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과 제사 문제로 갈등이 심합니다. 어떻게 하나요?
이것은 제사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문제'라고 하는 이 주제는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복잡합니다. 이 문제를 안고 있는 개개인의 형편에 따라서 대처하는 방법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완전한 해결책을 찾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질문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일까요?" 하고 물으셨는데 사실 우리가 찾아내고자 하는 방법 자체도 지혜로운 것이어야 하겠거니와 그 방법을 각자의 상황에 적용하는 태도도 지혜로워야 하리라고 봅니다.
1) 제사에 대한 이해
제사문제를 다루려면 먼저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제사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사의 기원과 역사와 변천과 방법들을 낱낱이 알아야 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크리스천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는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사는 다양한 민족과 그들의 문화에 따라서 제사의 대상과 방법도 다릅니다. 죽은 조상에게만 아니라 산 종손을 모셔놓고 그에게 제사를 한 예도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익숙한 한국인 전통의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대개는 제주가 생전에 뵈었던 할아버지 대까지는 개별적으로 기일에 따라서 제사하고 그 윗대의 조상에 관해서는 명절 때나 혹은 어느 날을 택하여 단체로 모아서 합니다.
제사의 방법도 초기에는 단순했으나 점차 발달해서 아주 복잡해졌다가 요즘에 와서는 다시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개념은 무덤에 계신 선조의 영혼을 불러 위패를 모신 곳, 혹은 지방을 써붙인 곳에 모시고 음식을 차려 드시게 한 후 다시 본곳으로 돌려 보내드리는 절차를 밟습니다. 초혼(招魂: 혼을 부르는 일)을 할 때는 대문을 활짝 열고 빨랫줄을 걷고 방문을 열어드립니다. 생존해 계실 대와 같은 개념으로 영훈을 맞이합니다.
만일 유고의 제례법을 고수하시는 분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당혹해 하실지도 모르겠으나 정직하게 관찰을 하면 선조의 영혼에 대한 그분들의 개념에 상당한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전통적으로 위패나 지방은 한문으로 적게 되어 있습니다. 고인이 생존했을 때 한문을 터득하지 못했어도 한문으로 적는 것을 예(禮)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후손들 중에서 한문을 알지 못하거나 주위에 한문으로 써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한글로 썼습니다. 고인이 한글마저도 알지 못하는 집안에서는 지방 없이 제사한 예도 있습니다.
그리고, 초혼을 할 때는 대문을 열고 빨랫줄을 거두고 방문을 열어드려야 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여지는 또 하나의 모순점은 만일 영혼이 공간을 초월하지 못하고 산 사람처럼 걸어서 문을 열어야만 다닐 수 있고, 빨랫줄을 피해 다녀야 한다면 무덤에서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까?
또한 제사 음식을 종류에 따라 위치를 정해서 놓고 조상의 영혼을 극진히 대접해드린다며 제주가 그 앞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여기저기 골고루 옮겨놓으며 많이 드시라고 권합니다. 술도 격식에 맞춰 따라올립니다. 그런 뒤에 잠시 방안의 불을 꺼놓고 마음껏 드실 시간을 드립니다. 그후 다시 묘지로 전송을 하고는 지방을 불사릅니다.
제사 음식과 제주가 입는 제목은 빈부의 차이가 많았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음식 대신 종이에 각종 음식의 이름만 적어놓고 제사한 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음식을 만들 시간이 없어 경제적으로 종이에 돈이라고 써서 올려놓고 제사한 예도 있었다고 합니다. 돈이면 무엇이나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겠죠.
만일 제사를 거른다거나 제물이 소홀하다거나 제사 시간이 늦어진다거나 하면 조상의 영혼이 얼마나 시장하실까 하는 생각에 죄송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또한 조상의 영혼은 어두운 밤 시간에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새벽 미명 전에 그 영혼들을 묘소로 전송하엿습니다. 날이 새면 밝은 빛을 인하여 거처로 돌아가는 데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상의 영혼은 어두움에 속하여 계신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2) 제사의 동기
제사의 기본적인 동기는 자기를 낳아 길러 주신 부모와 조상에 대한 감사와 효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문제는 효도하는 태도와 방법입니다. 전통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자손들이 빠짐없이 모이고 제사상을 정성껏 풍성하게 차리고 격식에 맞추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최대의 감사요, 효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영혼이 처한 실제 입장에서보다는 제사드리는 자손의 입장에서 이것이 옳겠거니 하고 짐작해서 하는 것입니다.
