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륙선교에 새 장을 연 "허드슨 테일러"선교사>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
“중국인처럼 사고하고 살라.”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1832∼1905) 는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중국인처럼 살았던 선교사다. 그는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1865년 초교파 국제선교단체인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창립,‘믿음선교’(Faith Mission)와 더불어 해안선선교시대에서 내륙선교시대를 연 것이다.
“성경을 사랑하거라. 하나님은 거짓말을 안 하신단다. 그분은 너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고 실패하지도 않으신단다.”
그는 아버지 제임스 테일러로부터 늘 이같은 말을 들었다. 하지만 15세 때 반즐리은행의 하급직원으로 일하면서 물질주의에 깊이 빠져 하나님을 멀리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중 17세 때 소책자를 통해 회심하고 중국선교사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
메드 허스트가 쓴 ‘중국의 현재와 미래’라는 책을 읽으며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중국어 공부에 몰두했다. 1853년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터지자 그는 의학공부를 마치지도 못한 채 서둘러 중국으로 떠났다.
특정 교파의 후원을 받지 못했던 터라 그는 늘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의사자격증이나 목사안수도 받지 못해 자립 기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1855년 7월27일 그는 우등민족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선교사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변발을 하고 중국옷을 입기로 했다. 또 2명의 중국인 성경공부 인도자를 세워 또 다른 중국인들을 양육하도록 도왔다.
1860년 영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의학공부와 닝보방언으로 된 신약성경 출판에 몰두했다. 조지 뮬러,찰스 스펄전 등과 교류하면서 각 선교회를 순회,중국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오늘 하루도 3만3000명의 중국인들이 소망 없이,하나님 없이 죽어갈 것이라는 생각에 또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자녀 및 소속 선교사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에도 절망하지 않았다. 그레이스 새뮤얼 노엘 등 세 자녀와 아내 마리아를 잃었다. 또 CIM 선교사 58명과 선교사 자녀 21명을 잃었다. 하지만 그가 세운 CIM은 1882년까지 중국의 모든 성과 몽골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의 선교원리와 정책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케임브리지 7인은 물론 전세계 독립선교회들이 소속된 초교파선교단체(IFMA) 및 복음주의선교협의회(EFMA)에 가입한 교회들이 모두 그의 뜻을 따랐다. CIM은 1964년 OMF로 이름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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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는
1832년 5월 21일에 영국 요크셔주 반슬레에서 태어났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복음적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5살이 되자 두 동생을 앉혀 놓고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웅변이 뛰어난 감리교 지방 설교자이자 약사이며, 그의 어머니는 매우 온화하고 인내심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아버지의 능력과 어머니의 온유한 성품을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아멜리아가 허드슨 테일러를 임신했을 때부터 남편 제임스 테일러와 그 아이를 놓고 중국의 사역자로 부르시길 서원 기도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부모님은 약제사였는데, 항상 그의 약국에는 사람들로 가득찼으며, 그의 친구들은 항상 모이면 감리교회의 발전상황과 선교사역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하였습니다. 특히 중국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말을 곧잘 듣고, 또한 그의 여동생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한 허드슨 테일러는 막연하나마 어릴 때부터 중국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른이 되면 반드시 다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면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신앙인이 되도록 교육에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허드슨이 11살이 되어 학교에 다니면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가 학교에 가서 책상 위에 엎드려 기도하면 "와! 허드슨이 기도한다"하며 아이들이 비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후 그는 학교를 그만 두었고 15살의 나이에 한 은행에 취직하였습니다. 그는 선배 동료들의 나쁜 영향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인가 하는 생각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징계로 시력이 나빠져 실직하게 되어 무의미와 절망 가운데 하루하루 고통하였습니다. 비록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분위기에서 자라났지만 테일러는 17세가 되어서야 회심하였습니다. 그때는 1849년 여름 그의 어머니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멀리 가고 안 계신 때였습니다.
소년 테일러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이 책 저 책을 뒤져보다가 어떤 종교적인 소책자를 발견했습니다. 영적으로 감동 깊은 것이라기 보다는 재미있게 보여서 읽기 위해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책을 읽어 나가다 그는 엎드렸습니다.
