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현교회 

 1893년 평양에 살립된 장로교회로 사진의 ㄱ 자 예배당은 1900년 건립된 것이다

 

 

 소래교회

1895년 기와 지붕의 한식교회 건물로 개축한 소래교회 (사진 상,중)

1884년 6월 29일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 (사진 하)


한국교회 초기의 자발적 전도자요, 권서인이었던 의주 출신

서상륜과 서경조 등 그의 가족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는 세계 선교사상 유래가 없는 자발적 자전에 의한 복음의 토착, 수용사 였다.

곧 선교사 입국 이전에 한국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한국교회사(45)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2. 서울에서의 복음 전파

4) 승동교회 설립

‘모삼열’(牟三悅)로 불렸던 북장로회 선교사 무어(S. F. Moore)는 1892년 9월 19일 부인과 함께 제물포를 통하여 내한하였다. 그는 시카고 부근 그랜드 리지(Grand Ridge)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9년 몬타나대학을 마치고, 맥코믹신학교에 입학하여 1892년 봄에 졸업했다. 대학시절부터 남다른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학교 근처 감옥의 죄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열렬하게 외쳤고, 신학교 시절에는 경찰서 유치장의 죄수들을 찾아다니며 인간의 행복에 대해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그해 로즈 엘리(Rose Elly)와 결혼하여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가 되어 두 달 뒤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무어 선교사는 한국말을 채 익히기도 전인 1893년 서울 시내에 집을 마련하고 전도에 나섰다. 그는‘치외법권 지역’이었던 정동 밖으로 나간 첫 번째 선교사였다. 자비로운 행동으로 한국인들 사이에 인목(仁牧)으로 불렸던 무어의 집이 있던 곳은 ‘미동’, 토박이말로 ‘곤당골’이었다.

1893년 봄 곤당골에 한옥을 구입하여 16명으로 시작한 집회 인원은 연말이 되어 43명으로 늘어났다. 무어는 곤당골교회 안에 학교도 설립했고, 개울 건너 구리개(銅峴, 을지로2가)에 있던 제중원에도 나가 전도하여 많은 교인을 얻었다. 제중원은 1885년 4월 재동에서 알렌이 시작하였으나, 1887년 구리개로 옮겨진 후 헤론, 빈튼에 이어 1893년부터 에비슨(O. R. Avison)이 맡아보았다. 뛰어난 의술로 고종의‘시의’(侍醫)가 되어 궁궐 출입도 하게 된 에비슨은 제중원을 선교 기지로 적극 활용하였다. 그 결과 제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들이 곤당골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런 식으로 치료받고 나온 교인 하나 때문에 곤당골교회에 큰 소란이 일었다.

그것은 관자골(貫子洞, 종로2가 관철동) 백정 마을에 살던 박성춘(朴成春) 때문이었다. 백정으로 태어나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사는 것이 한이 되었던 박성춘은 아들 ‘봉주리’만은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저 가르쳐 준다’는 곤당골 예수교학당에 아들을 보냈다(아들은 후에 이름을 ‘박서양’으로 바꾸었고,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성춘이 돌림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그 사정을 알게 된 무어 목사가 에비슨을 데리고 관자골에 들어가 치료해 살려냈다. 그러자 박성춘은 선교사의 은혜에 감사하여 곤당골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했던 때에 양반이 예배드리는 곳에 백정이 들어왔으니 조용할 리가 없었다. 양반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며 박성춘을 다른 교회로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양반 쪽에서 타협안이 나왔는데 예배당 뒤쪽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 박성춘을 거기 앉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어는 그것마저 거부했다.

결국 양반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길 건너 홍문석골(紅門洞, 지금의 삼각동)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따로 예배를 드렸다. 곤당골교회 설립 2년 만인 1895년의 일이었다. 이에 입장이 난처해진 박성춘은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수원까지 내려가 백정마을을 돌면서 ‘백정에게 인간 대접을 해 주는 종교가 들어왔다.’고 하면서 전도하여 곤당골교회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순식간에 양반 교회가 천민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백정은 조선시대 천민 계층을 일컫는 칠천역(七賤役, 광대, 무당, 기생, 갖바치, 고리장, 포졸, 백정) 중에서도 제일 아래 계급에 속했다. 다른 천민은 자신들 직업만 버리면 상인이 될 수 있었으나 백정은 자신의 직업을 버려도 여전히 백정이었고, 부모가 죽어도 상복을 입을 수 없었으며, 부녀자들은 비녀도 꽂아서는 안되었다. 그리고 비단옷 두루마기도 입을 수 없었으며 패랭이라는 테가 좁은 갓만을 쓰게 하여 상민과 식별하게 하였다. 그뿐
만 아니라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탈 수 없었으며 이름을 지을 때도 인(仁), 예(禮), 의(義)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짓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교회는 달랐다. 평생 들어보지 못했던 존댓말을 교회에서 처음 들었고, 양반·상놈 차별 없이 대하는 선교사들의 행위에 감격했다. 백정들에게 교회는 ‘인간 평등’을 체험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해방 공간이었다.

교회를 통해 해방을 체험한 박성춘은 ‘백정 해방운동’에 나섰다. 그는 무어와 에비슨 등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백정 차별 정책을 철폐할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정부에 냈다. 법적으로는 갑오개혁(1894년) 이후 신분 차별 규정이 없어졌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봉건적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던 그때에 그들은 ‘백정 해방’의 상징적인 조치로 ‘백정도 양반처럼 갓을 쓰고 도포를 입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95년 4월 백정들의 요구를 들어 주는 정부 칙령이 내렸다. 포고령이 내리던 날, 서울과 근교 백정들은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종일 종로 거리를 왔다 갔다 행진하였으며, 박성춘은 감격에 겨워 잠을 잘 때도 갓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로 일약 민중 지도자로 부각된 박성춘은 1898년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를 종로에서 개최할 때 정부 대표 및 양반·귀족들과 나란히 단상에 올라 백성 대표로 연설까지 하였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홍문석골 교인들이 무어를 찾아와 교회를 다시 합치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분열 3년 만인 1898년 홍문석골에서 양반과 천민이 함께 ‘평등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덕수궁을 확장하려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동에 있던 선교부를 폐쇄하고 남대문 밖과 동대문 안 연못골(연지동), 두 곳에 선교 거점을 새로 조성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04년 가을 제중원을 남대문 밖 복숭앗골(桃洞, 지금의 서울역 앞 세브란스빌딩 자리)에 옮겨 짓고 이름을 ‘세브란스병원’으로 바꾸면서 교회도 그리로 옮겼다. 이때 구리개 교인 대부분이 병원을 따라 남대문 밖 교회로 갔다. 그러나 박성춘을 비롯한 곤당골 출신 교인들은 선교부에서 새로 마련한 종로 예배 처소인 ‘절골’(寺洞, 지금의 인사동)로 옮겼다. 절골이란 동네 이름은 원각사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승려가 많다 해서 ‘승동’(僧洞)이라고 했다. 이 지역에 살던 양반들은 ‘僧’자를 싫어해‘承洞’이라 하였는데, 교인들은 1907년 승동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던 길선주의 충고를 따라 ‘勝洞’으로 표기하였다.

교회를 서울 한복판인 승동으로 옮긴 후 교인이 200명 수준에서 400명 수준으로 급증하였다. 교인이 늘었을 뿐 아니라 질도 달라졌다. 인근 양반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백정 교회’라는 오명(?)을 벗을 기회로 보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이미 교회 안에 다수 세력으로 자리잡은 천민 교인들과 새로 나온 양반 교인들 사이에 새로운 긴장관계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백정 출신으로 천민층을 대표하는 박성춘에게 어떤 직위를 수여하느냐에 있었다.

1908년 가을부터 양반 교인 일부가 재동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양반 출신 이원긍을 누르고 천민 출신 이명혁이 장로가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연동교회 교인들까지 합류하자 선교부도 양반 교회 설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해서 생겨난 것이 북촌의 안동교회이다.