제사의 두 번째 동기는, 제사드리는 자손들 자신이 복을 받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아들 잘 낳고, 재물이 늘고, 하는 일이 형통하며, 몸이 건강하고, 집안 번성하고, 악귀를 물리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상의 영혼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명당을 찾아 장례를 치르고 성묘를 하며 때마다 예를 갖추어 정성껏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세 번째 동기는 가족과 사업에 재액이 임하는 것을 피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만일 자손이 조상의 묘소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든가, 해마다 기일과 절기에 제사상을 정성껏 준비하여 모시지 않는다든가, 조상을 탓한다든가 해서 그 영혼의 노여움을 사면 자손에게 화가 미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재액을 받지 않고자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네 번째 동기는 뿌리 깊은 관습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새롭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면서도 지금까지 오랜 세월 다져온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가 전하여 준 제사를 자식이 이어받아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통을 바꾼다는 것은 이목을 의식한 체면과 수치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남들이 다 변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기도 슬그머니 변화의 길을 찾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그들은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3) 제사의 기능
이제 제사의 기능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제사는 첫째로 집안의 가풍을 유지하는 기능을 합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모여서 어른의 교훈을 받아 그 가문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가풍을 배우고 유지해 나아갑니다. 선조의 역사를 배우고, 훌륭했던 조상들을 기리고, 가훈을 마음에 새깁니다. 어른 공경하는 효도와 인사법을 배우고 서열을 확인하며 질서를 유지합니다.
둘째로, 가문의 결속을 유지하는 기능을 합니다. 제사 때 일가가 종손의 집에 모이는 것 자체가 동네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이고, 제사음식을 돌리는 풍습이 이웃에게 그 가문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한국인들은 자기 가문이 번성한 것을 이웃들이 알아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 왔습니다.
셋째로, 사방에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종손의 동네에 와서 이웃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제사음식을 돌려 함께 나누는 관습이 순수한 동기에서 지켜질 때는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발전시키고 서로 간에 화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의 도시생활 속에서 핵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전의 농촌 생활에서 보던 제사 풍습이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아직도 전통적인 제사를 고집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4) 조상의 영혼에 대한 전통적 개념
조상의 영혼에 대한 한국인의 전통적인 개념은 무속종교와 불교와 그밖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관찰됩니다. 사람마다 이해의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전도의 현장에서 일반적으로 접하게 되는 견해는 사람이 죽으면 그 후에 영혼이 남고, 그 영혼은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과 그 영혼도 산 사람처럼 편안히 쉴 처소와 먹을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 등입니다.
5) 크리스천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
크리스천이 한국의 전통적 개념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는 그 제사 자체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영혼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행 14:8-18)
사람의 영혼은 죽는 즉시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 안에서 잠든 영혼은 천국에 가고, 믿지 않고 죽은 영혼은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천국과 지옥에 간 영혼은 자기 마음대로 천국을 떠나 지옥으로 가거나, 지옥을 떠나 천국으로 가거나, 이 세상에 돌아와 여기저기 다닐 수가 없거니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눅 16:19-31).
천국에 간 영혼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 위로와 평안을 얻습니다(계 14:13, 21:1-7).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는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땅 위의 무엇을 가지고도 그 이상 더한 기븜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대문에 우리는 영혼을 위해 이 세상의 어떤 음식도 대접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지옥에 간 영혼은 손가락 끝의 물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으며 불꽃 가운데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눅 16:23-26).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무슨 노력을 기울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한번 죽고 나면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히 9:27). 제사를 아무리 많이 드려도, 제사상을 아무리 잘 차려도, 자손들이 제사에 아무리 많이 모여도, 그 어떤 지성을 드려도 이미 죽은 영혼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속자이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제사하게 되어 있습니다(출 20:3-6).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유일의 영원한 제물로 단번에 받으셨기 때문에 다시 다른 제물을 원치 아니하십니다(히 7:26-28). 구약 시대의 모든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제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제사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한국인의 전통적 제사는 성경이 말씀하는 제사와는 다릅니다. 제사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조상의 영혼입니다. 제사의 대상이 잘못되었을 분만 아니라 제사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림으로써 조상의 영혼이 기뻐하여 자손에게 복을 주고 재액이 임하지 않게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조상의 영혼이 묘지를 근거로 활동한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조상의 영혼이 주려서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도 잘못되었습니다.
