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골감리교회, 2007년으로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샘골교회와 최용신 선생 관련 연혁
1907.07. 03 샘골교회 창립(당시 사리교회). 홍원삼, 홍순호 형제가 양노리 교회(현 비봉교회)에서 예배 를 드리다가
사리(샘골) 한 가정집 마루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림
1929 순회 목회자 김홍제(1929~32년)-안산 구역(처음으로 샘골교회 주재)
밀러 선교사에 의한 순회강습회가 운영, 장명덕 전도사 부임으로 샘골학원이 처음으로 운영됨
엡� 청년회 금주단연운동 벌임
1931.10. 11 최용신 선생 농촌 계몽사로 샘골 부임(김활란,황에스더,쿨란 박사등과 함께 옴).
밀러 선교사가 기증한 전재풍 목사의 사택 건너방(현 태영 아파트 205동 위치)에 임시 거주하다가
샘골교회 뒤 4칸 초가로 이사, 장명덕 전도사와 함께 거주
1934 전재풍 목사 부임(최초 담임 목회자, 1934~37년) 샘골교회 안산구역에서 안산 동구역이 됨
1934.03. 샘골학원 제1회 졸업식(박문성 외 9명)
1934.04. 27 최용신 일본고베여자신학 입학. 건강 악화로 6개월 만에 귀국
1935.01. 23 최용신 선생 수원 도립병원에서 장 중첩증으로 소천
04. 27 심훈의 계몽소설 “상록수”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현상 입상
1998년 건축한 5번째 현재 샘골교회
샘골교회
기념관 위에서 본 모습
교회 내부
내부 계단 기미독립언문
교회 계시판 전시물
1952년 천곡교회 3번째 성전
1952년 천곡교회 3번째 성전에서 학생들
1962년 천곡교회 4번째 성전
1994년 천곡교회 4번째 성전 모습
<상록수공원, 최용신 선생 묘>
상록수공원
상록수공원, 샘골 소개비
상록수공원
상록수공원
상록수공원, 최용신 기념관
안산시가 소설 「상록수」의 배경이자 일제 강점기 농촌계몽가였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중인 「최용신기념관」이 착공 1년여만에 드디어 완공됐다. 안산시는 지난해 6월 상록구 본오동 상록수 공원(1만2천328㎡)내에 최용신기념관 건립공사에 들어가 지난 7일 기념관 설치공사를 마쳤다고 4일 밝혔다. 총 7억1천만원이 투입된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462.8㎡(140평)규모로, 지상1층에 최 선생 활동 당시의 강습소인 「샘골강습소」를 원형 복원했으며 지하에 교육과 전시 등을 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시는 8월까지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최용신묘역, 기념비, 표석 등 12점과 안내표지판 4개소에 대하여도 일제히 정비하고, 9월까지 상록수 공원을 산뜻하게 단장해 앞으로 안산시 문화관광 유적지로서 널리 활용할 계획이다. 한편 기념관 건립에 앞서 지난 2004년 9월 최 선생의 제자 홍석필(84.안산시 본오동)씨가 『최용신 선생의 뜻과 얼을 기리고 청소년과 노인들이 공부하며 쉴 수 있는 강습소를 다시 만들어 달라』며 자신의 집을 팔아 마련한 1억5천만원을 안산시에 기탁한 바 있다. 홍씨는 1932년 최 선생이 안산시 본오동 샘골마을로 내려와 만든 강습소 에서 4년여 동안 학업을 한 강습소 2회 졸업생이다.
