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 백두산공정과 더불어 중국정부의 대소수민족 역사왜곡와 동화정책이 가속화 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중국에서 마지막 남은 오지지역인 티베트까지 칭짱철도가 개통되어 한족 관광객과 중국 문화가 소수민족 거주지에 물밀듯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중국정부의 치밀한 정책에 따른 중국 각지 소수민족(나시족, 티베트인, 위구르족, 동족, 조선족) 거주지의 무분별한 개발과 노골적인 한화(漢化) 현장을 5회 현지 르포로 살펴본다. |
'한 개의 산에 계절이 있고 십리를 가면 기후가 다르다(一山有四季, 十里不同天)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윈난성은 다양한 기후조건과 멋진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빼어난 자연환경 속에서 자체 성시에만 거주하는 15개 소수민족을 비롯하여 모두 26개의 민족이 윈난성에 어울려 살고 있다. 윈난성 서북부 나시(納西)·티베트족자치현에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해발 5600m의 옥룡설산(玉龍雪山)이 있다. 옥룡설산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은 산 구릉에 흑룡담(黑龍潭)이라는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었다. 맑고 시린 흑룡담이 다시 흘러나가 형성된 몇 군데의 마을들, 13세기 중엽부터 형성된 고도 '리장'(麗江)은 이처럼 자연이 내린 대지의 축복 위에 자리잡고 있다. 기품 있는 전통 기와집에 긴 세월이 담겨있는 돌길, 미로처럼 복잡한 수백 개의 골목. 리장 따옌전(大硏鎭) 고성에 들어서면 거미줄 같은 수로가 골목과 함께 사방으로 이어지고, 수로를 따라 식당과 카페가 촘촘히 들어서 있다. 고성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전통의상을 입은 소수민족들, 은제품을 비롯한 전통 공예품, 각종 볼거리들로 가득찬 가게들. 이 모든 것들은 작은 산골 마을이었던 리장을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자 휴양지로 변모시킨 원동력이다.
세계문화유산 지정후 불어닥친 개발열풍
나시족은 본래 간쑤(甘肅)성과 칭하이(靑海)성 일대에 살던 유목민족이었다. 지금도 '남녀 모두 양가죽을 걸치는'(男女皆披羊皮) 유목민족 특유의 복식문화가 남아 있는 나시족은 티베트인, 한족, 창(羌)족 등 강대한 주변 민족에 밀려 안전한 목축지를 찾아 윈난성과 쓰촨(四川)성으로 내려왔다.
기자가 첫 발을 딛었던 당시, 리장은 조금씩 개발의 열풍이 일고 있었다. 하나둘씩 늘어가는 식당, 카페, 상점들. 따옌전고성 골목골목에서 쉽게 부딪칠 수 있는 여행자들. 리장의 밤거리는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각종 카페와 가게에서 뿜어나오는 불빛처럼 흥청대는 분위기였다. 이런 리장 개발 덕분에 원주민이었던 나시족의 삶도 크게 변화했다. 일부는 관광산업에 뛰어들어, 일부는 장사를 목적으로 들어온 외지인에게 살던 집을 팔아 돈을 벌고 새집으로 이사했다. 직업고등학교를 나와 18세부터 관광가이드로 나선 양리어(여)씨. 그는 리장 관광 개발의 가장 큰 수혜자다. "1992년만 해도 한 달 수입이 50위안(약 6천원) 안팎이었는데 지금은 월 수만위안(수백만원)을 벌고 있다." 과거를 떠올리는 양씨는 잠시나마 아련한 회상이 잠겼다. 그는 "늘어나는 외지의 단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여행사를 차려 크게 성공한 뒤 4성급 호텔까지 운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모든 나시족 원주민들이 양씨처럼 성공의 길을 걸어 온 것은 아니다. 현재 리장의 상권을 잡고 있는 대부분은 외지에서 온 한족들. 현지 정부의 장례정책과 투자특혜를 받고 들어 온 한족들은 뛰어난 비즈니스 마인드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던 나시족을 쉽게 따돌렸다. 리장의 전통 기와집들을 놀고먹고 즐기기 좋은 식당, 카페, 술집, 상점 등으로 바꾼 이들은 바로 한족들이다. 1998년만 해도 적지않은 나시족들이 살던 따옌전고성은 더 이상 나시족 생활의 공간이 아니다. 2006년 현재 고성에서 신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긴 빈자리에는 한족 주인이 차지하여 그들이 고용한 소수민족 종업원과 함께 장사에 몰두하고 있다. 여전히 따옌전고성 내에서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나시족 토박이 리홍씨는 "개발이 시작될 당시 집값에 2배를 주겠다는 부동산개발회사와 외지인들의 유혹에 대부분의 주민들이 집을 팔았다"면서 "5년도 지나지 않아 집값과 임대료가 수십 배로 뛰었으니 결국 떼돈을 번 것은 한족을 비롯한 외지인들"이라고 혀끝을 찼다. 그는 "관광 개발에 나시족의 독자적인 풍속과 문화가 사라지는 것도 문제"라며 "예전에는 사람들의 심성이 순박했지만 지금은 너무 상업화되었다"고 말했다. 나시족 제사장까지 돈벌이에 이용돼