6) 크리스천이 당하는 제사문제
이상과 같은 이유로 크리스천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 데 대하여 전통적 제사를 고집하는 가문의 가족들은 여러 말로 압력을 가하고 핍박을 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 가운데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상놈이다"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불효다" "너는 조상도 모르느냐?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조상의 노여움을 산다"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화가 미친다"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집안이 망한다"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조상의 영혼이 배고 고파 떠돌아다닌다" 등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에 제사가 정착된 것은 신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중국 주자의 영향이 컸습니다. 제사의 절차와 모양도 점점 복잡해졌습니다. 장례법도 남자가 죽으면 3년상을 치르고, 여자가 죽으면 1년상만 치르다가 근래에 와서는 남녀 모두 1년으로 줄더니 6개월이 되고, 3개월이 되었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더 줄여서 삼우제와 사십구제로 끝내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제사법의 변천을 보면서 우리는 또 하나의 모순을 발견합니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1392년에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면서 장려한 것이 중국의 풍습인 제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시대에 죽은 영혼들은 제사 없이 어떻게 지냈을까요? 영혼들의 상태가 시대마다 변했을까요? 제삿밥이 없으면 영혼이 주린다는 생각이 옳다면 남자는 여자보다 더 오래 더 많이 먹어야 되고 여자는 그보다 덜 먹어도 된다는 것인가요? 또 최근처럼 장례기간이 짧아진 경우에는 어찌된다는 말인가요? 현재 우리가 아는 전통적인 제사는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지내온 것이 아닌 중국의 풍습이었습니다. "제사를 안 드리는 사람이 상놈이라면 제사를 드리는 양반은 되놈이다"라고 한 손봉호 박사의 지적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7) 제사문제를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한 제안
이제 크리스천이 제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제사 자체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족이라면 제사에 대한 크리스천의 입장을 정중하게 설명하여 제사를 드리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득을 할 때는 제사를 전면 부정하는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차근차근 전통의 개념과 성경의 개념을 비교하여 설명하십시오 .예를 들어 전통의 제사는 돌아가신 영혼에게 효도하려는 것이나 성경은 살아계신 어른들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한다는 것을 확실히 일러주십시오.
제사의 개념과 대상과 방법은 받아들일 수 없으나 제사의 기능 중에서 집안 식구들의 친교를 통한 결속과 우애, 이웃과의 화목을 추구하는 일들은 성경이 훨씬 더 차원이 높게 적극적으로 장려한다는 점을 지적하십시오.
집안이 잘되고 가문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조상의 영혼에게 빌 것이 아니라 창조주요 구속주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시요 영원히 살아계셔서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설득하십시오.
둘째로, 말로 설득하는 동시에 참고서적들을 읽어보도록 권할 수 있을 것입니다(<한국교회와 제사문제(이종윤, 도서출판 엠마오)>, <기독교와 관혼상제(박근원, 전망사)>). 책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을 놓고 대화를 나눈다면 좀더 구체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말로나 글로 설득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절이나 생신, 결혼기념일, 결혼식 등 식구들이 모이는 특별한 날에 살아계신 집안 어른들에게 정성껏 효도를 하여 평소에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십시오.
제사문제를 빼놓고는 나무랄 데가 없는 며느리라는 인식을 갖게 해드리십시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어려운 동기들을 돌아보고 사랑을 베푸는 일들을 솔선하여 하십시오. 영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대범하게 일해 나가십시오.
남편과 자녀와 집안 어른들과 친척들에 대한 책임을 즐겁게 이행해 나가십시오. 특히 사업에 어려움을 당하거나, 배우자를 잃거나, 병석에 누웠을 때 최선을 다하여 도와 드리십시오. 제사 때에도 가서 집안 가족들을 만나십시오. 제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식구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교제를 나누십시오. 눈총을 받고 미움을 받아도 개의치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십시오.
주님을 모시고 사는 크리스천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과 말과 행실로 확실하게 보여 주십시오. 머지 않아 신뢰 관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제사문제의 틈을 뚫고 그들의 심령에 파고 들어갈 기회를 주님이 주실 것입니다.
