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ROSS(존 로스)/한국의 첫 선교사
3. 첫번째 안식년(1879-1881) 2.
그때 중국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강하게 건의하면서 "중국은 미래 아시아 선교의 발판이요, 세계선교를 위해서는 중국선교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중국선교의 전략적 중요성과 문화수준을 높이 평가해서 주장하기를 "평범하거나 국내에서 그 이하 수준의 선교사
파송은 무의미한 것"이라 했다. 이것은 곧 중국파송 선교사는 최고
수준의 실력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로스목사는 동북 중국과 조선의 선교 중심지로서 만주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해 7월 로스목사는 페이즐리(Paisley)에서 살았다. 그곳은 존.맥킨타이어 부모의 고향일 뿐 아니라,
로스목사의 동생인 도널드가 1878년 이래 개업했던 글래스고우와 가까운 곳이었다. 같은 달에 도널드가 선교할려고 선교부에 신청했으나 그 뜻이
성취되지 못하였음을 알았다. 또한 페이즐기는 로스목사가 그의 출판사인 제이 앤드 알 파래인(J.and R.Parlane)이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중요시된다. 1879년 말 그 출판사는 로스목사의 첫번째 큰 책을 만들었다. 페이즐리에 있을 때 로스목사는 그들과 이 책의 출판에 대해
얘기하고, 그때 원고를 주었음이 틀림없다. 이 책은 동양학 연구의 이정표였는데, 그 제목은 '조선의 고대 근대사'('History of
Corea,Ancient and Modern')였다.
이것은 그의 세번째 작품이나 초기 저술 중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이 책의 영어판은 처음 어떤 서양어로서
출판됐는데,조선사(史)에 대해서는 최초의 저술이었다. 물론 드 할드(de Halde)신부의 청제국에 대한 기록 ('Description...de
la Chine et la Tartarie Chinoise'[1735])에서 조선에 대해 한 단원을 썼으나, 그것은 내용이나 분량면에서
로스목사의 그것과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스목사의 기술 중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는 한국 역사를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조손에 대한
자료가 없었으므로 중국역사 자료를 사용해야 했다.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조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로스목사를 거쳐야 됐을
것이다.
1880년 5월 로스목사는 에디너러의 시너드(Synod)4)에 참석해서 중국 선교의 최근 현황을 얘기했다. 그가 조선 고대 근대사를 쓰고 난 후부터 시너드에
참석하는 중간에 각 교회에서 설교 현황을 발표할 기회가 없어서,조선 고대 근대사의 속간인 '만주족:중국의 현대 왕조'('The Manchus,or the Reigning Dynasty
of China')글 쓰기에 몰두했다. 시너드가 끝난 뒤 이것은 제이 앤드 앞 파레인 출판사에서 나왔고,9월에 런던에 더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잡지는 이를 칭찬했다. 이것이 중국과 중국인의 가능성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보였기 때문에 로스목사를 중국에 대한 열광자로
표현했는데 그가 중국인에 대해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나왔던 책고 마찬가지로 이것은 그 기언과 자료를 사용하는데 생생한
필체로 썼다고 칭찬받았다. 이 출판은 동아시아와 연구에 훌륭한 학자로서 로스목사의 명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로스목사는 저술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첫 안식년에 그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 또한 영어로 동양역사에 관한 책
등 두 권을 썼고, 연합 장로교인을 위해 중국에 대한 소개의 글도
썼다. 1880년 11월 연합장로교 선교보고에,중국의 지리와 인구에 대해 '中國의 廣大'('The Extent of China')라는 제목을
붙여 썼다. 1881년 1월 같은 잡지에 '중국의 민족'('China's People')이라는 제목을 붙여 그들의 그년성을 찬양했다. 3월과
5월호에 '중국인의 교육'('Chinese Education')이란 제목 하에 중국인 교육제도와 한문과거시험에 대해 설명했다.
1881년 2월 24일 로스목사는 재혼했고,두번째 그의 아내 이사벨라스트랩 맥패디언(Isabella Strapp
McFadyen)은 그의 여생의 반려자로 그에게서 8명의 아이들이 출생했으나 그중 넷만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난
장자 드러몬드는 4월 중순 영국을 떠나 5월 25일 영구에 도착했다. 이때가 그의 저술의 전성기였다. 39세에 로스목사의 사역은 영광스러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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