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어원(四旬節, The Lent)
 
사순절(40일)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한다. 이는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이다.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심, 40일간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한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은 재의 수요일, 성회 수요일, 속죄일 등으로 불리워진다.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며,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은 이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두 주간의 준비기를 두고 금식과 기도로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해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사순절의 풍습
        
종려나무의 재로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식 기도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구제와 선행 베풀기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종려주일


  종  려  나  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부른 사건 때문에 (요 12:12, 13)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종려나무 (히브리어 '타마르' 영어 'Date Palm'
)에 호감을 가지는 듯하다. 목재가 귀했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나 간단한 가구를 만드는데 종려나무를 이용했으나 현대는 그 열매만을 사용한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기후가 상대적으로 더운 요르단 계곡, 사해 주변, 아라바 계곡 등에서 종려나무를 많이 기르고 있다 (사해 가까이 여리고가 종려의 성읍으로 불리웠다. 신 34:3 대하 28:15). 종려나무는 그 키가 곧고 크고, 또 여름을 지나면서 그 열매가 아주 탐스러워지는데, 아가서 7장 7절은 바로 이런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신부의 키가 종려나무 같고 그 아름다운 가슴이 종려나무의 열매 송이와 같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종려나무는 우아함이나 축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유대 여자들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다윗의 아들 암논에 의해 추행을 당한 압살롬의 누이 동생 이름이 바로 '종려' (다말=타마르)였다. 유대인들은 매년 가을의 초막절에 일주일 동안 초막을 치는데(모든 사람들이 초막을 치는 것은 아니며, 또 나주 그럴 듯하게 초막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 초막의 지붕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한다. 종려나무는 암나무, 수나무가 있으며 암나무는 5~6년 생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50여 년 정도까지는 매년 30 Cm 정도 자라다가 그 이후는 성장이 둔화 되는데, 그 키가 약 20m 정도 되는 종려나무는 수령이 약 100년 된 것이라고 한다.      

  호   산  나    
히브리어 '호시안나'(Hosianna)라는 말을 헬라적 표현으로 발음한 것인데, 본 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또는 "아무쪼록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시 118 : 25, 삼하 14 : 4, 시 20 : 9, 마 21 : 9, 막 11 : 9, 요 12 : 13). 이 말의 기원은 시편 118편 25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곧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구약 후기와 초대교회에 와서 메시야 소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사람을 메시야로 이해했습니다. 이때에 '호산나'라는 말은 남을 칭송하며 존경심을 가지고 인사하는 말이나, 환희를 나타내는 감탄사로 잘못 쓰게 되었습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여섯 번 사용하였는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 : 9, 막 11 : 10)라고 하였으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요 12 : 13, 막 11 : 9)라고 하여 역시 환호의 소리로 사용하였습니다. 민중들이 호산나를 외친 것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불러 내려오시게 하는 것입니다(시 20 : 9). 메시야를 통하여 "우리 아버지 다윗의 왕국이 임한다"(마가)고 했고,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다"(요한)라고 했으며, 또한 성찬식에 성결하기에 앞서서 세 번 "거룩"과 연결해서 쓰였으나, 떡을 땐 후에는 별로 쓰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문이 아니라 환호의 소리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상크투스와 베네덱투스의 끝 부분에 이 말이 있는데 '만수무강 하소서' '만수무강'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혀 원래의 뜻에서 멀어진 말입니다.

 

종려주일 시기


 
종려 주일은 십자가 수난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공식 입성(入城)을 축하하는 날로, 사순절의 6번째 주일이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하다. 그리이스의 일부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날로 보아 고난 주간에서 제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만왕의 왕이신 성자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한 인간의 모습으로 입성하심으로 낮아지심을 보이셨으며, 이는 또한 마지막 주간에 당하실 시련의 시작이란 의미를 지니므로 일반적으로 동,서로마 교회는 종려 주일도 고난 주간에 포함시켰다.