추모비
최용신이 죽은지(1935년 1월 23일) 72년이 지난 오늘 2007년도의 샘골동산에는 지난 1998년에 새로 지으진 샘골(천곡)교회가 있다. 그 앞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조용히 서있는데, 하나는 루씨 동창회와 천곡교회가 합동으로 1974년 11월에 세웠다. 이 기념비에는 유달영 작사, 이홍열 작곡의 “최용신을 기리는 노래”를 적고 있다. “일제 하 처절하던 민족 수난기에 나라의 광복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농촌 계몽의 선구로 불사조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생명을 바쳤네 영원히 역사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처녀 싱그러운 처녀 민중의 가슴속에 뿌리깊이 잡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
추모비 최용신 선생
최용신의 묘
최용신의 묘
최용신(좌)과 약혼자 김학준 장로의 묘(우)
(지금은 없어진) 강습소가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강습소 바로 옆에 마련된 최용신 선생의 묘소, 소박한 최용신 선생 묘소 오른쪽에는 1926년 최용신 선생과 약혼자 였던 故 김학준 교수(장로)의 묘가 있다.(최용신 선생 곁에 묻히기를 ...김학준 교수의 유언에 따른것이다) 1935년 6월 최용신선생을 모델로 한 沈薰의 소설. 常綠樹(여주인공 채영신으로)발표, 1936년 YWCA는 비석을 세워 Y정신의 실천자, 농촌사업가의 산 표본으로서의 최용신선생을 기리고 선생의 사업과 정신을 계속하기로 총회에서 결정.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상록수 저자 심훈 서울대병원에서 36세의 일기로 운명(병명 장티프스)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 제정, 1974년 11월 최용신 기념비 제막, 1975년 3월 11일 약혼자 김학준교수 타계
최용신(좌)과 약혼자 김학준 장로의 묘(우)
최용신(좌)과 약혼자 김학준 장로의 묘(우)
최용신의 묘
1934년 해가 저물어 가면서 그녀의 병은 극도로 악화되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그녀의 병은 “장중첩증”이었다고 한다. 창자가 창자 속으로 꼬여 들어간 것이었다. 2차에 걸친 수술이 시도되었으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농성 복막염까지 겹치게 되었다. 이는 극도의 과로와 영양부족 탓인데다 치료를 미워왔기 때문이었다. 1935년 1월 22일 아침, 학원 이사 중에 한 사람인 안홍팔 씨의 손을 잡고 힘겨운 말문을 열었다. “...만일 제가 떠난 후에라도 학원만은 잘 살려서 여러분의 손으로 훌륭한 학원을 만들어 주세요... 제가 약혼한 지 올해가 10년이어요. 올 4월부터는 두 사람이 힘을 모아서 농촌을 위해 일하고자 곧게 약속했지요. 그런데 이대로 떠나니 그 사람에게 대단히 미안합니다... 제가 늙으신 어머니보다 먼저 떠난다면야 그것도 죄송한 일이고... 내가 죽은 후에는 학원이 잘 보이는 곳에 묻어주세요... 교회와 여러 이웃 친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은혜를 갚지 못하고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아무에게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세요...” 이렇게 띄엄띄엄 한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끝낸 뒤 그녀는 가끔씩 헛소리를 하기도 하였다.가끔씩 “주여! 주여!”라고 조용히 외피기도 하였다. 1935년 1월 23일 오전 0시 20분 그녀의 얼굴에 만면의 희색이 돌더니 긴 한숨을 몰아 쉬고는 고요히 영원의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그렇게 25년 6개월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었다. 장례식은 천곡 마을장으로 학원 마당에서 온 교우와 학원의 학생, 학부형 그리고 친지들이 운집한 가운데 당시 천곡교회 전재풍 목사의 주례로 장명덕 전도사의 기도, 어린 학생들의 조가 및 조사, YWCA의 대표 황에스더 여사의 조사 순으로 이어졌다. 장례식이 마칠 무렵 현해탄을 건너 급히 달려온 약혼자 김학준 씨가 도착,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다 못 다한 사랑을 나누기라도 하려는 듯 입고 온 외투를 그녀의 관 위에 고이 덮어 주위를 더욱 숙연케 하였다. 막무가내로 관에 매달려 울부짖는 어린 제자들을 겨우 뜯어말리고서야 그녀의 시신은 그녀의 사랑과 봉사와 희생이 아로새겨진 천곡학원이 마주 보이는 산, 언덕 공동묘지에 묻혀진 것이다.
(글 출처- 1.홍석창 목사님의 저서 <상록수 농촌 사랑>, <수원지방의 발자취- 수원지방 70년 약사>와 목사님의 미공개 논문 등 2. 2001년 YWCA주관 전국대학생 여성포럼에서 양 미강 목사 발표한 내용을 편집한 것, 샘골교회 홈페이지)
묘앞에 세워진 유훈비
김학준 장로의 묘
최용신 선생 묘소 오른쪽에는 1926년 최용신 선생과 약혼자 였던 故 김학준 교수(장로)의 묘가 있다.(최용신 선생 곁에 묻히기를 ...김학준 교수의 유언에 따른것이다.
