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내몽고지구  -   만    족(滿    族)

만족(즉 만주족)은 대대로 동북지역에 살았으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원인으로 지금은 거의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1990년 현재 만족 인구는 982만여명이다. 주요 분포지는 동북 3성으로 7,185,46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요녕성(遼寧省)이 4,952,859명으로 가장 많다. 그 나머지는 하북 내몽고 영하(寧夏) 감숙 복건 산동 신강 등의 성구(省區) 및 북경 천진 상해 성도 광주 항주 서안 등의 대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만족은 원래부터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주어는 알타이어계 만주퉁구스어족 만주어지(滿語支)에 속한다. 현재 대다수의 만족들은 중국어와 중국문자를 그들의 공식 언어 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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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에 의하면 만족의 조상은 2천여년전의 숙신(肅愼) 및 이후의 읍루(相婁) 물길(勿吉) 말갈(靺鞨)과 여진 등의 고대 민족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남북조·수당 시기에(4~7세기) 숙신·읍루인의 후손들은 그들의 민족 명칭을 물길 말갈이라 했다. 물길은 경제적 발전으로 인구도 신속히 증가하여 수십개의 부락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속말(粟末) 흑수(黑水) 백산(白山) 등 7개의 큰 부락연맹이 있었다. 그 후 사서에서는 물길을 다시 말갈이라 고쳐 불렀다.

7세기 말에 대조영(大祚榮)은 속말 말갈을 중심으로 송화강(松花江) 상류, 백두산 북쪽 기슭 일대에 지방정권인 "진국(震國)"을 세웠다. 713년 당왕조는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다시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에 제수하였다. 이로부터 "진국"은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발해국의 정치 군사 제도는 당왕조를 그대로 모방하였으며 한자를 사용하였다. 국왕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당왕조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당 고종(高宗) 때에 발해국은 당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거의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를 배알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이와 동시에 여러 차례 당의 수도 장안(長安) 태학(太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중원지역의 정치 경제제도와 우수한 과학기술 문화의 영향으로 발해국의 농업과 수공업은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제철과 견직은 대단히 유명하였다.

개원(開元) 13년(725년), 즉 발해의 건국을 전후하여 당왕조는 흑수(黑水, 즉 흑룡강) 말갈 지역에 흑수군(黑水軍)을 조직하고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하여, 흑수 말갈 각 부의 수령에게 도독(都督) 자사(刺史)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 집권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당왕조는 728년에 다시 그 도독에게 황족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하사하고 운휘장군(雲麾將軍) 겸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에 제수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장사(長史)를 설치하여 그들을 감독 보좌하게 하였다.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된 흑수부는 흑룡강 유역에 세워진 당왕조의 직속 지방기구가 되었다.

요(遼)가 발해국을 멸망시킨 후에 발해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 나날이 흥성하던 흑수 말갈부는 그곳을 보강하기 위하여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였다. 발해국을 뒤이어 번성을 누린 흑수 말갈을 거란인들이 "여진"이라 부르기 시작한 후로 이 명칭은 점점 말갈의 대명사가 되었다.

12세기 초엽에 유명한 아골타(阿骨打)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요를 물리치고 금(金)을 세웠다. 그들은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요와 북송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과 대치하였다.

13세기 초에 몽고가 금을 멸망시키고 원(元)을 세우자 여진인들은 원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원왕조는 흑룡강성 의란(依蘭)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과 흑룡강 중하류 및 우수리강(烏蘇里江) 유역에 분포하던 여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풍속을 따르며 다스리는 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5만호부(五萬戶府)를 설치하여 관할하다가 뒤에는 흑룡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를 설치하고 계속하여 두 개의 천호부(千戶府)와 한 개의 만호부(萬戶府)를 증설하였다. 당시에 이 여진인들은 대체로 원시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원대 말기에 이르러 원래의 여진 사회는 해체되고 노예제 사회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초에는 명왕조가 동북지구를 관할하면서 여진의 각 부도 모두 명왕조에 귀속되었다. 명왕조는 여진인의 분포 지역 내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하였다. 여진 각 부의 수령들을 각각 도독 도지휘사(都指揮使) 지휘첨사(指揮僉使) 천호(千戶) 백호(百戶) 진무(鎭撫) 등의 관직에 임명하고 칙서(勅書) 인신(印信) 의관 금전을 하사하였으며, 조공과 마시장의 시간과 대우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노아간위(奴兒干衛)의 여진 수령 홀자동노(忽刺冬奴)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흑룡강과 항곤하(恒滾河)가 합류하는 특림(特林) 지방에 중앙 왕조 직속의 지방행정과 군사기구인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였다. 이상의 조치들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과 한족 등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명대에 여진인들은 점점 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장소 이동의 과정 중에 그들은 건주(建州) 해서(海西) 동해(東海)의 3부로 나누어졌다. 건주여진은 무순(撫順) 동쪽으로 이주하여 혼하(渾河) 유역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동으로는 백두산 동쪽과 북쪽 기슭, 남으로는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해서여진은 이주한 후에 휘발하(輝發河) 유역에 분포되어 살면서 북으로 송화강 중하류 지역에 이르렀다. 동해여진(명나라에서는 그들을 野人女眞이라고도 불렀음)은 건주 해서 이동과 이북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송화강 중류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해안까지 다달았다.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정착한 후에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동해여진은 그러지 못하고 발전 속도가 완만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경제 문화적으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그들 부락 사이의 빈번한 전쟁으로 서로를 침탈하고 살육하는 참혹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였다. 건주여진 좌위(左衛)의 수령 노이합적(努爾哈赤)은 역사적 조류에 부응하여 군대를 일으켜 여진의 각 부를 점령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통일 과정 중에 노이합적은 군사 정치와 생산기능을 갖춘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은 청대(淸代)의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되었다.

