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교류 증진 세미나
2006. 7. 13 인천차이나클럽 주최 세미나 주제발표 자료
발제자/ 김용필 중국동포타운신문 편집국장
<발표요약>
1. 중국동포들의 ‘코리안드림’ 20年
2. 중국동포는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시각
3. 중국동포의 불법입국 -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4. 한국속 중국동포타운 - 한국과 중국문화의 접합점
5. 한국인과 중국동포 - 반듯이 극복해야 할 갈등과 불신의 벽
6. 중국동포 ‘합법화 시대’를 맞이하며
1. 중국동포들의 ‘코리안드림’ 20年
중국동포가 처음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둔 1987년부터이다. 이것은 1945년 남북분단 역사 이래 42년만의 만남이며 올해 들어 꼭 20년째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87년 중국동포는 지금처럼 연변 연길공항에서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홍콩을 경유 홍콩주재한국영사관에서 발급해주는 한국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한국으로 들어오는 절차를 밟았다. 한국여행증명서는 KBS이산가족찾기운동에 의해 방송이나 편지로 한국에 있는 친척과 연계가 되면 친척의 초청장을 근거로 중국동포들에게 제한적으로 발급해주었던 것이다.
이런 경로로 들어오는 중국동포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90년대에 들어서 한달에 100여명 정도 들어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전 국내에 체류하는 중국동포 수는 2,000여명 수준이었다. 그러다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를 분수령으로 하여 중국동포들은 중국여권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입국자 수도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중국조선족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은 아주 높았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많이 듣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중국동포들은 북한보다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 훨씬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90년대초 중국동포는 보통 약장사로 통했다. 최초의 중국동포 입국자들은 불법취업 목적보다는 단기간 방문으로 한약재를 팔아 경비를 마련하는 보따리 장사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갔다가 돌아온 고향사람들로부터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차차 조선족사회에 ‘코리언드림’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30년 근무를 한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문화춘 심사과장은 “92년 한중수교 전만해도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 와도 마땅히 일할 곳이 없었다. 당시 한국인 임금도 월 50만원 수준이었다. 조선족동포들이 불법체류하며 일을 해도 월 40만원을 벌면 많이 번 시대였다. 그런데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나서 당시 정부는 200만호 주택건설 정책이 발표되고 일산, 분당 등 신도시 아파트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건설현장에서 건설노동자가 부족하자 언어 소통이 가능한 중국동포들이 단순노동자로 상당한 수입을 얻어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중국동포 불법체류 문제가 사회문제로 가시화 된 것은 1992년 6월 10일부터 7월 31일까지 실시한 ‘불법체류 자진신고’ 기간을 실시한 후부터였다. 국내에는 이미 외국인노동자가 10만명 이상이 들어와 있었고 이 기간에 신고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6만여명이었다. 그 중 중국동포가 상당수 차지하였다. 이때부터 중국동포 불법체류문제가 한국사회에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20년째 된 올해 작년에 이어 제2차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이 나와 중국동포사회가 새롭게 변모해 나가는 발판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2. 중국동포는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라는 시각에 대해서
중국동포들은 왜 불법체류자가 많은가 묻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중국동포를 보면 모두 불법체류자인 것으로 인식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따라서 중국동포들의 불법체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중국동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째, 중국동포들이 불법체류자로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일부러 출입국법을 어기고 불법체류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無知와 人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권 유효기간과 체류기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포들도 많고, 또 체류기간이 언제까지 허용되는지도 모르고 친척집에서 생활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불법체류자가 된 경우도 많다는 것을 동포들을 상대하면서 알게 되었다.
둘째, 자녀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국동포들이 한국에서 일을 해 돈을 벌기 위해 불법체류자로 남아있는 현상이 늘어났다.
조선족사회는 전형적인 농촌사회이다. 일년에 농번기라 할 수 있는 3개월동안 일하고나면 나머지 시간은 거의 일거리가 없다. 이런 과정에 중국이 80년대 이후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조선족사회의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졌다.
주목할 사실은 조선족사회는 한 자녀를 둔 한족 가정과 달리 2 자녀 이상을 키웠기 때문에 생활비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한족사회보다 조선족사회가 상대적으로 대학과 유학을 다니는 자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엔 보고서에 의하면 2000년 말까지 전세계 유학생 수는 160만명에 달하며, 2003년 중국유학생 수는 46만명(중국인구 13억명)이며 조선족유학생은 한국(약 3500명 조선족유학생)과 일본을 중심으로 미국, 카나다, 오스트랄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그 규모도 최저 1만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조선족 인구는 중국인구총수의 1/650(0.15%)밖에 안되는 데 반해 인구당 차지하는 조선족유학생비례는 중국평균유학생비례의 10배에 달하는 것이다.
미국, 중국 등 학자들의 합작연구결과에서도 중국 56개 민족 중 조선족의 교육수준은 제1위로 드러났으며, 2003년 9월 27일 민족통신에 의하면, 제5차 전국인구 조사결과 중국의 100명당 지식인구 비중이 조선족(96.96%), 백족(91.27%), 만주족(88.18%), 까자흐족(86.53%), 투쟈족(86.41%), 동족(85.22%), 한족(84.91%)였다.
중국의 56개 소수민족중 조선족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자녀 교육열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 예로 연변에서 자녀를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과외공부가 성행한다고 한다. 교원출신의 동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연변에서 학생과외를 통한 수입이 적지 않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연변의 동포들 중 고위공무원과 교원출신들도 자녀교육 뒷바라지를 위해서 부부 중 한명은 한국에 나와서 막일과 식당일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국동포의 이런 이주노동 현상은 70~80년대 한국농촌의 젊은 부부가 자녀교육의 미래를 생각하고 농사짓는 땅을 팔고 서울 등 대도시로 이동한 현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고 무자본의 한국인노동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중동으로 진출하고 ‘아메리카드림’을 갖고 미국에 가서 불법체류자로 생활하며 돈을 번 현상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실시한 법무부의 ‘불법체류자 자진신고기간(02.3.25~5.25)’에 접수된 불법체류외국인 수는 25만6천여명(93%가 신고함), 이 중 중국인의 자진신고가 15만명인데 중국동포만 본다면 10만명이 넘었다. 이 때 밀입국자도 상당수 자진신고를 하였다.
