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 조선족 생활 보고서

올린시간: 2007-12-06 08:51 | 작가: webmaster | 출처: 길림신문                                  

   재한 조선족 41명에게서 듣는다

 

재한 동향회 모임에 참가한 재한 조선족들 모습.  / 사진 한정일 기자

재한 조선족들은 힘들게 돈을 벌어서는 그 돈을 어떻게 소비하고있는가? 어느 정도 송금하고있는가? 그들의 희로애락은 무엇일가? 한국중국에서 견우직녀의 부부감정은? 그리고 재한 조선족들이 생각하는 정착지는 어디인가?...

이번 한국에서의 《재한 조선족 삶의 현장》 취재에서 기자는 재한 조선족 32명에 대한 전화취재와 9명에 대한 대면취재를 통해 상술한 문제들을 두고 알아보았다. 전면적이지 못하지만 재한 조선족의 생활현황과 마음을 살펴볼수 있는 좋은 계기라 할수 있다.

성별과 년령단계에따른 소비경향

이번 한국 취재길에서 기자는 재한 조선족들의 세집 3집을 방문했었고 랭동칸에 고기 한칼 없는 랭장고도 열어보면서 그들의 생활수준이 우리 중국조선족들의 생활수준보다 많이 뒤떨어져 있음을 알게 됐다.

배추값이 올라 마음대로 사먹지도 못한다고 했다. 참으로 눈물나는 말이였다.

김치 한쪼각에 물에 밥을 말아 대충 끼니를 에우고는 일터로 냅다 뛰는 재한 조선족들, 한국에 간지 몇년이 되도록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물건 한가지를 사도 중국돈으로 환산해 본다는 그 습관, 중국에서 그렇듯 좋아하던 술이며 담배며를 절제하는 그들…

그들은 자기 자신들에 한해서는 그렇듯 돈을 아끼며 중국에 있는 자식 공부 뒤바라지를 하고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 주고있었다.

특히 녀성들 대부분이 생활에서 돈을 아끼고있었고 부부 함께 한국에 나가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돈을 함께 모으며 아끼고있었다.

남자들의 경우는 40대 후반과 50대 절대대부분이 중국에 있을 때처럼 모여서 흥청망청 식당 술놀이 같은것을 안했고 친구거나 손님이 찾아와도 음식점에 가지 않고 고기, 채소 등을 시장에서 사다가 세집에서 끓여 소박하게 술 한잔씩 나누고있었다. 고기, 김치 따위도 마트에서 사면 비록 맛은 있어도 비싸다며 시장에 가 사고있었다. 중국에 있을 때 같으면 손님을 집에 데리고 오고 자기가 직접 끓여 대접한다는 자체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한국술은 비싸다고 안사고 한국에 들어온 중국 북경의 《얼궈터우》거나 심양 《고량주》 같이 엄청 싼 술을 샀고 일하고 들어와서는 피곤한 몸을 그런 술 한잔으로 달래고있었다.

남자들 40대의 경우는 한국에 오래 있었거나 재입국을 한 사람일수록 돈을 아끼고있었다.

금방 한국에 와서는 올 때의 빚을 갚느라 돈을 아끼고 헤프게 쓰지 못하다가 빚을 다 갚은 후에는 한시름을 놓고 돈을 헤프게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2~3년을 지나고 어느날 돌아보니 《아차!》 한국에서 여러 해 돈을 벌었다는게 모아둔 돈이 없다는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때로부터 다시 돈을 아끼기 시작했다.

특히 40대 중반부터는 모아놓은 돈은 없고 자식 대학공부를 시키고 시집장가 보낼 일도 어깨 무겁게 안겨오는데 몸은 조금씩 아파오고 쉽게 피곤하니 정신차리고 돈을 아끼고 모으고 한다.

남자들 미혼이거나 30대―40대 초까지는 아직 튼튼한 신체라는 밑천이 있어 맥이 있고 정력도 있기에 희망이 있고 아직 돈을 벌 나이 시간이 많으며 돈은 써도 또 벌수 있다고 자신하기에 돈을 쉽게 쓰고있었다.

