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삶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었습니다."

중국에서의 삶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었다

제가 북한에서 바라보는 중국은 그야말로 천국이었습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빨강 파란 노랑색들로 형형색색을 이루는 거리와 건물들의 반짝이는 불빛의 조화는 아름다운 천국의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저희 쪽에는 1년 12달이 가도록 전기 불을 볼 수 있는 날짜와 시간이 얼마 안 되지만 강 건너편 저쪽에선 매일 밤 반짝이는 불빛이 마냥 살아 숨쉬는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았습니다.
저희는 그때 몇 해째 전기 공급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하였습니다.
간혹 가다 하루에 몇 시간 공급이 될 때도 있었고, 저녁이면 집에 불이 없어 컴컴한데서 손더듬이로 일해야 하였습니다.
멀쑥한 시래기 죽물도 저녁이 늦어 어두워지면 내입에 들어가는지 남의 입에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도 저녁 시간만큼은 불을 보려고 석유등이나 디젤유로 등을 만들고, 아니면 소나무 옹이를 잘게 쪼개어 거기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히었습니다.
때로는 다 꿰져서 너덜너덜한 신발짝을 주어다 고무를 뜯어 짤게 쪼개어 거기에 불을 붙여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1시간만 불을 켜놓으면 콧구멍은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됩니다.
그것도 다행이었죠.
이러다보니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은 한마디로 어둠을 모르는 낙원으로 보였습니다.
저도 거기에 가면 꼭 천국의 행복에 도취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북에서 그처럼 부럽고 황홀하게 바라본 중국은 저에게서 절대로 천국이 아니었고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불빛 속에 감춰진 인간들의 추악함은 그야말로 저를 경악케 하였습니다.
1998년6월4일 검푸른 두만강을 북한 경비대 군인들의 추격을 받으며 건너 중국 땅을 밟은 저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그것은 그저 잠시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두만강 연선 중국 내 주민들(조선족 교포)중 일부, 돈에 눈이 어두워 인간의 양심을 팔아먹은 자들이 강변을 지키고 있다가 강을 건너오는 북한의 여성들을 강제로 붙잡아다 팔았습니다.
연변 내 조선족한테 팔 때에는 기혼여성은 2000~3000, 미혼여성은 4000~5000위안(중국인민페)씩 팔고, 내륙지방의 한족들한테 팔 때에는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얼마를 받느냐는 한마디로 말하여 자기들의 능력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뱃속에 아이를 갖고 (5~6개월)탈북하였는 데, 당시 한 몇 달만 돈을 벌면 고향에 가서 아이도 낳고 그럭저럭 먹고 살기도 괜찮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탈북 하였습니다.
그런데 강을 건너자마자 인신매매하는 인간쓰레기 같은 조선족 교포들한테 같이 탈북 한 친구와 같이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뿐이 아니고 저의 친구도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저희를 강제로 끌어다 빈집에 가두어두고 자기들이 교대해가면서 우리를 지켰습니다. 저희는 울며불며 사정하였습니다.
저희를 놓아 달라고...

