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年代簡表

 

夏 (하)

約前21~前16世紀

商 (상)

約前16~前11世紀

周 (주)

西周 (서주)

約前11~前771

東周 (동주)

約前770~前256

春秋 (춘추)

約前475~前221

戰國 (전국)

約前475~前207

秦 (진)

前221~前207

漢 (한)

西漢 (서한)

前206~公元24

東漢 (동한)

25~220

三國 (삼국)

魏 (위)

220~265

蜀 (촉)

221~263

吳 (오)

222~280

晉 (진)

西晉 (서진)

265~310

東晉 (동진)

317~420

南北朝

(남북조)

南朝

(남조)

宋 (송)

420~479

齊 (제)

479~502

梁 (양)

502~557

陳 (진)

557~589

北朝

(북조)

北魏 (북위)

386~534

東魏 (동위)

534~550

北齊 (북제)

550~557

西魏 (서위)

530~556

北周 (북주)

557~581

隋 (수)

581~618

唐 (당)

618~907

五代

(오대)

後梁 (후량)

907~923

後唐 (후당)

923~936

後晉 (후진)

936~947

後漢 (후한)

947~950

後周 (후주)

951~960

宋 (송)

北宋 (북송)

960~1127

南宋 (남송)

1127~1279

遼 (요)

916~1125

金 (금)

1115~1234

元 (원)

1271~1368

明 (명)

1368~1644

清 (청)

1644~1911

中華民國 (중화민국)

1911~1949

中華人民共和國

1949成立

 

참고용

 

 

 

 

중국역사의 이해(중국사개론)

 

 

1. 중국역사의 이해

우리가 중국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할 몇 가지의 자세가 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자세와 개념의 정립 없이는 중국 역사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큰 오해를 불러와서 역사를 하나의 에피소드나 민중의 전승 담으로 가치를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의 정신적 자세는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편리하게만 외우려고 했던 연대기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는 그 유구한 시간만큼이나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또 중국의 언어나 그 기록을 위한 문자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아서, 또 역사적 사실관계를 당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한 왕조가 바뀌거나 최소한 한 세기가 흐른 후에 각자의 시각으로 해석을 붙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에 대한 시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중국의 정사(正史)라고 하는 것은 한 왕조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대륙전체와 그 많은 인민을 역사라고 하는 커다란 틀로 전부다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중국의 역사는 사실관계의 역사라고 하기보다는 유추관계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누구나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무리함이 없기 때문에 지극히 공상적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의 고대 역사는 신화와 비슷하기 때문에, 또 문자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라도 그 해석의 방향이 천차만별입니다.

세 번째는, 중국 역사는 이중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왕조를 중심으로 한 역사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민중을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역사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어느 것이 진정 중국의 역사인지를 분간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왕조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고, 민중의 역사도 또 중국의 역사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중국역사의 본류(本流)인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편의 기록만을 중국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큰 오류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네 번째는, 중국이 인류문화문명의 발상지다 보니까, 역사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문명이 중국으로 모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관계된 모든 국가나 민족이 또 중국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주변국의 역사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중국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로마의 역사나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역사를 모르고서 중국 역사의 진실로 접근한다는 것은 자석 없이 밤중에 바늘을 집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역사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중국역사에 대해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중국을 오해해서 중국역사를 에피소드로 여긴다든지, 중국역사가 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고 폄하한다든지, 중국 역사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잃고 가장 큰 민족과 가장 큰 역사를 알지 못한 채 세계역사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방대한 중국역사를 왕조별로 비교적 잘 정리한 미국의 역사연구가 오우웬 라티모어의 저서를 기초로 해서 대략을 이해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재해석해 봅시다.

 

오랫동안 중국 역사를 연구한 선교사가 「중국역사는 너무나 요원하고 단조로우며 애매하다.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너무나 공상적이어서 역사와 우화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경역사나 영국사처럼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의 뒤를 이었다」고 하는 식의 무익한 인명록에 인간적 흥미 때문에 때때로 첩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것을 역사라고 가르쳐온 것으로부터 나오는 말이다.

아마도 그 같은 방법으로 배우는 한 중국의 역사는 세계의 그 어느 나라의 역사에 비교해도 과도하게 많은 연호(年號)라든가, 외국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인명의 어려움이라든가, 왜곡과 민담의 복잡한 가감으로 흥미를 끌지 못하는 역사로 이해하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또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 관찰자들 간의  입장과 시각이 제각기 달라 어느 것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하기 매우 모호하고, 당대에 기록 된 것보다는 수 세기동안 구전되었다가 기록되거나 2차 적 창조나 필요한 부분을 서술을 통해서만 중국사를 대하게 되므로 그 사료적 가치를 측정하기란 정말 난해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배운다면 인류의 역사상에 찬란한 광채와 선지자적인 그림자를 던지는 중국역사의 찬란한 면모를 통해 인류의 모든 역사의 용광로를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시아에서 발생한 인류의 가장 원시적인 기원으로부터 철학, 종교, 문학, 예술의 발전이 최고정점으로 이르기까지 중국의 위대한 창조적인 시대의 것을 추월하는 문화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철학과 사상뿐만이 아니라 물질문명의 방면에도 우리들은 구주문명의 기원은 거의 구주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부분이 그들이 창조하거나 발견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종이와 인쇄술, 화약과 나침반, 비단과 직조술, 음용의 차와 음식의 향신료, 도기와 피혁기술 등이 모두 그러하다.

만약에 중국인들이 피혁기술을 창조해 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그들이 들어가 살 수 있었을 것이며, 어떻게 에스키모 인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 말이다.  나침반이 단 1세기만 늦게 발명되었더라면, 오늘날의 구라파의 문명이 아메리카로 이동하는데 몇 세기를 더 많이 흘려보내야 했을지도 짐작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자랑으로, 심지어는 우월하게 까지 거들먹거리며 중국역사를 하나의 만화로 격하시키려는 그들의 역사를 어떻게 지켰을 것이며, 성서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의 그 논거는 중국의 종이와 인쇄술이 아니면 또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말이다.

역사에는 고정된 기점은 없다.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도 언제나 더욱 먼 옛날로 갈 수 있다.  역사가들이 기점을 정하는 이유는 연구를 거기서부터 시작하기 위한 일종의 기선을 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유럽인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연구하여 수많은 추리를 끌어다 붙이고 사실로 왜곡하는 것에 비하면 중국사는 아주 많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도 남을 것이다.

역사 안에는 얼마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 희미한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점차로 커다랗고 먼 사실을 발견하며 그것을 지식의 체계로 모아 역사가 오늘날에 와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일부분은 사실, 일부분은 전설, 그리고 일부분은 추측에 불과한 일종의 증거를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역사를 다루다보면 연구자의 지극히 인간적인 요소가 가미되기 마련이고, 또 다시 후대의 사람들은 그 가미된 역사의 진위를 따지느라 또 세월을 흘려보낸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보는 기선을 언제로 잡느냐? 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부연하면 사실을 보느냐? 역사를 기록한 사람의 인간적 추측과 가미된 요소를 중점으로 보느냐? 에 따라 우리가 전설을 향해 가느냐? 역사의 진실을 향해 진일보하느냐? 의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바로잡고 인류가 지금까지 인정한 최고의 먼 역사적 기점 위로 가뿐하게 나라가 보자.

 

2. 은(殷), 전설과 역사의 혼재.

중국사의 서광은 현재로 BC 1766년으로부터 1122년에 걸친 은대(殷代)에 놓여지고 있다.  4,50년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BC 1100년경으로부터 시작한 주대(周代) 이전에는 중국에 믿을 만한 역사는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었고, 또한 그 이전의 은대라든가 다시 하대(夏代)의 제제왕(諸帝王)의 연표와 그들의 기록물 등을 포함한 막대한 전설이 전하여 지고 있으나 이들의 재료는 전부 역사가에 의하여 「선사(先史)」기록의 표찰을 붙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500년의 시간이 전설과 사상의 국토로부터 벗어나서 확실한 역사의 국토 안으로 붙여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500년을 더 살게 된 것과 같으니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말이다.  중국사의 기선이 周代의 초기로부터 殷代의 중기까지 밀고 들어가게 된 일은 극히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후의 고고학의 신발견은 중국역사의 기선을 다시 멀리 서광대의 더 깊은 곳으로까지 확대하려는 고무적인 양상이 나타나고 잇다.

70년 전에 현재로서는 은의 영토로 되어 있었던 황하지방에서 수골(獸骨)이라든가 귀갑(龜甲)에 문자를 조각한 중국의 그 옛날의 서찰(書札)의 파편이 발견되어 나왔다.  고대중국문자의 形態는 벌써 정확하게 2500년 이상을 경과하고 있는 청동제품부터로 알고 있었으나 조잡한 방법으로 조각하여 붙여진 부호는 그것 보다 훨씬 오래 전 것이다.  중국연구가들이 성대한 준비를 갖추고 일어나게 된 동기와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중국문자형의 변화에 관해 오랜 세월에 걸쳐 연구한 결과는 서양의 언어연구에 다년간 사용되어 온 것에 뒤지지 않은, 진보한 비교연구법에 의하여 이들의 갑골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고대자료의 모든 가치가 명확해진 것이다.  갑골문자의 많은 내용이 「점술」이었다.  사람들이 전쟁이나 수렵에 나서기 전에 그들은 먼저 무운(武運)이나 천후(天候)를 기원하는 질문을 각인한 것이다.

다음에 얕은 구멍을 내거나 혹은 움푹 들어간 곳을 긁어서 뚫은 다음에 그 귀갑이나 수골에 뜨거운 열을 가한다.  충분히 가열시킨 다음에 다시 차게 식히면 뼈나 껍데기는 두터운 부분과 엷은 부분으로 팽창률과 수축률이 달라져서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은 처음부터 뚫어 놓은 구멍으로부터 넓어지는 속성이 있다.  귀열(龜裂)이 그리는 문자의 모양을 보고 점술사는 원하는 질문에 대하여 길흉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 같은 종류의 점술은 사람들의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상의 필요에 직접으로 결부되었으므로 특별히 명료한 증거로 남겨져 있었다.  이들이 바로 은대의 사람들이었다.

이 같은 신탁(信託)의 유물과 같이 그들의 연대기의 유물의 단편이나마, 또는 그 반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들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헌의 두 가지의 型이 상호간에 다름을 설명하고 있다.  殷代의 중국인이나 「로마시대」의 희랍인이 기록을 만들었을 때 이들은 이것을 양식화한 것이다.  인간의 여러 모양의 행동은 몇 개의 유형으로 압축되고 여러 모양의 사건은 세분된 언어와 행동의 유형에 따라서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갑골문자는 개개의 종류의 자료다.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행동이 기록되던 이전의 또는 실행되는 이전의 행동의 계획이거나 아니면 행동에 관한 관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점술적 질문과 회답과는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명확하게 殷人자신들만의 전통에 따라서 묻거나 듣는 것이지만, 당대에는 특별하고도 현실적인 것이었다.

역사의 대부분은 행동한 것과, 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기술하는 것으로서 역사가는 다만 분석하고 추측하며, 대조 교정하여 기술이 실제와 어떻게 정확히 일치하는가를 확증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술적인 자료는 사람들 자신들이 행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의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뜻이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사고방법을 기록한 것이며 또한 그들이 실제로 행한 것을 바로 행하려 할 때 이에 관심을 표시하고 있는 그 기록인 것이다.

殷代는 漢代에 復原되어 그 이후 많은 해설이나 또는 해설의 해설까지를 붙인 모양으로 전하여 내려온 중국의 정사로서 일찍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殷代가 중국역사상에 실재한 것인가 아닌가에 관하여 오랫동안 의문시되어 왔다.  殷代에 관한 고대의 여러 說은 역사라고 할 수 없는 애매한 추상적인 전설로 생각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수골과 갑골의 자료는 그들 殷人의 수령들의 이름을 확인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지배자들의 대대로 계속되어 내려온 순서가 그로부터 1000년 이상이나 뒤에 와서 漢代의 학자가 써서 남긴 계승(繼承)의 순서와 정확히 합치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漢代의 학자들이 써서 남긴 역사의 모양에 압축한 단편적이 자료 중에는 殷代보다 더욱 앞의 夏라고 불리는 일대에 관하여 전하여 오는 부분이 있다.  그 역시 夏代의 지배자의 이름을 표시하고 있음으로 보아 역시 중국의 정통한 역사는 夏代부터가 아닌가? 하는 신빙성에 무게가 주어지게 된다.

「夏나라」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하인(夏人)이 중국인의 정통일 뿐만 아니고 진정한 조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殷代의 자료가 「정통적」 중국사를 확증한 주목할만한 방법에 의하여 대단히 확실시되게 된 것이다.  殷人의 문자도 또한 이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殷의 갑골문자는 그것 보다 1000년 이상이나 뒤의 청동기물의 문자에 비하면 「원시적」인 것이며, 그 자체로는 또한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중국문자의 形에 비교하면 역시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더욱이나 殷의 문자는 그 자체로 보아서도 결코 원시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벌써 수 백 년 간의 진화를 이룩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서 마침내는 이 중국의 대단히 오래된 역사에 관한 새로운 자료는 전체로서의 중국사의 위에 특별한 각도에서 하나의 빛을 투사하게끔 하게 되었다.  이 같은 자료는 역사학자와 같이 사회학자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그리고 바르게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자국의 최고의 역사에 관하여 독창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 자국의 후대의 역사에 대하여 신선한 견해를 가지는 데까지 이른 위대한 역사의 해석이었던 것이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효도의 교의(敎義)와 그에 따른 아버지의 위신, 재산, 권위에 관한 관념인 것이다.  이 같은 敎令은 봉건시대의 왕후장상이 그의 소유물이나 전리품을 자손에게 내려 주려는 욕심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성장한 것으로서 왕조시대가 되고서 나라의 전체에 파급되는 제왕의 권위가 일가의 위에 파급되는 아버지의 권위에 비교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형식을 띠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영원한 옛날로부터 확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무엇보다도 오래된 근거가 필요하게 되어 여러 가지로 탐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발견된 최고대(最古代)로부터의 증거의 연구에 사회학적 방법이 많이 채택됨에 따라서 前古典的 시대에 유산이 대대로 전하여 내려온 방법에 의한 고전의 해석을 이상히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타국들에도 있었던 것과 같이 중국에도 재산과 가족이 父系에 의한 것이 아니고 母系에 의하여 이어 받은 시대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증거는 보존되고 있었으나 후대에 와서 하나는 다만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남자가 주재하는 부족과 가족에게 권위를 주는 일에 있어서 구체적, 사회적 필요가 발생하는 까닭에 그의 고대로부터의 증거가 새롭게 왜곡되었을 것이다.

갑골문자는 우리들에게 기원전 1400년 정도의 중국사에 합당한 기록으로 주어지는 것이 된다.  殷의 지역에서 발굴된 골기(骨器), 도구, 무기, 거기에 다시 성벽이나 요새의 잔재 등 관한 연구에서 당시의 중국이 어떠한 사회였는지 비교적 명료한 상상이 그려진다.  그것은 결코 원시적인 사회는 아니었다.

북평(북경)에서 한구(漢口)에 가는 철도연변, 현재 개봉시가 있는 부근의 안양(安陽)에는 번화한 문명도시가 있었다.  그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 싸여 비교적 넓은 범위로 퍼져 있었으며 그 외에도 몇 개의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사회의 수도다운 크기의 도시였다.

이 도시의 주민은 예부터 발달된 화장실과 항문을 마무리하는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이었으나 또한 아시아의 각지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일종의 수렵(狩獵)도 한 것이다.  그 수렵이란 길게 한 줄로 서서 농민들이 차차로 반원형으로 좁혀 가면서 한쪽으로 몰면 귀족들이 마차에서 활로 짐승을 사살하여 잡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농작물은 수수를 주로 하고 수수의 곡신(穀神)은 가장 중요한 신의 하나였다.  그밖에도 가족이나 부족의 조상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고 제사 지내기도 하였다.

그들은 또한 벼도 알고 있었으나 이것은 지방적으로 재배하거나 아니면 멀리 남방의 양자강지방에서 통상으로 입수하기도 하였다.  소도 알려져 있었으며 그 고기는 식용으로  조리하였으나 밀크나 버터 등의 유제품을 만들거나 사용한 증거는 없다.

이것은 중국인의 진화의 선이 가축이 없는 농업으로부터 동물을 갖게 된 농업으로의 진행을 보여 주는 유력한 증거다.  만약에 중국인이 처음에 유목민이었다가 나중에 정주하여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면 그들이 밀크의 이용법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중국인은 인도인의 조상이 처음에는 분명히 목축민이었다가 나중에 와서 농민이 되고 도시생활자가 된 것과는 상이한 것이다.

고대의 인도 문헌에는 그 점을 접촉할 수 있으나 중국문헌에는 그것이 없다.  인도인은 밀크나 버터를 쓰고 있으나 중국인은 쓰지 않고 있다.  또한 밀크와 버터는 인도에 있어서는 의식적, 종교의 의미를 갖고 있으나 중국에 있어서는 그 같은 면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기원전 1400년 그들 중국인의 농업기구는 또한 돌로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중국인은 석기의 농구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확실히 운하를 파고 물을 끌어 와서 농작물에 대어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기술상의 농업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 하면 관개(灌漑)는 에이커 당의 수확과 평방 마일 당의 인구를 증가시킨 이외에도 이렇게 하여 얻은 잉여의 곡류로서 도시에 집중하여 스스로는 농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중국인이 벌써 관개에 성공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데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먼저 평원의 평탄한 구릉은 물의 분배를 용이하게 하였으며 우물을 팔 수 있었다.  북중국에는 지금도 널리 행해지는 고간식(枯桿式, 기둥을 세우고 그 끝에 가로로 장대를 걸친 후에  막대저울의 원리로 한 쪽에는 큰돌을 매달고 한쪽 끝에는 항아리를 매달아 적은 힘으로 우물물을 퍼 올리는 기구)에 의한 관개는 토지를 대단히 깊이 팔 필요가 없이 물을 사방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기후는 비교적 불안정해 건조한 해가 계속되고 대단히 심한 건조한 해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다.  이 같은 기후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사람들은 우량의 결핍에 대비하고 또한 수확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더욱 더 관개에 의존하였다.  이 특별도시의 규모나 왕후의 커다란 墓室의 깊이라든가 건축물의 토대 등으로 보아서 당시의 사람들이 관개에 필요한 토목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년의 식량공급이 충분하게 보증되지 않았으면 그 같은 인구가 도시에 집중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농민이나 일부의 직업인들이 돌의 도구로 일을 하고 있는 반면, 귀족은 호화스러운 청동세공의 기술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청동 판을 덮은 마차나 마구를 썼으며, 청동의 투구와 요대, 검 등을 사용하였다.  기술이 대단한 직업인은 아름다운 容器를 주조하여 헌납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예술사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의 몇 개는 그의 초기의 시대에 속하고 있다.  주물의 기술은 결코 원시적인 것은 없었다.  주형(鑄型)을 랍형(蠟型)의 둘레에 바짝 녹인 청동을 유입하면 그의 랍형이 타버리는 방법 랍발형(蠟拔型)의 기술이었다.

이설도 잇는데, 청동을 사용한 귀족들은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방으로부터 침입하여 들어 와서 석기를 사용하고 있던 중국인농민을 정복한 이민족이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조직, 종교 기타 어떠한 것에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는 그 같은 사실을 증명할만한 아무 증거도 없다.  청동의 제조법은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었다는 것과는 관계없이 중국 내에서 독자로 개발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며, 그렇지 않으면 정복민족의 현실의 이동을 수반하지 않고 석기시대의 느릿한 여행과 지식의 전파에 의하여 중국에 들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같은 종류의 역사상의 문제의 중요성은 청동이 나타난 시대에 중국은 벌써 석기사용의 기초 위에 높은 문화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나 없었나에 있다.  중국은 통상이나 발견을 통하여 청동이 나타났을 때는 벌써 고도의 석기사용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용이하게 청동기술로 이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에 사용의 사용을 한층 더 성대하게 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 주로 원료의 공급과 수송이었다.  이 같은 문제는 그 어떠한 문화의 역사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하나의 고도의 기술은 벌써 상당한 고도의 발달을 이룩한 기술에는 비료가 되지만, 너무나 저급한 기술에는 고도의 기술이 어떤 보탬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삼아 야만인에게 칼을 줄 수는 있으나 칼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들이 아주 미개한 원시인이라 하더라도 칼을 쓰는 관념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칼을 제작하는 관념을 가지는데 있어서는 그들이 어느 정도의 기술을 가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미국에 건너간 초기의 백인은 인디언에게 금속의 사용을 가르쳤으나 인디언의 기술은 너무나 지나치게 뒤떨어져 있어서 백인의 너무 급속한 진보 때문에 결국은 인디언의 그들 자신의 제철기술을 낳지 못하고 멸망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 즉 신석기시대가 한창일 때 벌써 청동을 사용하고 있었다.  殷의 청동문화는 이 석기시대의 뿌리로부터 직접 출생한 것이라 생각해도 결코 무리가 아닌 것이다.  금속은 서서히 석기에 대신하여 변하여 갔다.  그래서 수백 년 간은 석기와 금속이 병용되었다.

철이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500년경부터다.  중국인이 경이적인 계속성을 증명하는 사실의 하나는 오늘날 우리들이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 농민이 곡류를 베는데 사용하고 있는 작은 낫(소겸,小鎌)을 보면 그 낫이 날 크기와 形狀도, 사용하는 방법까지도 대개는 그곳의 100야드 정도 앞의 장소에서 발굴된 돌의 刀物과 거의 같다는 사실 볼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라 서북중국의 여러 지방에 있는 이들과 같은 농민들은 석기사용 민이 수 천 년 전에 파낸 것과 꼭 같은 구멍을 파며 살고 있다.  다만 틀린다면 고대인은 벌거벗은 단애(斷崖)의 정점에서부터 구멍을 파고 살았던 것이고, 근대의 혈거인(穴居人)은 그 단애의 횡복(橫腹)에 파고 살기를 좋아하는 점이라 하겠다.

殷代는 자세한 년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기원전 1700년경에 시작하여 1100년경에 끝났다.  그의 지배자나 인민도 다같이 중국인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신체적 특징이 현재의 중국인과 닮아 잇기 때문이다.  殷代이래의 중국역사상에 나타난 그 어떠한 침략이나 정복에 있어서도 근본의 뿌리를 수중에 매몰하고 마는 정도의 민족대이동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역사의 줄기는 벌써 먼 옛날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민족 또는 그의 지배자도 타지방에서 살러 들어온 이주자 혹은 침입자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殷人은 그들 자신과 대단히 닮은 타민족과 종종 전화를 교환한 사실을 알고 있다.  중국인만큼 정치적으로 거대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같은 것을 증명하는 것은 殷의 「首都」와 같은 城塞의 주위에 각각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다수의 「동족국가」인 것이다.  이들의 집단 중에서 아마도 殷은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력한 나라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殷은 결코 거기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며 이웃 여러 국가의 전부를 곧바로 평정하거나 통일할 수는 없었다.  일군의 나라들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만한 압도적인 세력은 수백 년 간에 중국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3. 周代, 봉건주의시대(封建主義時代)

殷에 이어서 周代는 기원전 1100년에서 221년까지 계속되었다.  殷을 정복한 周는 현재의 협서성(陜西省)의 서방에 살고 있던 문화가 낮은 민족이었다.  周는 처음에 독서마저 할 수 없는 민족이었으나 마침내 중국을 900년에 걸쳐 지배하였으며, 또한 중국 역사상에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도 복잡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周는 외부에서 殷에 들어 와서 이를 정복한 외국인 혹은 오랑캐는 아니었다.  그들은 殷과 동일한 문화의 시원으로부터 나온 중국인이었다.  殷은 일찍이 황토질의 고원지대의 풍요한 동쪽에서 순조롭게 진보를 시작하였으나 여기에 반하여 周는 토지는 메마르고 물을 결핍된 지방에서 훨씬 뒤떨어진 성장을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殷은 그들은 오랑캐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단순한 지방의 종족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周人은 殷을 모방하고 정치적으로는 殷였보다 우세하였지만은 비교적 조야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고고학자가 周代를 청동기시대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기, 도구류 청동을 사용한 것은 먼저 殷에 의한 습득이었으나 周代에 와서 최고의 발달을 이룩한 것이다.