하지만 리장 개발의 여파로 함께 밀려들어온 한족과 그들의 문화는 현대물질문명과 더불어 나시족의 삶을 근원부터 뒤흔들고 있다. 1990년대 초 따옌전고성을 떠나 신도시로 이주한 민자린씨는 이를 "옛것을 고수하기보다 한족의 선진문화를 비교적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나시족이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중 비교적 선진적인 민족이라는 증거"라고 합리화한다. 민씨의 주장처럼 오늘날 나시족들은 외래문화에 충격에 대한 유연하게 응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무분별한 개발의 폐해는 리장 곳곳에서 목격된다. 불야성을 이루는 리장의 향락업소에는 나시족을 비롯한 젊은 소수민족 여성들이 한족이 대다수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매매춘 영업에 나서고 있다. 리장의 여러 마을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나시족, 티베트인, 바이족(白族) 등의 소수민족들이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모델료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나시족 전통종교의 제사장인 동파(東巴)까지 외지인 출신의 한족 사장에게 고용되어 동파문자를 그려 팔고 있다. 소수민족의 전통 가옥과 복식은 그저 리장의 유용한 관광자원으로 변했을 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것이 리장 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리장에서 4시간, 120㎞ 떨어진 나시족의 몇 안 되는 원시부락인 바이마이(白麥). 1950년대 말 지도제작에 나선 한 중국 관리에 의해 발견된 바이마이는 50여 가구가 사는 작은 오지 마을이다. 바이마이 주민들은 리장에서는 사라진 고대 나시족 언어를 그대로 유지하여 사용하고 있다. 집집마다 매일 식사 전 세 번씩 조상께 공양을 드리는 '훠탕'(火湯)이라 불리는 동파교의 종교의식도 행하고 있다. 이 오지 마을에서도 젊은이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돈벌이를 위해 주변 리장이나 대도시로 떠나기 때문이다. 동파교 제사장인 허리깡씨는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외지로, 도시로 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더 나은 삶은 위한 시대의 흐름"이라면서도 "허나 우리 아이들을 도시 문명과 한족 문화에 강탈당하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바이마르초등학교 교사인 허시우장씨는 "정부에서 표준어(普通話) 쓰기를 권장하고 TV에서는 표준어로 된 방송 프로만 보고 있다"며 "학습 교재도 모두 중국어로 되어 있어서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나시족 언어를 배우는 것을 점차 쓸모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리시 리장민속박물관 관장은 "관광지로서의 개발이 나시족의 전체적인 생활수준을 향상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서도 "심각한 한화(漢化)와 상업화로 인해 나시족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도 감출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개발이 가져다 준 부와 독초, 밀려드는 한족과 한족 문화로 인한 정체성 붕괴. 리장은 개발의 열풍에 몸살을 앓는 중국 소수민족의 모습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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