이렇게 다른 외국인과 달리 중국동포들의 불법체류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는 한국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중국동포들이 조상들이 개척해 가꾸어놓은 드넓은 농토를 팔아서 한국과 대도시로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결국 중국에서 재정착해 살아야 할 중국동포들이 근거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족사회 내부에서도 해체위기에 놓인 조선족농촌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농촌 사회와 함게 방안 모색에 열중하고 있어 희망을 찾을 수 있어 다행이다.
셋째, 브로커들에 의한 불법입국이 중국동포들의 불법체류를 부추기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동포들의 불법입국 경위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순박한 조선족동포들에게 한국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브로커들의 소행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 오면 쉽게 돈을 벌게 해주고 또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한이 3개월이면 끝나는 데도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5년을 체류할 수 있으며 영주권까지 얻게 된다고 속여 중국동포의 한국행을 부추기는 사례도 많다.
브로커의 말을 들어보면 1000만원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중국동포들은 쉽게 갖게 되며 ‘코리언드림’에 푹 빠지게 된다. 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로 여겨질 정도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중국동포의 한국행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한국에 왔지만 결국 브로커에 속아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돈도 아무 영수증 없이 현금으로 주었기 때문에 증거도 손에 쥔 것이 없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오로지 살아남는 길은 한국에서 불법체류하며 사기당한 돈을 벌어 갚고 생활밑천을 마련하는 길뿐인 것이다.
그나마 한국에 온 사람들은 다행이다. 회사이름으로 초청해준다 해놓고 돈만 가로챈 브로커들에게 걸리면 한국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영락없이 사기피해자로 중국땅에서 떠돌아다녀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중국동포들 또한 적지 않다.
넷째, 번 돈을 상업자본으로 돌리지 못하고 한국입국비용으로 대여해주는 악순환이 중국동포의 불법체류가 늘어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한국에 진출해 나름대로 성공한 동포들도 있다. 한국에 와서 1년만에 빚을 갚고 2년 더 일하면 중국에서 벌 수 없는 큰 돈을 벌게 된다. 문제는 중국동포들이 그 돈을 건전하게 상업자본으로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친척이나 고향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오는데 밑천으로 빌려준다. 그렇게 하다가 한국에 오는 것이 실패하거나 돈도 못벌고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하면 당사자는 고향땅을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또 여러 명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부인이 먼저 와서 남편의 입국비용을 대는 경우, 또는 남편이 먼저 와서 부인의 입국비용을 대는 경우가 일반적인 사례인데, 그런 경우 브로커를 통해 여권을 위변조하거나 위장결혼 방식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법과 제도에 대해 無知한 상태에서 그저 한국에 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들어온 중국동포들이 불법체류자로 고액의 빚을 지고 한국생활을 시작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
그런 사정에 놓여있는 중국동포들을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강제추방을 시킨 법무부 출입국공무원과 경찰관에 대한 두려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국내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동포들은 항상 쫓기는 듯한 인상과 불안감과 초조함, 그리고 언제 붙잡혀 강제추방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져있게 되는 것이다.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한 중국동포들의 고통은 아주 큰 것이었다. 고국에 대한 원망도 컸을 뿐만 아니라 강제추방 당한 동포들은 또다시 빚을 내어 여권을 위변조하거나 밀입국으로 재입국을 시도한다. 이런 것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속에서 ‘불법체류외국인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중국동포들은 1999년 9월에 재외동포법이 발표되었을 때 명동성당에서 거꾸로 매달려 시위를 하며 ‘부자집으로 시집간 딸은 딸이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간 딸은 딸이 아니냐’며 한국정부의 재외동포 차별정책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 2000년도에 들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중국동포 관련 종교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그것을 배경으로 한국정부의 차별정책과 단속위주의 정책에 맞서 시위에 동참하는 중국동포들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거나 카메라에 얼굴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했던 동포들이 종교사회단체에 의지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할 말은 해야겠다”는 입장으로 나온 것이었고 그것이 곧 국내에서 중국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을 크게 바꿔놓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본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동포들의 국내에서 생활모습이 TV화면으로 비춰지기 시작했고 안산 원곡동과 서울 가리봉동과 같은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이 형성되어 이들만의 ‘독특한 문화지대’에 대한 언론방송의 관심도 커졌다.
3. 중국동포들의 불법입국,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국에 친척이 없는 중국동포들 중 상당수가 밀입국, 여권위변조, 위장결혼 등 불법입국을 통해 들어와 인권사각지대에 놓여 있게 된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중국과 한국의 사회적 현실과 법․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조선족사회의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중국에서는 돈만 주면 안되는 일이 없다 할 정도로 여권 호구부 등 공문서 위조가 쉽게 일어나고 큰 범죄처럼 인식되지 않는 반면 한국사회에서는 공문서위조는 무거운 형벌 대상자이다. 한국인과 중국동포 간의 국제결혼 수자도 급증하고 있는 시점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볼 때, 상대방이 누구인지 심사숙고해보지 않고 결혼하는 중국동포의 결혼관은 한국사회에서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서 문제해결이 어려운 점도 발생하고 있다.
한 예로 결혼으로 들어온 중국동포 김정숙(가명)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김정숙씨는 2003년 3월경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하고 같은 해 8월 한국에 들어왔다. 김복순씨는 8월 9일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체류자격(F-2-1)을 부여받고 한국인 남편과 함께 2년 가까이 생활해오고 있으며 92세된 시어머니(2005년 5월 사망)를 1년간 모시고 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천공항출입국 소속 직원이 2006년 6월 20일경 한국인 남편에게 확인 전화가 왔다. 결론은 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 조사과에 출두하여 결혼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때 인천공항출입국 직원이 지적한 것은 김정숙씨의 생년월일이 원래 56년생인데 왜 58년생으로 고쳐 들어왔는가 점이다. 여권위변조에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김정숙씨는 한국에 와서 잡혀간 것이 있어서 생년월일을 56년에서 58년생으로 고쳤다고 사실대로 실토하게 되었다.
김정숙씨는 2000년 4월 14일 회사초청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 그 당시 체류기간을 연장하여 합법체류 기간 중 군포에 소재한 다방에서 종업원 식사를 제공해주는 주방 일을 하다가 체류목적외 활동으로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 김정숙씨의 생년월일은 1956년 10월 7일생이었다.