특히 미혼 등 젊은이들은 돈을 헤프게 쓰는데 일부는 녀자친구를 사귀고 선물도 사주며 술놀이도 하고 유흥가에도 드나들며 마작도 논다. 하지만 이 부류는 필경 극소수였다.

국내에로의 송금문제

한달수입에서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부치는 상황도 적잖게 년령이 작용하고있었다.

전화조사 결과 50―60대 남자들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세집비에 교통비, 식비, 전화비 등 최저한의 생활비를, 회사에 다니는 남자들의 경우는 회사에서 떼내는 의료보험비 등과 회사에서 식사를 제공해 주지 않는 주말 휴식일의 식비, 전화비 등 최저한의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절대대부분을 중국에 있는 가족에 돈을 부쳐주고있었다.

연변에서 간 51세의 한 조선족남성은 농장에서 먹고 자고 하는데 의료보험 등을 제한 나머지 월급을 몽땅씩 중국에 있는 안해에게 부쳐주고있었다.

회사에서 주숙하고 식사를 제공받으며 일한다는 50세의 한 남성은 회사에서 월급 150만원을 받는데 자기가 쓸 돈 20만원을 남겨놓고 나머지 130만원을 몽땅 집에 보내주고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아들 대학공부 뒤바라지가 포함되여 있다.

지방의 모 병원에서 청소일을 하는 60세의 한 조선족남성은 한달 월급이 70만원인데 병원에서 주숙하고 식사를 제공받는다며 버는 족족 돈을 몽땅 중국 안해에게 보낸다고 했다.

여기에서 년령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였다.

장춘에서 간 한 조선족은 42세지만 철관제조회사에 근무하면서 받는 월급 100만원에서 최저한으로 자기가 쓴 외의 돈을 몽땅 중국 가족에 보내준다고 했다. 한국 와서 돈이 아까워 담배는 끊고 술은 고독할 때면 한잔씩 한다고 했다.

그외 남자들 40대 후반까지와 녀자들 대부분이 중국에 있는 가족에 아이들 교육비와 가족생활비 정도를 보내주고있었다.

중국에 보내주는 《생활비》란 구체적으로 수자 얼마냐는 기자의 물음에 피조사자 대부분이 밝히기를 꺼려했다.

한국에 간지 3년이 된다는 휘남현의 50대 남자는 음식점 주방에서 료리사로 일하는데 월급 150만원, 중국에는 아들딸 둘이 공부를 하고있는데 자신의 세집비 등 《나도 살아야 하니》 월급의 절반을 중국가족에 보내준다고 했다.

한국에 온지 1년 8개월이 된다는 40대 중반의 한 조선족녀성은 변압기뚜껑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데 월급 120만원, 남편도 함께 한국에 왔다가 골괴사병으로 다섯달전에 귀국, 딸애는 중국 모 일본인회사서 통역으로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매달 30만원씩 보내주고있었다.

그녀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자기는 남편과 통화할 때마다 마누라를 만날 때까지 몸조심하라는 부탁이란다.

한국에 온지 8년, 식당일을 한다는 한 조선족녀성. 중국에서 병으로 여직껏 일 안하고있는 남편에게 그녀는 매달 생활비로 20만원도 보내고 30만원도 보내주고있었다. 아들은 외지에 나가 출근하고있어 자기가 보내주는 돈으로 남편 혼자 살기엔 넉넉하다고 했다.

가족에게 생활비와 교육비를 보내주는 외의 돈을 자기의 부모거나 형제, 친구에게  보내 저금하게 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구태시 농촌출신으로 장춘시에 세집을 맡고 살던 한 조선족남자는 건설현장에서 목수일을 하는데 일이 있을 때에는 일당 10만원으로 수입이 높은 축이였다. 그는 안해와 소학교에 다니는 딸애가 있는 장춘가족에게는 생활비를 푼푼히 보내고 나머지는 영주권자로 한국에서 사시는 부모님에게 돈을 맡겨 저금해 두게 하고있었다.

