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 선교 가시려는 분 필독사항 |
선교사 비자를 너무 고집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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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오려는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한다.
1. 선교사 비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은 비공식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 신문이나 잡지에 광고를 내는 것은 좋지 않다. 현재 한국에 있는 몽골 정부의 사람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면 비자는 나오지 않으며 입국해서도 문제가 된다.
2.선교사 비자를 너무 고집하지 말라 우선 이곳에서 언어훈련을 해야 하니 학생 신분으로 입국하라. 이곳 대학의 초청장을 받거나 관광으로 들어와서 학교에 등록하는 절차를 밟으면 된다. 입국 6개월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 초청장이 꼭 있어야 한다. 이곳으로 연락을 하면 초청장 발부가 가능하다. 영문 이름과 생년월일,그리고 입국하고자 하는 날짜를 연락하면 된다. 참고로 통신의 보안을 위해서 힘써 줄 것, 목사, 선교사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참고로 외국인들은 1년에 한번씩 거주 비자를 받아야 한다.이것을 받지 않앗을 경우 하루에 1$씩 벌금이던지 추방이다.
3.외국어 대학이나,국회 도서관에 가면 [몽,영,일,사전]이 있다. 그 사전을 복사해 와야 된다. 현재 몽한 사전이 없기 때문에 영어 사전이나 일어사전이 필요하다. 언어를 준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몽골 대사관에 문의해서 대사관 식구들에게 약간의 수업을 받을 수 있다.물론 약간의 사례를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일본어나,소련어를 공부하면 된다. 그러나 언어는 현지에 와서 직접하는 것이 가장 좋다.
4. 학비는 학교마다 차이가 있다. * 국립대학-250$ 매달(6개월차로 선불하라고 요구함) * 사범대-100$(에스페란토-110$ 매달) * 아카데미-150$(에스페란토-210$,매달) * 도서비-매달 30-40$ * INTERNATIONAL SCHOOL-매달 300$(1년치나 6개월치를 먼저 내면 할인이 된다. 유치원 과정과 국민학교 1-3학년 수준)
경제현황
이곳의 경제 현황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참고로 몽골은 물가 상승이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번에 300-600% 정도 오른다는 것을 감안하라.신문을 통해서 발표되는 것은 1$당 400TG(투구럭)이나,은행에서는 380원으로 계산해 준다(94년11월9일 기준). * 버스요금-30투그럭 * 택시요금-1KM당 130투그럭 * 호텔투숙비/울란바트로,바이앙골호텔 - 1인2일 최저 40$-120$ * 식사료-보� 1인당 1끼에 5-10$ * TV-350-600$ * 자동차-10000-40000$ * 집세-1개월당 200-500$ * 전화-몽골에서 한국으로, 호텔에서 1분당 7$ 그외에 $로 살 수 있는 식품류(별로 없지만)는 한국과 비슷한 가격이라고 생각하면 됨. * 4인가족의 생활비/매월 500-600$정도(교육비와 주택비를 포함하지 않은 지수) * 마늘 한쪽 60TG(가끔 마늘이 나오지만 이들은 음식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에 비싼 편이다).
몽골의 정치
1921년 소련 다음으로 공산화한 몽골은 현재 자유 시장경제 제도로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실제로 몽골 내에서는 공산권으로 다시 돌아가자,선교사들을 내보내자는 등의 말들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당은 MARP의 집권당 외에 5개의 야당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당이 야당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공산당의 집권 체제 속에서 싹튼 나눔의 관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 바로 민족주의다. 정부는 민족주의로 인도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하루 속히 징기스칸의 무덤을 찾아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전세계에 내보이자고 주장한다.민주주의라고 선포는 했지만 아직도 멀고도 먼 나라가 몽골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인을 추방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할 것이라고 보지만 나 자신은 이 나라가 너무도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게 못하리라 본다. 현재 몽골 정부는 갈피를 못잡고 있다. 자주 바뀌는 헌법과 경제적인 상황들이 정치인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고 각 기업이나 학교의 선생님들,노인들이 계속하여 항의하고 데모하고 있다.
의료현황
이곳에는 몇 개의 병원이 있고 의과대학도 있지만 이들의 수준은 극히 낮다고 볼 수 있다.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고 의료장비들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지난 70년 동안 러시아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전해 준 것은 하나도 없다. 이곳에는 기본적인 약품 등이 부족하다. 특별히 포도당이나 항생재,피임약 등이 부족하다. 이곳은 인구정책으로 인하여 다산제를 도입하고 있고 겔(몽골인들의 집)에서 부모들의 성생활을 눈으로 보면서 성장하기 때문에 성에 대해서 상당히 개방적이다. 현재 AIDS가 몽골에 들어 왔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다. 특별히 이곳에는 특이한 성병이 있다. 몽골 정부의 발표는 15%라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성병이 걸리면 2개월만에 죽는다고 하는 것이 UN 측의 말이다.그러나 성병전문가이신 한국의 교수님을 통해서 들은 바로는 그런 강력한 성병은 없다고 한다.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지난 2년동안 주몽골 미국 대사관의 직원 2명이 이곳에서 죽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병이었다고 하는 관계자의 말이다.
현지인들과 만나는 가운데 이들이 가장 많이 앓는 부위는 신장이다. 특별히 약하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고통 중에 있고,울란바타르의 경우 인구의 1/3이 결핵 보균자라고 하는 발표도 있다.또한 몽골인들 가운데 치아가 정상적인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치과 시설 또한 열악하기 때문에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난 한국의 의료선교단이 이곳에 와서 진료하는 가운데 치과병원은 끊임없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의 식수 사정이 좋지 않다. 많은 사람들의 말로는 석회질이 많다고 한다. 어느 날은 욕조에 담아둔 물이 새파랗게 물들고 어느 날은 황토색 물로서 흙같이 나온다. 이곳은 건조한 지대라 그런지 하수도가 없다.또한 러시아 부대에서 많은 것을 실험하고 그대로 강물로 버린다. 지하수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것이 몽골인들의 치아와 속을 버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어떤 부위의 의사들이 필요할까?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 치과의사,내과의사,소아과 의사,예방학이나 공중 위생분야등이 필요하다. * 간혹 약품을 보내주는 경우가 있으나 통로를 정확하게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써 공급한 약들이 다음날 시장에서 판매되고 만다. * 이곳의 모든 외국인들은 주로 6개월에 한번씩, 북경이나 모스크바,홍콩을 다녀온다. 그것은 소위 말해서 풍토병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이다. 지금의 전전 미국대사가 이곳에 근무하다가 본국에서 대사일을 하겠다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직위해제 됐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후원회에서의 이해 부족으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니지 못하고 있다. 외국 선교사들이,한국선교사들에 대하여 많은 우려를 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 감사한 것은 이곳에 연세친성병원이 설립됐다는 것이다.
매스컴
이곳의 매스컴은 상당히 자유롭다. 지난 11월 1일 기준으로 280개의 신문사들이 있다. 그들은 신문윤리위원회라는 것도 없고 자신들이 기사를 써서 내놓는다. 때문에 신뢰성에 상당히 문제도 있지만 숨김없이 사실대로 나온다. 한국의 신문에 비교하지 말라. 큰 회사의 것은 주로 신문지 4-8페이지 정도의 규모이고, 작은 것은 백모지 1장의 규모도 있다. 1주일에 보통 1-3번 정도 출판된다. TV쪽은 몽골 방송국이 1개,러시아 방송국이 1개, 그리고 영어 방송을 받아서 하는 작은 방송국 하나가 있다. 주로 오후6시부터 시작해서 10-11시까지 방송되는데 주말의 개념은 없다. 라디오는 공산주의 특유의 방식대로 각 가정에 라디오 케이블이 들어 있다. 라디오의 잭을 꼽으면 몽골방송이 나온다. 단파 방식이며 1개의 채널밖에는 없다.