1909년 안동교회가 설립되자 1908년 승동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되었던 이여한과 황기연을 비롯한 양반 교인들이 그리로 옮겨갔고, 승동교회에는 천민 출신 교인들과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만 남았다. 박성춘은 1911년 12월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5) 연동교회 설립

1893년 선교사 무어 목사는 서울시내 전도에 힘썼는데, 이때 김영옥과 천광실을 조사로 동반했고 전도인은 마영준과 이승두였다. 여기서 얻어진 신도들이 다음 해 연동교회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연동교회의 시작은 1894년 선교사 그라함 리(Graham Lee: 이길함) 목사와 서상륜 조사의 지도 하에 연못골, 지금의 연지동에 초가 한 채를 매수하여 예배 처소로 삼으면서부터였다. 1896년부터는 선교사 기포드(D. L. Gifford:기보) 목사가 연동교회를 돌보게 되었고, 교인의 증가로 선교부 내의 한 건물을 매입하여 예배 처소를 옮겼다. 연동교회가 조직을 갖추고 성장하기 시작한 때는 1900년 5월,
게일(James Scarth Gale) 목사가 연동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봉사하면서부터이다. 게일 목사는 캐나다 출신 선교사로서 1888년 12월 우리나라에 왔다. 처음에는 캐나다 선교지였던 원주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게일은 원주지역에서 유명한 난봉꾼이요 도박꾼이며 일명 꼭지대장(지금의 건달)으로 알려진 고찬익을 만나서 성경책을 주게 되었다. 성경책을 받아든 고찬익은 말
씀에 감동되어 게일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충성하다가 연동교회로 부임할 때 함께 왔다. 그가 불쌍하고 힘 없는 노인들의 짐을 짊어져다 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자 이 소문이 서울 장안에 퍼져서 당시 500명 교인이 1200명으로 부흥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1904년 연동교회에 당회가 조직되면서 천민 출신인 고찬익이 초대장로로 장립되었다. 이는 무어 선교사의 기독교 정신에 의한 계급타파와 기독교 윤리 구현의 선봉적 실천의 개가였다. 그 후 고찬익 장로가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식중독으로 소천하게 되어 연동교회장 1호로 장례를 치렀다.

1907년에는 천민출신이며 노름꾼 출신이었던 이명혁과 양반 이원긍을 후보로 투표한 결과 이명혁이 장로로 선출되어 장립되었고, 1909년에 3대 장로로 갖바치이며 광대 출신이었던 임공진이 선출되어 장립을 서두르자, 법무협판(법무부장관)이었던 이원긍과 함우택(함태영의 아버지) 등이 반기를 들고 100여 명의 성도를 이끌고 나가 묘동교회를 세웠다.

이때 함태영은 청년으로서 아버지의 부당성을 말하며 효를 중시하던 그 시대의 대의적 명분을 저버리고 연동교회에 남아 후에 제2대 위임 목사가 되어 연동교회를 시무하기도 하였다. 게일 목사는 교회는 사회적 전통보다 개인의 신앙적 본질과 결단을 중요시하며, 그래서 선교 방침은 ‘높고 귀한 데’있지 않고, ‘낮고 천한 데’있다고 하였다.

한국교회사(46)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2. 서울에서의 복음 전파

6) 여성 중심의 주일학교 시작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아펜젤러가 정동교회를 설립하여 조용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스크랜턴 여사도 열악한 환경과 싸우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스크랜턴 여사가 한국에 와서 처음 느낀 것은‘이 나라의 가장 급속한 진보를 위해서는 여성과 소녀들이 꼭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여성들의 위치란 남성들에 의해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소외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여성들에게는 배움의 기회는 커녕 오직 가문을 계승할 아들을 낳는 의무만이 존재할 뿐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던 때였다. 이런 한국 여성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통해 자유의 기쁨을 찾아 주고 싶었던 것이 스크랜턴을 비롯한 여 선교사들의 간절한 바램이었다.

이런 때에 최성균의 아내의 회심과 세례는 다른 여인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과 자극을 주었다. 점점 더 여인들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여성들만의 집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888년 1월에는 이화학당에서 12명의 처녀(어린이)와 3명의 부인이 모인 가운데 주일학교가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남자들의 주일학교는 1888년 3월 11일에 시작되었다.

그 해 2월에는 스크랜턴 부인이 주일 밤마다 여자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해 가을에는 성경반의 학생 수가 35명으로 늘어났다.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글을 가르치고, 이름이 없는 여성들에게는 이름을 지어 주는 일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그로 인해 한국여성들에게 있어 기독교의 복음은 획기적인 생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조선어가 서툰 스크랜턴 부인이 남자 매서인을 부인 성경반 성경교사로 세우자 부녀자들이 어찌 남의 남자를 볼 수 있겠느냐 하여 성경반에 오기를 꺼려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스크랜턴 여사는 학생과 교사 사이에 휘장을 쳐 서로 대면하지 않고 말소리만 들리게 하는 방법을 취했다. 교회 안에 남녀 좌석 사이에 휘장이나 벽을 세워 남녀를 구분하는 서구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 등장한 것이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신분과 성을 초월하여 하나 되게 만드는 복음이 조선인들의 심성과 문화 속에 뿌리 내리기까지는 이와 같은 문화적 갈등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문화에 반(反)하는 복음의 전파 방법이 조선인의 전통을 파괴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면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러다‘ㄱ’자 형태로 교회를 건축하여 한쪽에는 남자석, 다른 한쪽에는 여자석을 정하고 강대는 모서리에 설치하여 양쪽 다 설교를 들을 수 있게 하는 교회들이 생겨났다. 그 전형적인 교회가 평양의 장대현교회였다. 점차 그 같은 추세가 증가하면서 남석과 여석을 휘장이나 칸막이로 구분하는 교회들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1925년까지는 휘장이 완전히 걷혀지지는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선교사들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현안은 제사 문제였다. 게일은 원산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사 문제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 결과 신자들 대다수가 제사를 지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처음부터 제사는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는 것으로 규정하여 제사를 금하고 전국 교회가 이를 지키도록 했다.

첩 문제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첩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이를 금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1895년 감리교 선교회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이것은 우리 감리교 연회에서 결의한 것인 바 어떠한 사람이든지 첩을 두는 것은 교회의 법과 규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비록 교회에 나오더라도 출교시킬 것이며, 또한 그러한 사람은 감리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금한다.’

장로교 선교회 역시 일본, 중국, 인도 등지의 선교사로부터 온 문서들을 참고하고 오랫동안 이 문제를 숙의한 결과 첩을 두는 것을 금지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 후 장·감은 제사와 첩의 문제를 철저하게 금지하는 것을 선교회의 원칙으로 정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직분자들 중에서도 교회를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선교회는 이 원칙을 준수했다.

장·감은 세례의 기준을 높여 일정 기간 신앙생활을 통해 신앙이 깊어진 이들을 대상으로 세례를 주었다. 감리교회에서는 세례 후에 바로 입교인으로 허락하지 않고 일정 기간을 거친 후에 입교인으로 받아 주었다. 그래서 감리교에는 교인이 입교인, 세례교인, 학습교인 그리고 평신도 등 4단계의 신앙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즈음부터 장로교회에서도 학습 제도를 신설하여 신입교인이 몇 달 동안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한 다음에 학습을 시행하고, 학습을 받은 후 일정 기간을 거친 후에야 세례를 주었다. 대개 6개월 동안 학습교인으로 있은 후 문답을 거쳐 세례를 베풀었다.

비록 더디기는 했지만 복음이 전래되면서 의식의 변화가 나타났고, 그와 함께 문화 변혁도 일어나고 있었다. 복음의 원칙이 제시되고, 갈등의 과정을 거쳐 그 원칙이 수용·정착되어 가기 시작했고, 자연히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한 잘못된 전통과 문화와 관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닿는 곳마다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었다.

한국교회사(47)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2. 서울에서의 복음 전파

7) 순회 전도의 시작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복음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조용히 확장되어 나갔다. 2년간의 언어 습득과 정착기를 지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지방 순회 전도를 떠났다. 1887년 4월 13일 아펜젤러는 조선 세관에 근무하는 헌트(J. H. Hunt)를 대동하고 평안도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 고양, 장단, 미력, 파주, 임진강, 송도, 김천, 통천, 평산, 서흥, 봉산, 황주를 거쳐 23일에 평양에 이르는 순회 전도를 했다. 이들은 지방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무관심한 듯 해 보여서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기우임을 곧 알게 되었고, 아펜젤러는‘우리가 머무는 곳에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죄인들이 회개하는 그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펜젤러에게 평양의 첫 인상은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독립적으로 느껴졌다고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이전에 내가 보았던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독립적이고 덜 위축되어 있으며, 모든 사람들은 활발하게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상점에는 많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성냥이나 물감, 옷감 등의 외국 제품들 외에도 한국에서 만든 여러 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런 상점들이 많이 있다. 오늘 아침(4월 24일 일요일 아침) 성벽 바깥에 있는 전신국에 가면서, 우리는 1마일쯤 중심도로를 따라 걸었는데, 여러 곡식들 - 콩, 기장, 보리, 옥수수 그리고 심지어 밀과 메밀 등 - 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밀은‘술’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나는 이렇게 풍부한 것에 놀라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농촌이 넓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곡식들이 잘 되어서 기쁘다.”고 하였다.