2년전 한국에 간 한 조선족녀성도 중국에 있는 남편한테 가족의 생활비와 아이 교육비만 보내고 나머지를 한국에 시집온 언니 앞으로 저금하고있었다.

3년전 한국에 간 한 조선족녀성은 중국가족에 생활비를 보내는 외 나머지 돈은 중국에 계시는 친정어머니에게 보내고있었다. 친정어머니는 딸의 이름으로 따로 저금증을 만들어 놓고 딸이 피땀으로 버는 돈이라며 단 한푼도 다치지 않고있단다.

중국에 있는 친한 친구에게 돈을 보내는 녀성들도 있었다. 중국에 있는 한 조선족녀성은 한국에 가있는 친구 셋으로부터 《저금보관해 달라》며 보내오는 돈을 받고있는데 그녀는 그 돈을 받아 중국에서 투자를 해 자기의 돈벌이를 하고있다. 헌데 돈을 보내오는 한국의 친구들은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국가족에게 왜 생활비만을 보내는가? 다 보내지 않고》라고 묻는 기자의 물음에 40대 후반이라는 한 조선족남자는 전화통화에서 언성을 높여 《당연하지 않냐》고 반문아닌 반문을 했다.

돈을 중국에 보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한 남자는 5, 6년전 싸이판에 갔다가 3년만에 중국에 돌아왔는데 안해가 남편이 없는 사이 다른 남자와 동거한 사실이 들통났다. 남자는 곧 리혼을 하고 한국으로 갔다. 헌데 기자의 눈에 비친 그는 남들과 같이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돈을 악착같이 벌려고도 하지 않았다.

《힘들게 벌어서보낸 돈인데…》

한국에 온지 다섯달밖에 되지 않으며 가사도우미를 한다는 50대의 한 조선족녀성은 남편이 1992년 중한 수교전에 한국에 와서 여태껏 남편 혼자 벌어서 자식 둘을 류학공부까지 시켰다며 《한국에 온 사람들이 바보라고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몽땅몽땅씩 중국에 보내겠는가?》고 했다.

지난 15년간 중국에서 남편의 돈을 받아썼고 오늘은 한국에 와 자기도 힘들게 일해 돈을 벌면서 중국의 현실과 한국의 현실을 다 잘 아는 녀성의 말이였다.

한국에 온지 10년이 된다는 40대 중반의 한 조선족녀성, 그동안 식당 주방일만을 하다나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 아침에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벌벌 기다싶이 일을 나간다고 했다.

그녀는 기자에게 《저는 지금까지 불법이예요. 하나라도 돈을 더 벌 마음에 〈자진귀국〉을 못했는데 〈자진귀국〉으로 중국에 갔다온 친구들이 제가 아픈 몸을 끌고서도 계속 일하는것을 보고 〈네가 암만 악착같이 돈을 벌어 가족에 보내주면 뭘하냐? 이젠 치료도 하고 쉬며쉬며 일해라. 이번에 중국에 가보니 우리들이 한국에서 그렇게 힘들게 벌어 보낸 돈으로 중국에서 가족들은 술놀이란 술놀인 다 하고 고급옷 사입으며 흥청망청 잘도 쓰더라〉고  하데요. 그 소릴 듣고 사실 충격이 컸습니다. 마음이 많이 서글펐어요》라고 고백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자는 중국에서의 우리들의 생활을 되돌아보고 반성해 보지 않을수 없었다. 한국에 가 고생하는 그들에게 비하면 중국에서의 우리들의 삶과 생활은 실로 사치임을 페부로 절감했다.

수자로 따져보는《가계부》

부엌칸까지 합쳐 3평방메터나 되나마나한 다락세집에서 만났던 40대 후반의 한 조선족녀성은 한달 수입지출 상황을 묻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출부사무소에 회원으로 등록하고 일당으로 전문 식당파출부일―홀써빙(복무원)을 하고있는데 하루에 평균 13시간―14시간 일을 하며 일당 5만원, 한달에 25일을 일해 127만원을 수입한다.