그런데 2003년 3월 김정숙씨는 한국인을 만나 결혼하여 제2의 인생을 살기로 하고 한국에 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김정숙씨는 생년월일을 58년 10월 7일생으로 고쳐 여권을 발급받게 되었다. 김정숙씨는 중국돈 150위안을 들여 합법적인 방법으로 호구부상 나이를 고쳤기 때문에 다시는 56년생으로 원상복귀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출입국 직원은 김정숙씨의 말은 거짓말이고 어떻게 원적본의 나이를 그렇게 쉽게 고쳐서 나올 수 있느냐고 의심하고 있다. 이미 2년 가까이 결혼 생활을 했지만 결혼생활도 허위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와 김정숙씨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출입국 직원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왜 동포들은 밀입국, 여권위변조, 위장결혼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한국에 정당하게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좁았기 때문이다.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친척초청이 일반적 것이다. 그 상황을 보면,
2000년까지만 해도 친척방문 허용연령은 50세 이상이었으며, 2002.11.1 중국동포에 대한 입국문호 확대 차원에서 친척방문 허용연령을 종전의 45세에서 40세로 하향조정하여 시행한다. 대상은 국내의 배우자, 8촌이내의 혈족 또는 4촌 이내의 인척을 방문하고자 하는 자로 40세 이상인 자이다. 단, 한중수교(92.8.24)이후 국민과 결혼 등의 사유로 한국국적을 취득한 자가 중국거주 친척을 초청하는 경우 제외되었다.
2003.5.10 법무부는 취업관리제를 도입하여 중국동포들에 대한 고국방문 및 취업기회를 확대하기 위하여 친척방문 허용연령을 30세 이상으로 대폭 하향조정하고, 혼인․귀화 등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동포들에게도 일정한 범위내에서 친척을 초청할 수 있도록 현행 중국동포 입국절차를 개선했다. 가족당 연간 2명 이내에서 초청을 허용하고 입국후 불법체류하지 아니하고 귀국하는 경우 대체인원 초청도 허용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8촌 이내의 혈족 또는 4촌 이내의 인척으로부터 초청을 받는 30세 이상의 중국동포들은 주중공관에서 방문동거(F-1) 사증을 발급받아 입국하여 친척을 방문할 수 있게 되며, 또한 소정의 절차를 거쳐 음식점업, 청소업, 사회복지사업 등 6개의 서비스분야 등에서 합법적으로 2년간 취업할 수 있게 된다.
현행 친척초청 허용범위는 25세 이상으로 하향조정되었다. 그만큼 한국에 친척이 있는 동포들의 경우 한국입국이 수월해졌다. 문제는 200만 조선족동포 중 중 한국에 친척이 있는 인구는 30% 정도로 파악되며, 동포들이 가장 많이 밀집거주하고 있으며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연변지역의 조선족동포들은 대개 북한출신들이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연변 조선족동포들은 결혼으로 귀화한 자들에 의한 친척초청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중국동포의 한국 입국문이 좁다보니 결과적으로 불법입국을 알선하는 브로커들을 양상시켰고 이에 입국사기를 당한 동포들이 늘어난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4. 한국속 조선족타운 - 한국과 중국문화의 접합점
한국에서 중국동포의 생활근거지를 찾아보면 초창기 서울역 뒷골목 판자촌에서 비롯되어 청량리, 난곡 등 한국의 빈민지역으로 퍼졌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중국동포들이 밀집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꼽으라면 대표적인 곳은 안산 원곡동과 서울 가리봉동이다. 안산원곡동과 시화․안산공업단지를 배후로 두고 있고 가리봉동은 구로디지털단지를 배후로 두고 있다.
가리봉동에 동포들이 밀집거주 하게 된 배경은 저렴한 방값을 지불하고 생활할 수 있는 쪽방이 많다는 것이다. 일종 벌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70년대 구로공단에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젊은 한국인노동자들이 거주하던 방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텅텅 비어있다가 90년대 후반부터 그곳을 중국동포들이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안산원곡동에는 동남아시아 외국인노동자들도 몰려있으면서 중국인과 중국동포들이 3만에서 5만명 가까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가리봉동은 5천에서 1만명이 거주하고 가리봉동을 끼고 있는 구로구와 금천구 가산․독산, 영등포구의 대림․신길, 관악구의 봉천․신림 지역에 3만에서 5만명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이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중국동포의 문화는 이색적이다. 향이 짙은 중국음식과 40도가 넘는 고량주, 대표적인 서민술은 코베이(컵술)이다.
즐겨먹는 음식은 개고기, 냉면, 만두, 양꼬치, 훠구어(샤브샤브) 등으로 한국풍보다는 중국풍에 더 가까운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그동안 알려진 중국요리집, 차이나레스토랑의 음식과는 다른 정말 중국본토배기의 음식맛을 안산원곡동과 가리봉동 중국동포타운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음식문화를 놓고 볼 때 중국조선족은 분명 한국보다 중국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래문화만큼은 영락없이 한국의 대중문화에 가깝다.
중국동포 밀집지역의 특징은 노래방이 많다는 것이다. 가리봉동의 경우 2002년이후 3배가 늘어 한 집 걸러 하나의 노래방이 있을 정도로 26개의 노래방이 생겼다. 중국노래도 있지만 역시 중국동포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는 한국의 대중가요이다.
필자는 중국동포타운이라 할 수 있는 가리봉동을 2000년부터 다니며 중국동포들의 생활면을 가까이에서 보아왔고 2003년 5월부터는 가리봉동에 거주하며 중국동포와 한국지역민이 함께 하는 동포타운을 만드는데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다.
활동을 하면서 필자는 ‘과연 중국동포와 한국인은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왔다.
이것은 결코 쉬운 질문이 아니었다. 중국동포와 한국인은 서로 언어가 통하기 때문에 언어 장벽 없이 쉽게 친해 질 수 있지만 관계가 발전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속칭 끼리끼리 문화가 중국동포사회도 아주 강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동북3성에 퍼져있는 중국동포들은 연변사람, 흑룡강사람, 심양사람 등 지역적으로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으며 고향사람끼리 어울려 음식을 나누고 친목모임을 갖는다. 이것은 한국사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한반도 4배에 해당하는 동북3성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200만 조선족사회는 지역색이 더욱 뚜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좋은 예로 중국동포들은 음식맛에 상관없이 고향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식품점 등을 단골집으로 정해놓고 이용하는 소비형태를 볼 수 있다.