周代는 중국 문화사가들이 고전시대라고 부르며 그리스의 황금시대에 곧잘 비교한다.  그것은 ꡔ춘추(春秋)」나 「시경(詩經)」과 같은 위대한 중국고전을 낳았으며 이들의 고전들은 바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중국사상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위대한 철학자들, 공자, 맹자, 노자, 묵자 등은 모두가 이 시대의 사람들이다.

周代의 사회는 명확한 봉건적 사회였다.  중국에 봉건주의가 발생한 사정은 아주 명료하다.  황토질의 고원의 계곡 사이 또는 계곡이 계속되는 곳에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봉건적 규모의 작은 전쟁을 당하여 방위의 용이한 봉건사회를 이룩하는데 아주 좋은 토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周代 중국 황토질 토양은 관개가 용이하였으므로 반렵반농(半獵半農)의 원시적 혼합경제는 점점 집약적 농업으로 옮아갔다.  관개는 운하를 파는 것 이외에도 수리권(水利權)을 규정한다든지 공동체 소유의 관계설비를 방위하기 위하여도 공동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관개는 에이커 당의 수확과 평방 마일 당의 인구를 증가시켰다.

풍요한 저축 고는 약탈당하기 쉬우며 관개설비는 공격에 노출되기 쉬웠다.  여기에서 집약농업을 평화적으로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무인계급에 의한 방위가  필요하게 되었다.  무장(武將)에 이끌리는 군대의 병역부과와 관개설비의 건설유지사업을 위한 집단노동의 할당을 조정할 필요가 생기며, 이 같은 사정은 결국 군사적 지배와 민사적 지배를 독점하는 지방귀족의 발달을 돕는 결과가 된다. 

周代의 봉건주의는 결국 일종의 세포구조 형태의 사회를 가져왔다.  각 세포는 곡물을 안전하게 저장하며 주변 마을의 작은 농촌을 방위하기 위해 수비병을 배치한 성벽도시를 가지고 있었다.  성벽도시는 동시에 촌락으로 향하는 의료, 도구, 집기, 기타의 각종 상품을 생산하는 수직(手職)의 중심이기도 했다.  이들의 각 세포는 겨우 30마일에서 60마일 사방, 즉 도보나 차로 1,2일 이내의 곳을 활동의 범위로 한 것이다.  그것은 곡물이나 일용품의 수송이 그 이상의 원거리에서는 경제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부터 계속 後代에까지 또는 바로 지금의 근대교통이 확산된 현재에도 중국의 농촌촌락에는 이 같은 세포구조의 그림자가 얼마간은 남아 있다.  원래는 주변의 농촌을 내란이나 약탈로부터 방위하기 위하여 건설되었던 성벽도시는 지금도 볼 수 있으나 이들 도시들은 성밖의 농민을 위하여 곡물을 저장한다든가 생활에 필요한 수공업제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계속하여 왔던 것이다.

봉건중국에서는 봉건구주와 같이 주권의 구체적 단위는 국민이 아니고 봉건영토의 영지(領地)였다.  그렇기 때문에 周代의 제왕들은 광범위하게 넓혀진 문화의 중심의 대표자였으나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각 영토의 개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행정을 행하는 통일국가의 지배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봉건주의 범위 내에서 몇 사람의 대귀족들에게 진공(珍貢)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불과하며 이들의 대귀족은 또 각각 같은 방법으로 보다 약소한 귀족에게 공순(恭順)을 요구한 것이다.  周의 지배자들도 또한 각자의 사유지를 소유하며 이 사유지에 대해서는 제왕으로서가 아니고 봉건귀족으로서 정치를 행한 것이다

周의 首都는 서방(西方), 현재의 협서성의 서안 부근에 약 300년 정도 계속 하였다.  그로부터 기원전 771년이 되어서 그들과 같은 종족이었던 「서이(西夷)」에 의하여 패배하고, 그 후에 周는 首都를 동쪽으로 옮겼으나 이로 인하여 반대로 殷의 영토였던 북방의 河南지방은 다시 중국문화의 중심이 된다.

황하하류의 이 대평원의 토지는 봉건주의를 포기하고 다음의 단계로 발전하는데 적합하였다.

소귀족들은 방위에 유리한 적은 곡간(谷澗)에 머무르면서 몸의 안전은 보호되었으나 각자의 봉건영토를 확실하고도 영구적인 경계에 의한 상호간의 구획이 될 수 없는 대평원의 생활에서는 대규모의 건설사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업을 행하는 데는 봉건영주들은 상호간에 공동적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게 되어 차례로 새로운 대규모의 동맹이 만들어지고 여기에서 나중에 와서 민족국가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협서성의 황토질의 계곡은 이른바 「서강(西疆)의 見張役」이라고 말하는 세습귀족이 지배하는 변역(邊域)이 된 것이다.  이 계통으로부터 진(秦)의 봉건국가가 발전하여 왔으나 秦은 기원전 3세기에 와서 周의 계통을 타도하고 하나의 새로운 확실하게 집권한 帝國을 만들어 낸 것이다.  周代의 후반은 기록도 잘 완비되고 연대도 명확하게 되었다.

그 기록 중에는 周朝의 위신이 추락해 封建諸國이 차례로 독립을 시작했고, 쇠약해진 周朝를 통제하려고 서로 전쟁을 하더니 마침내 周帝國을 河南의 북방의 중요하지 않은 小領土로 몰아낸 사정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周帝國이 그 같이 통제된 것이 주권상의 변동이 발생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와 동시에 중국문화에 지배되고 중국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으로 가득 찬 지역은 점점 넓어졌다.  그것은 양자강 유역의 지방에 현저하게 많았다.  양자간 유역의 남부 諸國間의 전쟁은 수백 년 사이에 황하유역의 北部諸國의 同種의 전쟁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이들의 여러 전쟁결과는 양자강과 漢江이 합류하는 지점과 가까운 현재의 한구시(漢口市)가 있는 곳에 대초국(大超國)이 일어났다.

超의 지배자는 周朝 제2왕의 신하에서 나왔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의 국민은 북방 중국인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초나라는 양자강을 따라 내려오더니 해안까지 넓혀지면서 여러 왕국을 정복하여 갔다.  북방에 지배권을 확립한 나라가 아직 나타나기 이전에 남방을 지배하게 되었다.  결국은 周代의 종말을 고하는 최후의 격전은 이중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것은 미해결의 북방지배의 문제인 동시에 중국은 그의 중심을 황하유역에 둘 것인가 양자강유역에 둘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최후의 승리를 얻고 全中國을 단일 帝國으로 통합한 나라는 秦이었다.

중국철학의「師父」인 孔子, 孟子, 老子는 다같이 周代의 後半 끝없는 戰亂과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변동의 시대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났을 때 벌써 中國은 옛날부터의 高度文明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여 그들이 그저 端座와 명상만으로서 중국철학을 만들어낸 것처럼 오해하여서는 안 된다.  그들이 위대한 철학자로 된 것은 그들이 변동의 시대를 호흡하면서 살았다는데 있는 것이다.  目前에 일어나고 있는 변동은 사람들을 사고하게 하며, 생각하는 쪽으로 달리게 한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벌써 풍부한 사상의 기념물, 傳說, 口碑, 문학, 종교, 사회제도 등을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과거를 다시 한번 일으켜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적 사건이나 문제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과거 가운데서 더욱이 의미 깊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골라내어 이것을 현재에 맞추어 보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노자가 그의 自然力에 관한 철학을 구축하였을 때 그는 당시에 벌써 옛 것으로 되어버린 중국의 자연에 관한 생각에 어느 정도 저버리는 바가 있었다.  그의 철학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적인 것이었으므로 그 후 수백 년 간에 神秘主義的 요소를 다분히 붙이고 보탠 것이다.  사실, 道家의 학문(노자의 철학은 이렇게 불린다)과 구별하였을 때의 통속의 道敎는 魔術과 奇蹟의 거대한 저장고다.  현재의 형태의 도교는 유교나 불교로부터의 借入이라드나 超自然的인 전설로 재수식(再修飾)된 것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공자의 철학은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는 개인과 가정, 국가를 위하여 일정한 윤리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개인과 가정, 국가와의 지위와 기능 모두가 변동하려 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또한 그가 古來의 說이나 口碑를 해석하여 바로 고치며 이것은 새로운 바람과 경향(傾向)을 불러 일으켰으며 마침내 이 경향은 경향으로 끝나지 않고 지배적인 규준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敎義는 중국 사회제도의 고전적 규범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敎義의 중심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順從이며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책임과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권위였다.  그리고 그 敎義로는 나라와 가정이 상이해서  군주는 국민이라는 가정에 대하여 가부장적 권위를 가지고 임하며 官僚群이 계급제도는 마치 부자형제의 하나의 거대한 가족구조와도 같이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공자가 수집(蒐集)한 당시의 이미 먼 옛날의 것으로 되어 있던 여러 자료 중에는 詩와 口碑가 있었다.  공자시대보다 훨씬 이전에는 사회도 가정도 혼인도 兩性關係도 재산소유권도 반드시 공자가 理想으로서 배울 만 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오늘에 남아 있는 형태로서 전통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바와 같이 유교적 고전 중에는 구약성서 중의 몇 개 구절이 그러하듯이 옛날의 문맥으로 보아서 그렇게 먼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성서의 「야고보서」 중 「솔로몬」의 歌詞의 章題와 고대 히브리語의 「솔로몬」의 歌體의 내용을 비교하여 보면 공자의 경우와 비슷함을 보여 주고 있다.

 

4. 중국제국의 탄생

기원전 221년 중국최후의 獨立封建帝國은 대정복자 秦의 始黃帝에 붕괴하고 全中國은 처음으로 단일의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이 당시 로마와 카르타고는 서로가 그 유명한 三大戰爭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고 카르타고는 하니발이라는 영웅을 전설에 남기고 결국 괴멸하고 없었다.  중국의 제국형태의 정치는 기원전 221년에서 기원 1911년까지 계속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침략이나 내전에도 불구하고 2000년 이상에 걸쳐서 계속한 정치형태의 역사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

그 기록을 서양세계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자.  앞에서와 같은 기간에 서양역사의 중심무대는 이태리에서 프랑스로, 스페인으로, 영국으로, 대서양과 북미주로 옮아갔다.  이에 대조하여 중국의 역사는 폐쇄적이고 정체적인 것 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중국이 그 자신의 내적 발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 극적인 흥미와 全人類의 년대기에 있어서 의미의 진가를 알기 위하여서는 그 발전의 주요한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진의 시황제를 중국의 통일 자로 부르는 것은 약간 과장된 면이 있다.  그가 이룩한 것은 중국각지의 諸王國들이 독립과 분열 중에서 서로 생존을 계속 할 수 있는 선택을 강요하는 방법으로 봉건세력을 파괴한 것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봉건왕국들은 시황제와 전쟁을 해야 했고, 분열을 선택한 경우에는 오로지 그에게 복속하는 것으로만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발휘한 압도적인 군사적 공격력은 여기에 필적할만한 수송과 경제조직, 정치행정의 장악력을 수반하지 못하였다.  그의 군사적 근거지는 중국 서북 단에 있으며 이 변단(邊端)에서 그는 중국내부로 종횡의 진출을 시도하면서 중국봉건주의의 정치구조뿐이 아니라 또한 그 사회질서도 차례 차례로 격파하여 갔다.

그의 사후, 정복된 강토는 분해되어 격렬한 내전시대가 계속 되었다.  더욱이 중국인은 이 혼란으로부터의 탈출로를 봉건주의로 복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몇 사람의 지배자는 이것을 마음 속으로 생각은 하였지만, 봉건국가로의 회귀와 그 체제의 안정을 꽤하지 않고 끊임없이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중국이 오늘  날에도 거대한 단일 국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극도의 혼란기에 전 중국인이 하나의 민족이며 통일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자리하므로 서 가능해진 것이다.

진나라의 멸망 후에도 봉건체제로 복귀하지 않고 통일된 중국의 단일 제국에 대한 희망을 선택한 것으로부터 오늘날의 중국이 형성된 사실을 주지해야만 한다.  중국인은 진시황이 만들려고 마음먹은 것과 같은 종류의 제국을 다만 그보다도 정교하게 재통합하는 길만이 전진을 보장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 후 몇 번이고 제국의 건설이 실현되었을 경우에 그것은 진시황이 시작한 변단지방으로부터가 아니라 나라의 중심부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 있다.

 

5. 漢 代

그런 중국인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룩된 신제국은 기원전 205년으로부터 기원 221년까지 계속된 漢王朝였다.

漢代는 그 중기로 기원전 9년에 한 역모자 왕장이 나타나서 왕위를 빼앗은 때문에 단기간에 중단되었다.  이 중단 시기를 경계로 하여 한대 전체를 前漢과 後漢으로 나눈다.  한대의 건설자는 황하와 양자강의 중간을 흐르는 회하(淮河) 유역의 평지로부터 왔다.  지리적으로 말하면 그는 북방의 봉건 諸王國의 잔해와 南方의 그것들과의 중간 입장을 점하므로 해서 그 세력을 굳힐 수가 있었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그가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은 그 자신이 봉건주의의 부활을 기획하는 순귀족이 아니고 오히려 말단관리나 法外土匪등의 경력을 가진 인간의 덕분이었다.  옛 정치형태의 붕괴에 의하여 버려져서 토비로 유출된 가치 없는 인사들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그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속하여 있던 토비들을 정규군으로 조직하여 점차 그 조직을 확대함에 따라서 군사력을 기르는 한편, 지배 하에 들어온 경제적 요지에는 수하인이나 혈연자를 배속하는데 따라서 정치적 권력을 확립하여 갔다.

점점 중국의 남은 부분의 전부를 손에 넣을 야망으로 그는 결전을 결심한다.  그렇게 하여 그는 전략적인 서북변단에 들어가 거기에 수도를 건설한다.  그리고 한번 이 변단에 근거를 잡은 다음에 그는 중국의 다른 부분의 전부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기 위하여 두 번 다시 이곳을 갈 필요가 없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정복한 나라를 감시하고 공고화하기 위한 요지로서 이곳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이 서북변단은 많은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장안(현재의 서안)의 수도는 위수(渭水)와 小河川이 황하에 합류하는 넓은 평야에 있었다.  이 평야의 수확은 제국수비병의 식량을 지급해 주었고 동방의 황하와 南方의 진령산맥(秦嶺山脈)은 중국의 여타 여러 지방에 집결한 반란군이 제국의 수도를 기습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의 황제들은 이 요지에 근거하여 중국의 전토를 내려다 볼 수 있고 또 몽고나 중앙아시아 변강(邊疆)을 감시하는 편의를 얻었다.  황하가 그 상류를 향하여 커다란 북향의 만(彎)을 이루는 곡선을 그린 이 지점은 漢에 있어서는 로마제국의 「다뉴브강」과 같이 중요한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 국경 외에는 로마인에게 성가신 헝가리의 諸種族이 있었듯이 중국인에도 귀찮은 종족이 있었다.  이들 종족을 정복하여도 크게 얻을 것이 없으며, 그들과의 통상은 유리하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몽고의 건조한 평원은 농작에 적합하지 않았고, 따라서 당시 중국의 국고수입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농산물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地租를 취하는데는 유리한 토지가 아니었으므로 이들의 토지를 정벌한다 해도 결국 전비에도 부족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별다른 관심이나 야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그 같은 환경에서 중앙아시아와 몽고에 있었던 유목민과 정착 중국인 사이에 오랜 세월을 두고 불온한 관계가 이루어졌다.  중국인은 점차로 성장하여 오는 유목민종족의 병력을 격파하기 위하여 원정군을 일으킬 필요를 느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그 같은 행동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원정은 대단한 자금이 필요하였으나 하등 여기에 상응하는 수확은 없었다.  유목민은 유목민다운 이동성을 발휘하여 항상 천막을 비치하고 짐승무리를 쫓아 거의 끝이 없이 멀리까지 내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군대가 철수하기 시작하면 말을 탄 종족은 그 퇴각의 길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중국인은 로마인이 한 것과 같이 여러 가지의 대책을 강구하였다.  중국의 보충병력에 사역하기 위하여 작은 종족으로부터 병사를 고용하여 들여오기도 하고 타 종족과 싸우게 하기 위하여 다른 종족에 보조금을 주기도 하였다.

변강지역 밖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또 하나는 고역을 성대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근대의 저술가들의 많은 사람들이 이 통상의 성질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중국인은 이 잉여생산물을 팔기 위한 신시장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상업은 전체로서 잘 균형이 잡혀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말하여 중국의 대개의 지방에서는 제각기 필요한 합당할 만큼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의 중앙아시아와의 통상이 팽창한 배후에 작용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것은 蠻族이 중국에 약탈의 목적으로 습격하여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수령들에게 그 필요물품을 파는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통상을 넓히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족에게 중국으로 단체를 파견하는 것이 허가되어 그 단체는 「사절(使節)」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사절들은 보통 「공물(貢物)」이라 불리는 갖가지의 물품, 예를 들면 금분, 양마, 기타 토지의 특산물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 공물의 답례로서 中國朝廷으로부터 견직물과 그릇과 기타의 중국산물을 「증물(贈物)」로서 받아 갔다.  그 외에도 이들의 사절단원들은 개인적으로 막대한 매매를 행하여 이익을 얻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 그 공물 중에 특이한 것은 사절단들이 가지고 오는 사람들, 예를 들면 환관, 기예인, 기생이나 예쁜 숫처녀도 있었다.

대게는 공물로 바쳐진 여자들은 황제나 황실의 하녀나 혹은 첩으로 바쳐졌는데, 그들은 정략적으로 중국 황실로부터 믿을만한 정보를 빼내 같은 종족에게 정치 군사적 이익을 안겨주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사절단은 그런 대가로 받은 물품들을 갖고 돌아가서 다른 종족에 팔기도 하고 다른 물품과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로마까지 중국의 막대한 증물이 흘러 들어 간 것은 이 같은 연유로 이루어 진 것이다.

변강의 근처에는 또 중국인과 蠻族과의 혼혈민족이 생겼다.  그리고 이들의 혼혈민족은 만족과 싸우는 중국인의 전우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중국을 공격하여 오는 종족의 전우가 될 때도 있었다.  중국의 가장 유명한 장수 중에는 혼혈민족 출신자가 얼마든지 있다.  또 직업적인 중국병사로서 일하는 순수한 종족출신자도 있었다.  유명한 군인으로서 어느 때는 변방의 진영장군으로서 일하고 어느 때는 적군의 장군이 된 자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전쟁과 타협을 대대로 사용한 중국의 신중한 북변정책과 잘 균형을 이루어 중국인 자신은 점진적으로 양자강 유역을 넘어서 외부로 팽창하여 갔다.  중국인은 반렵반어민(半獵半漁民)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밀림이나 작은 농지에서 경작을 하고 있던 약소종족과 접촉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작은 종족들은 완전하게 그리고 용이하게 중국으로 흡수되었다.  즉 「중국인으로 변한 것이다」

이 동화작용은 현재까지도 남부, 특히 동남연안지방에 중국어의 심한 각양각색의 사투리가 남아 있는데 대한 하나의 이유인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이들의 사투리는 어는 정도까지 역사의 파도에 밀린 파문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이 같은 것은 그들이 원래는 비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각양각색의 종족이 중국어 내지는 중국문명 전반을 채용한 여러 종류의 상이한 시기를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漢代에는 정치적 중앙집권과 지방행정의 재조직을 병행하면서 문화의 표준화와 그 진보가 행하여졌다.  한대의 직전에 중국인은 毛筆(붓)로 쓰는 것이 시작되었으나 이 개혁과 동시에 또는 이에 곧 이어서 종이가 발명되었다.

이 새로운 실용품에 의하여 쓰는 문자의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서 古典의 원문은 반복하여 쓰인 筆寫로 인하여 언제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여기서 발생한 변형 때문에 자연히 파손되어갔다.  따라서 같은 내용의 고전은 ‘누가 어떤 생각으로 섰느냐?’에 따라 그 내용과 의미가 전혀 달라졌다.

그래서 漢의 학자들은 돌에 조각한 권위 있는 원문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그것은 나중에 돌에 조각한 원문에서 「탁본(拓本)」을 뜨는 방법이 시작되었고, 인쇄술의 발달에 중요한 향상을 이룩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한대의 학문과 출판활동은 중국의 記載言語에 하나의 영구적인 지표를 남긴 것이다.  이 시대에는 고전의 「결정판」의 출판 외에도 중국 최초의 사전과 최초의 백과전서와 같은 역사가 편찬되었다.  돌에 원문을 조각하는 것과 종이와 묵(墨)의 개량은 이로부터 수세기후에 중국인이 인쇄기술을 발견하기까지의 발달과정의 무수한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한 대의 문화적 발전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의 하나는 불교의 도래인 것이다.  이것은 他國의 문화, 즉 인도문화 중에 발달한 여러 가지의 사상이 중국에 들어왔다.  최초의 불교의 출현은 가정과 국가에 하나의 제도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수세기에 걸쳐서 중국의 순례자들은 다만 성지를 방문하는데 그치지 않고 권위 있는 경전을 손에 넣기 위하여 인도를 향한 어려운 여행을 시도하였다.

중국의 학생이 구주나 미국에 나갈 수 있을 때까지에는 불교만이 면학을 위하여 고국을 떠날 가치 있는 것으로 중국인이 생각한 유일의 권위 있는 사상의 원천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6. 왕조의 흥망

漢朝는 불우하게 붕괴하였다.  이 붕괴는 얼마나 많은 왕조가 ‘왜 붕괴하고 새로운 왕조는 어떻게 하여 일어났는가?’하는 중국 역사의 근본문제의 하나 앞에 우리들은 끌고 간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이 문제를 「간한 제왕」과 「약한 제왕」의 차이에 따라서 설명하려는 방법이 주로 유행하고 있다.  이 같은 방법으로는 역사라는 것을 단순한 개인적 사건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해하기에는 대단히 불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서 一村의 역사 이야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에서는 경제적 지배는 언제나 토지소유의 위에 놓여 있었다.  곡류의 수확고는 부의 척도였다.  현물의 곡류에 과세하는 능력이 국가권력의 척도로 되어 있었다.  저장 곡류는 수비병이나 상비군을 지배하는 능력의 척도였다.  사실상, 국가가 가지는 징세권과 지주가 가지는 지대수입의 권력 사이에는 항상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地代든 조세든 어느 것이나 가혹한 경제적 사실에서는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을 기르기 위하여 실제에 사용되지 않았던 잉여부분, 그것이 문제였다.

국가가 강력하였더라면 토지의 생산물의 과대부분을 지대의 형식으로 地主의 호주머니에 넣지 않고도 필요한 稅收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만약에 지주세력이 강력하여지면 그는 농민과 국가 간에 서서 토지가 생산한 부를 사적인 지대수입으로 흡수하게 됨으로써 국가권력에 대항하며 또한 이로부터 이탈할 수가 있었다.

富라는 아주 중요한 문제에 관한 충돌은 지대를 받아 가는 지주와 조세를 징수하는 관사가 종종 동일인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특수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중국은 항상 재정활동 때문에 막대한 量의 記帳事務를 필요로 하는 국가였다.  중국농업에 있어서의 관개의 중요성이 이 같은 일과 비상하게 관련이 있다.

캘리포니아나 기타 지방에서 관개가 중요한 지방에 사는 미국인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관개농업에서는 水利權의 소유는 토지의 소유권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관개는 누가 얼마만큼의 물에 대하여 언제 또 어디서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가에 관하여 자세한 계산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정부의 주된 수입이 경작지의 생산력에 기초하여 계산되는 조세로부터 얻어지는 경우에는 국세대장과 지대장부는 똑같이 수리권의 기록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중국문화에 관하여 무엇보다도 현저한 한 가지 일은 그 기록의 기재언어가 분분하고 혼란한 것과 어려운 것이다.  중국의 문서는 (이집트의 그것과 같이) 물의 배당이나 지대, 조세 등의 할당을 지배하는 재력과 권력의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될 수 있는 대로 어렵게 기술하는 방법으로서 발달되어 내려온 것이란 사실은 생각해야 한다.

