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삶
나는 1949년 5월 17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전문학교인 고등 경공업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소녀시절 후 나는 여러 공장에 이름을 걸어놓고 선전대원으로써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당정책을 해설 선전했습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구호를 소리높이 외쳐가면서 당이 제시한 인민경제 모든 분야에서 근로자들이 자신들이 맡은 인민경제 과업을 제 기일 내에 할 수 있도록 나의 “노래”로써 고무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1989년 이북에서 제13차 대회를 가진 해부터 나는 이북의 당 간부들의 어지러운 행동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간부들을 우상화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처벌받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1989년 이러한 배경에서 나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과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저는 낙심한 상태로 어느 직장에도 취직 못하고 피를 판돈을 장사 밑천으로 장사질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함경남도 함주군 친구들이 1992년 12월 25 동짓날 저녁에 나를 청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나의 마음을 달래어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 장소에는 손금을 보는 무당 한명과 다른 동무 3명 모두 5명이 함께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놀았는데, 이 장소에서 저는 남한노래 “홍도야 울지마라”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나의 스트레스를 풀면서 유쾌하게 친구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홍도야 울지마라”라는 남한 노래는 조선 예술영화 중 <민족과 운명>이라는 다부작 영화의 5부에서 카페 여가수가 부르는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이 영화는 박정희 정권을 시대적 배경으로 찍은 영화 였습니다.
몇달 지난 이후 1993년 5월 15일 함경남도 함주군 안전부 감찰과장이 저에게 이름을 부르면서 따라오라고 하기에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안전부 마당으로 따라들어 갔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예심과(감옥 가기 전에 취조 받는 곳) 감방 철문을 열고 저를 집어 넣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얼마나 맞았는지 온 전신이 피멍이 들어 자리에서 1달 가량 일어나지 못했고 3년 형기를 받고 교화소에 끌려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함주군 안전부에 갇혔고 죄목은 김일성, 김정일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를 부르는 대신 수정주의 날라리 바람들을 사회에 유포선켰다는 죄의 두목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당시 사회 질서와 관련해 발표된 포고문에는 사회질서와 관련한 점을 치는 문제, 외국 노래 부르는 자, 국가사회재산 탐오 낭비, 일하지 않고 먹는 자, 술 마시는 자, 사기 현장 등 많은 조항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에 적응하게 잡히는 자는 무자비하게 처벌하며 때에 따라 사형까지 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같이 있었던 4명은 8개월 강제노동 가고 나는 두목으로 4명한테 “홍도야 울지 말라”라는 노래를 가르쳐주었다고 함경남도 함주군 안전부에 15일간 있다가 함경북도 명천군 안전부에 호송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또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문과 성추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구루장 감방 경비원의 나이는 22~24 정도였습니다. 저는 너무 억울하고 철창 속에 갇힌 몸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시멘트를 네모난 형태로 4개를 잘라서 먹고 구류장 널마루 밑에 있는 오물들과 쓰레기들, 머리카락 등을 주어 먹었지만 죽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순간부터 구류장 경비원은 나에 대한 감시를 더욱더 강도를 높이면서 나를 더 꼼짝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상태로 명천군 안전부에서 화성군 안전부에 또 호송당하였습니다. 원래 저의 문제는 예심대상이 아니라고 예심처에서 전화가 왔는데도 아무튼 법관들은 철창에 갇힌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결함을 붙여서 징역을 보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나는 단지 잘못된 노래를 불렀다는 죄로 이런저런 사소한 결함을 들어 예심을 하였으니 나의 예심은 다른 사람보다 좀 경한 예심이었음에도 이러한데 다른 죄수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원래 교화소 밥은 하루 700g 씩인데 무슨 절약미로 떼여내니 한끼에 180g 밥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처음 신입자반을 졸업해야 교화반을 배치받는 사정으로 신입반에 들어가니 밥 한끼 100g 소금절임 배추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죽도록 맛있었습니다. 죽도록 맛있었던 사정은 허약에 걸렸던 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노동시간은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지만 국가의 바쁜 과제는 죄수들을 시키기 때문에 보통 22시간 일해야 합니다. 또한 남자 안전원들은 소위 여성 죄수들을 개별 담화한다는 이유로 사방대(안전원실)에 불러 성추행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1시간 매일과 같이 생활 총화 시간에 서로 남의 결함을 말하라고 하면서 호상 비판을 안하면 또 미달밥을 먹이기 때문에 죄수들끼리 죄 아닌 죄를 만들어 비판했습니다.
