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덕보다 지독한 14호 관리소의 生과 死
국가보위부원이 기분대로 射殺·타살, 밤알 줍다가 사살된 김철민의 손아귀에 든 밤알을 뺏으려 싸우는 사람들
金容三(월간조선)   
 [金容三 기자의 철저 檢證] 세계최초의 생환자 證言
 (월간조선)
 
 「북한의 아우슈비츠」 14호 관리소의 內幕
 
 
 
  ●『14호 수용소에서 포로로 추정되는 70代 서양남자 3명을 3m 거리에서 목격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선 나올 수 없다는 平南 개천 14호 관리소에서 최초로 탈출, 귀순한 金龍씨(국가보위부 간부 출신)의 證言과 그 사실 여부를 檢證하다 『국가보위부원이 기분대로 射殺·타살, 밤알 줍다가 사살된 김철민의 손아귀에 든 밤알을 뺏으려 싸우는 사람들. 농구선수 갈리영은 보위원의 채찍을 삶아먹었다가 타살당했다. 소똥 속 강냉이알을 주워먹고 이를 잡아 씹어먹는다』
 
 ●『黃長燁씨 일가 친척은 18호 관리소에 갇혀 있다』
 
 국가보위부의 중좌로 외화벌이를 하던 金씨는 아버지가 간첩혐의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평남 개천군 14호 관리소로 넘어갔다.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이곳에 도착한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들은 「사람 설계도 같은 인간들」이었다
 
 金容三 탑클래스 편집장 겸 출판팀장 (dragon03@chosun.com)
 
 북한 정치囚 수용소 완전통제구역의 증인
 
  북한판 아우슈비츠
 
  우리는 지옥이란 말을 자주 쓴다. 입시지옥, 만원 지하철을 빗대어 지옥鐵(철)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휴전선 너머 아주 가까운 곳에 인간멸종의 실제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현실로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한번 끌려가면 시체마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북한 정치囚 수용소(북한에서는 수용소를 관리소라고 부른다. 기자가 이 기사에서 정치범 수용소라고 쓰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보편적 기준에서 범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끼에 강냉이 20~30알과 소금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하루 15시간씩 탄광에서, 작업장에서 중노동을 해야 하는 곳. 보위원들의 기분에 따라 사람을 쏘아 죽이고 때려 죽이고, 굶겨 죽이고…. 그 시체를 짐승처럼 끌고 가 묻어버리는 곳. 그리하여 죽음이 일상화된 곳.
 
  무슨 죽을 죄를 지어 끌려가면 그나마 억울함이 덜할 것이다. 그저 지주의 아들, 북송교포, 김일성 사진 훼손 등 우리가 생각하기에 어처구니없는 죄목이 대부분이다.
 
  죄를 지은 당사자만 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가족은 또 무슨 죄가 있다고 2대, 3대 젖먹이 어린이까지 끌어가 목숨을 잃게 만드는가. 『반동의 씨앗들은 3대를 멸종시키라』는 金日成(김일성)과 金正日(김정일)의 교시가 진리로 숭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3월 하순, 북한의 정치囚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상황이 열악하다고 알려진 제14호 및 18호 수용소를 탈출하여 귀순한 金龍(김용)씨와 만났다.
 
  그는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6·25 나던 해에 출생했으니 우리 나이로 51세인 셈인데, 그 나이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험한 세파의 흔적이 얼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김용씨는 북한 사회에서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경험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에게 있어 天國의 시절은 체제유지의 전위대이자, 사회 운영 및 배급 과정에서 특혜계급이라 할 수 있는 국가안전보위부(우리로 치면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를 합쳐놓은 조직) 중좌(중령급에 해당)였을 때다.
 
  그는 보위부 산하 외화벌이 사업소인 서해아사히 주식무역회사에 근무하면서 많은 달러와 외국 문물을 접할 수 있었고,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그 천국의 계단에서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추락하여 죽음의 수용소에서 5년여 수감생활을 경험해야 했다.
 
 
  완전통제구역 체험자의 귀순
 
 
  그간 북한 정치囚 수용소 생활을 체험했다가 한국으로 탈출한 사람은 1992년 8월에 귀순한 安赫(안혁)·姜哲煥(강철환)씨, 1994년 9월에 귀순한 安明哲(안명철)씨가 있다. 이 중 안혁·강철환씨는 15호(함남 요덕) 수용소의 혁명화구역 수감자 출신이며, 안명철씨는 완전통제구역인 13호(함북 온성), 22호(함북 회령) 관리소의 경비대 운전병 출신이다.
 
  이에 비해 김용씨는 북한 정치囚 수용소, 그중에서도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고 시체마저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완전통제구역(金씨는 이를 「닫긴 구역」이라고 표현했다)에서 수감생활을 체험하다 자유세계로 탈출한 유일한 인물이다.
 
  수용소 생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완전통제구역은 정치적 범죄행위를 저지른 당사자는 물론이고, 연좌제에 의해 그 가족과 부모 등 2~3代까지 수용한다. 수용소行이 결정되면 일가족 전체를 한 곳에 수감하지 않고, 생이별시켜 별도의 수용소에 수감하는 경우도 있다.
 
  안명철씨는 月刊朝鮮과의 인터뷰(1995년 3월호)에서 『죄를 지은 당사자는 15호(함남 요덕의 완전통제구역)와 25호(함북 청진)로 보내고 그 가족들은 14호(평남 개천), 15호(요덕의 혁명화구역), 16호(함북 화성), 22호(함북 회령) 등으로 분리 수용한다』고 증언했다.
 
  김용씨의 귀순으로 14호 수용소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14호 수용소는 죄를 지은 당사자가 수용되는 곳이며, 그 가족은 14호와 마주 보고 있는 18호 수용소에 수감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金씨는 북한 정치囚 수용소 중에서도 상황이 가장 참혹한 완전통제구역, 그중에서도 죄를 지은 당사자들이 수감되는 14호 수용소의 실상을 증언할 세계 유일의 인물이 되었다.
 
  북한 정치囚 수용소의 필요성이나 운영방법, 목적 등은 귀순한 수용소 체험자들의 증언으로 어느 정도 윤곽이 밝혀진 상태다. 김용씨의 존재는 수용소 생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 내용에 대한 검증을 할 수 있는 사실적 기초를 제공해 줌은 물론, 기존 증언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김용씨의 수용소 생활 증언의 신뢰성 여부를 검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金龍씨의 기구한 인생 행로
 
 
  김용씨는 14호 수용소에 들어간 후 무진2갱이라는 제한된 구역에서만 노동을 했기 때문에 무진2갱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배치된 지역 이외로 돌아다닐 수 있는 이동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金씨의 체험은 무진2갱 지역, 그리고 자신과 함께 작업했던 300여 수감자들에 국한된다. 때문에 「나무는 보되 숲은 못 보는」 일정한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선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김용씨는 일생 동안 이름이 세 번 바뀌었다. 부모가 지어준 본명은 김봉수, 두 번째 이름은 박봉수, 세 번째 이름이 김용이다. 한국에 귀순하여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때 그는 참혹했던 과거지사를 잊자는 뜻에서 이름을 김용으로 개명했다. 그의 이름이 세 개이듯, 인생 이력도 정확히 3등분된다. 먼저 김봉수 시절의 이야기.
 
  그는 6·25가 터지기 직전인 1950년 황해도 신계군 적여면 대평리에서 출생했다. 6·25 전란 통에 부모를 잃고 네 살 되던 해 황해남도의 벽성애육원(고아원)에 기탁됐다. 젖먹이 시절에 전쟁고아가 됐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오히려 金日成을 진짜 어버이로 모시며 살았기 때문에 성장해서도 黨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굳건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수령의 은혜를 입어 북한 체제의 전위대라 할 수 있는 혁명의 아들로 자란 것이다.
 
  그는 평남 강서초등학원을 졸업한 후 청진시 신암구역에서 항만건설을 담당하는 준첩사업소 노동자로 배치돼 나진 선봉지역의 나진항, 웅상항 건설사업에 참여했다. 1970년 군에 입대하여 호위총국 독로강체육단의 유도선수(당시 계급 소위)로 활약했다.
 
  1974년 체육단이 해산되면서 김책공대 자동화공학부 인쇄과에서 6년간 공부했고, 1980∼87년 조선인민군 489군부대(인민무력부 청사관리국) 원산출장소장(당시 계급 중좌)으로 배치됐다.
 
  그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닥친 것은 원산출장소장 시절인 1986년이다. 전란통에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던 어머니(김찬일)가 어느 날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처음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마주친 순간, 그는 도저히 자신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전후좌우 사정을 들어보니 다음과 같이 과거가 再生되었다.
 
  6·25가 나기 전 부모는 金씨를 비롯해 형님(김권수)과 누이(김옥순)를 황해도 신계군의 외할머니 댁에 맡기고 38선 바로 이북의 판문군에 거주했다. 전란통에 대부분의 사람들 생활이 곤궁했지만 식솔이 많았던 외할머니 집안은 비참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양식이 없어 누이가 굶어 죽자 외할머니는 『이러다 두 외손자를 다 굶겨 죽이는 것 아닌가』 하고 겁이 더럭 났다. 두 외손자를 살리기 위해 외할머니는 金씨 형제를 「전란통에 길에서 주운 아이」로 신고하여 황해남도 벽성애육원에 보냈다.
 
 
  호적 위조하여 사회안전부 진출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金씨의 아버지(김청국)는 비밀리에 38선을 넘나들며 무명장사를 했다. 이 와중에 아버지는 미국을 위해 스파이로 활동하다 체포돼 총살당했고, 어머니는 신의주 교화소로 끌려갔다. 후에 형님도 집안 내력을 알고는 『이런 신분으로는 도저히 북한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 남한으로 탈출을 모의하다 황해북도 은파군 보위부에 체포돼 총살당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진실을 듣고 보니 金씨는 북한 체제의 주역인 「혁명의 아들」이 아니라 「원쑤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전율했다. 만약 이 사실이 탄로나면 그의 앞길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고민 끝에 어머니로 하여금 친척들과 공모하여 같은 고향 출신으로 道(도)부위원장까지 지낸 박복덕이란 사람과 어머니가 불륜의 관계를 맺어 태어난 자식이라고 호적을 위조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1만 달러라는 거액의 뇌물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김봉수에서 박봉수로 둔갑하여 제2의 인생이 시작된다. 주위 사람들에겐 『전쟁통에 부모를 잃었는데, 부모를 찾고 보니 박씨더라』 하는 소문을 냈다.
 
  졸지에 성분이 우수한 집안의 아들로 신분이 바뀐 「박봉수」씨는 그 배경으로 1988년 사회안전부 산하의 동흥무역주식회사에서 일본과 해산물 무역을 하는 서해아사히 주식무역회사 대리인(부사장급)으로 영전했다.
 
  서해아사히의 本社(본사)는 일본 규슈의 하카다에 있었는데, 주로 북한에서 일본에 광어와 가자미를 수출했다. 월급은 일본에서 600달러씩 송금되었는데, 이 돈은 사회안전부 구좌로 들어가고 직원들에겐 북한 돈이 지급됐다. 당시 김용씨 월급이 180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과의 무역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했고, 金正日에게 36만 달러의 충성자금을 바친 공으로 1990년 혁명열사증과 金正日로부터 「강원도 원산시의 박봉수에 대해 잘 돌봐주라」는 개별방침까지 받았다.
 
  1990년 5월3일 金正日의 방침에 의해 이 회사가 국가안전보위부 산하로 이관되었다. 그는 무역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 국가보위부 고위 간부 ○○○의 신임을 얻었다. 고위 간부는 그가 가짜 박봉수인지도 모르고 그의 사업실적을 높이 평가하는 등 총애했다고 한다.
 
  그는 국가안전보위부에 근무하며 자신의 친부모에 대한 관련서류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서류를 보니 아버지는 「비루스 3호」라는 암호명을 가진 美 중앙정보부(CIA) 첩자로 활동하다 개성시 판문군에서 체포돼 1957년 공개 처형당했고(개성시 판문군 간첩단 사건), 어머니는 신의주 교화소로 끌려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짜 박봉수 인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위조된 신분이 발각된 것은 1993년의 일이다. 평양시에서도 金正日 집무실 가까운 지역의 거주지를 「김정일 1호 행사구역」이라고 한다. 이 일대 거주민들에 대해서는 수시로 주민등록 검사를 한다. 이 지역 주민은 金正日과 대면할 기회가 자주 있기 때문에 정수분자들로만 배치하기 위한 조치였다. 바로 이 거주지에 金씨의 서류상 아버지인 박복덕씨의 둘째아들 박찬혁(당시 민주조선사 사진부장)씨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주민등록 조사를 나온 사회안전부 관계자가 박찬혁씨에게 『당신 가족 중 박봉수라는 막내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박찬혁씨 『박봉수란 이름은 처음 들어봅니다. 그 자가 누구요?』 하고 되물었다.
 
  의심이 간 관계자들이 박봉수의 행적을 면밀히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서류 위조에 가담했던 황해북도 서흥군 안전부 주민등록 지도원 김계선(대위), 金씨의 어머니가 불륜의 관계로 박복덕씨의 아들을 출산했다고 거짓 보증을 섰던 마을 주민들이 줄줄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체포, 구금, 고문
 
 
  1993년 5월 어느 날의 일이다. 일본으로 가는 배에 실은 수출품 검사를 마치고 부두에 내리자 난데없이 나타난 사람들이 김씨를 덮쳤다. 영문을 모른 채 체포당해 끌려간 곳이 평양시 용성구역 마람의 특수 아지트. 심문관들의 취조가 시작됐고, 극심한 고문이 이어졌다. 이력을 속이고 국가안전보위부에 침투한 목적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꼼짝없이 간첩, 혹은 反혁명분자로 몰린 것이다.
 
  그에게 고문당했던 과정을 질문하자 『너무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워 상상하기도 싫다』면서 자신이 직접 쓴 手記(수기)로 답변을 대신했다. 다음은 김용씨의 자필 수기 내용을 옮긴 것이다(북한식 표기와 용어, 맞춤법은 우리 실정에 맞게 기자가 바꿈).
 
  <평양시 용성구역 마람에 위치하고 있는 특수 아지트에 잡아넣고 저를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특수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에 침투했는가』 『무슨 담력으로 간첩의 자식이 애국자의 탈을 썼는가』 하며 온갖 고문을 다했습니다. 5승5각자(5㎝×5㎝의 직사각형 각목)를 무릎 안쪽에 끼우고 꿇어앉혀 구둣발로 무릎을 사정없이 내려밟고, 족쇠(수갑)를 채워 발끝만 겨우 땅에 닿을 정도로 매달아 놓았습니다.
 
