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1832-1905)

 

 

  ●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1832-1905)는 1832년 5월 21일에 영국 요크셔주 반슬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웅변이 뛰어난 감리교 지방 설교자이자 약사이며, 그의 어머니는 애우 온화하고 인내심이 많은 여인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아버지의 재능과 어머니의 온유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그의 어머니 아멜리아는 허드슨 테일러를 임신했을 때부터 남편 제임스 테일러와 그 아이를 놓고 중국의 사역자로 부르시길 서원 기도하였다.

 

허드슨 테일러의 부모님의 약국에는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부친의 친구들은 항상 모이면 감리교회의 발전상황과 선교사역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특히 중국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허드슨 테일러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말을 곧잘 듣고, 또한 그의 여동생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같은 복음적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5살이 되자 두 동생을 앉혀 놓고 설교를 하곤 했다. 따라서 허드슨 테일러는 막연하나마 어릴 때부터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신앙인이 되도록 교육에 힘을 썼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학교에 다니면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가 학교에 가서 책상 위에 엎드려 기도하면 “와! 허드슨이 기도한다.”하며 아이들이 비웃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학교를 그만 두었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행에 취직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선배들의 영향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인가 하는 생각만 하였다. 그러던 중 시력이 갑작스레 나빠져 실직하게 되어 좌절과 고통 가운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 이렇게 믿음을 잃고 방황하고 있던 1849년, 17세 때, 한 번은 그의 어머니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먼 곳에 다녀오게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는 믿음을 잃고 방황하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빈방을 찾았다. 수년 동안 허드슨 테일러의 어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 왔다. 그녀는 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간, 집에 남아 있었던 허드슨 테일러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할 일이 없이 빈둥거리며 이 책 저 책을 뒤져보다가 어떤 종교적인 소책자를 발견하게 된다. 영적으로 감동 깊은 것이라기보다는 재미있게 보여서 읽기 위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것저것 일는 중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역사를 다 이루셨다.’는 부분을 읽을 때, 테일러는 혼잣말로 “무엇을 이루었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스스로의 입술로 이렇게 답을 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 온전한 구속을 이루어 우리 죄를 위해 이미 자신을 속죄제물로 드리셨지. 우리의 죄를 위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서.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가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그의 심령을 비추사 큰 감동으로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책을 읽다가 그 자리에 엎드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이 그를 사로잡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거듭남의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시간,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있던 허드슨 테일러의 어머니 심령 가운데, 성령께서 그녀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확신을 주셨다. 그래서 즉시 그녀는 간구를 감사로 바꾸어 하나님께 찬미를 올려드렸다.

 

여러날 후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자 허드슨 테일러는 자신의 회심에 관하여 얘기했으나 어머니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며칠 전 친구 집에서 아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하게 느껴 하나님이 그녀에게 확신을 주실 때까지 친구의 방에서 기도했다는 간증을 들려주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다시 한번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자신의 죄를 탕감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 주님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허드슨 테일러는 후일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간증했다. “성령님께서 내 영혼에 기쁨과 확신의 빛을 비추어 주셨다. 나는 주님을 영접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모아서 남부럽지 않게 사느냐 하는데 온 관심을 쏟았던 허드슨 테일러는 이제 어떻게 해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 수 있을까를 주야로 생각하게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이후 중국선교협의회에 편지하여 사역소개와 자료 요청을 하기도 하고 선교잡지를 구독하는 등 선교사역, 특히 자신이 중국사역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그 중국 영혼들을 생각하며 날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가역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게 된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선교사로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기본적인 훈련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올바른 정신자세와 생활태도 그리고 건강한 몸을 위해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운동을 시작하였다. 잠과 음식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였다. 교회생활과 전도생활을 충실히 하였으며 중국어를 배우고 의대에 진학하여 의술을 익혔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자 빈민촌으로 거처를 정하고 장막훈련을 시작하였다.