종려주일 의미


 
성경에서 종려나무(the Palm)는 의, 아름다움, 승리등을 상징했다. 그런데 고난 주간의 첫날이 종려 주일로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메시야로 개선하는 왕처럼 오시는 예수를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한때 이주일을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시 그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친 데서 유래된 말이다. 종려 주일은 그 옛날 서로마 교회에서는 이날 그리스도의 수난사(受難史)를 낭독했기 때문에 '고난의 주일' (Dominica Passionis)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종려 주일은 이외에도 '꽃의 날' 이란 뜻에서 Floridum, Dominica Florum 등으로 불리워졌으며, 부활절날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세례 지원자들과 과련하여 '세례 지원자 주일'(Dominica Competentium)이라 불리기도 했다. 우리는 이 날을 맞을 때마다, 지금 당장은 당신께 환호하는 무리들이 곧 당신을 못박으라고 돌변할 자들임을 아시면서도, 즉 며칠 후 당신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다만 그들 죄인의 죄값을 대신 치루사 구원을 주시려는 뜨거운 사랑으로 백성들의 환호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주님의 심정을 다시금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그리하여 바로 나를 위해 주가 당하신 노고와 고난이 그 얼마나 크고 감사한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새로이 깨달아야 하겠다. 더욱이 본래 제 2위 성자요 메시야이시면서도 초라하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속주요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에 대해서 묵상하여야 할 것이다.     

 

                      
                 

                                                                                                   

종려주일 유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주께서 자신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메사야로 오셨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일주일 후에 있을 부활의 승리를 예견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백성들이 이날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 종려 나뭇가지를 흔든 것은 종려 나무가 승리의 상징이었고 그리스도를 승리의 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려주일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자료는 385년경의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이다. 이에 따르면 동로마 교회 중의 하나인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로 종려 행렬 등이 행해졌다고 한다(3. 풍습 참조). 물론 서로마 교회들도 부활 주일 전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간을 갖기는 했지만 종려 행렬과 같은 축하 행사는 없었고, 그 성격도 축하 분위기를 지닌 동로마 교회의 행사와는 달리 애도의 성격을 띠었다.  이 밖에도 6세기경 스페인의 의식서(儀式書)인 서고트 교회의 Liber ordinum에서도 종려 주일 행사에 대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의식서에는 종려 행진과 더불어 동로마의 교회에서 행하던 풍습들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는 5세기 경 동로마 교회의 종려 주일 풍습이 서로마 교회에 유입되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다. 따라서 고난 주간, 특히 종려 주일의 행사는 대부분 동로마 교회로부터 서로마 교회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려 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의 축성의식(祝聖儀式)만은 그 기원을 서로마 교회에 두고 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에 행하는 축성의식은 초기에는 행해지지 않았으나, 후대에 와서는 종려나무 뿐 아니라 종려 행렬에 사용하는 꽃들에도 행해졌다(3. 풍습 참조).  중세 로마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에 종려나무의 축성의식, 종려 행렬, 그리고 완전한 애도의 성격을 띤 미사를 행하였다. 그러나 희랍 정교회에서는 이 주일을 고난 주간에서 독립된 주일로 정해 '환희의 날'로 기념하였다. 오늘날 희랍 정교회에서는 종려 행진을 하지는 않지만 종려나무 축성의식만은 계속해서 지키고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고난 주간 의식으로서의 종려 주일 행사들이 폐지 또는 간소화되어 오늘날에는 과거의 풍습과 행사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종려 주일의 의미는 잊지 않고 교회의 한 절기로 기념하고 있다.  

 

 

고난주간 








  고 난 주 간 유 래  
고난 주간은 사순절 절기 내에 포함된 절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주간이다. 이러한 고난 주간이 언제부터 지켜지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롬 6:3-5, 고전 11:23-26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난 주간이 전교인의 공식적인 절기로 공개적으로 지켜진 것은
A.D.313년 콘스타티누스 대제의 신앙 자유령이 포고된 이후였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종려 주일로부터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부활 주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수난의 노고와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가 바로 고난 주간이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이 고난 주간에는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 그야말로 예수 공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요, 전 우주적 사건이기도 했던 대사건들이 숨막히게 전개 되었다. 이에 성도들은 주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 응축적으로 담겨 있는 이 주간의 각 요일마다 그 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을 각각 기억하여 한 주간을 내내 엄숙한 절기로 보내게 된다.