  밤이면 독감방에 배꼽까지 물을 채워놓고 순간의 쪽잠도 잘 수 없게 감시했습니다. 온몸이 물에 퉁퉁 부어 올라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지면 구둣발로 차서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세 달간 그는 평양시 대동강 구역의 문수에 위치하고 있는 특수 아지트를 왕래하며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어머니의 진술서와 황해북도 서흥군 안전부 주민등록 지도원 김계선의 진술서를 꺼내놓고 공모 사실을 자백하라고 위협했다. 그는 3개월여에 걸쳐 끔찍한 고문을 당할 때마다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 『저들이 원하는 대로 다 실토하자』는 유혹에 이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죽음의 관리소로 끌려가다
 
 
  1993년 8월 어느날 밤 그는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채 호송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평양을 출발한 호송차가 4~5시간 정도 달렸을까. 감시초소 앞에서 차가 멈추더니 굳게 잠겨 있던 호송차의 문이 덜컹 열렸다. 차에서 내려 도대체 이곳이 어디일까 하고 어리둥절해 있을 때 어디선가 『이 새끼 꿇어앉아! 대가리 박아!』 하는 고함이 날아왔다. 잠시 후 그를 태우고 왔던 호송원은 내부 근무자에게 서류를 넘겨주고 되돌아갔고, 金씨는 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호송차로 옮겨졌다.
 
  『야 이 새끼야, 타라』
 
  처음부터 끝까지 욕이 섞인 말로 명령이 떨어졌다. 金씨는 영문을 모른 채 호송차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이 새끼, 개대가리 같은 거 자꾸 쳐들갔어?』 하더니 호송원이 그의 머리를 구둣발로 밟아 차 바닥에 짓이겼다. 그 순간 김용씨는 『이젠 죽었구나』 하는 깊은 체념에 머리의 극심한 통증마저 잊었다고 한다.
 
  겹겹이 쳐진 감시초소를 몇 개인가 지나쳐 한참을 덜컹거리며 달리다가 차가 멈추었다. 족쇄를 풀고 차에서 내리자 희미한 불빛 아래 「집행창고」(일종의 영치품 창고)라는 푯말이 붙은 건물이 나타났다. 호송원이 입고 있던 옷과 속내의, 팬티까지 모두 벗으라고 명령하더니 넝마 같은 회색 죄수복을 던져주었다.
 
  알몸이 된 김용씨는 악취 나는 누더기 죄수복을 입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갑자기 『이 새끼 아직 속이 살았구나. 꿇어앉아!』 하더니 강제로 머리를 땅에 박게 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이새끼, 저새끼 하는 욕이 표준어였다. 또 14호 관리소 규정에는 「선생님」(간수 역할을 하는 계호원이나 보위원들을 부르는 명칭)이 나타나면 수감자들은 손을 뒷짐진 채 돌아서 이마를 땅에 박고 꿇어앉아 있다가 「선생님」들이 지나간 다음 그들이 지나간 반대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철칙이었다.
 
  잠시 후 한 사나이가 나타나 『이새끼는 무진2갱 굴진조에 배속해서 일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보위원 두 명이 金씨를 호송차에 태우고 산굽이를 돌아 산중턱에 내려놓았다.
 
  눈앞에 「무진2갱」이라는 푯말이 붙은 갱 입구가 나타났다. 그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풍경에 김용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로만 듣던 관리소에 끌려온 사실을 그제서야 현실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곳은 북한의 관리소 중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국가안전보위부 제14호 정치범 관리소였다.
 
  과연 이 죽음의 관리소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 혀를 깨물고 자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에 일단 「관리소」에 끌려오면 살아서 바깥 세상 구경을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국가안전보위부 14호 정치범 관리소
 
  『사람 설계도만 남은 상태의 인간들…』
 
 
  金씨가 수감된 14호 관리소의 행정구역상 위치는 평남 북창군 득장구로 되어 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행정구역상의 위치는 외부 기만을 위한 것일 뿐 실제 위치는 평남 개천군·순천군·운산군·득장구·영대구로 둘러싸인 산골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용소의 대부분이 평남 개천 쪽에 있다고 한다.
 
  그를 인계받아 무진2갱까지 인솔해 온 보위원이 김씨의 「담당 선생님」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14호 정치범 관리소의 무진2갱에서 2년여 악몽과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가 배치받은 곳은 14호 수용소의 우측 산골지역에 위치한 무진2갱 탄광이었다. 그는 탄광 주위에서 비틀비틀 걸으며 노역에 종사하는 수감자들을 보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인간이 말라도 어쩌면 저렇게 마르고 야윌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뼈에 가죽만 씌워 놓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수감자들을 보는 순간, 사람 설계도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인간의 형체만 남았을 뿐 온몸에서 살점을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말라 비틀어진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어요. 게다가 그곳은 탄광지역이라서 작업자들이 탄가루를 뒤집어썼기 때문에 마치 석탄 묻은 마른 장작이 꿈틀대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13호와 22호 수용소 경비원 출신 귀순자인 안명철씨는 북한의 수용소에는 작업 도중 다리나 팔 등을 다친 불구자가 상당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金씨에게 수감자에 대한 첫인상을 묻자 『제대로 먹지를 못해 걸을 때도 쐐쐐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굽어 있었다』고 기억했다. 『14호 수용소에도 탄광에서 작업하다 사고가 나서 다리나 팔이 잘린 불구자들이 상당수였다』고 증언했다.
 
  『팔과 다리가 있거나 말거나 수감자들은 노동을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다리가 없는 사람들은 나무로 목발을 만들어서라도 절뚝이며 어떤 형태의 노동이건 해야 합니다』
 
  수감자들이 몸에 걸친 작업복은 수백 번도 더 기워 누더기가 된 거적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기자는 안명철씨가 그린 22호 수용소 수감자들의 모습(月刊朝鮮 1995년 3월호 게재)을 보여주자 『이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은 14호 수감자 모습과 비교하면 훨씬 나은 편』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수감자들의 한 끼 양식은 통강냉이 20∼30알과 배추 잎이 둥둥 뜬 소금국이 전부입니다.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힘을 쓸 수가 없어요. 갱도에서 100m를 걸어 들어가는 데 15분도 더 걸렸고, 삽질 한 번 하고 나면 하늘이 노래져 헉헉거리며 숨을 쉬어야 했습니다. 노동 생산성을 거의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탄광에서는 작업 목표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들어도 보위원이 지시한 작업내용을 이행하지 않으면 「공화국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무진2갱 지역에서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곤 하마처럼 입을 벌린 坑口(갱구)와 그 옆 수감자들의 주거지인 다 쓰러져가는 막사 한 棟(동), 식당 겸 세면장 한 동, 제재소, 그리고 종합 권양기실이 전부였다(아래 그림 참조). 막사는 6칸의 내무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각의 방에는 52∼53명의 남자 수감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김용씨는 무진2갱 지역의 수감자를 300여 명 정도로 기억했다. 수감자들은 굴진조, 준비굴진, 채탄공, 선로조, 전차운전조, 제재조, 동발공 등의 임무로 나뉘었다.
 
 
  돼지 사료 훔쳐 먹을 수 있는 자리를 부러워한다
 
 
  내무반 입구는 철문으로 되어 있으며, 탄광에서 작업이 끝나 수감자들이 내무반에 들어가면 밖에서 철문을 잠근다. 내무반에 들어서면 한가운데 복도가 나 있고, 양쪽으로 수감자들이 눕는 3층으로 된 계단식 나무침대가 놓여 있다. 이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내부 비품은 빗자루 한 개, 드럼통을 반으로 자른 소변통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탄광지역이니 땔감은 풍부했다. 난방은 석탄으로 하는데, 내무반에서 나이가 많은 노인이 火夫(화부) 일을 본다. 대변을 본 후엔 나뭇가지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그것으로 뒷손질을 해야 한다.
 
  안명철씨는 22호 수용소의 경우 임신한 여성 수감자는 무조건 처형한다고 증언했다. 이 내용을 질문하자 김용씨는 『14호 수용소는 남녀를 엄격히 분리 수용하기 때문에 수용소 내에서 남녀간에 임신 사건은 원천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는 14호에 수감되어 있던 2년여 기간 동안 단 한 번, 全 수감자들이 동원되어 도로 확장공사를 할 때 여자 구경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수감자들 가운데는 보위원의 밀정 노릇을 하는 밀고자들이 있기 때문에 극도로 말조심을 했다고 한다. 누가 밀정인지 모르기 때문에 수감자 상호간에 의심과 불신·반목이 일반적 현상이다. 함부로 자신의 인적사항을 밝히거나 대화를 나누면 즉시 밀고되어 심한 추궁을 당할 정도다. 수감자 셋 이상이 모여 대화를 하면 모의 대상, 쿠데타 대상으로 간주하여 가혹하게 처벌하기 때문에 수감자들끼리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본다.
 
  『제가 보기엔 수감자 세 명 중 한 명은 밀고자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밀고와 감시가 성행하는 이유는 수감자가 은밀히 도주 모의를 하는 내용을 밀고할 경우 탄광보다 조건이 나은 작업장으로 옮겨주기 때문입니다. 목장 같은 곳으로 배치되면 그래도 돼지나 소에게 주는 사료를 몰래 훔쳐먹을 기회가 있고, 또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탄광보다는 작업환경이 좋습니다. 그러니 굶주림 때문에 목숨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수감자들은 옆사람들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내용을 엿들었다가 밀고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용씨는 2년여 무진2갱에 수용되어 있었지만 같은 굴진조에 속했던 몇 사람의 이름 정도를 기억할 뿐 그들의 인적사항이나 끌려온 이유, 사회에 있을 때의 지위 등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굴진조의 조장이었던 김재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처음 굴진조에 배치됐을 때 조장 김재근은 「이곳에서 말은 필요없다」고 하더군요. 몇 개월이 흘러 내가 보위원의 프락치가 아니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자 그때부터 보위원의 눈을 피해 작업 도중에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됐습니다. 그는 저에게 「김재근이가 누군지 아나? 내가 바로 김재근이야」 하더군요』
 
  김재근은 사회에 있을 때 인민무력부 519연락소(해외로 파견하는 간첩양성소) 책임자로서 계급은 인민군 소장 출신이었다. 김정일의 이복 동생인 김평일 계열로 몰려 숙청된 후 14호 수용소로 끌려왔다고 한다. 그는 『해외에 26차례 파견됐고, 미국의 신형 탱크 설계도를 채온(훔쳐온) 적도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고 한다.
 
 
  2년 동안 15건 정도 즉결처분
 
 
  관리소는 죽음이 일상화된 지역이었다. 김용씨는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해 냈다. 보위원들은 수감자들을 함부로 죽였다고 한다. 그는 14호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2년여 동안 아무 이유도 없이 보위원에게 즉결처분당한 사례를 15건 정도, 영양실조로 죽거나 탄광 작업 도중 사망하거나, 보위원에게 불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사례를 25건 정도로 기억했다.
 
  그가 수감됐던 무진2갱 주변은 밤나무골이라 불릴 정도로 밤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산골마다 밤알이 수북이 쌓이곤 했다. 어찌나 밤이 탐스럽게 열리는지 가을이 되면 밤이 쩍쩍 벌어져 굵은 밤알이 우수수 떨어졌다. 坑口 윗부분에도 밤나무가 있어 보위원들 몰래 몇 알씩 주워다 먹곤 했다. 그러나 산에는 경비가 삼엄할 뿐만 아니라 보위원들의 눈을 피해 한 발자국이라도 산에 올라갔다 들키면 도주분자로 몰려 현장에서 사살당한다. 때문에 모진 굶주림에 시달리는 수용자들은 눈앞에 밤알이 어른거려도 감히 주워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김철민이 사살되는 장면 목격담
 
 
  1993년 10월 무렵의 일이다. 갱구에서 산중턱을 따라 석탄을 실어나르는 전찻길이 나 있었다. 그 주위에도 밤나무가 많아 전차 선로에 잘 익은 밤알들이 떨어져 있었다.
 
  하루는 전차(석탄 운반차) 운전공인 김철민(당시 나이 54세 정도. 평북 대관 출신)이 석탄을 운반하고 坑으로 돌아오던 중 전찻길에 떨어져 있는 밤알을 발견했다. 너무 배가 고파 눈이 뒤집힌 김철민은 전찻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 밤알을 주웠다. 그때 갑자기 『야 이 새끼야, 그 자리에 섯』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坑 안에서 동발목(갱도를 받치는 나무 기둥)을 나르고 있었던 김용씨는 고함소리에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당시 김용씨 일행을 감독하던 보위원은 성격이 포악해서 수감자들이 「오빠시」(산 속에 살고 있는 야생벌로서 맹독성의 침을 갖고 있는 독종이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밤을 줍는 데 정신이 팔린 김철민은 오빠시가 자기를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뛰어간 보위원은 김철민의 허리를 구둣발로 냅다 걷어차 쓰러뜨리고는 사정없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신음소리와 함께 피가 퍽퍽 튀었다. 마구잡이식 구타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보위원은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철커덕 장전을 했다.
 
  『이 새끼는 사회에 있을 때도 당과 인민에 대한 해독분자였는데, 여기 와서도 자기 잘못을 고치지 못하고 제도적으로 반항을 하다니. 이런 해독분자 새끼는 죽어도 싸다』
 
  이렇게 외치고는 김철민의 머리를 전차 레일 위에 구둣발로 내려 밟은 채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망치로 귓전을 때리는 듯한 총소리와 함께 김철민의 입과 머리에서 울컥울컥 피가 솟구쳐 나왔다. 보위원은 감독(수감자 중 대표로 정한 사람. 일종의 보위원 프락치. 이름 기억 못함)에게 『이 새끼를 끌고 가라』고 명령했다. 감독이 달려가 피를 쏟는 김철민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보위원이 『이 새끼, 해독분자를 동정하나? 너도 이 꼴이 되고 싶나? 그냥 끌고 가』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보위원 기분이 나쁘면 피살될 확률 상승
 
 
  감독은 머리에 총을 맞고 시체가 된 김철민의 다리를 잡아 질질 끌면서 전차 선로를 따라 내려갔다. 김철민의 머리가 선로의 침목에 닿을 때마다 털컥털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철민의 손에는 그때까지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알의 밤알이 으스러지게 잡혀 있었다.
 
  김용씨는 짐승 시체를 끌고 가듯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들도 인간인데, 이럴 수가 있는가』 하며 치를 떨었다. 다른 수감자들도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죽일 놈들, 개만도 못한 놈들』 하며 오한이 난 것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시 정황에 대한 김용씨의 증언.
 
  『수용소는 無法 지대입니다. 수감자들이 무슨 뚜렷한 죄를 지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담당 보위원의 기분에 따라 죽이는 겁니다. 보위원들 기분이 나쁘면 죽음을 당할 확률도 높아지지요. 때문에 수감자들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머리털이 곤두선 채 살아야 합니다.
 
  수용소에서는 자신을 담당하는 보위원의 명령을 우선적으로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명의 보위원이 함께 불러 일을 시킬 경우 담당 보위원의 지시를 먼저 들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다른 보위원은 「이 새끼 내가 부르면 낯가림을 한다」면서 쏴죽이는 경우도 있었어요』
 
  이런 진술은 『보위원 기분 내키는 대로 쏴죽인다』는 안명철씨(22호 관리소 경비원 출신 귀순자)의 증언과 일치한다. 김용씨도 보위원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기억을 기자에게 소개했다. 그가 무진2갱 「지하 6편도」(지상에서 여섯 번째 작업 갱도)에서 굴진공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1편도는 보통 120m이기 때문에 지하 6편도는 720m의 땅 속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그림 참조).
 