교화소는 1995년 9월에 소위 수령님의 배려라고 하면서 나에게 석방을 선포하였습니다. 석방되어 함주군에 배치받아 나아가니 사회의 모든 성원들은 교화소 출소자라고 했기에 직장 배치도 못받고 사람들도 나에게 곁을 주지 않아서 마음의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본 남편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 다시 회복을 하자고 찾아왔기에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북한의 경제위기와 교화 출소자라는 어지러운 이미지로써 남편과 아이를 먹여 살릴 길 없어 수혈소에 가서 여러 차례 걸쳐 피를 팔아 아들을 먹여 살리면서 하루에 200~250 리씩 걸어 다니면서 아들과 남편을 데리고 장사질 하면서 3명의 식구들 생존을 유지하던 과정에 또 남편이란 사람이 장사밑천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어디론가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후 나는 남한을 목적으로 중국으로 도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98년 9월초에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이북돈 1000원을 가지고 출발하여 두만강행 기차를 타고 함경북도 무산까지 도착하였습니다.
무산은 국경지역이라 매일과 같이 길에 다니는 사람들의 통행증을 검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낮에는 계속 식당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면서 밤에는 개인 숙박소 사람에게 돈을 좀더 주고 숙박하면서 무산 국경경비대원을 한 사람 선택하여 먹을 것 200원 어치와 현금 200원을 주고 중국에서 장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돈을 더 주겠다고 하니 국경 경비대원은 나의 말을 믿고 통과시켜주어 낮 3시 30분경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닿게 되었습니다.
이북은 군인들도 배가 고파서 돈만 손에 쥐어주면 그 무슨 험악한 일도 도와 주었습니다. 그들은 제대할 때 조선돈 50만원을 손에 쥐고 제대해야만 사회에서 살아나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자비하게 군 내부규정과 관계없이 돈을 손에 쥐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이용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들어갔고 산속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을로 내려가 조선족 집에서 하루밤 재워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을 당했고 그래서 원두막에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잘 익지도 않은 실과를 따먹으면서 하룻밤을 지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과수원 주인에게 잡혀 과일을 많이 따먹은 죄로 며칠동안 그 집에서 인질로 잡혀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경 웬 승용차 한대가 아무런 경적도 울리지 않고 우리가 일하는 배나무 숲속에 들어 오길래 나는 근처 고추 밭에 엎드려 숨었는데 결국 나는 잡혀서 차에 태워졌습니다. 나는 이순간 북한군인줄 알고 너무 놀랬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길림성 룡정시라는 곳이었습니다.
나와 또 다른 여자 하나는 룡정시의 어느 홀아비의 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1명은 어디론가 팔려가고 나는 혼자 사는 영감 집에서 며칠간 성 노리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항하다가도 공안에 끌려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나는 반항할 수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15일간 이 홀아비 집에서 성 노리개로 있으면서 밥이나 얻어 먹으면서 도망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중국 조선족이 날더러 흑룡강에 있는 언니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길래 공안대에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할 수 없이 조선족의 각본대로 움직여 그를 따라 떠났습니다. 알고 보니 나를 데리고 있던 홀아비가 돈이 없어 중국 조선족 사람에게 나를 빼앗긴 것이 였습니다.
