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의 집/ http://blog.daum.net/jesus-amen/5198594

가정집에서 모인 초대교회(early church in the house, 가정 교회(house church))



※ ①"<가정집 모임은 어떻게(원제: How To Meet In Homes)>(대장간) - 진 에드워드(Gene Edwards) 지음 -"와 ②"<교회가 없다(원제: Pagan Christianity)>(대장간) - 프랭크 바이올라(Frank Viola) 지음 -"와 ③"<완전한 가죽 부대(원제: The Complete Wineskin)>(미션월드 라이브러리) - 헤럴드 R. 에벌(Harold R. Eberle) 지음 -"와 "③"<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다(원제: The House Church in the Writings of Paul)>(기독교연합신문사) - 빈센트 브래닉 -" ...에도 초대 교회의 모습 그리고, 현대 교회에 침투한 인간적 전통의 유래가 잘 나와있어서 읽어볼만한것 같습니다.

  ○ 고객평가글 (출처: http://www.lifebook.co.kr)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 brethren님 |2006-7-8| ★★★★★ |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정말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과 같은 것일까? 과연 우리가 속한 교회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와 똑같은 것일까? 현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무도 해보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봄직한 질문이 아니겠는가?

  이 책의 저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처음 교회, 즉 1세기 교회의 특징을 관계성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가족,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묘사의 중심 생각은 바로 관계이다. 하지만 우리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관계 중심이라기 보다는 조직이나 기관의 개념에 가깝다. 그래서 저자는 조직이나 기관 개념이 중심이 된 교회를 가리켜 제도권 교회라 부른다.

  저자는 오늘날 이처럼 보편적인 제도권 교회는 신약성경의 계시와는 다른 교회의 구조라는 점을 밝힌다. 저자에 의하면 제도권 교회는 어떤 면에서 고대의 유대종교 조직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교회를 성직자와 평신도 그룹으로 이분화하는 체계이다. 하지만 에클레시아인 신약교회는 분명 하나님의 설계도(Divine pattern)에 따라 세워질 때만이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영광이 나타남을 강조한다.

  에클레시아의 영광이란 사도적 전통에서 출발한다. 사도적 전통이란 사도들이 만들어낸 규칙이 아니라, 신약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따른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머리와 몸이 생명 관계로 이어진 생명체 구조이다. 따라서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의 생명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현, 만인제사장 직분의 실제적인 실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 사이의 가족 관계를 누림, 서번트(종됨의) 리더십의 실현 등이 나타날 때, 교회는 본래 하나님의 목적대로 영광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저자는 교회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려면 교회에 관한 성경의 언어들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제도권 교회에 의해 잃어버린 본래의 의미를 다시 배우고, 과거에 잘못 배워왔기 때문에 깊이 묻혀 있는 교회 진리를 파내기 위한 발굴과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교회에 대한 성경적 패러다임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단순히 제도권 교회에 대한 부정이나 이탈이 아닌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과연 현대 교회는 잃어버린 1세기 교회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의 단순함 속에서 생동하는 신성한 생명력으로 충만한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신약제사장들의 공동체. 그리고 그 가운데 준비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부. 우리는 이 장엄한 퍼레이드의 일원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책은 우리를 1세기 관계적 교회의 회복에로 돌이키도록 자극하며, 신약의 원리에 충실한 하나님 집의 출현을 앙망하도록 해준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성경의 증거를 통해 교회들이 지녀야 할 참된 성경적 가치를 보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의 참 모습 발견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영적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될 것이 분명하다. 제도권 교회의 벽을 넘어 그보다는 더욱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의 원형을 발견코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말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매우 흔한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중요한 관계가 있다.

최근에 당신이 신입 사원을 채용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어느 교회 다니는가를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가정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는가? "글쎄"라고 머리를 갸우뚱 거리며 의문을 품기 시작할 것이다. "이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은데", 또는 "이단이나 이상한 사이비에 속한 사람 같애", 혹은 "이상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보통(regular) 교회에 나가지 않겠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 다분히 반항적인데. 좀 엉뚱한 사람 같아. 생각이 똑바르면 번듯한 건물에서 모이는 보통(normal) 교회에 다니지 않겠어!"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정 교회'(house church)라는 개념을 처음 접할 때 이런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 신입 사원이 다닌다는 그 교회가 신약 성경이 언급하는 초대교회의 모습니다.