아펜젤러는 평양에서 장군(將軍)이라는 이씨가 2명의 첩을 끼고 앉아 노는‘탐관오리의 부패상’을 목도하고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사람의 도덕 환경은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일으키시는 은혜를 믿는다. 그리스도의 피가 그들의 가슴에 닿는 길 외에는 그들을 죄에서 구원할 길이 없다. 그들이 지금 이 세상 환경에 몰두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눈이 영적 필요에 따라 열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주님 어서 그날이 오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아펜젤러는 이 여행을 통해“사람들은 우리에게 친절했다. 가는 곳마다 대단한 관심을 보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때 평양 사람들이 거칠다고는 믿기 힘들다.”고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음을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첫 순회 전도를 통해 조선 사회의 부패상과 죄악의 만연으로 안타까워하면서도 이 민족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아펜젤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또 이 민족의 부패와 죄악을 보면서 마치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아픔은 방관자의 아픔이 아니라 결단과 실천을 전제한 아픔이었다. 1887년 4월 24일자 아펜젤러의 일기는“지금은 씨를 뿌릴 때다. 좋은 씨가 뿌려져서 풍부한 열매가 맺혀지게 하소서.”로 맺고 있다. 이와 같은 아펜젤러의 소원은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왔다.

1887년 가을, 언더우드도 지방 순회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의 판단에 서울의 한복판에서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설립하고, 공개적인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의 상황이 개방되어 있다면, 지방에 대한 순회 전도여행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송도, 소래, 평양 그리고 의주로 첫 순회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 여행길에 가지고 간 의약품과 서적들을 나누어 주고, 돌아오는 길에 소래에서 비밀리에 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황해도 소래에 이르러 부유한 한 농부의 집에 4일간 머물면서 그 며칠 사이에, 수년간 다른 방법으로 한 것보다 더 한국인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9명의 신자들이 마을 전체를 기독교 공동체로 이루어가고 있음도 확인했다. 그는 이 여행에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선교 상황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를 입수하여 돌아왔다. 즉 송도에는 10-12명의 세례 청원자가 있고 70명(혹은 더 많은 수)이 넘는 신도가 있으며, 평안도 혹은 의주에는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세례를 준비해 왔으며, 해주에는 더 많은 수의 신자가 있다는 소식도
접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가 지적한 것처럼 언더우드가‘경성으로부터 서북각도를 편람’한 이 전도여행은‘장래의 전도 요소와 중심지를 산정’하는 뜻 깊은 여행이 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 언더우드는 첫 선교여행에서 경험한 것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소래에 도착하자 전체 마을이 나에게 경의를 표하기에 바빴습니다.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은 어떻게 하면 나를 기쁘게 해줄까 하고 마음을 쓰느라 경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내가 기뻤던 것은 기꺼이 자신들을 기독교인들이라고 불렀던 여섯 명의 사람들을 발견했으며,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나는 다시 혼자 작은 마을에 들어갔는데, 그때에 달려 나와서 두 손으로 나를 붙잡고 나를 환영했던 사람은 현재에는 목사로 시무하는 서경조 씨였습니다.”

언더우드는“이 여행을 시작할 때 약간은 두렵고 떨렸다.”고 고백했던 첫 선교여행을, 자신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순탄하게 마친 것이다.

한국교회사(48)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3. 한국 초대 교회의 수난

1) 갑작스런 금교령

한국 초대 교회가 처음으로 당한 수난은 1888년 4월에 발표된 전도 금지령이었다. 1884년 선교사가 입국하기 시작한 이래 조심스럽게 진행되던 복음 전파는 여러 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1887년 한 해 동안 소래교회, 새문안교회, 정동교회를 창립하고, 첫 순회 전도를 실시하고 세례식도 거행하며,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토대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1888년 4월 28일에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조병식이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3국 공사에게 기독교 전교를 금하라는 조회문을 통보한 것이다. 이에 알렌이 입국한 이후부터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한국 정부를 자극할까 봐 매우 우려를 해오던 미국 공사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는 이 내용을 선교사들에게 알렸다. 선교가 순조롭다고 여겨지던 그 순간 갑자기 금교령이 내려진 것이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이미 이 일이 있기 전 1887년 11월 27일 정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피어선에게 편지를 보내 "정부가 기독교 사역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며 한국 선교의 장래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정부가 바뀌거나 아니면 더 안정될 때까지 선교사역의 진행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으며, 심지어 현재와 같이 생명과 재산의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은 무모한 짓"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금교령은 주로 천주교를 겨냥해 내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개신교만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개신교가 천주교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천주교보다 개신교를 선호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개신교에 대해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금교령이 내려진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1887년에 천주교회에서 서울 시내의 고 지대(지금의 명동)에 대지를 비밀리에 큼직하게 매입해서 왕궁을 내려다볼 정도로 웅장한 대성당을 건축하는 데서 발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홍렬 교수는 그의 책‘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조선 정부의 말썽’과 건축 과정에서의‘조선 정부의 강렬한 반대와 물자의 결핍’정도로 일언하고 있으나, 사실은 고종이 그 성당 위치가 궁전보다 높기 때문에 왕실 존엄이 깎인다 해서 그 건축
의 중단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불응한 천주교회의 불손이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왕실을 가장 불쾌하게 만든 것은 이 과정에서 보여 준 불란서 신부들의 오만한 태도였다. 왕실에서는 조약에 있어서도 서울이 개항지가 아니기 때문에 성당 건축을 무조건 반대할 수도 있었지만 시내 다른 터를 골라도 된다는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 고종이 불란서 공사관을 통하여 성당 터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란서 신부들은 불란서 정부를 등에 업고 동시에‘동맹국 러시아의 훈수’를 받아 성당 건축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천주교는 그 자리가 자신들이 오랫동안 물색하여 온 성당 자리인 데다, 개신교가 선교열을 가속화하고 있는 마당에 한국 선교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성전 건축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실의 요구를 천주교가 거절하자 사태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았다. 성당 건축 중단을 요구한 고종의 요구에 불응한 천주교의 불손이 급기야는 금교령으로 이어진 것이다. 금교령은 외국 공관뿐 아니라 국내 선교사들에게 적지않은 혼란을 초래했다. 고종의 금교령이 발표되자 미국 공사 휴 딘스모어는 정도 여행 중에 있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두 선교사에게 서한을 보냈다.

‘대군주 전하의 명령이라 하여 조선 외무부로부터 공한을 받았는데, 그 내용에는 국내에 거주하는 미국인 중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파하고 있다는 것을 조선 정부에서 알고 있다는 것과, 이 사실을 정부 당국에서는 부당하게 여긴다는 것, 조약상 인정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중지를 요구한 것 등이 있다. 이러한 행동의 금지에 협조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므로 나는 주한 미국 공사로서 두 분은 조선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전파 및 종교 의식과 규례의 집행을 중지하도록 청하는 직무를 행사한다.’고 하였다.

이 전교 금지 칙령은‘어떤 장소에서 여하한 종류의 종교 교육이든 금’하는 것이었고, 실질적으로 "조건에 관계없이’‘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금지한 것’이었다.

1888년 봄, 아펜젤러와 함께 순회 전도여행을 하던 언더우드는 평양에 도착하여 금교령 소식을 듣게 되었고, 지방 전도 여행을 중단하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의 상황을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본래 이 칙령이 로마 가톨릭 교도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자신들의 주의 사업에까지 지장이 있게 되었다고 이 소환 명령에 몹시 불쾌해 하였다. 한편으로 뭔가 이상한 낌새만 보이면 늘상 그러하듯이, 외국인 사회에서는 위기적인 긴장감이 팽배하였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문제가 그들의 무모한 지방 여행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의료 사업이나 교육 사업에만 몰두해야지, 공연히 전도 사업에 끼어들어 관리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중요한 위치를 위험스럽게 만든다든가, 그들을 곤경에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적인 원인은 금지된 자리에 성당을 세운 로마 가톨릭교인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1888년 5월부터 9월까지 학교 아침예배, 주일예배를 비롯한 일체의 한인들의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다. 시골에서는 정도가 더 심해 기독교 문헌들을 모두 불태우고 종교의식을 전폐시켜 과연 그곳에 이전에 선교 사업이 있었는가 의심할 정도였다. 초기 선교사들은 과연 한국에서의 선교 사업이 계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금교령이 내려진 이후 종교 활동 재기 문제를 놓고 장감 선교회 안에는 미묘한 의견 대립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알렌과 헤론을 비롯한 한쪽에서는 조정을 자극하지 않고 최소한의 명맥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종교 활동을 포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설사 생명 그 자체에 위험이 온다 해도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최우선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미국 공사는 금지령이‘학교나 가정에서 예배를 행하는 것, 또는 본토민과 함께 기도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선교사들에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자신들이 운영하는 배재학당과 고아학교에서 조선인들과 함께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실제로 종교 활동을 재개했다. 비록 일시적이지만‘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제외한 다른 선교사들은 그 칙령 공포에 따라 모든 종교 사업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유사점이 많은 이 두 선교사는 그들의 두 소년 학교와 가정에서 종교 활동을 개시하여 원기 왕성하게 찬송가를 불렀는데, 한국인들과 함께 부르는 이 찬송가 소리는 거의 1.6km 근방까지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저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지방 여행에서 돌아온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언더우드는 정부의 지도적 각료 몇 사람의 공식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언더우드에게 그들이 세운 육영공원
(government school)을 영구히 맡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원래 이 학교를 맡았던 미국인 교사들이 불만을 느끼고 사퇴해 버렸기 때문에 이 젊은 선교사가 얼마의 보수를 요구하든 가장 좋은 집안의 젊은이들로 가득 찬 그 학교를 그의 완전한 통제와 책임 하에 맡기려고 한 것이다. 외국인들의 입장, 혹은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이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곧 이 학교를 담당하는 데 있어 기독교를 가르칠 수 없다면, 자기는 학교를 맡지 못하겠다고 그들에게 통보했다. 규칙상으로 교과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조차 언급될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언더우드의 제안은 두말 없이 승낙되었으며 빠른 답을 기다린다는 소식이 왔다.’그러나 이 제안을 수락할 경우 선교 일보다 학교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을 염려한 언더우드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선교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었다.

