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의 이해

유소충/영등포 중화교회 목사

우리가 중국션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 일을 수행할 것인가? 건저 말씀을 통해 조명해 보면서 저 개인의 의견을 여러분과 나누고싶다.
요한복음 10장16절의 말씀을 펼쳐보자.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나 저회도 내 음성올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선한 목자가 되어 하신 말씀이다. 성경을 통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후 쫓겨난 심령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내실 때 여러 가지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 하신 것올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일을 위에서 처럼 동물적 비유를 들어 목자가 양올 인도해낸다든지, 어부가 고기를 낚는다라든지, 혹은 식물적 비유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표현한다든지, 아니면 우리를 하나님의 교회를 지어가는 반석들로 광물적인 용어로써 비유하기도 한다.


아무튼 위에서 말씀하신 ”이 다른 우리에 들지아니한 다른 양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는 지역과 종족 또한 시공을 초월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지금 한국안에도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이 있다. 그리고 저 중국 안에도 이러한 수많은 양들이 있다. “중국을 주께로”라는 표현은 바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수많은 중국인들을 향한 강한 호소 력이 있는 표현이라고 느껴진다, 지금 중국은 잘 알다시피 개방의 물결 속에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되어 가고 있는 전환기에서 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보이는 중국의 경제부흥과 발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계획하고 온갖 지혜를 동원해 돈벌기 위한 전략을 짜느라 여념들이 없다.


이처럼 그들은 없어질 세상의 재물을 얻기에도 혈안이 되어 있는데 오늘 우리들은 중국의 저 엄청난 양들을 얻기 위해 그처럼 혈안이 되어 있는가.
이 중국 안의 잃어진 양들을 주깨로 인도해 주님의 음성을 듣게하고 한 목자에게 있게 하는 사명은, 그 이하도 이상도 없는 주님의 최대명령으로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할 대사명이다(마28:18-20). 이때 우리에게 만약 저 영혼들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없다면, 선교사역은 몹시 피곤한 일이 되고 말것이다. 눈으로 보이논 대가도 보상도 없지만 우리가 다시 오설 주님 앞에서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게될 줄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그 상급에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먼저 구속해주신 그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중국은 어떠한 나라인가? 잘 아시다시피 960만km2의 광대한 땅에, 이리떼가 들끓는 살육의 광야 속에 주인의 보호와 위로를 안타깝게 기다리는 양들이 헤메고 있는 곳이 중국이다.


그곳에도 주님의 양우리 곧 교회가 었다. 교회 역사적으로 살펴 볼 때 1949년 공산정권이 들어서, 온통 교회가 소멸되다시피 했지만 오늘날 그양의 숫자가 감소되기는 커녕 오히려 증가일로에 있다. 이는 무엇올 말하는가?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자 없으신” 그 손에 일곱 별을 쥐고 계시는 주님께서 그 혹섬한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중국의 교회와 그 지도자들올 보호하셨다는 이야기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비록 보이는 “우리”들은 철거될 수 있으나 보이지 않는 “영적 우리”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공산정권을 비롯한 그 어떤 것에도 좌지우지 되지 아니한다. 많은 사람이 말하길 “공산정권의 중국이 더 개방되야 선교할텐데 ..”라는 선교의 선입관올 지니고 있다.
그 다음으로 중국은 56개의 종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일반적으로 漢, 滿, 蒙, 回.壯族으로 그 분포세력이 큰 종족을 들지만 그 가운데 漢族이 무려 14억 중국 인구의 94%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 우리안에 들지않은 한족의 우리가 얼마나 큰지 점작이 갈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에 있어 그것이 인구 200만의 조선족에 치중되고 있어 한족쓸 향한 선교는 좀처럼 이루어지고 있지 뭇함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든디. 아무튼 우리가 선교를 말 할 때 선교학자뜰은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하고 있디.

 

첫째, 자국 동문화권 선교이다. 자기 나라의 동일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한국에도 아직 수많은 무교회 지역이 있다. 이들에게 선교함을 일컨는다.

