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조선인10가지 종교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종교를 신앙해 왔다. 중국조선인의 종교는 당연히 조선의 고유한 종교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주이주초기 기독교, 천주교는 조선이민들이 정신적 고통에서 해탈되고 초세적 안위를 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순신앙의 작용, 즉 정신상에서 자아만족을 얻는 것이다. 만주에서의 종교 활동은 점차 조선인의 일상생활 범위에서 벗어나 교육과 사회와 항일무장투쟁과 직접적 연계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 계통의 교세가 이주조선인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도 이 방면의 원인이 있다. 조선광복운동이 종교를 밑바탕으로 일어났고 주요한 령도인물들도 종교계인사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의 대표로는 이상욱 씨와 김약연 씨를 들 수 있다. 종교를 배경으로 한 애족, 애국운동 및 이주조선인의 지도활동의 공적은 마멸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종교단체는 자금을 내여 학교를 꾸리고 반일사상괴 사회개량주의를 선전하였다. 천주교에서 꾸리는 해성여학교, 예수교에서 꾸리는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 대성유교에서 꾸리는 대성중학교, 천도교에서 세운 동흥중학교 등이 그 예로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결속 후 소련10월 혁명의 성공과 더불어 국제형세는 커다란 변화가 일었으며 3 .13반일운동과 더불어 동북의 반일민족독립운동이 획기적인 전변을 가져올 때 종교단체의 민족지사들은 무장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대한군정서는 대종교를, 대한국민회, 대한의군부, 대한북로독군부는 예수교를, 대한광복단은 공교회를, 대한국민의민단, 신민단, 대한공의단, 대한의사부, 대한총군부, 구국군은 천주교를, 야단, 훈춘 한민회, 청년단은 청림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상 단체는 9880명의 인원을 갖고 있었으며 그중 무장대원이 3700명이었다. 이런 반일단체들은 혈전정신을 실천에 옮겼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그 범례이다.

이상과 같은 반일 종교당체가 있는가 하면 시천교와 같은 친일종교가 간도지역에서 일제의 앞잡이로 추악한 면을 보여준 사실도 있다.

1934년 재만 조선인의 종교를 살펴보면

1. 남만지역에 있어서는 교회당이 48개, 기독교신도 9950명으로 그 대부분이 장로파에 속하며 주로 통화, 해룡, 봉천, 안동의 각 지방에 분포되고 기타는 신경, 길림에 소수의 감리교신도가 있었다.

2. 북만과 동몽지방에 있어서는 총수 1570명의 신도가 있었고 대부분이 할빈에 집중되여 장로파와 감리파가 반반의 세력이었다.

3. 기독교의 설교가 제일 설행된 곳은 간도지방으로서 교회당 104개, 신도는 2만 1261명에 달하여 재만 조선인기독교도의 65%를 점하고 있다.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재만 조선인 중에서 거의 세력을 갖고 있지 못하였으며 단지 간도의 용정촌을 중심으로 3000명 신도를 갖고 있을 뿐 만주 각 지역에 있어서는 표면에 나타난 신안자가 거의 없었다.

불교는 고려시대에 정점에 달했으나 이조에 와서 이를 압박, 금지한 결과 장기간에 걸쳐 조선인과 탈리된 종교였기 때문에 이주조선인 중에서 크게 전파되지 못했다.

기타 종교 중 천도교, 시천교, 제우교 및 보천교 등은 남북만주에서 신봉되고 있었으나 조직적인 설교활동은 없었으며 단지 간도에서 이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동 지방에서는 천도교, 시천교, 원종교, 대종교의 각 유파 중 천도교는 약 800명의 신도가 있어 용정촌을 중심으로 설교하고 있었으며 원종교와 대종교는 각각 80명 내지 40명의 신도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종교와 같은 것은 국교적인 성질을 띠고 중, 일 당국에 의해 취제가 심하였다.

유교는 간도지방에서 대성유교와 공교회 두 파로 갈라졌으며 약 1만 7600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향상하는 경향이었다.

1936년 6월 현재 통계에 따르면 교회당이 293개, 신도는 6만 1156명이다. 그중 기독교회당이 233개, 신도 3만 8251명이고 유교회당이 5개, 신도는 1만 4515명, 불교회당 23개, 신도는 3899명이었다. 또한 만주에 설치된 조선인교회에서 경영하는 신학교는 1939년 현재 길림에 신학교, 용정에 성경학원, 사평가에 역시 성경학원이 있었으며 봉천에는 하급전도사양성소와 보모양성소가 있었다.


제2절 종교 각파

1. 기독교

기독교는 1920년대에 조선에서 널리 보급되었으며 교파가 많았다. 예수교 장로회, 감리교, 천주교, 동아기독교, 조선기독교, 재림안식교, 성결교, 조선기독교회 등이 있었다. 그중 장로교의 세력이 가장 컸다. 1940년 5월 19일 일제의 강제적인 시책에 따라 만주 6개 기독교교파는 신경에서 《조선기독교연맹》을 조직할 데 관한 제1차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선언서》를 발표했다.