금교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그것도 순회 전도여행에서 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제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당시로서는 현명한 처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정반대였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큰 소리로 이끄는 회중들은 계속해서‘예수의 피밖에 없네’등의 찬송가를 하늘에 울리도록 소리쳐 불렀는데도 가장 비천한 조선인 신자를 비롯해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의 일꾼들은 다시 나가 복음을 가르치고 선교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사(49)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3. 한국 초대 교회의 수난

2) 영아 소동

1888년 5월부터 9월까지 선교 금지령이 진행되는 동안 소위 ‘영아 소동’(the Baby Riots)이 발생했다. 이는 1870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같은 유형의 것이었다. 서양인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자 서양인들에 대한 폭동으로 이어져 서양인 학살사건으로 발전했던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이 소동이 최절정에 달한 것은 6월 10일부터 25일 사이였다. 이것은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과 오해가 증폭되면서 터진 것이다. 외국인들이 조선인 악질분자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아이들을 꾀어다가 잡아먹고, 눈알을 빼 약용이나 사진 현상 재료로 사용한다는 음흉한 소문이 항간에 나돌았다. 이 때문에 선교사와 상종하던 관원까지 9명이나 처형을 당했다.

릴리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영아 소동의 동기는 민비의 파멸을 획책하던 정적들이 고의로 일으킨 사건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 당시 궁궐 사정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민비의 파멸을 획책하는 왕비의 적들이 모든 문제를 고의로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민비는 진보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외국인들을 좋아했는데, 폭도들은 외국인을 대적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왕이 어렸을 때 나
라를 통치하던 섭정이었는데, 아들에게 통치권을 넘겨 주어야 할 때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권력을 쥐고 정사를 맡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온화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쉽사리 아버지를 물러나게 하지 못했다. 동양 종교(유교)의 규율과 관례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행동
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는 왕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서 영특하고 강력하며 두려움을 몰랐다. 때문에 본래의 왕이 이렇게 하찮은 존재로 밀려나 있는 것을 참지 못하여, 급작스럽게 쿠데타를 일으켜 놀라고 격노한 늙은 섭정자를 밀어내고 고종을 왕좌에 앉혔다. 그날부터 대원
군은 복수할 기회만 노리며, 민비와 그 가족을 파멸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 중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 1884년의 폭동이었으며, 이 때문에 왕비는 농가 여인의 복장을 하고 서울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또 하나의 음모, 마지막 음모의 결과로써 나타난 것이 1895년 궁궐에서의 민비시해 사건이었다.

아마 대원군은 민비의 행동을 배은망덕하고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를 왕비로 택한 것이 바로 대원군 자신이었으며, 그때는 민비가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은 대비가 양자로 택했었기 때문에, 대원군이 왕좌에 대해 요구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6월의 폭동에서 제일 처음으로 공격을 당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왕이 아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가마에서 끌어내려져 그 자신의 종자와 측근들이 보는 앞에서 거의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 당시 왕과 왕비가 아끼는 기관이었던 병원은 특히 음험한 범죄의 소굴로 지목되었다. 거기서 아기들의 심장과 눈을 잘라내어, 외국 관리와 선교사들의 요리상에 진미로 바쳐진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병원 부근에는 커다란 소요가 있었다.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가던 한 사람은 아기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받아 아무런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폭도들이 우리 공사관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어느 날 밤, 서울 근교에서 큰 화재가 일어났다. 그리고 북소리와 함께 사람의 혼을 빼는 듯한 외침 소리가 계속되고, 집들이 무너지고, 군중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우리 모두는 이제 우리의 마지막이 다가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불
은 꺼지고 우리는 아무 해도 입지 않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셨고, 우리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영아 소동이 일종의 폭동의 성격으로 발전하였음을 말해준다. 영아 소동으로 가장 위기를 만난 것은 역시 선교사들이었다. 군중들이 이성을 잃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후에 발생한 중일전쟁이나 러일전쟁보다도 더 두려웠다고 말했다. 흥분한 군중들이 공관 건물들을 방화하고, 몇 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어 거리에 방치된것을 목격하고는 외국 공관 대표들은 즉시 조선 정부에 자기 나라 국민의 보호를 요청하였고, 제물포의 전함에 주둔해 있던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 해군들이 급히 서울로 출동했다. 선교사들은 언제든지 공사관으로 달려갈 만반의 채비를 갖추었고, 심지어 상당수의 외국인들은 값진 물건을 챙겨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훗날 언더우드가 회고한것처럼 선교사들은 ‘화산(火山) 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들 정도로 너무도 불안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선교사들의 안전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정부에서도 영아 소동이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근거 없는 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진화에 나섰다.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누구든 아기를 먹는다는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곧 잡혀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사실 두 사람 이상이 공공연히 길거리에 서서 이야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사태는 곧 진정되어 갔다.’

3) 금교령과 영아 소동의 결과

금교령과 영아 소동은 한국 선교에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반감과 폭동이 있었다는 소식이 본국에 전해지자 본국 선교부는 한국 선교를 심각하게 재고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신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여론은 물론이고, 이런 위협이 존재하는 조선에 선
교를 계속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언더우드가 지적한 것처럼 감리교 선교부는 조선에 선교사업이 중지된것으로 알고 선교비를 삭감했고, 장로교 선교부도 선교의 자유가 허용될 때까지 선교사를 더 이상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내의 선교 금지령은 선교부로 하여금 선교 중지를 결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국내의 선교사들은 금교령과 영아 소동과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의 선교사역은 매우 고무적’이라며 본국 교회와 교단에 한국 선교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정부를 자극시키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했다. 오히려 금교령과 이어 발생한 영아 소동은 본래 그것을 발표하거나 그 사건의 발단의 원인과는 달리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국내 선교사들이 왕실과 민중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는 상당히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첫째, 정부가 갖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해소되어 두 사건은 오히려 조정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더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로 인해 발생한 금교령이었지만,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정부의 명령에 즉시 순응함으로써 정부 관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천주교의 명동성당 건축 강행으로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이미지는 더 악화된 반면 개신교에 대한 정부의 호의는 계속되었다. 왕실이 선교사들에게 호의적
인 인상을 가지게 된 것은 1884년 알렌이 입국함으로써 시작된 조선의 개신교가 천주교와는 달리 고종의 윤허를 받고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심 없는 국내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갑신정변 때 알렌이 보여 준 민영익에 대한 헌신적인 치료, 그의 후임 헤론의 희생적인 봉사로 개
신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호의적이었다. 이처럼 천주교와는 달리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보여 준 사랑과 상호 존경의 건전한 가정생활, 1886년 콜레라 만연 때의 헌신적인 봉사정신, 그리고 계층을 가리지 않은 진료활동 등은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다. 명성황후는 연봉 1,800달러를 지급하며 미국인 여의사를 자신의 시의(侍醫)로 고용했고, 고종은 알렌을 미국 주재 조선 공사로 파송할 정도로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다. 금교령과 영아 소동 이후 왕실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개신교 선교사들을 궁궐이나 외부에서
열리는 연회나 식사에 초대했다는 사실, 모든 면에서 선교회를 극진히 대우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칙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선교사들이 ‘칙령을 무시한 것이 아무런 반감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모두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실제로 1889년에 들어서면서 금교령은 사문화될
만큼 개신교 선교가 자유스러워졌다.