"성령께서 내 영혼에 기쁨과 확신의 빛을 비추셨다....영접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 수밖에 없었다."
2주일 후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자 그는 자신의 회심에 관하여 얘기했으나 어머니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2주일 전 친구 집에서 갑자기 아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하게 느껴 하나님이 그녀에게 확신을 주실 때까지 친구의 방에서 기도했다는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죄를 깊이 깨닫게 되며, 죄에 대한 완전한 구속과 온전한 값을 지불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으로 인해 자신의 빚이 탕감되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을 느꼈으며, 자신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중국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선교사로 그 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도했으며, 아주 어린 시절에 W.H. 메드허스트의 (China)를 읽고 테일러의 생각은 그 나라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모아서 남부럽지 않게 사느냐 하는데 온 관심을 쏟았던 그가 이제는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 수 있을까 주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후 글리너라는 선교잡지를 구독하기 시작했으며 중국협회 (Chinese Association)에 편지하여 사역소개와 자료 요청을 하게 된다.
그후 반즐리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 중국선교를 말씀드리자 목사님은 "거기엔 어떻게 가려하지?"
"모릅니다 하지만 옛날 유대 땅에서 열두 제자와 70문도가 지팡이도 전대도 먹을 것도 돈도 없이 자기들을 보내시는 주님이 곧 자기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이시기도 한 것을 믿으며 떠났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목사님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오, 얘야. 이제 네가 크면 지금보다 더 현명해 질 거란다 . 그런 생각은 예수님이 이세상에 계시던 시절에는 통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다"라고 일축해 버렸다.
후에 테일러는 이 일을 기억하면서 "나는 그후로 커서 어른이 되었지만 결코 더 현명해 지지는 않았다. 우리가 주님의 방법을 따르려 한다면 그리고 그분께서 그분의 첫 제자들에게 주셨던 확신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때 그들 시대에 적합했던 그것들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라고 썼다. 또한 항상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고 이어 전에 알지 못했던 그 어느 것과도 비길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를 위하여 해주신 일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하나님, 제게 저의 사랑과 감사의 표시로써 뭔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있은 다음 허드슨에게는 하나님이 자기의 생애가 어떻게 쓰여지기를 원하시는지 깨달았다는 명백한 확신이 찾아왔다.
"나는 내가 전능자와의 언약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 언약을 철회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음성이 내게 너의 기도는 응답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시간 이후로 내가 중국으로 부름 받았다는 확신은 한번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허드슨 테일러는의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가득차있었고, 그 중국 영혼들을 생각하며 날마다 기도하며 사역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게된다. 필생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준비시킬 목적으로, 그는 헐에서 어떤 의사의 조수로 일했으며그후 런던병원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를 향한 대규모운동으로 잘못 추측되었던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하여 중국에 대해 더 큰 관심과, 그리고 중국의 근접성에 관하여 귀츨라프가 기록한 선명하나 과장된 보고서의 결과, [중국복음 전도협회]가 창설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선교사로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기본적인 훈련에 착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올바른 정신자세와 생활태도 그리고 건강한 몸을 위해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잠과 음식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교회생활과 전도생활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중국어를 배우고 의술을 익혔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자 빈민촌으로 거처를 정하는 장막훈련을 하였습니다. 이 기간동안 테일러는 선교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철저한 자기부인의 훈련을 하였습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살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테일러는 생활에서도 선교훈련을 받는다라고 생각하고, 영국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고생스러운 생활을 견디는 법을 배우기 위해 침대도 없애고 딱딱한 바닥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식사도 가장 값이 싼 청어를 커피와 함께 삼키기도 하며, 감자 대신 콩과 쌀 푸딩을 먹고 양배추를 식초에 절여서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매일 사과 한 덩어리와 빵만 먹어 야위게 되었으며, 그의 조그만 다락방은 옛날에 그가 썼던 좋은 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심지어 밀린 임금을 지불해 달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중국에 가서 사역한다면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얻을 수 없다.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므로 영국을 떠나기 전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육신생활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허약하던 몸이 영양실조로 더욱 약해져 갔으며 해부학을 배우는 동안 실수로 병균에 감염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성열병'에 거의 생명을 잃을 뻔했으며, 여러 달 동안 의학공부를 쉬어야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이 "당신처럼 헌신적인 사람 처음봐요. 그래서 너무 부담스러워요."하며 청혼을 거절하였습니다. 중국선교냐 결혼이냐 하는 문제 앞에서 그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삶의 방향을 정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시험을 이겼습니다. 