'고난 주간'(Passion week) 또는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등으로 불리는 고난 주간의 원래 명칭은 큰 주간, 즉 하나의 큰 일주일이라는 뜻의 '대주간'(Great week)이었다. 이 명칭은 동로마 교회의 고난 주간 행사를 기록한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 속에 언급되어 있으며, 서로마 교회에서도 이 주일을 대주간이라고 불렀다. 로마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주간의 공식 명칭으로, 대주간을 의미하는 'Hebdomada Magna)' 또는 'Hebdomada Major' 등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한 의로운 인간의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구속(救贖)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구속주가 당하신 전 우주적 고난이었다.

태초에 인간은 선악과를 두고 맺은 언약을 어기고 범죄했다. 그리하여 원래의 규정대로 죽어 영벌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이 세운 법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Love)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공의의 원칙대로 처벌하시면서도 구원받을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법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대속 희생으로서의 고난을 겪으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런 구속의 법을 가장 처절한 사형수단이었던 십자가(the Cross)위에서 마침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영육간의 처절한 고난을 통하여 성취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본래 제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주권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수난을 당하신 주님의 사역에 담긴 공의와 사랑을 마음 속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창 3:15; 사 53:1-12).                                

 
고난주간의 전통
          

  종 려 주 일
 
종려 주일은 십자가 수난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공식 입성(入城)을 축하하는 날로, 사순절의 6번째 주일이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종려나무(the Palm)는 의,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했다. 그런데 고난 주간의 첫날이 종려 주일로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메시야로 개선하는 왕처럼 오시는 예수를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한 때 이 날을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시 그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친 데서 유래된 말이다.

그리스의 일부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날로 보아 고난 주간에서 제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만왕의 왕이신 성자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한 인간의 모습으로 입성하심으로 낮아지심을 보이셨으며, 마지막 주간에 당하실 시련의 시작이란 의미를 지니므로 동, 서로마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종려 주일도 고난 주간에 포함시켰다.
             

    월요일~수요일
 고난 주간의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은 특별 집회의 형식으로 모였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고난 주간 화요일에 철야 집회를 갖는데, 이때 주교는 감람산에 올라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마 24:4이하의 성경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요일에는 마 26:14-16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부분의 말씀이 낭독되었으며, 이때 회중은 큰소리로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한편 로마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앞둔 이날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는 엄숙한 미사를 드렸다.
               

   세족목요일(Maundy Thursday)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의 Maundy는 율법을 뜻하는 라틴어 Mandatum에서 말로, 수난을 당하기 전 목요일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심을 기념하는 데서 유래하였다(요 13:24).
이날에는 과거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과 마가의 다락방에서 드셨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성만찬이 행해진다. 그리고 이날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처럼 자기 죄를 회개한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예식을 행하는 것은 회중이 회개한 자와 화해함으로써 그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이날 밤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며 다음날 있게 될 십자가 지심을 대비했던 것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다.
                  

  성 금요일(Holy Friday)
 성 금요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고 인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신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을 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에서 이날을 Good Friday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날은 역시 모든 성도들에게 슬픈 날임에 틀림없다. 즉 성 금요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기리는 날이기 때문에 새벽부터 밤까지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또 이날에는 가장 엄격한 금식과 철야가 행하여 졌으며, 교회의 집회도 가능한 한 제한 되었다.

3세기 중엽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에 금식이 행해졌고, 7세기 스페인의 일부 지방에서는 성 금요일에 아예 교회 문을 열지 않았으며, 성도들은 이날 철저히 기도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들은 이날 성경 낭독, 중보기도, 십자가의 베일 벗기기, 찬양 등의 내용으로 간소화된 예배 형식의 애도 예식을 거행했다. 또한 중세에는
   이날 엄숙한 장례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성 토요일(Holy Saturday)
 대 안식일, 즉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머무셨던 동안인 성 토요일은 성 금요일보다도 더 엄숙한 날로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경건한 분위기 아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기념되었다. 따라서 이날은 교회력 가운데 가장 엄격한 금식의 날이기도 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날 새로운 불, 부활절 촛불,
   물 등을 성별하는 의식과 참회와 애도의 미사가 드려졌다.
     