1941년 8월 신경에서 제2차 연맹회를 소집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 기독교는 완전히 일제의 동아침략의 정신적 도구로 되어 버렸다.

11월 28일, 《합동》결성을 마치고 제1임 총회장으로 봉천 서탑장로교 목사 정상인을 선거했다. 합동 이후 《만주조선인기독교》는 동북을 신경, 동만, 북만, 봉천, 안동과 남만 등 6개 교구로 나누고 사무소를 신경에 설치하고 산하에 총무국, 교육국, 교무국, 전도국, 출판국, 재무국 등 6개국을 두었다.

1). 장로교회

일찍 1880년 기독교장로파는 간도를 카나다 장로파의 전도구역으로 획분하고 조선의 4개 전도구의 하나로 정하였다. 1876년 카나다 《일치선교회》의 마이러타이(麦勒泰) 목사는 조선 평북 의주에서 우장(현 영구)에 이주한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 4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882년 심양에서 조선어로 된 《신약전서》가 이응찬 등의 번역으로 출판되었고 서상륜, 이성하 두 사람은 러스(罗斯)목사의 촉탁을 받고 동만, 남만의 조선인촌락에서 전교하였다. 1884년, 마이러타이, 러스 목사는 동만을 상회할 때 75명 조선인신도들이 자원하여 세례를 접수하였다.

1910년 전후 기독교반일민족주의자들이 유하, 흥경 일대에 정착한 후 기독교전도사도 따라 왔다. 1918년 무순, 봉천, 흥경, 통화, 유하 등 지역서 전파되었으며 경신년대토벌 후 조선난민을 구제한다는 명의로 남만 각 지역에서 모금활동을 벌려 기독교는 남만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1924년 후, 마레주의 전파로 한시기 기독교는 저조기에 있었다. 남만에서 장로회는 통화를 중심으로 그 부근 30리 내에 20여개 크고 작은 교회가 있으며 신도는 1000여 명이었다. 이밖에 유하현에 신도 50명, 집안현에 200명, 장백현에 100명, 흥경 지방에 600명, 휘남현에 1170명, 해룡현에 320명, 안동현(부속지를 포함)에 700명, 봉천부속지에 460명, 그 부근 지방에 200명, 대련에 70명, 기타 부근지역을 합하면 장로회신도 6000여 명이었다.(《재만조선인 사정》)

20세기 초 장로교는 간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김진근(金振谨), 한경희(韩敬熙) 등은 간도에 와 설교하였다. 1902년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구례선(具礼善)과 선교사 조리 홍순도(洪淳图)는 간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활동을 했으며 뒤이어 전도사 안순영이 계속 전도활동을 했다. 1906년 구례선과 홍순도는 용정교회를 세웠다. 그해 전도사 안순영(安顺永)이 중국인교도 선금(单金)의 도움 밑에 선후하여 화룡현 양목정자 (杨木顶子) 교회와 광제암(广济岩)교회를 세웠다.

1907년 조선반일지사 김약연, 구춘선, 마진, 박무림, 강백규 등은 다라즈 장재촌에 명동강습소와 명동학교를 꾸렸으며 서울로부터 장로교회의 정재면(郑载冕)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장로회에 집단적으로 가입했다. 1909년 김약연은 명동교회를 세웠고 성경을 강의하면서 반일민족의식을 선전하였다. 또 이동휘 등은 《러, 중, 조 삼국전도회》의 명의로 조선에서 연변에 와 설교하면서 《종교로 민족을 단결시키고 민족해방을 쟁취》하자고 주장했다. 외국선교사들은 병을 치료해주고 부침 땅을 좀씩 희사하는 방법으로 각지서 설교하면서 많은 군중을 저들의 교회에 흡수하였다. 1911년 현재 간도에는 교회와 집회처가 40여 곳, 교도가 1600여 명에 달하였다.

1912년 카나다 선교사가 용정에 장로교 선전부를 세웠다. 박걸, 구례선 등 선교사들은 용정, 명동을 중심으로 전고활동을 활발히 밀고나갔다. 1914년 이후 명신고등여자학교, 명신여자학교, 은진중학을 육속 창건했고 1916년 5월에는 제창(济昌)병원을 세웠다. 그해 간민회와 훈춘의 한민회를 합쳐 간도《국민회》를 조직했으며 구춘선이 회장에 취임 하고 아래에 80여 개 분회를 앉혔으며 연락지점을 제창병원지하실에 두었다. 전도하는 동시에 반일활동을 벌리였다. 유럽, 미국 등 나라와 일본과의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구미선교사들은 조선인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적극 지지해 나섰다.

1918년 4월,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 교감 정재면 등 39명 반일지사들은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으며 그후로는 반일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암살대를 기반으로 국민회군을 창건하고 안무를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하였다. 그뒤 또 홍범도장군을 초빙하여 군사 령도를 강화했다. 국민회 본부는 《군적등록령》을 반포하였으며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골간을 양성했다. 자금을 모아 무기를 사기 위해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최봉 설, 김준, 전홍섭, 박웅세 등 7명 교도는 조선은행 회령 분행으로부터 용정으로 오는 차를 습격하여 조선은행권 15만 원을 앗아냈다.