허드슨은 물질이 전혀 없는 형편에서 중국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기도만이 이 문제의 해결책임을 믿고, 기도로써 물질을 공급받고자 하였습니다. 한번은 허드슨 테일러가 커다란 병원에 실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중국선교협회로부터 생활비를 부담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을 수락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가 게을러지고, 그만큼 중국선교에 대한 훈련도 안일해질까 두려워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중국어 문법책도 없이 만다린어로된 누가복음을 가지고 사촌인 존과 함께 중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영어성경에서 누가복음의 짧은 구절하나를 뽑은 다음 그 절의 한 단어를 놓고 그 단어와 같은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 구절을 되는대로 많이 찾습니다. 그 다음 처음의 그 절을 중국어 성경에서 찾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공통된 한자가 나오는데 그것이 최초의 영어단어에 해당하는 중국에 글자가 됩니다. 그 다음 종이 쪽지에 영어 단어와 한자를 같이 쓴 다음 여러 군데에서 쓰임을 정리하다 마침내 확정되면 잉크로 쓰기 시작해 최초의 사전을 만듭니다. 테일러는 이렇게 공부하여 얼마 후엔 웬만한 중국어 한자는 다 알게 됩니다. 그 후 라틴어와 히브리어 헬라어도 공부를 하게 됩니다.
어느날 테일러에게 글리너의 편집국장인 찰스버드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테일러에게 중국선교를 이야기하며, 당신이 의사공부를 중지하고 지금 당장 중국으로 들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자네를 파송할것이라고 말합니다. 1년만 공부하면 의사가 되는 터이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고민할 여지도 없이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1853년 9월19일 CES(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 중국 선교회라는 단체의 파송을 받아 중국선교의 길로 들어섭니다. 마침내 허드슨이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약 다섯달간의 위험한 항해를 거쳐,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가 상해에서 자리잡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와 방불한 곳에서 불안감을 느꼈고 물가가 폭등하여 생필품을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는 별수없이 누더기만 걸치고 거치처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무더운 여름철이 되면서는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고, 심한 먼지 때문에 눈병까지 앓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땅에서 사는 가련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복음밖에는 희망적인 소식이 없다고 생각한 허드슨은 한차례의 전도여행이 끝나면 미처 쉴 사이도 없이 다음 차례의 전도여행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렇게 강행된 전도여행은 15개월동안 무려 10차례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중국어 신약성경 1천 8백권과 2천권이 넘는 전도 책자들을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중국인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만큼의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테일러는 여러곳을 여행하며 많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는데, 이는 그가 설교를 유창하게 잘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해박한 지식 때문도 아니라 잃은 영혼을 향한 그의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한달에 100만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는 그의 호소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많은 선교의 자원자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하여 선교회가 조직된 것입니다.
중국 내지 선교회는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경험과 성격이 반영되어 독특하게 조직되었습니다. 그것은 교파에 속하지 않았고 노동자 계급에 의존하였습니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 목회자들로서는 중국의 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국의 많은 노동자들 중에서 헌신된 남녀 일꾼들을 모집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선교 단체들과의 쓸데없는 경쟁을 피하고, 중국에서의 선교노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복음화 선교회에서 일해 본 결과 선교본부는 중국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선교사들의 모든 필요를 제때 채워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6살이 되자 허드슨은 영적으로 스승이나 다름없는 윌리암 번즈 목사와 동역하여 드디어 꿈에 그리던 내륙지방으로 진출하였습니다. 이때 노예 매매가 성행하는 광동성 산두지방에 위험을 무릎쓰고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그 지방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온종일 복음을 전하고 저녁 때 거처로 돌아올 때는 몸이 피곤에 지쳐 다리를 겨우 끌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댓시간 후면 다음날의 전도를 위해서 다시 침상에서 일어났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은 주로 상해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해의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내지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테일러는 자신이 신기한 존재로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보다는 그의 복장과 태도에 호기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즉 중국인의 옷을 입고 풍습을 따르는 중국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오래 전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런 것을, 전통적 방법을 떠난 파격적인 것으로서 올바른 선교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서양 문화의 옷을 입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푸른 눈에다 회색 머리를 한 요크셔 출신의 테일러에게 중국인이 된다는 것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허리에 걸쳐 있기엔 너무 헐렁한 바지", "갑갑한 비단 옷", "굽 없는 신발" 등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으나 중국인사이에 섞여 살려면 무엇보다 검은 머리털과 변발을 갖춰야만 했습니다.