또한 생활면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가리봉 지역주민과 상인들이 갖는 중국동포에 대한 시각을 보면, 중국인(중국동포)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술을 많이 마시고 놀음을 좋아하고 위아래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막말을 하고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고 싸움이 일어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거친 기질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대체로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시각은 선진국 수준에 올라가 있는 한국사회와 생활문화에 20년에서 30년 가까이 뒤떨어진 사회에서 살다온 중국동포들이 사회질서에 대한 기본 인식이 부족하고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분석된다.
분명 안산원곡동과 서울 가리봉동과 같이 중국동포들이 밀집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한국과 중국문화가 공존하는 이색적인 지역임에 틀림없다. 이곳 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 지역민은 중국에 가보지 않고도 중국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5. 한국인과 중국동포 - 반듯이 극복해야 할 갈등과 불신의 벽
경제적으로는 10배 이상의 차이가 나고 사회체제가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50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이 만났을 때 관계가 서먹서먹해지고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과 중국동포의 만남은 상호 그리움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갈등과 불신이 점철된 20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면 안되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런 가운데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이 30만을 넘어서고 앞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런 한국인을 ‘신선족(新蘚族)’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거주하는 중국동포는 현재 20만 가까이 되며, 앞으로 그 인원도 더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국적을 취득한 중국동포도 6만명 가까이 되고 있다.
중국동포와 한국인은 많은 차이점이 드러난다. 쉽게 말해 말은 통하지만 중국동포는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사고방식과 생활문화 등이 한국보다는 중국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중국동포들도 궁극적으로는 한국보다는 중국에서 살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다. 중국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고 생활이 어려워서 지금은 한국에 와서 국적도 따고 취업활동을 하지만 중국의 경제상황이 나아지면 중국에 가서 살겠다고 말하는 중국동포들이 더 많다. 실제로 한국에 몇 년씩 와서 돈을 번 중국동포들은 중국에 투자하여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 예로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동포들은 대개 여성들인데, 자녀교육을 대개 중국에서 시키고 있다. 한국에서의 교육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자녀의 미래를 생각해볼 때 중국에서 교육받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교육을 선호한다는 것도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과 중국동포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유발되는 곳은 노동시장이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중국동포들은 다른 외국인노동자와 달리 건설현장, 식당, 가정부 등으로 취업이 가능하다. 그러다보니 노동시장에서 하루하루 일하며 살아가는 저소득층 한국인과 충돌이 일어나고 더욱 많은 갈등이 유발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동포 입장에서 보면 노동시장에서 같은 민족이고 또 한국인노동자보다 힘든 일을 더 많이 하고 노동시간도 긴데 임금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한국인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인력난에 고민하는 고용주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중국동포는 일자리를 잠식하는 중국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노동시장에서의 한국인과 조선족동포의 충돌로 말미암아 한국인에 의한 신고로 강제추방을 당하는 중국동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악덕업주가 노동을 시키고 임금을 주지 않을 목적으로 불법체류 신분을 악용하는 사례까지 발생해 인권문제로까지 번져나간 것이다.
중국동포들은 한국사회에서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알려져봤자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불이익을 많이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법체류 상태에 있는 중국동포들은 임금체불 산업재해 등을 당하고도 강제추방이 두려워 말을 못하고 있는 경우도적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인 신분을 이용해 건설현장 등에 취업하는 경우가 늘어나 오히려 그것에 발목잡혀 어려움을 겪는 중국동포들도 많았다.
이것은 곧 중국동포들의 ‘반한감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동포의 반한감정이 최고조로 이르게 된 것은 2002년초 법무부 ‘불법체류 종합방지대책’이 나오기 전까지 인 것으로 판단된다.
분명 강조하고 싶은 말은 한국인과 중국동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국인 위주의 지나친 노동시장 보호정책 보다 열심히 일하고 생활하는 중국동포를 지원해주는 정책을 펼치는 것이 바람직하며 미래지향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과거에 빚어진 갈등과 불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며 해체위기에 놓인 조선족사회를 바르고 건강하게 재조합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6. 중국동포 합법화 시대를 맞이하며
중국동포 불법체류외국인노동자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합법화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것은 다소 때가 늦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국과 중국이라는 경제․사회․문화적 차이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생각한다. 이젠 서로 이해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한국정부의 동포 포용정책 일환으로 실행한 2005년과 2006년도의 ‘동포 귀국지원프로그램실시’에 의거 불법체류 중국동포들이 합법적인 신분으로 한국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해주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본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동포들이 한국정부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모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다시 갖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중국동포를 위해 방문취업비자(H-2) 신설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중국동포는 한국에 5년동안 자유롭게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체류할 수 있고, 또 3년간 취업활동도 할 수 있게 된다.
중국동포들이 절대 다수가 불법체류 상태에 있을 때와 합법상태로 전환되어 가는 현 시점에서 중국동포들의 생활방식 또한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젠 불법체류 중국동포의 인상을 지우고 새롭게 중국동포에 대한 시각을 가져야 할 때라 생각한다.