둘째, 자연히 이 일을 계기로 선교회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중과도 더욱 밀접해졌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무지와 근거 없는 편견을 가지고 보던 선교사들과 선교 사업이 결코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민중의 치료에 앞장섰던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이 두 사건을 경험하고 지적한 것처럼 선교사들은 비로소 ‘민중접촉자격험’을 통과한 셈이다. 처음
선교 사업에 냉소적이던 조선인들은 이제 전적으로 선교사들을 믿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노동을 천시하여 학식 있는 사람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설교하고, 가르치고, 타자기를 사용하고, 책과 설교문을 쓰고, 지방을 걸어 다니고, 좋은 길을 만들고, 담과 집을 세우고, 채소와 과수를 심고 가꾸며 돌보고, 또한 가축과 생선밖에 먹을 것이 없을 때
는 백정 일도 할 줄 아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모습이 한국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선교사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완전한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892년 길모어 선교사가 ‘조선에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안전한 일은 아니다. 위험은 존재한다.’고 고백한 것과 같이 많은 위험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백홍준은 복음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했으며, 정부에 의한 박해가 종식된 후에도 기독교로 개종한다는것은 부모, 형제, 친척, 친구, 동네 사람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

 

곤여전도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F. Verbiest)가 제작(1674년)한지로도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重刊)되었다. 8폭 병풍.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405*173.3cm

 


척화비
1871년 신미양요때 세웠다가 1882년에 철거된 척화비는 바로 교회의 박해 상징이기도 했다.



이수정의 개종
1882년 신사유림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성서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기독교대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가운데 한복입은 이)의 모습을 모여주고 있다.

 

 

한국교회사(25)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⑥ 이수정의 죽음

귀국 후 이수정의 신상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한국에 도착한 후 보수파에 붙잡혀 처참히 살해당했다는 설인데, 이것은 일본교회문서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루미스 역시 이수정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권력을 잡고 있는 보수파들에 의해 체포되어, 장차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반대할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사지
를 토막내 처형당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문은 이수정과 함께 귀국한 유학생들이 처형된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수정과 함께 귀국한 유학생 6명 중 유형준, 김한기, 박영우, 유송목 등과 뒤따라 귀국한 장은규, 박영빈 등 6명은 귀국 후 김옥균 잔당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때 이수정은 처형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때 귀국한 8명이 모두 처형된 것으로 보도되었고, 박영빈과 함께 귀국한 이은종도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동경에서는 이수정의 추모회까지 열렸던 것이다. 이은종의 처형 소식을 접한 일치영화학교(명치학원의 전신) 학생이었던 미야치 겐기치(宮地謙吉)의 추도문은 다음과 같다.

“나도 이모라는 최연소의 조선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6월 말일 경에 그는 선배 이주필 군의 권계를 물리치고 당시 조선 정부에서 지금 돌아온다면 어떤 국사범의 큰 죄라도 용서한다는 통지를 굳게 믿고 근일 중으로 귀국한다 하면서 학교에서 퇴학하였다. 나는 그가 근일 중으로 자기 부모들과 만나게 된다고 하면서 매우 기뻐하던 모습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 수십 명을 싣고 가는 배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붙잡아 다 죽여 버렸다. 이 슬픈 소식이 그해 가을에 축지 일치 영화학교에 들려왔을 때 다 비분을 금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하나는 이수정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처형은 사실이 아닌 풍설이라는 주장이다. 이수정과 같은 배를 타고 조선에왔던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은 1886년 7월 14일자 조선에서 동경으로 보낸 통신에“오랫동안 일본에 체재하고 있던 이수정 씨는 귀국 후 일본에 있을 때 얻었던 지병도 근일에는 점점 쾌차가 있어 건강이 회복되어 가며 국왕은 특별히 그를 사랑하고 우대하며 소중하게 여겨 근일에는 특별히 쌀과 돈을 하사하였다고 한다.”는 보고를 보냈다. 오윤태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가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진 것은 처형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받은 상처로 인한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이수정의 배교설이다. 이것은 백낙준에 의하여 제기되었는데, 그는“이씨는 귀국을 앞두고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하였다.”라고 하면서 파슨(Ellen C. Parson)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 이수정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문필로 널리 공적을 세웠고 미국에서는 그의 사진이 지상에 실렸다. 그는 마게도니아인처럼 나타났으나, 가련한 이수정은 좋지 못한 영향에 빠져 한국에 대한 관심을 적잖게 불러일으켰지만 그 문을 박차버렸다. 자기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한국에 보내어질 첫번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기회까지 던져버렸다.”

위의 견해에 대해 이만열은“과연 이수정은 배교함으로써 ‘잃어버린 지도자’가 되었으며, ‘일반 사회의 시각에서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시각에서도 사라졌고’그에게서는‘순교자적인 기독교 영웅의 삶’을 찾아볼 수 없으며, ‘초기 빛나는 선교 활동에 비해 그의 종말은 대조적으로 침울’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우리는 일단 앞에서 이수정이 귀국하기 전에 루미스를 만나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귀국하기 전에 기독교 신앙을 이탈하였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박용규 역시도“만일 이수정이 기독교 신앙을 정말 버렸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단지 귀국전 그 주변에 벌어진 정치적인 정황 때문에 잠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루미스에 따르면 동생이 다녀가고 오래지 않아 이수정은 일본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에 개화파 정부를 세우려는 책략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의 주의력이 자연히 성경연구나 번역에서 점점 더 벗어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미스는 이것이 곧 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박용규는“그가 수구파에 의해 처형을 당했든 아니면 일본에서 받은 상처로 세상을 떠났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한국개신교 선교에 바쳐진 그의 길지않은 생애 자체가 일종의 순교적 희생,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그의 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이만열도“우리는 그를 불타지 않은 등잔 심지 혹은 잃어버린 지도자로 보기 전에 인간의 연약한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불러 사용하였는가를 살필 줄 아는 신앙적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땅 한반도가 암흑에 잠겨있던 한 시대에 복음의 빛을 주시기 위해 택함을 받은 도구였던 이수정은, 한국 선교와 한글 성경 번역의 개척자 역할을 감당하고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가 소원했던‘성경을 조선에게’는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점차 구현되어 갔다.”고 하였다.

(4)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

① 한국 선교는 성경 번역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다.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의주 젊은이들과 더불어 성경 번역을 하고 있던 동안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 성경 번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해서 정식으로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국외에서 번역된 성경이 존재했으며, 선교사 입국 시 그 성경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다른 나라의 선교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현상이다.

② 한국 선교는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됨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의주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고향에 복음이 전해졌고, 선교사가 입국하기전에 소래교회가 먼저 세워졌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예수를 믿은 후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한국선교를 준비했다는 점 역시 다른 나라의 선교 역사에서 찾아보기 드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③ 이러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한국의 선교의 장을 여시기 위해 깊이 개입하시고 섭리하셨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불교신자인 김옥균이 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이 기독교라고 외칠 수
있었으며, 지극히 세속적인 임오군란의 사건으로 그것도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이 세례를 받고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만주에서 만주인들을 위해 활동하겠다고 입국한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며 한국선교를 위해 일생을 헌신할 수 있었겠는가?

이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를 하나님의 구속사로 운행해 나가신다. 그리고 그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을 전개하는 기관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자신에게 맡겨진 구속 운동을 전도(선교)를 통해 현실화시킨다. 그 전도 곧선교의 현장에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그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곳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임하여 그 말씀을 받은 자들을 변화시키시고, 변화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또 다시 교회 운동을 전개해 나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위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결과 한국교회는 성경 위에 든든히 서 있는 교회가 되었으며, 120여 년 전 복음의 불모지요 세계에 그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던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21세기 세계 선교의 대명을 받고 움직이는 선교 대국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사(2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3) 미국 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

외국에서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도 선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나라의 문을 굳게 닫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高宗)이 집권하면서 한국의 정세는 바뀌기 시작하였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통상 압력은 더욱 가중되었고,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정치·경제적인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라도 문호개방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서양열국에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양에의 문호개방은 곧 서양 문물과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정세가 이렇게 변하자 선교에 대한 형편도 변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미국 교회 내에서는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으며,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시작을 종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 선교사 유치 활동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을 계기로 1882년 5월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한미수호조약을 시작으로 1883년 11월 26일에는 영국 및 독일과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1884년 7월에는 러시아와 그리고 1886년 6월 4일에는 프랑스와도 조약을 체결해 한국은 이제 더 이상 감추어진 은둔의 나라가 아니게 되었다. 미국과의 조약은 우호 및 통상을 내용으로 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이었지만, 이것은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선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학자를 이 나라에 파송하여 언어와
문학과 예술을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한미수호조약 체결 후 남미 칠레 공사와 캘리포니아 검찰총장을 역임한 푸트(General Lucius H. Foote, 福德, 1826-1913)가 미국 초대공사로 임명되었다. 한국에 온 푸트는 1883년 5월 20일 고종을 알현하고 비준을 받아 업무를 시작하였다. 미국에 공사를 파송할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을 감지한 푸트가 조정에 건의해, 정부는 민영익을 특명전권대사로 한 11명의 견미사절단을 미국에 파송하게 되었다. 1883년 7월 15일 제물포를 떠나 일본의 요코하마 항에서 미국 아라비스(The S. S.Arabis)호를 타고 일본을 떠난 견미사절단 일행은 오랜 항해 끝에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다. 비단이나 무명으로 만든 전통적인 한국 양식의 희고 느슨한 두루마기를 입은 민영익과 홍영식, 서광범 일행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항인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움,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항만시
설, 즐비하게 늘어선 기선들, 항구도시에 세워진 수십 층의 고층빌딩들, 그 속에서 반사되는 야밤의 휘황찬란한 전깃불, 6척의 미 서부 남성들, 정돈된 도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 끝없이 펼쳐진 서부의 비옥한 평원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동양의 문물, 기껏해야 청나라를 통해 앞선 문물을 전하고 쇄국정책을 견지해야 한다고 외쳤던 수구파의 거장들은 서양문명의 발전 앞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들 일행은 아더(Chester D. Arthur, 1830-1886) 대통령을 예방하고,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이동하는 여정에서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윌리엄 그리피스와 가우처 학장을 만난 것이다.