첫 번째 머리털 염색은 큰 소동만 일으키고 실패하였습니다. 머리에 부은 암모니아가 살갗을 태워 하마터면 장님이 될 뻔하였습니다. 다행히 의사인 선교사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잘 치료해 주어 다시 염색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하였습니다. 이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계획을 밀고 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이발사에게 맡겼기 때문에 우습지 않게 잘 염색되었습니다. 그는 "난생 처음 머리털을 밀고나니 햇볕이 따가워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염색도 5-6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러한 고통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수고는 값진 결실을 나타내었습니다. 비록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잘못된 변발을 하였지만 테일러는 이제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서도 중국인들 사이에 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다른 중국인들과 섞여 있을 때 당신이 나를 만나게! 된다면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외국인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변모된 모습을 테일러는 무척 대견하게 생각했지만, 다른 선교사들은 대부분 불쾌감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들은 테일러를 처음에는 골칫덩어리로 여기다가 나중에는 웃음거리로 삼았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자 식구들까지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테일러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테일러란 존재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중국 옷을 입고 중국식대로 사는 것은 이제 그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국 내지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 생활하기에는 서양 옷보다 중국 옷이 훨씬 더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테일러와 동행하며 여행을 하던 윌리암 번즈는 테일러가 편리하고 편안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중국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중국 옷을 입었다고 해서 내지에서 사역하는 모든 어려움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골로 여행하면서 의료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그 지역 의사들과 직접 경쟁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전통적인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지방 의사들이 그를 쫓아낸 적도 있었습니다. 여행 자체도 매우 위험했습니다.
한번은 중국인 짐꾼이 테일러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돈과 물품을 다 가지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상해로 돌아가 개인적인 헌금이 영국으로부터 올 때까지 동료 선교사의 신세를 졌습니다. 그것은 어떤 후원자가 보낸 헌금액수? 자기가 잃어버린 액수와 똑같은 40파운드였습니다. 중국 선교 초기에 이런 개인적인 헌금이 없었더라면 아마 테일러는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선교본부와 불편한 관계를 가져오다가 1857년 테일러는 정식으로 중국 복음화 선교회를 탈퇴하였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는 아무 곳에도 정착하지 않고 중국 내지를 돌아다니며, 한 선교사의 말처럼 "열심히 그러나 목적없이" 선교를 하였습니다.
이 후 내륙선교의 Power Station이 된 영파지방에 옮겨온 허드슨은 파커박사를 동역자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외국인 학살 계획이 세워져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 영파에서 동역자 다이어양을 얻어 결혼하였습니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생긴 난민들을 돕고자 무료 급식소를 열었으며 교회를 맡아 시무하였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한 결과 현지인 동역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테일러가 예기치 않게 지방의 병원을 맡아야 했는데 그들은 3년 동안 닝포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테일러의 능력을 넘어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중국에서의 사역을 중단하고 떠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의학 공부를 더 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60년 테일러 부부는 장기 휴가를 받아 영국에 도착하였는데 이 휴가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허드슨과 마리아는 모두 결핵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이 기회에 휴식을 취하고 병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또 교육을 더 받을 기회도 되었습니다. 테일러는 런던 병원에 들어가 응용화학 과정과 산부인과 과정을 마치고 왕립 외과 대학의 회원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또한 번역 사역도 하였습니다.