                                                                






 

부활절


  부활절의 이해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의 금요일에 죽어 장사되신 주님은 삼일만인 일요일, 곧 주일날 스스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셨다. 부활절은 이를 기념하는 주일날을 가리킨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을 '파스카'(Psacha)로 불렀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Passover)을 뜻하는 히브리어 '페사흐'( j s p )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구약의 초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유월절 양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구속 희생을 당한 사실에 근거하여 구약의 유월절을 예수의 부활 기념일로 변용시켜 기념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한편 부활절을 의미하는 영어 '이스터'(Easter)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인 Eastre와 Ostara가 합성된 말로, 유럽의 튜튼족이 숭배한 새벽과 봄의 여신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새벽은 어둠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봄은 새 생명이 겨울을 이기고 나온다는 의미에서 각각 부활절의 의미와 관련이 있는바 두 단어를 합성하여 부활절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던 것이다.

  부활절의 유래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기록들이 비교적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에 관련된 것이며 부활절의 기념과 그 행사에 대한 것은 유월절과 관련되어 잠깐 언급될 뿐이다(고전 5:7).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의 종교력으로 1월인 니산월 14일, 즉 유월절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였다. 이렇게 유월절이 부활절로 변용되어 기념된 것은, 예수의 부활이 유월절기에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출애굽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심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속과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이 그 의미에 있어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출 12:13) 전통적으로 소아시아 지역의 동로마 교회들의 성도들은 부활절에 양고기를 먹으면서 승리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일부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다. 또한 부활 주일 이전의 월요일로부터 토요일까지 고난 주간 행사로 금식이 행해졌고,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주일에는 함께 애찬과 성찬을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마 교회들은 어떻게 부활절을 기념했는지, 또 그 시기는 언제였는지 확실히 알려진 것은 없다. 서로마 교회에서는 유월절에 기초해서 부활절을 기념하는 동로마 교회와는 달리 유대 전승에 근거한 부활절을 거부하고 보다 성경의 기록에 근거한, 로마 전승을 반영한 부활절을 기념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이유로 동, 서로마 교회는 부활절 시기 문제에서 합의를 보지는 못했으나, 이날을 성대하게 기념한 것은 동일했다. A.D.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부활절 시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이후부터, 이들 교회들은 부활절과 관련한 보다 다양한 행사를 갖게 되었다. 각 교회들은 부활절 전날 촛불을 밝히며 부활절 전야제 등을 거행하였다. 또한 이날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모세 오경과 주님의 수난 설화 등을 낭독하였으며, 성유를 바르는 의식 및 성찬을 행하였다.
 
  부활에 대한 실제적 증거    
(1) 첫째 증거 :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예언되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눅 18 31-33).

(2) 둘째 증거 ; 부활은 그의 빈 무덤에 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 : 2-6).

(3) 셋째 증거 : 오직 부활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가장 합리적인 증거이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 37 - 39).

(4) 넷째 증거 : 부활은 교회창설의 유일한 합리적인 설명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 : 38-42)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기록   

1)
막달라 마리아에게(막 16 : 9).
2)
여인들에게(마 28 : 9).
3)
베드로에게 (고전 15 : 5).
4)
두 제자에게(눅 24 : 15-31).
5)
열 제자에게(요 20: 19).
6)
도마에게(요 20 : 26-28).
7)
일곱 제자에게(요 21 : 1-24).
8)
열 한 제자에게(마 28 : 16-17).
9)
500명에게 (고전 15 : 6).
10)
열 한 사도에게(행 1 : 2-9).
11)
야고보에게(고전 15. 7).
12)
바울에게(행 9 : 1-5, 고전 15 : 8).

 
  