1920년 일제의 무장진압 하에 장로회는 심한 파괴를 받았다. 그후 장로회 상층인사들은 반일기치를 내리우고 《구세촌》을 건설한다고 떠들었다. 1921년 12월 1일, 장로교는 토성보에서 회의를 열고 조선 함북로회에서 갈라져 간도로회를 세우고 김내범(金乃范)을 회장으로 선거했다. 1925년 《동만로회》라 재칭하였다. 1926년 3월, 박창옥 (朴昌玉), 이찬걸 등은 왕청 배초구에 예수교청년회를 건립하였는데 회원은 14명이며 문화학습, 신체단련 등 계몽교육방식으로 교회의 영향을 이어갔다. 1936년 6월, 동만 장로회는 간도와 돈화, 영길, 서란, 녕안, 교하, 길림 등 지역에 129개 교회를 설치하였으며 신도는 1만 6000여 명에 달하였다.

1939년 9월 15일, 일제의 통제 하에 동북의 장로교회대표 32명은 조선 신의주에서 열린 제2차 교회회의에 참가하였으며 《전만주 조선예수교장로회연합회》의 건립을 보았다. 1940년 5월 장로교회는 강박에 의해 《만주 조선기독교연맹회》에 가입했고 이듬해에는 《만주조선기독교회》에 합병되었다. 1944년 말, 간도《만주조선기독교》는 교회 100개, 전도소 16개, 신도 1만 449명이 있었다.

2).감리교회

감리교회는 기독교신교의 한개 파로서 세계 성을 띤 종교조직이다. 남감리 교파와 북감리 교파(미감리교파)로 나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조선을 거쳐 만주에 들어왔다.

남만에 있어서 감리교신도는 흥경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이 있었고 장춘, 사평가에 300명, 길림, 액목, 몽강 등 지역에 예배당 7개소, 신자 약 2000명이 있었고 할빈에 예배당 1개소, 신자약 100명, 해림에 예배당 2개소, 신자 50명, 기타 지역까지 합하면 4000명 신자가 있었다.(《재만조선인사정))

1908년 9월, 남감리교회의 전도사 이화춘(李和春)이 책장사 이응현(李应铉), 함주익(咸株益) 등과 함께 용정에서 전도하였다. 중국인 기독교도 선금과 반일민족지사 박무림의 지지 하에 용정촌과 그 부근에 9개 교회를 세웠는데 500여 명 교도가 있었다. 1908년 8월, 장로교파와 감리교파의 전도구역협정에 좇아 간도의 감리교회를 장로교파에 넘겨주고 조선으로 나갔다.
1920년 5월 남감리교회는 또다시 간도에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7월 남감리 교회는 훈춘 등 지역의 성리교회(圣理教会)를 접수하였으며 이듬해 4월 정재덕(郑在德)목사는 용정, 투도구, 왕청 등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당시 간도지역의 총책임자는 량주삼(梁柱三)목사이고 용정교회책임자는 이용정(李容政), 왕청교회의 책임자는 최세환(崔世焕)이었다.

초기에 남감리 교회는 왕청 ,용정 등지역에 《반일학교》 등 교회학교를 세웠다. 또 교도자녀를 위해 동명학교, 북일학교, 영창학교, 삼광유치원을 세웠으며 용정에다도 매일성경학원을 세워 국립, 사립학교의 학생들이 퇴교 후 성경을 배우게 하여 그 영향을 크게 넓히였다. 1925년 남감리교회는 국자가, 옹성라자, 용정, 투도구, 훈춘, 배초구, 석현, 경신, 대두천 등 곳에 교회를 세웠다. 1926년 2월, 최착봉(崔镯凤), 김리남(金利男) 등이 배초구에서 남감리파청년회를 건립하였으며 회원 30명은 모두 선도자녀였다.

1918년 전후 미감리교회의 배형식(裴亨植)목사는 간도에서 사회조사를 하였고 1920년에 도문에 감리교회를 세웠다. 1929년 1월, 장로교파와 감리교파는 봉천에서 협상을 거쳐 신경지역을 감리교전도구로, 간도지역을 장로교파 전도 구역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감리교파는 계속 간도에서 전도하였다.

1931년 12월, 감리교회의 남북 두개 파는 용정에서 연합회의를 열고 감리교 《만주 선교년회》를 조직하였으며 교육, 농촌 기구를 설치하여 교회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1933년에 이르러 간도에 24개 교회, 1644명 교도가 있으며 6개 교회학교에 506명 학생이 있었다. 1939년 감리교회 만주년회는 북만, 동만 두 곳으로 갈라졌다. 1940년 5월 감리교회는 《만주조선기독교연맹》에 합병되었으며 1941년 11월 《만주조선기독교회》로 개칭되었다.

3) 동아기독교

1906년 카나다 선교사 변위익이 충청남도 강경에서 《대한기독교》를 세웠으며 1921 년 《동아기독교》라 고치였다. 신약성경을 유일한 경전으로 삼고 정치와 종교를 갈라 보는 원칙을 주장했다.