나쁜 짓 안하고 돈만 벌어 고향에 도로 가야 한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지만 그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우리가 자꾸 시끄럽게 굴면 중국공안에 고발해 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를 밖에 불러내다 차에 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라는 대로 하였더니 어느 골목골목을 돌고 돌아 개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산부인과 병원에 데려 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저희더러 아이를 지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울며불며 사정하고 하라는 대로 다하겠으니 아이는 못 지운다고 하자 "죽겠냐 아니면 살겠냐. 시키는 대로 하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자기 한목숨이 아까워 아직 이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한 불쌍한 어린 생명을 죽여야만 하였고 태어나지도 못한 자식한테 평생을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애를 지우고와서 한 며칠 지나 출혈량이 작아지니 (그것도 주인 여자한테 시켜 저희 보고 물어보았음)저희보고 하는 소리가 "너희 오늘부터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게 되였다.
가서 살아보고 좋으면 살고 마음에 안 들면 연락해라. 그러면 더 좋은 남자를 소개 시켜 줄게. 그리고 시집갔었다 하지 말고 아직 처녀라 해라.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순결을 잃어서 피가 나온다 해라" 이렇게 뇌까리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팔려간 집의 남자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장애인이고 거기에 성장장애와 성격도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또한 15년 차이가 되였습니다.
제가 그 집에 들어가 너무 서러워 밥도 못 먹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자 저를 때리면서 썩어지지 않고 살겠으면 조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를 팔아먹은 그자들이 와서 저보고 재미가 좋으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다른데 안 간다고 하니 네가 싫으면 그만두라"하고는 씽하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밤에 자는데 갑자기 중국 공안이 집에 쳐들어왔습니다.
꼼짝도 못하고 붙잡혀 가보니 공안이 아니고 저를 그 집에 팔아먹은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보고 이죽거리면서 하는 말이 한족로반(술집 사장)이 네사진보고 너하고 살겠다고 하니 그쪽에 가면 부잣집이고 사장 마누라가 되어 잘살겠으니 팔자를 고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차타고 길림으로 가서 역에 내려 기회를 봐 탈출하는데 성공 하였지만 어디에도 저를 오라는 곳은 없었습니다.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다 마침 한식당에 들어가서 머물게 되였습니다.
말이 안 통하여 손짓 몸짓 다해 가며 겨우 찾은 거처 지였습니다.
이후 같은 민족이 사는 고장이 그리워 연변으로 나왔는데 거기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교포들의 대접에 아연 질색 하였습니다.
중국 땅에서 흘린 저의 눈물이 한평생 제가 흘려야할 눈물 중에 80%가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론 좋은 사람도 만나 도움도 받았지만 우리 탈북자들을 업신여기고 개, 돼지보다 못하게 취급한 그들을 생각하면 너무 너무 치가 떨립니다.
제가 북한에서 그토록 동경하고 부러워했던 중국은 저에게 하나의 지옥이었습니다.
수령을 잘못 만난 민족의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 하였는데 백성이 주권이 없고 무너져가는 사회의 배경 속에서 이국땅의 방황은 저를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그냥 하루하루 먹고 자고 하는 것으로 목숨이나 지키는데 급급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지금도 중국 땅에서 수많은 우리 탈북자들이 쓰러져가는 생명의 빛을 잡고 서럽게, 서럽게 울고 있습니다. 수많은 탈북여성들이 중국 사람들에게 팔려가 아이를 낳고 살지만 며느리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다만 씨받이일 뿐입니다.
거기에 태여 난 자식들 또한 엄마처럼 국적도 취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국적도 아니요 중국국적도 아니요 국제고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들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고 있습니다.
불쌍한 우리 형제들을 안전하고 인권이 보장된 사회에서 살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으련만. 정부에서도 중국 정부의 눈치만 보지 말고 탈북자 문제에서 강경하게 맞서 주었으면 좋으련만…,
정치계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못하겠지...
하지만 무식한 저로서는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오직 파도 사나운 망망대해에서 외롭게 이리 저리 떠밀리고 찢기고 사는 우리 형제들을 빨리 구원하여주었으면...
정부에서는 왜 그렇게 안하는지 야속하게만 생각됩니다.
2005년 10월 25일 아침이슬 출처:탈북자사이트 http://www.nkd.or.kr/
 

끊임없이 팔리고 팔려다니며.....

김 춘 애
탈북여성(2003년 6월 입국)
화룡시 변방구류소, 무산군 노동단련대, 청진 집결소 경험자


1. 비극의 시작

저는 평양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1997년에 탈출하여, 한국에는 2003년 6월 15일에 들어왔습니다. 중국에서의 인신매매는 제 자식들도 당했고, 제가 직접 본 것도 많았습니다. 북한에서는 1995년부터 배급이 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도 1995년 6월부터 배급이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인민반장이었기 때문에 반원들을 관리해야 하는 주어진 임무가 있어서 장사도 하기 힘들었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맏딸은 1년 동안 청년근위대에 나갔습니다. 근위대 생활은 실제 군대생활하고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자꾸 딸에게 도둑질을 시켰습니다. “벽돌 채워라,” “모래 채워라.” 그래서 딸은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매를 맞기도 했고, 결국 집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3일째가 되니까 1개 분대가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밤새 설득하다 못해 마지막에는 때리기도 하면서, 군대를 등지는 건 조국을 배반한 것과 같으니 강압적으로 끌고 새벽에 다시 군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열흘만에 다시 도망쳐 나왔습니다. 또 도둑질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또 문제가 제기되니까 부소장이 우리 애만 24시간 보초근무를 세우고, 못살게 한 것이었습니다. 청년근위대 안간 것, 배치 받고 자기 배치지역으로 안간 것, 학교 안간 것 등 나쁜 것들만 막 적어내니까, 저는 딸을 숨길 수도 없고 너무 속상해서 무산으로 보냈습니다.

1997년 8월 15일에 기차에 태워 딸을 보냈는데, 한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뭔가 잘못됐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연락체계가 다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막내아들을 집에 두고 16살 된 둘째 딸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담당 주재원을 찾아가 통행증을 부탁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국경에는 도강생(월경자)들이 많기 때문에 안 되며, 옛날에는 안면(뇌물)도 통하고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살던 곳의 지도원을 찾아가 당증까지 맡겼습니다. 당증은 곧 정치적 생명이니까 믿어주었고, 9·9절에 받는 고급담배 두 갑을 주고, 통행증이 분실되었다는 확인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둘째 딸은 “당증 맡기고 갔다가 사고가 났다간 큰일 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는 중국에 가서 딸을 구해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기 그런 생각조차 못했던 것입니다. 잘못되면 정치적 생명이 끊길 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다시 돌아가 당증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확인증을 반납하고 당증을 돌려받았습니다. 결국 안되겠다 싶어서 대동강을 지나 강동까지는 통근열차를 타고, 어머니와 막내동생이 사는 청천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큰 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펄쩍 뛰시며 무산에는 도강생이 많은데 굶어죽지 않았다면 중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중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에 어머니가 소금을 뿌려주셨습니다.