그는 영국에 중국인 조수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와 다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닝포 신약전서의 개역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어려운 일을 하루에 13시간 이상씩 일하면서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휴가 기간중 그들이 가장 중요한 사역은 선교회를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내지선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테일러는 중국 여러 곳을 여행하며 일하면 일할수록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어 강한 의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수억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다 매시간 1000명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중국 전역을 복음화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 같이 보였으나, 테일러는 한가지 전략을 세웠습니다. "만약에 1000명의 복음 전파자를 확보한다면, 그리고 이들 각 사람이 매일 50명 내지 200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3년 이내에 모든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실적인 계획이 아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내지 선교회는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선교회가 설립된지 30년이 경과된 1895년에는 64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으로 일한 결과 결핵을 앓게되어 영국에 귀국하였고, 여기에서 '중국의 영적 수요와 요구'라는 논문으로 중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중국내륙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역사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허드슨이 34살의 나이로 중국에 2차 전도여행을 갈때는 지망선교사 16명이 동행하였습니다. 이들의 헌신으로 1년만에 항주에 세운 교회당에 모이는 신자들의 숫자가 무려 1천 5백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개척지 양주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서 맏딸, 막내아들 그리고 헌신적인 동역자를 차례로 잃었으며, 이 와중에 천진대학살 사건을 겪었습니다. 그는 성경 여백에다 다음을 같은 기도문을 적어 두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앞으로 1백 명의 선교사들을 추가로 더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저로하여금 주님의 큰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소서."
그가 기록한 이 기도문이 기독교 신문에 기사화됨으로 영국인들 안에 중국 선교에 대한 관심의 열풍이 일어났습니다. 가까스로 건강이 회복되자 45살의 나이로 다시 중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는 중국선교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자였습니다. 허드슨은 여러 선교지역에서 많은 경험을 하면서 놀라운 진리를 깊이 터득하게 되었는데 이는 선교사역을 추진시키는 원동력은 온갖 고난과 시련 속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헌신으로 북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호주, 뉴질랜드에 중국선교회 지부가 설립되고, 이렇게 하여 한 때 중국에 모여든 선교사는 1천명을 넘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선교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 지방에 이르자 성문 위에서 금빛으로 '내륙 은인'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여러 선교 본부를 방문한 후 그는 이전에 배타적인 지방이었던 호남의 지방도시 '장사'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호남성에서 73살의 나이로 열정적인 전도자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허드슨은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고 영혼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고, 전도의 목표를 위해 언어, 의학, 기도훈련을 철저히 감당하였으며,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감당한 헌신적인 전도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2007년은 ‘중국기독교 선교’ 200주년 되는 해입니다.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많은 중보기도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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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새 천년 새 중국선교
새 천년의 시대적 요청
새 천년에 들어선 우리는 무엇이든 새롭게 보고, 행하고 또 새로운 시각으로 새롭게 평가해보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탈태환골(脫胎換骨)’이니 ‘새 술을 새 부대에’, ‘새 패러다임’이라는 말들을 빈번히 사용하곤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 세계선교는 더 이상 허공을 향해 외치는 구호나 미래에 진행될 사역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교회에서 다양한 양태와 방법으로 참여하고 있는 중요한 사역이 되고 있다. 선교헌금의 책정과 선교위원회의 조직, 단기선교 활동, 선교사 파송 그리고 선교에 관한 설교, 특강 및 세미나 개최 등은 이제 교회의 중요한 프로그램과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세계선교 속에서 중국선교가 갖고 있는 중요성과 차지하는 비중은 더 말할 나위가
없기에, 한국 교회가 새 천년에 세계선교를 잘 감당해야 한다는 말은 곧 중국선교를 잘 감당해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새 천년의 시대적 요청이 무엇이든 새롭게 보고, 행하고 또 새로운 시각으로 새롭게 평가해야 하는 것이라면, 새 천년을 맞이한 중국선교 역시 똑같은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 특징과 경향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1913년 11월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등을 중국 산둥(山東)성에 파송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자, 중국선교는 대륙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는 화교(華僑)와 대만, 홍콩 등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역이 전이(轉移)되었다. 그후 1979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과 미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미국의 한인 교회와 재미동포를 중심으로 중국 대륙에서의 선교가 또 다시 태동되었다.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로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 교회는 본격적으로 중국선교를 전개하였다.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를 1992년의 시점에서부터 분석한다면 다음과 같은 특징과 경향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한국 교회는 중국선교에 쉽게 착수할 수 있다는 차원과, 북한선교를 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 속에서 동북(東北)지역의 조선족을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한국 교회가 조선족에 착안하여 중국선교를 시작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조선족 복음전도를 통해 주변에 있는 한족(漢族)에게까지 전도의 폭과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으며, 또 조선족이라는 유리한 신분을 통해 북한선교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조선족선교가 부정적으로 평가된 데는, 조선족선교가 한족선교로 연계성을 갖고 확산되는 데 절대적으로 미흡하였고 역부족이었다는 점이다. 또 한국 교회가 조선족들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 민족적 특성을 간과한 채, 조선족선교를 마치 한국 내 미자립 교회에 대한 사역의 연장으로 쉽게 생각하였다는 것도 지적되는 점이다.
