싼샤에서만 볼 수 있는 직업인 첸푸를 만나기 위해서다. 고대부터 첸푸는 노를 저을 수 없는 싼샤 협곡의 급류에서 밧줄로 배를 끌어 상류로 옮기는 노릇을 했다.
투자족(土家族)이나 유랑민의 후예였던 첸푸는 20세기에 들어서도 1990년대 초까지 수면이 얕은 계곡에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했다. 수면이 얕고 물살이 빠른 싼샤의 수많은 지류에서는 노를 젓거나 동력을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4~6명이 한조로 이뤄 10여명이 탑승하는 소형 선박을 끄는 첸푸는 한 달 수입이 싼샤 주민의 평균소득의 두 배인 1000위안에 달해 인기 높은 직업이었다. 하지만 싼샤댐 건설후 수위가 140m 이상까지 올라가면서 첸푸도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한때 수천 명이 활동했던 첸푸의 숫자는 지금은 백 명도 남아 있질 않았다. 이제는 다닝허의 지류인 마두허(馬渡河)의 샤오샤오싼샤에서만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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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은 어디로 싼샤댐은 ?b샤에서만 볼 수 있는 직업인 첸푸마저 사라지게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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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후에서 사는 첸푸 왕샤오린(王燒淋)은 자신도 일거리가 없어져서 광둥성으로 나가 2년 동안 일하다 돌아왔다며 "지금은 그나마 우산현 정부가 운영하는 여행사 소속으로 일하면서 농사도 짓고 해서 기본적인 생계는 유지하고 있지만 2008년에 싼샤댐 수위가 175m까지 올라가면 첸푸 일은 그만 두어야 할 실정"이라고 말했다.
사라지는 것은 첸푸만이 아니었다. 다음 날 우산을 떠나 찾은 펑제(豊節)현 백제성(白帝城)은 천여년된 역사를 지닌 성벽이 철거되거나 물에 잠겼고 일부 건축물만 강물로 뒤덮인 섬 위에 남아있다.
싼샤의 첫 절경인 취탕샤의 시작점이기도 한 백제성은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 원정을 나섰다가 패해 숨지면서 제갈량에서 후사를 부탁한 곳으로 유명하다. 뒤이어 찾은 윈양(雲陽)현의 장비(張飛)묘도 이미 수몰되어 중요한 유적만을 10여km 떨어진 고지대로 옮겼다. 싼샤댐 건설로 수몰된 문화재만 1200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쯔강 수위가 전보다 평균 50~70m 올라가면서 싼샤의 자연 풍광이 훼손되는 것도 아쉽다. 굴원, 이백, 두보, 백거이, 소식 등 중국의 수많은 문인들이 싼샤를 노래한 것은 깎아지는 듯한 협곡과 하늘까지 치솟은 험준한 산세의 신비스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에 잠긴 싼샤는 안개로 둘러싸여 빼어난 자태를 뽐내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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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도 수몰 위기 백제성은 섬으로 변하고 오직 '유비탁고'(劉備託孤) 고사의 현장인 탁고당(託孤堂)만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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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양을 떠나 충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깊은 상념에 잠겼다. 중국 정부가 내세운 홍수방지, 전력생산, 물류이동 등 싼샤댐 건설의 목표는 언젠가 중국인들에게 큰 경제적 이익으로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허나 중국 안팎으로 우려한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파괴 현상은 하나둘씩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수몰지 이주민들의 삶과 생활이 붕괴되어 기본적인 생계조차 어려운 현실은 지방정부 차원에서 더 이상 해결하기 힘든 불안의 폭탄이 되고 있다.
배에서 만난 펑제의 한 주민은 "정부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데다 부패한 관리들이 이주민들의 정착비를 착복하여 살기가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중국 <차이나데일리>는 국무원 싼샤사업건설위원회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싼샤댐 수몰지 이주비용으로 책정된 자금이 부패한 관리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차이나데일리>는 "지금까지 이주비용 관련 횡령사건만 모두 327건, 이로 인해 구속자만 369명, 횡령된 액수는 5580만위안(약 67억6천만원)에 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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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 제일 절경'이라는 싼샤 취탕샤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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