한국인이 중국동포에 대해 갖는 긍정적인 시각이라면 중국동포가 강한 독립심과 생활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동포는 13억 인구의 중국땅에서 수작농업인으로 우수한 민족성을 보여주었고 중국내 다방면에서 주요한 활동을 해왔고 지금도 우수한 인재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는 해보지도 않은 일도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일하는 중국동포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인이 하지 않는 3D업종에서 중국동포 대부분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 발전하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중국동포들의 한국사회와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한국에서 3년 이상 생활해 본 중국동포들은 중국보다 한국에서 살기를 더 원한다. 그 이유는 한국의 발전된 문화양식과 한국인의 교양 있고 친절한 태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고, 심지어 각 사업장에서의 서비스정신과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돕는 자원봉사와 나눔의 정신을 본 중국동포들은 한국사회에 와서 배워야 할 점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필자는 한국인과 중국동포는 상호보완적으로 서로 협력하면 충분히 함께 미래를 펼칠 수 있는 희망찬 시대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는 것이 필자가 갖는 바램이자 동포활동가로서 갖는 사명이기도 하다. <끝>
2006. 7. 13 인천차이나클럽 주최 세미나 주제발표 자료
발제자/ 김용필 중국동포타운신문 편집국장
<발표요약>
1. 중국동포들의 ‘코리안드림’ 20年
2. 중국동포는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시각
3. 중국동포의 불법입국 -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4. 한국속 중국동포타운 - 한국과 중국문화의 접합점
5. 한국인과 중국동포 - 반듯이 극복해야 할 갈등과 불신의 벽
6. 중국동포 ‘합법화 시대’를 맞이하며
1. 중국동포들의 ‘코리안드림’ 20年
중국동포가 처음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둔 1987년부터이다. 이것은 1945년 남북분단 역사 이래 42년만의 만남이며 올해 들어 꼭 20년째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87년 중국동포는 지금처럼 연변 연길공항에서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홍콩을 경유 홍콩주재한국영사관에서 발급해주는 한국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한국으로 들어오는 절차를 밟았다. 한국여행증명서는 KBS이산가족찾기운동에 의해 방송이나 편지로 한국에 있는 친척과 연계가 되면 친척의 초청장을 근거로 중국동포들에게 제한적으로 발급해주었던 것이다.
이런 경로로 들어오는 중국동포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90년대에 들어서 한달에 100여명 정도 들어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전 국내에 체류하는 중국동포 수는 2,000여명 수준이었다. 그러다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를 분수령으로 하여 중국동포들은 중국여권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입국자 수도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중국조선족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은 아주 높았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많이 듣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중국동포들은 북한보다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 훨씬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90년대초 중국동포는 보통 약장사로 통했다. 최초의 중국동포 입국자들은 불법취업 목적보다는 단기간 방문으로 한약재를 팔아 경비를 마련하는 보따리 장사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갔다가 돌아온 고향사람들로부터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차차 조선족사회에 ‘코리언드림’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30년 근무를 한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문화춘 심사과장은 “92년 한중수교 전만해도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 와도 마땅히 일할 곳이 없었다. 당시 한국인 임금도 월 50만원 수준이었다. 조선족동포들이 불법체류하며 일을 해도 월 40만원을 벌면 많이 번 시대였다. 그런데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나서 당시 정부는 200만호 주택건설 정책이 발표되고 일산, 분당 등 신도시 아파트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건설현장에서 건설노동자가 부족하자 언어 소통이 가능한 중국동포들이 단순노동자로 상당한 수입을 얻어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중국동포 불법체류 문제가 사회문제로 가시화 된 것은 1992년 6월 10일부터 7월 31일까지 실시한 ‘불법체류 자진신고’ 기간을 실시한 후부터였다. 국내에는 이미 외국인노동자가 10만명 이상이 들어와 있었고 이 기간에 신고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6만여명이었다. 그 중 중국동포가 상당수 차지하였다. 이때부터 중국동포 불법체류문제가 한국사회에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20년째 된 올해 작년에 이어 제2차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이 나와 중국동포사회가 새롭게 변모해 나가는 발판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2. 중국동포는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라는 시각에 대해서
중국동포들은 왜 불법체류자가 많은가 묻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중국동포를 보면 모두 불법체류자인 것으로 인식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따라서 중국동포들의 불법체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중국동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째, 중국동포들이 불법체류자로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일부러 출입국법을 어기고 불법체류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無知와 人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권 유효기간과 체류기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포들도 많고, 또 체류기간이 언제까지 허용되는지도 모르고 친척집에서 생활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불법체류자가 된 경우도 많다는 것을 동포들을 상대하면서 알게 되었다.
둘째, 자녀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국동포들이 한국에서 일을 해 돈을 벌기 위해 불법체류자로 남아있는 현상이 늘어났다.
조선족사회는 전형적인 농촌사회이다. 일년에 농번기라 할 수 있는 3개월동안 일하고나면 나머지 시간은 거의 일거리가 없다. 이런 과정에 중국이 80년대 이후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조선족사회의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졌다.
주목할 사실은 조선족사회는 한 자녀를 둔 한족 가정과 달리 2 자녀 이상을 키웠기 때문에 생활비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한족사회보다 조선족사회가 상대적으로 대학과 유학을 다니는 자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엔 보고서에 의하면 2000년 말까지 전세계 유학생 수는 160만명에 달하며, 2003년 중국유학생 수는 46만명(중국인구 13억명)이며 조선족유학생은 한국(약 3500명 조선족유학생)과 일본을 중심으로 미국, 카나다, 오스트랄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그 규모도 최저 1만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조선족 인구는 중국인구총수의 1/650(0.15%)밖에 안되는 데 반해 인구당 차지하는 조선족유학생비례는 중국평균유학생비례의 10배에 달하는 것이다.
미국, 중국 등 학자들의 합작연구결과에서도 중국 56개 민족 중 조선족의 교육수준은 제1위로 드러났으며, 2003년 9월 27일 민족통신에 의하면, 제5차 전국인구 조사결과 중국의 100명당 지식인구 비중이 조선족(96.96%), 백족(91.27%), 만주족(88.18%), 까자흐족(86.53%), 투쟈족(86.41%), 동족(85.22%), 한족(84.91%)였다.
중국의 56개 소수민족중 조선족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자녀 교육열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 예로 연변에서 자녀를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과외공부가 성행한다고 한다. 교원출신의 동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연변에서 학생과외를 통한 수입이 적지 않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연변의 동포들 중 고위공무원과 교원출신들도 자녀교육 뒷바라지를 위해서 부부 중 한명은 한국에 나와서 막일과 식당일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국동포의 이런 이주노동 현상은 70~80년대 한국농촌의 젊은 부부가 자녀교육의 미래를 생각하고 농사짓는 땅을 팔고 서울 등 대도시로 이동한 현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고 무자본의 한국인노동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중동으로 진출하고 ‘아메리카드림’을 갖고 미국에 가서 불법체류자로 생활하며 돈을 번 현상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실시한 법무부의 ‘불법체류자 자진신고기간(02.3.25~5.25)’에 접수된 불법체류외국인 수는 25만6천여명(93%가 신고함), 이 중 중국인의 자진신고가 15만명인데 중국동포만 본다면 10만명이 넘었다. 이 때 밀입국자도 상당수 자진신고를 하였다.