최용신 유훈비
심훈이 '상록수'를 쓰게 된 동기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을 맞이하여 장편소설 공모하였다. 상금 500원을 걸고(당시 소 한 마리 값 60원) '조선농어촌문화'에 기여 할 수 있는 소설을 모집한 것이다. 당시 심훈은 부모님이 낙향하여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살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장질 심재영이 청년 십 여명 과 농촌계몽에 앞장서서 인근 마을까지 활동하고 있었고, 이때 샘골의 최용신의 부음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회 장으로 치루어 졌으며 그녀의 업적이 소개되고 ,영원불멸의 명주, 무산아동의 자모, 선각자중의 선각자라는 글로 신문 첫줄을 장식하였다. 심훈은 샘골을 세 차례 정도 방문하여 자세히 기록 한 후 '상록수'를 썼다. 1935년 5월 4일 쓰기 시작하여 6월 26일에 탈고하고 그 해 9월 10일 석간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 15일 까지 127회에 걸쳐 연재 되었다. 1936년 영화화하려 했으나 일제 당국의 불허로 실패. 같은 해 8월 28일 한성도서 주식회사에 의해 책으로 발간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책의 표지 그림은 청전 이상범(동아일보 전속 화가) 이 그렸고 서문은 벽초 홍명희가 맡았다. 1936년 소설을 영화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9월 쟝티프스에 걸려 고열로 사망(36세)하였다. 소설'상록수' 채영신의 모델 최용신, 박동혁의 모델 장질 심재영과 약혼자 김학준, 청석골의 모델 샘골
(출처- 민족저항 시인 '상록수'의 작가 沈熏의 문학과 생애-申庚林 編著에서 발췌)
최용신 기념관 정원
최용신 유훈비와 심훈(상록수 저자) 문학기념비
심훈(상록수 저자) 문학기념비
심훈 청동상
샘골강습소 주춧돌과 향나무
샘골강습소 주춧돌과 향나무
최용신 추모 돌
최용신 추모 돌 뒷면
<최용신 기념관>
최용신 기념관 2층, 현재 학당으로 사용되고있다. 1층은 전시실이다.
최용신 기념관 2층
최용신 기념관 1층 전시실, 정원에서 계단을 내려와야한다.
전시실 입구 최용신 상
전시실 내부
샘골강습소 모형품
최용신 연보
샘골강습소 교가
기념관 기증자 명단
샘골강습소를 도운사람들
전시실 내 영화관
최용신의 학력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연극발표회
협성여자신학교 (현 감리교신학대학)
최용신 협성신학교 시절 (앞줄 오른쪽)
1928년 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최용신은 매우 중요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그 만남은 바로 아닌 황애덕(에스더) 교수와의 만남이다. 황에스더는 여성비밀결사체의 모체인 ‘송죽회’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이 당시 협성신학교의 농촌사업 지도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황에스더는 농촌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YMCA, YWCA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학생들에게 농촌운동에 대한 사명감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최용신은 협성신학교를 다니면서 황에스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입학한 첫 해, 황해도 수안 용현리로 황에스더와 김노득과 함께 농촌실습을 떠났다. 각종 식용품과 일용품을 가지고 긴 여행 끝에 용현리에 도착해보니 문맹과 극빈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과 함께 3개월 동안 최용신을 비롯한 세 처녀들은 글을 가르치고 학예회를 열면서 동고동락했다. 이곳에서 최용신은 관념적으로 생각만했던 농촌운동을 실제적으로 실습하고 농촌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체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다음해 포항 옥마동에서의 농촌실습은 자신의 전 생애를 농촌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게 하였다. 졸업을 앞둔 1931년 10월, 최용신은 당시 수원지방의 밀러 여선교사의 요청과 YWCA의 지원으로 경기도 반월군 천곡(샘골)에 파송을 받아가게 된다. 이미 천곡은 교회가 세워져 부흥일로에 있었으며 선임자인 장명덕 전도사에 의해 학원도 설립되어 있었다.