막내동생의 신랑이 안전부에 있었기에, 성천군 집결소에 가서 통행증 분실 확인서를 받아 성천 역전에 가서 청진까지 기차표를 받았습니다. 검열이 계속되었고, 결국 걸렸습니다. 남편이 압록강체육단에 있다고 속여 아들이 있으면 내가 체육단에 넣어주겠다고 봐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험한 대우는 받지 않았습니다. 통행증이 없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부령에서 내려놓으려고 하기에 줄을 지어 내리던 중간에 살짝 빠져나와 다시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는 다시 달려 부령선을 지났지만 국경선 근처에 이르자 다시 검열이 시작되었고, 결국 또 걸리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돈은 100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를 찾으러 가니 제발 봐달라고 애걸하면서 그 돈을 모두 주었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무산까지 가면 다시 걸릴 것 같아 철산에서 내려 남동생이 있는 무산까지 15~20리 정도를 둘째 딸과 함께 걸었습니다.

<무산에 도착하니 남동생도 얼굴이 새까매져 있었습니다. 맏딸이 시누이와 함께 사발을 팔러 중국으로 건너간 것 같은데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무산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10월 10일까지 기다려보다가, 중국으로 건너갈까 아들을 남겨두고 온 평양으로 돌아갈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평양에 있고 친척들이 있는데, 중국에 간 딸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을 당할까 더 걱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갈림길에서 망설이다가 중국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10월 10일이 당창건기념일이라 군대도 휴일이겠거니 생각하고 건너려고 했지만, 눈이 내리는 통에 다음날인 11일 저녁 6시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너려는데 눈이 녹아 불어난 물살에 둘째 딸을 놓쳤습니다. 한 두 시간 찾지 못하고 헤맨 것 같습니다. 이리 저리 헤매다 결국 저도 떠내려갔는데, 운 좋게도 딸은 돌 하나에 걸려 살아 있었습니다. 은인과 같은 돌이었습니다. 둘째 딸을 겨우 찾아 인공호흡을 시켜 정신을 차리게 하고 강 건너 둑으로 올라갔습니다. 근데 올라가 보니 변방대 차가 있었습니다. 도로로 나서려면 5m 정도의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00m 정도 옮겨가는데 차소리가 들리면 다시 숨고 숨기를 반복했습니다. 차 불빛에 보니 변방대 같았습니다. 그래서 차가 지나간 다음에도 도로로 나서지 못하고 맨발로 논밭을 뛰어갔습니다. 뛰어간 곳에는 한 농가가 있었고 중년의 조선족부부와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옷이 다 얼어 있으니 조선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이불도 씌어주고 옷도 주었습니다. 그렇게 30분쯤 몸을 녹이고 있으니까 하얀 이밥(쌀밥)까지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둘째 딸은 평양에서 굶고 있을 동생이 생각난다며 울었습니다. 저도 이밥은 1996년 이후 보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2. 계속되는 인신매매

그 부부로부터 중국에서는 조선여자들을 가리켜 나이도 상관없이 모두 ‘돼지’라고 부르며, ‘한 마리, 두 마리’ 하며 다 팔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얼마간 일하는 것이 안전하겠다고 생각하여 일자리를 부탁했습니다. 그 부부로부터 소개 받아 화룡시에서 보모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한지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채소를 사러 장마당에 갔다가 돌아오니 둘째 딸까지 없어졌습니다. 딸이 어디 갔는지 물어보아도 그들은 모른다고만 대답했습니다. 저는 딸 찾으러 정신병자처럼 한 달 동안 헤메다 11월 5일, 22살 된 한 조선여자를 만났는데, 팔려와 있었던 그녀는 갈 곳 없는 제 처지가 딱해 보여 자기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3일 정도 그 집에 머무르며 저보다 10살 아래의 한 남자를 알게 되었는데, 두 딸을 다 찾아주겠다는 말에 동하여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식모살이하던 집의 약도를 그려주었습니다. 그가 그곳을 찾아가보니 처음에는 모른다고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때 용정시 깡패였던 남편이 그곳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데리고 가니까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보모로 있던 그 집에서 둘째 딸을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주인집에서 직접 못 팔고 자기 친구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계속 알아보니, 딸은 흑룡강성 마룡현으로 4,000원에 팔려간 상태였습니다. 그곳에 찾아가니까 팔아먹은 당사자가 잠적하여 찾지 못했습니다. 두 달 동안 못 찾고 헤맸지만, 인신매매범도 수중에 돈이 다 떨어져 화룡현에 와있다는 것을 알고 붙잡았습니다. 16세인 딸은 팔려간 곳에서 매일 울었고, 불쌍해보여서 매일 이웃집들에서 재워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동네에는 약 100세대가 있었는데 거의 각 집마다 조선여자가 팔려와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경찰을 꼬아내기 시작했고, 시아버지로부터 4,000원을 내와서 양력 설날 즈음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파출소에서는 계속 저희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마침 파출소장이 남편과 동창이라서 돈을 좀 먹였습니다. 그런데, 옆집에 살았던 혜영이라는 조선여자에 대해서는 파출소에서 계속 잡으려고 했습니다. 가난했던 그 집에서는 그 여자를 인신매매꾼들에게 다시 팔았습니다. 그녀는 그 집에 팔려 와서 열 세달 동안 며느리 구실을 했는데, 길림에 있는 한족에게 또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화룡의 인신매매꾼에게 넘겨졌고, 화룡에 왔다가 또 다시 어디론가 팔려 갔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길림에 있는 동안, 인신매매꾼들에게 화룡현에서 살던 옆집에 조선에서 온 모녀가 함께 있다는 말을 해버린 것이었습니다.