실제로 몽골에 오는 분들께
필수사항(장기적으로 정착하고자 하는 가정) - 겨울옷(한국에서의 겨울용은 이곳에서 가을에 입을 수 있다) 약품상자(특별히 콧물감기,설사,마이신,소독약,대일밴드 건조하기 때문에 상처가 잘나고 아물지가 않음,비타민 다량,알러지 약, 소화제,주사기 마늘 솜). 음식 - 캔 종류의 �잎,김(건조해서 누지지 않음),미역,다시다, 라면,인스탄트 채소국(농심의 배추국),밀가루,그 외에 한국인이 꼭 섭취해야 하는 음식 중에 캔과 썩지 않는 것. 전자제품 - 이곳에서는 기대하지 말것.특별히 자녀들 교육을 위하여 비디오 테이프를 준비하려면 한국에서 준비해오던지 이곳에서 비싸지만 멀티시스템을 준비할 것, 한국과 씨스템이 다름. 세탁기는 크지 않지만 국산이 있음. 청소기(훨타 많이),히터,도란ㅅ (220-110),가습기,전기장판(220V용). 문구용품 - 종이(이곳은 종이를 생산치 못한다),화첩,매직,공책, 어린이용,문구...등 자신의 사역에 맞게 준비할 것. 책 - 성경공부 교재, 신앙인을 위한 소책자 등등....
읽으면 도움이 되는 책
* [몽골어와 퉁구스어]/김방한,김주원,정제문,86,10,31 믿음사 6,000원 * [몽골민족]/권오성,김선농,김태곤,임동권,정병호,92,1.30.복조리4.000원 * [몽고문화사]/D.마이담,N.츄르뎀,김구산 역,91.3.10.동문선문예신서 * [몽골사회제도사]/주채혁 92.대한교과서 주식회사 9.500원 * [징기즈칸]/르네,그룻세,최호연 역 83,2.10 정음문화사 * [만두하이]/얀달자빈,나차구도루지 90.5.10설영환 역,문학출판공사 * [소설 징기스칸]/바실리 얀,최종수 역 푸른산 * 우편상태-이곳의 모든 통신은 도청당합니다. 또한 우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포를 보낼 수 있습니다. 1KG당 5000원이며 2주일 걸립니다. 그 소포 안에 소식을 전하십시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편으로 ..소포는 1개단 10KG이 한계입니다. 포장을 상당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결론 : 몽골의 복음화는 한국교회가
몽골은 인구가 적고 땅이 넓다. 그러기에 선교에 소홀할 수가 있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의 선교센타로 이용하고, 전세계를 정복했던 징기스칸의 후예들을 복음화시켜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힘쓰도록 기도하고 헌신한다면 이곳은 어마어마한 선교의 시장이다. 과거 역사 속에서 한국을 100년동안이나 지배했던 나라, 몽골, 그러기에 더욱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왜 한국교회가 몽골의 복음화를 책임져야 하는가?
1.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흡사하다. 2. 언어의 구조가 같은 알타이어에 속하여 유리하다. 3.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4. 한국의 초대교회의 상황과 비슷하다. 5. 한국교회의 복음에 대한 빚이 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천강민 선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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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선교, 교파초월 연합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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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한인선교사회 울란바타르 선언문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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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일 기자 jangci@kidokongbo.com [조회수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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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장창일기자]몽골에서 사역 중인 한인 선교사들이 몽골선교의 청사진을 담은 선언문을 채택했다. 지난 15일~18일까지 몽골 울란바타르 사랑의 빛 센터에서 열린 몽골 한인선교 15주년 기념대회 마지막 날, 선교사들은 회의를 갖고 '2006 몽골 울란바타르 선언문'을 채택했다. 몽골의 선교를 위해 선교사들 간에 효과적인 네트워크 구축과 연합사역을 지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선언문을 통해 선교사들은 몽골 선교에 대한 비전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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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선교 15주년 대회 마지막 날 몽골 한인선교사회는 회의를 열고 2006 몽골 울란바타르 선언문을 채택했다. 사진/장창일기자 |
| 선언문에는 또 △몽골의 지방 복음화를 위해 차세대 지도자를 발굴ㆍ양육할 것 △몽골교회와 연합해 미개척지로 선교자원을 확산시키고 이를 통해 몽골교회가 세계선교에 기여하도록 도울 것 △선교사들 간에 효과적인 네트워크 구축과 연합사역 지향할 것 등의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몽골 한인선교사회 회장 양재철목사는 "울란바타르 선언문은 향후 몽골 선교사들이 사역을 해 나가는 데 필요한 나침반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면서, "앞으로 연합사역을 위해 선교사들이 노력하고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15주년 기념대회 주강사인 박종순목사는 "몽골 선교사들이 지금까지는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연합사역을 잘 감당해 왔지만 앞으로도 이런 전통을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면서, "선언문을 채택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이같은 비전을 담아 선교사들의 의견을 모은다면 다른 선교지에도 큰 귀감이 될 것"이라며 선교사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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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8월 22일 17:47:29 / 수정 : 2006년 08월 26일 10:06:51 장창일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http://www.cts.tv/prog/content.asp?PID=P368&DPID=51679 방송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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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한인 선교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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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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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교단을 초월해 연합활동을 펼치는 가장 모범적인 선교집니다. 현재 몽골에서는, 15년 동안의 한인 선교 역사를 되짚고, 미래 사역을 위한 준비가 한창 인데요. 이윤정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1914년 몽골 울란바트르에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세우고 의술과 복음을 전했던 대암 이태준 선생. 현재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이태준 선생의 흔적은, 복음의 씨앗으로 몽골에 뿌려졌습니다.
사회주의 체제 동안 복음의 불모지였던 몽골 땅에서, 1991년 7월 강영순 선교사가 최초 몽골 한인 선교사가 됐습니다.
int 강영순 선교사//울란바트르 영원한생명교회
교회개척을 중심으로 사역을 펼친 강영순 선교사를 비롯해, 임태수, 안교성, 윤순재 선교사 등이 몽골 땅을 밟고, 교육, NGO, 의료 사역을 펼쳤습니다.
몽골 한인 선교 15주년 기념대회 패널토의와 강의에서는, 초기 한인 선교사들의 활동을 정리하고, 미래 사역방향을 제시하는 시간이 마련됐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입국 당시, 사회주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는 선교는 교단을 초월한 연합 활동임을 깨닫고 결속력 있는 사역을 펼쳤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사역 중인 젊은 선교사들은, “연합 활동의 전통을 이어받아 몽골 전역에 복음을 전하고, 현지인과 함께 하는 선교를 해나가겠다”고 다짐합니다.
int 박종순 목사//한국세계선교협의회 대표회장 int 권오성 선교사//덴진미앙가 반석침례교회
STD 교단을 넘는 연합사역으로, 큰 열매를 맺고 있는 몽골 한인선교. 15주년 기념대회를 통해 지속적인 일치와 협력을 다짐하며 건강한 선교지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몽골 울란바트르에서 CTS뉴스 이윤정입니다. | | |
몽골 한인 선교 15주년 기념대회
http://cts.tv/prog/content.asp?PID=P368&DPID=51642 방송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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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복음의 불모지였던 몽골에서, 현재 1%가 넘는 국민이 기독교인이 되기까지는 한인선교사들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는데요. 몽골한인선교 15주년을 기념하는 대회가 몽골 울란바타르에서 열렸습니다. 이윤정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아시아 대륙 중앙에 위치한 몽골.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1990년대, 개방의 물결이 일면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몽골 선교사역중 한인 선교사들의 연합된 힘은, 4만 3천 여명의 몽골 기독인을 양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몽골 한인 선교 15주년을 맞는 기념 대회가 15일부터 18일까지 울란바트르 사랑의 빛 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됐습니다.