① 견미사절단과 윌리엄 그리피스와의 만남

1883년 11월 27일 저녁‘조선: 은둔의 나라’의 저자 그리피스는 빅토리아 호텔에서 귀국을 준비하고 있는 민영익과 서광범을 만났다. 당시 그리피스는 한국에 대한 두 번째 작품, ‘한국, 국내외’(Corea, Without and Within)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직접적인 결실을 얻지는 못했지만 민영익과 서광범은 그리피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② 견미사절단과 가우처와의 만남

시카고에서 하루를 묵은 뒤 이들 일행을 태운 기차가 백악관이 위치한 워싱톤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그 기차 안에는 한국선교를 애타게 기다리던 미국 감리교 목사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가 타고 있었다. 이미 출판된 하멜표류기, 몇 종의 조선 항해기, 그리고 1882년에 출판된 그리피스의‘조선: 은둔의 나라’등을 통해 조선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보이는 가우처는 기차 안에서 견미사절단을 만나 3일 동안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선교를 백방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1년 전 조선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우처 목사는 견미사절단의 일행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선교 가능성을 확인하고, 1883년 11월 6일 감리교 해외 선교부의 파울러 감독(Bishop C. H. Fowler)에게“만일 은둔국인 한국에 선교사업의 정책을 세울 수 있다면 한국에서의 선교는 영구히 확립될 것이다.”라며 한국선교를 위해 2,000불을 동봉한 긴 편지를 보냈고, 후에 3,000불을 더 추가하여 한
국선교를 강하게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1885년 그리피스가‘한국, 국내외’에서 지적한 대로“1883년 가을에 뉴욕의 감리교 해외선교위원회는 한국에 선교를 착수하기 위해 5,000달러의 선교비를 전용할 수 있었다.”그러나 가우처 목사는 그 당시로서는 시기상조라는 말을 듣고 1884년 1월 31일 다시 자신의 지우 일본주재 미 북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토록 요청했다.

“당신은 한국을 여행해 그 나라를 답사하고 선교부를 설치할 만한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교도 땅에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일본이 그 영예스러운 일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적절한 것이며, 당신이 그 사역을 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이 교회에서 지금껏 해온 봉사에 걸맞는 보탬이 될 것입니다.”

부탁을 받은 맥클레이 선교사 부부는 이것을‘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한국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1884년 6월 24일 제물포항에 입국했다.

맥클레이 목사는 중국 선교 초기(1847년)에 그가 거주하고 있던 푸쵸우(Foochow) 시의 거리에서, 중국인 선원들에게 구조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한국의 난파선 선원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의 낯선 의상과 서 있는 모습, 민첩한 동작 등이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언젠가 한국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외국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도 자신에게 주어진 중국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매우 바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생각을 접었었는데, 가우처가 한국선교를 타진해 달라는 부탁을 하자 그것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맥클레이 목사는 한국방문 목적인 선교 허락을 받기 위해 서울주재 해외 공관들의 협력을 구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을 아끼지 아니 하던 중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맥클레이 내외와 좋은 친분을 맺은바 있었는데, 귀국하여 외무부 외위문 주사로 있었으며,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맥클레이는 김옥균을 통해 자신의 한국선교에 대한 청원의 글을 왕에게 올렸는데 즉시 면담이 허락되어 7월 3일, 청원 3일 만에 고종으로부터 병원 선교와 교육을 허용한다는 회답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선교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맥클레이는 7월 8일 한국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외무부 외위문 주사 김옥균을 통해 고종으로부터 의료 선교와 교육 선교는 해도 된다는 답을 얻어 낸 맥클레이는 이 소식을 가우처에게 전달했고, 가우처는 다시 감리교 선교부에 알렸다. 이렇게해서 1884년 북감리교 보고서가 지적한 대로 이교의 나라 한국에서‘복음화라는 원대한 목표를 숨기지 않은 채 교육 및 의료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된 것이다. 맥클레이 자신의 고백처럼 “이 같은 윤허는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마치 강물처럼 왕의 마음이 주의 손”에 달려 있어“주님은 그가 원하시는 곳 어디로든지 왕의 마음을 돌리신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고종의 윤허까지 받은 한국선교는 처음부터 비교적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2) 선교사 파송 결정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F. F. Ellinwood)는 아직 한국의 선교는 시기상조라는 해외선교부 위원들의 의견을 일축하고, 한국선교는 지금 시작할 때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선교를 호소했다. 이런 엘린우드의 노력의 결과는“우리나라 혹은 그밖의 지역에 교육 사업 및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나 어떤 선한 사업을 고무하거나 지원하는 목적”으로 맥 윌리엄스가 기부한 6천 불의 헌금을 포함하여 한국선교 개시를 위해 모여진 1만 불의 헌금으로 나타났다(당시 두 사람의 선교사가 2년간 사역하는데 필요한 선교비는 5천불이었음).

당시 상당한 재력가였던 맥 윌리엄스는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선교지에서 읽고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간 신문은 한미조약이 체결된 후 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한국 공사를 대통령 아더(Arthur)가 뉴욕과 워싱톤에서 영접하는 기사를 게재해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었다. 또한 일본 주재 조지 낙스 선교사의 즉각적인 한국선교 개시 요청과 중국주재 길버트 리드 선교사의 한국선교에 대한 강력한 요청, 이수정이 보낸 선교 요청 등이 선교지에 실림으로써 미국 각 교단의 해외선교부와 선교를 지
망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한국 선교열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의 많은 성도들에게는 선교헌금에 동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선교비의 지원을 받은 엘린우드는 구체적으로 한국선교 후보생을 물색하기 시작해 1884년 4월 목사의 아들로 테네시대학 의대를 졸업한 훌륭하고 헌신적인 의사 존 헤론(John W. Heron)을 북장로교 파송 한국선교 후보생으로 임명하고, 후에 언더우드 목사를 선교사로 임명하는 한편, 중국 남경에 있던 호레이스 알렌(Horaace N Allen) 박사를 한국으로 전임시켰다. 이 명령을 받은 알렌이 1884년 9월에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알렌은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미 감리교 선교부는 맥클레이의 편지를 받고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글들을 감리교 선교지‘가스펠 인 올 랜드’(The Gospel in All Lands)에 실었다. 선교지에 실린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서신을 보고 한국선교를 위해 선교헌금이 각지에서 답지했다. 상황이 이렇게 급진전되자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더 이상 한국선교를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의료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출신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과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itch Scranton, 1832-1909), 그리고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를 선교 후보생으로 내정하고 한국선교를 가속화시키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사(27)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외국에서 복음을 접한 이들의 적극적인 복음 전파와 선교 청원에 힘입어 1884년 들어서 한국선교를 위한 미국에서의 준비가 가속화되었다. 장로교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알렌을 한국 선교사로 전임시켰으며, 감리교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을 한국 선교사로 내정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레이스 알렌이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어 1885년 4월 5일 북장로교 선교회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회 아펜젤러가, 5월 1일에는 미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이, 그리고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J. W. Heron)이 입국하여 미 북장로교 선교회와 미 감리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개시하였다.

1. 한국의 첫 선교사 알렌

1) 알렌의 조선 입국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 )은 1858년 4월 23일 독립전쟁의 영웅 이탄 알렌(Etthan Allen)의 후손으로 태어나 1881년 중부의 명문 오하이오의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대에 진학해 학업을 마치고, 1883년에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세계 선교의 붐을 타고 1883년 봄 알렌은 북장로교 선교부에 중국 의료 선교사로 지원했고, 곧바로 그 청원이 받아들여져 그 해, 갓 결혼한 아내 패니와 함께 중국에 파송되었다. 1883년 10월 11일 중국에 도착한 그는 상해를 거점으로 하여 선교사역을 시작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알렌에게는 25살의
젊음, 2차 대부흥운동에서 체험한 뜨거운 성령의 역사, 미지에 대한 담대함이 있었으나, 선교 경험의 미숙, 어린 나이, 동료 선교사들과의 마찰, 아내의 건강 악화로 인해 첫 1년간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알렌은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중국에서의 선교가 여의치 않자 선교지를 옮길 생각을 했다.