나는 결국 길림성 돈화시 황니허 라는 곳의 중국 사람에게 중국돈 4천원에 팔렸습니다. 길림성은 매우 공안들의 검열이 심한 곳이라서 할 수 없이 이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남자의 키는 145cm 정도이고 외모가 매우 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집에 있는 동안 경찰들이 조사하러 오면 이불장안에 몇시간씩 숨어 있었고 이 사람은 내가 도망칠 것이 두려워서 일하러 나갈 때는 대문과 출입문 몇곳에 자물쇠를 잠궜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종일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서 대소변을 보아야 하였고 저녁이 되면 눈에 차지 않는 그런 몸서리 치는 괴물 같은 사람에게 억압적인 성회롱물로 순간 순간을 보내면서 오직 내가 이 집에서 탈출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내가 도망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의심한 이 사람은 나를 자기가 다니는 벽돌공장에 끌고 나가서 나를 밤낮으로 감시했고 공안대가 잡으러 오면 남자변소에 뛰어 들어가 몇시간씩 숨어 있고 또 벽돌 굽는 창고 안에서도 숨어있다가 온 전신이 익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때로는 쓰레기 창고에도 한겨울 몇시간씩 숨어 살아야 했고 또 공장 탈의실 옷장 안에도 몇시간씩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또 중국 놈들은 이북의 여자가 예쁘다고 하면서 내가 숨어 있는 곳까지 찾아와 동물원 짐승 구경하듯이 구경하면서 나를 성희롱하였는데 이들의 행동은 너무도 역겨웠습니다.

재외탈북자구호기금을 조성합시다!
여러분의 작은 정성이 재외 탈북자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몇달이 지난 후에도 도무지 탈출할 기회가 조성되지 않았었는데 중국 조선족을 통역으로 이용하여 흑룡강에 있는 우리 언니 집까지 중국 사람을 데리고 간 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언니의 동무를 따라 산동성 위해시에 가서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3개월 동안 일하면서 북한 녀성이라는 것으로 얼마나 수모와 멸시를 받으면서 돈도 제때에 주지 않고 식당의 어지럽고 힘든 일은 내가 다 해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들에게 잘못 보이면 공안대에 끌려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하다가 한국으로 꼭 가야 한다는 결심으로 얼마의 돈을 벌어서 북한 사람 6명과 공모하여 중국돈 700원을 가지고 휘발유, 구명대, 망원경, 라침판들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위해시 해수욕장으로 나가서 밤 12시경 고속 보트를 훔쳐서 한국으로 오던 중 배의 계기가 고장이 나서 배에 물이 찼고 깊은 수심과 높은 파도와 싸우다가 날이 밝을 즈음에 중국 개인 고기 잡는 사람에게 구원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허벅다리에 중국돈 50원과 쇠톱을 감추어서 가지고 있었고 만약 잡힐 경우 쇠톱으로 철창을 자르고 도망친다던가 아니면 차라리 자살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었습니다.
6명의 일행이 같이 지내며 다시 기회를 엿보던 중 어느 한국인이 우리들에게 중국돈 3천원을 도와주어서 우리는 또 기름과 구명대, 망원경, 라침판, 몇개의 빵을 사가지고 또 이번에는 발동선 고기 잡는 배를 훔쳐 가지고 위해시 호포라는 곳에서 몇몇 일행이 날씨와 안전한 날짜를 선택하여 밤 12시에 출발하였는데 남한으로 오는 과정 몇번씩이나 배가 고장이 났고 공해에 들어가지 못한 상황에서 3일째 되던날 날씨가 험해져 태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4일간 나와 춘실이란 녀자는 배멀미가 나서 정신이 오락가락 했었고 우리들의 운명은 바다귀신이 되느냐 하는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망원경으로 남한쪽을 보니 배가 2척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여 보니 이젠 남한 바다에 거의 다왔다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대의 배를 한국의 배로 생각하고 두배를 향해 흰 천을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척의 배는 중국 배였습니다. 우리는 그순간 중국 배에 잡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도망하려 하였으나 너무나 지쳐서 결국 중국 배에 잡혀 중국 변방대에 15일간 잡혀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돈 천원을 빼앗기고 이북의 남자 1명은 변방대에서 도망친 죄로 그리고 우리 2명의 녀성은 족쇄에 묶여 밤에 변소에 갈 때도 팔목에 족쇄를 채운 상태에서 움직여야 하였습니다.