인신매매꾼들로서는 저희 집 하나를 치면 두명이 나오는 돈벌이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달 가량 저희들을 감시하고 순찰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게 1999년 5월 즈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희들은 낮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는 소외양간에서 숨어서 잤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순찰을 돌아도 찾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 또한 인신매매꾼들이 저희들을 잡아가려고 밤마다 순찰을 돌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너무 아프고 해서 딱 하루만 집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잠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영화하겠다 싶어 정신이 빠져 문도 걸지 않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남편은 취해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9시 20분 정도 되니 세명의 인신매매꾼들이 갑자기 나타나 하남 파출소에서 왔다고 하면서 후다닥 방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황급히 남편을 깨우려고 하니까 못 깨우게 제지했습니다. 급한 김에 손길이 닿은 남편의 허벅지를 꼬집어 비틀었습니다. 어슴푸레 잠이 깬 남편이 놀라 눈을 뜨자, 인신매매꾼들은 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머리를 발로 눌러 밟았습니다. 그들은 파출소에서 나온 것처럼 남편을 속이기 위해 호구를 보자고 했고, 남편이 바로 앞집인 시댁에 있으니 가져오겠다고 둘러대니까 나가지는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딸과 저의 팔을 비틀면서 무조건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지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가서라도 이 사람들이 진짜 파출소에서 왔는지 재차 확인하려고 하니까 제 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딸이 “엄마 환자인데 왜 때리냐”고 악을 쓰니까 그들은 “그래 너희 엄마 심장병 있어서 환자인거 다 안다”고 윽박을 질렀습니다. 벌써 저희들을 감시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단은 순순히 따라나서는 척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가면 다시 못올 집이니, 반드시 가지고 갈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증과 시민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건 가지고 가서 뭐하나”하는 것이었습니다. 파출소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보니까 파출소 차도 아닌 택시가 서 있었습니다. 딸에게 도망가라는 눈짓을 보냈습니다. 택시 쪽으로 끌려가던 딸이 오줌이 마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싸라”고 말했고, 딸은 정말 앉아서 오줌을 싸는 척 하다가 후다닥 밭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농촌이고 밤이라서 온통 새까맣기 때문에 금방 눈앞에서 달아났습니다. 인신매매꾼들이 당황한 틈을 타 저도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가면서 저희가 비명을 지르니까 그 사람들은 황급히 택시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던 찰나 저는 건너 시댁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그렇게 시부모님들이 밖으로 나오니 그 때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위험에서 일단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2달도 채 안되어 1999년 7월에 그들이 또 들이닥쳤습니다. 그날은 비가 축축하게 내려 외양간에 머물지 못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자야했습니다. 밤 11시쯤 되었는데, 그 때는 바깥에서 남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날도 술에 취해 깊은 잠에 들어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일로 개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개가 짖는 통에 무서워서 딸을 데리고 뒷문으로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이미 포위된 상황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칼을 배에 들이대며 저의 입을 틀어막아 옷도 챙겨 입지 못하게 하고 파출소 차인 것처럼 검게 칠한 차에 실어 끌고 갔습니다. 소리도 못 지르고 뛰지도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화룡시 소가자 마을이었습니다. 찬찬히 보니 그 놈들은 한패가 아니라 두패였습니다. 운전수는 차를 대는 한 패였고, 뒤의 두 명은 납치를 맡는 다른 패였습니다. 운전수는 보초를 섰고, 둘은 저희를 데리고 꼬불꼬불한 길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좁은 곳에 가둬두고 며칠 동안 감시당하며 지냈습니다. 제가 몸이 안 좋으니까 일부러 말이 통하지 않는 한족병원으로 데려갔고, 혹시나 말이 통할까 계속 감시 했습니다. 그들은 한족말로 계속 전화를 하는데 분위기상 저쪽에서 저희 딸을 달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딸이 팔려가는 것이 어쩔 수 없다면 제발 저도 같은 마을로 팔려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나마 감동하였는지 딸을 그 한족들한테는 못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저희들은 화룡현 탄광이 있는 곳에 만원씩에 팔려가기로 결정되었고, 길림에 있는 사람들이 사러 온다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딸은 그 때 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갇혀있던 그 집 주인이 몰래 다가와 조용히 하는 말이 “가다가 도망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함께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일을 잘해서 한달에 500원씩 번다며, 같이 일하면 얼마든지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좋다. 전화번호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너무 덥고 해서 앞 개울에 목욕을 하러 나갔는데, 화장실이든 어디든 말도 없이 나갔다고 막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 중 한 명과 언성을 높이며 싸웠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옆집에 사는 한족사람이 조선말을 알아듣고 헌정대에 신고를 했습니다. 눈치를 챈 집주인도 나가고 저와 싸운 놈도 달아난 뒤, 혹시나 했는지 한 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집주인도 안 나타나고 우리도 도망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밖에서 누가 전화기 검열을 하러 왔다고 하면서 들어왔습니다. 제가 노골적으로 신분증을 보자고 했고 북한에서 왔다는 것도 말했습니다. 알고 보니 옆집에서 신고가 들어가자마자 파출소에서 집주인 패거리를 계속 감시했던 것이었습니다. 달아난 줄 알았던 집주인은 이미 잡혀서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저는 헌정대에서 나온 듯한 사람에게 삼촌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헌정대는 집주인을 마구 때렸고 우리는 변방대로 넘겨졌습니다.