사실, 교회는 그 탄생으로부터 초기 삼, 사 백년 동안 성도들의 개인 가정집에서 모였다. 신약학자인 로버트 뱅크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한 도시 내에 몇 몇 그리스도인이 모인 작은 소그룹이나 또는 전체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좀 더 큰 모임의 경우이던 간에, '에클레시아'(ekklesia)가 모였던 곳은 성도의 '다락방' 이었다. 주후3세기까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해 특별히 지어진 건축물의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증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모인 장소는 말 그대로 성도의 가정집이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그러한 경우를(집에서 모이지 않는 경우) 평범하지 않은 일로 받아들였다. 다음 성경구절들을 살펴 보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 16:3, 5)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골 4:15)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몬 1:2)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 1:10)

위의 성경 본문들은 초대교회 집회가 섬기기를 좋아하고 관대하였던 개인 성도들의 집에서 모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자료들이다(이외에도 행 2:2, 9:11, 10:32, 12:12, 16:15, 34, 40, 17:5, 18:7, 21:8 등을 보라).

1세기 성도들은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건물을 가진 '교회'라는 개념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더욱이나 자신들의 집이 바실리카(역자 주: basilicas - 중세 고딕 양식의 정형화된 교회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로마 시대에서부터 생기기 시작한 장방형 형태의 집회 장소)로 전환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느 집에도 요사이 교회에서 보는 통나무로 만든 좌석이나 거실 가구와 같은 강대상은 없었다. 이러한 기괴한 모습은 20세기에 와서야 볼 수 있었지 초대 교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광경이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하면서도 평범하게 사람 사는 집에서 함께 모였다. 그들은 교회 건물(church-houses)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집에서 모인 교회'(church in the house)에 대해서는 익숙했다.

조그만 개인 집이 수용하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 모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했을까? 그렇다고 새 건물을 세웠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이는 횟수를 늘였고 '가정 순환 예배 원칙'(행 2:46, 20:20)에 근거하여 돌아가면서 다른 집들에서 모였다.

최근의 학자들은 초대 교회가 본질적으로 개인 가정집을 기초로 한 모임의 네트워크였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초대 교회의 보통 모습은 가정집에서 모이는 형태를 취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밝히는 교회 형태란 바로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가 없었다면 집회를 목적으로 한 특별한 건물들을 세웠을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할 목적으로 집에서 모였다고 주장한다.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가설을 근거로 하고 있다. 역사적 증거가 없다는 말이다. 빌 그림스(Bill Grimes)는 구체적으로 이에 반박한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 가정집 교회들이 박해의 결과였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교회사에 관한 책들을 보면 주후 250년 이전의 박해들은 로마 제국의 공식 칙령에 근거한 것들이 아니고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지역이나 폭도들에 의해 일어난 지엽적이고 산발적인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기의 '박해'이론은 성경의 증거와도 배치된다. 사도행전 2장 46∼47절은 집에서 모인 집회들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음'을 묘사한다. 박해가 일어났을 때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각 집에 들어갔다고 말한다(행 8:3). 성도들은 박해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인 장소를 비밀에 부치지 않았다.

만약 신약성경을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간에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그들이 왜 가정집에서 모임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영적인 원리들과 잘 부합한다. 따라서 이 원리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 원리들을 지금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가정집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증거 한다

'교회'에 대한 현대인의 생각은 종종 교회 건물과 관련되어 있다(사람들은 교회 건물을 보통 '성전' 혹은 '하나님의 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거하는 신자들을 가리켜 '교회'라 부른다. 벽돌이나 시멘트로 만들어진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이 바로 '하나님의 전'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이 거룩한 집회 장소였던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믿는 공동체가 곧 성전이다. 이런 의미에서 초대 그리스도인 집회가 열렸던 장소는 1세기의 종교적 관습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유대주의(Judaism)나 이교주의(paganism) 둘 다 신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거룩히 구별된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공동체적 예배를 위해 특정한 장소를 선별하여 세웠고(이것이 곧 회당이다), 이방인들도 신당(shrines)을 만들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이 거룩케 하시는 대상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백성임을 믿었다.

흥미로운 것은 초대 교회가 1세기 상황에서 거의 모든 집회를 가정집에서 가진 유일한 종교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선친들이 가졌던 유대적 전통을 따르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건물들을 세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도 초대 교회 신자들은 거룩히 구별된 건물들이 필연적으로 불러올 혼란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을 구성하는 살아있는 돌들이 바로 그들 자신이라는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건물들을 세우는 일을 멀리 했다.