이렇게 다른 외국인과 달리 중국동포들의 불법체류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는 한국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중국동포들이 조상들이 개척해 가꾸어놓은 드넓은 농토를 팔아서 한국과 대도시로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결국 중국에서 재정착해 살아야 할 중국동포들이 근거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족사회 내부에서도 해체위기에 놓인 조선족농촌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농촌 사회와 함게 방안 모색에 열중하고 있어 희망을 찾을 수 있어 다행이다.
셋째, 브로커들에 의한 불법입국이 중국동포들의 불법체류를 부추기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동포들의 불법입국 경위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순박한 조선족동포들에게 한국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브로커들의 소행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 오면 쉽게 돈을 벌게 해주고 또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한이 3개월이면 끝나는 데도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5년을 체류할 수 있으며 영주권까지 얻게 된다고 속여 중국동포의 한국행을 부추기는 사례도 많다.
브로커의 말을 들어보면 1000만원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중국동포들은 쉽게 갖게 되며 ‘코리언드림’에 푹 빠지게 된다. 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로 여겨질 정도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중국동포의 한국행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한국에 왔지만 결국 브로커에 속아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돈도 아무 영수증 없이 현금으로 주었기 때문에 증거도 손에 쥔 것이 없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오로지 살아남는 길은 한국에서 불법체류하며 사기당한 돈을 벌어 갚고 생활밑천을 마련하는 길뿐인 것이다.
그나마 한국에 온 사람들은 다행이다. 회사이름으로 초청해준다 해놓고 돈만 가로챈 브로커들에게 걸리면 한국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영락없이 사기피해자로 중국땅에서 떠돌아다녀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중국동포들 또한 적지 않다.
넷째, 번 돈을 상업자본으로 돌리지 못하고 한국입국비용으로 대여해주는 악순환이 중국동포의 불법체류가 늘어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한국에 진출해 나름대로 성공한 동포들도 있다. 한국에 와서 1년만에 빚을 갚고 2년 더 일하면 중국에서 벌 수 없는 큰 돈을 벌게 된다. 문제는 중국동포들이 그 돈을 건전하게 상업자본으로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친척이나 고향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오는데 밑천으로 빌려준다. 그렇게 하다가 한국에 오는 것이 실패하거나 돈도 못벌고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하면 당사자는 고향땅을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또 여러 명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부인이 먼저 와서 남편의 입국비용을 대는 경우, 또는 남편이 먼저 와서 부인의 입국비용을 대는 경우가 일반적인 사례인데, 그런 경우 브로커를 통해 여권을 위변조하거나 위장결혼 방식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법과 제도에 대해 無知한 상태에서 그저 한국에 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들어온 중국동포들이 불법체류자로 고액의 빚을 지고 한국생활을 시작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
그런 사정에 놓여있는 중국동포들을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강제추방을 시킨 법무부 출입국공무원과 경찰관에 대한 두려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국내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동포들은 항상 쫓기는 듯한 인상과 불안감과 초조함, 그리고 언제 붙잡혀 강제추방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져있게 되는 것이다.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한 중국동포들의 고통은 아주 큰 것이었다. 고국에 대한 원망도 컸을 뿐만 아니라 강제추방 당한 동포들은 또다시 빚을 내어 여권을 위변조하거나 밀입국으로 재입국을 시도한다. 이런 것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속에서 ‘불법체류외국인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중국동포들은 1999년 9월에 재외동포법이 발표되었을 때 명동성당에서 거꾸로 매달려 시위를 하며 ‘부자집으로 시집간 딸은 딸이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간 딸은 딸이 아니냐’며 한국정부의 재외동포 차별정책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 2000년도에 들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중국동포 관련 종교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그것을 배경으로 한국정부의 차별정책과 단속위주의 정책에 맞서 시위에 동참하는 중국동포들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거나 카메라에 얼굴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했던 동포들이 종교사회단체에 의지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할 말은 해야겠다”는 입장으로 나온 것이었고 그것이 곧 국내에서 중국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을 크게 바꿔놓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본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동포들의 국내에서 생활모습이 TV화면으로 비춰지기 시작했고 안산 원곡동과 서울 가리봉동과 같은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이 형성되어 이들만의 ‘독특한 문화지대’에 대한 언론방송의 관심도 커졌다.
3. 중국동포들의 불법입국,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국에 친척이 없는 중국동포들 중 상당수가 밀입국, 여권위변조, 위장결혼 등 불법입국을 통해 들어와 인권사각지대에 놓여 있게 된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중국과 한국의 사회적 현실과 법․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조선족사회의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중국에서는 돈만 주면 안되는 일이 없다 할 정도로 여권 호구부 등 공문서 위조가 쉽게 일어나고 큰 범죄처럼 인식되지 않는 반면 한국사회에서는 공문서위조는 무거운 형벌 대상자이다. 한국인과 중국동포 간의 국제결혼 수자도 급증하고 있는 시점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볼 때, 상대방이 누구인지 심사숙고해보지 않고 결혼하는 중국동포의 결혼관은 한국사회에서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서 문제해결이 어려운 점도 발생하고 있다.
한 예로 결혼으로 들어온 중국동포 김정숙(가명)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김정숙씨는 2003년 3월경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하고 같은 해 8월 한국에 들어왔다. 김복순씨는 8월 9일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체류자격(F-2-1)을 부여받고 한국인 남편과 함께 2년 가까이 생활해오고 있으며 92세된 시어머니(2005년 5월 사망)를 1년간 모시고 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천공항출입국 소속 직원이 2006년 6월 20일경 한국인 남편에게 확인 전화가 왔다. 결론은 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 조사과에 출두하여 결혼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때 인천공항출입국 직원이 지적한 것은 김정숙씨의 생년월일이 원래 56년생인데 왜 58년생으로 고쳐 들어왔는가 점이다. 여권위변조에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김정숙씨는 한국에 와서 잡혀간 것이 있어서 생년월일을 56년에서 58년생으로 고쳤다고 사실대로 실토하게 되었다.
김정숙씨는 2000년 4월 14일 회사초청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 그 당시 체류기간을 연장하여 합법체류 기간 중 군포에 소재한 다방에서 종업원 식사를 제공해주는 주방 일을 하다가 체류목적외 활동으로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 김정숙씨의 생년월일은 1956년 10월 7일생이었다.