양재철 목사//몽골한인선교사회 회장
몽골한인선교사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세계선교협의회가 함께 주관한 이번 대회는. 한인선교사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함께 몽골 현지인들을 초청하는 행사가 더불어 열렸습니다. std 대회 첫 날, 몽골 현지인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은혜의 말씀과 기쁨의 찬양이 선교 센터를 가득 채웠습니다.
3박 4일 동안 집회와 부흥회를 통해 말씀을 전한 박종순 목사는, “교단을 초월한 한인선교의 협력 활동이 선교의 좋은 결실로 이어진 것 같다”며 앞으로 현지인을 통한 선교가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을 당부했습니다.
박종순 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
칭기즈 칸의 기상이 살아있는 몽골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린 한인선교사들. 기념대회를 통해 지난 15년을 돌아보며, 현지인과 함께 하는 미래 선교를 꿈꾸고 있습니다. 몽골 울란바트르에서 CTS뉴스 이윤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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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7 |
날짜 |
2004년 04월 07일 12시 09분 |
이름 |
김종완(rabor) |
조회수 |
106 |
제목 |
아시아 평화와 평화봉사 발제물(몽골 - 4조: 김보미, 김종완) |
<아시아 평화와 평화봉사>
몽 골
발제자: 김보미(20401008) 김종완(19901073)
<<목 차>> 1. 몽골 이해 2. 자연현황 3. 정치, 외교, 경제 4. 사회, 문화, 교육제도 5. 종교 6. 관광정보 7. 선교정보 ------------------------------------------------------------ 1. 몽골 이해
- 국가명: 몽골(Mongolia) 몽골(Mongol)이란 본래 "용감한"이란 뜻을 지닌 부족어였으나, 징기스칸에 의해 통솔된 몽골부(部) 발전에 따라 민족의 이름 "Mongol" 및 지역의 이름 "Mongolia" 로 변화되었다. 몽고(蒙古)라는 이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북방 민족으로부터 전쟁에 시달려 온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卑下)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 과 '옛 고(古)'를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
- 국기 몽골 국기는 직사각형으로 3등분 되어있고, 중앙은 청색, 양측은 적색으로 되어 있다. 국기 중앙에 위치한 청색은 "영원히 푸른 하늘" 을 뜻하며 양측의 적색은 진보와 번영을 의미한다. 국가의 상징인 황금빛 소욤보는 국기 깃대 쪽인 좌측 적색부분에 그려져 있다. 국기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1:2로 되어있다
- 수도 : 울란바타르(Ulaanbaatar) 울란바타르는 '붉은 영웅'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면적은 1,358㎢(서울의 2.2배), 북위 47도 55분, 동경 106도 53분에 위치하고 있다(위도상 파리, 뮌헨, 시애틀과 일치하며 경도상 호치민, 자카르타 등과 거의 일치함).
- 행정구역 몽골의 행정구역은 18개의 도(道, Aimag)와 3개의 특별행정구역, 그리고. 1개의 특별시 (Ulaanbaatar)가 가장 큰 행정단위이며, 도 아래에는 343개의 군(郡, Soum)이 있고, 군 아래에는 1,681개의 면(面, Bag)이 있다. 전체 면적은 1,564.2천 ㎢이며, 인구밀도는 Ulaanbaatar의 127.98 명/㎢를 제외하면, 전국 평균이 1.57 명/㎢에 불과하다.
- 역사 몽골은 징기스칸으로 인해 세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고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元)나라를 세워 비로소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원나라(1279-1368년)는 순제를 마지막으로 1368년 한(漢)민족계인 명(明)에 의해 멸망하였고, 그 수 몽골은 고비사막 너머로 쫓겨가서 13세기의 모습을 갖춘 채 신비한 고립 국가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1616년에 성립한 만주계의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청나라는 비옥한 땅을 모두 빼앗아버리고 몽골인들은 황폐한 초원지대로 밀려나 유목민으로서의 삶이 더욱 고착되었다. 1911년 한민족계의 사람들이 청을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세웠을 때 외몽골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외몽골은 은 원래 중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외몽골은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국내의 혁명을 힘을 쓰지 못하자 중국이 침공을 시작하였고, 결국 외몽골은 독립을 취소하였다. 동시에 러시아의 반혁명 세력도 침입해 와서 라마교의 활불(活佛 : 달라이라마)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였다.
나라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외몽골은 러시아 혁명 세력의 원조를 받아 중국군과 활불 정부군과 맞서 싸워 1921년 수도를 점령하였다. 활불 정부군으로부터 정권을 인수 받은 날이 7월 11일로 현재의 독립 기념일(나담)이 되었다. 1924년 11월에는 몽골 인민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세계에서 2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1939년 이후에는 일본과 제 2차 대전에서 연합군 측에서 러시아와 함께 싸워 승리하였다. 1961년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1964년 중 몽 국경이 확정되어 내 외 몽골의 분열이 고착되었다. 1956년 체덴발이 인민 혁명당 서기장이 된 후 당내 친 중국파를 숙청하고 친소련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고,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 발전을 위하여 힘써왔다. 대부분 국민들은 중국에 대한 국민 감정은 썩 좋은 편이 아니나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중국의 영향은 매우 깊다. 한편으로는 지난 70년 동안 소련 연방(USSR)의 사회주의 제도 아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현대 몽골인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 방식은 러시아를 본받은 서구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2. 자연현황
- 위치 몽골은 중앙아시아 고원지대 북방에 위치한 내륙국가로 면적이 1,567,000㎢(한반도의 약7.4배)이고 동서길이는 2,349㎞, 남북길이는 1,259㎞ 배 모양을 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러시아 동남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이다. 부존자원으로 원유, 석탄, 구리, 몰리브덴, 텅스텐, 주석, 니켈, 아연, 금 등이 풍부하지만 개발이 거의 안 된 상태이고 전국토의 80%를 목축지로 이용하고 있다.
- 지형 북서부의 알타이 산맥으로부터 동남부의 평원지대로 펼쳐져 있으며, 서쪽 끝에 러시아와중국의 국경지대에 솟아있는 후이� 어른길(Huityn Origil)이라는 봉우리가 최고지대로 4,374m, 동부 평원지대가 초저지대로 560m이고 평균 고도는 1,500m로 지리산 천왕봉 높이와 같다.
- 기후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겨울이 길고 추우며, 여름이 매우 짧다. 1년에 구름이 없는 날이 257일이나 되는 등 맑고 높은 하늘을 항상 볼수 있으며, 11월부터 3월까지는 영하를 나타내고 특히 1월-2월은 영하 20도가 보통이며, 겨울철 야간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반면, 여름에 33-38까지 올라가지만 건조하기에 그늘에 있으면 시원하다.
- 온도 연평균기온은 북부와 중부지방은 -2 8.C, 동부지방은 -2 0.C, 남부지방은 +2 6.C에 이른다. 겨울은 몽골 북부지방에서 5 5.5달 동안 계속되고, 남부지방에서는 4 4.5달 동안 계속된다. 가장 추운 달인 1월의 평균기온은 북부지방의 경우 -35.C, 고비지대는 -15.C, 기타지역은 -20 25.C에 이른다. 특히 산악지대의 저지대와 협곡지대는 상당히 춥다. 측정된 기온 중 가장 낮게 내려간 1월 기온은 -48 -51.C이다.
- 연평균 강수량 강수량은 계절에 따라 매우 불균등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200 250mm 정도다. 산악지대는 대기전선 선풍의 활동이 심해져 다른 지역에 비해 강수량이 많다. 대기의 수직 이동의 발전에 상응하여 일정한 고도까지는 강수량이 증가한다. 반면에 강가의 계곡은 그 지형에 상응하여 강수량은 차이가 있다.
