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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로버트 모리슨 (Morrison, Robert)


    ■ 중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Morrison, Robert, 1782.1.5 ~ 1834.8.1] 



       로버트 모리슨 목사는 영국 런던선교회가 중국에 파송한 첫 개신교 선교사로 중국명은 마리쑨(馬禮遜)이다. 그는 중국에서 25년간 사역하며 10여명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했지만 선교 열의는 누구보다 뜨거웠다

       모리슨은 1782년 1월 5일, 영국 노덤벌런드(Nothumberland)에 있는 모패드(Morpeth)에서 스코틀랜드의 혈통을 이은, 청빈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로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리슨이 어릴 때에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생활을 받으며 성장 할 수 있었다.

       모리슨이 태어난 가정은 그의 아버지가 신발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 비교적 가난한 가정환경이었으나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엄격히 지도했다. 1802년 모리슨의 나이 20세 되던 해 모리슨은 일생 처음으로 인생의 슬픔이란 것을 체험했다. 그것은 이 세상 가장 가까이서 가장 존경하던 어머니와의 헤어짐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모리슨의 마음은 공허로 가득 찼지만 그러나 평소에 어머니가 자상하게 가르쳐 준 성경들을 기억하면서 슬픔과 외로움에서 금방 벗어나 위로를 받으며 살아 갈 수가 있었다. 
    모리슨은 열 두살 때에 성경에서 가장 긴 분량의 시편 119편을 하룻밤에 다 외울만큼 총명했다. 어머니가 지나간 세상, 그 어두운 밤의 외로움들을 시편 119편을 외며 잠이 들곤 했다.


       어느 날 모리슨이 그의 인생에 가장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선교사가 되어, 인생을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각오한 것이었다. 모리슨의 이 각오는 그로 하여금 마음을 불타게 했다. 그것은 순간적인 충동이 아닌, 어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강한 도전이었다. 어머니를 여윈 마음의 아픔도 가시기 전 그해 바로 런던으로 간 것이다. 런던에서 모리슨이 혹스톤 아카데미를 거쳐서, 1803년 고스포트(Gosport)의 선교사 아카데미(The Missiona- ry Academi)에 전입하게 되었다. 여기서 모리슨은 중국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중국에 가서 복음을 선교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전신을 사로잡았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중국대륙에 뛰어 들기로 각오한 것이다.

     

       마침 1805년, 모리슨의 나이 23세 때, 런던 선교회에 중국선교를 위한 신청서

    를 제출한 것이다. 그 이듬해 런던 선교회가 모리슨을 중국선교사로 내정하고 본격적인 선교사 훈련을 시켰다. 특히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중국 서적들을 통하여 현지훈련을 하고, 의학 및 천문학 지식까지 갖추게 되었다. 1807년 1월 8일에 목사로 장립을 받고 그 달 31일에 25세의 애띤 나이로 레미탠스(Remitance)호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 배의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었다. 레미탠스호는 모리슨을 싣고 미국을 향하고 있었다.