3.화룡시 변방구류소에서의 40일

거기서 12살짜리 여자아이를 만났습니다. 가정이 뭔지 시집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던 남자 전화번호를 옷춤에 감추고서는 “다시 중국에 오게 되면 그 아저씨를 찾을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 그래서 그 아저씨가 뭐가 좋니” 물어보니, 밥을 해서 무릎에 앉혀놓고 먹였다는 것입니다. 12살짜리면 한참 부모 손 밑에서 어리광 부리고 응석부리고 공부할 아이인데 그 아이가 뭘 알았겠습니까. 그 아저씨가 매일 무릎에 앉혀 밥 먹이고 하다가 시장에 옷 사 입히러 나왔다가 잡혔다고 했습니다.

변방대에 있으면서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가만 들어보면 질나쁜 조선족들은 북한 여자를 파는데, 거저 팔지도 않았습니다. 대개 저희가 실컷 데리고 놀다가 파는데, 고분고분 응하지 않으면 족쇄를 채워 강간하지 않으면 스패너를 자궁에다 꽂기도 한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무산에서 온 한 여자는 북한에 남편과 애가 두명 있는데 그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팔려가면서 남편에게 500원을 주고 나왔습니다. 남편은 자기 각시를 팔면서 임신만 되지 말고 돌아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정을 유지하려니까 각시마저 팔 수밖에 없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그녀는 석달 동안 한족이랑 결혼해서 살다가 임신이 되었습니다. 한족말도 모르니까 병원을 찾아가 유산시켜달라고 할 수도 없어서 자기 발로 파출소에 뛰어 들었다고 합니다. 한족 시누이가 파출소로 찾아와 이제라도 동생이랑 살겠다면 돈을 들여서라도 꺼내주겠다고 하는 걸 거절했다고 합니다. 북한에 두고 온 새끼들이 있어서 제 발로 잡혀간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딸을 팔아먹은 것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옛날에 심청이가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쌀 삼백섬에 팔려갔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고, 지금의 북한이 그렇습니다. 저는 변방대에 40일 동안 있으면서 그걸 알았습니다. 딸이 엄마를 위해서 팔려가질 않나, 마누라가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팔려가질 않나, 식구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 몸 하나를 희사하질 않나. 그곳에 1999년 7월 2일에 들어가서 40일만인 8월 10일 북송되어 무산보위부로 끌려갔습니다.


4. 치욕스러웠던 무산보위부


무산보위부로 끌려갈 당시까지도 우리는 납치꾼들이 비싼 값에 우리를 팔아먹으려고 입힌 찐바바지(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미국 청바지 입고 왔다며 보위부 회관에서 당장 벗기는 것이었습니다. 여름인데 딸이 팬티만 입고 또 뭐 입었겠습니까? 그래서 한 여자가 입고 있던 춘추내의를 얻어 입히고 저는 하늘하늘 비치는 잠옷바지를 입었습니다.

무산회관에서 집주소를 조사하고 보위부로 보내졌습니다. 가니까 여자들이 열명 있었는데 모두 발가벗겼습니다. 머리에 낀 핀침까지 다 벗겼습니다. 가슴이 큰 여자들은 그 밑까지 들춰 검사합니다. 옛날에 누가 가슴 밑에 돈을 감추고 반창고까지 붙이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발가락 짬(사이)이며, 머리카락 속까지 다 검열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팔을 머리 뒤로 넘겨 손가락을 끼게 하여 60번 앉았다 일어났다, 뽐쁘훈련이란 걸 시킵니다. 자궁이나 항문에 돈을 숨겨뒀으면 힘주면 나온다고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60번 일어났다 앉았다를 시키는데, 관절이 안좋아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것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겨우 60번을 채우고 나니까 모두 엎드리라고 했습니다. 돈이 나왔나 안나왔나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여자들 생리대 갈피갈피까지 다 검사합니다.