1906년,한태영(韩泰永)등 4명이 간도에서 전도했고 1912년 5월 김만순(金万顺)의 발기로 송언(松偃)예수교회를 세웠다. 1914년 1월 조정립(赵鼎立)이 종성동예수교회를 건립했다. 1916년 2월 대모록구(大母鹿沟)교회, 1918년 연길교회, 1920년 훈춘교회가 세워 졌다. 20년대에는 화룡현 명신교회, 왕청교회, 금당(金塘)교회, 흥인(兴仁)교회를 내왔으며 11개소의 교회학교를 갖고 있었다. 1923년 전후에 만주의 동아기독교는 남만과 북만 두 개 교구로 나눠졌다. 1936년 6월 만주의 동아기독교의 신도는 516명, 1940년에는 1000명 좌우였다.

동아기독교는 초기에는 반일을 주장하였으나 점차 포기해버렸다. 1940년 5월 일제는 동아기독교를 《만주조선기독교연맹》에 합병시켰다.

4).복림안식일교회

안식일교회의 특점은 토요일을 전도일로 하며 술과 담배를 엄금한다.

1914년 전도사 백덕순(白德逊)씨는 봉천에서 전도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이듬해는 장춘에 교회를 세웠다. 1917년부터 조선인을 대상으로 간도에서 전도하였으며 그해 4월에 투도구교회, 5월에 용정촌교회를 건립했다. 1919년 11월 화룡현 명신촌에 삼도구교회를 세웠다. 1926년 동만구교회내에 2개 학교가 있었고 학생은 149명이었다.

위만주시기 교회의 발전은 컸다. 1934년 2월 연길현 남구(南沟)교회, 1935년 3월 조양천 교회, 1936년 5월 로투구교회가 건립되었다. 1936년 6월말현재 만주의 신도는 544명 이었다. 1939년 1월 기독교 동북연합회는 동만구교회를 조선기독교복림안식일교회에 귀속시켰고 《간도합회》라 개칭했다. 1940년 5월 《만주조선기독교연맹》에 합병됐다.

5). 성결교회

1907년 미국 동양선교회는 서울옅동양교회복음전도관》을 세웠다. 성결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구원》할 것을 주장했다.

1924년 조선 충청남도 규암교회교도 박기래(朴基来), 경주교회의 교도 박장환 (朴章焕)이 각기 용정촌과 도문에 이주하여 전도를 시작했다. 그해 최성무(崔成茂)목사가 시찰원신분으로 용정에 파견되여 정황을 조사했고 1925년 3월 이원근(李元根)전도사가 용정교회를 세웠다. 뒤이어 여전도사 김경흡(金庚洽), 박로희(朴鲁熙)가 용정부근에서 전도했다. 그해 8월 기와집을 지어 교회당으로 하고 부흥전도회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 했다. 1926년 교도가 49명으로 늘어났다. 1928년 여전도사들이 용정을 중심으로 조선이주여성들가운데서 전도활동을 벌리였다. 1930년 11월 천보산분회가 세워졌고 이듬해 11월에 교회당을 지었다. 1932년 9월 김인석(金仁石)목사가 명월구교회를 내오고 1933년 2월 김학선 (金学善)목사가 조양천교회를 내왔다. 1935년 이정원(李祯源)목사가 연길교회를, 이듬해 10월 박문익(朴文益)목사가 도문교회를 세웠다. 1936년 6월 당시 만주 내 성결교 도는 1280명이다. 1940년에 《만주조선기독교연맹》에 합병되었다.

2.천주교

1872년 오문에서 세례를 받은 조선인 첫 신부 김대건(金大健)은 녕고탑, 왕청, 훈춘 등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조선 경흥에 돌아갔다. 1896년 4월,조선 청년 김영렬(金英烈)은 도선 원산에 있는 프랑스인 신부를 찾아가서 교리학습을 거친후 5월 17일에 세례를 받고 요한이란 본명(本名-교회이름)까지 지니고 화룡현 루학대에 돌아와 가족과 친지 10여 명 을 데리고 다시 원산으로 갔는데 때는 1897년 초봄이었다. 박련삼(朴连三), 김진오 (金真五), 김중렬(金仲烈, 김영렬의 동생) 등 12인은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가입하였는데 《북간도 12도도》라고 불리웠다. 그해 가을 간도에 돌아와 회령, 용정간의 큰길가 마을 삼원봉(三元峰, 지신향에 있음)과 하교동, 대교동, 부처동 그리고 용정촌에서 전교활동을 했다. 1902년 김계일(金桂一), 석해일, 박정규 등 100여 호 교도들이 용정촌으로부터 팔도구에 이주하여 교도촌을 이루고 교회를 내왔다. 1909년 화룡 지신사 영암 (英岩)촌에 천주교예배당을 세우고 남일량(南一良, 프렁스적)이 신부를 맡았다. 같은 해 용정촌에 용정천주교예배당을 세우고 원형근(元亨根, 프랑스적)이 신부를 맡았다. 이듬해 5월 팔도구에 천주교예배당을 세우고 최문식(崔文植, 조선인)이 신부를 맡았다. 그때 간도에 교도 2100여 명이 있었다. 1914년 간도의 조선인천주교회는 예배당 3개에 천주교공소 50개, 교회학교 17개(학생 339명)을 갖고 있었으며 교도가 5418명에 달하였다. 1919년 3.13반일시위 때 용정 각지의 천주교교도들은 반일시위에 적극 뛰여 들었으다. 《경신년대토벌》때 각지의 교회당은 파괴당하였다.