  그날도 김용씨는 버럭(갱도를 뚫을 때 발생하는 돌과 흙)을 광차에 실어 권양기場이 있는 곳까지 200여m를 밀고 나가는 작업을 했다. 그런데 먹은 것이 없어 힘을 쓰지 못하니 버럭을 실은 광차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뒤쪽에서 『어떤 새끼가 광차를 뒤로 밀리게 하는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씨는 관리소의 규정대로 굴 벽쪽을 향해 꿇어앉아 손을 뒷짐진 채 이마를 땅에 닿게 엎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일 못하는 놈들은 죽어도 싸다』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서 전기가 번쩍 튀었다. 보위원이 권총 손잡이로 김용씨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순간 김씨는 정신을 잃고 석탄가루가 물과 범벅이 된 갱 바닥에 쓰러졌다.
 
  겨우 제정신을 수습한 것은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뒤통수를 만져보니 머리 가죽이 찢어져 구멍이 뚫렸고, 그곳에서 흐른 피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만약 보위원이 그날 기분이 언짢았다면 그는 권총 손잡이로 얻어맞는 대신 총알세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농구선수 출신 갈리영의 죽음
 
 
  그는 정신을 차린 후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고 억울해서 『이렇게 구차하게 살 바에야 야수 같은 보위원 놈을 까죽이고 나도 죽자』면서 이를 갈았다고 한다. 김씨의 머리에는 아직도 당시 권총 손잡이로 맞은 상처가 남아 있다. 그는 이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원한의 상처』라고 말했다.
 
  그는 같은 내무반에 수용됐던 농구선수 출신 수감자 갈리영씨의 죽음을 기억해 냈다. 갈리영의 당시 나이는 57세 정도. 아버지가 지주였다는 이유로 끌려와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었다. 농구선수로 활동할 때는 중거리슛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하루는 문제의 「오빠시」 보위원이 갱 내부를 순찰하다 늘 가지고 다니며 작업자들을 때리거나 지시할 때 쓰는 소꼬리로 만든 채찍을 깜빡 잊고 坑에 놓고 나갔다. 너무나 굶주렸던 갈리영씨는 이것을 몰래 숨긴 다음 물에 불려서 뜯어먹었다.
 
  다음날 채찍을 잃어버린 오빠시는 수소문 끝에 갈리영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끌어내 『당과 인민에 대한 반항자』라며 무지막지하게 구타했다. 너무 많이 맞아 갈리영이 혼절하자 보위원은 감독에게 시켜 변소(별도의 건물로 된 것이 아니라 숲 속에 구덩이를 파고 주위를 거적으로 가린 곳)에서 회충을 한 마리 나뭇가지로 둘둘 말아가지고 와서는 『이 새끼야 이것도 고기니까 처먹어라』 하면서 입 안에 마구 쑤셔넣는 것이었다. 갈리영씨는 몸부림을 쳤지만 강제로 나무 막대기를 입안에 쑤셔넣는 바람에 입이 찢어져 피거품이 솟구쳐 나왔다. 김용씨의 증언.
 
  『갈리영은 그날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 고열이 나고 온몸이 퉁퉁 부어 올랐습니다. 제가 간호를 하느라 그의 머리를 무릎에 얹어 놓고 위로를 해주었어요. 그는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지주 아들이 무슨 죄인가. 아버지의 재산을 넘겨받은 것이 무슨 죄가 된다고 이런 고역을 치러야 하나」 하며 눈물을 흘리더군요』
 
  수감자들은 뼈와 가죽만 남은 만성적인 영양실조 상태기 때문에 몇 대 맞으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결국 갈리영도 구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흘간 불덩이가 되어 끙끙거리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죽음이 일상화된 곳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도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그저 「또 죽었구나」 하고는 질질 끌어다 아무 곳에나 묻어버리지요. 만약 사람이 묻힌 곳이라는 표식을 남기거나 봉분을 만들었다간 처벌당하기 때문에 죽은 자에 대해서는 어떤 동정도 금물입니다』
 
 
  죽은 사람 옷 차지하려고 싸움하기도…
 
 
  수감자들은 인간성이 거의 메말랐기 때문에 한 내무반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던 동료 수감자가 죽어도 무감각하다고 한다. 죽은 자를 동정하다간 해독분자로 몰려 같은 꼴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김용씨의 증언.
 
  『전차 운전공 김철민이 오빠시의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어떤 수감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는커녕 김철민의 손에 쥐어졌던 그 밤알을 빼내서 먹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김철민은 죽어가면서도 밤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으스러지도록 꼭 쥔 채 죽었어요. 그 수감자는 김철민의 손가락을 펴려고 낑낑댔는데, 이 모습을 본 굴진조장 김재근이 「이 새끼야 너도 사람이냐?」 하면서 발길로 그 수감자를 걷어찼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런 짓을 다 했겠습니까』
 
  수용소에서는 入所(입소) 당시 다 떨어진 죄수복을 내주고는 다시는 옷을 지급하지 않는다. 찢어지면 찢어진 대로 기워서 입어야 하는데, 오랜 기간 수감됐던 사람들은 완전히 옷이 해져 기울 자리도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갈리영이 죽었을 때 수감자들은 그의 옷을 서로 먼저 뺏으려고 치고 박는 싸움을 벌였을 정도라는 것이다.
 
  한번은 소지품 검사를 하는 와중에 한 수감자의 몸에서 신문지 조각이 발견되는 바람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14호 관리소에서는 수감자들에게 담배를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야생의 쑥과 가랑잎을 잘게 부숴서 말아 피운다고 한다. 담배를 말아피우는 종이는 「여죄 연루」 자백을 기록하라면서 가끔씩 종이를 나누어 주는데 이것을 몰래 잘라서 사용한다고 한다.
 
  1994년의 일이다. 인민군 출신으로서 전차 선로조에서 일하던 변철우라는 수감자가 주머니 검사 과정에서 손바닥만한 신문지 조각이 발견됐다. 아무리 맞아도 변철우는 신문 조각이 어디서 나왔는지 자백하지 않았다.
 
  『엄격하게 통제된 수용소 안에서 어떻게 신문 조각을 구해서 가지고 있었을까 지금도 의아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결국 그는 탈출 기도, 도주 기도 혐의로 손을 뒷짐지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습니다. 변철우는 이틀간 나무에 매달려 짐승같이 울부짖고 대소변을 흘리며 고통을 당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왜 신문을 소지하면 심한 처벌을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해 김용씨는 『수용소에서는 신문을 단순히 종이로 생각하지 않고 수감자들이 정세파악을 하여 폭동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개처형 목격한 囚人들 봉기, 1500명 사살당했다』
 
 
  김용씨는 이처럼 잘못을 저지른 수감자들을 대중 앞에서 참혹하게 죽이는가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어다 비밀리에 처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어디론가 끌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위원이 경비원과 함께 흰 장갑을 끼고 집총자세로 나타나 「누구 누구 나오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불려간 수감자들은 대부분 비밀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려가 돌아오지 않거나, 병에 걸려 격리수용된 후 돌아오지 않는 사례가 25~30건 정도 있었어요. 만약 비밀처형하지 않고 다른 작업장으로 이동을 시킬 경우에는 10~20명 단위로 이동을 시키는데, 그때는 보위원들이 흰 장갑이나 집총자세로 나타나지 않으며 「소지품을 가지고 나오라」고 명령합니다』
 
  김용씨는 14호 수용소는 다른 수용소와는 달리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공개처형은 금지되어 있으며, 대신 조용히 끌어다 비밀처형을 한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비밀처형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김용씨의 증언.
 
  『공개처형은 공포심 조장을 위한 목적에서 시행됐는데 너무 자주 죽이다 보니 반발심만 일으켰다고 합니다. 또 공개처형을 하려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감자들을 한자리에 모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아요. 1990년에 14호 관리소에서 보위원이 수감자를 처형하는 모습에 흥분하여 폭동이 일어나 보위원 8명이 살해됐다고 합니다. 폭동 진압을 위해 보위원과 경비원들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감자 1500명을 사살했고 시체는 폐갱에 처넣어 겨우 사태를 수습했답니다. 이 사건 이후 14호 수용소에서는 공개처형이 사라졌고, 수감자들의 내무반 출입문을 철문으로 교체하여 일과를 마친 후에는 밖에서 철문을 굳게 잠그고 다음날 아침 기상 시간에야 열어 주곤 했습니다』
 
  이러한 진술은 13호, 22호 수용소 경비원이었던 안명철씨의 증언과 일치한다. 安씨는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개처형은 공포심 조장과 일벌백계를 위한 제도였는데 처형이 너무 잦아 면역이 생겼는지 반발심과 분노만 조장하게 됐어요. 공개처형 때마다 폭동이나 소요를 막기 위해 경비대가 처형장 주위를 포위하고 완전 전투태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13호와 22호 관리소에서는 1984년부터 말썽 많은 공개처형 대신 비밀처형을 시작한 겁니다』
 
  공개처형 대신 14호 수용소에서는 사람을 불러내 비밀처형하는 사례가 주기적으로 반복됐는데, 김씨는 평균 45일에 한 차례씩(매 분기마다 두 차례 정도), 한번에 2~5명 정도를 끌어간 것으로 기억했다.
 
  보위원들의 야만적인 폭력과 죽음이 일상화된 환경조건 때문에 수감자들은 늘 긴장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때문에 수감자들은 충동적이고 이판사판식의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 가끔씩 보위원이나 경비원을 공격하기도 한다. 때문에 보위원들은 단독으로 다니지 않고 사상이 뛰어난 무술 유단자와 동행하며, 반드시 권총으로 무장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미군(혹은 영국군) 포로로 추정되는 서양인 목격
 
 
  1994년에는 坑內의 작업을 감독하러 들어갔던 보위원과 경비원 두 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곳에는 6명의 채탄조가 작업하고 있었는데, 다른 보위원들이 6명의 채탄조를 잡아다 『자백하라』면서 모두 때려죽였다고 한다. 수감자들은 채탄조가 보위원과 경비원을 살해한 후 사람 접근이 어려운 폐갱에 시체를 숨겼을 것으로 추측했다. 지하수가 흐르는 폐갱에 시체를 던져 넣으면 그곳은 완전한 암흑 세계이기 때문에 절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4호 수용소에는 어떤 사람이 끌려오는가. 이 질문에 김용씨는 정부 제도에 반대한 자, 방해 책동자,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모욕하거나 비판하는 발언을 하다 발각된 자, 기독교를 믿다가 발각된 자, 간첩, 치안대 관련자, 공장에서 기계를 파괴한 자 등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적대범들이 주로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악질분자로 분류되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 반대 발언자, 군사정변이나 쿠데타 기도자 등이라고 한다.
 
  김용씨는 14호 수용소에 있을 때 단 한 번 무진2갱 이외의 지역에 나간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와중에 여자 수감자와 미군(혹은 영국군) 포로로 추정되는 외국인을 목격했다.
 
  1995년 5월 무렵의 일이다. 14호 수용소 남쪽 지역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고, 그 강을 따라 6m 도로가 나 있었는데, 이것을 15m 폭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됐다. 워낙 공사를 급하게 진행하느라 14호의 全 수감자들이 동원됐다. 당시 상황에 대한 김용씨의 증언.
 
  『관리소 수감자들이 총동원돼 개미떼처럼 붙어서 도로 확장작업을 했습니다. 등짐을 지고, 곡괭이로 돌을 쪼아가며 서둘러 작업을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관리소 본관 건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본관 건물 주위는 밤에도 대낮같이 불을 켜 놓아 쥐새끼 한 마리 기어가는 것까지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여자 수감자들을 볼 수 있었어요. 여자들도 못 먹어서 그런지 유령의 모습이더군요. 그런데 제가 작업했던 곳에서 약 3m 떨어진 곳에 키가 크고 눈이 파란 서양인 세 명이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외국인의 나이를 70세 전후, 키는 180cm 정도로 컸으며 허리가 휘어 구부정한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6·25 당시 미군이나 영국군 포로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외국인들을 전쟁포로라고 믿는 근거는 같은 내무반에 근무하던 인민무력부 소장 출신의 김재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굴진조장이었던 김재근의 설명에 의하면 14호에 수감된 미군 포로들은 장진호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는데 김일성이 「너희들이 빼앗으려던 북조선 땅이 얼마나 발전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라」 하는 교시를 내려 외국인 포로를 수용소에 잡아놓고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다고 하더군요』
 
  기자는 김용씨에게 수용소에서 목격한 외국인이 미군 혹은 영국군 포로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김씨의 답변.
 
  『도로 작업장에서 작업할 때 김재근이 외국인 세 명과 눈인사를 나누며 뭔가 짧게 이야기를 주고받더군요. 작업이 끝나고 김재근에게 「외국인들의 존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김재근은 자신이 무진2갱으로 오기 전에 수용소 내의 다른 작업장에서 외국인 수십명과 함께 일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들로부터 그들이 미군 포로, 영국군 포로이며 대부분이 장교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겁니다. 그가 도로 작업장에서 만났던 미군 포로가 장진호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장교라는 사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알게 된 내용입니다』
 
  김씨는 서울에 귀순한 이후 14호 수용소의 미군 포로 존재와 관련하여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들에게 같은 내용을 증언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안명철씨는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22호 수용소에서 생체실험을 하는 사례, 그리고 생체실험 전담부서인 국가보위부 제3국의 존재에 대해 증언한 바 있다. 그런데 김용씨는 『수용소에서 생체실험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반면에 14호 수용소에는 의문의 지하시설이 있는데, 이것이 核 관련 시설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의문의 지하시설
 
 
  김용씨가 1995년 5월에 참여했던 도로 확장공사는 대동강을 끼고 뻗다가 산골 계곡지역으로 휘어져 나갔는데, 그 길을 따라 직진하면 거대한 지하시설이 나타난다고 한다. 수감자들이 사흘간에 걸쳐 도로 확장공사를 마치자 그날 새벽 2시 그 길을 따라 거대한 철제 시설물에 위장용 얼룩 방수포를 씌우고 무장병력의 삼엄한 호위 아래 대형 트레일러 15대, 대형 냉동차량 5대가 지하시설 쪽으로 들어갔다.
 
  이 시설이 核 관련시설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김용씨가 1995년 대동강 건너 18호 수용소로 이감된 후의 일이다.
 
  18호 수용소에는 영변 원자력 시설에 근무하다 수감된 김종훈(당시 나이 42세)이라는 수감자가 있었다. 그는 사회에 있을 때 술을 좋아해 술을 마시고 상관에게 행패를 부리다 체포됐는데, 일반 교화소에 수감하면 비밀유지가 어려울 것을 우려하여 18호 수용소로 끌려왔다는 것이다.
 