2달 짜리 갓난아기를 한족씨라며 책으로 그 갓난아기 머리통을 막 때립니다. 애는 소리치며 막 웁니다. 애가 뭘 압니까. 태어난 것도 죄입니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임신한 여자들을 발로 막 찹니다. 저는 그 때 심장이 안 좋아서 약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도 다 제 놈들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다 검열해서 옷, 전화번호, 돈까지 모조리 뜯어 검사하고 무산군 안전부로 보냅니다. 군안전부에서 또 검사합니다. 거기서 그 날로 단련대로 보내집니다. 군안전부에서 단련대까지 그 먼 거리를 뛰어가도록 시킵니다.


5. 노동단련대의 비정함

단련대에 가니 저녁도 안주고 굶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딸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담당주재원이 우리 딸을 데리고 들어갔는데 한시간만에 맞아서 새파래져서 돌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보기에 분명 우리가 평양사람인데 딸을 붙잡아 평양사람인가 속였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때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가 무슨 죄가 있냐”고 막 따졌습니다. 초소장이랑 두루두루 말해보니까 기막히게도 동생 신랑과 친구지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전해져 동생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면회를 안시켜줘서 울타리 높은 데서 동생은 밖에서, 나는 안에서 소곤소곤 말했습니다.

먹는 거라곤 썩어서 시꺼먼 밀가루로 죽을 쑨 것이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심해서 한입도 못먹겠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더 먹겠다고 식사시간이면 우리 주변으로 모였습니다. 본 지방 사람인 무산아이들이 콩이랑 강냉이를 가져오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바꿔 먹기 위해 옷도 다 벗어주고 팬티만 입고 다니면서도 창피한 줄도 몰랐습니다.

어떤 여자는 강간을 너무 심하게 당해 자궁이 다 썩어서 뒤집어져 있었습니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 다리를 벌리고 걸었는데, 밤에는 썩은 자리가 저려서 잠도 못자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런 여자도 20리를 뛰게 했습니다. 8월이니까 뛰어다니면서 배추 영양단지도 키우게 하고, 무산에 있는 높은 산에 올라가 나무도 해오게 합니다. 저는 다리가 팅팅 부어서 뛰지 못하니까 빨리 뛰라고 뒤에서 돌로 막 깝니다. 그런다고 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딸도 엄마 보위하겠다고 같이 맞으면서 뒤따라 달렸습니다.