1920년, 조선에서 원산종교구가 나와서 연길, 이란 두 교회는 원산종교구의 관리를 받았다. 제1차세계대전후 빠리전도회의 프랑스신부들이 육속 귀국했고 독일 센구디리 분듀회에서 로마종좌의 위탁을 받고 원산종교구를 관리하였다. 1921년 3월 이후 독일 신부 임갈충(任渴忠), 서상렬(徐相烈), 구걸근(具杰根), 심배의(沈培义), 오근수(吴根诛) 등이 간도에 파견되었다. 그해 9월 백화동(白化东)이 연길천주교예배당 주임신부로 전근되었다. 이때부터 천주교는 반일기치를 버리고 《순종교 활동》을 벌리였다. 1923년에 이르러 조선인천주교는 30개의 교회학교에 9990명의 교도를 갖고 있었다. 그 가운데 팔도 구천주교회의 교세가 가장 왕성했는데 1924년 교도수는 2000여 명에 이르렀다. 1928년 연길교구가 건립되었고 그 지역은 간도와 녕안, 목단강 등지를 포함하였는데 당시 교도가 1만 2057명이었다. 백화동이 김목교구장으로 되었다. 1931년 백화동은 스위스의 수녀를 청해다가 연길에 수녀원을 세웠다. 1933년 교회에서는 연길에 병원을 앉히였다. 지금의 연변군분구와 옛 연변가무단 건물이 바로 당년의 천주교 교구사무청사이다. 1934년에는 연길에 성십자가수원을 건립하였고 1936년 3월에는 잡지 《카톨릭 소년》을 창간하였다. 1937년 연길교구에는 주교 1명, 신부 22명, 수사 17명, 수녀 23명, 수원학생 31명, 전도사 21명, 천주교공소 45개, 교회당 39개, 그중 400명 이상을 용납할 수 있는 교회당이 13개, 교도 1만 2884명이었다. 1944년말 연길교구는 조선인신도 2만 명, 중국인신도 2000명을 갖고 있었다.
1947년 11월, 백화동이 귀국하고 대부분 독일신부들도 육속 떠났다. 전지령(田志灵)이 대리목구장으로 되었다. 토지개혁 후 천주교는 기본상 활동을 중지하였다.


3. 천도교 
천도교는 시천교, 청림교, 대종교, 유교 및 원종교와 함께 조선인민족종교이다. 천도교는 동학당의 후신이다. 창교주 최제우(도호 수원선생)가 교도를 선포한 것이 1860 년이다. 제4대 교주 손병희(孙秉熙)가 이용구 등 친일파를 개출하고 1905년 12월 《천도교》라 이름을 고쳤다. 천도교는 하늘을 숭상하지만 인간성과 인심을 떠난 하늘은 없으며 하늘은 오직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인정하였다. 인간의 존엄을 강조했고 인산사이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것으로써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고 천하에 덕을 닦고 백성을 많이 도와주어 지상천국을 세워 모든 동포가 한데 뭉쳐야 한다는 《개량세계주의》를 주장해왔다. 천도교의 의식은 간편하고 소박한바 물 한사발만을 제공한다. 물이 천지만물을 대표한다고 보고 있었다.

천도교는 1907년을 전후하여 만주조선인 중에서 전파되었다. 1908년 천도교는 국자가에 한명(韩明)의숙을 세웠고 1913년 8월 백사원(白士元), 고상률(高尚律)이 용정에 교회당을 세웠고 이듬해 3월 최진오(崔振五) 등 7명이 용정 천도교종리원을 세웠다. 1916년전후, 반일사상을 선전하는 것을 주요한 수단으로 동흥학교 등 교회학교를 육속 일떠세웠다. 1917년 9월 간도엔 천도교 교도 460여 명이 있었다. 1919년에는 3.13 반일 시위에 참가하였고 후엔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받았다.

1921년 4월, 천도교는 용정에 동흥중학교와 부속소학교를 창건했다. 1922년 3월, 동흥제1소학교, 이듬해 10월에는 동흥제2소학교를 세웠다. 1928년 5월 천도교는 8개 학교, 935명 학생을 갖고 있었다.

9.18사변후 천도교는 최림을 위수로 하는 신파와 박영호를 위수로 하는 구파로 갈라졌다. 신파는 친일파로 전락되었다. 구파는 천도교의 진의는 민족독립에 있으며 조선을 《천도국화》한 나라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6년 통계에 따르면 통화, 신빈, 안동, 집안, 장백, 연길, 투도구, 도문, 배초구, 할빈, 수분하, 치치할 등 지역에 종리원 또는 종리소가 20개 소, 신도 2119명이 있었다. 그 외에 봉성, 관전과 환인 등 지역에도 상당수의 신도가 있었으나 그들은 구파로서 주요하게는 반일활동에 주력했다.