1616년에 노이합적은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고 금나라(즉 後金)를 세웠다. 여진 각 부의 완전한 통일을 따라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바탕으로 일부의 동해여진과 다른 민족을 흡수한 사람들은 오랜 공동생활을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635년에 황태극(皇太極)은 여진이라는 옛 명칭을 버리고 만주(滿洲)라고 명명하였으며, 그 후에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만족(滿族)이라 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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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 황태극은 여진이라는 이름을 "만주"로 고쳤는데, 이것은 만족 민족공동체가 정식으로 형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듬해에 황태극을 황제라 칭하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만족 정권인 대청(大淸)을 세웠다. 1644년 청나라는 군대를 거느리고 중원으로 들어와 단시간내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 후 통치 계층은 명왕조 멸망의 교훈을 받아들여 일련의 행정 개혁 조치를 취하고, 이로써 계층간의 갈등과 민족간의 갈등을 완화하여 사회적 발전을 촉진시켰다.

예를 들면, 1667년 강희제(康熙帝)는 조서를 내려 권지(圈地)를 영원히 폐지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부역을 정돈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전보다 더 좋은 생산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는 다시 사회 경제적으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국의 인구 경지면적 농업과 수공업은 모두 현저하게 증가되거나 향상되어 자본주의의 기틀이 더욱 많이 잡혀갔다.

강희제의 집권 중반기에는 국내외적으로 적대 세력들의 활동이 창궐하였다. 만족 백성들은 조국의 이익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고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통일을 유지하고 변방을 강화하기 위한 전쟁에 가담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강희제는 전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삼번(三藩)"의 반란을 철저하게 진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만족 중심의 팔기군(八旗軍)을 친히 거느리고 출정하여, 제정러시아와 연합하여 내외몽고를 침공한 갈단( 爾丹)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로부터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에 이르는 70여년간에 걸친 투쟁으로 마침내 �갈(准 爾) 귀족집단의 분열 책동을 분쇄하였다.

일찍이 17세기 중엽에 제정러시아는 중국의 흑룡강 유역을 끊임없이 침입하였다. 1685년 강희제는 만족 도통(都統) 팽춘(彭春)을 파견하여 팔기군과 수군을 거느리고 반격하게 하였으며, 그 후 1689년 중 러 쌍방은 평등의 원칙 위에서 네르친스크(尼布楚, Nerchinsk)조약을 체결하고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18세기에 대영제국의 통치자는 그들의 영원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네팔의 통치자로 하여금 티베트지역의 봉건 영주와 연합하여 티베트 중부지방을 침공하게 하였다. 건륭제는 만족 대학사(大學士) 복강안(福康安)에게 군대를 거느리고가서 그들을 진압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에 복강안은 티베트지역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네팔군을 격파하고 티베트지역을 안정시켰다. 19세기 초에 영국 식민주의자는 과거의 실패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장격이(張格爾)를 시켜 여러 차례 중국 서북의 신강지역을 침공하게 하였다. 도광제(道光帝)는 만족 대학사 장령(張齡)으로 하여금 신강 경내의 만족 한족 군대와 동북 팔기군을 거느리고 달려가 그것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에 장령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장격이을 생포함으로써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중국 영토에 대한 야욕을 분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반란 세력 토벌을 통하여 중국의 통일을 강화하고 광대한 영토를 공고히 하였다. 이것은 비록 각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이룩한 결과이지만 18세기 후반에 만족이 발휘한 역량은 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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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반식민 반봉건사회로 전락하였다. 청왕조의 통치자들은 부패하고 무능하여 자본주의 열강들은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처럼 제멋대로 날뛰었으며, 이러한 참상을 목도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에 국가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자유 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만족과 다른 소수민족 백성들은 함께 힘들고 어려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예를 들면, 제1차아편정중 중에 좌령융복(佐領隆福)은 만주 팔기군을 거느리고 절강 사포(乍浦) 관음산(觀音山) 기슭의 천존묘(天尊廟)를 사수하면서 영국 침략군의 공격을 다섯 차례나 격퇴하고 많은 적군을 살상하였으며, 276명의 만족 방위군도 대부분 전사하였다. 강소(江蘇) 진강(鎭江)을 방어하던 팔기군 1500여명은 10배나 많은 침략군과 성능이 우수한 총 포를 맞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혈전을 불사하여 한치의 땅도 내주지 않았다.