  14호와 18호는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김용씨가 도로 확장공사를 할 무렵 김종훈은 마침 18호쪽 대동강변에서 돌로 제방을 쌓는 호안공사에 동원돼 대형 트레일러가 지하시설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김종훈은 트레일러에 실린 물건을 보고는 『저건 영변에 있던 원자력 시설』이라는 것을 당장에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김용씨는 김종훈의 설명을 소개하면서 『14호 수용소에 있던 의문의 지하시설은 核 관련 시설일지 모른다』고 증언했다. 그 이유는 14호 수용소를 운영하는 보위원 가족의 신생아 중 소아마비나 척추가 휘어진 아이 등 기형아 출산율이 높으며, 보위원들도 14호에 근무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생체실험에 대한 내용을 질문하자 『수용소에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고 내가 국가보위부에 근무할 때 생체실험을 하는 장소로 알려진 평남 평성의 한 실험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평남 평성지역에 국가보위부 생체실험 연구소가 있습니다. 제가 국가안전보위부의 고위 간부 ○○○을 태우고 이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이곳은 인체해부학을 연구하기 위한 동물원, 오른쪽으로는 상표를 인쇄하는 공장이 있는 산골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건물 지하에서는 흰쥐를 많이 길렀고, 건물 앞쪽에는 목장으로 위장을 해놓았더군요. 저는 이 건물 내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정문 앞에 마련된 초대소에 대기했고, 고위 간부만 안으로 들어가 일을 보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갔을 때 호송차에 눈을 가린 사형수 다섯 명을 실어온 모습을 직접 목격했어요. 저들이 무엇 때문에 여기 왔을까 하고 고위 간부에게 물어보자 「이곳에서는 1년에 사형수 열댓 명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생체실험과 화학실험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특수 아지트行은 곧 죽음
 
 
  수용소 내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곳이 구류장이다. 안명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22호 수용소에서는 보위원이나 경비원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는 자, 반항하는 자, 폭동 기도자, 살인 기도, 가축을 죽이거나 생산에 지장을 주는 행동을 한 자 등을 별도로 수감하는 구류장이 있다고 증언했다. 수용 규모는 50명 정도이며, 한번 끌려가면 굶주림과 구타로 대부분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김용씨도 구류장의 존재에 대해 진술했는데, 14호에서는 구류장이란 명칭 대신 특수 아지트(혹은 영창)로 부른다고 했다. 주로 내부규정 위반자, 도주 기도자 등을 끌어가는 것으로 기억했는데, 그는 14호 특수 아지트의 구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도주하다 잡히면 보위원들이 보기에 이 자 혼자만 도주자가 아니라고 판단될 경우 현장에서 사살하지 않고 특수 아지트로 끌고 갑니다. 여죄 추궁을 위해 잡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제가 무진2갱에 있을 때 특수 아지트에 끌려간 자들이 서너 명 있었는데,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수감자들은 「아지트로 끌려가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는 수용소에서 특수 아지트行보다 더 무서운 것이 「급식처벌」이라고 했다. 14호 수용소에서 수감자에게 식사는 통강냉이 삶은 것과 소금을 넣고 끓인 멀건 배추 국이 전부다. 坑內에서 작업할 경우 급식당번이 통을 가지고 가서 강냉이를 받아다 급식을 한다.
 
 
  소똥에 박힌 강냉이알 차지하려 싸우고 이도 씹어 먹는다
 
 
  한 끼 식사량은 강냉이 25알 정도. 반찬은 소금이 전부다. 그런데 급식처벌을 당하면 식사량을 3분의 1로 줄인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광차에 돌을 실어 200m 정도 밀고 나가야 하는데, 먹지 못해 힘이 없으니 광차가 뒤로 밀리게 됩니다. 그러면 작업에 지장을 준다 해서 급식처벌을 당하지요. 저도 사흘간 급식처벌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보위원이 급식반장에게 와서 「누구 누구 급식처벌」 하고 말하면 배급량을 3분의 1로 줄입니다. 배급 받은 강냉이를 세어 보니 8~9알에 불과하더군요. 이것 먹고 중노동을 하자니 배가 고파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뱃가죽이 등에 가서 달라붙는 것 같지요. 순식간에 강냉이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혹시나 저 동무가 나를 동정하여 한두 알 주지 않을까」 하고 남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처량한 신세에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수감자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 소들의 배설물에 박힌 강냉이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고 박는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안혁·강철환씨나 안명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이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으며, 수용자의 80%가 펠라그라병(단백질 부족증)에 걸려 있는 상태라고 한다. 김용씨도 이들과 똑같은 증언을 했는데, 김씨는 14호 수용소에서는 펠라그라병을 「개병」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15호 수용소에서 쥐를 잡아 먹은 내용을 질문하자 김용씨는 『쥐를 잡아먹을 정도면 그나마 행복한 편』이라고 말했다.
 
  『14호 수용소에는 쥐를 잡아 먹고 싶어도 씨가 말랐는지 거의 보이지가 않더군요. 산골 지역이라 가끔씩 뱀이나 벌레 등을 잡아 먹은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잡아 먹다 보위원에게 들키면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목욕을 거의 못해 몸에 이가 많은데, 수감자들은 이도 고기라면서 그냥 죽이지 않고 입에 넣어 씹어먹습니다』
 
  김용씨는 수용소에서 굶어 죽을 확률이 높은 사람은 대부분 수감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자와 노약자, 병자들이라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끌려오면 처음 1년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요. 사회에서 먹던 습관 때문에 음식의 양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감된 지 1년을 못 넘기고 굶어 죽거나, 기력이 없어 작업 도중에 사고를 당해 죽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저도 처음 수용소로 끌려갔을 때 처음 1년간은 너무 배가 고파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 고통이 극에 달해 자살할 결심을 한 것이 수십 번도 넘어요. 한번은 제가 굶주림 때문에 빈사상태에 빠지자 굴진조장 김재근이 자기 배급량 전부를 저에게 주면서 「이것 먹고 힘내라」고 하더군요. 김재근은 인정이 있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런 현실을 잊기 위해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자살하기 위해 광차를 일부러 탈선시켰는데 그만 달리는 가속도에 의해 광차보다 먼저 몸이 튕겨 나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수감자들은 지나가는 광차에 일부로 치여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단순 사고사로 처리한다. 수용소에서 자살은 금지되어 있고, 자살 미수자는 반역자로 몰려 처형된다. 수용소는 죽을 권리마저 박탈당한 공간인 셈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오랜 기간 생존한 수감자들은 나름대로 적은 양의 강냉이만 먹고도 생존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을 많이 먹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굴진조장이었던 김재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더군요. 절대 물을 많이 먹지 마라. 목이 마르면 소금 탄 물을 한 모금씩 여러 차례 나눠 마셔라. 배가 고프다고 해서 물을 많이 먹고 작업장에 나오면 금방 탈진해 죽는다. 또 절대 옆 사람 밥그릇을 넘보지 마라. 나에게 주어진 양만 가지고 내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정 배가 고파서 견디기 힘들면 소금을 한 알씩 먹어라.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김일성 사망 소식 알았다면 폭동 났을 것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에게 지급하는 물품은 한 달에 한 번 500g의 소금과 정어리 비누 반토막이 전부다. 이 소금으로 반찬용, 그리고 양치용으로 사용한다. 또 일을 잘했을 경우 연간 한두 차례 대두박 기름 짜고 남은 찌꺼기 한 조각을 特食(특식)으로 줄 때가 있다.
 
  수용소에서는 소금이 귀해 훔쳐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금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수감자들은 잘 때 손에 움켜쥐거나 소금봉지를 사타구니 사이에 넣고 자야 할 정도라고 한다.
 
  김용씨가 수용소에 있을 때 김일성이 사망했다. 그런데 김씨는 김일성 사망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김일성이 죽던 날 수용소에는 비상이 걸려 보위원과 경비원들이 평소에 쓰지 않던 군복과 철모에 위장망까지 치고 돌아다니며 몰아치는 바람에 전쟁이 난 줄 알았다고 한다. 김용씨는 『만약 김일성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수용소 내부에서 큰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명철씨는 22호 수용소의 경우 「대건설 대상」이라 하여 수감자들을 지하갱도 작업에 동원한 사실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바 있다. 이 내용에 대해 묻자 김용씨는 『대건설 대상이란 말은 처음 들어본다』면서 『14호, 18호 수용소에도 지하갱도 작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상당수였다』고 말했다.
 
  『14호와 18호 수용소에는 10년 넘게 지하갱도만 파다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18세 되던 해에 끌려가 함경남도 해안가인 어랑지구 일대에서 15~18년간 지하坑道 작업만 하다 온 사람도 있었어요. 그것이 무엇을 위한 지하갱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작업이 완료된 후 일부는 지하에 사람을 묻어 죽이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기자는 金씨에게 『지하坑道 작업자 중에 남침용 땅굴작업을 했던 사람은 없었는가』라고 묻자 『그런 내용은 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
 
  수용소에서의 하루 일과는 새벽 5시에 시작된다. 5시에 기상하여 6시까지 식사를 마친 후 6시30분에 대열점검이 시작된다. 점검이 끝나면 7시에 작업장에 진출, 입출갱 몸수색을 하게 된다. 몸수색이 끝나면 주 1회씩 여죄 연루 여부를 자술하는 자술서 작성 시간이 있다.
 
  수감자들이 사회에서 저지른 범죄를 자백할 경우 약간 편한 작업장으로 배치를 해준다고 유혹한다. 때문에 미해결 살인사건이나 反음모사건, 쿠데타 기도사건 등이 탄로나 처벌되는 사례가 간혹 발생한다고 한다. 중요한 미해결 사건, 反음모사건을 밀고할 경우 탄광처럼 가혹한 노동현장에서 광주리를 만드는 작업장으로 옮겨주는 경우도 가끔씩 있었다고 기억했다.
 
  본격적인 작업은 아침 8시부터 시작돼 12시까지 계속된다. 12시~12시30분까지 점심식사, 12시30분부터 오후 작업이 개시되어 저녁 8시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오후 8시에 작업이 종료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작업계획에 따른 노동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보통 밤 11시까지 하루 평균 15시간 정도 계속되는 것이 보통이다. 김용씨의 말을 들어본다.
 
 
  사소한 부상에도 목숨 잃어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연대책임으로 급식처벌을 당하거나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합니다.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업량을 채우려고 기를 쓰고 일을 하다가 피를 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업의 질보다 양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작업량을 채우기 위해 엉성하게 할 경우 「너는 당과 인민에게 불만이 많은 새끼로구나」 하고 해독분자로 몰려 죽음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죠』
 
  하루 작업이 끝나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자정~새벽 1시 정도. 이때쯤이면 숨쉴 기운조차 없어 지푸라기 쓰러지듯 쓰러져 잠이 든다. 하루 작업이 끝나 나무 침상에 누우면 『아, 겨우 또 하루를 살아서 넘겼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14호 수용소에서는 일체의 방송이나 신문, 출판물 등을 소지하거나 듣고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작업성과가 좋다고 인정될 경우 간혹 구내 방송차가 갱 입구에 와서 「모란봉」 「능수버들」과 같은 노래를 한 곡 틀어주는 것이 최고의 배려였다.
 
  탄광은 작업의 특성상 갱도 붕락, 칠흑같은 坑에서 鑛車(광차) 운행 도중 충돌사고, 발파로 인한 붕괴 등 부상 위험이 상존하는 곳이다. 수용소 내에는 병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 도중 부상을 당하면 자연치유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극심한 영양부족 상태에 있는 수감자들은 사소한 부상을 당해도 회복을 못하고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환자가 발생하면 위생원이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상태를 살펴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소연하면 위생원들은 환자를 발로 툭툭 차면서 「이 새끼 급식처벌해야겠구만」 하고 말하면 환자들은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작업장으로 갑니다. 급식처벌을 당하면 굶어서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또 발목이 삐어 통증이 심하다고 하면 발로 툭툭 차면서 「이 새끼 아프기는 뭐가 아픈가? 뼈들이 제자릴 잡느라 그런 거야. 죽을 병 아니니까 일어나라우」 하고 말합니다. 통증이 심한 환자들에게는 「이 새끼 영원히 쉬게 만들어 주갔어」 하고 협박합니다』
 
  다만 간염과 결핵 환자들은 별도로 격리시키는데, 이렇게 격리수용을 당한 수감자들 중 병이 완쾌되어 원래 작업장으로 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기억했다. 수감자들이 발병하여 격리수용되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작업인원에 결원이 생기면 호송차로 사람을 싣고 와 작업장에 배치한다. 그중에는 脫北하다 붙잡혀 들어온 사람, 金正日 비판하다 끌려온 사람 등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수감자 동정하는 보위원도…
 
 
  보위원들은 수감자가 죽는 것을 파리가 죽는 것처럼 무감각하게 인식한다. 그들에게 있어 수감자들은 「혁명의 걸림돌이며 철저히 제거되어야 할 혁명의 대상」 「3代를 몰살해야 할 계급적 원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맛을 톡톡히 보여주어야 할 존재」에 해당한다.
 
  만약 수감자들에게 동정하는 보위원이 발견되면 즉시 교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위원들은 비밀리에 동정을 표시하거나 먹을 것을 몰래 가져다 주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다음은 김용씨의 증언.
 
  『새로 배치된 보위원 중 나이 27~28세 정도의 운동 선수 출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감자들에게 약간 동정적이었는데, 말투가 다른 보위원이 쓰는 것과는 좀 다르더군요. 그는 주머니에 사탕이나 먹을 것을 넣어가지고 와서는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어떤 새끼가 주머니에 담뱃재를 넣었어?」 하면서 주머니를 툭툭 털며 먹을 것을 떨구고 가곤 했어요. 또 한 번은 「이 새끼 빨리 뛰어오란 말이야」 하고 저를 부르더군요. 헐레벌떡 뛰어가 손을 뒤로 하고 이마를 땅에 대니까 종이 두 장을 내놓으면서 「이 새끼, 사회 있을 때 뭘 했는지 다 적으라우」 하면서 먹을 것을 슬쩍 던져주고 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보위원은 사흘 후 포악한 성격의 보위원으로 교체되었다. 이런 사례를 설명하면서 보위원 내부에도 밀고자 혹은 감시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김용씨는 추측했다. 보위원들은 『내가 너희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심정으로 수감자들을 가혹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사회안전부 18호 적대범 관리소
 
  대동강 건너 18호 관리소로 이감되다
 
 
  1993년 8월부터 시작된 김용씨의 14호 수용소 생활은 2년여 계속된다. 1995년 10월의 어느 날 그는 담당 보위원에게 호출당했다. 그는 『내가 뭘 잘못했기에 부르는 것일까』 하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수감자들이 보위원에게 호출당하면 무슨 험한 일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보위원은 「14호 관리소에서 보고들은 일체의 사실에 대해 한 마디라도 발설하는 경우에는 개처럼 끌어다 처형한다」는 내용을 구술하더니 그대로 받아쓰라 하고는 손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보위원은 『김정일 장군님의 광폭정책에 의해 18호 관리소로 이감한다』면서 『18호 관리소에 가서도 생활을 잘하길 바란다』고 훈시했다.
 
  곧바로 호송차에 태워져 본관 건물에서 대동강 쪽으로 뻗은 직선도로를 따라 달렸다. 그제서야 김용씨는 두리번거리며 14호 수용소의 대략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도로확장 작업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2년간 무진2갱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따라서 14호 수용소 전체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구경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증언.
 