그와 같은 의견이 사변적인데 불과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중국의 기재언어가 언제나 지나치게 어려워서 충분한 교육을 몸에 붙이고 익히기 위해서는 서양의 어느 나라의 문화의 경우보다도 많은 시간과 면학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현실 생활상에서 볼 때 누구라도 잘 아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노동으로부터 한가하기만 한 지주계급의 자식은 빈한한 소작인의 자식보다도 아무래도 면학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져 있었다.  이것뿐이 아니라 지주에 유리하게 되어있는 기록이나 계산을 행하는 능력이 또 조세를 징수하는 국가의 사용인이 되는 필수의 자격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지주의 자식은 단순히 가산의 토지를 상속하는 前途의 덕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고위의 관직에 오르기 위한 기회를 보통의 사람들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실제상에 있어서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보는 것은 용이하다.  정부의 고관은 대부분이 토지소유가족의 출신이었다.  그들은 부유한 지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기보다는 조세의 무거운 짐을 농민들에게 전가하는 방법으로 그 재산의 유지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농민이란 또 지대를 지불하는 것으로 지주의 재산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었으나 그 과정은 궁핍한 농민을 한층 더 궁핍하게 하여 마침내는 살기 어려울 정도에까지 내몰았다.  이 같은 것으로 보아 중국의 기나긴 역사 가운데서 우리들은 정기적으로 출현하는 동일현상의 설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즉 하나의 번영하는 국가와 문명적인 宮廷과 낭비적이고 국내의 여러 곳에 할거하는 거대한 재산과 교양을 가진 여러 귀족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반대로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농민과 피치자들이 동시공간에 존재하는 시대가 있는 현상입니다.

얼마 안 가서 야만적인 농민들에 의하여 일어난 무서운 폭동과 동란, 그 결과로서 혹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이 같은 폭동의 와중에선 검을 휘두르고 권력을 잡고 중국의 고전(특히 공자의 그것들)에서 설명하고 있는 예양(禮讓)있는 철학적인 규준 등에는 전연 믿음을 가지지 않은 다수의 武人이나 野心家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러나 이 같은 사람들이 한번 권력을 잡게 되면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곧 확실한 세입의 필요에 쫓기곤 하였다.  그래서 정부행정의 기록에 능통한 학자를 자기의 지배 하에 두어야만 새로운 왕조를 안정적으로 건설하는데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성공의 관건이었다.

절박한 왕조의 안정을 맡을 인물은 역시 타도의 대상이었던 과거의 관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가 신왕조의 요구를 해냈을 때, 또 과거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학자행정관은 필연적으로 학자지주이기도 하였다.  그는 신왕조에 벼슬하여 공무에 종사하면서 자신과 후계자를 위하여 토지재산을 만들었다. 

기원 221년에 漢朝가 멸망하기 전후의 혼란기에는 그 이외에도 주목할만한 요인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의 諸皇帝는 자기의 종복인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한 지주계급의 상위에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각양각색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수단을 겸하는 조직을 만들어 내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 수단의 하나로서 환관제도(宦官制度)가 있다.

환관은 한 代마다 더욱 더 세력을 증가하여 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가정을 가질 수 없는 환관은 무엇보다도 먼저 황제의 종복이며, 그리고 궁정만이 아니고 정부 내에서도 왕에 봉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수단을 가지고도 확실한 그리고 영구히 권력을 독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환관은 중국의 역사 한가운데서 하나의 음흉한 역할을 연출한 것이다.  그들이 악정의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없으나, 악정이 다른 이유에서 벌써 시작하였을 때는 그들은 언제나 그 최악의 상황의 전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방의 부호가 그 실력을 충실하면서 토지수입을 가능한 한 그 원천에서 막아서 정부에 유입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帝國政府로부터 취조나 처벌을 받는 위험을 제쳐놓고도 그것을 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帝王이 개인으로써 약한 우매한 인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패한 관료나 대신들에 둘러 싸여 있을 때는 크게 자신의 안전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국민전체의 안정보다는 자기 일신의 지방적 재산이나 세력을 중시하는 인간들에게는 국내전체를 통하여 금전에 의해 쉽게 부패될 수 있는 환관들에 보다 좋은 친구는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지방호족과 정신(廷臣)들과의 동맹관계의 출현은 개인적 세력의 획득에 급급하였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왕이 왕위를 이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들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고 있지 않거나 또는 행정상의 상세한 데까지 통하지 않고 있을 때와 같은 기간이야말로 최대의 유혹이 존재할 시기였다.  이들의 관료는 제왕에 대하여는 오로지 아첨과 아부로서 그 하고자 하는 모든 쾌락을 제공하고 있으면 일은 다 되는 것이며 제왕이외에 대하여는 생각나는 대로 오만하고 가혹하게 뒤흔들 수 있었다.  환관은 제왕과 궁전 내의 후궁과 밀접한 그 지위를 이용하여 누구보다도 제왕을 부패시키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넓게 더욱 계속적인 부패의 기회를 주어지는 것은 신제왕이 유아인 경우이다.  제왕이 유아 시에는 어떤 것이나 그의 명의로 섭정의 권한을 가지는 者의 뜻대로 되었다.  소년제왕이 조숙하게 몸가짐을 가지며 겨우 성인이 되어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책임을 질 수 있는 한 사람의 남자가 될 수 없을 만큼 수락되어 있거나 아니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해를 기도하며 그의 지위를 다른 어린애기의 왕자로 연결짓는 방법으로 섭정기간을 연장하였다.  여기에서도 역시 환관은 음흉하여 편리한 도구였다.

이 같은 것은 중국전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역사변동의 중요한 요인을 이룬다.  그렇지만 중국의 역사에는 너무나도 수많은 유능하고 근면하며 진보적이고 영웅적인 인물과 같이 수많은 이기적이며 반역적이고 용렬한 인간이 출현함으로 말미암아 그 거대한 국가와 풍부한 문화와 무한의 정력과 창조력을 가진 민족의 모든 역사를 그저 개인적인 인격적 측면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이 생긴다면 이것을 우리들이 심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같은 해석방법은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중국사가나 중국문화 평론가에게 편견을 가지게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특수한 중국 연대기의 「폐지(廢地)」 가운데 길을 찾아 걸어가야 하는 서양의 중국연구가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중국전체를 가장 잘 균형 잡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시대의 주요인물을 항상 그들의 시대의 물질적 배경, 지리적이고 자연적인 단위를 구성하는 주요한 지방, 통상로와 교통망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같이 관찰한다면 왕조의 흥망이 단순한 악정과 선정의 상호교차의 문제가 아니었음이 곧 바로 이해될 것이다.  이 상호교차는 기타의 보다 큰 과정인 성장과 중국민족의 팽창의 내부에서 일어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국민족과 그 문화는 언제나 중국의 국경을 넘어서 외부로 넓혀져 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북방의 몽고와 중앙아시아에서는 유력한 만족이 중국인의 문화뿐만이 아니고 그 정치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종족은 농경이 아니고 목축에 의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중국인에 동화하고 또는 그것과 융합하는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많은 오아시스가 있어서 풍부한 농업사회가 가능하였던 중앙아시아에서도 오아시스와 오아시스의 사이에 있는 사막에 방해되어서 그들의 농경사회는 중국과 같이 커다란 집단으로 뭉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남부에서는 중국인은 식민하면서 개화하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여기에 구릉과 밀림과 호수가 있으며 또한 적지만 풍요한 미개척의 평야가 있는 토지를 발견하였다.  이 토지에는 후세의 사람들이 「선주민족(先主民族」이라고 부르는 종족이 살고 있었다.  중국민족은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이들의 종족의 속으로 뛰어 들어 가서 그리고 집단조직에 관계하기보다는 고도의 정치기술을 그들 속에 가지고 들어갔다.  그들은 선주민족 사이에 정착하고 저항하는 것과는 싸우면서 천천히 차례로 타민족을 중국의 생활양식으로 전향시켜 왔다. 

 

7. 육조시대(六朝時代)

앞에서 기원 221년에 漢代가 종말을 고한 데서 중단된 이야기를 다시 계속 하겠다.  한의 멸망 이유의 하나는 중국의 정치구조가 전체로서 벌써 중국민족과 그들의 문화의 지리적 팽창(膨脹)을 효과적으로 처리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계속하여 3세기 반 이상의 기간에 중국문화의 범위는 반대로 그것보다도 작은 정치적 단위로 분열하여 갔다.

그 기간은 길었으나 안정도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중국의 문화는 극히 균일하며 편차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상으로는 그 지리적인 넓이의 전체를 포옹할 만큼 커다란 정치구조가 필요하였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구조에 도달하기까지는 기나긴 전란의 시대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문화적 내지는 정치적 진보는 전란의 파괴에 비해 극히 적은 진보가 있었을 뿐이다.

먼저 최초에 「삼국정립(三國鼎立)의 반세기간이 있었다.  이것은 분열의 시대였다.  이 시대의 로맨틱하고도 장렬한 여러 영웅은 중국의 역사와 전설 가운데 불멸의 사람들로 기억된다.  그들은 결코 새로운 시대의 인간은 아니었고 본질적으로는 위대하였으나 지금은 벌써 벌레 먹어 사라진 漢代의 사람들이었다.

三國은 각각 그 자연의 지리적 영역을 대표하고 있었다.  북방에서 황하의 중류에 기반을 두고 몽고 유목민족에 대한 전투와 교역의 국경문제를 상속한 것은 위국(魏國)이었다.  西方에서 지금의 사천성의 풍요한 미작지대를 본거지로 하고 산악의 방벽에 가로막혀 고립하고 있던 것은 촉국(蜀國)이었다.  양자강의 중류로부터 하류에 걸쳐 동정호(洞庭湖) 주변의 미작지대를 보고로 하고 있었던 것은 오국(吳國)이었다.

이들 三國은 중국이 혼란의 시대에 있으면서도 그치지 않고 성장을 계속하여 왔음을 말하여 준다.  중국민족은 촉국으로부터 현재의 운남성을 지나 미얀마에까지 진입하였다.  그들은 또 吳國으로부터 양자강의 남쪽으로 넓히면서 중국인화 되지 諸種族間에 식민과 개화를 행하였다.  이렇게 하여서 내정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삼국시대는 분열의 시대이며 중국문화의 발전의 관점에서 말하면 부단한 팽창시대였다.

이들 삼국 중에서 또 타의 諸王國이 생겨났다.  북부의 전쟁경과는 그 자신 중국사로 반복되는 커다란 주제의 하나였다.  魏와 蜀으로부터 晋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왕국 혹은 제국이 생겨났다.  이 나라는 북방의 만족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물러났으나 중국의 중심부와의 싸움에서는 승리하여 그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것은 황하연안의 낙양(洛陽)을 수도로 하고 나라를 일으켜 양자강 하류의 남경을 수도로 하고 최후를 마친 것이다.

晋이 북방으로부터 후퇴하자 종족이 부르는 이름으로 「도바(拓跋)」이라고 하는 유목만족(遊牧蠻族)을 조상으로 하는 魏라는 帝國이 제 4세기가 끝나는 무렵에 그 뒤에 들어와서 바꿔졌다.  여기에서도 또한 역사의 걸음은 이중의 양상을 드러내었다.  어느 의미에서도 중국민족의 정치적 국경은 외족(外族)의 정복에 의하여 차례로 남방으로 밀려난 것과 동시에 다른 의미에서는 중국민족의 문화적 국경은 그 문화적.  사회적 특징을 급속하게 더욱 더 중국화 시킨 바의 정복자들에 의하여 멀리 북방과 서북방으로 넓혀져 갔다.

魏代는 중국의 藝術史上 저명한 시대이다.  현재의 산서, 하남, 양성지방에 있는 거대한 암석의 조각은 인도문화의 특징을 강하게 띠고 있는 불교의 기념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인도의 영향에는 또한 저 「알렉산더」대왕의 정복에 의하여 벌써 중앙아시아와 서북인도 깊숙이 침투하고 있던 그리스로부터의 여러 영향이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아직도 역력히 남아 있는 것이다.

魏는 589년에 붕괴하였다.  이때까지 양자강의 연안과 그 남방에 다수의 小國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이유 때문에 제5, 6세기 전체는 남북조분립의 시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宋國은 420년에서 477년까지 남경에 도읍하고 그 같은 도읍은 齊(479~501), 梁(502~557), 陳(557~589)에 의하여 계속 되었다.

이 시대의 전체를 통해 살펴보면 곳곳의 작은 지역의 내부에서 전면적으로 서로 얽히면서 상호간의 문화와 일상생활의 일체를 상하면서까지 몇 개의 단명이나마 소왕국의 창업을 용이하게 했다.  더욱 이 시대는 또 실제로 성장과 발견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조직과 권력의 새로운 기술이 차례로 상호간에 시험되고 있었다.

이 시대는 불교가 중국에서 단순한 宗敎라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인 하나의 힘으로서 번영한 시대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그 수도원적 교단은 집단경제의 기술을 진보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이룩한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자식에로의 상속에 의한 가족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단체적 계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개개인의 지식이나 기술을 공동적으로 기록하여 두는 방법을 발견하고 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였다.  그들의 농업은 성하였고 진보적이었으며 관개(灌漑), 排水, 하천제방, 수송운하의 축조 등은 중국에 있어서 위대한 토목기술을 실현시킨 것이다.

남부에서는 서로 이어서 흥하고나 망한 諸王國은 어느 것이나 모두가 小國이기는 하였으나 그들간의 문화적 접촉은 광범위하고 활발했다.  남경 부근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小梁國의 분묘조각(墳墓彫刻) 등은 중국의 고전적 전통의 눈부신 산물의 하나이다.  불안정한 여러 조건 밑에서 당시의 양자강 하류 지역의 상업과 문화교류는 멀리 인도차이나(印度支那)와 泰國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중국전체의 새로운 중심이 안정하기 시작한 것은 북부로부터였다.  북부의 전쟁은 동종동류의 군대상호 간의 단순한 반복투쟁이 아니었다.  북부의 중국인은 초원지대의 유목민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그 적들로부터 그들은 기마전술과 광범위한 그리고 급속한 기동전술을 배웠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남부의 諸國들과도 싸웠으나 거기는 하천과 물로 펼쳐진 수전지대(水田地帶)였기 때문에 전군이 특히 기병대의 행동을 마비시키거나 아니면 진격속도를 느리게 하였다.

이 같은 토지에서의 전투는 수비대에 호위된 대도시의 지휘 하에 통일되고 또 하천이나 운하를 선박으로 수송하는 곡류로 식량을 보급하는 일이 가능한 전략적 요지를 확보하느냐 못하느냐가 곧 승부를 좌우하였다.  그럴 경우의 하천과 운하는 경제적 또는 군사적인 이중의 전략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여기에 승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토목기술은 또 정치와 행정에도 똑같이 불가결의 것이었다.

 

8. 수대(隨代)

六朝時代의 전쟁이 행정, 군사, 기술 등, 각 방면의 기량을 진보시켰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다음에 오는 隨代에 시작한 새로운 대규모의 중국통일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隨代는 秦代를 생각하게 한다.  秦나라가 그 자신보다도 훨씬 오래 된 하나의 소왕국의 주권확대 이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255년에서 206년까지의 짧은 기간밖에 계속하지 못했다.

隨는 전란의 오랜 준비기간 중에서 탄생하였다.  그 수도는 최초에 장안(지금의 서안)에 두었고 그 후에는 황하의 대곡로(大曲路)의 바로 동쪽 옆에 중국문화 발전의 특별한 고전적 중심이었던 곳의 洛陽에 두었다.

끝없는 지방전쟁이 계속 되던 수세기간의 다음에 隨나라가 나타나서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중국을 통일하는데는 두 가지의 요인이 있었다.  농업중국의 서북변단에 위치를 점한 관계로 隨는 유목민과의 국경전의 전통 속에서 단련된 군대의 기동성과 공격력이 그 강점이었다.  수나라는 그 성장만큼이나 놀라운 속도로 패망의 길을 재촉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중국영토일 수 없는 동북단으로 진출로를 잡은 것이다.

파죽지세로 팽창하던 隨軍의 대편대(大編隊)는 「고구려」라는 한반도 북단의 거대한 문명국이며 군사대국을 침공하는 모험을 감행하여 진퇴를 거듭한 끝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고구려의 접경에 온 군대를 집중하고 있던 隨나라는 때마침 고구려의 내홍(內訌)이 닥친 틈을 타 여타지방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지만, 고구려의 진격에 밀려 오히려 패망을 자초하고 만 것이다.

농업중국의 중심부에서 隨가 권력을 잡게 된 것은 농업 중국민족 전부의 공유세습재산이었던 바 하나의 중요한 기술을 자기를 위하여 이용하는데 꼭 적당한 시기에 출현한데 있다.  이것은 수리토목기술이라는 세습공동재산이었다.  그때까지는 토목사업이란 관개, 하천제방, 배수운하로부터 수송운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연적 토지구획의 내에서만 실시되고 있었다.

협서성의 위수유역(渭水流域), 산서성의 분수유역(汾水流域), 洛陽을 당시의 가장 유력한 도회로 하고 있던 황하 하류 역과 황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沼地나 호수가 많고 넓은 평탄한 회하유역(淮河流域), 남경을 자연의 수도로 하는 양자강 下流域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수대에 와서야 이들의 여러 지역 전부를 합해 하나의 새로운 운하지대로 모을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  중국의 전설적인 대운하를 비롯하여 다수의 운하 망을 통하는 기간조직으로 이룩된 隨代의 사업이 그것이다.  운하에 의하여 모든 주요 식량생산지역에서 곡류 세의 징수와 중요한 수비군대의 유지와의 조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隨는 급작스레 흥하였다가 급작스레 망하였다.  그렇지만 중국은 이에 의하여 별로 후퇴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도 또 단순하였다.  隨가 가지고 있던 군사력은 북중국의 유목적 변강에서만 발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또 유목적 변강지방(邊疆地方)을 완전하게 지배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빠르게 중국의 풍요한 농업중심지방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방향전환은 隨의 군대보다 강대한 병력을 가진 내부의 왕위 요구 자들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隨는 자국의 장군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연(李淵, 唐의 고조, 566~635)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그 정복자는 中國全王朝 가운데서 가장 빛나고 가장 장수한 왕조를 구축하였다.  618년에서 907년까지 계속하였던 唐朝가 바로 그것이다.

 

9. 당대(唐代)

唐朝의 권력의 근저를 이룩한 것은 장성 주변의 북방변강과 농업중심지대와의 결합이 漢代보다도 훌륭하였다는 사실이다.  몽고의 근대몽고족은 당시에는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장성의 북쪽과 중국령 중앙아시아에서는 터키語와 터키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근대 몽고족의 일부는 이 터키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주: 오웬의 착각인 듯 싶다.  몽고가 터키화 된 것이 아니라, 터키가 오히려 몽고족에 의하여 몽고화 되었다.  샘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몽고의 최동부와 현재의 중국 東北諸省의 대부분의 살고 있던 諸種族은 주로 「퉁구스」족이었으며 그 퉁구스족 후세의 자손 중에서 「만주인」이라고 부르는 부족이 나타났다.  唐은 터키족과 퉁구스족과의 복잡한 동맹조직을 만들고 있었다.  장성에 더욱 가까운 지방의 종족수장들은 중국의 공주들을 결혼시켜서 중국 왕의 혈연자로서 대우를 받을 정도로 그들의 종족간에는 점차로 많은 중국문화가 침투하여 갔다.  그들은 중국에 기병대를 제공하기도 하고 또는 유리한 조건으로 중국과 통상하기도 하며 크게 번영하였다.

이들의 종족 이외에도 현재의 동북제성, 외몽고, 중국 신강성 등의 북부에 다시 시베리아와 러시아령의 중앙아시아 깊숙이 퍼져서 살며 중국인이 오히려 한번도 무력적으로 정복한 일도 평화적으로 제휴하거나 通商의 방식으로 병합한 일이 없는 별개의 종족이 살고 있었다.

가까이에 살고 있는 제종족은 보다 먼 곳에 있는 종족, 즉 외이(外夷)에 대하여 실은 언어나 문화에서는 중국인보다는 상호간에 친근한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중국의 정치와 행정의 기술을 바라면서도 일이 있을 때마다 자진하여 도전하였다.

많은 점에서 독일과 다뉴브강 연안지방에서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집단이 로마제국의 부속국으로서 그 歐洲의 내륙국경을 보다 먼 거리에 두고 미개한 게르만이나 슬라브에 대하여 방위하는 역할을 했던 로마제국의 사정에 비교될 수 있다.  중국의 왕조에는 또 로마와 같이 주로 蠻族들 간에서 모집한 금위병(禁衛兵)이 설치되고 있었으나 그것은 때로 제왕이나 왕조를 지배할 때도 있었다.

왕조의 번영한 기간은 국경조직의 안정성이 중국내의 번영을 지킨 것이다.  관개설비를 잘 유지하는데 따라서 수확에 잉여생산이 가능하였다.  운하에 의한 저렴한 곡류운송에 따라서 중국전체의 중심점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에 따라 가능하였다.  자연의 경제적 중심은 양자강의 유역에 있었다.  여기는 수확이 무엇보다도 큰 것 이외에도 茶(茶는 唐代에 비로소 중국에서 일반인에게 사용되었다)라든가, 絹이며 陶器 등의 상품을 산출했다.

자연의 정치적 중심은 황하유역에 있었다.  그것은 북방의 변경으로부터 차출된 병력에 의한 것이었다.  대운하조직의 이용에 따라서 경제적 중심은 점차로 북방으로 밀리게 되어 결국은 唐의 수도까지 옮아가 여기서 정치적 중심과 합체한 것이다.

이 같은 추세에 보호되고 통제된 중국의 자연적 富에 따라서 각양각색의 진보가 가능하게 되었다.  문학적 시험(관리등용시험으로서의 과거제도)에 기본을 둔 중국의 문관제도가 더욱 발달하게 된 것도 이 시대였다.  복잡한 행정은 막대한 양의 관료적인 서류사무를 필요로 했다.

중국의 기재언어는 너무나도 어려웠기 때문에 다소라도 독서가 되는 자는 누구든지 실제로 관직을 보증되는 상태였다.  이 같은 관료주의에는 흔히 끝없는 그 순수성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 순수성을 시험하는 척도는 필연적으로 문학적 척도가 아니면 안 되었다.

난해하고 함축성이 있는 교묘한 철학적이고도 시적인 글을 구사하며 능숙하게 쓸 수 있으면 있을수록, 또 노력에 의한 훈련된 기억력과 거대한 축적 속에서 인용이나 고사(故事)를 인출하는데 숙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보다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철학과 문학은 실제상으로 주로 정부직원과 문관사무의 부산물이 되었다.  그것은 근년까지 그리스語나 라틴語로 시를 쓰는 기술이 주로 영국의 본국과 인도의 화형문관(花形文官)을 양성하기 위하여 옥스퍼드나 캠브리지에 있었던 영국인 교육의 부산물이었던 것과 같았다.

생활을 위한 노동이 필요 없는 젊은 사람들이 보다 높은 고등시험을 치르기 위해 면학의 기회를 가지는 혜택은 당연하겠다.  이 사실은 당대의 처음으로 제도화된 과거제도가 명목적으로는 민주적인 형식인데도 불구하고 고급관료는 사실상으로 귀족적, 세습적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唐代의 중국은 어떠한 의미로도 폐쇄된 사회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와의 사이에 정치적, 군사적인 균형이 보장된 사정으로 보아서 중국의 내륙 깊숙한 변강은 그 해안지방 보다는 통상과 문화전파를 위해서는 보다 중요하였다.  인도로부터는 불교가 들어오고 「마니교」, 배화교(拜火敎, 조로아스터敎) 「네스도리우스」파의 기독교는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중국에 전해졌다.

중국령 중앙아시아의 「돈환」의 도시와 오아시스는 당시의 상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도시 안에는 몇 개의 외국인 사회가 모여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으로 별개의 구역을 만들어서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 같은 사회는 각자의 종교와 각자의 복장과 각자의 언어를 버리지 않았다.

사막의 건조한 공기 때문에 이 시대의 유물이 현재까지 다수 보존되고 있다.  이들은 기묘한 언어의 사본이라든가, 지금까지도 색이 변하지 않은 동혈(洞穴) 內의 벽화 등이다.  인간의 공통적인 습관에 따라서 종교벽화의 화가들은 종종 그들의 「빠도롱」들의 초상을 종교적 장면 중에 묘사하고 있어서 오늘의 우리들은 당시 중국의 西門의 주변에 모였던 각양각색 민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를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다.