나는 중국 변방 대원들에게 우리가 아직 죄인이라는 판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족쇄를 풀어달라고 했고 족쇄를 안풀어주면 3층 창문에서 뛰어 내리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잠자리 옆에 남자 공안대가 밤새 경비를 서서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거의 15일간 팔목에 족쇄를 채워 끌고 다니면서 신문하였습니다. 나는 계속 한국사람이라고 우겼지만 이것이 인정되지 않아 계속 속좨를 찬 상태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안 감옥에서 약 10일경 체류하면서 가슴에 피멍이 들 정도상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중국 죄인들은 감옥 안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먹고 입고 뒹굴어도 괜찮지만 우리 2명의 이북 녀성은 3일간 밥이 없다며 굶겼고 화장지가 없어 변소도 마음대로 못가며 짐승처럼 취급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중국 공안 대원들에 의해서 중국 단동 구류장에 집어넣어 졌습니다. 단동 구류장에는 50명 정도 있었는데 30명은 이북 사람들이었습니다. 중국의 여성 공안대는 우리들의 자궁에서 돈을 찾아 내느라고 옷을 홀딱 벗겨 점프 동작을 30번씩 시키고 이에 성이 차지 않는지 자궁에 손까지 집어넣는 추악스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순간까지도 예측하고 중국돈 400원을 삼켰었습니다.
이렇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다가 2000년 12월 초에 이북에 있는 평안북도 신의주시 보위부 감옥에 북송 되었습니다.
보위부 감옥에서 20일간 있는 동안 이북의 안전원들은 우리들을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하였습니다. 감옥 안에서는 휴지도 없이 변을 보고 한 사발의 물에 세수하고 그 물에 손으로 뒤를 닦아냈습니다. 이곳에는 임신한 사람, 성병에 걸린 사람 어느 한 사람도 정상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쁜 여자는 다른 독방에 넣고 성노리개로 삼았고 수없이 죄수들을 매질했으며 절반 이상 벌레 섞인 설익은 옥수수 50g을 식사로 제공받는 인간 이하의 생활을 했었습니다. 임신된 여성들은 너무나도 먹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먹을 것이 없어 자기들의 손가락을 마구 물어뜯어 씹는 여성도 있었고 성병이 걸린 여성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소금에 자신의 하반신을 마구 비벼데서 엉망이 된 여성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겠습니까?
다른 여성들은 그냥 중국 땅에서 잡혀 나왔지만 춘실이와 나는 한국으로 도망가다가 잡혀왔기 때문에 더욱 처벌이 엄중하였습니다. 춘실이와 나를 각각 다른 방에 집어넣고 나에게 몽둥이 찜질과 모진 매질을 했고 이로 인해 치질이 재발하여 차가운 감옥 안에 앉을 수 없었고 그냥 모기처럼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고통에 신음하면서 생활하다가 20일이 지난 후 집결소에 끌려 갔습니다.
집결소에 끌려간 후 7주일이 지난 이후 석방자를 뽑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나는 제일 먼저 집결소 반장이 되었다는 공로로 석방되게 된줄 알았는데 실상은 중국으로 도망가다 잡힌 사람도 석방한다는 것을 보여준 후 내가 일단 집에 도착한 다음 체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는 다시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기차를 타고 다시 함경북도 무산으로 향해 떠나 2001년 1월 1일 아침 함흥 역전에 내렸습니다. 집에 와보니 오빠의 가족은 다 죽은 상태였고 내 아들의 생사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피멍이 든 아픈 가슴을 안고 다시 무산에서 낮 3시경에 살얼음판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 갔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마음이 착한 중국 조선족을 만나 이 집에서 7주간 일을 할 수 있었고, 이 조선족 도움을 받아 다시 위해시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한국 회사에 숨어서 중국 공안대의 눈을 피했고, 검열이 있을 때마다 산에 올라가 숨어 있다가 다시 내려오는 방식으로 공안대의 눈을 피해가면서 3개월을 일하다가 그곳을 2001년 10월에 떠나 4개월에 걸쳐 동남아 4개국을 거쳐 2002년 1월 14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감옥살이와 구류장 생활 그리고 중국에서의 고통은 구체적으로 쓰자면 몇천장을 써야 하겠지만 여기서 줄이고 마지막으로 모든 인사 선생님들과 북한의 인권을 옹호하는 모든 분들에게 북한의 봉건 부패적이고 부정부패 정권이 인권을 유린하는 실상, 추악한 실상을 만천하에 폭로하여 세계의 화살표가 이북에 집중되여 지금 이북에 있는 백성들이 하루빨리 치욕스러운 사회에서 벗어나 이들도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지 해 남 (북한이탈주민, 개천교화소 경험자)
