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 기독교 개척자 모리슨 선교사
지난 호까지 우리는 당나라의 경교에서부터 현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중국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중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중요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2007년은 근대 중국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이 중국에 온지 200년이 되는 역사 깊은 해였다. 중국교회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먼저 중국선교의 개척자 모리슨 선교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모리슨의 어린시절
1782년1월5일,로버트 모리슨(Dr.RobertMorrision,1782~1834)은 영국 노텀버랜드(Northumberland)의 한 농가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모리슨이 세 살 되던 무렵, 그의 부친은 건강에 문제가 생겨 농사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뉴캐슬(New Castle)지역으로 이사하여 구두공장을 열어 생계를 꾸려갔다. 공업혁명이 한창이던 그 시절, 모리슨을 비롯한 어린이들 대부분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는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았다. 모리슨은 아버지와 함께 구두공장에서 일하면서 공부는 학교 선생님이었던 외삼촌에게서 배웠다. 모리슨의 부친은 교회의 장로로 신앙이 독실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모리슨을 교회 목사님에게 특별히 종교교육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모리슨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유년시절 불량한 소년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부모님의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수 있었다. 후에 이런 방황의 경험이 그의 신앙을 더욱 성숙시키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전도와 기도회, 각종집회에 더욱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국선교사의 사명
모리슨의 삶이 변화된 후 선교사가 되어 외국에 나가 선교하고 싶다는 꿈은, 17세가 되던 해, <선도잡지(The Evangelical Magazine)> 와 <선교잡지(The Missionary Magazine)>를 통해 구체화 되었다. 그러나 자식을 외국에 떠나보내는 것을 두려워하여 반대하던 어머니로 인해 모리슨은 갈등하게 된다. 그가 20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미루어왔던 결정을 하게된다. 모리슨은 고향을 떠나 공리회소속의 허스톤신학교(Hoxton Academy)에 입학하게 된다. 2년 간 학업에 임하면서 선교사에 대한 꿈이 더욱 커져갔다. 모리슨은 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떠한 곳이라도 기꺼이 가겠다는 고백을 하였다. 1804년 5월 27일, 모리슨은 마침내 런던선교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에 선교사 신청을 하게 된다.다음날 그는 선교회에 정식 가입이 되었다. 선교회는 그를 고스포트선교학원(The Missionary Academy at Gosport)에 보내어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받게 하였다. 모리슨은 고스포트에서 14개월 동안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장래의 선교지를 아프리카와 중국을 우선순위로 두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가 더 필요로 할 것 같아 아프리카 선교단체에 가입하여, 아프리카로 출발하였다가 도중에 사고가 나는 바람에 포기하고, 중국을 그의 선교지로 결정하게 되었는데, 그 중요한 계기는 다음과 같다. 그보다 몇 년 전에 영국 출신의 모스레이목사(William Mosley)는 중국의 영혼구원에 크게 부담을 느끼고, 공개서한을 발표하여 하루 빨리 선교기구를 설치하여, 동방에서 가장 큰 민족의 문자로 성경을 번역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 경비가 너무 방대하며 번역을 한다해도 중국에서 배포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모두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런던선교회만은 이를 중요시하고 이에 필요한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고스포트의 원장도 중국어 성경의 번역 사업이 중요한 것을 인정하고, 평소 좋은 인상을 주었던 모리슨에게 이 번역 업무에 가담할 것을 권고하였다. 모리슨은 원장의 권유로 이 역사적인 사명을 맡게 되었다. 런던선교회에서는 원래 세 명을 함께 보내고자 계획했었지만, 여의치 못해 모리슨 한 사람을 먼저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807년1월8일, 모리슨과 인도에 갈 두 명의 선교사는 스코틀랜드교회에서 정식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해는 모리슨이 25세가 되는 해였다. 런던선교회는 모리슨에게 그의 지혜와 능력으로 자유롭게 모든 상황에 대처하라는 수권서(授權書)를 하사하여, 그가 중국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국선교의 장애물
모리슨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지인 중국에 중문성경 번역의 임무를 띠고 중국에 부임하지만 그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우리는 여기서 모리슨이 근대 중국의 첫 선교사로 당면해야 할 어려운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검토해 보겠다.