 

특히 이 기간동안 테일러는 선교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철저한 자기부인의 훈련을 하였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만으로 살기 위한 노력이었다. 테일러는 생활 가운데서도 선교훈련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고생스러운 생활을 견지는 법을 배우기 위해 침대도 없애고 딱딱한 바닥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서양인들은 딱딱한 바닥에서 자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한다. 식사도 가장 값싼 재료로 준비했으며, 또 그것마저도 절제했기 때문에 그의 몸은 야위어 갔다. 심지어 밀린 임금을 지불해 달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에 가서 사역한다면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얻을 수 없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육신생활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허약하던 몸이 영양실조로 더욱 약해져 갔으며 해부학을 배우는 동안 실수로 병균에 감염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그는 ‘악성 열병’으로 거의 생명을 잃을 뻔했으며, 여러 달 동안 의학공부를 쉬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사랑하던 여인이 “당신처럼 헌신적인 사람 처음 봐요. 그래서 너무 부담스러워요.” 하며 청혼을 거절하였다.

 

한번은 허드슨 테일러가 큰 병원에 실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중국선교협회로부터 생활비를 부담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 제안을 수락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가 게을러지고, 그만큼 중국선교에 대한 훈련도 안일해질까 두려워 이를 거절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중국어 문법책도 없이 만다린어로된 누가복음을 가지고 사촌과 함께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무척 힘든 과정이었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최선을 다했고, 결국 얼마 후엔 웬만한 중국어 한자는 다 깨우치게 된다. 그 외에도 정확한 성경번역을 위해 라틴어와 히브리어 헬라어도 공부를 하게 된다.

 

● 이렇게 중국선교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던 어느날, 허드슨 테일러에게 큰 언론사의 편집국장이 찾아와 중국선교 이야기를 하며, ‘만약 당신이 의사공부를 중지하고 지금 당장 중국으로 들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자네를 파송할 것이네.’ 하고 말한다. 1년만 더 공부하면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이것이 주님의 부름이라고 생각하고, 고민할 여지도 없이 가겠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1853년 만 스물 한 살의 나이로 CES(중국선교회)라는 단체의 파송을 받아 중국선교의 길로 들어선다.

 

허드슨 테일러는 약 다섯 달 간의 위험한 항해를 거쳐,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큰 비전을 품고 중국 땅에 발을 디뎠지만, 그가 상해에서 자리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전쟁터와 방불한 곳이었으며, 물가가 폭등하여 생필품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별 수 없이 누더기만 걸치고 거지처럼 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더운 여름철에 되면서는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고, 심한 먼지 때문에 눈병까지 앓게 되었다.

 

하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이런 비참한 땅에서 사는 가련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복음밖에는 희망적인 소식이 없다고 생각하고, 한 차례의 전도여행이 끝나면 미처 쉴 사이도 없이 다음 차례의 전도여행을 준비하였다. 이렇게 강행된 전도여행은 15개월 동안 무려 10차례 이상이나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준비해 간 중국어 신약성경 1천 8백권과 2천권이 넘는 전도 책자들을 글을 읽을 수 있는 중국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중국인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만큼의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테일러는 여러 곳을 여행하며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많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는데, 이는 그가 설교를 유창하게 잘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해박한 지식 때문도 아니라 잃은 영혼을 향한 그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 당시 외국 선교사들은 주로 상해에 몰려 있었다. 그래서 상해나 큰 도시의 사람들에게는 서양 외국 선교사가 눈에 익었으나. 중국 내륙지방의 사정은 달랐다. 여행을 하면서 테일러는 자신이 신기한 존재로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그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보다는 그의 복장과 태도에 더 호기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중국인의 옷을 입고 풍습을 따르는 중국인이 되자는 것이다. 오래전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런 것을, 전통적 방법을 떠난 파격적인 것으로서 올바른 선교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서양문화의 옷을 입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푸른 눈에다 회색 머리를 한 영국 요크셔 출신의 테일러에게 중국인이 된다는 것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중국인 사이에 섞여 살려면 무엇보다 외모부터 바꾸어야만 했다.