漢代의 초기에 중국으로 도래한 불교의 발전과 교화력은 魏王國(척발의 위)과 唐朝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그것은 첫째로 당시 불교가 한창 번영하고 있던 중앙아시아를 통과하여 인도에 건널 수 있는 비교적 자유롭고 안정한 여행이 그들의 시대에 행하여 질 수 있었다는 것과,  둘째로 불교는 많은 사상의 집합체로서보다는 각각의 사찰마다의 활동력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불교사찰은 그 사원을 통하여 하나의 재산소유단체로서 번영했다.  중세의 구주와 같이 사원은 재산소유를 인정받고, 전시에는 중립을 보장받고 과세의 면제도 받을 수 있는 바, 당대에 이미 法人의 법률적 개념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사원은 그의 재력과 중립성에 의한 회화, 조각, 학예 등을 후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의 특혜는 구주의 예에서 보듯이 단체와 국가 간에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전쟁과 침략의 시대에는 토호들이 정치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존재였다.  그들은 언제나 같은 한편으로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결국 토호들은 성대한 권력과 급격한 몰락의 사이를 오락가락하였지만, 사원만이 전체로서 점점 부유하고 번영하여 가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개개의 사원에 대하여 말한다면 때때로 토지나 수입을 약탈당하는 수도 있었다.  과세를 면하려고 자기의 토지를 유력한 사원에 양도한 민간인의 토지 소유자도 적지 않았다.

필연의 결과로서 唐朝의 권세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한쪽으로는 국고수입을 늘리기 위해, 다른 한쪽으로는 唐을 도와서 唐과 같이 세력을 얻은 유공자에게 연속으로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사원의 수를 제한하고, 각종 면책특권을 삭감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사원의 박해와 그의 영지를 몰수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 이후 중국의 불교는 그 박해와 몰수로부터 자립하여 일어서기는 마침내 불가능하게 되었다.  불교는 敎義로서만이 남게 되었다.

국가의 철학으로서 지주계급 출신자를 중요한 구성원으로 하고 있는 관료제도의 사상적 정치적 훈련의 기초로서 우위를 되찾은 것은 유교였다.  그 사이에 불교는 중국으로부터 한국으로 전해 졌으며, 다시 한국은 일본으로 전하였다.  일본불교는 그것들을 순화시켜 전해준 한국불교의 것이며, 그 기초가 唐代에 자리잡은 것이다.

唐代에 중국에 들어온 중앙아시아의 여러 종교 중에서 「네스도리우스」파 기독교는 외국상인들 사회 이외에는 전파되지 않은 듯하나 반면에 回敎는 영구히 확립되었다.  회교는 싱가포르를 우회하여 해로로 들어온 아라비아 상인들의 손에 의해 남중국과 서남중국으로 운반되었다.

서남중국에 들어온 최초의 회교도들 중에는 상인 이외에도 당의 황제들이 고용해 들여온 중앙아시아인이나 또는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 등의 용병(傭兵)이 있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는 토지를 주고 중국여인을 처로 하고 중국에 영주한 사람도 다수가 있었다.

당대의 예술 중에서 단연 으뜸은 詩文이었다.  당대 이래로 중국에서 최고의 문학형태로 남은 시문은 그 서정성과 비극성의 조화가 참으로 위대한 중국의 문화를 짐작하게 해 준다.

 

10. 오대(五代)

당나라의 부패는 국내와 변강(邊疆)의 양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국내적으로 예부터 그리고 벌써 잘 알려진 현상이 반복되었다.  유력한 관료들은 자신의 가족을 부유하게 하였다.  이들의 가족은 유력한 지주로서 지방적 세력을 잡고 조세의 형식으로 정부로 흘러 들어가는 부분을 감하여 地代의 형식으로 토지수입을 착복하였다.  관료를 통제하는 힘을 잃은 정부는 이제야 지방을 통제하는 힘마저 잃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변강지방에서는 중국에 충성한 여러 종족의 족장들이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전에 중국을 돕기 위해 파견하여 복무시키기도 하고 혹은 보다 원흉의 만족과의 전쟁이나 원정을 해 중국을 위해 일을 하도록 지휘한 기병대를 이번에는 자기들의 전쟁과 세력확장을 위해 사역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이제야 또 다시 지방적 단위로 분해하기 시작한데 호응하여 변강의 대족장들은 그들 자신의 단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邊疆諸國은 이후 수백 년 간의 역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결정적 요소가 되었으며 그 결과는 13세기의 몽고의 대정복으로서 나타났다.  이들의 변강제국의 전형적인 구조는 牧人兵士가 경영하는 사회를 포함하는 북방지방과 중국인 주민이 곡류로 재정을 맡아보는 모든 종류의 工人과 직업인과 상인, 그리고 군인지배자의 명령 하에 행정을 담당하는데 충분한 만큼의 관리까지도 공급하고 있던 남방지방과를 결합시킨 것이었다

이 종류의 諸王國은 상호간에 패권을 결정하기 위하여 교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貢物을 받고 있던 諸國이 이번에는 자국의 북쪽 변강의 군인만족에 자신이 공물을 받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북몽고나 아무르강 변강의 만족지방의 아주 순수한 종족적인 사회와도 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또다시 대왕조는 붕괴하여 미세화의 시대가 닥쳐온 것이다.  5대의 시대로서 알려지고 있는 907년으로부터 960년에 이르는 반세기 間이 그것다.  그때도 한번 대통합작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대중국」이 다시 만들어지기까지는 약300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11. 송대(宋代)

宋代는 960년에 일어나서 1280년까지 계속 하였다.  그러나 宋朝는 빛나는 지방적 번영과 세련된 문학과 정교한 문화와를 뽐내는 왕조이기는 하였으나 全中國을 하나의 확고한 支配하에 둔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 최초의 수도는 황하유역에 있었으나 1127년에 먼저 남경에 이어서 양자강 하류의 항주(杭州)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후 계속 백년이상 宋朝는 양자강 중국의 끈기 있는 전쟁을 대표했으나 결국은 서서히 패퇴하고 말았다.  그 전쟁은 많은 만족정복자들이 서로가 이어서 개척한 進貢地域이었던 황하중국에 대하여 순수한 중국적 특징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들의 만족정복자들의 선두를 달린 것은 터키의 특징과 몽고의 특징과를 합한 유목민의 하나였던 요족(遼族)으로서 그 근거지는 현재의 열하성의 북방에 있었다.  遼는 종족 명을 契丹(거란, ‘가세이’라고 하는 이름은 여기서부터 나오고 있다)이라 하고 이것은 결코 중국변강에 돌연하게 나타난 종족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스스로 중국의 부속국이 되었으므로 먼 옛날부터 중국의 역사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중국의 문제의 처리방법이라든가 중국인의 이용방법 등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보다는 훨씬 중국적이 아니며 또 야만의 다른 種族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의 種族的 심정은 언제나 활발하고 호전적이었으므로 용이하게 또 급속하게는 중국의 사회와 문화에 흡수되어 용해되지는 않았다.

거란족(契丹族)은 최초에 唐의 멸망에 이어지는 5대 왕조의 하나로부터 북중국의 일부를 이어 받았다.  그들은 송대의 건설 이전에 벌써 스스로 遼朝를 건설하고 있으며 12세기에는 이미 도읍을 북평, 즉 나중의 북경에 두고 황하에 이르기까지의 북중국 전체를 지배했다.  그 이후 그들은 양자강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宋朝와 종종 전화를 교환하고, 북벌의 기회를 노리는 고려와 대치상태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요는 강력한 군대로 양자강지역을 일거에 점령하는 방법은 취하지 않고 송으로부터 실크나 금으로 막대한 배상과 공물을 인도 받는다는 전법을 취했으며, 고려로부터는 상호간섭을 배격하는 선에서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요는 또 그 외에도 많은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또 다른 북방종족의 대두에 고심하기도 하며 전력을 중앙아시아에 쏟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북방에서는 외몽고와 동북지방의 여러 민족에 대하여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완전하게 그들을 평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방에서는 당구도(黨項)國의 발흥으로 국력신장에 크게 방해를 받았다.

당구도國은 중국 역사상 가장 연구가 부족한 것 중의 하나다.  당구도國은 원래가 티베트 族으로서 황하 상류의 현재의 협서, 감숙, 영하의 諸省으로 되어 있었던 곳에 중국인 티베트인, 중앙아시아인, 몽고인 등의 민족이 풍속 변화된 혼합국가를 만들고 있었다.

결국 遼는 자기의 지배 하에 있는 하나의 만족인 「쥴틴」에 패망하였다.  이 蠻族의 이름을 나중에 중국어로 「여진(女眞)」이라고 기록하게 되었다.  쥴틴이란 女眞이라 번역되기 이전의 여진족의 발음이었다.  그들은 금(金)이라고 칭하는 왕조를 세우고 遼에 대항하여 국경에서 싸우고 宋에 대하여는 進貢을 강요하면서 역시 전투를 계속했다.

중국의 正史에서는 이 시대 전체를 통하여 중국왕조의 진정한 계통을 유지한 것은 宋이었다고 한다.  宋은 군사적으로는 약했지만 철학과 문학, 미술과 도예 등의 방면에서는 고도의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宋의 철학은 유교의 가르침의 재검토와 재해석에 있어서 유명하다.  미술에 있어서 남중국 인은 회화와 견, 도기의 제작에 우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또 항해술이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상 유례가 적은 시대의 하나였다.  송의 선박은 한국, 인도네시아, 인도, 아라비아까지도 항해하였다.  아라비아와 인도로부터의 영향은 아마도 宋代의 수학의 부흥에 대단히 큰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遼가 지배한 북방지역에는 특별한 건축양식이 행하여졌으나 그의 극히 적은 부분만이 남아있지 않으나 유적은 극히 인상 깊은 것이다.

송대는 또 정치의 실천과 이론과의 혁신가로서 대단히 유명한 왕안석(王安石)을 낳았다.  그의 관료로서의 명성은 고전문학의 현실적 구현과 양자강 유역의 사방공사 지휘의 두 가지로부터 나왔다.  그가 열심히 조직하고도 결국은 패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농민의 생활과 수입의 지배를 지주계급의 구조를 파괴하는 일이 없이 정부의 손으로 옮겼다고 하는 점이 문제였다.  그의 이론은 때때로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말하여 왔으나 그것은 사실을 왜곡한 주장이다.

왕안석이 목표로 하는 것은 국가에 의한 소유권은 아닌 것이며, 지주계급을 대신한 관료에 의한 지배의 독점이었다.  그래서 왕으로 하여금 패퇴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공생활에서는 국가의 사용인이면서 사생활에서는 지대를 받아 가는 지주라고 하는 인간이 너무나 많았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왕안석의 이론은 최근의 중국에서 또 문제가 일어나서 시끄럽게 논의되었다.  그의 이유를 이루는 것은 같은 옛날의 문제, 즉 관리와 지주를 겸한 사람들의 입장의 이중성문제에 관한 불안의식이었다.  거기에는 지주제도에 붙어 있는 소작농민의 생명재산의 專制的 지배라고 하는 최대의 유혹으로부터 관료를 떨어지게 하지 않고서 그저 교육과 훈련만의 힘으로 그들을 더욱 정직하게 선도하는데 따라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계획에 기대를 걸고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약하였다고는 하지만 宋代도 무장의 영웅인 악비(岳飛)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현재에도 인기 있는 전설적 영웅이나 그의 명성은 무장으로서의 천재성보다도 북방의 침입자들과 최후까지 싸워서 중국을 지키려 한 그의 전무후무한 충성심으로부터 온 것이다.  악비를 패배시킨 것은 한 사람의 위대한 무장이 권세를 베풀고 군사적 명성에 의한 민정을 지배하는 것은 참을 수 있겠으나 북방의 만족에 무거운 공물을 지불하면서 세상 되어 가는 대로 맡겨 두는 것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관료의 태도였다.

서민적인 문화가 경제적 상처와 사회적 불안과의 혼합된 이 시대의 공기는 중국최대의 소설의 하나로서 「펄벅」이 ꡔAll Men Are Brothersꡕ 라고 하는 제명으로 번역한 ꡔ수호전ꡕ의 책 속에 아주 잘 써서 남기고 있다.  이 중에는 북방의 만족과의 전란은 다만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밖에 묘사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국하고 宋代의 중국이 그 진동에 의하여 내부로부터 허물어져 가는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12. 몽고조(蒙古朝)

宋帝國도 그것을 유린한 북방의 諸王朝도 결국은 몽고의 대정복에 의하여 압도되었다.  「징기스칸」이 인솔하는 몽고족은 역사가에 의하여 중국북방의 사막으로부터 쳐들어와서 중국, 페르시아, 러시아로부터 다시 발칸반도, 폴란드에까지 쳐들어가서 엄청난 역사의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역사에 있어서는 신비적이며 원시적인 대단한 한 개의 兵馬團으로 취급되고 있다.

「징기스칸」 자신은 합리적인 설명을 붙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천재인가? 아니면 다만 전투만으로 인한 역사 속으로 말을 몰아 붙인 순수한 무인으로서 취급되고 있는가? 역사상의 이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흡사 동화와 같은 광의의 뜻이 붙은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몽고인이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서 정복을 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를 기후의 변화로서 그들의 고향인 목장이 건조해져 풀이 말라 목축을 할 수 없게되었다는 상상적 사실로 돌아오는 설명이다.  실제로 유목민족의 정치와 전쟁도 다른 모든 사회의 정치와 전쟁과 똑같이 합리적으로 분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몽고족의 정략도 「징기스칸」의 경력도 돌연히 출현한 것은 아니며 오랜 발생과정 가운데서 생겨났다.  13세기의 몽고는 중국의 장성주변의 만족 내지는 半蠻族諸國의 역사 중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징기스칸이 고비사막으로부터 역사의 가운데로 돌연 뛰어 든 것은 아니다.  그의 가정은 여러 대에 걸쳐서 외몽고의 풍요한 동방방목지대의 소귀족의 족장이었다.  그의 집은 거기서 북중국에 金을 세운 女眞國의 기식자(寄食者) 관계에 있었다.  기식자란 동맹국이며 進貢國이라는 형식의 관계다.

金朝는 그 도읍으로부터 부패하기 시작하자 그 대표자들은 벌써 長城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의 종족 사이에는 명령계통을 가질 수가 없었다.  징기스칸의 집은 종족간의 싸움에서 패하였기 때문에 징기스칸 자신은 자립과 자위의 노선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아버지 없는 고아가 되었다.

그는 일족의 수장으로 벼슬하더니 차례로 武名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평시에는 부하의 체면을 잘 보아주는 사나이로서 명성을 올렸다.  그는 주인이나 盟友와 절연할 때는 언제나 주의 깊이 자기의 행위에 정당한 구실을 붙였으므로 싸우는 상대방의 수장들로부터도 불충실한 남자라기보다는 자신의 신하를 위한 생각을 성실하게 하는 남자로서 보여 왔던 것이다.  많은 부족과의 전쟁에 의하여 세력을 눈사람 만드는 식으로 증대하여 部族戰爭을 넘어서 정복전쟁을 행할 수 있는 지위에까지 도달하였을 때의 그의 나이는 50세가 되었다.

「징기스칸」의 전역은 「알렉산더」나 그 외의 정복자의 그것보다도 웅대한 것이었으나 그는 실제로 중국을 정복하지 못하였다.  장성에 연하여 전개되었던 그의 여러 전쟁은 먼저 金朝와 「당구도」왕국에 대한 전쟁부터 시작하였다.  그가 죽은 것은 「당구도」의 수령과의 결승전에서 승리하고 귀국하는 도중이었다.  그의 사후에 宋朝는 완전하게 붕괴하고 몽고족은 양자강으로부터 멀리 미얀마까지에 걸쳐서 종횡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징기스칸의 사후 몇 개의 몽고제국이 세워졌다.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와 南러시아 그리고 중국에 원(元)이라는 명칭을 가지는 중국의 왕조는 그의 孫이 되는 「쿠빌라이 칸」에 의하여 건설되었으나 막연하고 다른 蒙古諸王國의 상급의 몽고왕조로 생각되었다.  몽고인은 그 기막히는 광범위한 정복에 따른 중국, 서아시아와 구주와의 사이에 교통을 개설하고 이에 의한 막대한 통상과 문화교류를 행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몽고인은 구주에서는 더욱 무지한 蠻族으로 생각되고 있었으며, 중국에서도 역시 元시대의 회화예술은 대단히 높이 평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은 元朝를 높은 문화수준에 도달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몽고인 자신은 도회적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그들은 문화적 여러 영향의 전파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이룩했다.  그들에 의하여 인쇄술과 화약의 지식이 歐洲로 넓혀지고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로부터 행정관과 수학자와 기술자가 중국으로 따라 오게 되었다.  蒙古朝에 봉직한 이들의 외국인들은 고량(高粱)이나 면(綿) 등의 새로운 농작물을 가지고 갔으며 페르시아인의 건축기사와 중국의 화약에 의하여 몽고인은 성벽 도시에 대하여 광범위한 포위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태국과 베트남, 미얀마와 캄보디아, 중국의 서남부 국경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족들이 「山族」이라는 이름으로 각양각색의 원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한국의 문화인류학자들은 그들이 「고려인」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언어적으로나 생활양식의 여러 방면에서 충분히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일면이 발견되고 있다.  몽고는 고려국을 정복하고 많은 공녀(貢女)와 陶器 기술자를 進貢형식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몽고조는 고려의 사람들을 미얀마 원정길에 대동하고 가다 추방했거나 이탈해 그 밀림지대에 남겨졌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에 대한 무리한 추리에 지나지 않는다.  몽고는 고려를 침공하기 이전에 이미 미얀마를 유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몽고조는 비교적 고려인에 대해서 지나친 진공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몽고가 고려를 침공한 이유는 복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고, 당연히 몽고는 고려에 대해서 일본원정의 동참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물론 고려는 몽고를 흉노(匈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역할을 회피하기 위하여 진공이라는 형식만을 취했을 뿐, 실재로 貢物을 바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일본은 몽고의 지대한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의해서 방위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고려에 대해 進貢을 바치는 나라였기 때문에 고려로서는 가능한 한 일본을 보호해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일례를 들면, 정확히 이름이 밝혀진 고려의 역사는 아니지만, 선박과 항해에 있어서 절대적 선진국인 고려에 대해 몽고는 열등감 내지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몽고는 그 첨단의 병력만은 오로지 몽고족만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배를 만들거나 항해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고려인의 협력이 절대로 중요했는데, 고려인은 몽고조에 대한 반감으로 배를 부실하게 만들고 출항 날을 폭풍이 많은 때로 잡았다.  그 결과로 몽고는 일본정벌에 실패하고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다.

 

몽고인은 文人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사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의 학술을 보급시키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들은 특히 극(劇)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중국의 극장 「오페라」의 음악과 양식화한 무대극은 몽고시대의 것으로부터 나왔다.  몽고인은 또 엄숙하고 중대한 古典보다는 읽고 익히는데 아주 쉬운 「로맨틱」한 악한도적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 쪽을 애호하였다.

서양의 여러 나라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의 영향으로 중국의 몽고조, 즉 元代의 역사에 특별한 흥미를 품는 것이 보통이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읽은 사람보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은 것뿐인 사람의 쪽이 훨씬 많기 때문에 들어서 전하는데 따라서 그의 인물과 그 시대에 관하여 「로맨틱」하고 생생한 이야기로 진실하게 전하여 지고 있다.  「마르코폴로」가 실제로 말하려는 바를 다른 여행가의 보고로 보충하여 보면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것이다. 

정복자들은 중국의 관료제도의 덫에 걸려 끌려가지 않게, 즉 중국으로부터 공물을 받아 가면서도 중국화 되지 않기 위하여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세운 帝國은 기계공업은 전혀 없었고, 驛傳驛馬制度를 가장 빠른 통신기관으로 한 시대의 조건 하에서 완전한 것으로 하기란 어려웠다.

몽고인은 스스로를 중국인화 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들은 순수한 유목민의 兵士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원인을 이루는 것은 중국지배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과 그 관개의 하천방조의 유리한 것 등이 있으나 취급에 곤란하고 복잡한 기계의 조작과 세분된 조세의 地租나 地代의 징수조직 등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歐洲의 표준으로 판단하여 세계에서 가장 유력하고도 안정되고 더욱 능률적으로 통치되고 있던 나라로 생각하였다.  몽고국이 그의 여행 후 백년도 되지 않아서 혼란한 가운데서 궤멸한 것도 의심이 가기에 충분하다.

몽고제국의 멸망은 중국의 다른 그 어느 왕조의 멸망보다도 그 뜻이 다른 바가 있는 것이다.  먼저 몽고인의 고국자체가 북경왕조의 통치에 辛苦를 느끼면서 몽고인이 차례로 그의 제왕은 멀리 떨어지고, 노쇠하고, 여기에 덧붙여서 몽고인의 기질을 잊은 인간이 되어서 그 지배에 복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데다가, 중국인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양자강 유역의 농민반란은 국고수입을 감소시켜 국력을 약하게 했다.

 

13. 明代의 민족주의

이 전쟁 중으로부터 14세기의 중엽에 明代를 창립한 한 사나이, 주원장(朱元璋)이 명의 태조로 나타났다.

오랫동안에 걸쳐서 제국편력(諸國遍歷)의 불승이었던 그는 많은 민족과 밀접하게 접촉하여 왔다.  또 몽고인에 반란을 일으킨 토비였던 그는 민족주의의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사실로 明代는 민족주의의 색채를 띠고 있었으나 그것은 중국인의 기억 중에서 오늘날까지 뒤를 되돌아보는데 그치지 않고 이 시대를 다른 시대로부터 구별하는 특징을 이루고 있다.

중국인은 그 역사의 전체를 통하여 아마도 다른 그 어느 대민족보다도 민주적 의식이 적은 민족인 것이다.  만족과의 전쟁시대를 통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외국인에 대하여 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외국이 좋아하지 않은 생활양식과 물건의 취급에 대하여 싸워 온 것으로 생각하며 내려온 것 같다.

중국을 정복한 만족의 쪽에서는 어떤가 하면 그들 중에서 중국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던 者들은 결국 중국인에 등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화재마저도 관료기구를 통하지 않고는 가질 수가 없었다.  단순하게 약탈만을 일삼던 정복자들은 재원이 갑자기 고갈상태가 되는 것에 마음이 쏠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확실한 수입을 표적으로 하여 규칙적인 약탈을 행하고 있던 정복자들은 자기의 이익과 관료기구의 이익 사이를 적당히 조정하지 않으면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렇게 하게 되면 할수록 자기들이 「중국인화」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시에 중국인의 상류계급과 문인과 지주와는 서로가 이어서 신왕조에 협력을 시작하려 하였다.  이 같은 사태를 몽고인은 결코 조용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중앙아시아나 페르시아의 유식자 중에서 모집한 자기들의 문관을 수입하여 중국의 관료기구를 개조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때문에 몽고왕조는 붕괴할 때에는 모든 것이 썩어서 무력한 정부가 되어 있었던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대부분의 중국인에 있어서는 외국인의 정부로서 남아 있었다.

중국군이 새로운 민족지도자의 통솔 하에 북상하여 오게 되니 몽고의 제왕과 그 관정(官廷)은 몽고로 도망하여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실패하게 되자 그들은 종족전쟁의 소란 속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과거 수백 년 간의 중국왕조가 하나같이 북방에서 퇴각하여 와서 남부에 와서는 멸망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몽고귀족이 중국에서 완전퇴각하지 않고 남아있었다.  이 같은 귀족들은 국경까지만 후퇴하고서 중국인과 잘 타협하여 봉건영지의 귀족이라 칭하게 되어 새로운 중국왕조에 복종과 공순(恭順)을 맹서한 사람들인 것이다.  이 같은 사람들은 그 이전의 시대에 어느 만족정복자와 화해하여 항복하며 그 신왕조에 봉사하였던 유력한 중국인들과 같은 것이었다.

明代의 문화도 그 정치와 같이 민족주의적이었다.  명의 중국인은 부흥자(復興자)였지 창시자는 아니었다.  고전연구, 회화, 인쇄술의 연구,  차, 도기의 제작 등은 모두가 비교적 야만적인 몽고인의 지배 하에서 어느 정도 퇴화하였다.  명의 중국인은 훨씬 높은 표준을 잡았으나 그 시대 전체를 통하여 볼 때는 크게 발명한 것도 창조한 것도 아니다.