그 가운데서 집세 한달에 15만원, 전기세 물세 한달에 1만 5000원, 가스비 겨울에는 많이 써 7만원 정도, 여름에는 적고… 전기세, 물세, 가스비를 합쳐 평균 한달에 5만원 정도, 교통비 4만원, 전화비 평균 5만원, 매달 파출부사무소에 회비 3만원, 그외 약간의 화장품을 사고… 필수생활소비 지출은 거의 40만원에 달했다.

거기에 중국에서 대학교에 다니는 딸애에게 1년에 학비와 생활비 도합 200만원을 보내주고 1년에 한차씩 중국의 집에 다녀오느라 일 못하고 또 중국에 와 부모 만나보고 소비돈 조금 드리고… 하고나면 결국 1년에 500만원(중국 인민페로 4만원이 안됨) 정도밖에 모으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쌍양 농촌에서 한국에 온지 1년 남짓 된다는 한 40대 중반의 조선족남자, 안해도 한국에 금방 왔는데 일터가 달라 따로따로 기거하고있었다. 안해는 몸이 아파 사흘 일하고 하루 쉬고 했다.

그 자신은 건설현장에 일당으로 뛰는데 일당 수입은 5만원,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일하러 나가면 저녁 8시에 집에 도착, 그때에야 자체로 밥 해먹고나면 잠이 항상 모자란단다. 담배는 조금 피우는데 술은 이튿날 힘들어서 안한다고 했다.

그렇게 어렵게 버는 돈이였다.

중국에는 고중과 소학교에 다니는 자식 둘이 있는데 장춘에 세집을 맡아주고 누나한테 부탁했다. 고중에 다니는 큰애 일주일 식비만도 인민페 100원이다. 아이 둘의 생활비(먹고 입고 쓰는 비용), 학비, 잡비로 도합 1년에 500만원을 부쳐주고 장춘시의 세집비를 보내주며 누나라고 적게 드리지만 아이들을 돌봐준다고 수고비로 1년에 250만원을 드리고 편찮으신 몸으로 홀로 계시는 어머니께 생활비 보내드리고… 하고나면 남는 돈이 얼마 없다며 한숨을 쉬였다.

한국에 간지 얼마 되지 않는 조선족들의 경우에는 매 하루를 힘들게 암만 암만 벌어도 자신이 최저한의 생활을 하고 중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비와 자식들의 교육비 외에도 인민페 7만원이라는 빚 갚는 일까지 겹쳐져 마음들이 항상 무거웠다.

재한 조선족들과의 전화취재 대부분이 저녁 퇴근후였다. 전화선을 타고 흘러오는, 지쳐서  푹 가라앉은 목소리들을 들으며 기자는 한국에 가 고생하는 우리들의 남편(안해), 자식, 친척, 친구들의 어깨마다에는 참으로 무거운 짐들이 짊어지워 있다는 생각을 가슴아프게 했다.

기자와의 통화에서 조선족들은 적잖게 《돈이 모아지질 않는다》, 《중국에서는 우리가 돈을 엄청 많이 벌어서 엄청 많이 모은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라고 했다.

힘들고 간고하게 돈을 버는데 비해 생각과 같이 모아지지 않는 안타까움이였다.

부부 감정

한국 88올림픽때부터 2년전 한국에서 《자진출국, 재입국》 제도를 실시하기 전까지 한국과 중국에 갈라져 살며 그리움에 울고 상대방의 불신과 배신, 외도, 타남과의 동거 등으로 울던 우리 조선족부부들, 재한 조선족들이 한국정부의 《자진출국, 재입국》 정책에 따라 중국에 귀국을 했다가 다시 한국에로 재출국을 하면서 부부 감정들이 많이 돈독해졌고 믿음이 굳건해졌다. 이젠 언제건 집에 오고싶으면 올수도 있게 됐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조선족끼리의 혼외 《동거》현상은 줄어들고있었다.

한 조선족은 전화통화에서 한국에 친척이 있어 자기는 친척방문비자로 한국에 왔고 안해도 일전 한국의 친척 초청으로 심양령사관에 사증을 신청했는데 퇴짜를 맞았다고 했다.