  『대동강에는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강 양편에 빨간 깃발이 꽂힌 지역을 가로질러 잠수교와 비슷한 수중교가 놓여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이 다리가 물에 잠겨 있었다고 하는데 제가 18호로 이송될 무렵에는 날이 가물어 다리 윗부분이 강물 위로 노출되어 있더군요』
 
  강을 건너 18호 수용소로 들어서는 순간, 김씨는 저주스러웠던 2년여 세월이 영화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그러나 18호 수용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고난의 세월을 생각하니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14호 수용소는 서울이 한강을 가운데 품고 강북과 강남으로 구성되듯 대동강을 가운데 두고 강북쪽이 14호, 강남쪽이 18호 수용소로 구분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전체가 14호 수용소로 운영되었는데 김정일 방침에 의해 대동강을 중심으로 절반을 갈라 남쪽을 사회안전부 18호 적대범 관리소로 독립시켰다고 한다. 김용씨는 14호와 18호 수용소의 넓이는 각각 가로 70리(약 28km), 세로 25리(약 10km), 넓이 약 280㎢ 정도로 추정했는데 18호 수용소가 14호보다 규모가 약간 큰 것으로 기억했다.
 
  18호 관리소는 사회안전부에서 운영하던 관리소들 중 적대범들을 추려서 수용했는데, 구성 인원 중에 1代는 대부분 죽고 현재는 2~3代가 수감되어 있었다. 수감자들 중 60세가 넘은 할머니들은 대부분이 과부였다. 그 이유는 남자들은 14호 수용소에 분리 수용하고 가족들은 18호로 보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地主 출신, 6·25 때 치안대 활동자, 국군이나 미군 협조자, 反음모사건 연루자, 김정일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곁가지 등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대부분 학식이 높고 경륜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수감자들은 북한의 기득권자 입장에서 보면 말살시켜야 할 적대분자들이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유사시 북한 체제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총폭탄이 될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18호 관리소의 수용자 수는 노동력을 가진 노력자가 3만명, 어린이와 늙은이 2만 등 총 5만명 정도로 추산했다. 이 내용은 18호 관리소에 수감됐다가 1994년 귀순한 姜成山 북한 총리의 사위 康明道(강명도)씨의 증언과 일치한다.
 
 
  14호에 비하면 18호 수용소는 천국
 
 
  14호에서 김용씨를 호송해 온 보위원은 18호 수용소 행정관리과에 김용씨와 그의 서류 일체를 인계함으로써 18호 수용소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영등갱의 굴진공으로 배치됐는데, 18호 수용소로 간 지 보름 만에 호출을 받았다.
 
  영문을 모르고 불려가자 그곳에는 평양에서 온 국가보위부 8국장 장길남이 와 있었다. 그는 金씨에게 『네가 14호에서 18호로 이감된 것은 국가보위부 고위 간부 ○○○이 힘을 써 준 덕분』이라면서 『○○○ 동지의 배려를 잊지 말고 열심히 일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또 담당 보위원에게는 『이 자는 과거 국가보위부에 근무하던 자이니 잘 부탁한다』는 말도 했다.
 
  그는 사회에 있을 때 자신을 총애했던 고위 간부의 호의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김용씨는 굴진공에서 일이 보다 수월한 鑛車 수리조로 배치되어 한시름 덜게 되었다. 鑛車 수리는 탄광 노동 중에서 노동강도가 가장 약한 편이었다.
 
  김용씨는 18호에 와서야 14호에 수용됐던 사람 중 그동안 네 명만이 18호 관리소로 이감된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중 두 명은 김씨가 18호 수용소에서 직접 만났는데, 그중 한 명의 아버지가 과거에 중앙당 재정경리부 부국장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14호에서 18호로 이감되는 것은 대단한 혜택이나 다름없었다.
 
  수용소 생활을 체험했던 귀순자들은 북한 수용소 중에서도 평남 개천에 위치한 14호 수용소가 가장 상황이 열악하고 참혹한 것으로 증언한 바 있다. 강철환씨는 15호(함남 요덕) 수용소에 있을 때 김용씨가 수감됐던 14호 수용소에서 15호의 혁명화구역으로 이송되어 온 정치囚가 있었음을 증언했다. 그 수감자는 요덕으로 옮겨온 순간 『살았다. 14호에 비하면 여기는 천국』이라고 기뻐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18호 수용소는 14호에 비해 많은 것이 달랐다. 우선 옷차림도 14호보다는 한결 나았고, 거리에서 보위원과 마주쳐도 14호처럼 뒤돌아서 무릎 꿇고 이마를 땅에 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뒤돌아서서 머리만 숙이면 되었다.
 
  14호의 경우 산에 올라가 나물을 뜯거나 밤을 줍다 걸리면 도주분자로 간주되어 맞아죽거나 현장에서 사살당했는데, 18호에서는 위수구역 안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산에 올라가 산나물도 뜯어먹을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었다.
 
  그밖에도 14호에 비하면 여러 가지 혜택도 주어졌다. 교육실에서 가끔씩 수감자들을 집합시켜 TV를 시청하게 하거나 방송을 들을 수 있었고, 각 작업장 입구에는 노동신문이 게시되어 있었다. 안전원들이 필요한 신문 내용을 낭독해 주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일과시간은 14호와 비슷하지만 휴일이 연간 4일(1월1일, 김일성·김정일 생일, 당 창건일)로 늘었다고 한다.
 
  거주방식도 14호의 경우는 남녀를 엄격히 분리하여 내무반에 집단수용한 데 비해 18호에서는 가족들끼리 주거하도록 한 가구당 한 칸으로 된 하모니카 주택을 내주었다. 하모니카 주택은 한 동이 12칸으로 나뉘었는데 식구가 많건 적건 무조건 한 칸씩 방이 배정된다.
 
 
  한 달에 30원씩 월급 지급
 
 
  14호에는 상점이 없었으나 18호 수용소 내에는 상점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서는 소금, 성냥, 국사발과 밥사발, 손톱깎이 등을 판매한다. 물건은 사탕, 술 등 여러 가지를 진열해 놓았지만 이것은 전시품일 뿐 구입할 수 없는 물건이다. 게다가 한 달에 30원의 노임이 지급되었다. 월급에 대한 김용씨의 증언.
 
  『18호에서는 한 달에 30원씩 노임을 현찰로 지급한다고 규정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노임을 타는 사람은 100명 중 세 명이 될까 말까 합니다. 작업장에 세 번 지각하면 월급이 나오지 않고, 5분 이상 지각하면 식량 배급표를 주지 않아요』
 
  안명철씨가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22호 수용소에서도 수감자들에게 연간 500원 정도 돈을 주었다고 한다. 安씨는 수용소 내에서는 돈이 있어도 쓸 곳이 없기 때문에 보위원들이 암거래를 통해 수감자들에게 군복이나 신발을 몰래 팔고 돈을 갈취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일부 지역에서 월급도 주고, 생필품을 파는 상점도 존재하는 것은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일종의 집단농장이나 자치탄광이라고 위장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추측된다.
 
  이처럼 14호에 비해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졌으니 김용씨가 18호로 이감된 것은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김정일의 광폭정치」에 은혜를 입은 셈이다. 김용씨도 18호 수용소의 현실을 체험한 순간, 『살았다. 여기서는 잘만 하면 목숨을 잃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김용씨는 18호에 와서야 그의 어머니가 18호 관리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태어나서 40년 만에 처음으로 한 집에서 어머니와 생활하게 되었다.
 
  그동안 수용소 생활을 체험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정치囚 수용소는 죄를 지은 당사자만 잡아다 수용소에 수감하는 것이 아니라 연좌제에 의해 부인과 아이들은 물론 부모까지 3代를 잡아다 수용시킨다. 이것은 『말 한번, 행동 하나 잘못했다간 가족 3代가 몰살당한다』는 공포심을 유발시켜 주민을 통제하기 위한 고도의 체제유지용 폭압장치인 셈이다. 안명철씨는 정치囚에게 연좌제를 적용하는 이유는 『정치범은 3代를 멸종시키라는 김일성의 교시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김용씨가 수감될 당시는 자신의 부인과 강제 이혼을 시켜 부인과 가족들은 수용소에 끌려오지 않았으며, 호적을 위조한 김용씨는 14호에, 그의 어머니는 18호에 분리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례를 보면 최근 들어 철통같이 운영되던 연좌제 시스템이 일부 느슨하게 운영되는 등의 변화가 감지되기도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안명철씨는 『가혹하게 연좌제를 실시한 결과 정치囚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수용능력이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용씨는 14호 수용소가 남녀를 철저히 분리 수용하는 이유는 『반동의 씨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혁명화 작업반
 
 
  18호 수용소에는 탄광뿐만 아니라 시멘트공장, 도자기공장, 장독 만드는 독공장, 식료공장이 있었고, 큰 규모의 별장(前 보위부장 김병하의 별장)도 있었다고 한다. 또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도 한 곳 있는데, 보위원들이 권총을 차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14호의 경우 가족이 들어오면 남자는 따로 수용시키고 열두 살 미만의 어린이들이 있는 경우 인민반 4학년까지 어머니가 데리고 있는다. 4학년이 되면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엄마는 엄마대로 서로 분리시켜 일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게 한다.
 
  반면 18호의 경우 아이들은 중학교까지 교육을 시키며, 가족과 함께 代를 이어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하며 인권유린을 당한다.
 
  북한 정치囚 수용소를 체험한 귀순자들은 수용소 생활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굶주림이었다고 증언한다. 15호 수용소 혁명화구역 생활을 체험했던 안혁·강철환씨의 기억에 의하면 요덕수용소 「가족세대」(일가족 모두가 끌려와 함께 수용된 지역)의 식량배급량은 성인의 경우 하루 1인당 主食으로 강냉이 550g(사회 일반 노동자 600g), 副食으로 소금과 週1회 도토리 된장 한 숟갈을 배급한다. 그러나 작업태만 등의 이유로 배급량을 공제하기 때문에 매월 15일이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 산나물, 풀뿌리, 나무열매 등으로 연명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독신중대」에 수용된 범죄 당사자는 하루 강냉이 360g과 소금을 제공받으며 작업태만을 이유로 90g을 제하기 때문에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에 빠져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김용씨가 체험했던 14호 수용소에서는 식량배급이 한 끼에 강냉이 20~30알 정도였다. 18호의 경우 14호보다 사정이 나아 규정에는 하루 550g의 강냉이를 배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양을 다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한 달에 강냉이 약 4kg(열흘치 분량)만 배급받았기 때문에 극심한 굶주림은 14호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14호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산에 올라가 풀이나 나물을 뜯어다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김용씨의 증언.
 
  『만성적인 식량부족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 나무껍질이나 풀을 뜯어다 죽을 쑤어 먹습니다. 그런데 봄이 되면 풀독이 유난히 심해서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온몸이 퉁퉁 붓습니다. 보위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이 새끼들 살이 퉁퉁 찌는 것을 보니 먹고살 만한 모양이구만」 이런 말을 하기도 하지요』
 
  안명철씨는 북한 수용소 중 15호(함남 요덕) 수용소만 유일하게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으로 이분화되었으며, 나머지 수용소는 모두가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런데 김용씨의 증언에 의하면 18호 수용소에도 몇년간 수감생활을 한 후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혁명화구역, 그리고 외부 출입이 가능한 해제민구역이 존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다음은 김용씨의 증언.
 
  『18호 수용소에는 관리소 한쪽을 봉쇄하고 중앙당이나 국가보위부, 사회안전부, 대사급 등 지도층 간부들이 과오를 범했을 때 들어와 일하는 「혁명화 작업반」이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약 30명 정도가 독신으로 수용되어 있었어요. 이들은 일반 교화소나 탄광에 집어넣으면 여론이 나빠지니까 18호 관리소의 일부를 혁명화 작업반으로 만들어 이곳에 수용한 겁니다. 이들이 수감자들과 대화하면 반동의 물을 먹는다 하여 일체 18호 수용소의 일반 수감자들과 접촉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일정 기간 수감된 후 의식과 사상이 혁명화되었다고 판단되면 사회로 복귀합니다. 제가 18호 수용소에 있을 때 康明道씨가 혁명화 작업반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황장엽씨 친척 18호 수용소에 잡혀와
 
 
  김용씨는 18호 혁명화 작업반에는 강명도씨 뿐만 아니라 중앙당 부부장 아들, 황해남도 道黨 책임비서 아들, 항일투사 유경수 아들 유홍근이 아편중독자로 잡혀와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3년여 수감생활을 한 후 한 계급씩 강등되어 사회에 복귀했다고 기억했다.
 
  또 18호 수용소 내에는 다른 수용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해제민구역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진술했다. 해제민구역은 기존의 수용소 생활 체험 귀순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던 곳이다. 김용씨의 증언.
 
  『이곳은 과거 지주나 치안대 활동을 했던 집안의 가족들 중 모범을 보인 수감자를 연간 한두 명 정도 김정일이나 김일성 생일을 기해 노동에서 해제시켜 해제민구역으로 이주시킵니다. 이들은 외출증을 발급받아 근처 장마당까지 왕래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며, 제한된 방법이긴 하지만 사회의 친인척과 우편물을 주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해제민구역 수감자들에겐 4월15일 김일성 생일에 선물 술을 줍니다. 말하자면 북한 공민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지요』
 
  해제민구역으로 가는 것은 커다란 은전이 아닐 수 없다. 수감자들은 해제민구역으로 옮겨갈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고된 나날을 이겨나가며, 보위원들의 지시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해제민구역으로 가려면 1대, 즉 장본인이 죽고 2~3代만 남았을 때에 해당되는데, 2~3代들이 해제민구역으로 가기 위해 아버지를 굶겨 죽이거나 비밀리에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해제민구역에 있던 사람이 규정을 세 번 어기면 다시 관리소 구역으로 내쫓겨 노동 현장에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김용씨는 아주 특수한 사례로 18호에 수감됐던 일가족이 사회에 복귀한 사례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수용소에서 알고 지내던 귀국자 출신 김명빈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축구선수였고 조선영화기록소 1호 촬영기사로 김정일의 총애를 받다가 당정책 비난으로 일가족이 다 끌려와 수감됐어요. 그런데 일본 친척들이 70~80만 달러의 돈을 당에 기부하는 바람에 김정일 방침에 의해 김명빈 일가족이 풀려나 강원도 원산시의 前 직장으로 복귀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김용씨는 18호 수용소 수감자 중 일본에서 온 재일교포 북송자(북한에서는 귀국자라 부름) 가족 12세대가 수용되어 있으며, 그 중 현서일이란 이름을 기억했다. 그는 1~2차 귀국자 중 70~80%가 간첩 혐의로 수용소에 수용됐다고 증언했다.
 
  『현서일씨는 도주 기도로 어머니와 일가족이 수용됐습니다. 일본에 살다 북조선으로 온 귀국자들은 기회만 나면 일본으로 탈출을 시도했는데 성공한 적은 별로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1980년에는 귀국자 70명이 원산에서 배를 타고 도주하다 붙잡혀 「공화국 탈출죄」라는 죄명으로 전원이 수용소에 수감됐어요』
 
  또 1997년 7월에는 황장엽씨 부인과 아들을 제외한 일가 친척 여러 집안이 18호 수용소로 끌려온 사실도 증언했다. 황장엽씨 일가 친척은 강원도당 책임비서, 중앙검찰소 책임비서였던 피창연의 가족을 포함한 105세대가 대거 수용될 때 같이 끌려왔다고 한다.
 
  이들은 18호 수용소 내에서도 지형이 가장 험한 범골 지역에 수감된 후 그 일대에 감시병을 겹겹이 배치했다. 김용씨는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전해 들은 사실임을 전제로 『황장엽씨 조카(이름 기억 못함)가 18호 수용소에 끌려온 다음날 자살했다』고 증언했다.
 