明朝의 민족주의적 盛名 때문에 몽고인 멸망 후 세력의 실제 분포상태는 거의 불명료하게 되었다.  수십 년 간에도 중국의 군대는 북방 멀리까지 출동하여 몽고인을 그 토지에서 타파하였다.  여기서 옛 풍속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유목민이 「중국인이 된다」는 사실 없이 중국의 내륙 깊숙이 까지 지배자로서 설 수가 없었듯이, 중국인도 유목민이 사는 초원지대에서 「유목민이 된다」는 사실이 없이 지배자의 지위를 보존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중국인은 유목민의 토지에 머물러 있어서 유목민의 생활에 동화하는 것을 완고하게 싫어하였으므로 그들의 지방전체는 점차로 종족장의 지배 하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14. 청조(淸朝)

장성을 넘어서 명대의 중국인이 무엇보다도 확고한 지반을 구축한 것은 동북지방이었다.  이 지방의 남부에는 풍요한 농업지대가 있고 여기에는 계속해서 중국인이 살고 있었다.  이 양호한 농지의 서쪽에서는 명의 정부가 많은 몽고족과 교섭을 가졌고, 또 북방에서 동북지방에 걸쳐서는 「퉁구스」라는 집단명로 알려진 많은 종족과 접촉하였다.  이들의 종족을 통치하기 위하여서 토벌, 칭호(稱號), 영예, 보조금, 특별통상권의 부여(賦與) 등의 수단이 혼용되었다.

동북지방의 삼림이나 하연(河沿)에 살고 있던 「퉁구스족」은 12세기에 금조(金朝)를 구축한 여진인의 지배 하에 있었던 만족병사의 자손이었다.  그들의 종족의 작은 수장들 중에는 왕족의 자손이라고 칭하기도 하나 또한 사실인 것도 있는 듯하다.  그들 사이에는 후에 16세기 후반에 가서 중국을 통치하는 다음의 왕조 건설자를 배출한 하나의 武門의 가계도 있었다.

이 사나이의 이름은 「누루하치」라고 하였다.  그의 집은 중국인에 진공하며 중국의 변강관청에서 보조를 받아가며 변방미개의 삼림에 살고 있던 다른 여러 호족과 피를 나누며 살고 있었다.  중국에서 명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변강관리는 분쟁이 그치지 않은 이들의 종족간에 위령(威令)을 유지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민족 간의 내분은 점차로 종족간의 전쟁이 되어 가는 경향이 있고, 종족간의 전쟁은 마침내 중국의 변강관리를 중개자로 몰아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의 관리는 벌써 공평한 중재자로서 간섭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혼란상태는 「누루하치」와 같은 사나이에게는 세상 속으로 뛰어나가는 길을 열어 준 결과를 낳았다.  한 종족이 중국인에게 배신을 당하였다는 구실을 얻은 그는 중국인에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그에게는 두 가지의 정치적인 호소력을 가지는 것이 있었다.

그 하나는 중국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경험에서 생각할 때 관료를 욕하면서 지방의 중국정부의 실정을 비난하는 것이고, 다른 방법의 하나는 자기의 종족적 배경으로부터 생각할 때 종족민에 대하여 오히려 수백 년 전에 자기들의 조상이 중국의 커다란 부분을 정복하고 정부가 자기들의 것이었음을 밝히며 빛나는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소란의 數十年間이 지나고 「누루하치」는 변강의 하나의 강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군대는 멀리 북중국에 침입하였다.  그가 지금에야 만주인(일본식 명칭으로)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자신의 동족은 그의 군대의 일부분에 불과하였다.  그 군대 중에는 몽고인, 조선인, 그리고 다수의 중국인까지도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만주인은 글을 쓸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몽고어에 비교적 가까웠으므로 몽고문자를 빌려서 만주어로 무엇이나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같은 방법으로 그는 만주어를 정치의 상징으로 도구로 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무모한 시도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만주인의 혼성왕국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국가수입은 물론이고, 군사적 노동력의 대부분까지도 모두가 중국인이 살고 있는 지방에서 나왔으므로 그 정치조직이나 과세나 행정 등의 주요한 요소는 모두가 처음부터 중국적이었다. 

 

15. 근대의 중국혁명

의화단사건 이후, 중국 淸朝의 운명은 이미 정하여졌다.  다만 하나의 문제라면 여러 서양제국이 중국 전토를 분할하기 전에 중국인이 하나의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는데 족할 만큼의 운동을 조직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었다.

만주인을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건설한 정치운동의 천재는 손일선(孫逸仙, 1866~1925, 광동성 향산현, 현재의 中山縣의 농가에서 출생하였다)이었다.  그의 위업의 소재가 되어 준 것은 국내국외의 중국인의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반청, 반제국주의의 광범한 그물의 눈이었다.  이 소재로부터 그는 정치적으로 훈련된 혁명적 정당과 중국혁명의 목적에 관한 일관된 이론과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건설한 것이다.

 

15-1.  제1혁명

혁명이 시작된 때는 손일선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기 이전부터였다.  孫이 해외에 있을 동안에 그것은 이미 火口를 열고 있었다.  혁명의 파괴 작업은 순식간에 완료되었다.  벌써 존립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帝國은 도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건설사업은 혁명가들 사이에 훈련과 규율이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장차 오랜 시간을 두고 손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양사회는 1911년의 혁명을 크게 취급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당장 진압하겠다는 결심도 하지 않았다.  열강은 벌써 저 1914년에 발발한 식민지와 시장과 투자를 추구하는 야만적인 세계전쟁을 위하여 각각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강은 외국 조약상의의 권리와 특권과 시장과 국채와 투자의 관리인으로서 일을 시키기 위하여 일인의 「강한 사나이」를 원조하고 새로운 공화국의 지배를 탈취하는 정책을 쓰는데 그치고 있었다.  이 「강한 사나이」의 성공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열강은 그에게 국제차관을 주었다.  이 「강한 사나이」는 근대최초의 군벌(軍閥)이었고 나중에는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마음먹었던 원세개(袁世凱)였다.

그 후 1926~27년의 제2혁명에 이르기까지 군벌(사병을 가지는 정치가)들이 중국을 분할해 지배하는 핵심세력이 된 것이다.  군벌들은 외국에서 무기의 수송을 받을 수 있는 항만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수중에 넣으려고 기도하며 일정한 내륙지역을 지배에 두게 되는 경우는 무기의 자급을 위해 병기공장을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기의 군대가 점령한 지방에서 긁어모은 세금에 의하여 그의 사병을 양육하였다.

여러 군벌들은 서로 밀리고 밀치며 서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중앙정부에 붙기도 하고 반하기도 하며 서로 싸웠다.  각 군벌들은 그때의 조건을 따라서 중앙정부를 지지하자고 하기도 하고 또는 다른 군벌을 원조한다는 미명으로 중앙정부를 협박해 영리를 꾀했다.

西洋諸國은 각각의 군벌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거래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의 경우 중국의 광산물, 그 외에 다른 자연자원을 차관의 현물로 저당에 넣을 정도의 실권을 가지며, 그래서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중국의 지배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나이, 즉 강자 中의 강자를 탐색해내 더 큰 것을 위해 이용해 먹으려는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본은 특히 그 같은 단일지배자라는 것을 싫어하여 언제나 하나 이상의 군벌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이중정책을 취했다.  일본이 하는 방법은 먼저 군벌과 지방적 특권을 협정해 놓고, 이 특권을 중앙정부의 승인을 얻는 방향으로 진출을 시작한다.  그 이행에 확실성을 기하는 수단으로 유력자와 거래를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나이와 대립하는 더욱 유력한 상대의 1인에게도 연결을 시켜 놓는 것이 일본의 수법이었다.

일본이 오랫동안 관계하고 있었던 유력한 일본의 군벌의 한 사람은  장작림(張作霖)이었다.  그는 일본이 많은 특별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던 동북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군벌에 대항하기 위하여 한 편의 일본의 지지를 사양하지는 않았지만, 공연하게 나라를 파는 매국노가 될 수는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결국 그를 없앨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가 탄 열차는 일본군의 보초가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던 철도 위를 달리던 중 폭파되었다.  그 궤도는 한시라도 중국인은 얼씬거릴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의 군벌시대의 커다란 부분이 1914년에서 1918년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과 평행해 계속된 사실을 기억에 둘 필요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계대전은 1918년의 휴전조약과 1919년의 베르사유 조약으로써 종막을 고하였지만, 아시아에서 일본은 시베리아 점령의 야욕을 완전히 버릴 때까지 군벌간의 전쟁은 종결되지 않았다.

1922년의 워싱턴 회의에서 동아시아와 태평양에 있어서 해군력과 정치세력의 균형을 규정하는 새로운 조약이 성립된 결과, 국제적 압력이 일본을 시베리아에서 퇴각시킨 것이다.  워싱톤 회의까지는 중국은 거의 연일로 일본의 위협 속에 숨죽여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은 동북중국을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기지로 이용하였다.  1915년 다른 주요 열강이 歐洲의 전쟁에 몰두하여 미국의 시선도 대서양을 건너고 캐나다를 향하고 있을 사이에 일본은 중국에 영구지배를 확립하려는 야심을 무적상태에서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는 것과 동시에 군사적, 정치적, 재정적인 거부권을 획득하는 목적을 가진 21條의 요구서를 제출하였다.  만약에 일본이 비밀로 하려고 했던 이 요구가 미국에서 폭로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중국은 이 요구를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모든 조항을 승인시켰을 것이다.

이 같은 수난의 시기에 손일선은 西洋諸國으로 하여금 무익한 공상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하면서도 자기의 사업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의 힘의 주된 원천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각양각색의 견해와 이론과 개인적 이해를 가지는 광범한 인간을 집결해 그들 사이에 공통되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그의 능력이었다.  그의 당원의 수는 항상 변동하였다.

형세가 좀 유리하게 되었을 때는 신중한 당원이나 안일한 당원은 안일로 탈락하였다.  반대로 사태가 악화되었을 때는 가슴이 약한 자는 도망하였다.  孫이 얼마간의 군대를 지배하고 있는 한 협력하고 있던 군인이 孫을 무시하고 모른 체 하였을 때, 혹은 그의 전복운동(顚覆運動)의 성장에 당황한 외국세력이 孫의 당원을 협박한다든가 금전으로 유혹하였을 때 혁명운동은 그 때마다 전진을 멈추곤 하였다.

그러나 손일선은 못을 박고 빼듯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망명 중에는 언제나 중국 내의 정치뉴스와 최신의 정치여론을 재외중국인에 전하고 또 중국에 돌아갈 때는 재외중국인으로부터의 정치자금과 정치여론을 가지고 갔던 것이다.  제외국으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해안지방에서 출생한 그가 내외의 중국인 사회의 사이를 이어주는 열쇠로서 일하는데 적임자로 간주했다.  소년 시절에 그는 하와이에 건너가서 오랫동안 그곳의 미국인의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자라서는 미국의 중국식민의 발판이었던 홍콩(香港)에서 의학을 수학하고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해외에 있었던 중국인은 정치자금을 보내기도 하고 또 중국인의 정치사상의 성장을 도운 많은 사상을 전함에 따라서 중국혁명의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해외, 즉 미국본토, 하와이, 특히 동남아시아의 영, 불, 화란 領의 식민지에 出稼하여 진출한 중국인의 자손들이었다.

출가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극빈한 농민으로서 복종과 저임금으로 정치적으로는 무원(無援)의 노동자로서 식민회사에 고용된 것이다.  그들은 미국에 철도를 부설하고 말레이반도에서 주석을 채굴하며, 또 고무농원 등에서 일을 하였다.  단결성으로 그들은 어느 정도의 개인재산을 모으면 상호간에 서로 도왔다.  중국인의 절약해 먼저 저금을 하고 다음에는 투자하였다.  교육은 힘이라고 하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신념으로 그들을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이렇게 한 결과 이들의 중국인 이민의 다수자가 성공하고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인사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인종적 편견에  방해받았다.  또 식민지에서는 어디서나 그들에 대해 희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의 土民은 자립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고정관념에 부딪쳐서 그것을 타파할 수가 없었다.  이 같은 차별대우는 그들 내부에 애국심을 불러 일으켜서 그들의 생각을 조국에 향하게 했다.

해외에 체류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강한 자유스런 중국만이 자기들의 지위의 향상을 돕는 것이 되며, 중국에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유력한 왕국과 변화되지 않은 사회제도와 해외에서 몸에 벤 돈과 기능을 유효하게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 경제구조에서 생활하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화교는 고국의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게 되었다.  실력 있는 중국인조차도 혁명의지는 대단히 높았다.  그 이유의 하나는 보통 너무나도 고압적이었던 식민지정부의 태도가 다소의 정치적 감각을 가진 식민지인민을 급진적 사상으로 몰지 않으면 안된 사정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정치적 생활을 가지지 않았던 그들에게는 다만 정치적 사상만이 허용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치행동을 수반하지 않은 정치사상은 급진주의로 기울어진다.  무엇인가 된다면 하나의 정치이론은 급진적로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한층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화해에 도달하려고 하는 인류의 인내하지 않은 압력을 통하여 이론의 예리한 칼날을 둔하게 하며 정치적 실천의 논리성보다는 현실성을 증가시키는  것이 정치의 살아있는 실천인 것이다.

 

15-2.  제2혁명

중국에도 러시아의 경우처럼 위대한 혁명적 기회는 歐洲의 전쟁이 세계의 현존질서를 근저부터 흔들었을 때 닥쳐왔다.  손일선은 이 기회를 이용하기에는 단명으로 그쳤다.  그는 1925년에 죽었다.  그의 최후의 대사업은 광동에서 수천의 동지를 향해 행한 강연으로서 1926년~27년의 제2혁명을 위한 사상적 준비를 갖추었다.  그 강연은 완결되지 않았지만 그가 죽은 후 현재의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의 형태로 남았다.  손일선의 자식인 손과(孫科)는 이것을 대신한 표현으로서 민족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

손일선의 교의는 때로 난해하다고 하지만, 어느 관점에서 이해하면 그것은 반드시 난해한 것만은 아니다.  1918년에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독일을 타도한 諸國은 서로가 입으로는 세계의 민주주의를 옹호하자고 말을 하면서도 내심은 명확하게 식민지제도를 끝까지 존속시키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全아시아의 인심을 동요시켰다.

인도에서 조선까지의 동아시아 전역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소리, 혹은 적어도 지방자치 정부내의 대표의 증원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 위에 러시아의 혁명 소식은 식민지 민족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大帝國의 붕괴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마르크시즘」의 지식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러시아혁명이 아시아 내부에 주어진 가장 큰 파동은 동시베리아를 병합하려고 벼르고 있던 일본의 실패였다.  이것만이 18세기 이후 계획적인 식민지 정복이 실패한 최초의 것이었다.

그 같은 사정에서 중국내의 혁명사상 그 자체도 1911년 당시에 비교하면 확실히 고무적인 상황이었다.  반대로 혁명운동은 정치조직이론에 관심을 가지는 지식계급과 정치대표를 가지지 못해 경제적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상공업자들로부터 이루어지는 창(槍)의 머리와 같은 것이었다.  이 창의 머리의 약점은 「자루」라고 말할 수 있는 데, 자루를 잡지 않은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야 혁명운동은 자루 있는 창 정도가 아니다.  全국민을 포옹하여 하나의 훌륭한 성곽을 파괴하는 대철추(大鐵鎚)의 모양으로까지 굳어 있었다.

공개강연을 한 손일선은 이 광범한 지지를 될 수 있는 대로 강한 결집으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또 한층 미묘한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단지 중에서 영국, 미국, 그 외의 다른 조약국의 무력간섭을 겁내는 무리와 소비에트 동맹이 준 「유정천(有頂天」 원조가 좋아서 자기를 잊고 있는 한 무리를 어떻게 하여 협조시키느냐가 문제였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에 결성되었다.  그 당원은 손일선의 국민당에 참가하는 것이 허가되어 공산당원이 아닌 국민당원중의 일부의 사람들은 러시아에 공부하러 가게 되었는데 장개석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 손일선이 소비에트 대표와의 사이에 계약을 맺어서 소비에트로부터 군사 전문가와 정치전문가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 계약은 조약국을 놀라게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많은 중국인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국의 정당 내지는 지도자가 아무런 조건 없이 체결한 최초의 것이며, 더욱이 단 하나의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동맹은 손일선이 중국을 공산화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음을 확실하게 알면서도 다만 단순하게 孫이 할 수 있는 일을 승인하고 그것을 원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때까지 자국의 영토 혹은 자원의 수탈을 수락하는 일이 없이 외국과의 정치협약을 체결한 중국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손일선이 이면조건이 달리지 않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중에 지배관계의 비밀사항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게된 것이다.

손일선이 관계한 공산당은 확고한 통일정당은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도 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항쟁이 다른 당파와 그 유력한 지도자를 숙청하고 감옥에 몰아 넣은 시대였다.  중국은 러시아의 「이데올로기」 전장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의 소비에트 동맹의 정치적 여러 지도자는 모두가 중국내의 정세와 중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해 자기의 사상이 기여하도록 또는 영향이 미치도록 요구했다.

그들의 사정은 모든 것이 손일선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문제라든가, 중국의 여러 문제에 「마르크시즘」 이론의 적용의 문제에 대하여 「유세」할 때의 주의 깊은 그러나 복잡한 방법에 커다란 관계가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여러 혁명지도자의 사상적, 정치적 불일치보다는 일치점을 강조하였으며, 오랜 동지를 멀리하는 일 없이 가능한 한 다수의  새로운 동지를 끌어 모은다는 확고한 전략에 변함이 없었다.

손일선의 국민당에 소속된 군대가 광동에서 북상하여 全中國 통일의 진군을 개시할 때, 그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 진군이 유명한 장개석 휘하의 북벌군이었다.  이들의 군대 속에는 러시아인 교관의 훈련을 받은 선발된 장교단에 교육을 받은 부대가 있었다.  이 군대에는 정치적 조직이 동행하기도 하고 또는 선도하기도 하였다.  이 조직 중에는 공산당의 방식으로 훈련된 자라든가 또 공산당원이었던 자도 다수 섞여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부르짖던 사상과 이해는 압도적으로 국민당적인 구호였으며 공산당의 전략은 아니었다.  이 결과로서 애국주의에도 민족주의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 군벌의 군대는  붕괴와 국민당의 본격적인 우월성에 패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수의 선교사, 특히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자와 조계에서 대중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던 사람들의 의견으로는 국민당만이 중국을 참으로 대표하는 정당이라고 생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체류하던 외국의 정계와 재계 대표자들 사이의 여론은 철저한 반 국민당이었다.

국민당 군대가 양자강 연안에 오랜 세월동안에 구축하여 놓은 외국권익지대에 진군하여 왔을 때 위기는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중국인 중에는 동지로서 어떻게 싸워도 자유지만 그들에게 외국의 법률과 질서를 혼란시키는 권리는 없다고 하는 옛날부터의 태도로 배짱을 부리는 자도 있었다.  중국인의 일부의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중국인이 자국 內에서 하고 싶은 것에 따라서 행동하기 시작할 때가 왔으므로 외국인은 조용히 이 운명을 받으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도망가는 것이 좋다고 하는 성급한 협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외국인 중에서는 선교사까지도 살해되었으며, 또 재산을 소각 당하기도 하고 약탈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미미한 사건은 외국의 신문에 즉각 확대 보도된 반면에, 외국군함이 중국인 수천의 양민을 살상하는 과거의 포함정책이 되풀이 된 중요한 극한사건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질풍노도로 진군하여온 북벌군은 한구(漢口), 남경, 상해를 점령한 후에는 속도가 늦어졌다.  잔인한 일본의 간섭이 양자강 북부의 국민당의 진군을 저지하였다.  국민당군의 주력부대가 남경, 천진, 북경과 통하는 철도에 진군하였을 때에 산동성의 일본 육군은 도발적 행동을 취하여 이것을 방해하였다.

국민당의 최고위원들은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입장 전체를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華北에서 그들은 일본과 선전포고 없이 전쟁에 돌입하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상해에서 중국인 도시는 점령하였으나 共同租界와 프랑스 租界는 점령되지 않았다.  이들의 租界는 외국의 투자, 경제이권, 정치특권의 최대의 요새였다.  조계는 워싱턴, 런던 그 외의 諸外國 수도에 울려 퍼지는 강한 압력이 분출하는 하나의 중심이었다.

문제는 국민당 군은 여러 외국의 군사적 간섭을 각오하고라도 일거에 완승을 목표로 돌진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획득한 위대한 전과를 중심으로 일단 휴전에 들어간 다음에 남은 부분을 교섭으로 획득하는 방법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점에 대하여 국민당 내부에는 중대한 재정돈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혁명운동을 일으키는데 가장 용감한 다수의 사람들은 지금이야  말로 당면한 것은 이미 충분한 전파를 울린 것이었으므로 일단 한 번 정리에 들어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는 확신이 나온 것이다.  또 혁명의 재원을 지불한 화교를 포함한 부유한 중국인들은 적어도 片足을 「갖지 못한 것」의 위치로부터 「가지는 것」으로의  입장으로 옮겨갔다.  혁명의 지도자로서 혁명의 성공으로 가장 이익을 얻고 있던 사람들은  그 이상의 변혁을 선동하기보다는 행정과 조직의 봉사에 먼저 구축할 수 있는 정세가 이때 중국의 내부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16. 대전 전의 중국

1920년에서 1937년까지의 사이 중국정부는 두 가지의 주요한 정책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즉 국내에 정치구조와 행정지배의 통일을 실현하는 線과 국가를 강화하고 근대화하는 線이다.  이 시대는 서양의 교육을 받은 중국인이 더욱 잘 팔릴 때이다.  그들은 무한의 봉사와 강력한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서 중국은 공업, 광업, 은행업, 토건업, 교육, 의학, 공중위생의 쾌속발전을 이룩하였다.  全中國人은 그 진보를 실제 눈으로 볼 수가 있었으므로 중국이 더욱 더 근대적이고도 진보되어 가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중국인은 하나의 커다란 위험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일본이 이대로 보고만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통일에 대한 일본의 저항은 곧 바로 국민당의 화북지방 지배를 방해하는 공작으로서 나타났다.  그래서 위기가 온 것이다.  국민당이 결연한 태도로 돌진하였다면 여러 조약국은 일본을 지지할 것이라는 극히 구체적인 위험이 있었다.  또 한쪽으로는 국민당은 벌써 상해와 양자강을 확보하고 있었다.  만약에 국민당이 일들의 지방에서 미국, 특히 영국의 주요 기업에 대해 유리한 무역활동을 허가하는 의지를 표시할 수만 있었다면 조약국간에 통일전선이 이루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 할 수가 있었다.

자기의 의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신정부는 공산당과 절연하고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왔다.  거기서부터 외교정책이 국내문제와 서로 엉키고 있었다.  신정부는 상인, 은행가, 공장주, 보험회사, 선박회사 등의 급속히 발전하는 자본가계급의 도시이익과 중국으로 보내지는 화교의 이익을 어디까지 대표하여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주가 상류계급으로서 세력을 잡고 있는 산간오지 諸省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의 주의가 필요하였던가?  군대에 관하여서는 어디에 균형 점을 찾아 내야하는 것인가?

병사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농민이 독립과 자치라고 하는 관념을 자기의 문제에 부합시키기 위해 토지는 보다 많이 지대는 보다 적게라고 하는 요구가 나온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장교 중에는 지주계급의 자제가 많아서 그들은 교육정도가 높았으므로 군대에서 진급이 빨랐다.

여기에 러시아와의 절연에 따라 정부와 공산당과의 내전이 일어났다.  러시아와 절연은 영국, 미국과의 관계의 개선에 수반된 것이었으나, 그 개선은 개선으로서 일본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려는 전략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문제의 전모는 중국공산당이 항일 전에서 연출한 역할이 어떠한 것이었었는가? 에 대해  생각해보면 가장 명료하게 된다.  중국이 l928년에서 1937년까지의 사이에 공산당과의 내전 외에도 여러 가지 많은 경험을 해야만 했던 사실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당 신정부는 그 권위를 요구하며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먼저 우호적인 諸外國政府의 승인과 다음에 신임을 얻을 것, 그리고 일본의 계속되는 침략을 저지할 힘이 필요하였다.  국내에 아직 강하게 남아 있던 각 省의 분리주의와  지방군벌의 소극적인 방해와 적극적인 저항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독립의 군벌이 아직도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국민당 정부의 권위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여러 지방을 차례로 지배 하에 편입함에 따라서 공산당과의 전쟁에 의하여 발생한 파괴와 국내의 사회적 긴장은 점점 누그러져 가고 있었다.  공산당 군이 점차로 이들의 지방으로 밀고 들어오자 군벌은 우선 정부군의 원조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다음에 재정적, 행정적으로도 중앙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략상, 경제상의 필요에 응하여 도로와 철도 교통이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중국 최초의 철도는 해안에 평행하여 양자강 유역과 황하유역의 평야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철도는 최초의 조약항의 무역을 증대하여 외국기업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외채에 의하여 겨우 외국의 관리 하에 건설되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국민당 정부는 그 지배를 전국토로 넓히고 외국간섭을 배제하고 통상을 발전시키면서 직접 산간오지로의 통로를 넓히는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두 개 노선은 화남의 광동에서 양자강연안의 무창(漢口의  반대편에 있다)에 이르는 線과 또 다른 하나의 화북의 북경에서 북평 사이와 한구에서 북평 사이의 기존 노선과 교차하여 서북의 협서성에 이르는 線이었다.  이들의 새로운 철도가 없었다고 한다면 중국은 1937년, 그리고 1938년에 일본군의 공격의 압력에 과연 지탱할 수가 있었을까 의문이다.