예수님 부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우리의 구원 또한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흘려 죽으신 주님은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은 것처럼 보이거나 기절한 것 같은 가사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머리는 가시면류관에, 손과 발은 대못에, 허리는 로마 군병의 창에 찔려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더 이상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해가 져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덤 속에서 그의 생애를 끝마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 : 17-18)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이 예언하고 그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실 때 인생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에 대해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마 16 : 21).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첫째로,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범한 종교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병 고침도 요술로 취급되었을 것이고, 그의 죽음도 하나의 비극적인 순교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고, 예수님의 병 고침이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이 인류를 구속하는 대속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죄를 속함 ,즉 구원의 보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인류의 죄값인 사망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인데,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죄값을 치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살아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죄 값이 다 청산되고 우리는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에 대한 확증이 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 라" (고전 15 : 13).
 넷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죄와, 죽음과,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차 다가올 부활은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소망이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요, 우리 죄속함의 보증이 되며,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확증이 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반대설    
부활에 대한 반대설이 많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1) 가사설(假死說)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실신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하는 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6시간이나 십자가 위에 계셨고 운명 후 로마 군인이 옆구리에 창을 절러 물과 피를 나오게 하여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제자이지만 죽은 것이 확인되니 무덤에 장사했을 것입니다. 로마 병정도 죽은 것이 확인되니 시체를 내어 주었고 제자들도 확인되니 흩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2) 도거설(盜去說)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해 가고는 돈을 주고 예수가 살아났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훔쳐 갔으면 무엇 때문에 여자들과 베드로가 무덤에까지 찾아갔겠습니까? 로마 병정들이 인봉을 하고 지키는데 어떻게 접근했겠습니까? 나아가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순교하기까지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겠습니까? 도리어 대제사장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훔쳐 갔다고 거짓 증거하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 외에 환상설도 있으며 유령설
도 있으며 가지가지 거짓 증거가 많이 있지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가 베드로, 야고보 외에도 500명이나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기독교회가 세상에 끼친 영향으로도 증거하고도 남으며, 교회확장과 박해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로 변하며, 현재의 역사를 통해서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불란서의 볼테르는 50년 후에는 교회가 다 없어진다고 하면서 무신론과 성경을 반박하는 책을 많이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50년 후에 교회는 없어지기는커녕, 신기하게도 그 무신론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소가 성경을 찍어내는 인쇄소가 되어서 마루에서 천정까지 성경책으로 꽉 찼다고 합니다.
                                             
                                                                                  

  
부활한 육신은 어떤 모습일까   
썩지않고 영원한 "생명의 형상"
살과 뼈 가진점에서 이전의 몸과 연관성
시간과 공간 제약 안받고 영광으로 빛나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14:14)하는 질문은 수천년 동안 내려오는 인간의 질문이다. 죽으면 그만이고 특히 몸이 썩으면 없어져 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산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15:23)"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라고 신자들의 부활을 보증하셨다.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은"죽은 자들이…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15:35)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 살펴본다.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사르밧 땅의 과부아들
(왕상17:17-24),수넴 여인의 아들(왕하4:17-27), 유대 관원인 야이로의 딸(막5:22-43),나인성의 청년(눅7:11-17),나사로(요11:17-44),여제자 다비다(행9:36-43),졸다가 떨어져 죽었던 유두고(행20:7-12) 등이 죽었다가 살았으나 신학적인 의미의 부활은 아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었다가 소생했을 뿐 부활의 몸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부활의 몸이란 예수님 경우처럼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나 살과 뼈를 가진 몸이다(눅24:2940).어떤 불신앙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같이 예수님의 출현이 영의 출현이거나,단순한 환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못자국을 보이시며 손가락을 내밀어 창으로 찔렸던 옆구리 상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요20:2527).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다고 선언하고 있다(마28:9).

부활한 몸은 부활체를 가졌기에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다(눅24:41-45).영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어릴때의 경험에서 이것을 생각해 본다. 유교의 관습대로 조상의 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한 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꽂아놓고 음식을 잡수시도록 자손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한참 후에 방으로 들어와 호기심어린 눈으로 없어진 음식이 있는가 살펴보아도 밥이나 국이 없어지지 않아 안심하던 기억이 있다.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와 동일하지는 않으나 깊은 연관성이 있다. 도토리가 자라서 참나무가 되고 갓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될때 동일한 물질에서 발전하지만 그 형태가 같지 않다.

도토리와 나무, 아이와 어른 사이에 차이가 있으나 계속성이 있음을 의심할 수 없는 것 같이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몸은 계속성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가까이서 예수님을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생각한 일이나(요20:1415),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길에서 동행하게된 예수님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6). 제자들이 무서워하며 모여있던 다락방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영으로 생각할 정도로(눅24: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해있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는 흙으로부터 온 것이나 부활 때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될 것이다(고전15:49).지금 우리의 몸은 썩고 욕된 약한 몸이지만 부활 때에 갖게될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한 몸이 될 것이니 곧 신령한 몸이다(고전15:42-44).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의 비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후에 가지시게될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변화산사건이라 부른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고 전하고 있다.