둘째. 이국 동문화권 선교이다. 미국의 교포뜰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다면 이것이 곧 이국 동문화권 선고이다. 물론 저 자신도 이 선교를 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이국 이문화권 선교이다. 만약 한극인이 한족에게 선교한다면 바로 이국 이문화권 선교를 하는 셈이디. 이 이국 이문권선교는 무척 어려운 선교이다. 가서 살아야 하는 것이 다. 여 기에는 말할 수 없는 설움과 눈물이 뒤따른다. 이는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선교사란 반드시 이국에 가서 살아야만 꼭 선고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확히 표현하자연 그 선교국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탕자의 비유를 잘 안다. 탕자는 언제부터 탕자였는가? 그가 집올 떠날 때 곧 당자가 되었는가? 또 탕자는 언제부터 다시 아들의 지위뜰 회복했는가? 그가 전에 집에 도착해서 영접을 받느 순간부터 다시 아들이 되었는가? 아니다. 그가 그런 결과에 이르기 전 이미 탕자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을 가질 때부터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아직 중국에 가지 않았어도 아직 주님의 우리에 있지 않은 저 중국의 영흔들을 향한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이 선교사역에 어떤 형태로든 협력하고 있는 분들이떤 그들이야 말로 바로 선교사들이다.


만약 선교사가 비록 중국에 간다 하더라도 이런 마음이 없다연 어찌 그들을 선교사라 부를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우리가 중국선교를 수행해 갈 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분별력이다. 나는 가끔 한국인들로부터 “당신은 중국인으로서 왜 중국에 가서 선교하지 않는가? 한국인들은 말은 통하지 않아도 ‘믿습니다’ 하고 가지 않는가”하는 어쩌면 그럴듯한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말씀을 펼친다. 그리고 기도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에게 한국에서 중국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단체들과 협력해서 터전을 잡는 일올 기뻐하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빌딩을 올라가는 것보다 중요함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중국선교를 할 때, 우리가 어디 서 있는가를 결정할 때 인간적인 논리에 기초를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는 뜻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선교는 백인들이 주도해 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많은 선교학자들은 복음의 최대 수요국인 중국인과 복음의 최대 저력국인 한국인이 만나야 세계선교가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이것으로 교만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주시는 선교사역의 변전일뿐이다. 또한 많이 주신자에게 많이 요구 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에 기인한다. 많이 받았다고 자족할 것이 아니다. 이것을 주신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이제 많은 한국인 사역자가 일어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부르짖고 헌신하는 역사와 그들이 기쁨과 확신 가운데 사역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문제는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지 두 가지만 물으신다. “네가 원하는가 원하 지 않는가?"


그 일이 크거나 작거나 문제가 아니다. 이 하나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고 또 얼마나 주님을 신뢰하느냐가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 사명을 받아 이 일을 하고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곧 낙심과 좌절로 돌아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격려해야 한다. 말 한마디로 선교의 씨를 키울 수도 있고, 말 한마디로 불타는 선교열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중국선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우리가 도전해 나가야 하고 부단히 애써야한다.
한 작은 예를 들고 싶다. 내가 한 삼십 년 한국어를 배웠지만 나는 지금도 틈틈이 한국어공부를 계속한다. 또 여러 중국선교단체에서 오는 간행물들을 오는 대로 즉시 정독은 못해도 통독은 하고 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루게 되고 후에는 그 귀중한 메시지들이 쓰레기통에 가기 십상이다.


끝으로 내가 한국교회의 중국 선교를 보고 느낀 점과 이에 따른 충언을 드리고 싶다. 먼저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지금 한국교회의 중국선교가 적신호 상태에 들어와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비유컨대 지리조건을 모르는 곳에서 과속운전올 하고 있다고나 할까. 중국이란 나라를 다 이해하기도 전에 선교를 급히 서두르다 보면 언젠가는 그 과속운전의 대가를 반듯이 치루게 되리라는 점을 되새겼으면 한다. 그러므로 중국선교에 앞서 중국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무형 문화가 중국인의 사유를 지배한다. 여기에 한국인들이 뜨거운 국을 들면서 “아, 시원하다”를 표현할 때 외국인이 그것을 사전에서 찾아내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오늘 선교국에서 선교할 때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신학적 대립문제라기 보다는 그 문화적 충돌문제이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이 싫어서가 아니라 선교사들이 내세우는 기독교 문화가 그들의 문화와 도무지 융화되지 않기에 기독교 신앙을 거부 한다.
그러므로 선교현장의 체험을 거친 분들의 실제적 체험과 검증을 거친 선교서적들을 충분히 접해서 참고할 필요가 있다.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스킬러 경험담을 들어 보자.