여러 철도의 중간 중간에 또 그 먼저에는 자동차용 도로가 보다 더 한층 급속하게 넓혀졌으며 또 다시 오지 깊숙한 곳에는 항공로가 열려서 자동차 도로마저 들어 갈 수 없었던 지점까지 도달하게끔 되었다.  결과는 오늘 중국의 산간오지에서 비행기는 알고 있으나 자동차는 본적이 없다고 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현실에 생활하고 있으며, 또 자동차나 트럭은 보았지만 기차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그것보다도 다수가 공존하는 현상을 낳았다.

거기에는 몇 세기 동안에 생활에는 거의 변화라는 것이 없었던 가장 오지의 벽지에 먼저 최초에 도달한 것이 가장 진보한 최신기술이었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많은 중요한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효과가 보였다.  중국 내에는 증기력(蒸氣力)의 시대를 완전히 뛰어 넘어 직접 전기력의 시대로 옮겨가는 방대한 지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중국의 중공업과 경공업은 미증유의 속도로 발전하였다.  반대로 외국의 소유나 또는 경영 하에서만이 가능하던 각종의 기업에서 중국인은 점차로 재능과 가능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양적으로 보면 1937년까지의 중국산업의 실적은 공장 수에 있어서나 동력에 있어서나 세계 도표에는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질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빵」에 대한 「이스트」와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동력사용 기계는 모두 두 가지의 일을 한다.  즉 그것들은 생산적으로 운전하며, 교육적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모든 공장은 기술훈련의 학교였다.  중국의 경제와 사회의 변형은 바로 그 인화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초기의 「앙키」의 뉴잉글랜드에서 기계시대가 출현하려고 할 때에 직업인에서 발명가나 숙련기사에의 이행이 놀랄 만큼 단시일의 사이에 실현한 것과 같다.

하나만 예를 들어 보겠다.  숙달한 중국인 기사가 동유(桐油, 植物油)를 태워서 「디젤엔진」을 설계하고 싶었다.  독일인의 기사들은 조력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자기들의 무역독점을 지키기 위한 것과 또 하나는 중국기술의 전반적 수준이 복잡한 디젤엔진의 제작에는 아직 불충분하기(독일 사람이 말할 것)때문이었다.  중국인은 자력으로 시작하였다.  화학실험에서는 동유를 표준 「디젤」에 맞게 공식적으로 분해하는 것이 되지 않았으므로 「엔진」 자체의 가운데 압력비율을 변경하여 보았더니 문제는 해결되었다.  여기서 설계하고 곧바로 「엔진」을 만들기 위한 기계 공구를 제작하고 마침내 하나의 완전한 공업이 성립되었다.

국민당정부는 여러 외국과의 외교에 고도의 수완을 발휘했다.  첫째 문제는 외국세력이 자기를 위하여 중국을 지배하는 강한 사나이를 구하는 옛날부터의 요구의 문제였다.  이들의 외국세력은 아직 보수적이며 중국정부가 외국기업에 중국의 국가적 이익을 존중 시키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모조리 뻔뻔스럽게 여겨 증오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종종 중국인이라는 사람들이 정부나 정치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고 그저 잠깐 동안이라도 그냥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는 병폐(病弊)가 있었다.

또 그들은 외국 조계나 치외법권 등은 「법률과 질서」의 옹호 때문에 깨질 수 없다는 이론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혼란과 부패정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역시 군벌이라든가 비애국적인 방법으로 치부한 돈을 조세와 기타의 일체의 중국지배에서 면제되기 위해 조계의 외국은행에 예금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외국세력은 무엇보다도 장개석을 자기들의 강한 사나이로 하여 올리는 것을 바랬던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당시의 그들에게 중요한 공적의 하나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외국의 지배를 증대시키지 않고 중국정부의 실력과 신용을 쌓아 올린 것이다.  점차로 그는 여러 열강 중에서도 미국과 영국으로 하여금 중국정부를 지지하게 하는 것과 다시 그들의 특권을 스스로 방치하여 중국의 주권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에 있어서의 영토적 정치적 제국주의의 제창자로서 또 미국과 영국 세력을 위협하는 경쟁자로서 더욱 고립하여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까닭이 당시에 확실히 밝혀져 있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히틀러」의 봉기를 마치 순수한 유럽적인 현상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그가 1933년에 권력을 잡은 것은 일본이 1931년에서 32년에 걸쳐서 국제연맹의 무능력을 폭로한 이후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기타의 조약국들 중에 일본의 야심에 동정적이었던 나라들이 나타난 관계로 많은 논점이 돌출 되는 불행한 일이 밀어났다.

세계의 한쪽에서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동정적으로 기울어져 있던 동종류의 세력이 있었다.  그 상황관계로 일본의 침략행동은 처음에는 독일이나 이태리의 그것과 같이 민주주의의 여러 국가 간의 연합정책에 의해 반대를 받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각 국 중에는 침략의 확대에 깜짝 놀란 사람들도 약간은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든가 무관심이었으며 소수의 사람은 마음에서 동정적이었다.  중국 자체에서는 반대로 외국 제국주의 때문에 내부에서 중국을 지배하여 주는 강한 사나이를 찾으려고 하던 외국인들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에 와서는 외부에서 중국을 지배하며 제국주의자의 선두로서 또 제국주의 일반의 대리인으로서 일하여 주는 강한 나라를 구하려고 하는 생각으로 변한 것이다.  이 같은 세력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정치적 장래가 불안한 중국과 직접 무역을 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일본에 투자하여 안정적인 이윤을 얻어서 위험이 적은데 만족하는 것이 왜 나쁜가? 일본에게는 보다 큰 위험과 보다 큰 이윤을 취하게 하여 직접 중국에서 지배와 착취를 하게 내버려두는 편이 우리에게 이롭지 않겠는가?」

민주주의 제국의 다수의 사람들의 의혹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법률과 질서의 보관인을 자처하고 나선 일본이 그 법률과 질서를 모두 파괴하는 과정을 묵인한 것에 그치지 않고 원조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미국인도 영국인도 다시 화란人과 같은 적은 소수의 특권국민까지도 중국으로 하여금 경쟁이나 이익보다는 다만 생존을 위하여 전쟁을 하게 만든 것이다.

 

17. 만주사변.

17-1.  일본의 괴뢰정부.

최초의 시련은 1931년 일본이 동북중국에 침입할 때 닥쳐왔다.  9월 18일 남만주철도(동북중국을 관통하는 일본소유의 철도)가 일본군에 의하여 엄중하게 경계되고 있던 한 궤도가 폭파되었다.  파손은 급행열차가 통과한 후에 발견되었으나 사상자는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수도 봉천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불과 몇 시간 뒤에는 일본 병은 주요한 철도연변에 늘어서서 모든 중요한 도시를 점령하였다.

당시의 외교문서를 반복하여 읽어보아도 이 침략사건의 설명은 붙어있지 않았다.  들춰 본 문제는 외교용어로 말하는 미묘한 문제였다.  참으로 미묘하고도 극한 문제였으므로 세계 일류의 외교관들조차도 문제의 사실의 논점에 접촉도 하여 보지 못하고 이것을 회피하기 위한 문서의 초안을 위촉할 정도였다.

더욱이 진상은 극히 단순했다.  중국은 통일로 향하고 있었다.  1911년 중화민국의 건설이래도 그 정치적 분리주의와 언제나 근린지방에 전쟁을 걸어온 침략적 태도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광대한 동북 여러 성은 내전을 일으키지 않고 국민당정부에 참가하여 평화교섭에 의한 그 권위에 복종하고 있었다.

동북의 여러 성에는 자신들의 문제에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지 않았던 중앙정부의 통치에 복종을 어려운 고통으로 느끼는 변강적(邊疆的) 전통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거기에 사는 민중도 역시 애국적인 중국인으로서 다른 지방의 중국인이 주권을 침해하는 일체의 외국지배와 특권을 추방하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철도나 광업 조차지나 그 외의 일체의 「특별조약」에 의한 일본의 침략을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를 굳히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고 동북의 여러 성은 가지려다 남은 변강은 아니고 중국의 가장 중요한 진보하는 국경이었다.  거기는 상해의 인접지방을 제외하면 인구 1인당의 사용 마력수와 토지 평방 마일 당의 철도 마일 수에 있어서 중국의 어느 지방보다도 진보된 기계화 공업을 가지는 지방이었다.

동북의 오래된 군벌인 장작림의 뒤를 이은 장학량(張學良)은 남경의 국민당 정부와 다소간 관계하여 중국통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동북의 여러 성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일본의 위협적인 태도의 통고를 받았다.  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장학량은 동북중국을 중국의 다른 여러 성과 제휴시키는 것이 방침이었다.  1929년 국민당기는 높이 게양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일본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동북제성 침략은 냉혹하게 계획되고 잔인하게 실행되었다.  이 침략의 결과는 동북중국에 있어서 일본의 특권적 지위를 직접적 점령으로 바꾼 것이 되었다.  또 하나의 중대한 결과로서 일본 국내에서는 군부와 민간의 제국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볍게 궁지로 밀어붙여 일본국민을 정복한 파시즘이 탄생하였다.  그 내부의 상황을 중국영토의 제국주의적 정복에 결부시켜 「비상사태」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17-2.  열강의 침묵

극동의 위기는 해외에 알려졌다.  극동에 대해 경제적, 정치적 내지는 전략적인 이해 관계를 가지는 정도의 나라에서는 어디서나 의혹의 눈초리와 주저의 몸짓을 보였다.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느낌은 널리 퍼져 있었으나 그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념을 말로 나타내면 그것이 정부의 행동으로 되어 나타난다고 믿고  입으로 말하는 용기에 못을 박은 것이다.  중일 양국 간의 참다운 사태는 좀처럼 파악되지 않았다.

1세기의 오랜 세월을 두고 중국인은 자국의 뒤떨어진 가장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생각이, 또 열강이 중국에 대하여 또는 중국에서 이룩한 것만이 중대한 것이라고 하는 생각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믿었다.  오래도록 일반에 인정되어온 생각 중에서 어떤 중국에 관한 현명한 정책도 해가 된다는 하나의 가설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중국을 일본의 손에서 구한다는 것은 돈이 드는 애타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설인 것이다.

일반의 사람들은 러시아에 대항하는 일본을 지지하는 결의는 가능해도 중국을 국제적 결의에 의한 원조에 가치가 있는 정도의 나라라고 하는 확신은 갖지 못하였다.  그런 사이에 일본을 지지하는 두 개의 강력한 논의가 일어났다.

그 하나는 중국은 만약에 외국의 지배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면 세계의 세력균형 흔들게 하는 손댈 수 없는 나라가 된다고 하는 두려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 중국의 법률과 질서에 대하여 주된 책임을 지게 할 것, 즉 일본인을 써서 「중국인을 그 한계에 그치게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하는 방관적 태도였다. 

또 하나의 진실한 논의는 중일간의 문제는 전혀 아닌 것이며 일본과 러시아간의 문제이다.  만주의 침략은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에 대하여 단호한 공격을 개시하게 한 것이다.  동북의 諸星을 러시아에 대한 장래의 침략을 위한 일본의 기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일본이 용이하게 러시아 침략에 성공했더라면 일본인들은 오랜 기간 동시베리아의 광대한 토지의 개발에 분주할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서양 민주주의 제국의 투자와 유리한 차관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서양제국들은 그 점을 노리고 동북아 문제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시베리아의 정복이 곤란한 일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서양 민주주의 제국에 있어서 유리한 것이다.  서양의 제국들은 일본을 극동으로 팽창하는 러시아에 대한 반대급부로 지지하므로 서 극동에서의 세력균형의 완전한 통제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17-3.  허수아비, 국제연맹.

일본의 결의와 영국, 미국의 방임주의와의 사이에서 중국인과 그 정부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19세기적 제국주의 때늦은 새싹이 반복하여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자각이 중국 내에 압도적이었다.  이것은 배상, 즉 새로운 조약의 개설이라든가 새로운 租借地의  할양이라든가 아니면 보다 이상의 경제적 양보의 승인 등에 의하여 매매할 할 수 있는 침략은 아니었다.  그것은 광대하고 풍요한 동북의 여러 성의 할양이상의 것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전 중국인에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 자유나 항복이냐의 최종 결정의 발단이 되었다.

국운을 나누는 결정을 협박하는 느낌이 다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용이하게 행동상의 결정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1931년의 중국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나라였는가를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그 정부는 대외대내 양면의 정책위에서 세워졌다.  그 대외정책에서는 중국 내에 막대한 투자권익을 가지는 열강과 절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의 열강은 행동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때로는 자국의 권익보호를 위해 일본과의 사이에 일을 벌이게 되면 그 권익의 가치 이상으로 높은 비용이 들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또 때로는 중국이 혼란에 빠져 권익자체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급했다.

대내정책에 있어서는 중국혁명이 정치에서 사회혁명으로 완전히 이행하지 않은 사이에  혁명의 속도를 늦추어 놓은 것이 문제였다.  두 개의 정책은 서로 밀접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국민당정부는 법률과 질서를 지키는 정부이며 그와 같은 것으로서 외국의 지지와 신용을 받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관세수입은 착실히 향상되고 있었다.

중국정부는 일본정부가 사명으로서 중국 내에 완성하는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던 것을 자기들은 벌써 실현하여 체제를 고치고 있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야 외국의 권익은 과거 40년 간보다 한층 더 좋은 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일본을 중국에 있어서의 여러 외국권익의 보호자로서 일하게 하는 필요는 없어질 것이다.  옛날부터의 외국투자는 지금보다도 안전하게 되었으며 그 수익은 보다 확실하여 투기성이 적어졌다.  새로운 직접투자의 길이 넓혀졌으며 벌써 일본을 신투자의 대상 내지는 보증인으로서 일하게 하는 필요도 없어졌다.

국민정부는 이때까지 어떠한 외국간섭에 의하여 평온하게 된 것보다도 훨씬 넓은 지역에 걸쳐서 지배력을 회복하였으므로 일본이 중국을 혼란에서 구할 필요는 없어졌다.  조약지에서 멀리 떨어진 토지라도 국민당 정부의 권위가 미치고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여행도 통상도 안전하였다.  일본이 국제적 동정에 호소한 가장 선정적인 호소, 즉 「중국을 공산주의에서 구하고 아시아에서 볼셰비키의 홍수를 막는 역할」은 어떠한가 하면 그것도 또한 사족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국민당정부는 중국공산당을 일정의 지역에 못을 박아 놓았다.  그리고 외국에서의 차관과 외국에서 구입한 비행기나 장비를 공산군 토벌전에 대규모로 사용한 사실로 그들의 의도는 명확히 나타났다.

이 같은 이유에서 중국은 실제에 전쟁을 하지도 않고 東北諸省을 구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만약에 중국이 그때 실제로 싸우려고 결심하고 있었다면 그 위험은 극히 커다란 것이었을 것이다.  중국은 여기서 전 문제를 국제연맹에 옮기려고 결심하였다.  그것에 의하여 다른 여러 나라, 먼저 미국과 영국에 위험을 분담시키려고 하였다.

여러 외국이 일본을 억제하는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일본의 요구를 요약한다면 중국의 「법률과 질서」의 국제적 보관인으로서 인정받으려는 열망이외는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 그 본심은 국민당정부의 치하에서 법률과 질서는 보다 잘 유지되고 있으며 중국이 西洋諸國과 접촉을 시작한 이래로, 또한 반대로 없었던 정도로 밝은 장래가 투명하게 보인다는 것 등이다.

중국이 국제연맹을 공평한 재판소라고 아무런 생각 없이 오해한 것은 확실한 것이다.  연맹은 실제는 이익과 손실을 위원회의 회의에서 계산하고 전장에서 승부를 붙이는 대신에 조약에 기입하는 일종의 국제권력의 주식 거래소였다.  중국은 여기서 적어도 하나의 승리의 찬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연맹의 관례를 쉽게 익히지 못했다고 해도 적어도 손실을 메울 수는 있었을 것이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연맹에 가입하고 있지 않았다.  미국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연맹의 결정에 중개인 역할을 한 사례가 있는 반면에 1922년의 워싱톤회의는 극동에서의 국제적 여러 결정으로부터 러시아를 제외한 사례가 있었다.  일본의 목적은 중국을 러시아와 혹은 적어도 볼셰비키의 위협과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일방으로는 중국의 영토적 내지는 정치적 보전을 위해 미국의 원조를 구하는 것이 중국의 이익은 되었으나 연맹에 제소하는 쪽이 무력에 호소하는 것보다는 안전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 제소의 결과가 중국의 참담한 패배로 끝날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은 최종적인 패배는 아니었고 이 패배에 의하여 중국은 최후의 전쟁준비의 시간을 벌게된 것이다.

연맹의 결의를 요약하기란 곤란하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보기 위하여 (꼭 무슨 불쾌한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파견되었던 「리튼」 조사단이 만든 보고서는 국제적 모욕을 드러낸 부분은 불사르고 채택된 하나의 걸작이었다.  일본은 연맹을 탈퇴하고 동북제성에 만주국이라는 전대미문의 위장국가를 세웠다.  이 괴뢰는 잘 그 목적을 수행하였다.  일본은 동북제성에서 책임은 만주국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얻은 것이다.

이에 대한 미국의 눈치 없는 반응은 「후와 스찌므슨」의 「불승인」주의였으나 여기에 영국이 뒤따랐다.  이 주의는 중국의 영토적, 정치적 보전에 관한 미국의 정통적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미국이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성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동시에 미국이 더욱 행운의 기회에 처해 있을 경우 이 정책을 옹호하기 위한 정쟁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이 사이에 중국은 약자의 지위에서 강한 지위에 잘 나아가려고 인내하며 강한 행동을 개시하였다.  일본의 새로 불어난 요구와 영국, 미국의 투자사업과의 충돌이 표면에 나타났다.  동북중국에 관한 연맹의 결정에 동의한 제국의 정부는 민간기업이 새롭게 획득된 영토의 개발사업에서 일본인과 교역하기도 하고 또는 새로운 재로나 새로운 기술(예를 들면 비행기나 자동차의 설계라든가, 높은 옥탄가스를 일본의 급격한 군비확장을 위하여 제공하는 것을 금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외 없이 이것 이상 일본의 돌발적 행동을 방지할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공격하게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이 명확해지면 해질수록 어떠한 중국에 대한 새로운 행동도 중국만의 희생일 뿐만이 아니라 다시 또 영국, 미국, 프랑스의 투자사업과 장래의 경제적 발전을 희생으로 하여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 더욱더 확실하여졌다.  미국과 영국은 이제야 더욱 더 넓게 중국과 이해관계로 맺어졌다.  병기는 계속하여 중국에 보내졌으며 화폐는 벌써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정치활동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으로 대출되었다.

다수의 미국인은 중국이 동북지방을 잃어버린 것을 극히 냉담하게 생각하여 다분히 중국에 있어서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은 1931에 발발직전까지 왔으나 본격적으로 된 것은 1937년의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실제의 전쟁은 1931년에 시작된 이래도 부단히 계속하여 왔다.  1931년에서 1937년까지는  국지적 전쟁이었으나 1937년의 노구교에서 전쟁국면은 확대하여 진주만 이후 중일 양국의 전쟁은 세계전쟁 속으로 같이 뛰어들게 된 것이다.

당시의 신문이나 책들을 읽어보면 동북제성의 점령은 대략 3천만명의 인구와 미개발지 내지는 반개발의 자원을 가지는 360,000평방 마일의 영토를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으므로 상당한 긴 기간에 일본을 만족시켰을 것이라는 추측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은 그치지도 제자리 걷기도 하지 않았다.  국제연맹과 미국은 동북중국을 일본에 일임하고 있었다.  이 좋은 기회를 어디까지 이용해 일본은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가일층 강화한 것이다.

 

17-4.  열하와 화북을 잃다.

다음해인 1933년 일본은 중국의 熱河省을 공격하여 이것을 일본이 아닌 「만주국」에 병합하였다.  열하성은 100,000평방 마일의 토지를 가지는 대단위였으나 이것을 일본은 꼭 10일간의 전쟁으로 전부를 탈취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 공략에 있어서 이때까지는 연습에도 사용하지 않았던 대규모의 자동차 부대를 사용하였다.  미국과 영국은 이 전쟁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독일은 여기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열하에서 일본인이 사용한 전법에서 자극을 받아 나중에 오스트리아, 체코를 점령하며 폴란드를 제압한 때의 전법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는 것이다.

열하성을 손에 넣은 일본은 그 전력을 서쪽으로 구사하여 내몽고를 경유하여 북평에서 천진항까지 점령하였다.  동시에 일본은 그 전력을 이용하여 착착 정치적, 경제적인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최초로 시작한 것이 커다란 비밀무역을 장려하여 화북의 경제생활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화북에는 세금 없는 일본상품이 범람하였다.  중국의 산업과 경제는 산산이 파괴되고 정부는 국고수입의 최대의 재원이었던 무역관세수입의 상당부분을 침략자에게 잃었다. 

경제적 파괴는 정치적 침략의 길을 넓혔다.  일본은 하북(河北), 산서, 하남과 산동의 北部五省을 스스로의 「정당한 포부」로 자치권을 가진 중국의 일부로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에 일본과 절충하기 위한 특별한 「정치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중국정부에 요구하였다.  그 다음의 일은 지방군벌을 꾀여서 일본의 원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며 그 전 병력을 국민당정부에서 이탈시키는 것이었다.

일본은 화북지방을 다른 지방에서 분리시키는데 거의 성공한 것 같이 보였으나 실제는 이중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 침략의 손이 아직 미치지 않았던 지방에는 저항의식 대단히 강하여 민족활동의 시기가 다가왔음을 자각하는 소리가 동북지방에도 일어났다.  점차로  동북지방의 주민들은 자기들을 고립시키지 않기 위해 배후에 있는 거대한 동포의 지지를 얻고 있다는 감정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 상황으로 중국의 전 민중이 일제히 「우리들의 항일전선을 형성하자」고 호소하고 있으며 화북지방의 전 민중은 「同胞諸君의 지원을 얻는다면 우리들의 전선을 선포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18. 서안사건(西安事件)

이 항일의 감정은 1936년 12월 장개석 총통이 서안에서 유괴되는데 이르러 마침내 절정에 이른다.  국민당정부는 철저한 항일 전을 부르짖지 않고 주저하면서 1927년에서부터 시작된 공산당과의 내전을 계속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중공군은 마침내 양자강남방 지역에서 격퇴되었는데, 그 퇴각을 종종 「장정(長征)」이라 불린다.  협서성의 북방에 새로운 기반을 굳힌 중공군은 일본군에 침략된 지방과 접촉하게끔 되었다.  중국의 내정과 외교와의 마찰은 중공군의 상태에 따라서 극적으로 변했다.  국공내전(國共內戰)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당파를 버리고 전중국민중은 항일 전에 결속할 것인가?

공산당 군을 포위하고 있던 군대 중에는 1931년에서 1932년에 걸쳐서 「만주사변」이 쥬네브에서 토의되고 있을 무렵에 동북중국에서 철퇴되어온 수 천 人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정치적 지도자이며 군사령관이었던 인물은 장학랑이었다.

1936년경에는 중국문제는 벌써 일본의 침략에 비교하면 그것보다 중대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느낌이 점차로 강해졌다.  만주의 고향에서 망명하고 있던, 앞에서 말한 동북중국인도 역시 이 같은 감정을 가졌다.  그들은 중공당원과 친해지기 시작하였다.  용감한 성격과 책임을 중히 여기는 태도에 의하여 민족주의의 탁월한 표상으로 되어 있던 장개석은 군기숙청의 목적으로 대공전(對共戰)의 사령부인 서안으로 갔다.  그런데 군은 반란을 일으켜서 장학량은 장개석을 포박하여 즉시 내전을 그만 두고 항일 전에 대동 단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국민당정부의 수뇌의 일부는 장개석의 생명의 위험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대 군사행동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장개석 부인은 그것을 거절하고서 스스로 남편이 있는 서안으로 달려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중공은 그의 최고간부의 한 사람인 주은래를 장학량의 허락 하에 파견하여 민족적 단결은 장개석의 통솔 하에서만이 실현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그것은 무력으로는 안 되고 납득으로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거에서 장개석을 석방하도록 설득하였다. 