최용신기념관 소개 비디오
최용신 선생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崔昌熙씨 2남 3녀 중 차녀로 출생(1909년 8월 12일)한 최 용신은 일찍부터 가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928년 3월, 감리교단이 설립한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19세)를 졸업하고 서울여자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를 입학한 최 용신은 일찍부터? 농촌계몽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최용신은 루씨여자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저의 희망은 농촌에 들어가 농촌계몽에 일생을 바치는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고 한다. 이러한 그녀의 사상은 그녀가 졸업시에 쓴 “교문에서 농촌으로”라는 글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오늘 교육받은 여성들이 복더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크게 유감된 바이다. 여성도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농촌으로 하여금 어두움 속에서 걸어 나오게 못한다면, 이 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유달영, “최용신 전기-눈 속에 피는 나무”, 중앙출판공사, 1978년, 255-257쪽)?
최용신 선생 (출처- http://blog.naver.com/tksqksghk46)
1928년 조선일보에 게제된 최용신의 글 (출처- http://sg21.org/html/main/main.htm)
여러 가지로 일하는 여건이 좋은 천곡에서 최용신은 마을을 순회하면서 농민들의 생활상태와 교육에 대한 열의를 타진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교육사업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막상 마을을 다니면서 학원의 신입생을 모집해보니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사람들이 일찍 기독교를 믿어 생각은 많이 깨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파란 처녀의 교육사업에 전적으로 밀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최용신은 만나는 사람마다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하고 권면하면, 마을사람들은 “돈이 없어요, 월사금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실망치 않고 최용신은 “공부해서 잘살아 봅시다”하면서 학생들을 모집한 결과 40명이 되었다. 이들에게 한글, 산수, 재봉, 성서 등을 가르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육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저녁에는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그는 하루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오전반이 끝나면, 곧 오후반을 가르치고, 이것이 끝나면 가정순회지도, 개인전도로 다니며, 밤에는 다시 야학을 인도하였다. 야학이 끝나면 한밤중에 그 동안 미처 돌아보지 못한 동네를 지도하고 오면 첫 새벽이 되는 것이었다. 최용신의 이러한 열심과 헌신적 행동은 마을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헌신으로 인해, 최용신과 샘골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샘골의 모든 일은 최용신의 한마디로 주저없이 움직이게 되었고, 샘골의 어려운 모든 일은 최용신에게로 왔다. 닭을 잡아도,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와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대접했다. 완전한 신뢰였다. 점차 천곡학원이 마을사람들의 신임을 얻었고 학생수는 증가하여 6칸의 예배당이 비좁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학원을 인가하여 강습소로 개축할 계획을 세워 추진하였다. 정식 학원 설립의 꿈을 키우던 최 용신은 교회를 중심으로 “천곡 학술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였다. 최용신은 동네 유지들을 찾아 다니면서 “짐승을 키우는 것보다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 더 소중하지 않느냐”며 설득 작업을 벌여 기금을 모아갔다. 그녀는 기금을 모음과 동시에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나서서 돌을 나르고 새끼를 꼬고 터를 닦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일치 단결하여 학교를 세워 나간지 한달 남짓한 1932년 10월 27일 정초식을 거행하였고, 추운 겨울에도 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여 드디어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러 천곡학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933년 봄이 되어 학생을 새로 모집하니, 예년보다 훨씬 많은 110명이나 몰려오게 되었다. 새로 지은 교사마저도 턱없이 모자랄 정도였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은 반드시 예배로부터 시작하여 보통 6시간 또는 7시간 계속되었다. 보통학교 6년 과정을 단 2년 만에 마치는 것이라 조금은 벅찬 과정이었다. 그러나 보통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전부 다 가르쳤는데, 특히 그녀는 한글, 역사, 성경 등의 과목에 중점을 두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러한 과목을 통해서 신앙과 애국심을 고취시켜주기 위해서 최선을 노력을 다하여 나간 것이다. 예를 들어, 동화시간에는 모세, 다윗, 에스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자수시간에는 한국지도를 무궁화 꽃으로 꾸미게끔 하였고,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이라는 노래를 가르침으로써 민족교육과 아울러 민족신앙을 심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천곡학원은 점점 일제의 미움을 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최용신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서 민족신앙의 민족교육을 계속해나가자, 급기야 일제는 갖은 탄압을 가해오기 시작하였다. 학생수가 시설에 비해서 너무 많으므로 초과 학생을 돌려보내라느니, 조선의 국어와 역사는 가르치지 말라느니 하면서 갖은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학원의 시설미비라는 명목으로 천곡학원의 학생들을 다른 곳으로 빼내는 등 분열정책을 일삼았다. 일제는 사사건건 천곡학원을 운영하는 최용신을 불러댔다. 최용신이 기독교인이며 신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는 점, 역사와 한글,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점 등은 일제가 긴장하는 점이었다.