넷째로, 집안 식구들 가운데 설득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지목하여 기도하면서 기회가 되면 전도훈련을 받은 크리스천을 청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주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구가 전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전도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과거에 제사를 철저히 드린 경험이 있는 전도자라면 대화가 좀더 잘 통할 것입니다.
다섯째로, 자기 집안을 믿음 위에 세워 일으키는 것이 제사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녀를 신앙적으로 잘 길러내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하십시오. 집안 살림을 알뜰이 가꾸십시오. 재정적으로 윤택한 살림을 일구십시오. 그리하여 도움을 받는 가족이 아니라 도와주는 가족으로 일어서십시오. 그러면 전도가 훨씬 더 설득력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로, 이 질문을 주신 성도님 자신이 전도 훈련을 받아 집안 식구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전도폭발 훈련을 받을 것을 권합니다. 다양한 반대 의견을 처리하고 지혜롭게 복음을 제시할 실력을 갖춘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나오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성경의 약속을 붙잡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온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할 그 날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실 때 주님의 약속대로 응답을 받아 제사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신합니다.
아멘.
글쓴이: 김만풍목사 (총신대 대학원, Boston대학교 신학대학원, 고든-콘웰 신학대학원 졸업. 국제전도폭발 북미한인본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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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제사문제 |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때, 그것은 진공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는 이미 여러 가지 종교들이 있었고, 그 영향 속에서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전파되고 성장하면서, 갈등과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 왔습니다. 그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가 바로 제사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선교초기의 마펫 선교사는 원입교인들에게 우상숭배와 조상제사 폐지, 성수주일, 부모 공경, 축첩 금지 등을 가르쳤고, 이를 세례교인이 되는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초창기 기독교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고, 순교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마다 명절 때만 되면, 화목해야 할 가정이 제사문제로 인해서 기독교인과 불신자 가족 간에 적지 않은 마찰을 빚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상담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사례1 ..예수를 믿다보니 제사와 추도예배의 중간에 서서 어떻게 조상을 모셔야 할지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다가올 추석에는 어떻게 해야 될지...? 그래서 목사님, 집사님,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님등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자문을 구했씁니다만 명확한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이런 문제로 인해 늘 언짢아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며칠 전부터 그런 제사에 대한 부담이 없는 카톨릭으로 개종했으면 하는 눈치셨습니다. 무조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뻔한 일이구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례2 ..저는 삼형제 중 둘째로서 집안에서는 저만 유일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제사나 명절만 되면 곤란을 겪습니다. 첫째와 막내가 절을 하는데 둘째인 제가 절을 하지 않자 ..넌 자식이 아니냐?..며 집안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제사 때만 되면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의 강요 때문에 고통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이런 고민은 두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명절과 제사 때만 되면 큰 부담감으로 찾아보는 반갑지 않은 손님임에 분명합니다. 낙원프레이즈 10월호에서는 다가오는 추석 명절을 앞두고, 제사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에게 제사의 기원에 대해서 소개하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제사관, 크리스천들이 제사를 지내 ㄹ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본 후에, 마지막으로 그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제사의 유래에 대해서
중국 송(宋) 나라 때 유교 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가 처음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것이 유교 철학의 한 덕목으로 정착되었습니다.(이것을 체계화한 학문이 성리학입니다.) 이러한 제사는 유교의 기본적인 덕목 가운데 하나인 ‘효(孝)’에서 비롯된 것인데, ‘효’는 ‘예(禮)’와 ‘제사(祭祀)’를 통하여 실천되는 덕목이었습니다. 중국의 왕들과 제상들은 자기 가문을 자랑하기 위해서 이 유교덕목을 받아들였고, 평민들도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유교 특히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옴에 따라 이 제사제도도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제사제도는 조선 정종 때까지는 백성들에게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하다가, 왕가에서 덕행교육의 일환으로 적극 장려하는 바람에 수많은 폐단을 안고서도 민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
2. 천주교와 개신교의 제사관