 
  性的 노리개의 최후
 
 
  김용씨는 18호 수용소에서 자신의 「담당 선생님」이던 김영일이란 보위원을 통해 수용소 내부의 여러 가지 사정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김영일은 14호 수용소에 근무하다 18호로 왔기 때문에 14호 수용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18호 수용소에 와서 김영일에게 전후좌우 사정을 듣고서야 14호 수용소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14호 관리소의 경우 노력자(노동력이 있는 성인 수감자)가 1만5000명(어린이 및 노약자 수는 정확히 기억 못함)이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1990년 14호 수용소에서 폭동이 일어나 1500명의 수감자가 사살된 사실도 김영일로부터 확인한 내용이다. 다음은 김영일을 통해 들은 14호 수용소 여성 수감자들의 이야기.
 
  『14호 관리소에서는 간부 초대소라는 것이 있는데 이곳은 평양에서 부부장(고위 간부) 급이 내려오면 숙식하는 일종의 특각(별장)입니다. 평양에서 간부들이 내려오면 여성 수감자 중 얼굴이 반반한 21∼25세 사이의 처녀들을 선발하여 목욕을 시킨 후 간부들에게 바친다고 합니다. 간부들은 이런 여성들을 온갖 性的 노리개로 삼은 후 비밀유지를 위해 「도주분자」로 몰아 비밀리에 죽인답니다』
 
  14호 수용소는 남녀를 엄격하게 분리 수용하기 때문에 임신 사건이 없지만 18호에서는 수용소의 허락을 맡아 수감자들간에 결혼이 허용되며, 결혼한 사람들이 출산하여 아이를 안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과부와 홀아비 간에 결혼이 허용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여성이 임신을 하면 수감자 중에 소파수술을 전문으로 해주는 아주머니가 아이를 지워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결혼 방식이나 임신녀 출산 사실은 안명철씨가 증언한 22호 수용소의 상황과 비교하면 그나마 관대한 편이다. 22호의 경우 폭동이나 소요 방지를 위해 보위원들의 정보원 노릇을 잘 하거나, 생산량이 월등히 뛰어난 남녀를 선발해 일년에 한두 쌍 정도 선전용으로 결혼시킨다고 했다. 특히 22호 수용소의 경우 부부간의 출산, 수용소 내에서의 결혼으로 인한 출산을 제외한 그밖의 모든 임신과 출산은 엄격히 금지시키며, 임신 여성이 발견되면 남녀를 함께 비밀처형시킨다고 한다.
 
  이처럼 심하게 남녀간의 성생활을 통제하다 보니 한 가족의 오누이간, 母子간에 성관계를 맺는 등 가족 윤리가 파괴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고 증언했다.
 
  가족간의 성관계에 대한 내용을 질문하자 김용씨도 『18호 수용소에도 오누이간에 성관계를 맺다가 임신이 되어 죽음을 당한 사례가 더러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18호 수용소에서는 얼굴이 고운 여성 수감자들이 보위원이나 안전원들의 性的 노리개로 이용되다 죽음을 당한 사례가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8호 수용소에는 과거 김병하 보위부장의 별장이 있었습니다. 건물이 워낙 넓어 한쪽은 보위원에게 제공되는 술공장으로 이용됐고, 나머지는 기생파티하는 곳으로 이용됐습니다. 외부에서 간부들이 오면 얼굴이 고운 여성 수감자들을 깨끗이 목욕시켜 데려다 노는 장소였지요. 여성 수감자 중에 황금순이라는 처녀가 얼굴이 가장 고왔습니다. 어린아이 때 부모와 함께 끌려왔는데, 수용소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잘생겼는지 사내들이 홀딱 반할 정도였어요. 황금순은 18호 관리소장 강창현의 전문 위안부로 자주 불려갔습니다. 그런데 김유배라는 안전원이 황금순을 좋아하여 강간했는데, 그녀가 자기 말을 잘 듣지 않자 강가에서 때려 죽이고는 대동강에 시체를 빠뜨렸습니다. 그 현장을 같은 지역에 살던 김종훈이란 수감자가 몰래 보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서 알게 됐어요』
 
  여성 수감자들이 수용소를 운영하는 보위원이나 안전원들의 性的 노리개로 이용되는 현실은 안명철씨가 밝힌 22호 수용소의 장면과 거의 비슷했다.
 
 
  500가구 중 70~80건의 죽음 목격
 
 
  김용씨는 18호 수용소의 영등갱에 배치됐다. 14호와 마찬가지로 탄광에서 석탄을 생산하는 것이 그의 과업이었다. 일과는 14호와 동일하여 새벽 5시 기상, 6시30분 대열점검, 7시 작업장 진출 및 몸수색. 그리고 밤 11시까지 고된 노동이 이어졌다.
 
  14호와 차이점이 있다면 월요일 아침에 조직별로 모여서 회의를 하는 직맹생활 총화 시간이 있고, 토요일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인덕정치와, 두 사람은 위대한 분이라는 내용을 가르치는 덕성학습 시간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14호 수용소에서는 양식을 워낙 적게 주고 고통을 주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생산계획이라는 것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18호에 오니까 생산계획을 많이 따지더군요. 18호의 경우 하루에 5m 굴진을 보장하라고 합니다. 무조건 하루에 5m 굴을 파야 하는 겁니다』
 
  만약 수감자가 작업장에 나오지 않으면 식량공급을 중단하기 때문에 굶어 죽는다. 보위원들은 『일하기 싫은 놈들은 영원히 쉬도록 해줄 테니 나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한다. 하루만 작업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체제 반항자」로 간주돼 족쇄를 채워 특수 아지트에 잡아넣는다고 한다.
 
  14호 수용소보다는 상황이 나아졌지만 18호 수용소도 혁명화 작업반과 해제민구역을 제외하고는 한번 들어오면 영원히 사회로 나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이곳도 엄격한 통제가 가해지는 수용소이기 때문에 김용씨는 수감자들이 무시로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18호 수용소 영등갱 지구에는 500여 가구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죽은 사람을 직접 목격한 것만 70~80건 정도로 기억했다. 이것은 『13호와 22호 수용소에서는 하루 평균 5~6명씩 죽어나갔다』는 안명철씨의 증언과 비교하면 그나마 약간 나은 편이다.
 
  14호 관리소에 비하면 천국이라고 생각하던 김용씨의 생각은 3개월이 못 돼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그는 『18호 수용소도 14호나 마찬가지로 죽음이 일상화된 지역이었다』고 말한다.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먹을 것이 없으니 산에 올라가 풀뿌리, 소나무 껍질, 잣나무 껍질을 벗겨서 먹습니다. 그러다 보니 산의 나무란 나무는 다 껍질이 벗겨져 말라죽지요. 게다가 탄광에서 작업할 때 카바이트가 모자라 칸델라 불도 잘 켜지 못합니다. 자연히 깜깜한 곳을 더듬더듬하면서 작업하다 광차에 치여 죽고, 동발이 무너져 죽기도 합니다. 착암기가 없어 정대로 바위를 까서 굴진작업을 하는데, 굴진 도중 갱도가 무너져 개죽음을 당하는 수감자들도 많습니다』
 
  김용씨는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가 죽기 전에 18호 수용소에 갇혀 있었으며, 그가 죽어서 묻힌 장소가 영등갱 주변이었다고 증언했다.
 
  극심한 굶주림과 가혹한 노동에 지친 수감자들은 사회에서 부르던 노래에 가사를 바꿔 부르며 지친 심신을 달랜다고 한다. 김용씨는 『14호에서는 노래를 부르다 잡히면 맞아죽지만 18호에서는 노래 부르는 것은 보위원이나 안전원이 보고도 못본 체했다』고 말했다. 그는 18호에서 부르던 노래 중 가사가 기억나는 것으로 「추도가」에 가사를 붙인 노래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산에 나는 까마귀야 관리소생(수감자)보고 울지 마라/몸은 비록 잡혔어도 그의 정신은 살아 있다/내가 벌써 집 떠난 지 30년이 흘렀건만/30년간 흘린 눈물 모으면 한강수라>
 
 
  목숨 걸고 보위원 테러하기도
 
 
  김용씨는 또 수용소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까마귀가 많았다고 증언했다. 까마귀가 많은 이유는 죽어 나가는 시체가 많기 때문에 까마귀들이 그것을 뜯어 먹기 위해 몰려든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래서 수용소에서는 까마귀를 소재로 한 우화들이 많이 떠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까마귀가 우는 소리를 빗대어 『까마귀도 관리소생들이 너무 불쌍해서 집에 「가아가아」 하고 운다』고 말한다.
 
  수감자들은 가혹한 노동강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坑內에서 조명용으로 들고 다니는 칸델라는 길죽한 방망이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바닥에 세워 놓고 앞으로 넘어져 두개골을 깨서 자살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김용씨의 증언에 의하면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에 있던 사람들은 고통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끌려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고통스런 삶을 살다보면 악에 바쳐 보위원을 상대로 테러사건이 빈발한다. 보위원이나 안전원들은 혼자서 산길을 못 다니고 반드시 2人1組로 움직이며, 유사시를 대비해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소지한다고 한다. 김용씨는 통제가 심한 14호보다 오히려 통제가 약간 느슨한 18호 수용소가 반항심이 더 강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18호 관리소에는 교양실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끔 사람들을 모아 텔레비전도 보여주고 라디오도 들려주면서 교양을 시키는데, 이 방의 벽에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걸려 있어요. 한번은 이 초상화 액자가 박살이 나고, 그 안에 있던 金父子 사진이 갈기갈기 찢겨진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坑內에서는 굴진작업, 발파작업 과정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한다. 그런데 불량이 발생해 다이너마이트가 터지지 않을 경우 수감자들이 몰래 이것을 숨겨 두었다가 폭발물로 사용해 보위원이나 감독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1997년 2월의 일로 기억됩니다. 누군가가 불발된 다이너마이트를 모아 두었다가 坑內에서 광차를 끌어올리는 권양기 줄을 폭파시켰어요. 그날은 마침 작업 독려차 관리소장과 갱장 등 간부들이 갱에 들어와 있을 때입니다. 힘겹게 끌려 올라오던 여러 양의 광차가 권양기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아래로 곤두박질하여 간부와 보위원, 감독 등 여러 명이 부상당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범인을 잡지 못해 영구 미해결로 남았다고 한다. 이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입출갱時 몸수색을 철저히 하여 쇠붙이나 다이너마이트를 숨겨 나오는 것을 검사한다.
 
  1997년 1월의 일이다. 작업자들이 坑에 들어가기 전에는 매일 아침마다 대열점검 및 몸수색을 하게 되어 있다. 하루는 몸수색을 하고 坑內로 들어가기 전에 대기하는 과정에서 굴진공 허철호(당시 나이 45세)의 몸에서 담배종이(담배를 말아 피우는 종이)가 발견됐다. 수용자들은 보통 신문지를 잘라서 담배를 말아 피우는데, 허철호가 가진 신문 종이에는 金日成 이름이 크게 씌어져 있었다.
 
 
  탈출자 가족은 나무에 매달아 죽게 방치
 
 
  이를 발견한 갱장은 마치 큰 범죄자를 잡은 것처럼 허철호를 대열 앞에 끌어내 세우더니 『이 새끼는 애비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반동의 새끼』라면서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두들겨 팬 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옆에 있는 나무에 꽁꽁 묶어 놓고 교대로 지키라고 했다.
 
  『당시는 1월이라서 坑이 위치한 산골짜기의 기온은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날씨였습니다. 걸친 것이라고는 걸레 같은 얇은 작업복뿐이었던 허철호는 삽시간에 몸이 얼어붙어 신음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습니다. 坑長은 「이런 놈은 뿌리를 뽑아야 한다」면서 다음날 아침까지 꼬박 24시간을 나무에 묶어 놓았습니다. 허철호는 결국 손과 발에 동상을 입어 진물이 나오고 온몸이 퉁퉁 부어 쓰러졌어요』
 
  허철호가 묶여 있는 나무 앞을 지나치는 囚人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진저리를 쳤다. 그렇다고 그를 동정하면 공범으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그저 마음속으로만 불쌍히 여길 뿐이었다.
 
  체제유지를 위한 고도의 폭압장치인 관리소는 북한 입장에서 보면 국가기밀에 속하는 사안이다. 때문에 관리소 외곽에는 도주 방지를 위해 갖가지 장애물과 경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김용씨가 증언한 18호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설치해 놓은 전기 철조망과 차단장치는 안혁·강철환씨, 안명철씨의 증언내용과 거의 일치했다. 金씨의 증언.
 
  『관리소 경비는 무장경비대 2개 대대가 산 정점에서부터 3m 높이의 고압 철조망을 설치해 놓았고, 그 아래에는 삼각형으로 깊이 3m, 너비 1.5m의 함정을 파놓았습니다. 함정 속에는 송곳 형태의 철근을 촘촘하게 박아 사람이 떨어지면 찔려 죽도록 설치해 놓았어요 그 안쪽으로는 200m 간격으로 높이 5m의 경비초소(망루)가 서 있으며, 초소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경비대들은 2시간 교대로 근무를 서며 그 아래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잠복 초소가 있어 잠복근무를 합니다. 또 위병대가 항상 순찰하면서 봉쇄하고 있다가 수감자들이 위수지역을 벗어나면 경고 없이 현장에서 사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통제시설과 경비를 해도 목숨 걸고 탈출하는 사건이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김용씨는 14호에 있을 때는 탈출을 기도하다 현장에서 사살된 사건이 한 차례 있었지만 18호에서는 종종 탈출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만약 가족 중 한 명이 탈출하면 그가 붙잡힐 때까지 가족들을 나무에 매달아 놓아 대부분 목숨을 잃게 됩니다. 저와 가까운 지역에 살던 한 가족의 세대주가 탈출했는데, 그가 체포될 때까지 부인과 아이 둘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어요. 이처럼 가족들을 참혹하게 죽이기 때문에 수감자들이 가족을 포기하고 선뜻 탈출할 엄두를 못 내는 겁니다』
 
 
  도주하다 붙잡히면 공개총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들어왔다가 成人이 된 수감자들은 사회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도주할 엄두를 못 내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붙잡혀 온 사람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에서 종종 탈출을 기도한다고 한다. 또 아버지의 잘못으로 가족들이 함께 끌려오면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절망 분노하여 아버지를 살해하는 경우도 가끔씩 발생했다고 한다.
 
  이처럼 고도의 통제장치와 가족에 대한 극심한 탄압 때문에 自力으로의 탈출은 기대하기 힘들며, 경비원이나 보위원 등 내부 협조자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었다고 증언했다.
 
  수용소에서 탈출 사고가 나면 1주일간은 수용소 내부를 수색한다. 혹시 물에 빠져 죽거나 산에서 떨어져 자살한 것은 아닌가 하며 내부 수색을 하는 것이다. 보름 동안 수색해도 행방이 묘연하면 사회안전부 교화국 산하에 비상이 걸리고, 20일이 경과해도 찾지 못하면 전국적인 수사가 벌어진다. 이때는 각 도시군의 안전부를 통해 각 인민반에 도주자의 인적사항과 사진 등이 통보된다고 한다. 다음은 김용씨가 증언한 노동당 선전비서 출신 수감자(이름 기억 못함)의 탈출기.
 