- 강설량 몽골은 10월말부터 이듬해 4월까지 평균 20 100㎝의 눈이 내린다. 눈이 가장 많이 내릴 때의 눈의 밀도는 0.15 0.20g/㎤이고, 강설에 의한 수량(水量)은 항가이 산맥의 북사면과 �스굴 산악지대의 경우 평균 20 30mm, 높은 산악지대의 경우 60 80mm, 고비지대의 경우 10mm를 넘지 않는다.
- 바람 몽골 바람의 전형적인 특징은 북풍과 서풍이라 할 수 있다. 특히 4 5월에 부는 봄바람의 위력은 대단한데 평균풍속은 2 5m/s 정도이다. 고비나 동 몽골의 봄바람은 매년 사람이나 가축을 회오리바람에 말아 올려 죽일 만큼 그 위력이 대단하다. 바람이 가장 심한 시간은 오후 1시 전후이다. 고비지방의 봄바람은 종종 폭풍으로 변할 때도 있으며 이 때의 풍속은 15 25m./s 정도이다. 몽골의 겨울은 아주 춥고 매우 건조하지만 바람은 그다지 불지 않는다. 특히 산간분지일 경우 바람은 거의 불지 않는다.
- 토지이용 국토의 총면적은 156,412천 ha로 남한면적의 16배에 해당한다. 이 중에 123,591천 ha가 농업용지로 남한 농경지 면적의 약60배에 이른다. 가축을 방목하는 초지가 국가 전체면적의 76.9%에 달하고, 삼림의 면적은 전체 국토 면적의 약 9.2%에 지나지 않아서 초원으로 이루어진 국가임을 알 수 있다. 경작지 면적은 총 121.7만 ha로, 농업용지의 약 0.98%, 국가 전체 면적의 0.78%에 불과하였다. 농업용지의 도(道)별 분포를 보면, 전체 농업용지의 약 61%가 중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중부지역은 3개 도(Bulgan, Selenge, Tov)를 포함하며, 특별시로 Ulaanabatar와 Darkhan이 포함된 지역이다
3. 정치, 외교, 경제 - 정치 1924년 11월 몽골 인민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면서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던 몽골국(외몽고)은 1961년 유엔(UN)가입과, 1964년 중 몽 국경이 수립된 후 많은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된다.
오랫동안의 사회주의 폐쇄 정책을 실시해 오면서 생긴 극심한 경제적 난제와 세계무대에서 가장 큰 지지 기반이었던 러시아의 붕괴는 몽골국(외몽고)의 변화를 더욱 강하게 요구했다. 따라서 1988년 12월 제 5 차 공산당 (인민 혁명당) 총회에서 개혁 정책(시네츨를)과 민주화를 추구하기로 결정하였고 90년 7월 29일 최초로 민주 총선을 실시하여 국회(이흐 호랄)를 구성하였다.
그 후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개선에 주력했으며, 한국과도 1990년 3월 25일 대사급 수교를 하였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의 경제 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생활 여건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으며, 국민들의 경제적 궁핍이 개혁 정책의 효과를 불신케 하자 92년 6월 말에 있었던 총선거에서 민족주의의 회복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공산당(인민 혁명당)이 전체 의석 중 92%를 차지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1993년 6월 국민 직선 대통령 투표에서 야당의 대표로 출마한 오치르바트가 공산당의 후보인 투데브를 누르고 선출되었고, 1996년 6월 30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난 75년 동안 집권하였던 인민 혁명당을 국민들의 거부함으로써, 1924년 근대 국가를 수립한 이래 처음으로 선거에 의하여 정권이 바뀌는 새로운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총선거를 통해 야당 연합이 국회 의석의 3분의 2인 50석을 차지하여, 국회 의장과 총리, 장 차관이 새로 교체되며, 사회 전반에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7년 5월 18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인민 혁명당 후보인 바그반디가 60%의 득표로 현직 오치르바트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 외교 몽골은 140개국(2000년 12월)과 수교를 맺었는데 몽골의 재외공관은 대사관이 22, 영사관이 4, 대표부가 2개이고 몽골주재 외국공관 및 국제 기구는 대사관이 18, 영사관이2, 무역대표부 1, 국제기구 대표부 8개 있다.
- 경제 몽골의 국민 1인당 소득(Per-capita GNP)은 $335 이나 1인당 국내 총생산(Per-capita GDP)는 $2,185 로 국민들의 생활 수입은 낮은 편이나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혜택(주택, 의료, 교육 등)이 자본주의 국가와 다르기 때문에 화폐 가치 차이로 단순하게 비교하기 어렵다.
국유 재산 사유화 조치가 91년 5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몽골은 지난 70년 동안 정치와 경제 부분에서 소련 연방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대부분의 소비재와 건설재 등을 소련이 공급해 주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동맹국가로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지난 89년 소련 연방이 시장 경제로 전환하면서 몽골에 대한 대부분의 원조가 중단되었다. 동구와 소련의 철수로 몽골은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공업 및 건설 사업은 예전보다 더 부진한 상태에 있으며,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가장 큰 어려움은 극심한 생필품 부족 현상으로 인한 엄청난 물가 폭등과 국가 재정의 부족을 경험하였다. 대개 91년에 비해 식료품 가격은 62배나 폭등하였고, 교육비는 무려 89배나 올랐다. 전체적으로 약 51배나 오른 소비자 물가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의 생활을 동경하도록 하고 있다.
국가 재정도 많은 부분이 해외 원조와 장기 저리 차관으로 메워나가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폭의 재정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새로운 사회 간접 자본 건설을 위한 투자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고, 늘어나는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할 만한 정부 차원의 시도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물가 상승률이 많이 둔화되었고, 89년 이후 국민 총생산이 감소(-성장)하다가 93년을 고비로 증가(+성장)하기 시작하였고, 96년의 경우 전년도에 비해 경제가 무려 6.3% 성장하였다. 또한 실업률이 1994년 8.7%에 비해 1998년 3월 말의 통계 자료는 경제 활동 인구 가운데 2.6%인 62,744명으로 나타났다.
몽골의 시장 경제로의 이행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자유 시장(바라니 자흐, Free market)인데, 가장 큰 시장은 일주일에 네 번 모이고 많이 모일 때는 한 번에 약 20,000명으로 하루 종일 출입하는 사람을 모두 합치면 10만 명가량 모인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중국제 값 싼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한국 물건도 많이 볼 수 있는데 한국의 두 배 가격에 팔리며 몽골 사람들에게는 매우 품질이 좋은 물건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 정부는 한국을 경제 성장의 모델로 삼아 최근 공무원 연수단 파견, 학술 대회의 개최 등으로 양국간 인적 교류 확대를 추진하고 있으며 지난 91년 10월에는 몽골의 직선 대통령인 오치르바트 대통령이 직접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양국간의 무역은 95년의 경우 연간 4,600만 $ 규모이며, 한국이 몽골의 제 4 위 수입국이며, 수출은 제 7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양국의 교역은 날로 확대되고 있다.
4. 사회, 문화, 교육제도 - 사회 몽골 사회의 모든 면모가 유목에 의해 조성되어 왔는데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몽골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자원 때문이 아니라 유목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평균 이하의 강수량과 기온에서 극심한 변화로 특징지어지는 복잡하고도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환경 적응의 과정이 바로 유목인 것이다. 유목은 일정한 구역의 한계 없이 매우 광활하게 매년 장소를 이동해야 하는 직업이다. 처음 서리가 내리는 날과 마지막 서리가 내리는 날, 그리고 식물이 자라는 계절도 매우 광범위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환경 때문에 나무보다는 초원이, 삼림보다는 구릉이 발달되어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곡식은 자라지만 매년 거둘 수 잇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매 십 년마다 한번씩 모든 곡식을 잃을 것을 각오하고 밀농사를 짓기도 한다. 환경학적으로 매우 제한된 구조의 몽골 환경에서는 농사가 적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유목은 몽골 사회에 다양한 초원의 자원을 활용하는 데 용이하다.