천주교는 1715년과 1742년 두 번에 걸쳐서 교황 베네딕투스 14세가 교서를 발표했는데 특히 1742년에 “유교적 조상 숭배는 성경의 교훈과 어긋나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에서 용납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1939년 12월 8일에 교황 피우스 12세는 교서를 통해서 유교에서 조상숭배 하는 것은 하나의 시민적 의식일 뿐 종교적인 의식은 아니라고 선언하면서 제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와 풍습을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65년에 열렸던 제 2차 바티칸 공회에서도 이와 같은 전통적인 제사의식을 용납하는 태도를 취하고, 연옥사상에 근거해서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죽은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카톨릭 교회는 시신이나 사진 앞에서 절하는 것, 향을 피우는 것, 그리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다 허용합니다. 하지만, 개신 교회는 지난 백여 년 동안 ‘제사는 우상숭배’임을 굳게 믿고 완강하게 거절해 옴으로 성경말씀을 따르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1891년-1897년에 세례를 받을 서약하는 일곱 가지 조목이 있었는데, 그 첫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영들을 숭배하는 것과 높이는 것을 미워하시므로 조상의 영을 숭배하는 것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결단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제사문제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가 성립된 시기에 공의회 결정으로 “엄숙한 장례식만 하고, 조상 숭배의 제사는 지내지 말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없애는 것이 아닌 추도식(예배)이라는 형식으로 권장해서 1915년에 모범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계의 제사논쟁은 찬반논쟁으로 팽팽한 대립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부 진보적인 개신교 지도자들은 제사가 우상숭배가 아니요, 조상에 대한 효심의 발로요, 추모의 한 방식이므로 기독교인이 조상 제사를 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또 한편 보수적 개신교에서는 조상 제사는 귀신을 모시는 것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십계명에 전적으로 위배가 되며, 하나님이 금하신 우상숭배임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그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크리스천이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이유
[1] 성경이 우상숭배의 행위를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비성경적인 전통이나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제사에는 본래 신주(神主)라는 것이 있는데, 이 신주는 분명히 우상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 절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때 우리의 마음은 복을 빌거나 저주를 면해보려는 마음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의 영적인 죄임에 분명합니다. 바로 십계명 중 1계명과 2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제 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이고, 제 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3-5)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면 조상을 섬긴다는 미명하에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섬기고 경배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고전11:26) 명절에 가족과 일가친지들이 모인다면 그들 중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을 구령한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를 참으로 공경하기 원한다면 그들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 구령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참된 효의 모습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2] 산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제사는 산 자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기념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산 자가 중요하겠습니까? 아니면 죽은 자가 중요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산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관점으로 제 아무리 제사가 효도의 한 본이 된다고 해도 돌아가신 뒤에 제사 한번 지내는 것보다 제사상을 차릴 비용으로 살아계신 부모님께 보약 한첩 지어 드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부모님은 우리를 항상 걱정해 주시고, 매일 생각해 주시며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은 부모님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성리학이 고려말엽부터 전래되면서 조상숭배사상이 생겨났고, 이어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때 성리학을 통치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제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종교는 불교였기 때문에 유교사상에 근거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불교에서도 제사를 지내지만, 사실 정통적인 불교국가는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에 대한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효도’라는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비난을 받는데, 제사가 곧 효도라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효자가 한 사람도 없었단 말입니까? 기독교는 절대로 부모 공경의 효(孝)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살아계신 부모님께 순종하며(엡6:1), 부모를 경외할 것(레19:3)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죽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와 미신으로 정죄하며, 반면에 살아계신 부모님들께는 함을 다하여 효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죽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절대로 효나 불효의 판단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살아있는 부모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네 아비와 네 어미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준 땅에서 네 날들이 길 것이라.”(출20:12), “살아있는 모든 자에게 참여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나니, 이는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전9:4)