나는 1949년 5월 17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전문학교인 고등 경공업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소녀시절 후 나는 여러 공장에 이름을 걸어놓고 선전대원으로써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당정책을 해설 선전했습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구호를 소리높이 외쳐가면서 당이 제시한 인민경제 모든 분야에서 근로자들이 자신들이 맡은 인민경제 과업을 제 기일 내에 할 수 있도록 나의 “노래”로써 고무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1989년 이북에서 제13차 대회를 가진 해부터 나는 이북의 당 간부들의 어지러운 행동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간부들을 우상화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처벌받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1989년 이러한 배경에서 나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과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저는 낙심한 상태로 어느 직장에도 취직 못하고 피를 판돈을 장사 밑천으로 장사질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함경남도 함주군 친구들이 1992년 12월 25 동짓날 저녁에 나를 청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나의 마음을 달래어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 장소에는 손금을 보는 무당 한명과 다른 동무 3명 모두 5명이 함께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놀았는데, 이 장소에서 저는 남한노래 “홍도야 울지마라”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나의 스트레스를 풀면서 유쾌하게 친구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홍도야 울지마라”라는 남한 노래는 조선 예술영화 중 <민족과 운명>이라는 다부작 영화의 5부에서 카페 여가수가 부르는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이 영화는 박정희 정권을 시대적 배경으로 찍은 영화 였습니다.
몇달 지난 이후 1993년 5월 15일 함경남도 함주군 안전부 감찰과장이 저에게 이름을 부르면서 따라오라고 하기에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안전부 마당으로 따라들어 갔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예심과(감옥 가기 전에 취조 받는 곳) 감방 철문을 열고 저를 집어 넣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얼마나 맞았는지 온 전신이 피멍이 들어 자리에서 1달 가량 일어나지 못했고 3년 형기를 받고 교화소에 끌려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함주군 안전부에 갇혔고 죄목은 김일성, 김정일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를 부르는 대신 수정주의 날라리 바람들을 사회에 유포선켰다는 죄의 두목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당시 사회 질서와 관련해 발표된 포고문에는 사회질서와 관련한 점을 치는 문제, 외국 노래 부르는 자, 국가사회재산 탐오 낭비, 일하지 않고 먹는 자, 술 마시는 자, 사기 현장 등 많은 조항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에 적응하게 잡히는 자는 무자비하게 처벌하며 때에 따라 사형까지 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같이 있었던 4명은 8개월 강제노동 가고 나는 두목으로 4명한테 “홍도야 울지 말라”라는 노래를 가르쳐주었다고 함경남도 함주군 안전부에 15일간 있다가 함경북도 명천군 안전부에 호송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또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문과 성추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구루장 감방 경비원의 나이는 22~24 정도였습니다. 저는 너무 억울하고 철창 속에 갇힌 몸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시멘트를 네모난 형태로 4개를 잘라서 먹고 구류장 널마루 밑에 있는 오물들과 쓰레기들, 머리카락 등을 주어 먹었지만 죽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순간부터 구류장 경비원은 나에 대한 감시를 더욱더 강도를 높이면서 나를 더 꼼짝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상태로 명천군 안전부에서 화성군 안전부에 또 호송당하였습니다. 원래 저의 문제는 예심대상이 아니라고 예심처에서 전화가 왔는데도 아무튼 법관들은 철창에 갇힌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결함을 붙여서 징역을 보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나는 단지 잘못된 노래를 불렀다는 죄로 이런저런 사소한 결함을 들어 예심을 하였으니 나의 예심은 다른 사람보다 좀 경한 예심이었음에도 이러한데 다른 죄수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원래 교화소 밥은 하루 700g 씩인데 무슨 절약미로 떼여내니 한끼에 180g 밥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처음 신입자반을 졸업해야 교화반을 배치받는 사정으로 신입반에 들어가니 밥 한끼 100g 소금절임 배추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죽도록 맛있었습니다. 죽도록 맛있었던 사정은 허약에 걸렸던 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노동시간은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지만 국가의 바쁜 과제는 죄수들을 시키기 때문에 보통 22시간 일해야 합니다. 또한 남자 안전원들은 소위 여성 죄수들을 개별 담화한다는 이유로 사방대(안전원실)에 불러 성추행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1시간 매일과 같이 생활 총화 시간에 서로 남의 결함을 말하라고 하면서 호상 비판을 안하면 또 미달밥을 먹이기 때문에 죄수들끼리 죄 아닌 죄를 만들어 비판했습니다.