① 동인도(東印度)회사의 반대 모리슨은 원래 영국에서 동인도회사 소속의 배를 타고, 중국에 올려고 했는데, 동인도회사는 선교사가 중국에 올 경우 그들의 무역활동에 문제가 될까 모리슨이 중국에 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당시 동인도회사가 동방무역을 독점하고 있어 동방에 갈려면 반드시 동인도회사의 배를 타야만 했다. 모리슨은 할 수 없이 먼저 뉴욕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중국으로 가야하는 노고와 위험을 격어야 했다. 1807년1월31일, 그는 Remittance호를 타고 영국을 떠나 뉴욕으로 출발하였다. 그가 뉴욕에 도착하자 뉴욕 전도위원회의 회장 그린(Green)씨를 만나, 여러 가지 도움을 받고, 또 미국 국무성장관에게 추천서를 의뢰하여, 국무성장관 마디손(Madison)은 그를 위해 광주(廣州)에 있는 미국영사에게 추천서를 써준 후에 모리슨이 광주에 도착했을때, 그 추천서의 덕택으로 미국영사의 도움을 받도록 했으니,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었다. 1807년5월12일 모리슨은 Trident호를 타고 113일의 항해끝에 9월7일 일요일에 무사히 광주에 도착하였다. 그가 영국을 떠난 지 무려 7개월에 걸쳐 비로서 그의 목적지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② 청나라의 폐관정책(閉關政策) 모리슨이 중국에 왔을 때, 청나라는 외국과의 무역을 유효하게 관리하기 위해 광주만을 개항하고, 외국 상선들이 광주 이북으로 항해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광주에서도 영국 상인들은 여러 가지 엄격한 규제 속에서 청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무역을 해야했다. 예를 들면 외국 상인들은 광주에서 겨울을 나지 못하게 하고, 행동을 제한하였으며, 중국인들을 고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고, 특히 외국 부녀자들은 배안에만 있을 수 있고,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엄금하였다. 모리슨은 중국에 온지 2년후에 몰톤(Mary Morton)여사와 결혼했지만, 이와 같은 규제 때문에 부인은 마카오에 생활하며,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에 근무하기 위해 광주에 분거하며 겨우6개월에 한번 마카오를 방문하는 정도의 고독한 신혼생활을 해야했다.
③ 중국어 학습의 어려움 모리슨이 중국어를 배우는데도 많은 어려움을 격어야 했다. 중국어 자체가 서방 각국의 언어와 완전히 달라서 서방인들이 중국어 배우기를 매우 두려워했다. 모리슨은 중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문자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더욱이 청나라는 외국인들이 중국어 배우는 것을 심히 의심하여,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중국인을 매국노로 몰아 본인과 가족까지 멸절하여 외국인들이 중국어 배우는 것을 엄히 금지시켰다. 이러한 여건속에서 중국어 선생을 찾기도 어렵고, 또 엄청난 비용을부담해야 했다. 그는 양광명(楊廣明)과 이선생 두 명의 중국어 선생을 구하여 중국어와 광동어를 동시에 배웠다. 듣기에는 이 두 선생은 주머니에 항상 극약을 휴대하고 다녔다고 한다. 왜냐하면 만약 청나라 관리에게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그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④ 런던선교회의 오해 1809년,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으로 초빙되었다. 모리슨이 중국에 오는 것을 반대했던 동인도회사가 그를 통역관으로 초빙한 것을 보면, 모리슨의 중국어 실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동인도회사 통역관이 되었다는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런던선교회와 교우들은 그가 선교의 사명을 버리고, 세속의 일에 전념한다고 비난하고 오해하여,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모리슨은 편지를 써서 자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통역관이 되면 정당한 신분이 있어 합법적으로 광주에 거주할 수가 있고, 통역은 중국어 공부에 도움이 될 뿐아니라, 동인도회사의 월급이 있으니 선교회의 부담을 줄일 수 있으며, 더욱이 동인도회사의 선교사들에 대한 적대감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모리슨의 업적
① 중문성경의 번역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으로 늘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고, 또 나약한 부인을 마카오에 두고 홀로 광주에 있는 고독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한시도 그의 선교에 대한 사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행히 광주의 영국 상인 로버트(Roberts)와 스타운톤(Sir. George Staunton)이 그의 성경번역 사역을 적극 지지하여 그에게 큰 힘을 주었다. 1810년9월, 모리슨은『사도행전』을 번역 인쇄하여 3권을 영국으로 보냈다. 이때 그는 중국인 인쇄공 양발(梁發)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후에 모리슨의 중요한 동역자가 되었고, 중국인으로서 최초로 목사가 된 사람이었다. 1811년9월에는『누가복음』을 인쇄 출판하였다. 그리고 1812년에는『진도문답(眞道問答)』을 출판하였다. 그 해에 청나라 정부는 이를 주의하여 중국어 기독교 서적을 인쇄하는 자에게는 사형에 처한다고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어,1813년에『신약전서』를 모두 번역 출판하였다. 양발은 활자를 새기고 인쇄하는 모든 과정을 맡아 진행하였다. 1813년은 모리슨에게는 매우 뜻 깊은 해였다. 신약전서가 출판되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고대했던 그의 새로운 동역자 밀렌(Rev. William Milne)목사가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광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밀렌은 광주에 머물 수가 없어, 말레시아의 마육갑(馬六甲)에 가서 중국선교기지를 세워야 했다. 모리슨은 양발과 다수의 인쇄공들을 함께 보내어 밀렌을 돕도록 하였다. 모리슨은 신약성경을 출판한 후 계속해서 구약성경 번역을 밀렌과 함께 하여 1819년 구약성경 번역을 모두 마치고, 1823년에 인쇄 출판하였다. 모리슨 보다 앞서 영국 침례교목사 마스만(Joshua Marshman)이 인도에서 성경번역을 착수하여 1811년 신약을 완성하고, 1822년에는 구약을 완성하여, 그 해 활자 인쇄로 출판하고, 곧 바로 영국성서공회로 발송하였다. 모리슨은 이보다 일 년 후에 출판하였고, 그 이듬해 5월 고국을 떠나온 지 처음으로 귀국할 때, 친히 가지고 돌아갔다. 비록 모리슨의 번역본이 마스만보다 1년 늦었지만, 중국에 널리 보급되었고, 그 후 중국 성경의 번역하는 과정에서의 영향력은 마스만 역본과는 비교할 수 가 없었다.