[3] 제사는 마귀들과 교제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면 죽은 조상들이 와서 차려 놓은 음식을 먹고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은 한번 죽으면 이 세상에 다시는 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죽으면 즉시 하늘나라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눅16:19-31) 그 대신 제사지낼 때 오는 것은 마귀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노라.”(고전10:20) 이 말씀에 따르면 제사를 지낼 때 조상들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죄짓게 만들고 병을 주며, 살인하게 만들고, 도둑질하게 만들고, 음란하게 만드는 마귀가 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를 자주 지내는 사람들은 마귀와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남을 참소하게 되고(계12:10), 대적하며(벧전5:8), 약해지고(요일2:13), 거짓말하게 되고(요8:44), 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제사를 지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와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적절한 대안, 추도예배
여러 가지 문화상황에 처해있는 크리스천들은 복음이 문화에 따라 변질되지 않도록 그 문화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변화시켜야 합니다. 문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성령의 능력에 의해 변화되어야 합니다. 제사문제에 있어서도 안 믿는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접촉점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적절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추도예배(追悼禮拜)입니다. 추도예배는 죽은 조상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 가정과 친족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부모님기억하며 드리는 예배입니다. 사실상 추모예배 또한 성경적 근거가 약하나 한국의 독특한 상황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 필요한 예배형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 예수를 믿고 처음 돌아온 가정에서는 추도일이 되면 교역자가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들은 조상숭배를 하다가 갑자기 중단하면 조상이 저주를 내려 가정에 우화가 생길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안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오래 믿고 신앙이 제대로 잡힌 가정에서는 가장이 간단하게 자녀들과 친지들을 불러놓고 예배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반은 예수 믿고, 반은 믿지 않는 가정에서는 한쪽은 제사를 지내려 하고, 한쪽은 안 된다고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상대방이 나의 신앙을 시험하려고 고의적으로 이 문제를 들고 나올 때는 한 치도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불신 가족이 악의에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제사를 지내야 되겠다고 끝까지 고집한다면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조금 더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제사행위에 동조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추도예배를 드릴 때도 가족이 먹기 위한 상은 좋지만, 죽은 자를 위하여 상을 차리는 것이나, 지방을 붙이거나 절을 해서도 안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기독교 진리만이 영원한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고, 이 진리의 왜곡에는 절대로 굴종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명절 때에만 부모를 찾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믿지 않는 부모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도록 물심양면으로 사랑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잘못된 조상공경의 태도를 버리고 성경적인 바른 조상공경의 자세를 견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른들을 향한 바른 공경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보이며, 온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고,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아 누리는 복된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최준우 목사
대한예수교 장로회 낙원 제일교회 낙원프레이즈 제 215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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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술·담배·제사와 기독교인의 이중성 역사적 관점, 현대적 시각 조명
술과 담배는 기독교에서 금하고 있는 식품? 언뜻 듣기에도 기독교와 술, 담배는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비교적 술과 담배에 자유로운 자유주의 신학이 널리 퍼진 오늘날에도 술과 담배 때문에 신앙적 갈등을 겪는 성도들이 비일비재하고 신앙인이 술과 담배를 하면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기 일쑤다. 술, 담배와 함께 한국교회 신자들이 갈등하고 있는 또하나의 문제는 제사 부분이다. 제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현재까지 명료하지 않은 상태이다. ‘신앙심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술과 담배는 끊어진다’는 목회자 혹은 신자들의 말처럼 신앙심이 깊어지면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제사는 우상숭배로 기독교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신앙의 시작에 걸림돌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는 아직 술과 담배, 그리고 제사문제에 자유롭지 못하다. 떳떳하지 못한 기독교인의 술과 담배, 그리고 정립되지 못한 제사문제에 대한 역사적 관점과 현대적 시각에서 짚어본다.