(2) 가정집은 서로 교제하기 위한 최상의 조건을 제공한다

교회 집회에 관한 사도적 교훈들은 가정집과 같은 소그룹 환경에 가장 적합하게 보인다. 상호 참여(히 10:24∼25)와 같은 기독교적 원리, 영적 은사를 행사하는 일(고전 14:26), 형제들의 모임을 서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공동체로 만드는 일(엡 2:21∼22), 공동체 식사(고전 11장), 회중 간에 공개적인 투명성과 상호 복종의 분위기(롬 15:14; 갈 6:1∼2, 약 5:16, 19∼20), 격의 없는 쌍방향 대화의 분위기(고전 14:29∼40), 자유를 추구하는 성령의 코이노니아(나눔의 삶, 고후 3:17, 13:14), 이 모든 것들은 가정과 같은 소그룹 환경에서 최선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요약하면, 신약성경에 쉰여덟 번씩이나 언급되는 '서로 함께 하라"(one-anothering)는 권고들은 가정과 같은 환경에만 적합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가정집에서 모이는 교회 집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이 목적이란 머리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몸이 '함께 지어져 감'을 말한다(엡 2:19∼22).

(3) 가정집은 그리스도의 단순성을 나타내 준다

가정집은 겸손과 자연스러움, 그리고 순수하고 단순함을 나타내줌으로 초대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행 2:46; 고후 11:3). 가정집은 오늘날 높이 솟은 첨탑과 우아한 실내장식으로 대변되는 종교적 건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검소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대부분의 현대 '교회' 건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겸손함보다는 이 세상의 헛된 자랑거리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종교적 건물에 너무 과도하게 지출함으로 형제들이 재정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그 지출을 줄임으로 사도적 일꾼들('교회 개척자들')을 돕는 데 더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고,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더 많이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4) 가정집은 교회의 가족적 성격을 반영해 준다

가정집에서 모이는 집회와 바울의 글에 나타나 있는 가정과 같은 교회 사이에는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정집(home)은 가족(family)이 모이는 자연스러운 환경이기 때문에 교회(ekklesia)에 가족적인 분위기를 제공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가족적인 분위기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와는 정 반대로 교회 건물은 환경적인 친밀감을 저버린채 비인격적인 분위기만 자아낸다. 그래서 전통적인 '교회' 건물은 거북스럽고, 그 건물이 지닌 경직된 형식주의는 가정집에서 느낄 수 있는 신선함과 자유스러움과는 사뭇 다르다.

또한 큰 건물에서는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바실리카풍의 교회의 거대하고 한적한 분위기는 사람들이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고도 드나들 수 있게 만든다. 더 나쁜 것은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신의 죄를 숨기기 쉽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정집과 같은 분위기에서는 그럴 수 없다. 우리의 모든 결점들은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 모임에서 모든 사람들은 다른 형제로부터 인정받고, 수용되고, 격려 받을 수 있다.

더욱이나 바실리카풍 교회에서 나타나는 형식적인 태도는 초대 그리스도인 집회를 특징 지워주는 상호 교류나 자발성을 심각하게 퇴색시키는 경향이 있다. 전형적 교회 건물의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면 교회는 수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것 같아 보인다.

이 건물의 내부 장식은 인격적인 대화나 상호 사역, 또는 영적 교제와 같은 것들을 위해 꾸며지지 않았다. 대신에 경직된 일방적 의사소통 구조, 강단과 회중석, 지도자와 회중에 맞추어 설계되었다.

전형적인 '교회' 건물은 강의실이나 극장과 아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회중석은 교인들이(혹은 찬양대원들이) 설교자(혹은 사제)가 말하는 것을 의자에 앉아서 잘 듣고 볼 수 있도록 정교하게 고안되어 있다. 사람들은 전면의 설교자나 그의 설교단상을 주시한다(제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에서는 식탁과 제단이 강단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둘 모두의 경우에서 그 건물들이 교역자 중심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더군다나 목사와 예배 순서자들이 앉아 있는 강단은 보통 회중이 앉아 있는 곳보다 더 높게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구조는 비성경적인 교역자/평신도 이분주의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구조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을 가장 심각하게 괴롭히는 성도들의 관중성향(spectator-mentality)을 더욱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페다이브리지(W.J. Pethybridge)는 이 점에 대해 정확하게 관찰하고 있다.

가정집에서 모이는 친밀한 연합의 소그룹 모임에서 모든 참여자들은 서로에 대해서 잘 알 수 있고 상호 간의 관계는 좀 더 실제적이다. 형식적인 모습을 탈피하게 된다. 인원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모든 사람들이 그 모임에 좀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주님의 몸은 효과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집회를 위해 특별한 건물을 건축하는 거의 모든 경우는 특별한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면서 '일인 사역' 경향으로 흐르게 되고, 만인 제사장의 진리를 실현하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초대 교회의 잃어버린 비밀』(The lost secret of the early church)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지닌 생명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가정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예배와 친교와 사역의 가족적 차원의 의미를 고양하기 위해 가정집에서 모였다.