최용신과 학생들
일제는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 열기를 이미 경험한 터였다. 결국 일제의 조치를 따르지 않으면 학원이 폐쇄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설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떠나지 않겠다는 아이들을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떠나 보내며 해가 지도록 아이들과 대성통곡을 하여야 했고, 일경이 오지 않을까 눈치를 봐가며 우리의 말과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설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이런 모진 탄압을 견뎌내기 위해 오히려 자신에게 더욱 채찍질을 해 나갔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쉴새 없이 가르치노라면 목이 부어오르고 팔다리가 쑤셔대지만, 밤이면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에 서곤 하였다. 또 농번기 때마다 손수 마을 사람들의 논밭일을 돕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학이라 해서 쉴 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천곡을 중심으로 해서 이웃에 흩어진 마을과 교회를 찾아다니며 단기 교육을 시키곤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힘은 그녀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오는 힘이었으며, 교육을 통해서 민족을 일으키고자 한 그녀의 민족신앙에서 온 것이 분명할 것이다. 1934년 3월 최용신은 좀더 신학적인 이론 수업을 쌓기 위해서 일본의 고베여자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은 자신의 오빠와 동생이 공부하고 있었고 어린 시절 부모에 의해 정혼했던 약혼자, 김학준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수학했던 고베 여자신학교(현 세화대학교) 자치회 기록부(1934년 4월 27일)는 당시의 최용신의 심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저는 조선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사명감에 불타 농촌전도에 들어갔는데,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다시 학교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들어오고 보니 그 희망이 이루어져 현재 대단히 기쁩니다.”(“최용신 양의 신앙과 사업”의 저자 홍석창 목사가 84년 도일해서 확인)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3년간이나 중단했던 신학공부를 그것도 이국땅 이국인 사이에서 쫓아가고자 너무 무리해서 공부했던지 덜컥 병이 나고 만 것이다. 처음엔 다리가 붓고 몸이 조금 피곤한 정도였으나 차츰 그 부기가 더해갔고 나중엔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아마 그것은 3년간의 힘들고 고된 농촌사업에 지치고 지친 후유증으로 온 것일 게다. 최용신은 애써 준비해 온 유학의 길을 도중 하차해야 하는 아픔을 간직한 채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은 최용신이 공부를 도중에 하차하고 만 것이다. 최용신은 먼저 고향에 내려가 건강을 회복한 다음 다시 천곡으로 갈려고 생각하였으나 천곡 사람들이 “아파서 드러누워도 좋으니 제발 천곡으로 오라”고 애원하는 통에 그녀는 제 2의 고향인 천곡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천곡 사람들의 기쁨은 대단하였으며 그들은 곧 바로 그녀의 완쾌를 위한 기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누구라 할 것 없이 각자가 좋다는 약을 다 구해 드렸고, 전보다 더 알뜰히 보살펴 드렸다. 이런 정성의 손길로 인해서 그녀의 병세는 차츰 호전되어 갔다. 몸이 좀 회복되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일을 위해 다시 일어섰다. 워낙 책임감이 강하고 부지런한 성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천곡을 위해서 전보다 더욱 열심히 뛰어 다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년 전부터 원조해 주던 YWCA의 보조가 1년 전에 절반으로 삭감되더니 1934년 10월에는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학원운영에 큰 타격을 주어 그 아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최용신의 천곡학원, 혜촌 김학수 화백 그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최용신과 개미저축회 회원