헨더슨 박사(Dr. Henderson)와 몇몇 다른 상해 의료 선교사들이 알렌 선교사에게 한국행을 권면하자, 마침 한국에 관심이 있던 알렌은 함께 묵고 있는 윌리엄 홀트(William S.Holt) 선교사와 상의한 후, 1884년 6월 6일 한국세관(the Korean Customs Service)의 요셉 하스(Joseph Hass)에게 한국에 의사가 필요한지를 문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다시 3일 후인 9일에 뉴욕 북장로교 선교부 엘린우드에게“한국의 여러 외국 공관들과 세관에서 의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허락하신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그곳에 가서 선교사로서 열심히 일해 보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자신을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해 줄 수 있는지 전보로 알려 달라고 조심스럽게 문의했다. 7월 22일 알렌은 선교부로부터 한국 입국을 허락하는 전보를 받았다.

아내가 출산을 한 후 아내를 상해에 남겨 두고 그 해 9월 14일 남경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한 알렌은 9월 20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틀 후 상해에서 같이 온 중국인 어학 선생과 함께 매우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당나귀를 타고 서울에 입성했다. 처음 그의 공식적인 입국 신분은 미국공관의 공관의였고, 후에 영국, 중국 그리고 일본의 공관 의료를 담당했다.

고종은 알렌의 도착 후 푸트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자리에서 그가 이전에 선교사였는지, 또 선교사 자격으로 입국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를 원했다. 이때 푸트는“그는 미국 공관의이다.”라며 선교사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피해 나갔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허용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조선 사람들에게 선교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지양하고 가정에서 가족들과 조용히 예배를 드리며 자신을 이곳 조선으로 보내 주신 주님의 뜻과 섭리를 헤아리고 있었다.

2) 갑신정변(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대원군의 실각 뒤에도 계속 개화정책 구현이 미흡하고 오히려 수구파가 정권을 주도하는 것을 본 개화파는 일본을 등에 업고 정권찬탈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민영익과 서광범 등 견미사절단으로 미국에 입국했던 상당수의 수구파 지도자들은 비록 3개월의 짧은 미국체류였지만, 이 기간 동안 동양보다 수세기를 앞선 미국의 문화와 문명을 목도한 후에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내의 미묘하고 복잡한 정치 기류로 인해 민영익과 서광범의 동반관계는 얼마 가지 않아 금이 가고 말았다. 민영익은 서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청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 원했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급진적이라고 할 만큼 적극적이었던 서광범과의 사이에 갈
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구파와 개화파의 갈등이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황 가운데 불란서의 압력을 받고 있는 청국이 한국 주둔군의 반을 철수하면서 기회는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일본은 일본을 등에 업고 개화를 꾀하는 한국 내의 친일 세력의 개화파들과 결탁해서 물리적으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거사를 계획하고, 12월 4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이 날을 거사일로 잡은 것은 각국 공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개화파 지도자들은 일본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사관학교 생도들을 쿠데타에 동원하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병으로 국왕을 호위케 한 후 혁신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필요한 무기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 박문국에 고용된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주선을 통해 일본에서 밀수입하여 조달했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일본 공사 타케조이가 배후에서 지원했으며, 직접 행동할 사람들도 김옥균이 골라 일본에 파견했던 유학생 출신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거사에 참여한 개화파들은 저들이 원했든 원치 아니했든 간에 일제침략지반의 앞잡이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 된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일본인 낭인 4인을 배치하고 일본군 30명을 창덕궁과 경우궁
사이에 배치해 두었다. 12월 4일 저녁에 개최하기로 계획된 만찬회는 예정대로 일본영사를 제외한 서울주재 각국 외교관들과 척족일파가 참석한 가운
데 진행되었다. 자객들을 연회장 가까운 곳에 숨겨 두었고, 안국동 별궁의 방화가 실패하자 연회장에 인접한 가옥을 방화함으로 거사가 시작되었다. 연회장에 있던 수구파 지도자들이 외국 공사들과 함께 급히 밖으로 도피하자 숨어 있던 개화파 자들은 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개화파 일당은 거사 후 급히 창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에게 지금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속이고 고종을 통해 일본군의 호위를 요청케 하는 한편,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겼다. 일본군의 호위 속에 경우궁 안은 일체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12월 5일, 개화당은 각국의 공사, 영사들에게 신 정권의 성립을 통고하고 혁신정강(革新政綱)도 마련하여 발표하였다. 그들이 마련한 혁신정강은‘문벌의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확립, 관제의 개혁과 용관(冗官)의 혁파, 전세제(田稅制)의 개혁과 재정의 일원화, 군제의 통합과 순사 제도의 신설, 고관회의에 의한 정책 심의 그리고 형정(刑政)의 시정’등이었다.

일본 군대가 12월 5일과 6일 왕궁을 지키는 동안 급진 개화파 지도자들은 거짓으로 왕의 조서를 만들어 6명의 대신들을 왕궁으로 소환시켜서 모두 살해했다.

그러나 12월 6일 아침 6시에 일본 타도를 외치는 군중의 외침이 들렸고, 그날 오후에 3,000명의 한국인의 지원을 받는 600명의 중국정예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훗날 그리피스가 말한‘유혈의 거리 전투’(a bloody street battle)가 발생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일본 군대는 즉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갑신정변은 삼 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새로 건립한 우정국과 일본 외교부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일본 민간인이 살해되었으며, 권좌를 버리기를 거부한 홍영식은 중국 군대에 체포되어 중국군 캠프로 끌려가 거기서 처형되었으며, 갑신정변에 연루된 11명도 비참하게 처형당했다.

청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갑신정변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12월 30일 청국 대사가 3,000명의 청군을 대동하고 한국에 도착했고, 같은 날 일본대사 이노우에가 2,500명의 일본군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수개월 동안 조선 정국은 매우 긴장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885년 4월 18일 청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양국 군대가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1885년 10월 5일 대원군이 청국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으로 긴장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개화파들은 한국 선교의 장을 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885년에는 박영효가, 1888년에는 김옥균이 그리고 1895년에는 유길준이 서구문명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그 뿌리가 되는 기독교의 수용을 상소와 보도 형식으로 주창한 것 등이 한국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지극히 세속적인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28)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1. 한국의 첫 선교사 알렌

3) 알렌의 광혜원 설립

갑신정변 때 뜻하지 않은 화재로 왕궁으로 가기 위해 우정국 밖으로 먼저 뛰쳐나갔던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수구파의 지도자인 민영익은 개화파의 자객의 칼에 일곱 군데나 찔려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 마침 한국 정부 세관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 G. Van Mollendorf)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민영익을 식당으로 급히 옮겨 응급조치하고 한 시간 후 다시 세관본부로 사용하는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알렌 의사를 황급히 불렀다.

알렌 선교사가 도착하자 14명이나 되는 한의들이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으나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와 끊어진 혈관은 동양의학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의사들은 알렌의 치료를 극구 반대하였다. 저들은 ‘고귀하신 민대감의 몸에 서양 오랑캐가 감히 손
을 대고 치료하는 것은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민영익의 생명이 점점 위독하여지고 자신들의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해지자 끝까지 반대할 수 없어 알렌을 부르게 되었다. 알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신유의 은사를 내리시사 민대감을 살려냄으로 선교의 길이 열리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치료에 임하였다. 알렌은 민영익의 깊은 상처를 명주실로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치료했다. 그리고 상당한 걱정과 불안 속에서 석 달이나 치료해 주었다. 비록 노련한 의사는 아니었지만 알렌은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고, 민영익의 외상은 놀라운 속도로 치유되었다.