최후의 결말은 반란과 똑같은 극히 극적인 것이었다.  총통은 무조건 석방됨과 동시에 장학량은 스스로 군법회의 재판에 출두한 것이다.

서안사건의 결과는 중국에서 아직도 통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하나는 장학량은 군법회의에서 금고형의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대일 전이 종막을 고함과 동시에 석방되게 된 것이다.  장학량 개인으로서는 만주제성의 중국에 대한 충성심을 상징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고향의 재탈환에 있어서 중국통일의 대표자로서 기용될 가치가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반란 그 자체가 하나의 선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 군대는 외국의 침략에 직면한 경우에 장군에게 내전을 그만 두도록 강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선례인 것이다.  중국의 군대도 장군도 현재 외국의 정복을 당할 위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선례를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1936년의 「크리스마스」날에 장개석이 석방된 일의 직접의 의미는 그것에 의하여 내전이 종결되고 거국적 항일전선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중공을 무력으로 탄압하여 국내를 통일하려고 하는 국민당정부의 정책은 실패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더욱 극적이고도 이채로운 실패로 끝났다.  중공군이 만약에 일시적인 우세를 타고 장개석의 사형이나 장기 감금이라도 주장하였다고 한다면  여론의 지지를 잃었을 것이다.

또 총통이 석방 후에 내전의 재개를 주장하였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와 같은 명령의 실행을 거부하여 온 군대 중에는 불만과 거부가 폭발했을 것이다.  총통도 중공도  공동으로 항일에 전념하는 정책만이 총통은 옛날의 위신을 회복하였고, 공산당은 새롭게 획득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들이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기 어렵게 한 것이다.  지방적인 압박이나 침략으로서는 중국을 분열시키지는 못하였다.  일본군은 지금에 와서는 악수를 하느냐 공격을 하느냐? 의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잡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19. 남경대학살

서안사건의 6개월 뒤의 7월 7일, 북평시외의 노구교에서 일본군은 중국의 대규모의 침략을 대표하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포문을 열었다.  이것은 일본의 오산이었으며 불행이었다.  일본인은 고심한 끝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압박과 간접지배의 오랜 기간이 지나고 또 중국정부가 임명하는 인물은 일본당국의 「승인을 얻을 수 있는」인물이 아니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고압적인 태도의 결과로서 일본의 명령에 복종을 개의치 않은 소수의 패배주의자와 자국이나 자기국민에 믿음을 두지 않고 한번 일본의 병기가 회전을 시작하자마자 겁을 먹고 마는 극히 많은 수의 사관이 화북에 배치되고 있었다.

사태를 구한 것은 중국의 보통의 병사들이었다.  연대라고 하는 연대와 부대라고 하는 부대에는 下士卒 간에 저항의 정신과 혼이 불타고 있었다.  전투가 되지 않은 토지에 진군하는 것은 누구나 거부하였다.  명령이 없어도 무엇인가 쏘고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포문은 열려졌다.  결과는 혼란과 살육이었다.  일본군은 아예 처음부터 선정하여 두었던 지점에 언제든지 불을 토하는 대포와 기관총을 장치하고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그들은 살인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번 중국인의 저항이 시작되면 그것은 벌써 격파할 수 없는 노도가 되었다.  그것은 마치 요원의 불길과 같이 널리 퍼져나갔다.  고급 사관 중에는 일본군에 투항하려고 확실히 결심을 하면서도 한번 저항이 시작되자마자 마음을 바꿔 본래의 부하가 있는 곳으로 춤을 추며 되돌아오곤 하였다.  저항은 화북을 구하는 데는 결함이 많았다.

그래도 일본군의 예정을 먼저 몇 시간을 다음에는 몇 일간을 그리고 마침내는 몇 주간을 늦출 수가 있었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것은 민족 간의 전쟁이었다.  꼭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빼앗을 때, 또 체코슬로바키아를 빼앗을 때 만약에 지방적 저항이 일어나면 그것을 파괴하면서 한쪽으로는 전전선의 확대를 막기 위하여 병력을 주의 깊게 집중한 것과 똑같이 일본군은 화중에서는 타협적이기 때문에 모든 노력을 한 것이다.

양자강의 全연안에서 그들은 실제로 일본인 시민을 퇴각시키고 상해에서는 중국인을 성나게 하거나 도발하지 않도록 크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잠잠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 같은 정책과 모략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북방에서의 일본의 예정이 중국인의 저항에 의해 크게 깨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상해의 일본군은 벌써 위령의 상실을 느끼고 초토화 작전을 위해 총의 방아쇠에 손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장은 또 일본의 육군과 해군의 양쪽 군부간의 예부터의 질시와 경쟁의식을 자극하였다.

1932년 「만주사변」의 당시 일본육군이 동북중국으로 진출한 것을 보고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던 해군은 상해를 빼앗으려는 공상을 만용으로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작전은 실패하고 육군의 대규모 출병에 의하여 겨우 구출되었다.  1937년에 일본해군은 1932년의 불명예를 회복하려고 상해시의 주변에 순양함과 구축함의 대군을 집결시켜 맹렬한 포화를 퍼부어 상해 시를 공격하였다.

상해에서의 중국인의 저항은 또다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일본해군은 자기들의 포화의 밑에 놓여 있었던 하나의 도시를 점령하는데 두 번째로 실패하였다.  자기들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사건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해군은 정면공격이라든가 집과 담을 따라 전투하는데 수천의 병력을 잃고 결국은 육군이 출동하여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 신예병력을 상륙시켜 중국인을 포위 공격한다고 거짓말로 위협하고 철수하는데 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장은 이때부터 중국의 수도 남경으로 옮겨갔다.  한번 야외전투가 시작되면 일본군은 그 우수한 항공기, 대포, 자동차장비를 종횡으로 구사하였다.  여기에다 이번에는 육군의 원조에 나서게 된 일본해군의 중국군대를 영구히 봉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해군은 육군과 병행하기도 하고 또 선두에 서기도 하면서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중국군이 일단 이 강에서 방어전선을 결성하지 못하게 하였다.

중국군은 일본군의 격심한 육박전 때문에 상해와 남경의 중간에도 남경 자체에도 중요한 발판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벌써 수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입성하는 일본군은 피에 미친 악마였다.  수주일간이나 계속되었다.  불타는 도시 한가운데서 약탈과 강간과 포로와 시민을 무참히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죄악을 수주일 간이나 계속했다.  5천 년의 문명국 중국의 수도에서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사건이 야만족 일본군에 의해서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군의 사관들은 부대를 제지할 수 없었을 뿐만이 아니고 부하들을 제지하기는커녕 스스로가 그 잔학행위의 대열에 가세했다.

남경의 참화는 너무 나도 심하였기 때문에 그 군사적 의미도 지금까지 기피되고 있으며, 인류의 역사로 거론하기조차 민망한 것이 되었다.  일본군은 남경에 도달하였을 때 아마도 중국군의 최정예부대의 대부분을 격파하고 포위하여 실제로 중국을 마비시켜 단기전의 승리를 가지게 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학살로 남경에서 스스로 잃어버린 승리의 기회는 두 번 다시 일본군의 손에는 되돌아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명예 또한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야만인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20. 공간을 빌어서 시간을 번다

남경을 피로 덮은 학살극 다음에 일본군대는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광대한 규모로 일본군의 행동을 당기고 넓히는 일에 전념하고 있던 중국군을 격멸하는 데는 벌써 너무 늦었다.  그들이 전략은 나중에 러시아군이 독일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보다 다량의 보다 우수한 장비로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한 전술과 같은 종(縱)의 방어작전이었다.

중국군의 전술은 일본군의 압력이 보다 강한 전선은 그냥 넘겨주나 일본군의 종대(縱隊)라든가 돌격부대의 측면이라든가 연락선을 위협한다는 전술이었다.  이것이 장개석의 「공간을 빌어서 시간을 번다」고 하는 전략전술이었다.

중국군의 교묘한 전술은 일본군을 차이무이자기류(遮二無二自己流)로 전진할 수 없게 하였으나 일본군은 하나의 이점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반복하여 이용하였다.  즉 일본군은 해군을 가지고 있어서 양자강의 깊이와 넓이를 이용하여 선박이나 순양함을 나라의 중앙부의 漢口(항구)에 접근할 수 없었다.  중국군의 정면의 앞 방어선은 조금도 파괴되지 않았지만 그 측면은 몇 번이고 양자강연안에서 배후를 교란 당했다.  1938년의 말경에는 일본해군은 육군을 한구에 도달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해안 측의 광동 시를 점령한 것이다.

 

21. 자기전(磁氣戰)과 게릴라전

1938년 말의 한구와 광동의 함락 후 전국은 하나의 새로운 국면을 전개하여 그것은 1941년 말의 일본군이 「파르하바」를 공격할 때까지 계속하였다.  일본해군에 양자강 연안을 점령당한 중국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하여 극히 적은 양의 선박이나 철도에 의한 보급을 받고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1940년에 인도차이나가 일본군에 점령되고 나서는 끊어지고 말았다.

중국군은 그간에 자기들을 위하여 건설한 미얀마에서의 트럭도로와 소비에트 동맹에서의 2000마일의 철도로 운반하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미얀마 통로로 미국의 보급품이 운반되고 있었으나 그 마저도 1940년 프랑스의 패전으로 인하여  절대절명의 위기로 떨어진 영국은 일본의 압력 앞에 미얀마 국경의 출하를 정지 당하게 되어서 수개월간 폐쇄되고 말았다.

이 3년 간 중국군은 새로운 形의 당기고 넓히는 작전을 계속하였다.  지도상에서 그을 수 있는 북평에서 한구를 경유하여 광동에 이르는 일직선이 중국내의 일본의 전선의 전개도의 필요한 전부였다.  이 선에서 서쪽으로 진격한 일본군은 반드시 포위되었다.  산서성의 산악을 지나 양자강 연안의 의창(宜昌)에서와 같이 1937년에는 중국의 전공업생산, 철도의 거의 전부, 충분히 개발된 탄갱의 대부분, 가장 풍부한 농산, 여기에 전 인구의 반 이상이 이 선에서 동쪽에 모여 있다.

그 선에서 서쪽으로 중국의 종전의 공업생산의 10%이하, 아주 적은 철도 대부분이 전쟁이 시작하면서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광산자원, 여기에 연료와 새로운 차나 예비부품의 입수곤란 때문에 심하게 제약된 자동차도로가 있는데 불과하였다.

북평에서 항구를 거쳐서 광동에 이르는 선의 서쪽에 펼쳐지는 중국의 구릉지대는 동쪽의 황하 하류와 양자강 연안의 대평야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평야 지방에서 일본군은 그 자동차 장비와 대포를 가장 유효하게 활용하였다.  그들은 제공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중국군이 어디에 화력을 집중하려고 하면 반드시 그 계획을 냄새 맡고 자기 군대에 대포와 전차를 그보다 훨씬 강력하게 집결하였다.

산악과 기복이 많은 지대에서는 중국군은 일본 정찰기의 눈을 피해서 행동하며 집결할 수가 있었다.  이 지대에서 그들은 장개석의 이른바「자기전술」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먼저 일본군을 유도하여 대포를 자유로 조작할 수 없는 토지에 들어오게 해 놓고 박격포와 수류탄과 총검으로 육박하며  부대후미부터의 보급을 방해하는 것과 동시에 그 전위를 파괴하여 가는 전술인 것이다.

이 방법으로 중국군은 일본군을 정지시킬 수는 있었으나 반대로 자기 군대의 승리를 대규모의 반격으로 전환시키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한번 평야지대에 나오면 기동성과 집결력이 압도적으로 우수한 화력을 가진 일본군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게 나누어진 전선의 동쪽에서는 중국군은 「게릴라」전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게릴라전의 지대는 때로 그렇게 불리어지는 것과 같이 「점령된 중국」은 아닌 것이며 「침략된 중국」이었다.  일본군은 다수의 지점을 점령하고 일들의 지점간에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주민은 그들의 집요한 공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일본의 지배 하에 굴복한 것은 아니며 자기들을 점차로 능력 있는 저항체로 조직하여 갔다.  게릴라전은 일본군의 중국의 재원을 약탈하는 것을 많이 저지하였으나 결국 광대한 영토와 전략지점을 탈환하는 작전이 되지 못했다.

이 게릴라전의 정치적 효과는 그 군사적 효과보다도 더욱 중요하였다.  게릴라대가 어쨌든 생존을 계속한 것은 그들이 전쟁을 하면서 생활하여 가는 것, 일본군의 공격 가운데서 자기들의 토지를 경작하며 그 수확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개인과 마을, 공동체의 의무와 책임을 확립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중국인민의 정치적 본능에 직접 호소하여 하나의 살아 있는 사회를 조직하는 능력을 발견하였다.

그 같은 것만이 중국사회, 특히 전 인구의 기강을 세우는 농촌사회가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을 조절하여 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의미의 증명인 것이다.  다수자의 의견과 소수자의 동의에 따라서 최대다수의 행복을 목표로 기능을 하는 것이 정치라고 하는 의식이 생긴 것이다.  이 같은 의미의 민주주의를 전 중국인은 마음으로부터 공고히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게릴라 대는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것은 일본군의 배후에서 중국 정규군의 연장으로서 그 지휘관에서 명령 혹은 적어도 지령을 받아서 행동하는 비정규군이었다.  게릴라 부대 중에는 중경의 국민당정부에 조세를 송금하는 것도 있었지만, 또 어느 것은 공산당 군이었다.  또 어떤 것은 공산당 군은 아니나 그것과 우호관계를 맺고 자기 군의 훈련과 사회, 결제조직의 지도를 위한 전문가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게릴라대가 국민당정부의 조직과 접촉하였든, 공산당의 조직과 맺어졌든 항일에 결정적인 요인을 이루는 문제는 아니었다.  가장 중대한 것은 기백만의 민중이 그들의 조국을 방위하기 위해 각자의 가정과 경작지를 지키면서 싸워냈다는 것이다. 

 

22. 혁명, 미완의 대교향곡

완전한 근대국가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중국에 있어서도 다름없이  경제문제다.  길게 그리고 괴로웠던 전쟁이 가져온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고 전쟁에 의해 한층 더 첨예해진 여러 문제를 남겼다.  그것이 미완성의 중국혁명사업이다.

손문은 1925년 3월 12일 북경에서 그의 58세의 혁명적 생애를 마쳤으나 그의 최후의 말은 오늘도 중국인들 중에 살아 있다.  「혁명은 아직 완성하지 못하였다.  우리들의 동지는 더욱 분발하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911년 혁명 前 붕괴의 시대는 그때까지의 중국사에 등장했던 여러 왕조의 붕괴와는 여러 점으로 보아서 상황이 너무나 달랐다.  농민의 빈곤이라든가, 압박이나 지배계급의 타락이라든가, 새로운 지배자群의  등장이었으나 노쇠한 구체제 위에 가하여지는 서양의 충격이라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보았듯이 중국의 역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왕조의 도래가 계속되는 시대에는 농민의 지위의 개선과 먼 대다수의 민중생활의 향상 등이 특징이었다.

농민과 노동자에 토지개혁과 정치대표를 약속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는데 출발한 중국의 新정치체제가 전 인구의 8활을 점하는 농민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지는 않고 그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의 압박이 보관되어 힘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데는 먼저 무엇보다도 이들의 농민의 문제, 즉 고대 토지제도의 끊어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과 수공업의 붕괴와 근대공업의 개시가 얼마나 그들의 생활을 비참하게 하였는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비효통(費孝通) 박사가 「중국의 농민생활」 중에서 말하고 있는 극히 간결한 결론은 모든 전문가가 도달한 것과 일치한다.  「중국에 있어서 참다운 논점은 민중의 빈 배(空腹)인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



중국은 7,000년 전에 형성된 고대문명을 현재까지 지속·발전시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외래 문화의 유입이나 이민족의 정복에도 문화적 단절을 경험하지 않고 오히려 외래문화와 민족을 중국에 동화시키면서 더욱 풍부한 문화를 형성해왔다. 중국이 광활한 영토 안에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면서도 오랜 기간에 걸쳐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단일성과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중국 대륙의 남과 북이 서로 보완관계에 있어서 항상 통일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양쯔 강[揚子江]을 기준으로 나뉘는 북부와 남부 지방의 풍토와 생활양식이 서로 다르다. 북부지방은 중국을 북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중국이 서북과 동북 방면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군사적 중요성을 띤 기지였다. 남부지방에서는 전중국사회를 안정시킬 만한 풍부한 농업생산이 이루어져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그러므로 북부와 남부 지방이 서로 결합되어야 비로소 강력하고 안정된 정치권력이 형성될 수 있었다. 중국 역사상 여러 번의 분열시기가 있었지만 늘 재통일이 이루어졌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요인 외에 한자문화라는 문화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에서는 은(殷)나라 중기에 갑골문자가 만들어진 이래 정치적·문화적 확대에 수반하여 차차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진대(秦代)에는 정부에 의해 서체가 통일되었고, 한대(漢代)에는 간략화되고 정리되어 이른바 '한자'(漢字)로서 한이 지배한 영토 전역에 퍼졌다. 그후 한자는 시대에 따라 쓰여지는 범위가 넓어졌으며, 이와 더불어 사상과 문화가 함께 전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 문화권이 만들어졌으며, 전중국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강한 유대가 형성되었다.

중국사는 중대한 정치적·경제적 변혁을 염두에 두면서 편의상 왕조를 중심으로 구분하여 서술할 수 있다. 중국사상 중대한 변혁의 첫번째 시기는 선사시대에서 문명시대로 들어가는 은나라 전반기인 BC 1700~1300년이다. 2번째는 전국시대인 BC 400~ 200년경으로, 이때는 씨족제가 붕괴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였으며,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발전 외에도 사상을 크게 꽃피웠던 시기였다.

3번째는 당(唐)·송(宋)의 변혁기로 일컬어지는 당말오대(唐末五代) 시기로, 귀족제가 무너지고 군주독재체제로 바뀌는 과도기였다. 4번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초에 걸쳐 군주제가 무너지고 민주적 정치체제로 바뀌는 시기였다. 이때 중국사회는 서구열강의 침입에 의해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외에도 중국사회는 외부 민족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진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중국사회 내부의 변혁을 향한 강한 요구로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변화를 가져온 이상의 4시기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변화들에서도 외부의 사정, 특히 주변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선사시대

구석기시대

중국의 역사는 구석기시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란톈 원인[藍田猿人], 베이징 원인[北京原人 Homo erectus pekinensis] 등의 인류화석이 출토되어 구석기시대 중국 대륙에 호모 에렉투스, 즉 직립원인이 살았음이 증명되었다. 특히 베이징 원인의 화석이 발견된 베이징 시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는 40여 개의 인골(人骨) 외에도 수많은 석기와 동물화석이 함께 발굴되어, 이를 통해 베이징 원인의 생활과 거주환경을 추측할 수 있다.

산시 성[山西省] 딩춘[丁村], 광시 성[廣西省] 마바[馬] 등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 유물과 함께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과 치아가 발견되었다. 삽 모양의 앞니, 넓은 코, 앞으로 튀어나온 턱 등이 몽골 인종과의 관련성을 시사해준다. 허난 성[河南省] 안양[安陽]을 비롯한 북부지방 여러 곳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석기 제작기술의 발달, 음식의 생산과 저장, 사회조직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중국의'신석기 혁명'은 늦어도 BC 6000년경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문화가 일찍 발전했던 곳은 토양이 좋고 물을 항상 공급받을 수 있었던 황허 강[黃河] 유역이었지만 양쯔 강 하류 유역과 남부지방에서도 독자적인 신석기문화가 발전했다. 신석기문화는 지역이나 문화의 내용으로 볼 때 단일하지 않은 서로 다른 몇 가지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우선 북부지방에서는 페이리강 문화[裴李崗文化],츠산 문화 [磁山文化],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룽산 문화[龍山文化]로 이어지는 신석기문화가 발전했다 (→ 색인 : 룽산문화). 허난 성과 허베이 성[河北省] 남부의 페이리강·츠산 문화는 초기 농경문화로서, 탄화된 조 외에 농경과 관계 있는 석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개나 돼지의 사육뿐만 아니라 수렵과 어로도 이루어졌다.

토기는 대부분 무늬 없는 붉은색의 발(鉢)·호(壺)·옹(甕) 등이었지만 빗살무늬나 채문토기도 발견된다. 연대는 BC 5400~5100년으로 추정된다. BC 4500~2400년으로 추정되는 양사오 문화는 북부를 중심으로 한 넓은 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시 성[陝西省]의 반포[半坡] 유적과 허난 성의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이 유명하다.

반포 유적에서는 많은 구덩식[竪穴式] 주거지, 그릇을 굽던 가마터, 묘지 등이 발견되어 양사오 문화의 성격과 당시 사회상황이 분명해졌다. 조와 기장이 들어 있던 항아리와 돌낫·돌촉·돌칼 등의 간석기[磨製石器]·뗀석기[打製石器]가 발견되어 농사를 지었음이 확실해졌다. 토기는 일상적으로 흑회색 삿무늬토기[繩蓆文土器]가 사용되었으며, 의례용으로는 채도(彩陶)가 만들어졌다. 집락(集落)에서는 집회용의 대가옥과 일반 소가옥의 구별이 있어서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무렵 중부의 화이허 강[淮河] 유역에서는 장쑤 성[江蘇省] 칭롄강 문화[靑蓮岡文化]와 산둥 성[山東省] 다원커우 문화[大汶口文化]가 일어났다. 둘 다 양사오 문화로부터 촉발되어 일어난 독자적인 지역문화였으며, 다원커우 문화는 후기 룽산 문화의 선구를 이루었다.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북부지방에서 룽산 문화가 출현했다. 룽산 문화 가운데 전형적인 것은 산둥 성 룽산 진(鎭) 청쯔야[城子崖]의 하층문화이다. 이 유적에서는 수혈 주거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바닥에 회칠을 하여 단단하게 하는 등의 기술적인 진전이 보인다. 저장용의 깊은 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생산에 여력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토기는 일상용과 의례용의 토기가 생산되었다. 의례용은 양사오기의 채도와 전혀 다른 흑색 토기로, 제작기법이 발전하여 복잡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장례제도는 남녀 합장의 형태를 취했으며, 부권(父權)을 위주로 한 가족제도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묘에 따라 껴묻거리[副葬品]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기가 끝날 무렵 이미 선진 지역에서는 씨족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남부에서는 북부와 다른 독자적인 신석기문화가 발달했는데 저장 성[浙江省]을 중심으로 한 허무두 문화[河姆渡文化]가 대표적이다. 이곳에서 탄화된 쌀이 대량 발견된 것으로 보아 벼농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농경도구로는 석기 외에 뼈연장·조개연장이 많다.

토기도 회색 바탕에 흑색 무늬를 넣은 채도가 만들어졌는데 특색이 있다. 또 대규모의 부락에는 고상식(高床式)의 대목조 건축물도 세워져 고도로 발달한 신석기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연대는 북부의 양사오 문화와 거의 같은 시기인 BC 4300~3300년으로 추정된다.

은·주



은대는 BC 11세기 후반 주(周)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6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은은 얼리터우기[二里頭期]·얼리강기[二里岡期]·샤오툰기[小屯期]로 이어지는 중국 청동기문화에 기반을 둔 왕조였다. 후기의 수도인 상읍(商邑)은 〈사기 史記〉에 기록된 '은허'(殷墟)임이 20세기초 발굴조사에서 밝혀졌고 이곳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은'은 주대 사람들이 쓰던 호칭이며, 은나라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상(商)이라고 불렀다. 은의 문화는 BC 17세기말경, 당시 북부에 널리 퍼져 있던 신석기시대 룽산 문화를 모체로 하여 황허 강 남안 일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태을(太乙)이 명재상 이윤(伊尹)을 임용하여 하(夏)를 무너뜨린 후 은을 세우고 호( : 지금의 산둥 성 차오 현[曹縣] 부근)에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이때가 BC 16세기초로 추정되는데, 은은 당시 황허 강 유역에서 성장하던 신흥문화의 동쪽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은의 특색이었던 형제상속과 부자상속이 반복되었는데, 제10대 중정(中丁) 때 왕위계승을 둘러싼 싸움이 격화되어 세력이 약화되었고 도읍을 여러 번 옮겼다. BC 13세기에 19대 반경(盤庚)이 위기를 극복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상읍으로 도읍을 옮긴 후 은조는 다시 왕성해졌다.