《안해와 한국에서 상봉할 날을 그렇게 고대했습니다. 그리고 회사 사장님을 비롯하여 직원 모두가 제일처럼 기뻐하며 기다렸는데…》라고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가득 실렸다.

목전 부부 함께 한국에 와 있는 가정이 점점 늘고있었다. 이번 방문취업제로 한국에서 모일 부부 비례가 더욱 늘 전망이다.

함께 한국에 가있는 부부 대부분이 일터 관계로 한 세집에 모여살지를 못했다. 따로따로 살면서 일주일이거나 열흘에 한번씩 모이는 부부들이 많았다. 중국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열흘에 한번씩 부부가 만나 회포를 풀고 정을 나누며 밥 지어 함께 먹고 빨래를 해주고 옷을 갈아입는 그 자체, 평소 힘든 일에 지친 그들에게는 참으로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번의 방문취업제로 한국에서 만나게 되는 부부가 더욱 많아짐에 따라 또는 한국에 가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짐에 따라 원래부터 문제시 되고있는, 중국에 두고가는 자식들에 대한 정감 교류와 교육이 앞으로 한국에 나가는 매 가정, 나아가 우리 전반 조선족사회가 더욱 관심을 갖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로 나서고있다.

가장 큰 보람과희망은 《자식》

재한 조선족들에게 있어 그렇게 힘들게 일해도 보람을 느끼게 하는 일이 있다. 무엇무엇해도 중국에 두고 온 자식이 《잘 한다》는 소식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는 그들에게 식을줄 모르는 열정과 힘을 주고있었다.

전화로 길림신문사 기자라는 자기소개에 하루 일에 지칠번도 한데 확 밝은 목소리에 반갑게 인사하는 분이 있었다.

《중국 장춘에 있는 길림신문사요? 반갑습니다. 저의 딸애가 지난해 길림신문사에서 주최한 학생작문콩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대요. 그 소식 듣고 얼마나 기쁘던지요. 그럼요. 저희들에게 있어 자식 〈잘 한다〉, 자식 〈잘 된다〉 하는 소식보다 더 기쁜 일 어데 있겠어요. 그런 소식 들으면 암만 힘들어도 힘든줄 몰라요. 그 자식놈들을 위해 타국에 와 이 고생을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비록 몸은 천리밖에 떨어져 있어도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는 어시들의 공통된 마음이였고 《자식을 위해 힘들게 돈을 번다》는 재한 조선족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대변하는 대목이였다.

딸애가 장춘시 모 조선족소학교에 다닌다는 한 녀성은 통화에서 《중국에 있는 가족들중 누가 가장 보고싶어요?》라고 묻는 기자에게 《말로 해서 뭘해요. 3년전 어린 딸애를 두고 한국에 왔는데 항상 눈에 밟혀요. 많이 컸을것예요. 어떤 땐 보고싶어 미칠것 같아요.》라고 말하는데 그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방학때면 중국의 려행사들에서 부모가 한국에 가있는 아이들을 조직해 한국에 다녀가는데 경비가 얼마 들지 않는다는 기자의 말에 《그래요?!》 반갑게 반문하는데 그 목소리가 확 밝았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꼭 딸애를 한국에 데려다 만나겠다며 기쁨에, 희망에 부푸는것이였다.

친척 친구 고향사람…사회권의 주축

한국에 가있는 조선족 절대 대부분에게는 한국내에 형제거나 부모, 친척, 친구, 동창, 한마을 사람, 형제의 친구, 아는 사람…들이 있어 명절 때나 누구의 생일 때 흔히 함께 모여 술잔을 나누며 회포도 풀고 노래방에도 가며 명절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있었다.

동창모임도 갖고 오랜만에 맘껏 마시며 평소의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전화취재에서 지난 추석에 어떻게 �는가는 기자의 물음에 재한 조선족 대부분이 추석때 친척이거나 형제끼리 한국에 시집온 딸이거나 녀동생, 조카 또는 시누이 집에 모이고 그런 집이 없을 경우에는 어느 친척세집에 모여 명절을 �다고 했다.