 

첫 번째 머리 염색은 큰 소동만 일으키고 실패하였다. 머리에 부은 암모니아가 살갗을 태워 하마터면 장님이 될 뻔하였다. 다행히 의사 선교사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잘 치료해 주어 회복했다. 이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계획을 밀고 나갔다. 이같은 노력 덕택에 테일러는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서도 중국인들 사이에 낄 수 있었다.

 

자신의 변모된 모습을 테일러는 무척 대견하게 생각했지만, 다른 선교사들은 대부분 불쾌감을 표시하였다. 그들은 테일러를 처음에는 골칫덩어리로 여기다가 나중에는 웃음거리로 삼았다. 그는 선교본부와 불편한 관계를 가져오다가 1857년 정식으로 중국복음화 선교회를 탈퇴하였다. 그 후로부터 그는 아무 곳에도 정착하지 않고 중국 내지를 돌아다니며, 중국내륙선교의 새 장을 본격적으로 열게 된다.

 

● 한편 내륙선교의 중심지로 잡은 영파지방에 머무는 가운데, 1858년 26세 때, 그곳에서 초기 중국 선교사의 딸이었던 마리아 다이어양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마리아는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동역자로서 큰 힘을 보태어 주었으며, 7명의 자녀를 출산한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맏딸과 막내 아들을 먼저 잃었으며 마침내 1870년 콜레라로 인해 아내 마리아 마저 숨지고 만다. 힘겨운 선교사역의 가장 큰 위로자요 동역자였던 마리아의 죽음으로 인해 허드슨 테일러는 큰 충격에 잠긴다. 본인도 결핵을 앓게 되어 영국에 귀국하여 치료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선교를 향한 그의 열정은 그 무엇으로도 끄뜨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건강이 회복되자 45살의 나이로 다시 중국을 향해 떠날 때, 이미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순교자의 모습이었다.

 

1871년 재혼한 제니 폴딩은 1904년 죽을 때까지 온갖 위험, 질병과 싸우며 중국선교를 위해 힘쓰는 허드슨 테일러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큰 힘을 보태어 주었다. 그녀는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 내륙지방 오지에 이르기까지 함께 여행하였으며, 허드슨 테일러의 동역자로서, 비서로서, 대변인으로서, 선교사역의 관리자로서,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다가, 허드슨 테일러가 죽기 1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 허드슨 테일러 가족의 이 같은 일생의 헌신으로 인해, 북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호주, 뉴질랜드에 중국선교회 지부가 설립되고, 이렇게 하여 한 때 중국에 모여든 선교사는 1천명을 넘었다. 그가 말년에 선교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 지방에 이르자 허드슨 테일러를 환영하면서, 성문 위에 금빛으로 ‘내륙의 은인’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허드슨은 그리스도만은 위해서 살고, 영혼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고, 전도의 목표를 위해 언어, 의학, 기도훈련을 철저히 감당하였으며,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감당한 헌신적인 전도생활을 실천하였다. 중국 내지선교회의 선교사들과 허드슨 테일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놀랍고 정확하게 응답받곤 하였다. 테일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구해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의 선교단체만이 아니라 다른 선교단체들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노력하는 것이 그의 사역의 원칙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중국 땅의 모든 곳을 구석구석 찾아나서는 ‘중국과 중국의 혼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테일러는 1905년 73살의 나이로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중국 사람들의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고, 그 땅에 묻혔다.

 

 

상하이에서 난징가기 전 쩐쟝이라는 지역에 있는 허드슨 테일러의 묘비 앞.

 

그의 친필로 중국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친 허드슨 테일러의 열정을 대표하는 글

해석: 내가 만약 1000 파운드 금화가 있다면 모두 다 중국을 위해서 쓸 것이고

내가 만약 1000개의 목숨이 있다면 중국을 위해서 그 중 하나라도 남겨둘 수 없다.

 

허드슨 테일러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중국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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