가정집에서의 집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의 이익이 결국 자신들의 이익이 됨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과 교회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밀하게 해준다. 그와는 반대로 대부분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능동적 참여자라기보다는, 경기장에 입장하는 관람객 정도로 비하시킨다.

요약하면, 가정집 교회 집회는 교회(ekklesia)를 특징 지워주는 관계성과 상호연결성을 증진시킨다. 가정집에서 모이는 집회의 정신은 성도들에게 어깨와 어깨, 얼굴과 얼굴, 그리고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갖게 되는 가족과 같은 진정한 교제를 가능케 해준다.

그래서 가정 집회(home meeting)는 개방적 의사소통이나, 영적 응집력, 또는 솔직한 교제의 분위기를 고양시킨다. 이러한 점들은 성령의 코이노니아(나눔의 친교)를 풍성케 하는 필수불가결의 조건들이다.

이 모든 점에서 볼 때 가정 교회 집회(home church meeting)는 근본적으로 성경적이다. 또한 영적으로 매우 실제적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한 두 시간동안 서로의 뒤통수만을 바라다보면서 교제를 가지도록 강요하는 강단-회중식의 현대 예배는 이 기준으로 볼 때 매우 기괴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오늘 날 집회에서 우리는 '다락방'의 원리로 다시 되돌아가야만 한다. 예배당의 바닥은 마치 사람들이 오고 가는 사업장과 같다. 하지만 다락방에서는 가정과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고, 이곳에서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집회가 곧 가족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곳이 되었다. 마지막 성만찬은 다락방에서 이루어졌고, 오순절, 그리고 [드로아에서의]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집회를 구별하시기 위해 '다락방'의 친밀함을 요구하셨지, 위압적인 건물의 경직된 형식성을 원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자녀들의 집회에서 개인 가정 집의 가족적 분위기를 요구하시는 이유이다.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모임을 가지도록 서로 격려하여야 한다. 형제들의 가정집이 교회 모임의 필요를 상당부분 채워 줄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

(5) 가정집은 영적 확실성(authenticity)의 예를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영적인 확실성을 추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극장, 화려한 고딕 양식의 건물이나 거대한 원형 돔에서 모이는 교회들이 피상적이고 천박하게 보인다.

그와는 반대로 가정집에서 모이는 교회는 영적인 실재의 풍성한 열매들이 증거들로 나타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정 교회는 휘황찬란한 건물들과 수십 억 원에 달하는 교회예산규모를 성공으로 여기는 종교적 단체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면서 신선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불신자들이 교회에 갈 때 고급 극장 쇼를 보러 갈 때처럼 멋진 옷을 차려입어야 한다면 바실리카풍의 교회의 집회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집에서 편안한 마음과 분위기에서 모임을 갖는다고 했을 때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그 집에서 자신의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기만 한다면 말이다.

차가운 병동 건물과는 사뭇 다른 가정집의 편안한 분위기는 매우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이것은 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 당시의 종교적 모임들이 그러했듯, 신당이나 성소, 그리고 회당에서 모임을 가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공교롭게도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지 못할 경우 세상에 대한 복음전도가 방해받고 성장이 정체되어버릴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워드 슈나이더(Howard Snyd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건물이 아무리 유용하다 해도 이것이 수적 성장이나 영적 깊이를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니다. 초대 교회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이루었다. 그리고 최근까지 교회 역사에 있어 가장 강력한 역동성과 성장을 보여준 시기는 바로 초기 2세기였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교회 건물의 도움 없이도(오히려 방해가 되는 지도 모르겠다) 가장 빠른 성장을 보여 주었다.
『가죽 부대의 문제』(The Problem of Wineskins, 작자의 동의로 인용함)

교회의 사회적 위치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 집회의 사회적 위치는 교회 그 자체의 성격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그것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의 공간적 배경은 신학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교회당'이나 '예배당'안에 있는 강단이나 회중석(또는 긴 의자들)은 상호 교류와 관계성을 이루는 일을 저해시킨다.