교화소는 1995년 9월에 소위 수령님의 배려라고 하면서 나에게 석방을 선포하였습니다. 석방되어 함주군에 배치받아 나아가니 사회의 모든 성원들은 교화소 출소자라고 했기에 직장 배치도 못받고 사람들도 나에게 곁을 주지 않아서 마음의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본 남편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 다시 회복을 하자고 찾아왔기에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북한의 경제위기와 교화 출소자라는 어지러운 이미지로써 남편과 아이를 먹여 살릴 길 없어 수혈소에 가서 여러 차례 걸쳐 피를 팔아 아들을 먹여 살리면서 하루에 200~250 리씩 걸어 다니면서 아들과 남편을 데리고 장사질 하면서 3명의 식구들 생존을 유지하던 과정에 또 남편이란 사람이 장사밑천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어디론가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후 나는 남한을 목적으로 중국으로 도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98년 9월초에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이북돈 1000원을 가지고 출발하여 두만강행 기차를 타고 함경북도 무산까지 도착하였습니다.
무산은 국경지역이라 매일과 같이 길에 다니는 사람들의 통행증을 검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낮에는 계속 식당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면서 밤에는 개인 숙박소 사람에게 돈을 좀더 주고 숙박하면서 무산 국경경비대원을 한 사람 선택하여 먹을 것 200원 어치와 현금 200원을 주고 중국에서 장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돈을 더 주겠다고 하니 국경 경비대원은 나의 말을 믿고 통과시켜주어 낮 3시 30분경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닿게 되었습니다.
이북은 군인들도 배가 고파서 돈만 손에 쥐어주면 그 무슨 험악한 일도 도와 주었습니다. 그들은 제대할 때 조선돈 50만원을 손에 쥐고 제대해야만 사회에서 살아나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자비하게 군 내부규정과 관계없이 돈을 손에 쥐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이용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들어갔고 산속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을로 내려가 조선족 집에서 하루밤 재워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을 당했고 그래서 원두막에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잘 익지도 않은 실과를 따먹으면서 하룻밤을 지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과수원 주인에게 잡혀 과일을 많이 따먹은 죄로 며칠동안 그 집에서 인질로 잡혀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경 웬 승용차 한대가 아무런 경적도 울리지 않고 우리가 일하는 배나무 숲속에 들어 오길래 나는 근처 고추 밭에 엎드려 숨었는데 결국 나는 잡혀서 차에 태워졌습니다. 나는 이순간 북한군인줄 알고 너무 놀랬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길림성 룡정시라는 곳이었습니다.
나와 또 다른 여자 하나는 룡정시의 어느 홀아비의 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1명은 어디론가 팔려가고 나는 혼자 사는 영감 집에서 며칠간 성 노리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항하다가도 공안에 끌려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나는 반항할 수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15일간 이 홀아비 집에서 성 노리개로 있으면서 밥이나 얻어 먹으면서 도망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중국 조선족이 날더러 흑룡강에 있는 언니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길래 공안대에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할 수 없이 조선족의 각본대로 움직여 그를 따라 떠났습니다. 알고 보니 나를 데리고 있던 홀아비가 돈이 없어 중국 조선족 사람에게 나를 빼앗긴 것이 였습니다.