  『평북 구성시당 선전비서를 지내던 사람이 가족과 함께 18호에 들어왔는데, 그의 외사촌 동생이 18호 경비분대장이란 사실을 당국이 몰랐습니다. 선전비서는 분대장으로 있던 외사촌 동생을 설득하여 그의 아들을 탈출시켰어요. 아들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적은 편지를 가지고 수용소를 탈출하여 평양까지 잠입해 중앙당 정문에다 그 편지를 뿌린 후 할복하기 위해 배를 갈랐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체포돼 공개총살을 당했는데, 수감자들은 아들의 용기에 감복해 「안중근」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18호 수용소에서는 14호에서 구경하지 못했던 공개처형이 실시됐다는 점이다. 18호 수용소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이동의 자유가 허락되기 때문에 간 큰 사람들은 밤에 몰래 14호 수용소까지 헤엄쳐 건너가 14호 관리소 창고의 물건을 훔쳤다. 한번은 다섯 명의 수감자가 14호에서 물건을 훔쳐가지고 돌아오다 체포돼 전원이 공개 총살당했다고 한다.
 
 
  공개처형 장면 3년간 30번 정도 목격
 
 
  공개처형장은 14호 수용소를 바라보고 있는 대동강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김용씨가 증언한 공개처형 장면은 요즘 수용소 체험 탈북자 강철환씨가 15호(함남 요덕) 수용소에서 체험한 내용과 거의 일치했다. 공개처형자들은 대부분 도주하다 체포된 자, 도주 기도자, 보위원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자 등을 체포하여 특수 아지트(영창)에 잡아 두었다가 수용소 주민을 全員 공개처형장으로 집합시킨 후 처형하는 방식이다. 처형 직전 관리소장이 『반역자 ○○○을 총살형에 처한다』고 판결문을 낭독한 후 처형하는 방식, 총살형을 당한 시체에 돌을 던지게 하는 방식도 15호와 비슷했다.
 
  김용씨는 18호 수용소에서 공개처형은 총살과 교수형 두 가지가 실시됐다고 한다. 총살은 죄질이 약간 가벼울 때, 교수형은 죄질이 무겁다고 판단될 때 행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주자가 붙잡혔을 경우 그가 관리소 구역을 빠져 나갔다가 체포되면 교수형에 처하고, 관리소 내부에서 잡힐 경우 총살형에 처합니다. 어차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고통이 덜하다는 측면에서 죄질이 가벼운 경우 총살형에 처하는 겁니다』
 
  김용씨에게 『공개처형 장면을 직접 본 것이 몇 차례나 되는가』 하고 질문하자 『3년간 18호 수용소에 있는 동안 30회 이상 공개처형 장면을 봤다』면서 『하도 많이 봐서 기억이 안 날 정도』라고 말했다.
 
  『죽음이 늘 옆에 붙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공개처형장에 나가서도 무감각합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차례 이상은 공개처형장에 나가야 했습니다. 「오늘 몇 시에 공개처형이 실시되니 모두 모여라」는 방송이 나오면 대동강변의 처형장으로 다 나갑니다. 그러면 관리소장이 「반동 누구누구를 사형에 처한다」고 발표한 후 따당 따당 하고 쏘면 그만이에요』
 
  공개처형은 그나마 관리소장이 판결문을 낭독하는 등 절차를 거친 후 형을 집행하지만,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보위원이나 안전원의 개인적 판단에 의해 때려 죽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6형제 他殺사건에 대한 김용씨의 증언.
 
  『나진에 살던 6형제가 군부대를 습격하여 물건을 훔치다 들켜 6형제 가족 전체가 18호 수용소로 끌려왔습니다. 이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탈출하자」고 결심했어요. 그들은 탈출 때 먹기 위해 농장에서 기르던 소를 훔쳐 죽여서 베낭에 넣어가지고 산에서 내려오다 체포됐습니다. 6형제 모두 특수 아지트에 수감됐는데, 네 형제는 고문을 당해 죽고, 두 형제는 탈출 사실을 자백하지 않자 계호원(특수 아지트를 지키는 보초)을 시켜 때려죽였습니다』
 
  그는 또 공개처형장 뒤편에 위치한 보위원과 안전원들의 사격장이 비밀처형장이라는 사실도 공개했다. 김용씨는 『18호 수용소에서도 선동가, 불순분자, 도주 기도자, 수감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행위를 한 자, 안전원이나 보위원의 非行(비행)을 폭로할 우려가 있는 자들은 공개총살 대신 비밀처형을 한다』고 증언했다.
 
  김용씨는 비밀처형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지만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제로 중앙당 조직부 김창현 일당 24명이 한꺼번에 비밀처형된 사건을 증언했다.
 
  『1997년 6~7월의 일입니다. 평양시 사회안전부 중앙급 안전부장을 지냈던 사람이 反음모죄로 가족과 함께 18호 수용소로 끌려왔습니다. 그 사람 별명이 눈깔 망나였는데, 중앙급 안전부는 정무원 등을 담당하는 안전원을 총지휘하는 막강한 자리입니다. 그가 함께 붙들려 온 중앙당 조직부 해외파견과장 김창현 등과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특수 아지트에 근무하는 소위 두 명을 포섭했습니다. 이들을 연락원으로 해서 평양과 비밀편지를 주고받았고, 해외탈출을 위해 비행사까지 포섭했다가 탈출 직전 발각됐어요. 수용소 내부의 관련자는 물론 사회에 있던 외부 관련자들까지 냉동차에 잡아넣고 18호에 끌고와 24명을 비밀처형장에서 사살했다고 합니다. 다음날부터 수용소에는 「누구 누구가 탈출하려다 탄로나 비밀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은밀히 떠돌기 시작하더군요』
 
 
  아지트로 끌려가 폐인된 어머니
 
 
  1998년 5월경의 일이다. 식량난이 점점 심해진 때문인지 배급량이 갈수록 줄었다. 사회에서도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판이었으니 수용소 수감자들의 식량난은 더욱 극심했다.
 
  김용씨의 어머니는 날마다 산에 올라가 산나물과 칡뿌리를 캐다가 아들에게 풀죽이나마 한 공기씩 쑤어주곤 했다. 그 무렵 한 끼 식사는 멀건 풀죽에 통강냉이 한두 알이 전부였다고 기억했다. 이런 음식을 먹고 탄광에 나가 중노동을 해야 했으니 기운이 날 리가 없었다.
 
  허기진 김용씨 어머니는 나물을 뜯으러 산에 올라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수용소 규칙에 의하면 오후 5시 이전에는 야산에서 반드시 내려오도록 되어 있었다. 김씨의 어머니는 해가 질 때까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야산지역을 순찰하던 경비원에게 발견됐다. 김용씨는 새벽에 작업장으로 나가 밤 11~12시경에 집에 들어오기 때문에 어머니가 쓰러진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경비원은 어머니에게 『왜 밤에 산에 나다니는가』 하며 도주자로 몰아 끌고 갔다. 밤늦게 김용씨가 소식을 듣고 담당 보위원에게 달려가니 어머니는 뼈만 남은 손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얼굴은 얼마나 맞았는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당시 정황에 대한 김용씨의 자필 수기를 소개한다.
 
  <나는 담당 선생에게 엎드려 『선생님, 늙은이가 몰라서 그랬으니 한번 용서해 달라』고 사정하자 그놈은 『야 이 새끼야. 규정에 저녁 5시면 산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 모르는가?』 하며 구둣발로 사정없이 걷어차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관리소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특별 아지트(영창)에 데려다 놓고 70 고령이 넘은 늙은 어머니에게 대동강변에서 돌 쌓기 하는 일을 강요했습니다. 잘 걷지 못하는 우리 어머니의 다리 사이에 몽둥이를 끼우고 젊은 놈들 둘이서 메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타구니에 몽둥이를 끼운 채 넘어지지 않으려고 나무를 꼭 쥐고 우들우들 떨며 끌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 아들인 저의 가슴이 어떠했겠습니까>
 
  이 사건으로 김용씨 어머니는 대소변도 못 가리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김용씨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고아처럼 국가에 기탁되어 자랐으니 부모에 대한 정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잘 나가던 자신의 인생을 불행의 함정으로 빠뜨린 존재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따스한 피가 흐르는 인간인지라 싫건 좋건 그를 낳아준 분으로서 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어머니가 김용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얘야, 나는 더 살 것 같지 않으니 너 하나라도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기차 이용해 탈출
 
 
  병들고 늙은 어머니를 死地에 홀로 남겨두고 떠난다는 결심을 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 끝에 며칠 후 어머니에게 『만약 제가 없으면 어머니 혼자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어머니는 『네가 여기를 나가 남쪽으로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남쪽에 가면 6·25 때 월남한 너의 외삼촌도 있고, 아버지 친지분들도 있을 텐데…』 하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탈출을 결심했다.
 
  그후 김용씨는 사령부를 뒤엎기 위해 쿠데타 음모를 꾸민 사령부 침해 사건의 연루자로 몰려 18호 관리소 특수 아지트에 끌려가 죽도록 얻어 맞았다. 이 사건의 여파로 그의 신체는 「허약 3도」 상태가 되었다. 허약 3도란 영양실조가 심해져 주먹이 항문으로 쑥 들어갈 정도로 뼈만 남은 상태를 말한다.
 
  이대로 죽는다는 것은 개죽음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지면 어머니가 당할 끔찍한 고문에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고민 끝에 『나는 결백하다』고 쓴 편지를 어머니에게 주면서 『내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담당 보위원에게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다. 말하자면 유서였다. 그는 1998년 9월, 18호 관리소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김씨는 석탄 운반 열차를 이용해 탈출했다는 정도만 밝힐 뿐 『나와 같은 방식으로 탈출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자세한 탈출과정은 밝힐 수 없다』며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을 피했다.
 
  또 자신의 탈출 과정을 도와준 관계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시인했으나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가 탈출에 이용한 기차는 함남 고원역을 거쳐 강원도 문천시의 문천제련소行 열차였다. 그는 고원역에서 단천까지 가는 화물기차를 타고 청진으로 숨어들었다. 청진에서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집을 찾아가 『외화벌이를 하다가 잘못되어 구류를 살다 나왔다』고 속이고 숨어 지냈다.
 
  당시 그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어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몸 상태가 회복되자 1998년 12월 남양에서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도문으로 탈출했다. 이듬해 한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1999년 8월에 몽골로 탈출, 그해 10월 서울로 귀순했다.
 
 
  피로 쓰여진 기록
 
  그 세계를 체험했던 사람의 증언
 
 
  김용씨의 증언은 안혁·강철환씨의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 대한 체험, 그리고 안명철씨의 회령 수용소 완전통제구역에 대한 관찰기와 더불어 우리에게 정치囚 당사자가 수용되는 14호 수용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살필 수 있는 귀한 사례다.
 
  기자는 김용씨의 증언 내용을 정리하면서 「피로 쓰여진 책이 값진 것」이라는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그 내용 하나하나가 숱한 인간의 죽음을 딛고, 그들의 몸에서 흐른 피로 쓰여진 기록이었다. 이런 체험들을 서로 비교 분석하고, 증언 내용을 검증해 나감으로써 우리는 베일에 가려졌던 북한 정치囚 수용소의 내막을 보다 명징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사회 일각에서는 귀순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들의 증언 내용을 신뢰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 귀순자들이 수용소의 현실을 과장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증언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해서 그들의 발언 내용 자체를 불신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그 세계를 체험했던 사람의 존재는 어떤 이론이나 상상보다 더 무게를 가지기 때문이다.
 
  기자는 김용씨에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북한 정치囚 수용소에 대한 증언에 대해 「증거가 없으니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존재한다』고 말하자 이렇게 답했다.
 
  『저는 그곳에 5년간 살다 온 사람입니다. 또 제가 한 얘기는 나의 체험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은 내용만을 증언한 겁니다. 그곳에서 목숨 걸고 살다 온 사람이 하는 얘기를 믿지 못하면 도대체 무엇을 믿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의심 많은 사람들에겐 무슨 증거를 가져다 줘도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말할 겁니다. 저는 북한 정치囚 수용소의 진실을 증거가 없어서 못 믿겠다는 사람들에게 「내가 바로 그 증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쓸 데없이 의심만 하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나에게 직접 와서 물어보세요』
 
  이런 점을 감안해 기자는 김용씨를 취재하면서 그동안 북한 정치囚 수용소를 체험했던 안혁·강철환, 안명철씨의 진술과 내용과 일일이 대조하고 분석하여 그 차이점과 유사점을 분석해 내고자 했다. 또 김용씨가 직접 목격한 사례와 남에게 전해들은 사례, 그것을 입증할 만한 기억들을 되살리고자 노력했다.
 
 
  수용소는 북한 체제를 향한 총폭탄
 
 
  김용씨의 탈출로 인해 북한 체제의 일급비밀에 해당하는 14호와 18호 수용소의 비밀이 일부 공개됐다. 그는 『14호 수용소에 대해서는 그 안에 수감되어 있던 나도 수용소의 전모를 잘 모르니까 어떨지 모르겠지만, 18호의 경우는 해산시켜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18호의 혁명화 작업반에 수용됐던 강명도씨가 남한으로 탈출한 후 그가 작업했던 득장지구 탄광을 사회탄광으로 넘겨주고 수감자를 다른 지역으로 옮겼습니다. 남한에 간 강명도씨가 「득장탄광은 정치囚 수용소다」라는 내용을 폭로하자 노동신문은 「득장탄광 노동자들 생산계획 초과달성」이라는 내용을 여러 차례 내보냈어요. 말하자면 득장지구는 관리소가 아니라는 선언을 할 정도로 수용소의 존재를 감추는 데 급급한 실정입니다』
 
  김용씨는 북한 정치囚 수용소에 대한 증언을 계속 보도함으로써 북한이 세계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수용소를 폐지 혹은 철거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에는 북한 인민군 중좌 신분이었다. 한국 사회에 정착하여 주민등록을 발급받을 때 그는 전직으로의 복귀, 즉 국군 입대를 강력히 희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단 하루라도 좋으니 국군 장교로 복대(복귀)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그 이유는 국군 장교 계급장을 단 내 모습을 수만 장 인쇄하여 풍선에 실어 북한 14호와 18호 수용소에 뿌리면 그곳에 있던 수감자들이 「김용이가 남한으로 탈출해서 높은 신분이 됐구나」 하는 희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면 탈주자가 늘 것이고, 언젠가 때가 되면 체제에 반항하는 폭동을 일으켜 북한체제의 심장부를 겨냥한 총폭탄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이 등이 걸림돌이 되어 그의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 정부측에 요구한 아버지의 신원 확인, 즉 아버지가 정말로 미국을 위해 일했던 사람인지를 가려 달라는 요구도 현재까지 공식 답변을 듣지 못한 상태다.
 
  귀순자 강명도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베고 잘 정도로 히틀러 통치술을 흠모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북한의 정치囚 수용소가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제도를 본받아 유지, 운영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안명철씨도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수용소가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 체제를 모방 혹은 참고하여 운영되고 있음을 증언한 바 있다.
 