“순수한 이성이 없고 순수한 지성이 없는 것 같이 순수한 문화가 없으므로, 우리의 특정 문화만을 주장하는 것은 선교역사 현장에 큰 무리다.”
다시 말해 우리 것만이 옳고 순수하며, 우리가 그 신앙을 대표한다는 식의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가 위험수위에 이르지 않았나 염려된다. 이런 과속선교에 대한 진단이 빠를수록 선교생명은 연장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또한 선교헌장에서의 과속선교를 발견하고 그 속도를 늦추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지리, 환경, 문화의 이해 파악이 병행되어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중국선교 현장에서 문화적 충돌의 골만 깊게 할 위험이 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어문선교회의 정기 세미나나 선교 간행물, 훈련원 등의 사역이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언어훈련 문제이다. 일전에 내가 관여되어 있는 중국선교연구원에서 훈련원생을 받아들여 많은 경비와 인력을 투입하여 훈련시키면서 마음 아프게 느낀점이 있다. 다는 아니지만 많은 분들이, 쉽게 말해서 뼈를 깎는 고통이 없이, 어떤 대가의 지불없이 결과를 쉽게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어를 몇 개월 해야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상당히 급하다. 언어는 절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14억의 94%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그들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얼마마한 수고를 해야 할 것인가?
선교는 분명히 훈련된 우리를 통해서 하신다. 하나님께서 3만 2천의 군대를 사용치 않으시고 300명의 정병을 택하신다. 하나님께서 허드슨 테일러 한 사람을 택하셔서 중국내륙 선교의 큰 일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비록 숫자가 적다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실망할 펼요가 없다.
또한 우리의 선교사역의 평가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 분명해야 한다. 누가 먼저 가느냐가 선교의 평가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명평가 기준대로 이를 위해 훈련하고,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힘을 기르고 준비하여 순종함이 필요하다.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모리슨 이 7년 만에 한 명의 중국인 회심자를 얻은 것올 기억하라.
끝으로 선교 사역자들에게 몇 가지 부탁드림으로 끝맺을까 한다.

 

첫째, 전문화의 시대를 맞아, 여러분이 가진 전문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힘쓰라는 것이다. 사울이 바울된 이후 그는 자기가 갈고 닦은 모든 지식을 온전히 주님께 바쳤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개발하고 그저 남이 하는대로 들은 풍월대로 선교할 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전문성을 살려 중국 선교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둘째, 육체적인 건강관리에 힘쓰라는 것이다. 건강한 몸은 사역의 기초이다. 무리하거나 혹사 시카지 말고 충분한 휴식시간을 확보하기를 힘쓰라.


셋째, 영력 기르기 힘쓰기를 권한다. 저 중국은 악령이 우글거리는 땅이다. 남의 심령을 꿰뚫고 주님이 주신 지혜로 분별하며 때로는 말씀의 능력으로 저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도록 영력을 얻어야 이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넷째, 집단 이기주의를 극복하여 협력하기를 권한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위한 선교라는 공도목표를 추구해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 교회, 우리 선교단체만의 정보가 아니라 우리에 있는 그 무엇이든 다른 지체들에게 기쁨으로 나눌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이다. 선교에 내 자리 네 자리가 따로 있겠는가? 베드로의 배가 깊은 그물을 끌어올릴 때 힘이 부족해 옆에 고기잡는 다른 동역자를 불러 함께 어획의 풍성함을 나누고 주님께 영광 돌렸던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 우리는 황금어장의 대사명을 받은 자들로써 말씀을 통해 위에서의 여러 지적사항을 직시하고l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중국선교연구원 ; http://www.inbo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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