한국교회의 숙제 `술·담배'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사실 술과 담배의 부정적인 시각은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갖게됐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술과 담배를 금한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사를 정리하다보면 성탄절에 술을 빚어서 교인들과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나 예배 전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를 마치고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에게 술과 담배를 금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중국에서는 선교사들이 아편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금지했으나 술과 담배 문제는 관대하게 처리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직접 들어온 수보다 중국을 거쳐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같은 활동은 신앙적 내용보다는 사회 계몽적인 차원이 강했다.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사회 계몽적인 운동이었다고만은 볼 수 없다. 한국실천신학연구소 박세환 박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대부분 대중설교가로 알려진 무디나 R. A. 토레이 또는 조지 휫필드의 영향을 받은 보수 청교도주의자들이었다. 당시 보수 청교도주의자들은 신앙운동으로 내면적인 경건 운동을 펼쳤으며 음주, 금연은 물론 껌을 씹는 것이나 연극을 보는 것까지 금할 정도로 삶에 직접적으로 필요 없는 것들에 대해 철저히 금하고 있었다.” 당시 금주, 금연 운동은 부정적 사회상과 박세환 박사의 말처럼 신앙적인 면을 정화하기 위한 모두를 내포한 운동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선교사들에 의해 금주, 금연 운동이 펼쳐지자 금주, 금연 운동은 각 교단별로 확대되어 진행됐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펼쳤으며 같은 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 선교회에서는 교회의 금주 입장을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또한 장로교도 비슷한 시기에 금주, 금연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금주, 금연을 강조했던 단적인 예가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음주자를 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새문안교회는 음주 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는데,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 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設)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고 실제 이 문제로 인해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됐다. 그러기에 한국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제사 중지, 노름 및 도박의 금지, 축첩(蓄妾) 금지 등과 함께 금주 단연은 세례 받을 때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그러나 당초 대사회적 운동과 신앙적인 부분이 하나가 되어 시작되었던 금주, 금연 운동은 어느새 신앙적인 척도로 자리잡아왔다. 최근은 담배와 음주에 대한 폐해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속속히 드러나면서 점차 목소리가 줄고 있긴 하지만 술, 담배 금지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발도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얼마전 A 교회 황 모 장로는 술, 담배로 인해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한국에 방문한 한 미국인 목사님을 접대하던 중 미국인 목사님이 아무 거리낌없이 담배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그 뒤로 황 모 장로는 자신이 배워온 신앙관으로서는 담배는 분명히 금지되어 있는데 꽤 저명한 목사님이 담배를 피는 모습을 봤으니 갈등할 만도 하다. 어떤 이는 술, 담배를 금했던 당시의 상황과 현재는 경제적으로나 사회계몽적인 차원에서도 현저히 틀리고 술과 담배가 가지고 있는 사회화의 기능, 즉 술 담배를 통하여 스트레스를 풀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나아가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에 대한 긍정적 면은 어떻게 해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기독교에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술과 담배는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황 모 장로나 질문을 던진 사람의 문제는 술, 담배에 대한 신앙적 해석의 모호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박세환 박사는 “기독교의 전통주의가 자유주의 신학론 때문에 변질된 결과”라고 말한다. 본지에서 창간 25주년을 기념해 기독인들을 대상으로 ‘기독인의 술, 담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설문조사 실시, 총 179명 중 126명(70.3%)이 반대의사를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과 담배는 이미 알게 모르게 기독인들 사이에 넓게 퍼져 있다. 이 설문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의 많은 수가 술, 담배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많이 보편화되어 있음에도 거부를 표하는 것은 술, 담배에 대해 그만큼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직장사역연구소 윤여길 목사는 이같은 모습이 사회적 관점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기독교에서 술, 담배를 거부한 것은 하나의 문화였지만 지금은 윤리화 되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이 ‘기독교인은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관점이 스스로를 억압해 자꾸 숨게 되는 것이다.” 또 이러다 보니 교회에서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사회에 나가서는 술, 담배에 자유로운 사람으로 인식되어 ‘신앙의 이중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아직도 숨어서 담배 피고, 술마시는 기독교인들은 어쨌든 마음이 복잡하다. 일반적인 통념대로 예수 믿고 신앙이 깊어지면 술, 담배는 자연스럽게 끊을 수 있단 말인가. 극단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술, 담배 하는 사람은 신앙이 없단 말인가.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답변을 자신 있게 할 수는 없다. 이제 술과 담배를 교리로 정하는 시대는 어느 정도 탈피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술과 담배가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어느 목회자도 술, 담배에 관한한 쉽게 말하지는 못한다. 결국 기독교인들의 술, 담배문제는 `신앙의 이중성'이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에 대한 명확한 정립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가 돌출했다면 이제 한국교회가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할 때가 된 것이다.