부활의 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 부활체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않을 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죽을 수 없음과 같다(마22:30).닫힌 방안에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으며(요20:19),동행하던 일행중에서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눅24:31) 몸이 부활의 몸이다. 가고싶은 곳에 갑자기 나타났다가,원할 때 즉시 사라지는 부활체는 현재 우리 육체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과 다르다.

출근길에 또는 중요한 약속의 자리에 시간을 대기 어려워 조바심하며 차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일도 부활한 몸을 가질 때는 없어질것이다. 고칠 수없는 병에 걸려 고통하는 일도,늙는 것을 두려워하지도,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뺏기고 통곡하는 일도 부활 이후엔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죽은 자들이 다시살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를 받을 것이니(고전15:5152) 성도들의 몸이 구속을 받는 복되고 소망스런 날이 될 것이다(롬8:23).<성결교신대 성기호총장>               
                                                 

  세계의 부활절 행사   

독일
3일간의 카니발 후 긴 사순시기를 보내고 부활축일을 맞아 곳곳에선 전통 퍼레이드와 축제가 열린다. 성목요일에는 온가족이 모여 초록색으로 달걀을 칠하고, 어머니들은 바구니를 만들어 아이들이 자는 동안 머리맡에 두곤 한다. 성금요일에는 성당의 종이 울리지 않기 때문에 복사단들이 마을을 다니며 미사시간을 알린다.
부활성야에는 모든 크리스마스 트리를 한 곳에 모아 태운다. 이것은 겨울을 정리하고 새봄을 준비하는 의식이다. 독일의 부활은 가족의 날이다. 점심식사 때 함께 색칠한 달걀과 양모양이 케이크 등을 먹고, 아이들은 정원에 숨겨진 달걀과 초콜렛 토끼를 찾는 게임을 즐겨 한다. 부활 후 월요일에는 아이에르레젠이라는 부활달걀 굴리기 시합을 한다. 이 시합의 우승자는 101개의 부활달걀을 상으로 받는다.

불가리아
전통적으로 부활빵을 만드는데, 빨간달걀을 빵 안에 집어넣는다. 부활빵과 달걀을 토요일 저녁 성당에 가져가 축성을 받고 가져와 다음날 먹는다. 이전에는 달걀을 붉게 칠해 터키 친구들이나 대부모, 친척,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요즘은 이 전통은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남아있다.
또 집안의 최고 여자연장자가 아이들의 얼굴에 붉은 달걀을 문지른다. 이것은 흰얼굴에 붉은 뺨으로 행복과 건강을 바라는 의식이다. 또 불가리아에서 부활절날 즐겨 행하는 것으로 달걀깨기가 있다. 상대방의 달걀을 깨는 시합인데, 마지막까지 깨어지지 않는 달걀은 한 해의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을 상징한다.

미국
토착민이 아니고 이주자들이라 지방마다 풍습이 다르다. 어떤 도시에선 재의 수요일 전 화요일을 팬케이크의 날이라 정해 영국의 풍습에 따라 축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것은 일종의 카니발이다.
부활절 아침에는 새벽기도회나 야외미사가 봉헌된다. 허리우드나 캘리포니아 하와이의 호놀룰루같은 야외 원형 경기장에서 미사가 봉헌되기도 한다. 어떤 곳에선 성가대들이 동트기 전에 노래를 부르며 집집마다 다니기도 한다. 가족들이 함께 양노원이나 가난한 이웃들을 찾아 부활음식을 함께 나눈다. 특히 빵에 흰설탕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한다. 또 일부 도시에선 꽃축제가 열린다.

폴란드
부활 하루 전인 성토요일 각 가정에서 축복 바구니에 부활달걀과 빵, 소금, 흰 소세지를 넣어 축성을 받는다. 이 음식들을 할로우페어(신에게 바친 음식)라고 불린다. 붉은 달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빵과 소금은 건강과 성공을, 흰소세지는 새봄의 풍년을 의미한다. 또 부활절 다음 월요일에 물뿌리기라는 특별한 관례가 있다. 서로의 건강을 바라며 물을 뿌리곤 한다.