동변도 각 지역의 천도교신도들은 9.18후 량세봉의 조선혁명군의 반일무장투쟁을 적극 지지해 나섰다. 함경남도 도정 박인진은 김일성을 만남 뒤 그의 제의를 접수하고 조국광복회에 가입하였으며 신도들을 인도하여 항일투쟁을 성원해 나섰다. 1937년 이후 장백유격근거지가 파괴되고 1938년 박인호 등이 일제에게 검속되자 천도교의 교세는 크게 타격을 받았다.

1936년 6월말 현재, 만주에는 천도교 교회당 14개, 신도 2085명이 있었다. 이들은 투도구와 도문에 집중되었고 통화, 안동에 250명 신도가 있었다. 그 뒤 천도교는 점차 사라졌다.

4. 시천교

1907년 이용구(李容九)등 친일파들이 원 동학교에서 쫓겨난 뒤 천도교와 맞서 시천교를 창설했으며 서울의 일진회(一进会) 본부에서는 이희진(李熙真)을 파견하여 간도 지부장직을 이어 받게 했다. 1908년 8월 용정 등 지역에 시천교지회를 세우고 사립학교를 꾸렸다. 최초에는 교도 1만여 명에 13개 학교까지 갖고 있었으나 친일경향을 보아낸 뒤 교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1911년 5월 용정교회당에 화재가 인 뒤 시천교는 곤경에 빠졌 다. 1917년 간도에는 33개 교회당, 342호 신도가 있었다.

1920년 일제의 세력을 빌어 교세를 확장하였다. 1922년 동정(东征)학교를 세우고 1924년 6월 동아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친일종교였기에 그 세력은 여전히 크게 확장되지 못했다. 1936년 6월말 만주에 9개 교회당, 891명 신도가 있었는데 전부 간도에 집중되었다. 1945년 8.15 해방 후에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5.청림교

청림교는 동학교에서 분리되여 나온 신흥교파로서 교주 남정(南正)이 1913년에 창설하였다. 유교, 불교, 도교의 교리를 섭취하여 창립되였는데 유심주의에 속하는 실제를 탈리한 자아수도이다. 청림교가 신봉하는《大悟道之原理》는 유교, 불교, 도교를 합치면 《무극》이라 한다고 한다. 무극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속에 있으며 선천적인 것이라 한다. 인간의 마음이 유쾌하면 《무극》으로 되고 극락세계에 닿을 수 있다. 신도들은 념불을 외우고 예배를 드리고 마음을 수련한다. 이래야만 《만사지(万事知)》의 경지에 닿을 수 있다. 그러면《무위이화(无为而化)》가 되고 무위이화면 무극 즉 극락세계에 닿게 되여 성인이 될 수 있다.

청림교는 20세기 10년대에 간도의 용정과 토산자(화룡현)일대에서 전파되었다. 간도 주교 림갑석(林甲石)이 전도했다. 3.13반일시위에 많은 청림교도들이 참가했으며 교주 남정이 죽은 뒤 한병수(韓秉洙) 등이 청림교를 친일의 길에 몰아넣었다.

1925년 청림교는 재차 반일경향을 띠여 주요 지도자들이 투옥되었다. 그해 6월말 용정에는 청림교교회 하나, 교도 30여 명밖에 없었다.

1935년 청림교의 남홍광(南洪光) 등이 의연활동을 벌려 그해 12월에 용정 북산에 영막전(永幕殿)을 세워 교도들은 달마다 향을 지피고 예배를 하였다. 1936년에는 조선의 선조들을 기념하는 륙태묘(六太廟)를 지었다. 1942년 3월, 귀석비(龜石碑) 14개를 수건하고 7개월이나 향불을 지피며 예배를 드렸다. 1942년 3월 반일사상이 있는 조선인들이 적극 교회에 참가하여 연길, 화룡 두개 현에만 교도 1000여 명이 있었다. 1944년 용정에서 《청림교사건》이 일어났다。 (다음절에서 서술) 1946년 림창세(林昌世) 등은 비석을 세우고 청림교전도활동을 회복했다. 이듬해 림창세가 국외로 떠나자 청림교도 사라졌다.


6. 대종교

대종교는 조선인의 시조 단군을 신봉하는 까닭에 단군교라고도 이른다.

사람에게 《세 가지 진실(三真)》, 《세 가지 맹동(三忘)》, 《세 가지 로정(三途)》이 있는데 성인은 그것을 《느끼고(感止)》, 《조절하고(调息)》, 《건드리지 않으면서 (禁触)》 한마음으로 참되게 행사하여 이상세계에 들어선다는 것이 대종교의 주장이다.