  이탈리아의 언론인 레오 롱가네지는 『사상이나 주의가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사상이나 주의를 대표하는 얼굴』이라고 말했다.
 
  김정일 체제의 상징은 주체사상이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원칙이 아니라, 20여만명에 달하는 자기 국민을 믿지 못해 수용소에 가두어야 하는 현실이다.
 
 
  인권말살 主犯 김정일과 「세계적인 인권 지도자」 김대중 대통령의 만남
 
 
  아시아감시위원회(Asia Watch)와 미네소타 변호사 국제인권위원회가 공동 발간한 「북한의 인권」 서문에는 「인권의 존중보다는 침해를, 인권의 신장보다는 축소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논리와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권침해와 축소 말살의 상징인 金正日 정권을 향해 金大中 정부는 햇볕정책이란 이름하에 달러와 비료를 공급해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自任하고 있다. 바야흐로 우리는 「조직적 인권말살의 상징」 인 김정일과 「세계적인 인권 지도자」이며 「민주화의 등불」인 김대중 대통령이 어깨를 껴안은 채 정상회담을 논하고 통일을 논의할지도 모르는 시대를 맞게 됐다.
 
  취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기자는 취재노트 구석에 메모해 두었던 詩의 한 구절이 자꾸만 생각났다.
 
  <어째서 올바른 자가 십자가를 짊어지고/피를 흘리며 길을 가고/나쁜 놈이 도리어 승리자로서/의기양양하게 날쌘 말을 타고 횡행하는가>(하이네의 「라자로의 노래」)
 
  4월7일 기자는 김용씨를 다시 만나 취재한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작업을 벌였다. 밤을 줍다 총살당한 김철민씨 이야기, 소꼬리 채찍을 뜯어 먹었다가 타살당한 갈리영씨 이야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김용씨는 연신 눈물을 훔치면서 『그들이 죽어가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나의 체험기를 세계적인 인권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께 바치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국 사회로 귀순한 후 여러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김대중 대통령은 그동안 인권 신장과 민주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신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 노력과 관심을 북한 사회를 향해 다시 한번 기울여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설마 저들도 인간인데, 같은 인간을 상대로 그렇게까지야 하겠는가」 하고 말장난을 하는 사이에 북한의 수용소에서는 수도 없는 인간들이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총살당해 아까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저들이 더 이상 인권 유린을 당하지 않도록 김정일에게 압력을 하는 것이 세계적인 인권 대통령이 해야 할 일 아닌가요』●
 
 
 
  金龍씨 약력
 
 
 
  ●1950년 1월18일 황해도 신계군 적여면 대평리 출생
 
  ●1954~63년 황해남도 벽성애육원(고아원)
 
  ●1964년 평남 강서초등학원 입학
 
  ●1968~70년 청진시 신암구역 신진동 준첩사업소(항만건설) 노동자
 
  ●1970~74년 정부요인 호위총국 독로강체육단 유술(유도)선수로 선수생활(계급:소위)
 
  ●1974년 체육단 해산
 
  ●1974~80년 김책공대 자동화공학부 인쇄과 재학
 
  ●1980~87년 조선인민군 489군부대(인민무력부 청사관리국) 원산출장소장(계급:중좌)
 
  ●1988~90년 사회안전부 동흥무역회사 서해아사히주식무역회사 대리인(부사장)
 
  ●1990~93년 국가안전보위부 신흥무역회사 서해아사히주식무역회사 대리인(김정일의 5·3 방침에 의해 사회안전부 동흥무역회사가 국가안전보위부로 넘어감)
 
  ●1993년 5월 과거의 경력위조가 탄로나 체포, 조사
 
  ●1993년 8월 말 14호 정치범 관리소(평남 북창군 득장구:실제 위치는 개천)에 수감
 
  ●1995년 10월 18호 관리소로 이관
 
  ●1998년 9월25일 18호 관리소 탈출
 
  ●1998년 12월29일 남양에서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도문으로 탈출
 
  ●1999년 7월27일 중국-몽골 국경 월경 도중 몽골 수비대에 체포, 중국 국경경비대에 넘겨짐. 14일간 중국 국경경비대 감옥에 잡혀 있다가 8월10일 몽골로 탈출
 
  ●1999년 10월 서울로 귀순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이란?
 
 
  관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 정치囚 수용소는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구분된다. 중범자들이 수용되는 완전통제구역은 한번 수감되면 영원히 出所가 불가능하며, 죽어서 시체마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이보다 가벼운 범죄자와 그 가족은 혁명화구역에 수용되는데, 이곳에서 가혹한 수감생활과 노동을 한 후 개인이 혁명화되었다는 판정을 받으면 출소가 가능하다. 1992년 귀순한 안혁씨는 국경을 넘어 중국에 갔다온 죄로 1년8개월간 15호(함남 요덕) 수용소의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었다 풀려났으며, 강철환씨는 북송교포 집안으로서 할머니, 아버지, 삼촌, 여동생과 함께 15호 수용소 혁명화구역에 10년간 수용돼 있다가 출소했다.
 
  수감자들은 주로 지주, 친일파, 종교인을 비롯해 6·25 당시 치안대 가담자, 국군과 유엔군 北進(북진)시 협조자, 김일성과 김정일 노선에 반대한 종파분자, 일본에서 북송되어 온 교포, 월북자 중 선전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자들이 수용된다.
 
  강철환·김용씨의 증언에 의하면 혁명화구역 수감자는 북한의 엘리트 지배계층과 그 가족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북한이 많은 투자를 해서 길러낸 인재, 조총련 간부들과 인연이 있는 북송자 가족, 사회적 신망이 두터운 인물 등은 사회에 놔두면 눈엣가시이고, 죽이기에는 부담이 되는 인사들로서, 혁명화구역에 수감하여 일정 기간 「뜨거운 맛」을 보게 한 후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994년 5월에 귀순한 강명도씨도 18호 수용소의 혁명화 작업반에 수감되어 있다가 사회로 복귀했다.
 
 
 
  북한 정치囚 수용소의 탄생 과정
 
 
  북한판 아우슈비츠나 다름없는 정치囚 수용소의 탄생 과정에 대해 김용씨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국가안전보위부가 운영하는 정치범 관리소는 1972년 前 국가정치 보위부장 김병하의 발기와 金日成의 교시에 의해 설립됐다. 1968년 황해남북도의 군사분계선 부근(주로 개성, 금천, 용연, 장연, 안악, 은율, 취야, 장풍, 개풍, 판문 등)에 거주하던 월남자 가족과 6·25 전쟁 당시 치안대 가담자, 국군이나 미군에게 협조한 자, 지주, 친일파 중 그때까지 살아남은 본인 및 가족들을 북쪽의 주민들과 교환한다는 구실로 화물기차에 실어 12개의 험준한 산악지역에 설정해 놓은 특수구역으로 대대적으로 이주시켰다. 이곳에 끌어다 놓고 외부와의 접촉은 물론 서신거래 등 사회와 완전 차단시킨 것이다.
 
  그 무렵은 수용소 형태를 완전히 갖춘 것은 아니었고, 수감자 관리와 시설 운영은 사회안전성 안전과가 담당했다. 격리수용된 사람들 중 본인에 한해 죄가 엄중하다고 분류된 자들은 개천교화소와 청진에 있는 수성교화소를 정치범 교화소로 개조하여 이곳에 별도로 수용한 것이 정치범 관리소의 첫 출발이다. 그런데 탈출자가 속출하고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면서 경비 통제도 한층 강화되기 시작, 오늘날의 관리소 형태가 된 것이다>
 
 
 
  金龍씨가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
 
 
 
 
  14호 관리소
 
  김철민(54):전차 운전공. 황해도 출신으로 밤 주워먹다 보위원에게 총살당함. 김용씨와 같은 무진2갱에서 굴진조(6명)로 일하며 가깝게 지냈다. 14호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15년 이상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김재근:조선인민군 519연락소 조직부장(소장) 출신.
 
  갈리영(57):평양 출신 지주 아들. 북한 농구선수 출신(사망)
 
  변철호(55):개성 출신.
 
  심재석, 조근실, 안예남, 김영남, 조근상, 천광호, 김봉훈, 전대영, 이상은:이들은 이름만 기억날 뿐 자세한 인적사항 모름.
 
 
  18호 관리소
 
  김흥성(52):중앙사로청 간부 출신. 反음모사건에 연루돼 가족과 함께 수용.
 
  김창현:중앙당 조직부 해외파견과장 출신. 18호 수용소에 수용된 상황에서 반음모사건을 추진하다 발각돼 총살당함.
 
  김주길(56):중앙당 3호청사 과장 출신. 김경애 측근으로 활동하다 가족과 함께 수용됨.
 
  최훈섭(60):개성시 지주 아들로 1968년에 수용됨.
 
  김정철·김종훈(42):영변 원자력 시설에 근무하던 엔지니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잡혔는데, 일반 감옥에 수용하면 원자력 시설에 대한 비밀이 새나갈까봐 18호 수용소에 수감.
 
  김정남(42):황해도 출신으로 어린아이 때 부모와 함께 수용.
 
  김성호(37):어린아이 때 부모와 함께 수용.
 
  우옥순(여·38):평양 출신. 아버지가 인민무력부 연대장이었는데 큰아버지의 6·25 때 치안대 활동이 발각되어 가족과 함께 수용.
 
  김금순(여·37):전차 운전공. 자강도 출신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수용.
 
  김수길(53):중앙당 연락소 출신 전투원. 1988년 무렵 3인조로 남한에 간첩침투했다가 혼자서만 귀환한 죄로 수용.
 
  유정민(49):사회안전부 동흥무역회사 출신. 단독으로 일본 상인 만난 죄로 수감.
 
  유봉덕(44):군수동원총국장 사위. 청진에서 귀국자(북송 재일교포) 탈출시키기 위해 배 타고 나가다 체포 수용됨.
 
  김경수:개성시 체육단 레슬링선수. 아버지의 치안대 활동으로 수용.
 
 
 
  정치범과 정치囚
 
 
  북한의 관리소에 갇힌 수감자들은 죄를 지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그 가족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또 죄란 것도 김정일 父子 비판, 실수로 초상화 훼손 등의 사례마저 발견된다. 따라서 이들을 「죄수」나 「정치범」이라 부르는 것은 부당하며, 「정치적 囚人」(약칭으로 정치囚) 혹은 「양심수」라는 표현이 적당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정치적 사안으로 수감된 사람들을 「정치적 囚人」과 「양심수」로 구분한다. 정치적 囚人은 자신의 의사 표출을 위해 폭력을 지지하거나, 실제 폭력을 사용한 사람을 지칭한다. 반면 양심수는 폭력을 거부하고, 실제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를 말한다. 이 기사에서 사용하는 「정치囚」는 국제사면위의 구분이 아니라 廣義(광의)의 의미로 사용했음을 밝혀둔다.
 
 
 
  14호 정치囚 수용소의 일과
 
 
 
  05:00 기상 06:00시까지 - 식사
 
  06:30 - 대열점검
 
  07:00 - 작업장 진출. 몸수색(입출갱시 폭약 반출여부 확인 위한 작업). 주 1회씩 여죄연루 여부 관련 자술서 작성
 
  08:00~12:00 - 오전작업
 
  12:00~12:30 - 점심
 
  12:30~20:00 - 오후작업
 
  20:00 - 작업종료
 
  하루 평균 12시간 노동을 하는데, 작업계획에 따른 작업량이 달성되지 않으면 보통 23:00 까지 작업(하루 평균 15시간 노동)
 
 
  ●14호 수용소는 土, 日요일이 없고 연간 하루(1월1일)만 휴무. 규정에는 김일성·김정일 탄신일이 휴무로 되어 있으나 이날도 노동을 한다.
 
  ●14호 수용소의 경우 생산계획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반면, 18호의 경우 생산계획이 있어 이 작업량을 중요하게 여긴다. 18호 수용소 탄광의 경우 하루 5m 이상 굴진을 해야 한다.
 
  ●18호 수용소의 경우 일과는 14호와 비슷하나 다음과 같은 점이 다르다.
 
  1)월요일 아침에 직맹생활 총화(조직별로 모여서 회의)
 
  2)토요일에 덕성학습(김일성, 김정일의 덕성, 인덕정치, 김일성 부자는 위대한 분이라는 내용 교육)
 
  3)휴일이 김정일 생일(2월16일), 김일성 생일(4월15일), 당 창건일(10월10일), 1월1일 등 4일
 
 
 
  18호 관리소 혁명화 작업반에 대한 康明道씨의 증언
 
 
  康明道(강명도)씨는 귀순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90년 3월부터 1992년 2월까지 평남 북창군 득장리의 18호 관리소 혁명화 작업반에서 소위 혁명화 과정을 거친 후 출소한 사실을 증언한 바 있다. 다음은 康明道씨의 18호 관리소에 대한 증언.
 
  <관리소는 약 5만명이 수용된 탄광 노역장이다. 그러나 별도로 설치된 혁명화 작업반은 강제노역이 아닌, 특별 계층의 軍紀 교육대에 해당된다. 즉 당성이 빠졌다고 판단되는 간부를 2~3년 보내 가벼운 일을 시킨 후 현직으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 대표로 나온 金容淳(김용순)도 1979년께 3년간 18호 관리소 혁명화 작업반에 수용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관리소에 머무는 동안 비참하기 짝이 없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북한의 현실과,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김정일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康明道씨는 자신의 저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에서 18호 관리소 창고장으로 10년 이상 근무하다 수감된 황보천으로부터 「18호 관리소는 1958년 전후에 세워졌고, 수용자의 70%는 월남자 가족 및 친척들이며 나머지 30%는 악질범들」이라고 했다. 그는 또 「18호 관리소에는 황해남북도 출신의 월남자 가족이 많았으며, 수감자 대부분은 죄 없고 착한 사람들이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아편 재배는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애가 총책
 
 
  강철환씨는 함남 요덕의 15호 수용소 내에 위치한 구읍지구에 9000평 가량 아편밭이 있었고, 여기에서 조직적으로 아편을 재배한 사실을 증언했다. 囚人들은 아편 잎을 몰래 따다 설사가 날 때 달여먹었는데, 가을이 되면 트럭이 와서 아편을 몽땅 실어갔다고 한다.
 
  김용씨는 14호, 18호 수용소 내에서는 아편을 재배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며, 평양시 외곽지역인 평양시 상원군 일대의 호위국 산하 농장(김정일 사냥터 있는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아편이 재배된다고 증언했다. 또 평남 증산군의 사회안전부 교화국이 운영하는 11호 증산노동자교양소에서 아편 재배를 한 사실을 증언했다. 다음은 김용씨의 증언.
 
  <북한에서 아편은 1987년부터 본격 재배되기 시작했다. 내가 양귀비 농장을 직접 목격한 적도 많은데, 양귀비를 어떤 과정을 거쳐 마약으로 제조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마약 관계는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애가 운영하는 중앙당 연락소에서 아편 재배와 가공 판매를 총책임지고 있었다. 김경애는 경공업 담당 부부장으로서 자기 산하에 있는 오산동 무역회사를 통해 마약을 움직이는 것으로 안다>
[ 2006-03-31, 03:09 ]
출처 : 써비스 메신져
글쓴이 : 써비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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