② 중문 잡지의 출판 1811년, 모리슨은 광주에서『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발행하고, 계속해서『영화문법입문(英華文法入門)』,『중문법정(中文法程)』그리고 1812년『영화자전(英華字典)』을 출판하여 동서문화 교류에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이 오히려 청나라의 주의를 야기시켜, 청 정부는 중문기독교서적 발행금지령을 내려, 중국에서 출판사업이 곤란하게 되었다. 특히 1813년 그의 동역자 밀렌부부가 중국에 도착했을때, 그들이 광주에 머물 수 없게되자,모리슨은 밀렌을 동남아로 보내고,『항하외방전도회(恒河外方傳道會,The Ultra-Ganges Mission)』를 조직하여 남양일대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을 착수하고자 하였다. 모리슨은 마육갑에 그 선교본부를 설치하고 밀렌이 그 본부의 운영을 감당하였다. 1817년1월, 마육갑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출판사업을 착수하였지만, 실은 1815년8월5일, 이곳에서 근대 중국의 최초의 중문잡지인『찰세속매월통기전 (察世俗每月統紀傳)』을 발행하고 있었다. 이 잡지는 모리슨, 밀렌과 양발에 의해 1821년까지 발행되었다. 종교, 천문과 서방의 새로운 지식등이 풍부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1833년 모리슨은 마카오에서 잡문편(Serial Miscellany)을 주간으로 발행하였다. 겨우 3회 발행 했는데, 주요한 내용은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다.
③ 영화서원(The Anglo-Chinese College, 英華書院)의 설립 1815년 모리슨은 런던선교회에 마육갑에 영화서원의 설립계획을 보고하였다. 이 계획은 인도, 미국과 영국등지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고, 열렬히 헌금도 하였다. 런던선교회에서도 500파운드를 지원하였고, 모리슨 자신도 사재를 털어 1,000파운드를 헌금하고, 매월 100파운드를 헌금하기로 했다. 동인도회사도 적극 호응하여 1200파운드를 경상비로 찬조하였다. 이리하여 1818년 11월 11일, 영화서원 개교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 학교는 비록 마육갑에 세워졌지만, 중국선교를 위해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학교였다. 그 주요한 설립목적은 서방학생들에게 중국어와 문자를 가르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동남아, 그리고 일본과 고려(高麗)인등의 동방학생들에게 서방과학과 기독교 교육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학교는 다민족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주요한 교육대상은 중국 화교의 자제들이었다. 모리슨의 목적은 그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시켜, 이들로 하여금 중국선교에 직접 참여하도록 하고자 함이다. 1838년에는 성인부녀학교까지 설립되어 운영하다가 1842년 홍콩이 영국에게 할양되자 이 학교는 홍콩으로 이주하였다. 중국인으로 최초의 목사가 된 하진선(何進善)목사는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다.
평민의 영웅
1817년 모리슨이 중국선교를 시작한지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영국의 그라스고우(Glasgow)대학에서 그의 중국어 번역사역을 크게 인정하여 모리슨에게 특별히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또한 그의 동서문화간의 노력으로 구라파의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를들면 불란서 학원의 레무새트(Remussat)교수, 독일 커니스버그(Konigsberg)대학의 바터(Vater)교수, 영국의 애딘버그대학의 부총장 베어드(Baird)박사등은 모리슨의 사역에 관심을 갖고 수시로 그와 서신을 왕래하였다. 1834년8월1일, 모리슨은 광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의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가 27년 동안 중간에 한번 귀국한 이외에 거의 모든 생애를 중국선교를 위해 바쳤다. 그는 명실공히 근대 중국땅에 떨어져 죽어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중국기독교의 기초를 굳게 형성하였고, 후배 선교사들의 아름다운 귀감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중국에 온지 20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국인으로 다년간 중국 세무서의 총책을 지냈던 하트(Robert Hart)는 그를 “평민의 영웅”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는 강철같이 강인하고, 마음씨 착한 사람이었으며, 용감한 용사였고, 자기 직분에 충성하는 충직자였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