1910년 라철(罗哲)이 대종교를 창립하였고 1911년 전후 당군교의 이정완(李贞完)이 화룡현 학성촌 등 지역에서 전도했다. 1913년 10월, 심권(沈权), 박태익(朴泰益)이 왕청현 춘명향 류수구에서 암한묵(严汉默)의 집을 임시전도사로 삼고 전도했다. 1914년 라철이 총본사를 조선으로부터 화룡현 명신사 삼도구 청파호(현 화룡진 하동)에 옮겨와 반일활동에 종사했다. 당시 신도는 1만 5000여 명이다.

1915년 일제는 대종교를 불법단체로 공포하고 탄압했다. 1916년 9월 라철이 조선 황해도 구월산에서 자결하고 김교헌(金教宪)이 제2세교주로 되었다.

1918년 4월 김교헌은 서일 등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대종교 교도를 중심으로 《중광단》을 조직하여 반일운동을 벌렸다. 그해 8월 중광단을 토대로 《정의단》을 조직했으며 12월에는《북로군정서》로 고치였다. 서일이 총재를 맡고 김좌진이 총사령을 맡았으며 이장녕이 총참모장을 맡았다. 1923년 김교헌이 피로에 지쳐 세상을 떳고 윤세복이 제3세 교주에 취임했다. 1925년 일제와 군벌정부의 탄압으로 하여 《금교》가 되었다. 윤세복은 《순종교활동》을 하겠다는 조건으로 《포교》신청을 내여 허가를 얻었다. 1928년 대종교 총본사는 밀산현 당벽진으로 옮겨가 반일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1936년 동경성에 《대종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에게 교의학습을 시켰다. 1936년 이후 또다시 흥세하였다.

1942년 11월 녕안에서 신안진으로 가는 대종교 교주 윤세복과 이동주가 일제에 체포된 뒤 녕안, 목릉, 밀산, 연길, 반석, 할빈, 돈화 등 광범한 지역에서 대종교의 20명 골간들이 체포되었다. 그중 10명은 목단강 감옥에서 학살당했고 10명은 《8.15》와 함께 출옥되었다. 즉 《대종교 임오교변》이다. 그 후 대종교는 지하로 들어가고 신도들은 흩어져 포교활동이 중지되었다.


7. 원종교

1912년 김중건(金仲建)은 조선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유교와 불교 및 도교의 사상을 섭취하여 《천기대경(天机大经)》, 《도경(道经)》, 《대종원부경(大宗元符经)》등 저서를 펴내여 원종교(元宗教)의 원리를 창립했다. 이듬해 1월 1일 원종교의 창건을 전격 선고했다.

원종교는 《주역》중의 천극설과 음양오행설을 토대로 《극원(极元)철학》사상을 제창하면서 《대공화무국(大共和无国)》의 《대동세계(大同世界)》를 건립할 것을 주장했다.

1914년 봄, 김중건은 원종교 신자 2명을 거느리고 훈춘 현성 밖의 신풍촌에서 선교했다. 이듬해 1915년 안도현의 도전동(道田洞)에서 건원학원을 꾸리고 원종교의 교리를 강의했다. 1918년 장백현 왕가동(王歌洞)에서《왕가학원》을 꾸리고 민족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했다. 1920년 김중건은 다시 훈춘지방에로 돌아와 《원종총사》, 《대진단》의 명의로 반일에 종사했다. 1923년 6월 원종교는 화룡현 삼도구 원화동, 청두구, 수평동, 복동 등 지역에서 전도했으며 교도가 90여 명에 달했다. 1925년 6월 원종교는 5개 교회에 272명 교도를 갖고 있었다. 동시에 《신붕(新风)》잡지를 간행했다.

원종교는 학교를 꾸리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1922년 6월에 연길현 동흥동에 경신학교를 세웠고 8월에 로은평에 원성학교를, 이듬해 10월에는 연길현 상의향 세린하에 애영학교를 세웠다. 1926년 3월, 평강 개척리에 현신학원과 원녀학교를 세웠고 신포 (申跑)를 교장으로 농대학원을 세웠으며 그해 10월에는 정림동에 인일학교를 세웠다. 1928년 5월현재 원종교는 7개 학교에 298명 학생을 두었다.

1928년 봄, 김중건은 일제의 제한과 반종교충격에 못 이겨 흑룡강 녕안현 이도하자에 전이하여 계속 활동했다. 1931년 김중건은 《조선혁명군》지도처를 설립하고 무기를 사들여 반일무장투쟁준비사업을 다그쳤다. 1933년 3월 김중건은 뜻밖에 암살되었다. 그 후 원종교는 점차 사라졌다.


8. 유교

유가사상은 기원전 1세기에 조선에 전해졌으며 기나긴 시일을 거쳐 하나의 종교- 유교로 되었다. 조선 이씨왕조시기에는 국교로 되었다. 20세기 초, 조선인유교인사들은 간도 각 지역에 사숙을 꾸리고 청소년들에게 《사서오경》을 가르치고 반일사상을 선전하였다.

유교는 《수신, 제가, 치국, 태평》설을 주장하면서 《지선》을 설교하였다. 인간관계에서는 《5륜》을 도덕규범으로 삼고 있었다.