최용신은 이 절박한 상황에서 당시의 여론(女論)이라는 여성잡지에 글을 기고하여 호소하였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의 현상을 여러분 앞에 내어놓고 싶습니다. 내가 사는 이 촌은 우리 조선에 있어서 두메라고 부를 만한 벽촌은 아니외다. 서울서 멀지 않은 서해안의 작은 두메 산골짝이랍니다. 이 촌을 가리켜 근방에서는 교촌(敎村)이라 부르니 이 까닭은 이곳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20여 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학습강습소가 마을 가운데에 제일 높은 곳에 있는데 그래서 이 촌을 가리켜 문화촌이라고까지 부릅니다. 이 강습소에는 근방 십여 동네의 아동이 모여 오는데 그 수가 백여 명이나 됩니다. 이 많은 아동들이나 가정 정도를 말씀하여 보면, 호수가 1,400호 되니 그 중에 1년 수입 150원 이하의 호수가 910호나 됩니다. 특히 빈한한 지방이므로 이 강습소는 그 대중을 가르치는 데에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강습소는 이 지방의 중요한 기관이나 우리는 이것도 우리 농민들의 손으로 독립경영을 하지 못하고 사업가들의 후원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문화촌이라는 이름을 듣고 교촌이라는 칭호를 받는 이 촌중에 비통한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땅을 울리오니 목석이 아니고서야 어찌 볼 수 있사오리까? 이 비통한 울음은 다름이 아니오라 우리의 불쌍한 어린이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강습소가 폐쇄된다는 원통한 울음이었습니다. 사업가의 열성은 경제적 제한이 있어 이제부터는 후원의 손을 끊는다는 소식이 들림에 우리들은 낙망의 눈물, 비통한 울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르칠 줄 알고 배울 줄도 알건마는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습니다. 배움에 굶주린 우리 농촌 어린이들은 장차 어디로 가며 가르쳐 주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어이 하오리까? 우리 농민의 호소를 어찌 다 기필하오리까? 뜻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 주소서.”(1934년 10월 30일)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운 호소를 했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최용신은 막다른 길에서 발벗고 나섰다. 여러 친지들이며 먼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호소하여 어려운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쳐온 것이다. 다시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옛날의 증세에다 식욕까지 떨어져 음식조차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회복되리라 생각하고 약을 먹어가며 수업을 강행하였다. 그때의 사정을 천곡교회 홍찬의 장로는(88년 당시 76세) 이렇게 회상한다. “그 와중에서도 선생님은 학원의 떨어진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운동회까지 개최하였고, 또 수업도 계속해 나가셨지요. 도저히 서서 가르칠 형편이 못되면 앉아서라도 수업을 강행하셨습니다. 보다 못해 우리들이 좀 쉬라고 권유하면, ‘배우러 온 학생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시곤 했죠.”
1930년대 샘골 마을지도
최용신이 거주하던 4칸 초가
밀러 선교사가 기증한 전재풍 목사의 사택 건너방(현 태영 아파트 205동 위치)에 임시 거주하다가
샘골교회 뒤 4칸 초가로 이사, 장명덕 전도사와 함께 거주하였다.
전재풍 목사와 최용신 선생
전재풍 목사는 샘골교회 최초 담임 목회자로 1934~37년까지 시무하였다. 이전에는 순회목회자들이 샘골교회를 돌보았다.
초창기 YWCA 지도자 (1922년)
샘골강습소 낙성식 기념 (1933년)
최용신 사후 1935.3.20 제2회 천곡강습소 졸업생
최용신 사후 1935.3.20 제2회 천곡강습소 졸업생
최용신 사후 1935.3.20 제2회 천곡강습소 졸업생
1936년 천곡교회 하기성경학교
1937년 천곡강습소 4회 졸업생
1937년 천곡교회 부흥사경회 후
1938년 천곡강습소 학생들
샘골교회 전재풍 목사와 최용신 동생 최용경
샘골교회 전재풍 목사와 최용신 동생 최용경
고베여자신학교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장
수원도립병원
최용신 별세 기사
최용신의 묘앞에 모인 제자들, 1935년
최용신 유언
최용신 유언
상록수 전시물
상록수 전시물
상록수 전시물
상록수 전시물
최용신 유언
최용신 소전
샘골고등학교
샘골고등학교 출석부
최용신 추도예배
안종팔 증언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교복
무궁화 수보
전시물
최용신 공적 훈장
2001년 문화인물 선정
건국훈장 애족장
건국훈장 애족장
공적조서
YWCA 회의록
YWCA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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