그런데 2003년 3월 김정숙씨는 한국인을 만나 결혼하여 제2의 인생을 살기로 하고 한국에 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김정숙씨는 생년월일을 58년 10월 7일생으로 고쳐 여권을 발급받게 되었다. 김정숙씨는 중국돈 150위안을 들여 합법적인 방법으로 호구부상 나이를 고쳤기 때문에 다시는 56년생으로 원상복귀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출입국 직원은 김정숙씨의 말은 거짓말이고 어떻게 원적본의 나이를 그렇게 쉽게 고쳐서 나올 수 있느냐고 의심하고 있다. 이미 2년 가까이 결혼 생활을 했지만 결혼생활도 허위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와 김정숙씨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출입국 직원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왜 동포들은 밀입국, 여권위변조, 위장결혼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한국에 정당하게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좁았기 때문이다.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친척초청이 일반적 것이다. 그 상황을 보면,
2000년까지만 해도 친척방문 허용연령은 50세 이상이었으며, 2002.11.1 중국동포에 대한 입국문호 확대 차원에서 친척방문 허용연령을 종전의 45세에서 40세로 하향조정하여 시행한다. 대상은 국내의 배우자, 8촌이내의 혈족 또는 4촌 이내의 인척을 방문하고자 하는 자로 40세 이상인 자이다. 단, 한중수교(92.8.24)이후 국민과 결혼 등의 사유로 한국국적을 취득한 자가 중국거주 친척을 초청하는 경우 제외되었다.
2003.5.10 법무부는 취업관리제를 도입하여 중국동포들에 대한 고국방문 및 취업기회를 확대하기 위하여 친척방문 허용연령을 30세 이상으로 대폭 하향조정하고, 혼인․귀화 등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동포들에게도 일정한 범위내에서 친척을 초청할 수 있도록 현행 중국동포 입국절차를 개선했다. 가족당 연간 2명 이내에서 초청을 허용하고 입국후 불법체류하지 아니하고 귀국하는 경우 대체인원 초청도 허용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8촌 이내의 혈족 또는 4촌 이내의 인척으로부터 초청을 받는 30세 이상의 중국동포들은 주중공관에서 방문동거(F-1) 사증을 발급받아 입국하여 친척을 방문할 수 있게 되며, 또한 소정의 절차를 거쳐 음식점업, 청소업, 사회복지사업 등 6개의 서비스분야 등에서 합법적으로 2년간 취업할 수 있게 된다.
현행 친척초청 허용범위는 25세 이상으로 하향조정되었다. 그만큼 한국에 친척이 있는 동포들의 경우 한국입국이 수월해졌다. 문제는 200만 조선족동포 중 중 한국에 친척이 있는 인구는 30% 정도로 파악되며, 동포들이 가장 많이 밀집거주하고 있으며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연변지역의 조선족동포들은 대개 북한출신들이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연변 조선족동포들은 결혼으로 귀화한 자들에 의한 친척초청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중국동포의 한국 입국문이 좁다보니 결과적으로 불법입국을 알선하는 브로커들을 양상시켰고 이에 입국사기를 당한 동포들이 늘어난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4. 한국속 조선족타운 - 한국과 중국문화의 접합점
한국에서 중국동포의 생활근거지를 찾아보면 초창기 서울역 뒷골목 판자촌에서 비롯되어 청량리, 난곡 등 한국의 빈민지역으로 퍼졌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중국동포들이 밀집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꼽으라면 대표적인 곳은 안산 원곡동과 서울 가리봉동이다. 안산원곡동과 시화․안산공업단지를 배후로 두고 있고 가리봉동은 구로디지털단지를 배후로 두고 있다.
가리봉동에 동포들이 밀집거주 하게 된 배경은 저렴한 방값을 지불하고 생활할 수 있는 쪽방이 많다는 것이다. 일종 벌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70년대 구로공단에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젊은 한국인노동자들이 거주하던 방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텅텅 비어있다가 90년대 후반부터 그곳을 중국동포들이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안산원곡동에는 동남아시아 외국인노동자들도 몰려있으면서 중국인과 중국동포들이 3만에서 5만명 가까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가리봉동은 5천에서 1만명이 거주하고 가리봉동을 끼고 있는 구로구와 금천구 가산․독산, 영등포구의 대림․신길, 관악구의 봉천․신림 지역에 3만에서 5만명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이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중국동포의 문화는 이색적이다. 향이 짙은 중국음식과 40도가 넘는 고량주, 대표적인 서민술은 코베이(컵술)이다.
즐겨먹는 음식은 개고기, 냉면, 만두, 양꼬치, 훠구어(샤브샤브) 등으로 한국풍보다는 중국풍에 더 가까운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그동안 알려진 중국요리집, 차이나레스토랑의 음식과는 다른 정말 중국본토배기의 음식맛을 안산원곡동과 가리봉동 중국동포타운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음식문화를 놓고 볼 때 중국조선족은 분명 한국보다 중국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래문화만큼은 영락없이 한국의 대중문화에 가깝다.
중국동포 밀집지역의 특징은 노래방이 많다는 것이다. 가리봉동의 경우 2002년이후 3배가 늘어 한 집 걸러 하나의 노래방이 있을 정도로 26개의 노래방이 생겼다. 중국노래도 있지만 역시 중국동포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는 한국의 대중가요이다.
필자는 중국동포타운이라 할 수 있는 가리봉동을 2000년부터 다니며 중국동포들의 생활면을 가까이에서 보아왔고 2003년 5월부터는 가리봉동에 거주하며 중국동포와 한국지역민이 함께 하는 동포타운을 만드는데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다.
활동을 하면서 필자는 ‘과연 중국동포와 한국인은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왔다.
이것은 결코 쉬운 질문이 아니었다. 중국동포와 한국인은 서로 언어가 통하기 때문에 언어 장벽 없이 쉽게 친해 질 수 있지만 관계가 발전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속칭 끼리끼리 문화가 중국동포사회도 아주 강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동북3성에 퍼져있는 중국동포들은 연변사람, 흑룡강사람, 심양사람 등 지역적으로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으며 고향사람끼리 어울려 음식을 나누고 친목모임을 갖는다. 이것은 한국사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한반도 4배에 해당하는 동북3성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200만 조선족사회는 지역색이 더욱 뚜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좋은 예로 중국동포들은 음식맛에 상관없이 고향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식품점 등을 단골집으로 정해놓고 이용하는 소비형태를 볼 수 있다.