나는 결국 길림성 돈화시 황니허 라는 곳의 중국 사람에게 중국돈 4천원에 팔렸습니다. 길림성은 매우 공안들의 검열이 심한 곳이라서 할 수 없이 이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남자의 키는 145cm 정도이고 외모가 매우 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집에 있는 동안 경찰들이 조사하러 오면 이불장안에 몇시간씩 숨어 있었고 이 사람은 내가 도망칠 것이 두려워서 일하러 나갈 때는 대문과 출입문 몇곳에 자물쇠를 잠궜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종일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서 대소변을 보아야 하였고 저녁이 되면 눈에 차지 않는 그런 몸서리 치는 괴물 같은 사람에게 억압적인 성회롱물로 순간 순간을 보내면서 오직 내가 이 집에서 탈출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내가 도망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의심한 이 사람은 나를 자기가 다니는 벽돌공장에 끌고 나가서 나를 밤낮으로 감시했고 공안대가 잡으러 오면 남자변소에 뛰어 들어가 몇시간씩 숨어 있고 또 벽돌 굽는 창고 안에서도 숨어있다가 온 전신이 익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때로는 쓰레기 창고에도 한겨울 몇시간씩 숨어 살아야 했고 또 공장 탈의실 옷장 안에도 몇시간씩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또 중국 놈들은 이북의 여자가 예쁘다고 하면서 내가 숨어 있는 곳까지 찾아와 동물원 짐승 구경하듯이 구경하면서 나를 성희롱하였는데 이들의 행동은 너무도 역겨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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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이 지난 후에도 도무지 탈출할 기회가 조성되지 않았었는데 중국 조선족을 통역으로 이용하여 흑룡강에 있는 우리 언니 집까지 중국 사람을 데리고 간 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언니의 동무를 따라 산동성 위해시에 가서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3개월 동안 일하면서 북한 녀성이라는 것으로 얼마나 수모와 멸시를 받으면서 돈도 제때에 주지 않고 식당의 어지럽고 힘든 일은 내가 다 해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들에게 잘못 보이면 공안대에 끌려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하다가 한국으로 꼭 가야 한다는 결심으로 얼마의 돈을 벌어서 북한 사람 6명과 공모하여 중국돈 700원을 가지고 휘발유, 구명대, 망원경, 라침판들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위해시 해수욕장으로 나가서 밤 12시경 고속 보트를 훔쳐서 한국으로 오던 중 배의 계기가 고장이 나서 배에 물이 찼고 깊은 수심과 높은 파도와 싸우다가 날이 밝을 즈음에 중국 개인 고기 잡는 사람에게 구원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허벅다리에 중국돈 50원과 쇠톱을 감추어서 가지고 있었고 만약 잡힐 경우 쇠톱으로 철창을 자르고 도망친다던가 아니면 차라리 자살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었습니다.
6명의 일행이 같이 지내며 다시 기회를 엿보던 중 어느 한국인이 우리들에게 중국돈 3천원을 도와주어서 우리는 또 기름과 구명대, 망원경, 라침판, 몇개의 빵을 사가지고 또 이번에는 발동선 고기 잡는 배를 훔쳐 가지고 위해시 호포라는 곳에서 몇몇 일행이 날씨와 안전한 날짜를 선택하여 밤 12시에 출발하였는데 남한으로 오는 과정 몇번씩이나 배가 고장이 났고 공해에 들어가지 못한 상황에서 3일째 되던날 날씨가 험해져 태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4일간 나와 춘실이란 녀자는 배멀미가 나서 정신이 오락가락 했었고 우리들의 운명은 바다귀신이 되느냐 하는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망원경으로 남한쪽을 보니 배가 2척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여 보니 이젠 남한 바다에 거의 다왔다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대의 배를 한국의 배로 생각하고 두배를 향해 흰 천을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척의 배는 중국 배였습니다. 우리는 그순간 중국 배에 잡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도망하려 하였으나 너무나 지쳐서 결국 중국 배에 잡혀 중국 변방대에 15일간 잡혀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돈 천원을 빼앗기고 이북의 남자 1명은 변방대에서 도망친 죄로 그리고 우리 2명의 녀성은 족쇄에 묶여 밤에 변소에 갈 때도 팔목에 족쇄를 채운 상태에서 움직여야 하였습니다.
