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교회의 수난사
일제말기
일제 말기 7년은 우리 민족 교회가 변절한 부끄러운 시기였다. 1937년 이후 중일 전쟁이 일어난 후 일제는 일본과 미국에 유학한 지식층 교회 지도자들을 회유 매수해서 교회로 하여금 일본의 동양침략전쟁 선전의 앞잡이로 만들려고 했다. 주일마다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게 하고, 예배당에는 일본 국기인 일장기를 걸게 하고, 천조대신의 신단을 설치케 하고, 목사가 신도들을 끌고 일본 신사에 가서 참배하게 하고, 찬송가 중에 신앙의 투쟁적 찬송을 삭제하고, 황국식민서사를 주일마다 낭독케 하고, 우리말 주일학교를 금지시키고, 성경에서 창세기와 출애굽기 등 모세오경을 짤라 내도록 하고, 교회 기둥에는 "대동아전쟁 필승", "황국신민 멸사봉공" 등의 구호를 걸게 하고, 교회의 종은 모두 떼어다가 포탄을 만들도록 헌납케 하고, 교회 헌금은 일본군 전투기 구입을 위해 바치도록 하였고, 마지막에는 주일날 공휴일 제도까지 폐지케 했다.
이와 같은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여 교회의 변절을 거부하다가 옥에 갇힌 목사, 장로, 전도사들은 대부분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민족의식이 강한 식자층 지도자들은 중국 땅으로 망명을 하였다. 일본에 유학하였던 지식 높은 지도자들은 대부분 일제의 주구가 되어 총독부 촉탁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목사 일을 했다. 그 나머지는 할 수 없이 순응하면서 일제의 요구를 가능한 대로 피해가면서 견디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신도들은 변절한 교회에의 출석을 거부하고 비공식 가정교회를 지켰다. 이 와중에 2,00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옥에 갇히고 52명이 옥중에서 순교했으며 모든 기독교학교는 폐쇄되었다.
해방이후부터 한국동란까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고 감옥에 있던 신앙 영웅들이 풀려 나오면서 우리 민족의 교회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 교회의 중심이었던 평양에서 친일 성직자들이 회개와 근신을 거부하고 도리어 교권을 이어가려 했다. 출옥 성도 중심의 교회 재건 운동은 거부당한 채로 이런 와중에서 소련군이 진주하고 교회 지도력은 친일세력에서 친미파로 또는 친공파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종교 자유의 제한과 감시 속에서도 1950년까지 김인준, 김화식 목사 등이 이끌던 신학교가 있었고 대부분의 교회들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예배를 계속하고 있었다.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조만식 장로를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를 무시하고, 북한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소련의 계획을 강압적으로 강행하였다. 여기에 장애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점은 소련군정이나 김일성에게 가장 두려운 대상은 북한 땅의 교회였다. 신의주 제일교회, 제이교회의 목사인 윤하영, 한경직을 중심으로 1945년에 기독교 사회 민주당이 결성되었다. 결국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 해 11월 16일 사회민주당 용암포지부 결성대회 때에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일단의 청년들의 습격으로 유명한 신의주 학생의거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이 북한도처에서 교회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북한 땅을 공산화하려는 소련군정의 음모에 투쟁하던 많은 신앙인들이 순교를 하거나 고난을 겪었다. 그 당시 북한 땅에는 10개 노회에 2천여개의 교회와 대략 30만의 교인이 있었다. 북한 교회는 5개 노회를 연합하여 공산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인민위원회를 향하여 5개 항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범교회적 움직임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양면정책을 사용하였는데 강경책과 회유책이었다. 특히 교회를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1946년 11월 28일 평양신학교 출신인 강양욱을 앞세워 조선기독교 연맹을 만들었다. 그 핵심 요지는, 북한 땅을 공산화하는데 있어 적극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북한교회는 여기에 야합하여 공산화에 일조하든지 아니면 신앙양심을 지켜 순교를 택하든지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많은 신앙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6.25 직전에 북녘 땅에 남아 있던 목사들과 장로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에 북한교회에서는 큰 부흥이 일어났다. 비록 목자없는 교회였지만 교회마다 사람들이 가득찼고, 조국의 장래에 대한 통곡 어린 간구와 회개의 기도, 성령의 위로가 충만하게 나타났다. 핍박이 심해지는 와중에 일부는 남쪽으로 피난을 하였고 또 적지 않은 교인들은 당시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있었던 만주로 피신하였다. 또한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로 잠적하여 지금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있다.
6.25 동란 중에 북녘 땅의 3백만명의 피난민들이 남한 땅에 정착하였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신앙인으로 남한 도처에 교회를 세웠다. 1950년도에 북한의 교인 중 소수의 성도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난을 마다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1951년의 1.4 후퇴로 많은 신학생들이 남하하고 적지 안은 수의 목사, 전도사, 장로들이 남하함으로써 이북 땅에서는 공식적인 교회가 완전히 소멸되고 만 것이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후에는 더 이상 그 땅에 공식적인 교회가 남아 있지 않았다.
6.25 이후 북한의 지하교회
북한에는 현재 그 당국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봉수교회가 있고 그 이후 김일성이 자신의 어머니 강반석과 함께 어린 시절 교회에 다녔다는 칠골이라는 동네에 세워진 칠골교회가 있다. 하지만 이 교회들은 순수한 신앙에 의한 교회가 아니라 대외 전시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러나 지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일명 지하교회는 비공식 통로를 통해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1950년 동란이 일어나던 그 해에 김일성 종합대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북한교회 안에서의 부흥이 미국장로교회의 선교부 파송으로 활약하던 종군의사와 목사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전쟁 이후 1958년 평북 용천의 이관화 목사 사건, 1959년 박천에서의 인민학교 여교사 체포와 그 이후 1966년 잔여 교인들의 색출사건,1968년 평남 온천군 운하리의 박 목사 사건, 1974년 10월 함흥에서 적발된 김태용 목사와 교인들 소탕 사건, 더욱이 1970년대 이후 적발된 기독교인들을 평박쑴섬에 수천 명을 유배시킨 일과 최근에 신의주 자강도, 함북, 황해도 등지에서의 지하교회 적발사건 등은 분명 지하교회가 살아 움직이며 성도들의 신앙이 조직을 이루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북녘 땅에는 분명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서 생명을 유지하며 때가 되면 다시 그 잎과 열매를 맺듯이, 고통을 견뎌온 북한의 교회는 분명 살아 숨쉬며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환란의 때를 믿음으로 견디는 북한교회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저들로 이제 연단과 인내를 통과한 열매를 볼 수 있게 하시며, 성령의 강한 바람이 북한 교회에 임하므로 그 땅에 회복되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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