6. 또 다시 두만강을 넘어

그렇게 3일이 지나 8월 14일이 되었습니다. 딸이 감기를 앓아서 막 열이 나고 설사가 나서 보초 서는 아이를 보고 약을 가져다 달라고 했습니다. 작업을 하러 나가는데 뜬금없이 저에게 대열에서 떨어지라고 하기에 일단 떨어져 나오면서도 왜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경리가 나를 불러 외출시키면서 돼지고기 2kg에 맛내게 고춧가루를 사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동생이 통하는 사람과 짜고 그런 줄도 모르고 딸을 거기다 두고 나왔습니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 5시까지 들어오라고 하면서 그래도 경리가 뒤따라 다녔습니다. 그래서 먼저 동생네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언니, 빨리 (중국으로) 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너무 아파서 변도 못보고 손이 다 마르고 다리는 한없이 부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속이 타면 변이 새까맣게 타서 간신히 똘롱똘롱 떨어집니다. 일 보는게 애 낳는 것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몸이 안 좋으니까 창피라는게 없었습니다. 그걸 보고 우리 동생은 일단 저라도 먼저 살아나가야 한다고 더 다그치며 빨리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산군 바닥에서 뛰어봤자 어디로 뛰겠습니까. 5시까지 들어오라고 했는데, 5시면 벌써 기차도 안 다니고 금방 잡힐텐데. 그래서 저는 그날로 두만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첫째 딸부터 찾으러 다시 중국으로 나갔습니다. 평양시는 사람이 하나 없어지면 금방 수사포치(수배)를 했습니다. 인민반장이었던 사람이 없어졌고, 그리고 제가 무산으로 간다고 방향을 알렸으니까 무산 보위지도원들이 두 세 번씩 무산까지 잡으러 왔지만 동생들은 언니 여기 온 적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때마침 1997년 9월에 무산쪽에 열차사고가 많이 나서 사람들이 꽤 죽었는데, 그래서 저는 거기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중국으로 가기 위해 무산에서 칠성다리를 건너 산을 넘었는데, 오르막길은 그래도 걷겠는데 관절에 부종이 와서 내리막길을 못 걸을 지경이었습니다. 오로지 살아야 하니까 질질 끌고라도 가야하고, 5시까지 무산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새끼도 뭐고 모르겠고, 동생이 딸은 알아서 봐주겠다고 했으니 무조건 뛰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중국으로 뛰려는데 장마철이라 물길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삐쩍 말라 힘도 없었기 때문에 강물에 떠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한 조선족 할머니가 논판에 씨앗을 뿌리러 나왔다가 정신을 잃고 떠내려 온 저를 업어다가 화룡시 룡현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깨어나 보니 하혈을 해서 온통 피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제 조카들도 거기를 건너 다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동생도 그 집을 건너다니며 저를 찾겠다고 수태 헤매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운명이라는 것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3일 동안 있으면서 한국으로 먼저 간 남동생이 남겨둔 삐삐 번호로 연락을 해보았지만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 그집 강냉이밭에 숨어서 꼬박 잠을 잤습니다. 그러던 중 화룡현 남편과 3일만에 연락이 닿았고, 남편은 택시를 타고 달려와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딸을 살려야겠기에 옷가지 입던 거랑 두루두루 팔아 남편에게 500원을 주어 보냈습니다. 저를 살려준 할머니를 통해 북한으로 연락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 있던 동생 조카가 국경지역으로 잠깐 나와서 딸은 탈출한 엄마 대신에 무지하게 매를 많이 맞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돈을 갖고 돌아갔습니다. 딸은 걸상으로 머리를 맞는 등 나를 잡겠다고 많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딸이 워낙 이악하고 일도 잘하고 하니까 2달 반만인 11월 달에 풀려났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하지만 딸을 풀어놓고 나를 잡겠다고 계속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18살이 된 딸은 스스로 500원에 팔려가기로 마음 먹고 그 돈으로 “우리 엄마한테 면회를 가 달라”고 하면서 조카를 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후 딸이 제가 있던 할머니 집에 들러 엄마도 여기 있다가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딸이 할머니한테 말해서 팔려가기로 약속하고 그 돈 500원을 조카한테 줬습니다. 조카도 사촌누나가 그렇게 팔려가니까 마음 아파서 둘이서 붙잡고 막 울었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도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고 했습니다. 저는 딸이 건너왔다는 소리를 듣고 전화만 내내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딸은 제가 마음 아파할까봐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딸은 훈천에 가서 또 잡히고 말았습니다. 잡혀서 파출소에 가니까 파출소사람들이 또 5,000원에 딸을 팔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5,000원은 비싸다고 한족들이 안 샀다고 합니다. 하지만 3일 있으면 딸은 다시 송환될 판이었습니다. 젊은 파출소 공안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자 딸은 막 울었지만, 그런데도 혹시나 엄마가 잡힐까봐 제가 어디에 있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도움이었을까요. 그날 저녁 9시쯤 족쇄(수갑)에 묶여 있던 딸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쇠꼬챙이를 주워 구류소에서 익히 들어본 적이 있는 방법을 떠올려 운좋게 족쇄를 열고 3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다친 줄도 모르고 택시를 잡아타고 500원을 뻐쳐서(외상으로) 택시를 타고 화룡의 그 할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둘째딸이 살아 돌아오자 이제 아들이 걱정되었습니다. 아들은 화룡으로 나오다가 잠복에 걸려 다시 북송되고 변방대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도망쳤다가 잡혔으니까 큰 문제였습니다. 아들 역시 화룡변방대에서 무산군으로 넘겨졌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월경자들을 심하게 대하지는 말라는) 김정일 방침이 떨어져 있었는지 심하게 처벌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편, 우리는 2000년에 다시 북한으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송환되는 사람들이 “뺏기지 않으려면 돈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모아둔 돈을 먹었습니다. 토하면 또 삼켰습니다. 딸은 먹은 돈이 나오지 않도록 아예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보위원들이 “이 년들이 중국에서 얼마나 잘 먹었길래 여기서 안먹느냐”며 막 때렸습니다. 그곳에서는 저희처럼 돈 먹는걸 알기 때문에, 변을 볼 때는 여자들도 화장실이 아닌 바깥에서 누게 하고 일일이 검사했습니다. 딸이 오랫동안 변을 안보니까 이것들이 세 번에 먹을 변비약을 한번에 먹였습니다. 딸은 너무 아파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참았습니다. 거기서 저는 줄반장을 해서 끝에 앉았는데, 우연히 보초와 이야기 하다가 그의 어머니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제가 군대생활 할 때 특무장으로 있던 여자였습니다. 서로 그걸 알게 되니까 좀 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초의 눈을 피해 감방 안에 설치된 칸막이 간이화장실에서 변을 보고 바닥에서 건져서 돈을 하나를 건졌고, 근데 또 배가 아파서 설사를 했는데 하나는 건지고 하나는 보위원이 다가오기에 그냥 포기하고 떠내려 보냈습니다. 12월에 잡혀온 여자가 한명 있었는데, 그녀는 중국에서 한국으로부터 온 친척을 만나 3000원을 받았다는 죄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허약했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로 바로 못 보내고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주사를 맞으러 나왔다가 우리가 돈을 먹고 들어온 것을 일렀습니다. 그래서 종합지도원에게 끌려가 맞았습니다. 한국이나 기독교와 관련되었는지 계속 취조를 당했습니다. 저는 죽어도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틀 정도 취조를 하더니 다른 사람들은 보위부로 보내는데, 우리는 무산군안전부로 넘겨졌습니다. 안전부 감방에서 하루밤을 재우고 다시 단련대로 넘겼습니다.