22대 무정(武丁) 이후 은대는 다시 전성기를 맞아 산시[山西] 고원이나 산둥과 안후이[安徽] 지방으로 대정벌을 나갔다. 은이 동남 정벌에 몰두하는 동안 서쪽 산시[陝西] 지방에서 세력을 넓히던 주나라는 BC 11세기 후반에 은을 정복했다.

복사(卜辭)에 의하면, 은 후기 사람들은 선왕을 신격화하고 왕위를 신성시했으며, 왕위 계승을 점차 부자상속으로 일원화했다. 또한 안양 시 서북 구릉지대에 거대한 왕묘를 세웠는데, 이곳에서 웅장한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어 은나라 왕의 권력이 강대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여러 혈족집단이 뭉쳐 왕조를 만들고, 이 왕조는 여러 소부족국가 연합체의 맹주로서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은왕의 권력이 강해지면 다른 나라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주왕(紂王)을 포악한 군주로 묘사한 설화의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는데, 실제로 주왕은 우수하고 유능한 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에 의하면 주는 후직(后稷)의 자손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고공단보(古公亶父) 이전의 계보에는 의문점이 많다. 문왕(文王)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 때 주나라 사람들은 처음으로 기(岐: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치산 현[岐山懸] 근처)로 옮겨와 정착하여 점차 세력을 길렀다.

주는 허난 지방의 유력한 국가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세력을 확대하다가, 왕계(王季) 때 은과 싸워 왕계는 살해되고 문왕이 그뒤를 이었다. 문왕은 기에서 웨이수이 강[渭水]을 넘어 동쪽으로 진출하여 풍(:지금의 시안 시[西安市] 서쪽)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동쪽으로 세력을 신장하여 결국 은으로부터 서백(西伯:서쪽의 패자)으로 인정받았다.

그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도읍을 시안 근처의 호(鎬)로 옮기고 이를 종주(宗周)라고 했다. 나아가 이곳을 동방 진출의 거점으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은을 정벌하고 주조(周朝)를 세웠다. 무왕은 은나라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에게 은의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고 동생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그를 감시하도록 했다.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제위에 오르자 주공(周公)이 섭정했다. 관숙과 채숙이 이에 불만을 품자 주공은 은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강숙(康叔)을 그곳의 제후로 봉한 뒤 다시 동정(東征)에 나섰다. 주공은 동방경영을 위해 동도(東都) 낙읍(洛邑)을 건설했다.

주는 그뒤 강왕(康王)·소왕(昭王)·목왕(穆王)의 3대에 걸쳐 강성했으며, 여러 차례의 군사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주는 외국 정벌로 획득한 새 영토를 통치하고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요충지에 동족 또는 이족 공신들을 제후로 봉했다. 이 제후들에게는 일정한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게 하는 대신,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의무를 부여했다.

주의 봉건제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는데 무왕·성왕 때만 새로 70여 개국이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군사정벌로 목왕 이후 국력이 점차 쇠퇴했다. 제10대 여왕(勵王)은 국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전제정치를 시행했으나 귀족들의 분노를 사 체( : 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훠 현[縣]근처)로 망명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수도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그가 왕위를 비운 동안에는 재상 공백화(共伯和)가 국정을 장악했다. 공백화가 처음 국정을 다스리게 된 해를 공화원년(共和元年:BC 841)이라 하며, 이때부터 중국의 기년(紀年)이 분명해졌다.

주 말기에는 흉작과 천재지변이 이어져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후계 문제로 내란이 일어난 틈에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아 BC 771년 수도를 함락당했다. 이로써 서주(西周)가 멸망하고 평왕(平王)이 동도(東都) 성주(成周)로 도망가 다시 왕조를 일으켰다. 그러나 옛날과 같은 위세는 볼 수 없었으며, 제후들이 독자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은·주 시대의 문화

은의 문화는 BC 17세기 후반 무렵부터 허난 성의 황허 강 남안을 따라 비교적 협소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초기에는 금속의 질도 조악하고 무늬 없는 간단한 청동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정교해지고 금속의 질도 좋아졌으며, 형태와 문양이 다양해지고 청동기의 크기도 거대해졌다. 또 후기에는 문자가 많이 사용되어 청동기에도 명문(銘文)을 넣었는데 이것은 갑골문자라고 하는 것으로 문자구성이 이미 그림문자의 단계를 벗어났다.

주는 은의 문자와 청동기술을 그대로 계승했지만 청동기술은 퇴보하기 시작했고, 문양과 형태상에서도 은의 문화처럼 다양한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청동기에 새겨 넣은 금문(金文)은 은대에 비해 문장이 길었으며, 사용된 어구나 어법은 〈서경 書經〉·〈시경 詩經〉과 비슷한 점이 보이기도 한다.

은과 주의 관계에 대해 은은 동방에서, 주는 서방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발견된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 비교해볼 때 주와 은은 문화적인 관계가 깊었으므로, 은에서 주로의 교체도 문화와 민족의 근본적 교체라기보다는 같은 문화와 민족 가운데서 일어난 정권교체에 불과하다.

춘추전국시대

춘추전국시대란 동주시대(東周時代)의 다른 이름이다. BC 770~476년은 공자가 편찬한 노(魯)나라의 편년체 사서 〈춘추 春秋 〉의 이름을 따서 춘추시대라 하고, BC 475~221년은 대국들이 패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으므로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춘추시대

주 왕실이 동천하고 세력이 약해지자 100여 개국이 넘는 중원(中原) 지방의 제후들이 반독립적인 상태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들은 서주 시대 이래 존재하던 읍제국가(邑制國家)가 발전한 것이었다. 이들은 국도(國都)의 세력권 내에 크고 작은 읍들을 복속시켰는데, 국도의 정치력이 쇠약해지면 곧 제후의 이합집산이 격심하게 되고, 제후세력은 급속히 약해졌다.

그래서 춘추 제후는 국도에서 정권을 확립하고 여러 읍의 맹주라는 입장을 확고히 하는 데 노력했다. 이렇게 성립된 제후는 다시 회맹(會盟) 외교를 통해 상호간의 세력과 균형을 도모했다. 허약해진 주 왕실을 대신하여 제후국 가운데 강자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들이 회맹을 하게 된 데에는 남방의 강국인 초(楚)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작용했다.

BC 658년 초가 정(鄭)을 침입했을 때 제(齊)의 환공(桓公)이 이듬해 제후들을 이끌고 초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제후들과 규구(葵邱:지금의 허난 성 란카오 현[蘭考縣])에서 회맹하여 패업을 성취했다. 환공이 죽은 후 제는 내분으로 쇠약해지고 그 뒤를 이어 진(晉)의 문공(文公)이 중원의 맹주가 되었다.

그는 BC 633년 북진해온 초를 성복(城 : 지금의 산둥 성 쥐안청[城])에서 대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천토(踐土:지금의 허난 성 정저우[鄭州] 동북쪽)에서 제후들을 모아 회맹했다. 문공이 죽은 후 진이 내분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초가 다시 진(陳)과 함께 송을 침입했고, 나아가 육혼(陸渾:지금의 간쑤[甘肅], 산시[陝西] 서부에 속함)의 융(戎)을 치고 낙(:지금의 허난 성 뤄양[洛陽])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초의 장왕(莊王)이 주 왕실의 상징인 보정(寶鼎)의 경중(輕重)을 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양쯔 강 유역에서 세력을 쌓아 북방의 패자가 된 초를 위협한 것은 춘추 후기에 세력을 키워 급성장한 오(吳)나라였다. 오왕 합려(閤閭)는 BC 506년초의 도읍인 영(: 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장링 현[江陵縣])을 함락시키고 BC 482년 맹주의 지위에 올랐다. 그후 오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월은 다시 초에게 패자의 자리를 빼앗겼다.

전국시대

춘추시대 초기에 200여 개가 되던 제후국은 말기에 이르러 10여 개국으로 감소했다. 각 제후국 내에서는 실력을 키운 일부 세경(世卿)이 독자적인 가계(家系)를 형성했다. BC 5세기말경 제에서는 진항(陳恒)이 간공(簡公)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진(晉)에서는 한(韓)·위(魏)·조(趙)의 3씨(氏)가 구요(苟瑤)를 멸망시키고 국가를 3분했다.

이때 중국에는 제(齊)·연(燕)·진(秦)·초(楚)·한(韓)·위(魏)·조(趙)의 7개 국가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이 전국 7웅(七雄) 가운데 가장 먼저 발전한 나라는 위였다. 위의 문후(文侯)는 이회(李)와 서문표(西文豹)를 등용하여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는 한편, 오기(吳起)·악양(樂羊) 등의 장군을 기용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그러나 상앙(商)의 변법을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급속히 강국으로 부상한 진(秦)의 공격을 받아 BC 340년 수도를 안읍(安邑: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샤 현[夏縣])에서 대량(大梁:지금의 허난 성 카이펑 시[開封市])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진이 강성해지자 BC 318년초의 회왕(懷王)은 진 동쪽의 위·조·한·연·제와 함께 남북으로 동맹하는 합종책(合從策)으로 진에 대항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진은 6국 각각과 동맹하는 연횡책[連橫策]을 써서 합종을 방해하고 계속적인 침략으로 여러 중원 국가들 가운데 우위를 차지했다. 진은 BC 260년 장평(長平) 싸움에서 조를 이겨 조의 세력을 약화시킨 뒤 연합한 초·조·한·위의 마지막 저항도 물리치고, BC 221년 중국 전역을 통일했다.

농업과 상공업의 발전

춘추시대 이래 중국에서는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다른 문명과 달리 단철보다는 주철이 먼저 일반화되었는데 무기로 적당하지 않은 주철은 주로 농기구로 사용되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전국시대 이후 우경(牛耕)의 출현은 농업생산력을 현저히 증대시켰다. 또한 수리관개 시설의 발달로 경지가 확대되었다.

이것은 농민의 이주를 촉진시켜 세수(稅收)를 증진시키려는 목적 외에도, 전통적인 공동체 안에서의 농민을 포함한 전토지와 백성을 국가가 장악하려는 새로운 경제정책이기도 했다. 농업의 발전과 함께 상공업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다. 이 시기에 제철업·제염업·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대상인들의 이야기도 전해지며, 민간수공업자나 중소 상인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상공업의 발달로 도시발전이 촉진되어 각 제후국의 수도가 상업도시로도 크게 번영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

춘추전국시대에는 열국이 분립하는 정치적 혼란 가운데 사상과 문화가 꽃을 피웠다. 또한 천문·역법·수리·토목·건축·공예에서도 전례 없는 발전을 보였다. 특히 예(禮)를 중심으로 한 유가사상의 성립은 주목할 만하다. 공자는 부자와 형제를 축으로 하는 가족도덕을 기본으로 하고 사회적 규율로 예를 중시했다.

또한 덕치주의에 의한 정치론을 전개했고 군신(君臣)의 의(義)를 강조했다. 그는 인(仁)의 사상을 확립하여 유교의 기본원리로 삼았다. 전국시대에 위의 문후, 제의 위왕(威王)·선왕(宣王) 때에는 유가를 비롯해 여러 사상가들도 자신의 교단을 이끌고 제후왕과 공(公)의 정치에 접근하여 세력을 확대하려 했다.

이들 교단과 그들의 저작을 총칭하여 제자백가라고 한다. 이 가운데 묵가(墨家)는 공리주의(功利主義)의 입장에서 겸애(兼愛)·비공(非攻)·상동(尙同)·상현(尙賢)·천지(天志) 등의 이념을 강조하고 군권(君權) 강화를 주장했다. 유가(儒家), 특히 맹자는 천명의 지배하에 도의적 정치, 즉 왕도(王道)를 행할 것을 주장하고 인성이 본래 선함을 믿어 수양을 중시했다.

법가(法家)는 군권을 절대화하고 법(法)과 술(術)에 의해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엄격히 할 것을 주장했다. 도가(道家)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를 주장했다. 이들 제자백가는 각각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고 서로 비판하면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진·한

진·한시대(秦漢時代)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가 성립했던 시대로,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의 전국통일(BC 221)부터 후한의 멸망(AD 220)에 이르는 약 440년간을 말하는데, 이 사이에 네 나라가 흥망했다.



산시[陝西] 지역을 발판으로 한 진은 주가 낙읍으로 천도하던 해에 주왕에게 제후로 인정받았다. 춘추시대에는 목공(穆公:BC 659~621 재위) 때 잠시 중국 서북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중원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발전했지만 그후로는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이민족의 요소를 다분히 지닌 후진국으로 간주되던 진은 전국시대 효공(孝公:BC 361~338 재위) 때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BC 256년 주를 멸망시켰다.

진왕 정(政)은 천하를 평정한 후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그는 천제에 비견하는 절대자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존호를 황제라고 하고 시황제임을 선포했다. 그는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도량형·문자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리 막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나아가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들의 책을 모아 불사르고 유생 460여 명을 생매장시켰으며( → 분서갱유) (→ 색인 : 분서갱유), 장대한 능묘와 궁전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징발했다.

BC 214년 광둥·광시 지방과 베트남 북부를 정복했으며 흉노를 정벌하기도 했다. 또 조(趙)와 연(燕)의 장성을 수축·증축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처럼 계속되는 대규모 공사와 정복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시황제가 죽은 후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반진(反秦) 세력이 봉기하는 등 국운이 급격히 쇠퇴하다가, BC 206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결국 멸망했다.

그해 항우는 자립하여 서초(西楚)의 패왕임을 선포하고 유방을 비롯한 공적이 있는 장군 18명을 각지에 분봉했다. 그러나 이들은 항우의 조치에 불만을 품어 곧 산둥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항우가 북상한 사이에 유방은 한중[漢中: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난정 현(南鄭縣)]에서 군사를 일으켜 옛 진의 땅으로 들어가 항우와 대적했다. 4년간의 싸움 끝에 패한 항우는 BC 202년 자살했으며, 유방이 제위에 올라 수도를 장안(長安)에 세우고 한을 창건했다.

한의 성립

유방은 진의 제도를 많이 답습했지만 지방행정에서는 군현제를 변형시킨 군국제(郡國制)를 채용했다. 당시 한의 직할군은 황허 강 중류지역 서쪽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한신(韓信) 등 7명의 장수를 봉한 제후국이 전체의 60% 정도를 차지했다. 한의 황제는 사실은 이름뿐인 패왕에 불과했다. 유방은 재위중 창사 왕[長沙王] 이외의 이성(異姓) 왕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유씨 일족을 봉했으며, 왕국의 법제와 관제를 한과 같게 했다.

그러나 한의 황제는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하기 위해 왕국을 억압하고 그들의 권한을 박탈할 필요가 있었다. 경제(景帝) 때 오초7국(吳楚七國)의 난을 계기로 제후왕의 영지와 권한을 줄이는 정책이 강화되었다.

무제(武帝) 때에는 왕의 영지를 자식들에게 분할·상속시키게 했다. 종묘제사 때 제후가 헌상하는 황금의 규정을 엄격히 하여 BC 112년 이 규정을 어긴 죄로 106명의 제후를 처벌했다. 제후왕에 대한 각종 규제를 강화하고 왕은 단지 조세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었다. 또 주자사(州刺史)를 설치하여 지방행정에 대한 감찰체제를 확립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무제 때에는 군현제도에 의한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무제는 오랫동안 한을 괴롭혀왔던 북방의 흉노족을 정벌하고, 이곳에 하서4군(河西四郡)을 설치했다. 이밖에도 남월국(南越國)·동월국(東越國)·서남이(西南夷) 등을 정벌하고 각 정벌지에 군을 설치했다. 대규모의 대외원정이 해마다 계속되어 한편으로는 재정난이 심각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제 지배체제가 강화되었다.

그는 향리(鄕里)에서 현량(賢良)·방정(方正)·효렴(孝廉)의 사(士) 등을 추천하게 하여 신진관료로 등용했다. 또한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에 따라 춘추 공양학파(公羊學派)의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삼아 이것을 문교·사상 정책의 기본으로 정했다. 그결과 유교가 황제 지배의 사상적인 기초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혁명사상을 끌어들여 후에 왕망(王莽)의 제위찬탈을 긍정하게 되었다.

무제는 경제발전에도 적극적이었다. 농업개발을 장려했으며, 관중[關中:웨이수이 강 일대]에서는 대규모 관개공사를 시행하고 황허 강의 치수공사도 벌였다. 재정궁핍을 구제하기 위해 민간의 화폐 주조를 금지하고 통화를 오수전(五銖錢)으로 통일했다. 또 각종 조세를 늘리고 상인에 대한 자산세를 설치했으며 밀고제에 의해 징세를 철저히 했다. 나아가 염철전매·균수평준법(均輸平準法)·각고(:술 전매)를 통해 국가의 재정을 충실히 하고 민간경제의 안정을 꾀했다.

이와 같이 융성했던 한 제국도 무제가 죽은 다음부터는 점차 쇠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제가 치세중에 승상과 어사대부 등 외조(外朝) 관료의 권한을 억눌렀던 것이 측근인 내조(內朝)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나아가 외척과 환관의 전횡을 야기한 화근이 되었다. 한편 향리에서는 호족들에 의한 토지겸병이 증대되고 일반 농민들이 몰락하여 호족에 의탁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때문에 향촌사회의 공동체적 질서가 무너지고 계급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왕망의 정치

이같이 사회적·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던 한은 왕망에 의해 잠시 단절되었다. 그는 원제(元帝) 왕황후(王皇后)의 일족이었는데 주위의 두터운 신망을 얻어 대사마에까지 올랐다. 애제(哀帝)가 죽은 후에는 9세인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어린 황제를 보필한 공로를 인정받아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AD 5년에 반란을 일으켜 평제를 살해했다.

8년 자신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당시 유행하던 참위설(讖緯說)로 제위찬탈을 정당화했다. 유교를 열렬히 신봉했던 왕망은 제위에 오르자 주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유교주의적인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각종 개혁에 착수했다. 토지문제에서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기초하여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지했다.

화폐는 기존에 통용되던 오수전을 폐지하고 새로 대전(大錢)을 주조했으며, 도화(刀貨)·포화(布貨)·화천(貨泉) 등의 수십 가지 화폐를 발행했다. 이상의 여러 개혁들로 인해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 곳곳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특히 18년 산둥 성 낭야(琅邪)에서 일어난 '적미(赤眉)의 난'은 번숭(樊崇)의 지휘 아래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장안까지 침입했다.

호족들은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무장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농민군과 협력하여 왕망 정권에 반기를 든 사람들도 있었다. 난양[南陽]의 유씨 집단은 유현(劉玄)을 황제로 세워 왕망에 대항했다. 24년 유수(劉秀:光武帝)가 유현에 이어 황제가 된 후 적미군을 평정하고 호족군들도 항복시켜 한을 다시 일으켰다.

후한의 흥망

광무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그가 한의 재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여러 지방호족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족 지주정권의 성격을 지닌 후한은 왕망의 토지소유 제한정책을 완화하고 노비매매의 금지령을 폐지했다. 그밖에 왕망이 만든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행정의 규모나 군비를 가능한 한 축소하여 불필요한 것을 없앴으며, 민생의 안정과 생산의 회복에 힘썼다. 다만 왕망이 중시했던 유교만은 더욱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태학과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했다.

광무제부터 명제(明帝)·장제(章帝)에 이르는 약 60년간은 국내 제도가 정비되고 주변국과의 관계도 안정되어 후한의 최대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4대 황제인 화제(和帝) 이후로는 어린 황제가 잇따라 제위에 오르고 황실의 혈통이 끊기는 일도 있어서 외척과 환관 등이 다시 실권을 장악했다. 화제 때의 두씨(竇氏), 안제(安帝) 때의 등씨(鄧氏), 순제(順帝) 때의 양씨(梁氏) 등이 대표적 외척이다.

반면에 전한(前漢) 선제(宣帝) 무렵부터 지방호족 출신이 군·현의 관리나 중앙관료가 되는 경우가 잦아졌는데, 광무제가 호족의 도움을 받아 후한을 세운 뒤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광무제는 예교(禮敎)를 중시했으며 태학을 세워 사인(士人)을 양성했는데, 이들은 관리로 진출하는 일 외에 향리에서 정치를 비평하며 '청의'(淸議)를 조성했다.

청의의 공격목표는 주로 외척과 환관들이었고, 이때문에 화제 이후 환관과 조정 내 사인들의 충돌이 잦아졌다. 환관들은 황제의 힘을 배경으로 사인들을 탄압했으며, 166, 169년 2차례에 걸쳐 사인들을 체포·투옥·사형하는 당고(黨錮)의 화(禍)를 일으켰다. 2번째 당고에서 100여 명이 사형당하고 600~ 700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이 사건으로 청류파 관료는 정계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향리의 청의운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이후 위진남북조시대 귀족정치의 저류를 형성했다.

중앙의 정치가 쇠퇴해지자 흉노족을 대신하여 오환족(烏桓族)과 선비족(鮮卑族)이 북방을 침입하기 시작했다. 서역 여러 나라들도 한을 배반했으며 산시[陝西] 지방의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기근과 반란이 이어져 빈곤한 농민들 사이에 미신과 민간종교가 확산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촉(蜀:쓰촨 성[四川省] 서부)의 장릉(張陵)은 주술과 부적으로 병을 고치고 평안을 준다는 오두미도(五斗米道)를 퍼뜨렸다. 거록(鉅鹿: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쥐루 현[巨鹿縣])의 장각(張角)도 이것과 유사한 태평도(太平道)를 허베이·허난·산둥 일대에 퍼뜨려 잠깐 사이에 많은 신자를 확보했다.

이들은 종교왕국의 건설과 한의 타도를 목표로 삼았는데, 이때문에 한의 탄압을 받게 되자 184년 황색 머리띠를 두르고 일제히 봉기했다. 이것을 ' 황건(黃巾)의 난'이라고 하는데, 얼마 후 장각이 죽자 황건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반란이 일어나 각 지역이 황폐해졌고, 반란 진압을 기회로 곳곳에서 할거세력이 출현했다.

'황건의 난'을 기화로 환관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허베이의 호족으로 사예교위(司隸校尉)였던 원소(袁紹)는 동탁(董卓)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고 궁중에 들어가 189년 8월 2,000여 명의 환관을 죽였다. 뒤늦게 달려온 동탁은 소제(少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192년 동탁은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원소는 허난에서 일어난 조조(曹操)에게 격파당했다. 조조는 동북지방의 오환을 정복하여 북부지방을 평정하고 오의 손권(孫權), 촉의 유비(劉備)와 대립했다. 그러나 적벽(赤壁:지금의 후베이 성 자위 현[嘉魚縣] 동북쪽) 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패했고, 그뒤로는 세력이 강남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220년 헌제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아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후 400년에 걸친 한조도 멸망했다.

사상과 문학

전한 초기에는 황로사상(黃老思想)이 유행하다가 무제 때 동중서의 헌책(獻策)으로 유학이 국교가 되었다. 당시 유학은 진의 분서(焚書)에 의해 경전을 모두 잃어버린 후, 학자들이 암송하여 전해온 내용을 당시의 문자인 예서(隸書)로 기록한 경전에 의거했다. 이를 금문학파(今文學派)라고 한다. 이에 반해 고문학파(古文學派)는 진대(秦代) 이전에 사용되던 과두문자(文字)로 씌어진 경전에 의거했는데, 고문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새로운 경학을 필요로 하던 왕망에 의해 잠시 발전했다.

후한초 광무제는 학자들을 모아 금문학과 고문학을 절충하고 5경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한 〈백호통의 白虎通義〉를 편찬하게 했다. 그후 종래 어느 한쪽만을 진경(眞經)으로 인정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2가지 경전을 함께 연구하는 학풍이 일어났고, 정현(鄭玄)·허신(許愼) 등에 의해 훈고학·문자학이 발전했다.

한대에는 산문으로 가의(賈誼)의 〈신서 新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반고(班固)의 〈한서 漢書〉, 왕충(王充)의 〈논형 論衡〉 등의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 특히 〈사기〉는 한대의 기념비적인 역사책으로 기전체(紀傳體)라는 새로운 체제를 창조하여 이후 2,000년간 중국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출처 : [기타]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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