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의 찬바람에도 굳건한 ‘믿음의 뿌리’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돌발적인 부르심이었지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묵묵히 길을 떠났다. 1세기 전에 한반도에도 그랬을까. 지난 주말 오전 10시2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1시간30분 만에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주도(州都)인 옌지(延吉)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엔 설 명절을 앞두고 고향을 찾은 가족과 친척들을 마중 나온 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출국장은 옛날의 김포공항을 방불케 했다. 옌볜의 산야는 온통 눈꽃으로 뒤덮였다. 영하 20도를 웃도는 매서운 칼바람도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믿음을 꺾지 못했다.

#창립 100주년 맞이하는 옌지시기독교회

옌지에서 가장 오래된 옌지시기독교회는 수상(강변)시장 근처 삼꽃거리(參花街)에 있었다. 내년에 창립 100주년을 맞는 이 교회는 목사 3명, 장로 4명, 안수집사 16명, 권사 64명(은퇴권사 포함)으로 옌볜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 10년 전에는 서(서쪽)시장에 있었는데 1999년 이곳으로 이전해 신축했다. 97년 150명이던 성도들이 10년 만에 4500명(중국인 1000명)으로 늘었다.

수요예배는 오후 6시30분에 시작됐다. 400여명의 성도들이 박수를 치며 찬송가를 불렀다. 본 예배가 시작되자 성도들이 다같이 일어나서 '성령 충만한 우리 교회, 순종하며 기도하고 축복받은 교회, 사명으로 선교하는 교회'라는 교회 노래를 열창하는 모습이 특이했다.

류두봉(52) 담임목사는 '처세의 지혜(롬 12:14∼21)'를 주제로 설교했다. 류 목사는 "바다에 파도가 치지 않으면 배가 움직일 수 없는 이치와 같다"며 "모든 좌절과 두려움, 공포 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하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성령의 능력은 일어난다"고 격려했다. 류 목사는 또 "비뚤어지고 녹슨 자신의 마음을 회개하면 새로운 심령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친이 목사였다는 70대의 한 성도는 "옌볜에는 250개 교회가 있으며 이중 조선족이 70% 정도 차지하고 교인 수는 5만여명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목회자가 되지 못했지만 목사인 아들이 시골교회에서 개척하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옌볜에도 한국처럼 신천지 등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어 골칫거리"라고 말했다.



#믿음의 유산은 강물처럼 흐른다

옌지시기독교회가 유서 깊은 교회라면 하남(河南)기독교회는 신생교회였다. 김두성(52) 담임목사는 96년 가족과 친척 등 17명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정식으로 창립한 해는 99년이다. 김 목사는 사업에 성공해 돈도 많이 벌었지만 30대 후반에 외조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뒤늦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외조부님이 목사였죠. 문화혁명 때 설교한 것을 문제 삼아 1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출옥한 뒤 75년에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교회를 세울 준비를 하라고 하셨어요."

설마 했는데 역시였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마침내 '신앙의 자유'라는 선물이 찾아왔다. 94년 늦깎이로 졸업한 김 목사는 남성도 2명과 여성도 14명으로 한 주택가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듬해 1월10일 개척예배를 드리고 96년 시종교국에서 예배당 출입문을 봉쇄하자 주일 예배를 예배당 앞마당에서 드렸다. 68명의 성도들이 성탄절 날 예배당 앞마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차봉(출입금지) 딱지를 뜯고 교회당 안에 들어가 축하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 등 3명이 치안조례 위반으로 공안당국에서 10여일간 구류를 살았다. 3년이 지난 99년 5월28일 마침내 하남교회로 인가를 받았다. 창고 건물이 예배당이지만 교회 창립 10년 만에 출석하는 성도가 700여명이 넘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고향마을로 유명한 명동촌은 한민족의 중국 이민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명동교회는 1909년 두만강변의 함경북도 종성에서 이민을 왔던 분들이 8칸의 집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16년 김약연(윤동주의 외삼촌) 목사를 중심으로 성도들이 현재의 예배당을 지었다.

명동촌은 종성에서 살던 김 목사 등 142명이 1899년 2월18일 두만강을 건너와 건설한 동네다. 이듬해에는 윤하연(윤동주의 조부) 일가 18명도 이주해 한인촌을 이뤘다. 유학을 공부한 이들은 '밝은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토지를 집단으로 사들여 10%는 학교 터로 떼놓고 농사를 지으며 후손들을 양성했다. 김 목사 등이 교육기관으로 '명동서숙(明洞書塾)'의 전신인 '규암제서당'을 세웠다. 그리고 1909년 명동서숙이 명동학교로 바뀔 때 명동교회가 세워졌다.

93년 용정시는 현재의 명동교회당 건물을 보호 유적으로 지정했다. 94년부터 전시장이 됐다. 교회 마당에는 명동촌을 이룩한 김 목사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돼 있었다. 예배당 입구 지붕 가운데 얇은 각목으로 만든 빛바랜 십자가가 예배당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천금보다 소중한 목숨과 바꾸지 않았던 외삼촌 김 목사의 유언이다.

옌볜=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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