또한 생활면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가리봉 지역주민과 상인들이 갖는 중국동포에 대한 시각을 보면, 중국인(중국동포)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술을 많이 마시고 놀음을 좋아하고 위아래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막말을 하고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고 싸움이 일어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거친 기질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대체로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시각은 선진국 수준에 올라가 있는 한국사회와 생활문화에 20년에서 30년 가까이 뒤떨어진 사회에서 살다온 중국동포들이 사회질서에 대한 기본 인식이 부족하고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분석된다.
분명 안산원곡동과 서울 가리봉동과 같이 중국동포들이 밀집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한국과 중국문화가 공존하는 이색적인 지역임에 틀림없다. 이곳 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 지역민은 중국에 가보지 않고도 중국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5. 한국인과 중국동포 - 반듯이 극복해야 할 갈등과 불신의 벽
경제적으로는 10배 이상의 차이가 나고 사회체제가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50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이 만났을 때 관계가 서먹서먹해지고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과 중국동포의 만남은 상호 그리움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갈등과 불신이 점철된 20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면 안되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런 가운데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이 30만을 넘어서고 앞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런 한국인을 ‘신선족(新蘚族)’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거주하는 중국동포는 현재 20만 가까이 되며, 앞으로 그 인원도 더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국적을 취득한 중국동포도 6만명 가까이 되고 있다.
중국동포와 한국인은 많은 차이점이 드러난다. 쉽게 말해 말은 통하지만 중국동포는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사고방식과 생활문화 등이 한국보다는 중국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중국동포들도 궁극적으로는 한국보다는 중국에서 살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다. 중국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고 생활이 어려워서 지금은 한국에 와서 국적도 따고 취업활동을 하지만 중국의 경제상황이 나아지면 중국에 가서 살겠다고 말하는 중국동포들이 더 많다. 실제로 한국에 몇 년씩 와서 돈을 번 중국동포들은 중국에 투자하여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 예로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동포들은 대개 여성들인데, 자녀교육을 대개 중국에서 시키고 있다. 한국에서의 교육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자녀의 미래를 생각해볼 때 중국에서 교육받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교육을 선호한다는 것도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과 중국동포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유발되는 곳은 노동시장이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중국동포들은 다른 외국인노동자와 달리 건설현장, 식당, 가정부 등으로 취업이 가능하다. 그러다보니 노동시장에서 하루하루 일하며 살아가는 저소득층 한국인과 충돌이 일어나고 더욱 많은 갈등이 유발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동포 입장에서 보면 노동시장에서 같은 민족이고 또 한국인노동자보다 힘든 일을 더 많이 하고 노동시간도 긴데 임금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한국인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인력난에 고민하는 고용주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중국동포는 일자리를 잠식하는 중국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노동시장에서의 한국인과 조선족동포의 충돌로 말미암아 한국인에 의한 신고로 강제추방을 당하는 중국동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악덕업주가 노동을 시키고 임금을 주지 않을 목적으로 불법체류 신분을 악용하는 사례까지 발생해 인권문제로까지 번져나간 것이다.
중국동포들은 한국사회에서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알려져봤자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불이익을 많이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법체류 상태에 있는 중국동포들은 임금체불 산업재해 등을 당하고도 강제추방이 두려워 말을 못하고 있는 경우도적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인 신분을 이용해 건설현장 등에 취업하는 경우가 늘어나 오히려 그것에 발목잡혀 어려움을 겪는 중국동포들도 많았다.
이것은 곧 중국동포들의 ‘반한감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동포의 반한감정이 최고조로 이르게 된 것은 2002년초 법무부 ‘불법체류 종합방지대책’이 나오기 전까지 인 것으로 판단된다.
분명 강조하고 싶은 말은 한국인과 중국동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국인 위주의 지나친 노동시장 보호정책 보다 열심히 일하고 생활하는 중국동포를 지원해주는 정책을 펼치는 것이 바람직하며 미래지향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과거에 빚어진 갈등과 불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며 해체위기에 놓인 조선족사회를 바르고 건강하게 재조합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6. 중국동포 합법화 시대를 맞이하며
중국동포 불법체류외국인노동자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합법화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것은 다소 때가 늦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국과 중국이라는 경제․사회․문화적 차이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생각한다. 이젠 서로 이해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한국정부의 동포 포용정책 일환으로 실행한 2005년과 2006년도의 ‘동포 귀국지원프로그램실시’에 의거 불법체류 중국동포들이 합법적인 신분으로 한국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해주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본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동포들이 한국정부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모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다시 갖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중국동포를 위해 방문취업비자(H-2) 신설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중국동포는 한국에 5년동안 자유롭게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체류할 수 있고, 또 3년간 취업활동도 할 수 있게 된다.
중국동포들이 절대 다수가 불법체류 상태에 있을 때와 합법상태로 전환되어 가는 현 시점에서 중국동포들의 생활방식 또한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젠 불법체류 중국동포의 인상을 지우고 새롭게 중국동포에 대한 시각을 가져야 할 때라 생각한다.
한국인이 중국동포에 대해 갖는 긍정적인 시각이라면 중국동포가 강한 독립심과 생활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동포는 13억 인구의 중국땅에서 수작농업인으로 우수한 민족성을 보여주었고 중국내 다방면에서 주요한 활동을 해왔고 지금도 우수한 인재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는 해보지도 않은 일도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일하는 중국동포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인이 하지 않는 3D업종에서 중국동포 대부분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 발전하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중국동포들의 한국사회와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한국에서 3년 이상 생활해 본 중국동포들은 중국보다 한국에서 살기를 더 원한다. 그 이유는 한국의 발전된 문화양식과 한국인의 교양 있고 친절한 태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고, 심지어 각 사업장에서의 서비스정신과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돕는 자원봉사와 나눔의 정신을 본 중국동포들은 한국사회에 와서 배워야 할 점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필자는 한국인과 중국동포는 상호보완적으로 서로 협력하면 충분히 함께 미래를 펼칠 수 있는 희망찬 시대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는 것이 필자가 갖는 바램이자 동포활동가로서 갖는 사명이기도 하다. <끝>
출처 : 인생은 차곡차곡
글쓴이 : 5월의 태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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