스페인
전국 각지에서 성금요일에 수난행렬을 거행한다. 행진을 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마지막 한 주간의 행적을 재현해 보인다. 부활절이 되면 성모마리아께 꽃을 봉헌하는 퍼레이드를 벌인다.
이것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오기도 한다. 특히 스페인에서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대단하다. 또 투우경기 전에 길거리에 소를 풀어서 경기장으로 몰아넣는 풍습이 있다. 이때 소에 밟혀 다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부활절 행사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핀란드
부활절 이전에 아이들은 작은 화분에 독보리를 심는다. 푸르른 새순은 봄을 상징한다. 요즘은 튤립, 백합, 수선화 등을 대신 심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부활풍습은 달걀과 관련돼 있으며, 특히 달걀 숨기고 찾기 놀이가 인기다. 또 부활절 아침이 되면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춤추는 태양이라는 시간을 갖는다.

프랑스
성금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성당의 종이 울리지 않는다. 프랑스에는 교회의 종이 로마로 날아간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전설을 믿고, 부활절 아침 일찍 종이 집으로 날아오는 것을 보러 달려나간다. 이때 부모들은 초콜렛 달걀을 숨기고, 돌아온 아이들은 초콜렛을 찾아다닌다.

이태리
이태리의 부활절은 성당에서는 물론 일반사회에까지 종교적 축제 분위기로 들뜬다. 저녁에 훈제된 어린 양고기를 먹으며,아이들은 왕관 모양의 빵과 부활달걀 만들기를 즐겨한다.

네덜란드
성토요일밤 마을사람들이 모여 촛불행렬을 갖고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추며 보낸다. 아이들은 성주간동안 집집마다 다니며 계란을 얻어 모은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아름답게 장식한 부활화환을 문앞에 달아둔다. 또 집안은 노란 봄꽃들로 장식하고, 부활달걀을 정원에 있는 나무에 달아놓기도 한다.

스웨덴
성목요일 전날 메시지를 담은 쪽지를 사람들의 등에 붙이는 오래된 풍습이 있다. 이것을 행하는 목적은 쪽지를 붙인 사람들이 자신이 �희생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걸어다녀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는 데 있다.
                                                       

  한국의 부활절 행사   

(1) 부활절 철야제
부활절 철야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기 위한 부활절 주요 의식으로 성 토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에 거행되었다. 히폴리투스가 지은 '사도 전승'(Apostolic Tradition)에 의하면 이때 교회에서는 세례식이 베풀어지고 성찬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4세기 이후에는 교회력의 발달로 그리스도께서 수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성 금요일을 이날과 명확히 분리시켜 준수하게 되어, 성찬 등의 의식은 주로 그 이전에 행하고 부활절 철야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중점을 두어 지켜지게 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철야 예배가 토요일 오후, 토요일 아침 등으로 그 시간대가 변경되면서 사실상 철야제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51년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부활절 철야제가 부활되어 다시 지켜지고 있다.

(2) 부활절 연합 예배
우리 나라의 교회들은 새벽에 연합 예배를 드리고 있다. 제 1회 부활절 예배는 1947년 서울 남산의 조선 신궁터에서 거행됐는데, 이때 모인 신도는 1만 5천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부활절 연합 예배가 드려졌던 남산의 조선 신궁터는 과거 일제시대 때 신사 참배가 행해졌던 곳으로 해방 후 이곳에서 드린 부활절 연합 예배는 종교의 자유를 되찾았다는 실로 감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때 설교는 자로 교회의 한경직 목사가 맡았었다.
4회까지는 계속 남산에서 예배가 개최되었으나 6.25사변으로 인해 제 5회 연합 예배는 부산의 보수 공원에서, 제 7회 부활절 연합 예배는 부산 사범학교 뜰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1960년 이후에는 진보파와 보수파의 분열로, 또다시 예방측 합동 교단이 별도로 예배를 드리게 되어 부활절 예배가 같은 날 세 장소에서 드려지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1978년에 와서야 재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서울 뿐 아니라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별로 부활절 연합 예배가 거행되고 있다. 한편 서울에서는 1975년부터 연합 예배의 장소가 여의도 광장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계속적으로 그곳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다.
평소 교파를 달리하던 각 교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지체 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함께 모여 화목 제물이 되셨던 그리스도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뜻있는 부활절 예배가 될 것이다.

자료도움: 내이플스한인교회 www.nckorean.org

    

 SJSCH(기독교종합자료홈) http://sjs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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