7. 청진집결소에서의 40일

일주일 후 우리는 청진집결소로 보내졌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손가락 족쇄가 채워졌습니다. 19살 남자와 같이 손가락 족쇄가 채워진 딸은 청진까지 가는 길에 또 핀침으로 족쇄를 풀기도 했지만, 엄마가 있어서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집결소로 갔더니 또 검사를 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방이었습니다. 10~15명씩 들어가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서 잠도 못잘 지경입니다. 저녁 5시에 일 끝나고 밥을 먹고 들어가면 6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만 전기가 들어옵니다. 정전되면 빈대라는 빈대는 다 나와서 배꼽짬, 손가락짬, 발가락짬, 귓구멍짬 안 들어가는 데가 없습니다. 어쨌든 빈대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고 40일 동안 박쥐처럼 창문에 매달려 밤을 지냈습니다. 남은 돈 100원을 가지고 엿 1kg를 사다 달라고 부탁해서 그걸로 버텼습니다. 청진집결소에서는 7개월 된 여자아기를 담요로 덮어 강압적으로 죽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담요에 싸서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8. 다시 탈북

40일째가 되던 날, 평안남도 송천에서 68호 군수품 안전원 하나가 집결소로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따라 어머니가 계신 송천군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도저히 그곳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지도원이 제 출신지를 평양이 아닌 송천군으로 고쳐주었습니다. 그 안전원은 기차가 한달이 걸릴지 열흘이 걸릴지 모르니, 식사보장을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 핸드백밖에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 집결소에서 나와 청진역으로 가는 길에 저는 가지고 있던 핸드백을 500원에 팔고 돼지발족(족발), 두부를 200원어치 사서 안전원에게 먹였습니다. 자기는 이밥을 먹으면서 우리에게는 먹어보라는 말도 안합니다.

안전원이 끌고 다닌 사람들은 우리까지 모두 5명이었습니다. 집결소에서 가지고 온 강냉이밥을 옆에 있던 남자에게 불쌍해서 주니 너무 고마워하며 울었습니다. 우리가 도망온 걸 알고 그 남자도 도망가겠다고 했습니다. 안전원은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있고, 동행한 5명과 함께 있다가 화장실을 갔다 와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섯 명이 다 달아나면 금방 잡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낮 11시쯤 “나도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나오는데 딸이 뒤따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만 따라오라”고 하고는 가로질러 뛰고 뛰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무조건 뛰어 도착한 곳은 어이없게도 다시 집결소 마당이었습니다. 근처에서 돌고 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아파트 복도에서 새벽 3시쯤까지 쭈그리고 잤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다리 밑에서 통근차를 타고 수성까지, 그리고 무산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2000년 8월 29일이었습니다.


9. 탈북보다 더한 인신매매의 위협

다시 무산에 돌아와 아들을 찾으려고 보니까 장마가 닥쳤습니다. 무산에서 물난리가 나 사람들이 죽고 난리가 났습니다. 돈이 없어서 아들을 찾지도 못하겠기에 빨리 돈을 모아 중국으로 가야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장사하는 동생들과 동원 다니고 돌도 날랐으며, 인민반장 일을 따라다니면서 도왔습니다.

하지만 북한 남촌에서 다시 잡혔습니다. 대낮에 두만강을 못 건너니까 밤에 나왔다가 정치소 순찰에게 딱 걸렸습니다. 그냥 당당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중국에 친척이 있어서 돈 빌리러 가는 길이니 다시 오는 길에 꼭 뇌물을 좀 주겠다고 속였습니다. 밤에 조용히 림강쪽으로 걸어 높은 산을 넘어서니 중국 숭선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넘어가다가 다시 인신매매꾼인 백가라는 놈에게 걸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팔려도 좋다”고 하면서, 대신 화룡 시내로만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간 낮에는 호박씨를 벗기는 일을 하고 밤에는 산 중턱에 초막을 치고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하루에 10원을 받았습니다. 화룡에 오니 산동인-한족에게 저를 넘기는 것이었습니다.

기회만을 노리며 택시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 보니 조양촌이었습니다. 역전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오줌을 누겠다고 하니까 인신매매꾼은 길바닥에서 오줌을 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차 역전으로 들어가 손씻고 오겠다고 하고서는 무조건 도망쳤습니다. 그 놈은 다리가 얼마나 긴지 금새 쫓아와서 제 옷을 붙잡았습니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지만 아무도 안 돌보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족 하나가 지나가다가 그 남자를 붙잡아 공안으로 넘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돈은 줄 수 있지만 제발 공안에게만은 넘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조선족 집으로 따라가다가 문득 이 사람도 인신매매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 높은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허허 벌판이었지만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방향을 잡아 수태 걸어가니 태양이라는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그 곳에서 남편과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댁에서는 이제 저에게 다른데로 가라고 했습니다.

2005년 4월 19일
데일리 차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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