둘째, 한국 교회는 선교사의 파송과 예배당 건축 등 선교인력의 투입과 물질지원형 선교에 주력을 하였다. 한국 교회는 중국에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는 일에 주력을 하였으며, 이런 노력과 열성으로 중국은 한국 교회에서 국가적으로는 최다 선교사 파송 지역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예배당 건축과 교회의 시설물 지원을 요구하는 물질지원형 선교가 중국선교의 실질적인 내용이 되었다. 한국 교회의 물질지원은 일부 수혜받은 중국 교회로 하여금 물질적 토대와 자원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어 교회가 비교적 용이하게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물질지원형 선교는 중국 교회에게 한국 교회의 나눔의 사랑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러나 물질사용의 맹목성과 무분별로 인한 폐해도 심각하게 발생하였으며, 특히 조선족 지역의 교회들에게 한국 교회에 대한 의존적인 심리가 조장되었고, 교회가 자력으로 자립해 나가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장애가 되었다.
셋째, 한국 교회는 중국선교 현장의 특수성, 제한성, 복잡성, 다양성, 광범위성에도 불구하고 개 교회, 개 교단, 개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선교사역을 실시하였다. 한국 교회는 개 교회, 개 교단, 개 선교단체에서 수많은 노력과 헌신 그리고 수고를 하였으며, 많은 인력과 다량의 선교자원의 투입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중국선교 현장은 사회주의적 정치이념과 제한적인 종교정책으로 인한 선교사역의 특수성과 제한성이 있고, 또 목회자 선교사를 현장에 보내 예배당을 건축하여 목양하는 소위‘전통적, 일반적 선교모델’이 적용되기에는 어려운 한계성과 복잡성도 있다. 그리고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중국 사회는 다양한 욕구와 필요가 분출되어 선교사역의 다양성이 요청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활한 땅과 수많은 소수민족들의 필요는 중국선교가 지니고 있는 광범위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런 중국선교 현장에 개 교회, 개 교단, 개 선교단체 중심의 독자적인 선교사역의 진행은 선교사역의 효율과 확대를 꾀하기에는 힘겹고 역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한국 교회는 중국선교 현장의 상황과 필요보다는 한국 교회의 필요와 입장에서 중국선교를 하였다. 과거 한국 교회가 중국에서 전개한 선교의 방식, 형태와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분히 중국 교회보다는 한국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중국선교를 시작한 동기와 사역의 목적이, 중국의 복음화나 중국선교를 통한 세계선교보다는 개 교회의 특정 필요와 목적을 위함이 적지 않다. 한편 파송된 선교사 가운데 중국선교 현장의 필요보다는, 선교사 자신과 한국 교회 자체의 여러 가지 목적 때문에 파송된 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물질지원에 있어서도, 선교헌금이 모아졌고 또 그 헌금을 선교현장에 반드시 보내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이유로 진행된 부분도 있다. 한국 교회가 예배당 건축에 주력한 것도 현지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물질지원형 선교의 가시화라는 이유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다섯째,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적지 않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최근에 점차 동북과 연해 중심의 대도시에서 내륙으로, 조선족에서 기타 소수민족과 한족으로, 물질지원보다는 현지인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교회는 동북과 연해의 대도시가 주는 제한성과 부담감을 뛰어넘어 내륙으로 진출하였으며, 그 결과 지금은 한국인 선교사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있다. 또 조선족선교의 일정 목표가 달성되었고, 조선족선교가 지니고 있는 한계성과 문제성을 극복하고, 또 타 소수민족선교의 필요성과 조선족선교가 반드시 한족선교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등으로 인해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중국의 서남과 서북의 소수민족을 향해 이동되었고, 한족지역으로 사역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 특히 현장에 있는 선교사들은 물질지원형 선교의 폐해성과 제한성을 깊이 인식하고 통감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현지인 지도자훈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선교의 양태를 현지인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게 되었다. 또한 물질도 예배당 건축보다는 지도자 양성의 제반 사역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새 천년 새 중국선교
한국 교회는 이제 새 천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중국선교를 해야하는 시대적, 역사적, 선교적 과제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새 천년의 중국선교를 과거와 어떻게 다르게 해야 하며, 어떤 새로운 특징들을 지녀가면서 전개해 나가야 하는가?