1912년 1월 차의범(车义范) 등은 국자가에 연길공교회를 세웠다. 1913년 100여 명 유교인사들이 개산툰에서 《간도공교회》를 내왔으며 북경공교당회의 분회로 되었다. 당시 공교회회원은 3000여 명이었다. 1916년 8월 연길공교회는 국자가 동쪽에 공자묘를 지었다. 1919년 3.13운동 후 이범윤이 유림인사들을 위주로 《광복단》을 조직해 반일무장투쟁을 벌렸다.

1920년 이후 유교회는 여러 개 파로 갈라졌다. 림창세는 청림교에서 갈라져나와 용정촌에 대성유교파의 용정문묘회(文庙会)를 세웠고 그해에 대성중학교와 그 산하에 소학부를 꾸리였다. 1929년 12월, 이창환 등 10여 명이 용정촌에 대성원 동만총지원 (大圣院东满总支社)을 꾸리였다. 1925년 전후, 공교회는 신, 구파로 나눠졌다. 1926년 4월 신파는 연길에서 《대동학원》을 꾸리고 옛 서숙을 개혁하고 신학을 보급했다. 그해 9월 공교회는 해산령을 받았고 1930년 6월 다시 회복되었다. 1933년 9월, 용정 문묘회와 대성원 동만총지원은 합병하여 대성원동만총지회를 내왔다. 1936년 6월, 만주의 조선인유교신자는 1만 5450명이며 전부가 간도지역에 모여 있었다. 1941년 유교는 연길에 《왕도서원》을 꾸리여 삼강오강사상과 충군애국사상을 크게 설교했다. 1944년 현재 간도에는 문묘 7개, 신도는 1만 명이 안 되었다. 해방 후 유교는 종교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공맹지도의 영향은 깊었다.


9. 불교

불교는 조선인 중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신앙이 소극적이고 신도들이 심산유곡의 절당에만 국한되여 있으므로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본능적인 욕망을 갖고 있고 또 그것을 추구하기에 인생은 자고로부터 고달픔이 가득차 있다. 생명의 연장, 즉 이승에서 저승에로의 전환은 곧 고달픔의 계속이라고 간주한다. 고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도를 닦아 불교의 이치를 깨닫는 《원각 (圆觉)》과 《원적(圆寂)》의 길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무욕무아》의 경지에 이르러야 고난이 끝난다고 여긴다.

1911년 3월 조선인 승려 김본연(金本然)이 용정촌에서 최기남(崔基南)의 협찬으로 운흥사(云兴寺)를 지었다. 사에 불상 3존을 모셨다. 당시 신도는 200여 호에 달했다.

1915년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 반어사(梵鱼寺)의 고승 김구산(金龟山)이 간도에서 참법(忏法)활동을 하게 되면서 그를 주지승(主持僧)으로 모셨으나 절은 그냥 흥성하지 못하였다.

1920년 7월 화룡현 월청 룡암동에서 조선인 승려 최승한(崔承韩)이 구리불상 하나를 발견하고 신흥사를 지었다. 1925년 4월 근처에 다시 별원을 증축했고 1928년에는 인수사(仁寿寺)로 개명했다. 그해 8월 물에 절이 밀려갔고 1931년에 새롭게 건축됐다. 1923년에 부암촌(현 용정시 팔도향 경내)에 용주사(龙珠寺)를 세웠다. 1924년 간도에는 6개 절당과 2424명 신도가 있었다.

1931년, 도문 등 지역에 불교부인회가 세워졌으며 금연, 금주 등 운동을 벌려 세력을 얼마간 확장했다. 1936년 6월말 현재 만주에는 23개 불교 절당, 3899명 신도가 있었다. 봉천, 금주, 안동 등 지역에 개별적으로 신도가 700명 있는 외 나머지는 간도에 집중되었다. 불교는 남만, 북만에서 큰 발전이 없었다. 1944년 10월, 조선인불교신도는 4578명이었다. 1946년 3월, 간도의 조선인불교절간이 31개에 달했으며 《동북연변불교협회》가 나왔다. 그 대표인물로는 연길시의 김천해씨였다. 1947년 토지개혁 후 불교는 종적을 감추었다.


10. 싸만교

싸만교는 간도의 조선인, 만족들 속에서 널리 잔파 되고 영향을 끼쳤던 종교의 하나 이다. 영혼숭배를 주요내용으로 하며 세상 만물은 모두 영혼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무당(巫堂))을 인류세계와 영혼세계를 이어놓는 중개자로 보고 있다. 무당은 일반적으로 여성이 담당하며 남자일 경우 《프크쓰)라 부른다. 신령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면 무당을 청하여 의식을 가진다. 의식이 끝난 후 제물을 무당에게 보수로 준다. 싸만교는 고정적인 지점, 신조, 신도가 없지만 사람들은 무당을 찾아 도움을 바란다.

조선인가운데서 싸만교는 매우 큰 영향을 일으켰다. 후에 통치계급이 유교를 제창하였기에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해방될 때까지 싸만교는 홀시할 수 없는 영향을 남겼다. 

  주성화 zhutaining@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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