유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동성이다. 한 곳에서 일 년 동안 사람과 가축을 생존하게 하는 데 충분한 자원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목을 농사와 함께 할 수 있는데 이는 안정적인 불과 오아시스가 있는 곳에서 가축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제한된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
유목은 초원의 풀을 사람들에게 공급되는 우유와 고기로 전환되는 에너지에 사용되는 가축 떼의 이동성의 값과 수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공통적으로 일정한 틀이 없다. 즉 문제를 극복하며 위협을 피하고 지구상에 축적된 대상인 정착에 별 가치를 두지 않으며 이동성에 가치를 둔 민족으로 발전되었다.
과거에는 목축업자들은 집단 가축의 한 무리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보통 이 무리에는 자신의 가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 소유의 가축들을 분배받았고 부지런하기만 하면 유목 생활도 상당량의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최근에 현대화된 시골 가정은 풍력 발전기나 태양열 발전기, 아니면 석유 발전기를 가지고 전기를 잠깐씩 켜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전기 불을 켜서 사용한다. 방목지에 있는 유목민들에게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생활의 자강 큰 즐거움이며, 어디든지 들고 다니며 날씨 예보나 태풍 경고들을 듣는다. 또 웬만한 지역에서는 교통수단으로 말과 오토바이, 러시아 군용 짚차, 트럭을 이용하고 있다. 대개 보통의 가정이 말5 6마리, 양이나 염소 200 300마리, 소 10 15마리를 대가족이 기르며 가족이 많고 부유한 가정은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가축을 기르기도 한다.
- 언어사용 몽골은 언어 사용 면에서 거의 통일이 되어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인구의 90%가 몽골 방언 중의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몽골은 터어키, 우즈벡, 투르크, 카자흐 그리고 한국, 일본 등과 유사한 알타이 언어를 사용한다. 서부의 바얀얼기에 거주하는 카자크 종족과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사는 브리앗(Buryat) 종족을 제외하고 몽골의 여러 방언들은 몽골 인들이 문자를 판독할 수 있다. 할하(Khalkha) 몽골은 몽골 전체 인구의 대다수인 80.8%를 차지하고 있다. 방패(Shield)를 뜻하는 "할하"는 16세기 중반부터 고지대 스텝지역과 산악을 따라 이동하던 몽골 유목민을 지칭하던 말이다. 20세기에 중부 지역과 동부지역에서 통용되던 할하 몽골이 표준어가 되었고 이것은 학교에서 교육됐고 공식 언어가 되었다. 문자는 울란바토르 지역의 할하어에 기초했고, 이것을 1941 1946년에 소련식 알파벳을 사용해 시릴릭(Cyrillic)문자로 변조하였다.
- 주거환경 몽골은 유목민족으로서 예로부터 한 곳에 정착해 살기 보다는 양과 말을 기르기 위해 풀을 찾아 여기 저기 이동하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이러한 유목 생활형태에 맞추어 주거도 이동하기에 편리한 천막집을 주된 주거형태로 사용해왔는데, 나무와 펠트(양털)를 주된 재료로 조립되는 이러한 형태의 가옥을 몽골포 또는 게르(Ger) 라고 부른다.
- 음식문화 몽골 초원민의 식탁은 <하얀 음식>과 <빨간 음식>으로 채워진다. <하얀 음식>은 가축의 젖으로 만든 각종 유제품을 총칭하는 말이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충분히 짜낸 우유로 여러 가지 유제품을 만든다. 유제품은 보존식품으로서 1년 내내 먹는 음식이다. 그러나 그 질과 양에서 유제품이 가장 풍성한 계절은 역시 여름이다.
한편<빨간 음식>은 가축을 도살하여 얻는 육류를 총칭하는 말이다. 가을에 통통하게 살찐 가축을 도살해 혹한기에 대비한다. 따라서 육식이 가장 풍성한 계절은 기본적으로 겨울이다. 몽골 초원민의 식탁은 이와 같이 여름을 정점으로 하는 <하얀 음식>과 겨울을 정점으로 하는 <빨간 음식>이라는 명료한 계절성을 갖는 두 가지 주식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모두가 가축이 가져다주는 큰 선물이다. 여름날 몽골 초원에서는 많은 유목민들이 유제품을 널빤지에 펴거나 가죽부대에 넣어 천막 위에서 햇볕에 말린다. 유제품을 말리기 위한 받침대를 마련하기도 하고, 새의 피해를 막기 위해 죽은 까치를 매단 경우도 여름철 몽골 초원에서는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 의복 문화 몽골은 복장문화는 '델'이라는 옷을 입고 '말가이'라는 모자를 쓰고, '고탈'이라는 신발을 신는다. 그리고 기타 장신구(헤트 호탁그와 허러끄 등)로 멋을 낸다. "델"이란 몽골인들의 전통의상을 말하며 평일이나 명절 때 입는다. 이것은 한 장으로 된 길고 헐렁헐렁한 가운식이며 '부쓰'라는 비단으로 된 폭 50~100㎝, 길이 4~5m로 된 띠로 허리 부분을 묶는다. 이 허리띠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말을 탈 때 격렬한 요동으로 인한 내장의 손상을 방지하는 기능적 역할도 하는 몽골족 의복문화의 특징이다. 그리고 델에는 주머니가 없어 이 부쓰를 묶어 줌으로써 상체가 주머니 역할을 한다. 몽골에 사는 각 소수민족은 고유한 델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색깔, 재단, 장식으로 구별된다.
- 인구 몽골의 인구는 급속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인구부족으로 경제발전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정부는 각종 인구증가정책을 시도하여 왔다. 1999년 현재 전체 인구는 약 238만 명이며, 최근 5년간의 평균 인구증가율은, 높은 영아 사망률 때문에 매우 낮은 편이다. 전체 인구 중에 농촌거주 인구의 비율은 41.4%로 1990년 이래 약 15%가 감소하였다.
- 몽골의 인구구조
인구증가율은 1989년 2.5%에서 경제사정을 반영하듯 감소하였다가 최근에 다시 회복하는 추세에 있어 1998년 1.4%를 기록하였다. 총인구중 노동인구는 약 35%이고, 시장경제 도입 이후 공식적인 실업율은 5.0%를 웃돌고 있다.
- 몽골의 인구증가율 및 실업율
몽골 인구 중 65%가 30세 미만이며, 45.2%가 16세 이하의 어린이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인구증가정책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EH한 남녀의 인구성비는 94년 현재 101.0대 100으로 남자가 조금 많다. 국민의 평균수명은 남자가 64.6세, 여자가 66.5세(2001년 현재)이다. 1960년 이후부터 90년까지 몽골의 연평균 자연인구증가(Natural increase)는 인구 천 명당 26.8 32.7명으로 비교적 높았으나 91년 이후 점차 낮아져 93년에는 13.6명을 기록하였다. 이는 인구 천 명당 자연 증가율(Crude Birth Rate)과 자연사망률(Crude Death Rate)이 점점 낮아지기 시작, 93년에는 각각 21.5와 7.9를 기록한데서 기인한다.