1885년 1월 27일 민영익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알렌에게 현금 10만냥을 제공하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정2품에 해당하는 참관 벼슬까지 하사했다. 후에 민영익이 알렌의 은혜에 감사해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하며 “당신이 미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위해 하늘
에서 내려왔다." 고 생각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와 함께 알렌이 고백한 대로 민영익의 회복은 이 은둔의 나라 한국의 지도자들에게 서양의학과 외과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알렌이 민영익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서양의학 기술을 소개하고 후에 직접선교의 길을 열어 준 최초의 서양병원 광혜원의 설립을 가능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전기가 되었다. 알렌은 1885년 1월 한국주재 미국 공관 폴크를 통해서 한국에 서양병원 설립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1885년 봄, 조선 정부는 병원설립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회답을 보냄으로써 그해 4월 10일 한국에 침대 40개를 갖춘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인 광혜원이 개설될 수 있었다. 광혜원은 ‘은혜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직접 지어 준 이름이며, 갑신
정변 때 죽임을 당한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집을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4월 26일 개설된 지 16일 만에 광혜원은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이름인 제중원으로 개명되고 왕실과의 유대도 더욱 강화되었다.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이 개원되기 5일 전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그곳을 선교거점으로 삼고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1885년 6월 21일에 입국한 장로교 의료 선교사 존 헤론(John Heron), 같은 해 5월1일에 입국한 학문과 경건과 복음의 열정을 균형 있게 겸비한 감리교 의료 선교사 스크랜톤, 1896년에 입국한 의료 선교사 앨러스도 처음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제중원은 아직 선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선교사들이 때를 기다리던 곳이었고, 합법적으로 체재할 수 있는 은신처이며, 활동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 제중원이 후에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고, 오늘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대학이 되었다.

알렌은 1887년 선교본부와의 관계를 끊고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 주재 한국 공사관 소속 서기관이 되었다. 1889년 선교본부로부터 재임명을 받았으나 1890년 선교본부와의 관계를 끊고 다시 서울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897년에는 총영사, 1901년에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일했다. 이런 변천 때문에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알렌의 소명과 그의 모난 성품을 들어 제발 다시는 선교사로 임명해 주지 말 것을 미국 선교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얼마 후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에비슨 선교사가 도착해 공관으로 자리를 옮긴 알렌을 대신해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알렌은 1884년에 한국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과 의료 활동을
통해서 선교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국교회사(29)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I. 선교사들의 입국

2. 언더우드의 입국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정식 선교사의 입국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입국한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1) 언더우드의 성장 및 교육 배경

(1) 출생 및 유년기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ie)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종교적인 관심이 많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이었고, 그의 증조부인 토마스 언더우드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또한 토마스의 아내는 스코틀랜드 출신인 알렉산더 와우 박사(Dr. Alexander Waugh)의 딸인데, 박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서 능력 있는 설교자였으며, 해외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지닌 분이었다. 언더우드와 알렉산더 와우 박사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는데, 관대한 마음 씀씀이, 넓은 박애심, 연합에의 사랑, 자비, 지도 및 조직의 자질, 지적인 은사 등을 들 수 있다.

언더우드는 이런 신앙의 계보를 가진 가정에서 신앙적 유산을 받아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는 주의 재림에 대한 갈망과 기다림을 완전히 물려받았다. 해서 주의 재림은 언더우드에게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언더우드가 다섯 살 되던 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남기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몇년 후 재혼했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 10살 된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12살 먹은 형 프레드 언더우드(Fred Underwood)와 함께 프랑스의 불로뉴 슈메르(Boulogne Sur Mer) 지방에 있는 가톨릭이 운영하는 기숙사 남학교에 보냈다. 가톨릭계 학교라 해서 소년들을 개종시키려 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소년들은 영국인 교회에 출석하면서 흔들림 없이 개신교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곳에는 영국 학생들이 있기는 했으나 주로 프랑스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두 형제는 기숙사에 들어오자 언제나처럼 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했다. 당시 세속화되어가던 가톨릭계 학교에서 볼 수 없었던 낯선 이 모습을 보던 프랑스 소년들은 베개, 장화, 빗 등을 던지며 조소했지만, 두 형제는 굴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에 처음에는 방관하던 영국 소년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 형제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 소년들도 저들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하여 취침하기 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숙사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어릴 때 언더우드에게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런 집중력 때문에 언더우드는 한 번 하고자 결심한 일은 그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이든, 또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다 해도 그것을 뚫고 나가 결국 거의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끝내곤 했다.

(2) 미국에서의 청소년기

1872년 언더우드가 12살 되던 때에 부친은 그의 가족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 뉴저지주의 뉴더햄(New Durham)에 정착했다.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이다. 언더우드가 화란개혁교회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후에 언더우드가 보여 준 타 교단에 대한 관용, 신학적인 유연성, 동료들과의 친화, 부흥운동에 대한 열정 이 모두는 화란개혁교회에서 물려받은 유산들이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주일 오후의 대부분을 자녀들과 함께 보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주일에는, 아이들은 교회 놀이를 하곤 했는데, 이런 경우에 호러스는 언제나 설교자 역을 맡았다. 그는 의
자 위에 올라서서 정식 예배와 똑같이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청중과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설교를 하곤 하였다. 프레드는 가장 성자답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고, 존은 장남으로서 가장 큰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 둘 중 한 사람이 설교를 담당하는 것이 제격일 수도 있었는데, 설교자의 역할은 언제나 호러스가 맡곤 했다.

훗날 실제로 설교단에 서서 청중들을 사로잡아 감동시켰던 그 재능 그리고 한국의 이야기를 그렇게 힘차게 설파했던 그 재능의 상당 부분이 이 당시에
이미 발견되고 발전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이 호러스에게 맡겨졌던 것이 아닐까싶다.

미국에서의 소년 시절 동안, 소년들은 많은 복음사업에 관여하였다. 교회와 주일학교에서의 서너 번의 정규 예배 외에도 이들은 선교학교에 참여하였으며, 유니온 힐(Union Hill)의 암흑가에 종교서적을 배포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한 번은 술집에서 전도하던 중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거기 있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나가라고 거칠게 소리친 적이 있었다. 소년들은 예의바르게 절을 하고 물러났지만, 난폭한 행동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음 주에 침착하게 다시 방문하였다. 소년들은 경찰을 부르겠다는 협박을 받았으나, 열 살 때에도 그 소란스러웠던 기숙사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이들인지라, 이제 열여섯, 열일곱이 된 나이에 한두 명의 문지기가 저지한다고 해서 단념할 리가 없었다. 결국 술집 사람들은 옛날의 프랑스 학생들처럼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에 굴복하였고, 이 상냥하면서도 동시에 불굴의 의지를 지닌 어린 복음전파자들과 친해지기까지 하였다.

이 시절에 호러스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로브 교회에서 봉사하던 메이번 목사(Rev. Mabon)였다. 호러스는 그의 밑에서 자라면서 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하게되었고, 학자처럼 탐구하는 자세로 책에 몰두하여, 여섯 달이 지나자 대학에 진학하는 데 필요한 헬라어를 모두 배우게 되었다. 메이번 목사는 호러스가 브룬스윅에 있는 화란 개혁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학과장직을 맡고 있었다.

(3) 청년기

이민 후 자기의 본업인 문방구 제조에 착수하여 성공한 아버지는 언더우드를 장차 목회자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1877년 뉴욕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다시 가세가 기울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없었던 언더우드는 20여 리나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통학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형편을 불평한 적이 없었다.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졸업 시 졸업반을 대표하여 고별연설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 속에서도 신학교로의 입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1881년 자신이 속한 교단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 1784년에 설립된 화란개혁교회(RCA) 교단 신학교 뉴 브룬스윅신학교는 비록 외형적으로는 프린스톤신학교와 견줄 수 없었지만 그리피스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 선교사, 학자를 배출한 훌륭한 신학교였다.

호러스는 이목구비가 단정한 외모에 성실, 헌신, 영성 그리고 지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남다른 복음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언더우드는 신학교 은사들의 인상에 깊게 남은 남다른 학생이 되었다. 호러스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그를 관찰했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썼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그는 수업이 시작되는 첫날 뉴 부룬스윅의 신학교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는데, 나는 어떤 이에게 그가 누구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를 처음 보았는데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어떤 목적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집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호러스는 말씀 연구와 신학공부, 그리고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하루 5시간만 자는 고된 일과를 감당했다. 한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 마는 성격 탓에 그는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동안에도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학업과 복음 사역에 전념하는 열성을 보였다.

“호러스가 신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 거의 매일 그가 무슨 종교적인 일로 뉴 브룬스윅의 어떤 거리를 외투자락을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그의 급우 중 한 사람은 이야기 하곤 했다.

이러한 활동이 학업에 지장을 주리라고 믿는 교수들은 그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러스의 활동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또 그가 하는 행동들이 학급에서 그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치거나, 5시간의 수면과 19시간의 학업과 일을 강철과 같이 견뎌내는 그의 몸에도 무리를 가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교수들은 실제로 그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뉴 브룬스윅의 가장 큰 화란 개혁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이스튼 박사는 호러스와 마음이 통하는 인물이었다. 영혼에 대한 정열로 불타오르던 그 목사는 이전에는 변화가 없고 냉랭했던 교회에 불을 질렀다. 계속적인 부흥, 놀라운 회심들, 새벽기도와 저녁기도, 예배 후의 모임 등으로 넘쳐
나게 된 이 교회는 모든 이웃 교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호러스는 부목사가 감당해야 할 만한 역할을 감당해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주일 하루 내내 일곱 여덟 번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열정적인 활동을 감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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