       모리슨이 레미탠스호를 타게 된 이유는 당시 영국과 중국의 외교관계는 동인도회사 독점으로 관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동인도회사가 대중국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인도회사가 재중국 무역의 전매특권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영업상의 이익보장을 위하여, 다른 목적으로 회사 배를 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모리슨이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다. 모리슨이 레미탠스호를 이용한 것은, 미국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가기 위한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으로 가는 우회길은 멀고도 험했다. 꼬박 110여일 간,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4월 20일 드디어 뉴욕항에 닿은 것이다. 레미탠스호의 항해는 장차 중국대륙에서 겪을 선교사의 길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워싱턴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제임스 매디슨으로부터 중국 광동주재 미국 영사에게 전달하는 소개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매디슨은 모리슨이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모리슨은 매디슨의 소개장을 깊이 간직하고 5월 12일, 트라이던트(The Trident)호에 올랐다. 이 배의 기항지가 중국대륙이다. 대양의 거친 파도를 헤집고 트라이던트호는 중국, 그 수천 년의 역사로 다져진 대륙을 향하여 조타기를 움직였다. 모리슨은 감격에 겨웠다. 매디슨의 소개장보다 하나님이 그를 소개하는 성경이 그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붙들어 준 것이다. 그러나 이 젊은 영국 청년이 장차 세계선교 역사에 큰 금을 그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1807년 9월 트라이던트호는 마카오에 다달았고 모리슨이 그렇게도 그리워하였던 땅이며 죽기로 가오한 땅, 그 중국 대륙에 닿은 것이다. 대륙의 진한 흙 냄새가 풍기는 땅을 모리슨은 힘있게 밟았다. 대륙의 냉기가 모리슨으로 하여금 이방지대의 정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아무도 모리슨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모리슨이 처음부터 그런 형식 같은 것을 생각지는 않았다. 사실 그를 맞아 줄 사람도 거기에는 없었다. 이런 격식은 차차하고 동인도 회사 마카오 주재 대표부의 모리슨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를데 없이 오만하고 거칠었다.

       ‘동인도 회사 소속 상인 이외, 그 누구도 이곳에서 머물 수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왔을 테죠’ 모리슨은 갈 데가 없었다. 돈독히 든 동인도 회사 사람들과는 얘기 상대가 안되었다. 게다가, 이미 마카오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로마 천주교 신부들은 모리슨이 마카오에서 어정대는 것을 눈의 가시같이 여겼다. 9월 7일, 그날은 주일이다. 마카오를 떠나, 광주에 도착하니 밤 8시였다. 거기에는 외국인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이관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오랑캐를 이족이라 불렀다. 이 말을 외국 사람들에게 붙여서 쓴 것은 외국인들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관은, 곧 서방인으로서 중국에 밀입국하였거나 또 입국 목적이 분명치 않는 외국인들을 임시 수용하는 곳이다. 그날 밤 모리슨은 이 이관에 들었다. 이관은 당국의 감시가 엄격한 데다가 여기저기 나붙은 이관 규칙들은 이 젊은 영국 나그네를 더욱 긴장되게 했다. 모리슨이 훑어본 이관의 규칙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외방인이 멋대로 광주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② 외방인의 경우 상무관계로 광주에 머무는 때는, 상관 내에 거주지를 제한한다.
    ③ 외출은 매월 세 번 할 수 있으나 매월 8일, 18일, 28일로 제한하고 매번 10명 이내로 한다.
    ④ 외방인이 이관 내에서 부부의 정을 나누는 것을 금지한다.

       선교사로서의 삶을 꿈꾸고 바치기로 한 땅, 중국 대륙에서, 모리슨은 오랑캐 신세가 되어 수용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온 이상, 이런 것쯤이 문제되어서는 안된다. 얼마 후 수용소를 나온 모리슨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중국인과 같이 행세했다. 중국인의 옷을 입고 그들의 음식을 즐겨 먹으며 부지런히 중국 사람을 만났다. 모리슨의 이런 행동을 철없는 젊은이의 부질없는 모험이라고 하자. 모리슨은 그때까지만 하여도 중국 대륙의 현지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청조는 외국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① 중국인이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
    ② 비상 외인이 광주에 오래 머물 수 없다.
    ③ 외국인에게 서적류를 파는 것을 금한다.
    ④ 마카오 로마 천주교 선교사가 기독교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

       모리슨은 사면초가였다. 그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했던가를 알 수 있었다. 돈이 없었다. 먹을 것도 문제지만 등 댈 곳 조차 없었다. 다행히 화물 창고 지하실 방 한 칸을 세로 얻을 수 있었다. 습기가 차고 창 하나 없는방에서 생활을 했다. 중국 선교 첫 선교사의 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고, 화물창고, 지하실, 그것도 넉넉잖은 공간이었다.