- 교육 제도 몽골은 초, 중, 고등학교 구분 없이 1학년에서 10학년까지 10년 동안 같은 건물 안에서 배운다. 그리고 시력에 따라 기술학교, 직업학교, 대학교에 들어간다. 현재 8개의 국립대학교와1990년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100여 개의 사립대학교가 난립되어 있다. 9월 1일에 새학년 새학기가 시작되고 6월이 졸업시즌이며 대학입시 기간이다. 교육여건과 시설의 낙후에도 불구 96%의 높은 문자 해독율을 보이고 있다.
몽골 교육의 목표는 91년 6월의 교육법에 따라 크게 변하였다. 91년 이전에는 75년 채택된 지도원리에 따라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배양, 실용적 직업훈련, 공산주의권 심화, 집단주의의 권장, 학교, 가정, 사회 간의 긴밀한 협동을 교육의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91년의 교육법에서는 공산주의권 심화등의 사상적인 내용을 삭제하고 변화하는 세계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인간상의 육성을 추가하였다. 특히 이 새 교육법에서는 ①교육행정조직의 민주적 개방적 운영, ②교육과 과학의 통합, ③공립학교 행 재정 지원의 탈 중앙집권화, ④학교 관리감독 권한의 지방분권화, ⑤대학 운영의 자율화, ⑥사립학교 설립권장 등과 같은 시장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원리 도입에 따른 새로운 원리들이 강조되고 있다.
5. 종 교
몽골혁명 이전까지는 라마(Lama)교가 성행하였다. 몽골불교의 전통이 된 파스파는 티벳어를 기준으로 하여 몽골 문자인 파스파문자를 제정하였다. 특히 청나라는 몽골 족의 사납고 씩씩한 기상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라마교를 정책적으로 적극 후원하였다. 이제 더 나아가 청조는 맏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모두 라마승이 되어야 한다는 법명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라마승의 급증이 인구감소의 주원인이라고 인식한 몽골정부는 1921년 혁명 후 반라마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라마승이 격감하였으며, 종교는 당과 정부의 관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최근 제정된 신헌법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신헌법 제 16조 제 15항)
현재 수도인 울란바토르에는 3개의 사원이 있다. 그 중 간단산(Gandan Monastery)만이 제 구실을 하여 약 100여명의 스님이 활동하고 있고, 부설 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나머지 두 곳인 초이진 라마(Choijin Lama Monastery)과 복트 게겐 사원(Bogd Gegeen Monastery)은 현재 박물관으로 TM이고 있다. 1970년 6월에는 간단 사원에서 아시아 불교회의(The Asian Buddhist Conference for Peace)가 개최되었다. 서부지역의 카자흐족은 수니계 회교를 믿고 있으며, 몽골 곳곳에는 아직도 샤머니즘(Shamanism)이 잔존하고 있다. 이중 '오보'라는 신앙이 있는데 한국의 성황당과 유사하다. 몽골 사람들은 대평원 곳곳의 길목에 돌을 쌓거나, 흙을 쌓고 버드나무를 세워놓은 '오보' 앞에서 병과 재난의 예방 및 가축의 번성을 위하여 기도한다. 최근 몽골의 라마교는 과거 70년간 마르크시즘의 지배를 딛고 일어나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 샤머니즘 몽골은 샤머니즘이 번성한 지역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중앙 아시아의 혹독한 생활 환경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샤머니즘에 젖게 만들었으며, 다양한 종교적 심성도 샤머니즘에 녹아들었다. 샤머니즘은 몽골 역사 초기부터 13세기 혹은 16세기까지 몽골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종교로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샤머니즘은 몽골인의 심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생활 곳곳에서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샤머니즘은 징기스칸 시절 즉 초기 몽골 제국 시절에는 국가 무당이 전쟁에 관하여 충고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였고 국가 종교로 인정되었다.
- 라마교 전체 인구의 90% 정도가 라마교를 믿고 있으며, 4%가 이슬람을 믿고 있고 있다. 라마교가 처음 몽골에 유입된 것은 1230년대 어거데이(Ogotai)때이다. 그 후 세조 쿠빌라이가 1253년 티벳을 점령했을 때, 당시 라마교의 동자 승려인 파스파을 초청하였고, 그가 세조의 존경을 얻어 라마교는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파스파는 티벳어를 기준으로 하여 몽골 문자의 기원이 되는 파 스파 문자를 제정하였다. 라마교가 본격적으로 번성한 것은 16세기 후반부터이다.
- 회교 회교는 카자흐족이 주로 믿는데 주로 몽골의 서부 지역에 분포하며 수니파 회교도이다. 울란바타르 시에도 7,000명 가량의 몽골 국적의 카자흐인들이 살고 있으며, 수도에서 30km 떨어진 날라이흐 시에도 회교도들이 4-5,000명 있으며, 회교 집회소가 있다. 카자흐인들은 생활속에서 체득된 습관적, 명목적 회교인이 대부분이고, 영적인 저항이나 신앙적 의식은 희박한 편이다. 최근 터기 모슬렘 협회에서 몽골 회교 선교를 위해 몽골에 모두 4개의 학교를 세우거나 합작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울란바타르에 1993년 몽골-터키 합작 중학교를 설립하였고, 1995년 가을에 기존의 몽골 건축 기술학교(제 4호 건축기술학교)를 합작하였으며, 북쪽 다르항 시와 서쪽 바양울기 아아막에서 학교를 인수하여 모슬렘 선교의 기반을 닦아가고 있다. 울란바타르에는 "몽골 모슬렘 협회"(Mongolian Moslem Society)가 결성되어 있으며, 회교도들과 카자흐 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6. 관광 정보 - 관광지 정보 * 자이산(승전 기념탑): 1965년에 세운 2차 대전 승전기념탑이 있는 UB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사진촬영의 최고지임.
* 국립공원 테를지:에텔바이스와 여러 가지 만발한 야생화로 어우러진 초원과 소나무 숲으로 덮혀져 있으며, 산 뒤쪽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계곡이 있고 이 계곡으로 흐르는 물은 헨티산맥에서 발원하는 몽골의 젖줄인 토올강에서 흐르고 있다 . 그 강의 주변은 수양버들로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 고비사막
* TAERELJ RESORT TAERELJ 여행자 캠프는 일 년 내내 운영된다.자동차나 혹은 장거리 버스를 이용해서 도착할 수 있다.울란바타르에서 80km 떨어진 곳에 있다.해발 1600미터에 있으며 Gorkhi의 외곽지역에 위치한 아름다운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 UNDUR DOV Undur Dov 는 울라바타르에서 차로 30분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Mansushiri 사원에서 멀지 않다.방문객들은 몽고식 원형주거 천막에 투숙할 수 있다.주변환경은 수목없는 대초원이며 승마를 쉽게 할 수 있다.유목민의 생활방식을 배울 수 있다.예를 들어 전통적인 음료수인 발효된 당나귀 우유도 맛볼 수 있다.이 장소는 등반과 도보의 장소로 매우 적합하다.여행교통수단은 차,말,자전거 혹은 도보이다
* AMARBAYASGALANT 사원 이 사원은 울란바타르에서 북쪽으로 360km 떨어진 곳으로 여행객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지프차로 도착할 수 있고 지방 열차와 오토바이가 합쳐진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도 있다.1727-1736년에 세워졌고 Kharkhorum에 있는 몽고에서 Erdend Zuu사원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원이다
* 축제: 나담 나담'이라는 말은 축제, 혹은 놀이라는 말이다. 원래 '나담'은 8월에 시행되던 것이었으나, 청의 지배에서 해방된 시기를 기념하여 지금의 7월로 옮겨 시행하고 있다. 현재 매년 7월 11일에서 13일까지 3일간 거행이 되고있다. 이 나담 축제에는 경마, 활쏘기, 몽골 씨름의 3종 경기가 거행이 된다. ① 씨름 몽골 씨름은 한국 씨름과 달리 옷을 입고 한다. 씨름복은 질긴 비단을 누벼 박아 튼튼하고 상의는 소매와 등짝만이 있고 가슴은 그냥 노출이 되고 단지 배에 묶는 끈이 하나 있다. 경기 방식은 제한된 공간이 없고, 시간은 무제한으로 상대를 넘어뜨려야 이기는 방식이다. 한국 씨름과는 달리 손을 땅에 짚는다고 지는 것은 아니다. 무릎, 팔꿈치, 엉덩이 등 이 땅에 닿으면 지게 된다. 총512명의 씨름선수가 참가하여 토너먼트 방식으로 동시다발적으로 경기를 한다. ② 경마 7월에 시작하는 나담의 경마에 참가하기 위해 지방의 좋은 말을 가진 사람들은 6초부터 조련을 시작한다. 어떤 말 주인은 조련에 자신이 없을 경우 인근에서 이름난 조련사를 부르기도 한다. 우승의 70%는 조련사에 달려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훈련된 말은 물이나 풀을 조금만 마시고 경마를 위해 몸 만들기에 들어간다. 서양의 경마와는 달리 몽골의 경마에 참가하는 말은 몸이 날씬하다. 이유는 사람에 비하여 장거리 달리기선수와 같다고 보면 된다. ③활쏘기 몽골의 활쏘기는 한국과 비슷하다. 남자 여자 공동으로 첨가한다. 과녁은 나무판이 아니라 원통으로 생긴 통가죽말이를 주먹만한 크기로 수직으로 여러 개 쌓아 놓으면 화살이 떨어져 과녁을 쓰러트리면 된다. 화살은 촉이 없는 고도리 화살이다.