그러나 가정집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분위기는 그와는 정반대의 영향들을 미친다. 비교적 비공식적이고 쾌활한 식사 분위기, 푹신한 소파와 안락한 대화의 자리, 이 모든 특징들이 상호 사역에 좋은 영향을 주는 관계적 배경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는 합당한 영적 이유들이 있었기 때문에 각 성도의 가정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현대의 거대한 교회 건물들은 이런 합당한 이유들을 퇴색시킨다. 하워드 슈나이더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가정 교회(House churches)들은 교회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조직중에 가장 흔한 형태였을 것이다. 우리들이 사는 곳을 간단히 둘러보기만 하여도 오늘날, 수십 만 개의 가정 교회들이 북미, 남미, 유럽, 중국, 호주, 동유럽, 그리고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음을 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가정 교회들은 지하 교회이고 교회 역사의 숨겨진 지류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숨겨져 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문화적으로 우세한 조직 형태가 아니라 할지라도, 가정 교회들은 범세계 그리스도인들 중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신약 성경은 교회란 모든 사람이 은사를 받아 사역하는 공동체임을 가르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백성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본받아 다시 구현하는 새로운 공동체적 실재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을 부르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는 이러한 부르심을 외면한다. 가정 교회들은 이런 모순된 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서로가 얼굴로 대하는 공동체는 상호 존경과 상호 책임감, 상호 복종과 상호 사역을 풍성케 한다. 가정 교회의 공동체성은 비록 고린도 교회와 같은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지만, 평등과 상호 이해의 정신을 고양시킨다. 가정 교회 모델에서 보게되는 상호 평등 사역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교육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본연의 형태에서 자연히 유래되어진 결과이다. 가정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마다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부여 받는다. 가정 교회는 서로 돌보고 격려하는 분위기속에서 다양한 은사들과 사역들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만든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만인 제사장이나 성령의 은사, 상호 사역의 원리들은 이런 비공식적 문맥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발견된것들이다. 가정 교회는 모든 지체들이 은사를 받았고 모든 이들이 사역자임을 가르치기 때문에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가정 교회는 몇몇 신자들은 특별히 더 귀중하며, 몇 사람만이 사역자이고, 성령의 은사들이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없다고 말하는 가장 극악한 이단들로부터 보호하는 소망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제공하였다.

두 가지 종류의 집회

초대 교회의 일상적 집회 장소가 가정집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교회가 가정집 이외의 다른 장소에서는 집회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전체 교회들'이 다 함께 모일 필요가 있는 특수한 경우에 예루살렘 교회는 성전 앞뜰이나 솔로몬의 행각과 같은 넓은 장소에서 집회를 가졌다(행 2:46상, 5:12).

그러나 이렇게 대규모로 모인 집회가 정기적인 가정 집회의 전형을 보여준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집회를 위해 건물을 세웠던 예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성전 뜰과 솔로몬 행각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공적인 외부 집회 장소였다. 이렇게 넓은 장소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전체 교회'가 모이기 위해서 필요할 경우에만 사용되었다.

교회의 생성 초기에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많은 수의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위해서 특별한 사역 집회를 열 때에만 이런 공개적이고 넓은 장소들을 사용하였다(행 3:11∼26, 5:20∼21, 25, 42).

사도들이 회당에 찾아간 경우를 교회 집회와 혼동하지 말라. 이러한 예들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복음전도(evangelistic) 집회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 집회의 주요한 목적은 성도의 양육(edification)에 있다. 복음전도 집회는 불신자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때때로 건물에서 모이도록 우리들을 인도하신다. 하지만 성령은 주님의 목적에 부합할 때만 그렇게 하실 것이다. 교회를 한 방향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열정이나 정력이나 종교적 담화로 그 방향을 정당화하는 어떤 시도에도 좌우되지 않으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최근에 유행하는 영적 흐름이라는 현상에 무조건 따라가려는 무분별한 시도에 우리는 담대히 맞서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아무 목적 없이 '열방들을 따랐던' 고대 이스라엘의 잘못된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즉, 가정집에서 가졌던 집회로부터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진리적 요소는 없는가? 가정 교회 집회가 지닌 많은 장점을 살려서 하나의 규범적 집회 형태로 만들 수는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가정집에서 모이는 교회들을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폄하하면서 그들에게 이유 없이 반감을 가지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 현대의 거대한 교회 건물들이 과거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합당하지 않다.

성경적 예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문은 "왜 어떤 사람들은 가정집에서 모이지?"가 아니라, 오히려 "왜 많은 사람들이 가정집에서 모이지 않지?"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제도권 교회의 벽을 허문다) 1세기 관계적 교회(원제: RETHINKING THE WINESKIN(포도주 부대를 재고하라))> (미션월드)
- 프랭크 비올라(Frank Viola) 지음 박영은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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