나는 중국 변방 대원들에게 우리가 아직 죄인이라는 판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족쇄를 풀어달라고 했고 족쇄를 안풀어주면 3층 창문에서 뛰어 내리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잠자리 옆에 남자 공안대가 밤새 경비를 서서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거의 15일간 팔목에 족쇄를 채워 끌고 다니면서 신문하였습니다. 나는 계속 한국사람이라고 우겼지만 이것이 인정되지 않아 계속 속좨를 찬 상태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안 감옥에서 약 10일경 체류하면서 가슴에 피멍이 들 정도상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중국 죄인들은 감옥 안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먹고 입고 뒹굴어도 괜찮지만 우리 2명의 이북 녀성은 3일간 밥이 없다며 굶겼고 화장지가 없어 변소도 마음대로 못가며 짐승처럼 취급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중국 공안 대원들에 의해서 중국 단동 구류장에 집어넣어 졌습니다. 단동 구류장에는 50명 정도 있었는데 30명은 이북 사람들이었습니다. 중국의 여성 공안대는 우리들의 자궁에서 돈을 찾아 내느라고 옷을 홀딱 벗겨 점프 동작을 30번씩 시키고 이에 성이 차지 않는지 자궁에 손까지 집어넣는 추악스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순간까지도 예측하고 중국돈 400원을 삼켰었습니다.
이렇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다가 2000년 12월 초에 이북에 있는 평안북도 신의주시 보위부 감옥에 북송 되었습니다.
보위부 감옥에서 20일간 있는 동안 이북의 안전원들은 우리들을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하였습니다. 감옥 안에서는 휴지도 없이 변을 보고 한 사발의 물에 세수하고 그 물에 손으로 뒤를 닦아냈습니다. 이곳에는 임신한 사람, 성병에 걸린 사람 어느 한 사람도 정상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쁜 여자는 다른 독방에 넣고 성노리개로 삼았고 수없이 죄수들을 매질했으며 절반 이상 벌레 섞인 설익은 옥수수 50g을 식사로 제공받는 인간 이하의 생활을 했었습니다. 임신된 여성들은 너무나도 먹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먹을 것이 없어 자기들의 손가락을 마구 물어뜯어 씹는 여성도 있었고 성병이 걸린 여성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소금에 자신의 하반신을 마구 비벼데서 엉망이 된 여성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겠습니까?
다른 여성들은 그냥 중국 땅에서 잡혀 나왔지만 춘실이와 나는 한국으로 도망가다가 잡혀왔기 때문에 더욱 처벌이 엄중하였습니다. 춘실이와 나를 각각 다른 방에 집어넣고 나에게 몽둥이 찜질과 모진 매질을 했고 이로 인해 치질이 재발하여 차가운 감옥 안에 앉을 수 없었고 그냥 모기처럼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고통에 신음하면서 생활하다가 20일이 지난 후 집결소에 끌려 갔습니다.
집결소에 끌려간 후 7주일이 지난 이후 석방자를 뽑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나는 제일 먼저 집결소 반장이 되었다는 공로로 석방되게 된줄 알았는데 실상은 중국으로 도망가다 잡힌 사람도 석방한다는 것을 보여준 후 내가 일단 집에 도착한 다음 체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는 다시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기차를 타고 다시 함경북도 무산으로 향해 떠나 2001년 1월 1일 아침 함흥 역전에 내렸습니다. 집에 와보니 오빠의 가족은 다 죽은 상태였고 내 아들의 생사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피멍이 든 아픈 가슴을 안고 다시 무산에서 낮 3시경에 살얼음판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 갔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마음이 착한 중국 조선족을 만나 이 집에서 7주간 일을 할 수 있었고, 이 조선족 도움을 받아 다시 위해시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한국 회사에 숨어서 중국 공안대의 눈을 피했고, 검열이 있을 때마다 산에 올라가 숨어 있다가 다시 내려오는 방식으로 공안대의 눈을 피해가면서 3개월을 일하다가 그곳을 2001년 10월에 떠나 4개월에 걸쳐 동남아 4개국을 거쳐 2002년 1월 14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감옥살이와 구류장 생활 그리고 중국에서의 고통은 구체적으로 쓰자면 몇천장을 써야 하겠지만 여기서 줄이고 마지막으로 모든 인사 선생님들과 북한의 인권을 옹호하는 모든 분들에게 북한의 봉건 부패적이고 부정부패 정권이 인권을 유린하는 실상, 추악한 실상을 만천하에 폭로하여 세계의 화살표가 이북에 집중되여 지금 이북에 있는 백성들이 하루빨리 치욕스러운 사회에서 벗어나 이들도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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