첫째,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현지 교회에게 자생력을 갖게 하면서, 자생력을 키워나가게 하는 선교가 되야 한다. 현지 교회가 자생력을 갖는다는 말은 재정경제와 행정치리, 그리고 전도교육 등 모든 방면에서 현지인들이 책임지며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초창기에는 선교현장에서 선교사가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또 이끌어야 하는 책무가 있겠지만, 개척사역을 할 때 반드시 현지인들과 선교사, 그리고 선교사를 파송한 후원교회 간에 의존적인 관계가 장기간 유지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유념해야 한다. 경제적인 지원도 점차 지원액을 줄이고, 현지인들이 경제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현지 교회의 행정과 치리업무도 현지인들을 고려하면서 그들을 세워주고, 점차 그들의 지도력이 강화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안배를 해야 한다. 또 선교사는 항상 현지인 양육과 현지인 지도자 훈련에 주력하여 현지인들이 최소한 선교사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키워나가야 한다.
한국 교회는 현지 교회에게 자생력을 갖게 하고 자생력을 키워나가는 선교정책과 이것을 위한 실제적인 방안을 모색하여 이와 같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선교사들을 파송해야 한다. 만약 한국 교회가 이렇게 현지 교회에게 자생력을 부여하는 선교로 나아간다면, 중국 교회가 실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도 온건하며 건강하게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있다.
둘째,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다양하면서도 다원적인 협력을 이루어 나가면서 선교해야 한다. 중국선교 현장이 지니고 있는 특수성, 제한성, 복잡성, 다양성, 광범위성을 충족하고 극복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안은 다양하면서도 다원적인 선교협력이다. 이제 개 교회, 개 교단, 개 선교단체가 독자적이고 단독적으로 선교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중국선교를 위해 다양한 은사, 자원, 경험, 방법, 형태들이 모아져야 하며, 또 개 교회와 개 교단, 개 선교단체 뿐만 아니라 지역과 민족, 국가를 초월하는 다양한 협력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다양하면서도 다원적인 협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중국선교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중국에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나간다는 거시적인 안목과 마음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한편으로는 선교의 중복투자, 자원낭비, 각개전투, 고군분투를 피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의 효율화와 극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중국의 A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복음전도와 선교가 활성화되기 위해, 먼저 다양한 배경의 선교사들이 협력체제와 사역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따라 개별 선교사가 지니고 있는 자원과 은사들이 공유되고 있다. 또 이들은 현지의 교회공동체와도 긴밀한 협력을 이루고 있어, 선교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현지 교회에게 일임하고, 또 현지 교회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상호 신뢰와 겸손으로 함께 해결해 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자원들이 그 지역에서 십분 사용될 수 있도록 다각적인 협력체제를 이루고 있다. 이들 선교사들은 개인과 교회, 교파, 지역, 인종, 민족을 넘고 극복하면서 현장이 복음화될 수 있도록 선교의 협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셋째,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기독교의 중국 사회 ‘현상화(現象化)’와 ‘형상화(形象化)’가 구축되는 방향으로 지향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이루어 나가는 중국선교가 중국에서 장기적으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한국 교회를 통해 전파된 기독교는 반드시 중국 사회에서 현상화와 형상화가 이루어져야 된다. 기독교의 현상화(現象化)란 기독교의 영향성이 사회 속에서 확대되어 하나의 현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즉 기독교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다양한 사역들이 음성(陰性) 또는 양성(陽性)으로 사회 속에서 나타나, 결국 기독교가 사회에 대해 긍정적인 업적과 공헌, 유익한 일을 했다는 것을 사회와 사람들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의‘형상화(形象化)’란 기독교의 가시성(可視性)이 사회에서 확대되어 기독교가 적은 무리들과 보이지 않은 무리들이 신봉하는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의 다양한 활동과 업적을 통해 기독교가 유익한 종교라는 것을 각인(刻印)시키는 것을 말한다. 중국의 기독교는 현상화와 형상화를 통해 중국 사회 속에서 그 위상이 높아질 수 있으며, 이 또한 기독교가 중국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남는 길이 된다.