- 교통정보 ① 버스 버스의 크기는 소형/중형/대형으로 나룰 수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 승합차인 소형버스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소형버스는 버스차장 있다는 것과 대형버스에는 전기차가 운행되고 있다. 요금체계는 기본 100T(투그릭)이고, 거리에 따라 추가요금을 받는다. 대부분 300T(투그릭) 정도면 울란바타르 시내의 대부분은 갈 수 있다. 울란바타르에서 타 지역으로의 이동은 기차 외에 시외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포장도로가 있는 가까운 곳은 승합차들이 운행을 하고 있고, 그 밖에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하는 장거리인 경우에는 러시아산 짚차나 승합차가 운행이 된다.
② 택시 택시의 기본 요금은 250T(투그릭)이다. 울란바타르 시내를 이동할 경우 대부분 1000T~1500T 정도의 비용이면 이용할 수가 있다. 밤 늦게 택시를 이용할 경우 언어 소통만 된다면 콜 택시를 부르는 것이 안전하고 편리하다. 그리고 간혹 노란색 택시와 똑같지만 위의 등이 안 달려 있는 차들이 보이곤 하는데, 그런 차들은 한때 영업용 택시에서 지금은 자가용으로 쓰이고 있는 차들이라고 한다. 몽골 택시 기사들은 3년간 운전을 하면 택시 회사로부터 자기가 몰던 택시를 받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를 고쳐서 타지 않기 때문에 영업용 택시와 구분하기가 어렵다. 또한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택시들이 한 눈에 봐도 한국 자동차임을 알 수 있다.
③ 기차 육로를 통해 중국과 러시아를 가고자 한다면 울란바타르 중심에서 7시 방향에 위치한 이 곳으로 와야 한다. 웅장함을 자랑하는 기차역의 외관에서 보듯 울란바타르역은 그 크기 면에서 우리나라의 서울역과 흡사하다. 역내 정차되어 있는 열차들의 대부분은 물류 수송 열차들이 많았는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몽골의 감안한다면, 기차는 몽골의 주요 운송 수단임을 알 수 있었다.
④ 국내항공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몽골에서 다른 관광지로의 이동을 위해선 국내 항공을 이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유명 관광지들이 울란바타르에서 멀고, 육로를 통해서 가자면 비용은 저렴하겠지만 일정이 너무 길어지고 피곤해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국내선을 이용하는 편이다. 비행기는 50인승, 20인승의 쌍발기들이 운행이 되고 있는데 요금은 몽골 내국인에 비해 외국인이 평균 2배 정도가 비싸다. 몽골은 국내선의 경우 목적지 마다 공항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국내 비행기장은 흙으로 다져놓은 활주로와 주변의 철조망이 전부이다.
⑤ 국제항공 몽골 내의 국제공항은 울란바타르에 있는 '보양트오하' 공항이 유일한 곳이다. 이 '보양트오하'공항과 최근 신축한 '헙트공항'이 그나마 아스팔트 활주로와 기본적인 공항부대 시설들을 갖춘 공항이라고 할 수 있다.
7. 선교 정보 몽골은 직접 선교가 불가능한 창의적 접근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법적으로도 외국인이 내국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교사역은 의료, 교육, 컴퓨터, 농업, 문화 사역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선교사들은 '선교사'라는 이름이 아니라, 교수, 의사, 농업 기술사, 기계 기술자, 컴퓨터 교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NGO비자나 교사비자, 학생비자, 직업비자를 발급 받아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공식적으로 선교사 비자가 있으나, 지금까지 단 3명만이 발급 받았으며, 비자연장 가능성이 희박하다.)
- 한국과의 관계 1990년 3월 양국간의 수교이후 몽골과 한국의 경제협력 10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종적, 언어적 유사성 및 경제구조의 상호보완성을 바탕으로 경제, 통상, 투자 등 실질 협력 관계를 증진시켜 왔다. 몽골은 한국을 자국경제발전의 모델로 삼아 한국과의 협력관계 확대를 중요한 외교목표로 설정하고,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쳤다.
양국은 무역협정,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여 무역과 투자여건 조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자유 시장경제체제 전환과정 중에 있는 몽골의 경제는 여건상 정상적인 교역이 어려움이 있으나 교역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 선교전략 몽골선교의 가능성은 기독교 신자의 대부분이 18세에서 24세의 청년층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몽골 선교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특별히 어린이 사역의 중요한 이유는 인구 증가정책으로 몽골인구 중 어린이 및 청소년의 비율이 극히 많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초기에 복음을 접한다면 몽골민족 복음화는 앞당겨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사역은 매우 필요로 하고 있다. 또한 몽골은 구소련의 시베리아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할 수 있다. 몽골을 기반으로 인근 몽골계 종족 혹은 시베리아 종족에게 선교사가 나가는 것은 물론, 현지인을 양육하여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몽골인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고 친근감을 표시한다. 특별히 한국교회에 맡겨진 몽골족 복음화는 시급하고도 중요한 선교과업이 될 것이다.
- 최근의 이슈 최근 몽골에서는 목사 안수의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얼마전 최초로 현지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7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에 대한 인정문제를 놓고 논의가 있었는데, 외국 목사 안수자에 대해서는 목사직을 인정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또 다른 문제는 이양의 문제이다. 최근에는 한국 사역자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지면서, 몽골인들 특유의 근성인 자립성과 독립성으로 인해 현지의 교회를 몽골인들에게 이양할 것을 강요하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이것은 한국 사역자들의 문제와 몽골인들의 국민성이 복합적이 얽혀있는 것이다.)