제2차아편전쟁 중에 제정러시아 식민주의자는 청왕조의 통치력이 북방에까지 미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100㎢에 달하는 동북 변경 지역을 강제 점령하였다. 이러한 침략 행위는 중국인들의 분개를 불러일으켜 당시 그 지역에 살고있던 만족과 한족 백성들은 몽둥이를 들고 일어나 제정러시아의 칠략과 식민통치에 대하여 장기간 용감하게 투쟁하였다.

1894년 중일갑오전쟁이 발발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였다. 일본 침략군이 중국의 요동(遼東) 지역을 점령하여 그 세력을 신속히 확장시켜나가자 그 지역에 살고있던 만족· 한족·조선족 등의 백성들은 함께 들고일어나 민간자위단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요양(遼陽) 방어전쟁 중에 만족 한족 백성들의 합동작전으로 한 달 동안 일본군의 침공을 네 번이나 물리치고 일본 침략군의 봉천성(奉天城) 진입 계획을 무산시켰다.

1900년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 일어나 그 세력이 하북 산동과 동북 3성에서 신속히 확산되어 갔다. 각지에 흩어져 살고있던 만족과 한족 백성들은 모두 이 혁명의 대열에 몸을 던졌다. 그 중 북경 의화단의 기세가 가장 드높았는데, 그들은 유명한 서십고(西什庫)교회 전투에서 막강한 역량을 과시하였다. 만족 병사 은경(恩慶)은 총으로 시비를 걸어온 독일 공사 클링더(克林德)를 사살하였다. 비록 의화단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자와 청왕조 봉건 통치계층의 연합으로 진압되었지만, 광대한 만족 한족 백성들이 보여준 반침략에 대한 결심과 영웅적인 기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찬양되고 있다.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중국 역사상 대단히 �기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무수한 만족 백성들의 호응과 지지를 받았으며, 그들 중에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있다. 만족에게 있어서 신해혁명은 하나의 거대한 사변이었다. 그것은 청왕조의 종말을 선고함과 동시에 한족과 만족 백성들을 짓누르고 있던 봉건군주전제제도와 부패한 팔기제도를 제거하여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만족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9 18사변"을 조작한 후에 대대적으로 중국을 침입하였으며, 이로써 광대한 동북지역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그 곳에 살고있던 200여만명의 만족 백성들과 각 민족 백성들은 모두 일본군들에게 무참히 짓밟혀 식민통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국가와 민족이 생사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만족 귀족 집단의 대표자 부의(溥儀, 청대 마지막 황제)는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 일본제국주의가 세운 "만주국(滿洲國)"의 꼭두각시 황제에 올랐다.

이 꼭두각시 정권이 성립되자 백성들은 그것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만족 백성들은 의용군 항일회 혁명유격대 등의 각종 항일조직에 가담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935년에 동북항일연합군이 설립되자 그들은 길심철로(吉沈鐵路) 연선 연변지구 송화강 중하류와 목단강(牧丹江)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그 지역의 만족 백성들도 한결같이 들고일어나 항일을 위한 혁명 대열에 가담하였다. 왕광녕(王光寧) 포거괴(鮑巨魁) 진한장(陳翰章) 관화신(關化新) 이준산(伊俊山) 등은 모두 항일연합군의 유명한 만족 지휘관들로서 항일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7·7사변"은 항일전쟁의 전면적인 발발을 의미한다. 중국공산당은 단호한 항전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팔로군(八路軍)을 거느리고 항일 근거지를 개척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수많은 만족 백성들은 팔로군과 신사군(新四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팔로군 소속의 만족 지휘관과 병사들은 적의 후방까지 깊숙히 침투하여 항일 근거지를 세우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만족 출신의 뛰어난 지휘관 관향응(關向應)은 하룡(賀龍)과 함께 진서북(晋西北)을 수복한 후에 진수(晋綏) 항일 근거지를 개척하였으며, 1938년에는 하룡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기중(冀中)으로 진격하여 기중평원(冀中平原) 항일 근거지를 공고히 하였다.

각 민족 백성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앞으로 돌진하여 항일전쟁의 승리를 쟁취하였으며, 그 후 중국공산당은 동북 해방구 백성들을 영도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인민대중의 생산력과 혁명성을 적극적으로 고취시켰다. 해방구의 만족 백성들은 항일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전선을 지원하였으며, 일본군 점령 지역의 만족 백성들도 항일전쟁의 승리가 있기까지 여러 가지 형식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만족은 다른 소수민족과 함께 사회주의 시대로 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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