중국 사회 속에서 기독교가 현상화와 형상화를 이루기 위해,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먼저 현장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항상 도덕성과 전문성을 겸비할 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에서도 모범이 될 수 있는 현지인 신도가 더 많이 생겨날 수 있도록 기도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이런 사람이 사회에서 증가될 때 기독교의 현상화와 형상화의 굳건한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또 선교현장의 교회공동체와 신도들이 반(反)사회적이거나 또 사회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봉사자로서의 모습을 지닐 수 있도록 선교사역이 지향되어야 한다. 지역사회의 소외된 자와 불우한 자, 장애인들을 한국 교회가 선교적인 차원에서 껴안아야 한다. 병원사역, 복지사역, 재활사업, 장애인 공공시설 투자사업 등에 대한 한국 교회의 참여가 요청된다. 이런 사역은 기독교의 현상화와 형상화가 이루어지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선교의 장기적 효과에도 유익을 준다. 예배당 건축에 대한 물질지원은 이제 사회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공공시설에 대한 투자와 지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만약 기독교 선교가 사회봉사자로서의 모습과 이미지를 지니게 된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성을 보여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기독교가 중국 사회의 개발자와 공헌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역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다양한 공익사업과 개발사업, 수익성이 없는 사업에도 기독교 선교가 뛰어들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요, 유익한 종교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
넷째,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중국 교회로 하여금 세계선교로 발돋움해 나갈 수 있도록 동반자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 교회가 중국선교라는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완수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중국 교회의 성장과 확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계 복음화에 있는 것이다. 새 천년에 중국 교회는 이미 앞서 세계선교를 감당한 한국 교회와 더불어 세계선교와 세계 복음화를 향해 나가야 한다.
중국 교회가 세계선교와 세계복음화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한족과 소수민족들이 반드시 손을 잡고 협력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한족과 소수민족이 포함된 모든 중국 교회가 세계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동반자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족과 소수민족의 교회가 자생력을 지닐 수 있도록, 또 그들 교회들이 타 지역으로 복음전도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도와야 한다. 그리고 타 지역에서 개척된 교회가 또 다시 자생력을 지니고, 또 다른 타 지역으로 복음전도를 확장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자생력의 유지와 복음전도의 확장’의 연속 순환구조를 지니는 교회 발전의 모델은 중국 교회로 하여금 세계선교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가 중국 교회로 하여금 세계선교로 발돋움하게 하고, 또 세계 복음화와 연결될 수 있도록 나아갈 때 한국 교회의 궁극적 중국선교 목표가 비로소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새 시대에 합당한 사명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잘 감당해 왔다. 1913년부터 시작된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이제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합당한 시대적, 역사적, 선교적 사명을 굳건히 붙들고 나가야 한다. 한국 교회의 중국선교가 중국의 현지 교회에게 자생력을 갖게 하면서 자생력을 키워나가게 하는 선교로, 또 다양하면서도 다원적인 협력을 이루어 나가는 선교로, 기독교가 중국 사회에 현상화와 형상화를 이루어 나가는 선교로, 중국 교회로 하여금 세계선교로 발돋움 해 나갈 수 있도록 동반자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선교로 전개되고 발전되어 나갈 때, 비로소 새 천년의 새로운 중국선교를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왕쓰웨 목사/ 편집위원
중국복음선교회 〈중국교회와선교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