제사문제는 어떠한가? 제사의 문제 역시 처음 시작은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의 반대에서 비롯되었다. 제사문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술과 담배와는 달리 처음부터 거부했다. 1883년 서상윤이 만주에서 세례받고 돌아온 이후 1891∼1897년까지 세례자의 서약 일곱가지중에 제사를 거부하는 약속을 하게 했다. 때문에 당시에 신앙을 택하기 위해서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당시 제사의 문제가 거론된 이유로는 제사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잘 모시면 자손이 복을 받고, 재액이나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동기가 있다. 죽은 자를 대상으로한 신앙이요,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예배가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고 이는 십계명중 1계명 `다른 신을 섬기지말라', 2계명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에 어긋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제사문제로 비교가 되는 곳이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지금도 제사를 허용하는데 사실 가톨릭 역시 처음에는 제사를 반대했다. 처음 가톨릭은 유교의 제사에 대해 비판적 입장 취했고 신자들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자, 전라도의 윤지충, 권상연 등이 순교 당하는 신해박해 사건이 1791년에 발생하는 등 강경한 입장있었다. 그러나 1939년 로마교황청이 제사 문제에 대해 새로운 입장을 표명 했고 신사참배나 조상숭배의식은 종교의미가 아니라 시민적 의식(civil rite)이라고 교황 피우스12세가 교서를 내린 이후 제사가 허용됐다. 물론 가톨릭 내부에서도 제사에 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한다. 본지에서 조사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총 179명 중 135명(75.4%)이 제사 참여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반면 제사를 드려도 된다고 응답한 수가 29명(16.2%)에 불과해 아직까지 제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결과는 대체로 한국교회가 제사문제에 대해 우상숭배로 강하게 교육해 왔고 십계명에 우상숭배에 대해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제사 문제에 관해서 색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요즈음 와서는 제사에 대해 미신적인 요소보다도 부모나 조상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속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겨났다. 즉 의무로써가 아니라 가정의 평화,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것이고, 나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학적 결론이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제2계명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제사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다. 제사문제에 대해 철저히 거부하는 이유로는 제사가 철학적으로 과거지향적인 순환론적 사고론이라는 것이다. 또 대부분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을 근거로 죽음 후 영과 육이 분리되었을 때, 산자와 죽은 자의 대화는 두절된 것으로 설명하고 제사를 산자와 죽은자의 만남으로 여기는 자체가 신앙적 모순이라고 말한다. 현재 기독교는 제사대신 추도예배나 추모예배를 드린다. 사실 추도예배는 1904년 중국의 중앙선교협의회가 조상숭배와 기독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상제사 대신 추도식을 가진 것이 기원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후에도 `무당적 요소'나 `기복신앙적 요소'가 있다고 해서 많은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것 같이 현재는 기독교는 대부분 추모·추도예배를 권장한다. 추모·추도예배가 제사를 못드리게 하는 대신 만들어진 것이지만 제사처럼 특별한 형식은 없다. 때문에 형식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그런데로 경동교회가 좋은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경동교회에서 제시하는 추모예식은 기본적으로 검소하면서도 정성을 다하되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상제례 특히 추모제(기제사) 때에 고인의 사진이 없어 추모제 의식에서 “중심(中心)의 상징”이 필요한 경우에는 위패나 지방을 써 붙이지 아니하고 그 대신 “OOO씨 제 O주기 추모제”라고 화선지에 쓰고, 그 아래에 짧은 성경구절을 써 붙이고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이 좋다고 제시하고 있다. 늘 문제시 되어왔던 절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돋보이는데 절이라는 형식을 예(禮)표현의 고유한 양식으로 보고 굳이 `절하는 예법'으로 되돌아 갈 필요는 없으나 가족과 일가 친척 중에서 때와 장소를 따라 `절하는 예법'으로써 조의, 추도, 추모의 뜻을 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함이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도 상제례시에 제사상 위에 음식물을 진설하는 문제는 고인이 생시에 즐기던 음식을 중심으로하여 정성스럽게 음식물을 마련하거나 고인의 수의 문제에 대해서도 복식예법에 필요한 형태로서 간소화한 수의를 입히는 등 나름대로의 예법을 설명한다. 하지만 추모예배가 제사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같이 신앙의 내부적인 충돌이 있음에도 대부분의 교회가 제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교회는 장례식과 기타 의례준칙을 그런대로 갖추고 있어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제사에 대해 타협이 없다. 새신자 중에는 이 때문에 교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기도 한다. 특히 아직 유교적 풍습이 강한 상황에서 제사 반대만 고집하다가는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 실제로 여러 곳에서 이미 제사 문제로 충돌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조건 반대의 입장을 내세웠던 한국교회는 여기저기 유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수천년간 내려온 유교의 풍습을 기독교가 아무런 변질 없이 수용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며 제사를 기독교 신학에 맞춘다는 것이 애초부터 문제가 된다. 제사문제는 여전히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숙제 그러나 더이상 고유한 한국의 문화를 뒤로한 채 서구 기독교의 문화 속에만 머무르는 것을 탈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기독교 정신을 살리며 우리 고유한 문화와 접목시키는 작업, 그것은 이 시대를 사는 기독인이 마땅히 심사숙고 하며 내놓아야 할 과제다. <최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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