       숨막히는 공간에서 젊은 선교사 모리슨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향하여 가슴을 넓게, 더 넓게 편다. 돈도 없지만, 배고픔을 참아 가며 현지어 공부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몸은 쇠약하여 마침 곤경을 헤맨다. 화물창고, 퀴퀴한 냄새가 저려진 지하실 셋방에 누가 그에게 냉수 한 그릇 받혀 줄 사람이 없었다. 이 때 모리슨은 인간적인 비참과 삶의 좌절이 교차하는 공간을 꺼질 듯 꺼질 듯한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는 모리슨이 광주에 온 지 8개월, 이때 모리슨이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그 절박한 환경에 처했던 모리슨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어제 자네의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네. 나는 그 동안, 최소한 200통의 편지를 썼다네. 그러나 내가 회답으로 받은 편지는 고작 두 통 뿐이야.’ 모리슨의 이 편지에는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서 피할 수 없었던 그 고독한 환경이 엿보인다. 이것은 또 호사스러운 감정이라고 하자. 선교사에게는 항상 추방당할 수 있는 불안과 그런 압박감이 있는 것이다.


       청조가 쉽사리 모리슨을 받아 줄 여유를 가진 것도 아니고, 동인도 회사 역시 무역 이익상 한푼 어치의 도움이 없는 모리슨을 감쌀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마카오 주재 포르투갈 천주교 신부들은 모리슨이 빨리 쫓겨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모리슨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여 있었다. 이 현실의 늪을 헤어나야 한다. 어느날 그는 중대한 단안을 내렸다. 그것은 중국 대륙을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는 동인도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다. 1809년 2월 20일, 모리슨은 동인도 회사 통역 사원으로 정식 입사했다. 그러나 모리슨은 자기 현실에 대한 모순과 심한 갈등으로 다시 방황했다. 이때, 모리슨의 심정이 그의 일기에 그려져 있다.
    ‘나의 선교사 직책은 나의 모든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물며 선교 직무와 관련 없는 다른 각종 사무는 나의 감정과 상반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모리슨이 본의 아니게 동인도 회사에 취직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이런 일방적인 조치는 선교사로서의 신변보장에 대한 안전을 추구한 것이고, 다분히 경제적 타개책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모리슨은 최근 그의 신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즉시 런던 선교회 본부에 보고했다.

    ① 나의 취직은 중국에서 안전하게 거류할 수 있는 신변조치이며,
    ② 본인의 맡은 통역 일은 나의 현지어 학습에 도움이 될 것이며,
    ③ 나의 선교활동에 대한 영국 교회에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일이며,
    ④ 이로 인하여 동인도 회사 주재 직원들이 선교사인 본인을 경원시하 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임.

       모리슨의 이 보고는, 런던 선교회가 모리슨의 동인도 회사 취직을 문책한 데 대한 그 해명으로 보여지며 따라서 이 일로 선교사에게 가해질 수 있는 행정적인 조치를 고려해 주기를 바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모리슨의 동인도 회사 취직 문제는 현지 선교사와 본부와의 적지 않은 파문을 가져오게 했다. 이 일은 모리슨에게 결국 무거운 부담이 되고 말았다.


       모리슨이 동인도 회사에 취직하던 날, 마카오 주재 영국 상무의 일을 보는 모르톤의 딸 메리와 결혼했다. 모리슨이 중국에 온 지 만 1년 5개월 되던 때였다. 그렇게 길고 외로웠던 중국 생활이 끝나고 모리슨은 사랑하는 아내와 같이 마카오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모리슨의 회사 안에서의 일이 1년 중 최소한 6개월은 광주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런 사정을 모리슨은 고난 중에서 만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잔잔한 신혼의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으로 1834년까지 근무하면서, 1818년 말라카에 외국인에 의한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영화학당을 세우는 일을 해내기도 했으며 인쇄소를 설립하여 정기간행물을 발행하였다. 1827년의 재직기간 동안 광둥 ?말라카 ?마카오를 왕래하면서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서의 삶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그 외에도 《중국어사전》(3권, 1815~23), 한역 신구약성서인 《신천성서》(밀른과 공동번역, 1813)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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