- 몽골 선교 시 주의사항 몽골에서 선교를 하기위해서는 우선 몽골인들의 특성을 잘 알아야한다. 첫 번째로 주의해야할 사항은 몽골 사역현장에서는 현지인들에게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화를 잘 내지 않으며, 이웃간에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고 해도 다음날은 서로 웃음으로 대한다. 둘째, 반드시 물건을 건네거나, 무엇인가를 상대와 주고받을 때는 반드시 오른손으로 주고받아야 한다.(꼭 지켜야 할 철칙이다.) 셋째, 각 도시마다 돌무더기가 있는 이것은 몽골인들의 무속신앙의 상징 물이다. 이것은일정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법칙이 있는데, 이것은 무시하고, 반대 방향으로 돈다거나, 이것은 회손 하는 행위는 위험하다. 넷째, 몽골은 구제역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선교 시 이러한 지역은 피해야 한다.(구제역 발생과 동시에 이러한 지역들은 폐쇄되기 때문에 그 지역에는 들어 갈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 몽골 선교 시 필요사항 몽골은 오즌층이 파괴되고, 지대가 높기 때문에 자외선이 강하다. 그래서 모자는 필수 품이며, 일교차가 심한 날씨이기 때문에 몸의 보온을 위한 장비를 잘 갖추어야한다.
- 몽골사역의 현장 연세친선병원 연세친선병원(YONSEI FRIENDSHIP HOSPITAL)은 몽골의 수도 올란바타르의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100 여년 전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연세 대학교의 개교 100 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측의 연세 의료원과 몽골 측의 올란바타르시 보건국과의 합작으로 1994년 7월에 세워졌다.
1994년 10월 3일,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 4 개과로 첫 진료를 시작한 이후 5 년 여 동안 치과, 비뇨기과, 재활의학과, 피부과 등이 추가로 개설되어, 현재는 50 여명의 몽골인 의료진과 부원장님, 정형외과 1 명, 내과 2 명, 일반외과 1 명, 소아과 1 명 이렇게 6 명의 한국인 의사가 근무하고 있다. 조금 낡은 2 층 건물에 입원실은 없이 외래 환자만 보고 있으며, 외래 환자 수는 하루 500 여명이 넘는다. 몽골이 90 년부터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이후 작은 사립병원만 있었는데, 이 연세친선병원이 사립병원의 모델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몽골은 책 구하기가 어려워 의사들도 최신 정보를 구하기 힘들고, 영어를 잘 못해서 영어로 된 책을 읽기 어렵고, 책을 구한다고 해 봐야 러시아 책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러시아 의학이 생각보다 뒤 떨어져 있어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몽골에 처음 한국 의사가 들어 왔을 때 몽골 사람들은 한국이 북한의 원조나 받고 살고 있는 나라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이 무시하고 거리감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이 많이 발전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환자들도 한국 의사한테 진료 받기를 더 원하고 있고 몽골 의사들도 한국 의사에 대해 마음이 많이 열려 있다고 한다. 요즈음은 병원 직원들도 아는 사람이 병원에 오면 한 방에 몽골 의사와 같이 있어도 꼭 한국 의사한테 보이려고 할 정도이다.
울란바타르 대학사역 울란바타르 대학교는 몽골에서 외국인이 세운 최초의 4년제 사립 대학, 최초의 미션스쿨이다. 93년 개교한 이래 11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올해 졸업생 포함), 대부분 한몽 합작 회사에 취직하거나 한국으로 유학하였고, 몽골 공공 기관에도 진출하고 있으며, 많은 학생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현지 교회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설립되었고 몽골에서 좋은 기독교 대학으로 복음을 전하며 기독교 지도자를 길러내는 것이 설립 목표이며, 교훈은 믿음, 소망, 사랑이며 기독교 초기 상태의 몽골에서 유일한 기독교 대학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몽골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데 중심적인 기관으로서 자리잡아 가고 있으며, 96년부터는 몽골 우수 15개 대학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어 "몽골 대학 협회(컨소시엄)"의 회원 대학이 되었다. 99년 5월에 실시한 몽골 대학 종합 평가에서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되어 인증서를 받음으로서 공인된 명문 대학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으며, 탁구, 정구, 태권도, 보디빌딩의 국가대표 선수를 재학생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농구팀이 몽골 사립대학 연맹전에서 두 차례 우승, 전국 대학 리그에서 3위를 차지한 경력이 있다. 연간 30,000 권의 책을 인쇄하는 대학 출판부를 운영하여 교과서, 사전뿐만 아니라 각종 기독교 서적, 성경 공부 교재 등을 편찬 인쇄하고 있고, 95년부터 시작된 사회교육원을 통해 3개월, 또는 1년간 단기 강좌를 실시하여 인재 양성 및 전도의 통로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 6년 동안의 평균 입시 경쟁률은 5대 1이며, 수업료는 국립종합대학과 비슷한 연간 300 $ 가량으로 대학 경상 운영비의 절반 가량을 현지에서 조달하고 있으며, 전교생의 30 %, 몽골 교수 직원의 40 %가 기독교인이며,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기독학생회가 2개 있고, 대학 운영에 참여하는 선교단체는 예장(통합) 총회선교부, 성서침례교회, UBF, IVF, 미국 침례교 등이 있다.
NGO 사역 울란바타르에 거리 어린이들이 많이 있고 특히 그들을 돌보는 의료시설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그 당시 약 4000명으로 추산) 그들을 돌보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정부의 많은 노력으로 이 아이들을 보호시설에 수용 돌보아 주고 있으나, 의료 혜택에서는 소외되어 있어서 NGO 사무실에 클리닉을 설치 일주일에 두 번(화,금) 거리아이들을 진료하고 필요에 따라 방문, 진료, 상담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양로원 순회진료, 그리고 교도소 순회진료 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국가에 알려지고 인정되어 금년(2000년) 1월 27일에는 국무총리가 주는 어린이 보호 특별 훈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토착 자립 교회 설립 기독교적 훌륭한 리더십은 지역교회에 기반을 두고 사회 각 계층에 영향을 미치는 리더십으로 지역 교회를 성실히 섬기는 사람들을 말한다. 토착 교회의 설립은 선교사가 직접 관여하기 보다는 궁극적으로 현지 리더들이 이끌어 나가는 교회를 세우고 현지 리더들을 지원하는 일을 통해 교회를 개척한다.
신학교육 사역 세계적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깊이 인식되는 분야가 신학교육 분야이다. 이것은 평신도가 아닌, 목회자의 전문인 선교 사역 분야로서 서구 선교사들은 이미 그 중요성을 깨닫고 전 세계 선교지의 신학교에 많이 진출하고 있다. 한국 선교사도 이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가령, 몽골의 경우도 얼마 안가 신학교의 모든 교수진이 박사 학위 소지자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이 분야에 구체적인 소명을 받고 실력을 갖춰 선교지로 나오는 패기 있는 소장 신학자 선교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선교지에서도 구멍가게 식으로 선교사 개인이나 교단에 의하여 운영되는 군소 신학교가 과감히 통폐합되어, 선교사를 위한 신학교가 아닌 선교지를 위한 명문 신학교들이 설립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국제 감각, 기본적인 외국어 구사 능력, 연합의 의지, 실력 등을 갖춘 신진 선교사들이 시급히 요청된다.
성서 번역 및 배포 사역 몽골은 성서라는 측면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 복을 받기도 하였고, 그 복이 변하여 화가 되기도 한 나라이다. 몽골은 1989년 몽골의 민주화 과정을 통하여 1990년 선교의 문이 열릴 때까지 기독교인이 전무한 나라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가 중단된 기간 동안에 현재 몽골에서 사용되는 러시아식 키릴 문자로 된 현대 몽골어 성경이 번역 완료되었고, 개방과 더불어 선교가 시작될 때 그 성경을 사용할 수 있었다. 불신자를 염두에 두고 쉽게 번역된 성경은 몽골 선교 초기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선교 역사가 흐르면서 교회 내적인 요구 즉 성경 공부와 예전 등에 사용될 성경이 필요하게 되자,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부터, 성경 번역 원칙, 특히 용어의 문제가 대두되어 갈등의 요지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여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그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일부 선교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몽골 교인들은 문제를 파악한 채, 별 문제없이 성경과 용어를 지혜롭게 선별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일단 갈등 국면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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