한 부부가 돈이 없어 친척모임에 못갔다고 슬픈 고백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회사에서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 친척모임에 못갔었다고 했다. 그외는 모두가 친척끼리 모여 명절을 �단다.

모임에 경비는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기자의 물음에 대부분 각자 자기의 몫을 갖고간다고 했다. 얼마씩 갖고 가냐는 물음에 명절 때는 2~3만원씩 내기도 하고 생일 때의 축의금은 형제거나 중국에 있을 때부터의 딱친구의 경우 보통 5만원 정도, 한국에 가 알게 된 친구사이는 역시 2~3만원을 내고있었다. 친척늙은이의 생일이거나 노력해도 돈벌이가 잘 안되는 분들의 생일 때는 축의금 10만원씩 갖고 간다고 했다.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와있다는 한 가사도우미 조선족녀성은 명절 때거나 남편의 생일 때 친척들이 자기네 집에 오면 모든 경비를 자기들이 대고 친척들이 내는 돈은 몽땅 돌려준다고 했다.

한국내에 친척이 없는 조선족은 없는듯 하다.

친척끼리, 친구끼리, 한마을 사람끼리, 아는 사람끼리의 모임, 그것은 재한 조선족사회 형성의 튼튼한 기초가 되지 않을가 생각한다.

정착지는 어디?

기자가 실시한 전화조사대상 32명과 직접 대면해 만나보았던 9명 도합 41명중 친척관계거나 한국인과의 결혼을 통한 한국 영주권(시민권)자가 9명, 나머지 32명은 비자 5년의 정상체류자거나 불법체류자였다.

《한국에서 계속 살고싶냐, 아니면 언젠가는 귀국하려는가?》는 기자의 물음에 한국인과의 결혼으로 애낳고 잘 살고있는 사람의 경우는 《한국에서 살련다》고 한국에서의 정착의사를  밝혔고 부모거나 친척 관계를 통한 영주권획득자들은 《중국과 한국에 왔다갔다 하며 살련다》고 밝혔다.

그외의 재한 조선족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비자가 허용되는 한 3년 또는 5년간 한국에서 돈을 벌고 귀국하련다고 귀국의사를 밝혔다.

회사에 근무한다는 한 조선족은 《사실 한국에서 식당에 가도 먹을것도 없는데 한국에서 돈을 벌어 중국에 가 쓰겠다》고 했고 연수생으로 한국에 왔다가 귀국한 후 지난해 말 재입국을 했다는 한 조선족은 《이제 5년간 한국에서 돈 벌어 귀국하련다. 집에 가 사는게 편하다》고 했으며 가정파출부로 일한다는 한 녀성은 《뭐니뭐니 해도 중국이 제일이예요. 여기 온 조선족들마다 〈사람 살기엔 중국이 미국보다 낫다〉고 해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돈을 벌고 귀국해서 마음 편히 살아야지요.》라고 했다.

한국에 온지 13년에 나며 한국에서 엘리베이터 제조회사에 다닌다는 한 조선족남성은 《물론 귀국을 해야지요. 중국은 내 고향인데》라고 했다.

TV곽을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는 35세의 한 조선족녀성, 한국 시민권자인 남편이 지금 중국에서 8살짜리 아들애를 돌보고있는데 이제 며칠뒤 한국에 나온다며 남편과 둬달 함께 있다가 자기는 아들애 교육때문에 명년 년초에 귀국하겠다고 했다.

《왜 남편을 따라 안해와 아들애도 국적을 넘길수 있지 않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녀는 《우리의 아들애는 중국에서 살게 하고싶다. 때문에 나는 남편을 따라 국적을 넘기지 않았다. 물론 아들애의 국적도 넘기지 않을것이다. 명년에 나는 중국에 돌아가고 남편은 중국과 한국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들의 말대로 사람 살기 좋은 중국 그리고 내가 나서 자란 중국,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이 있는 내 고향에 향한 재한 조선족들의 사랑은 깊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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