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은 북한의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4년이나 수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어이 북한을 탈출하여 지금은 남한에 거주하고 있다. 김태진은 1956년에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했다. 1961년, 그는 아버지와 함께 북한의 북부 지역으로 이주했고, 1964년에는 보다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인 원산으로 이주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했다. 이는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당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은 참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노동의 반복이었다. 그는 그 당시의 심경에 대해 "여전히 북한이 지상의 낙원이라고 믿던 시절"이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그는 서서히 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1986년에는 탈북을 감행했다. "나는 중국에서 탄광노동자였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숨기기에는 좋은 장소였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조선족으로부터 성경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를 돌봐주던 그들 조선족 부부는 그를 교회로 인도했다. 여전히 그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해는 안갔어도 기독교인들은 어딘가 선하고, 다른 사람보다는 더 사랑이 많아 보였다. 나는 그들의 그런 따듯한 마음이 부러웠다. 내가 과거에 만났던 다른 모든 사람과 어딘가 달라보였다."
그러나 탄광 생활을 한지 4개월만에 그는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결국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나는 두려웠다. 바로 처형당할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는 전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기도하기도 했다. 제발 처형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나는 처형되지는 않았다." 갇혀 있는 동안 그는 심하게 구타 당하고,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형벌을 받았고, 씻지도 못하게 했고, 쥐나 벼룩 따위가 물어도 자세를 바꿀 수 없었다. 그리고 감옥은 굉장히 추웠다고 한다.
1988년 3월 31일, 김태진은 결국 요덕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은 추운 고산지대에 있는 광활한 노동수용소였다. 그곳에 갖힌 자들에게는 한벌의 옷만 지급되었고, 해가 뜨고나서부터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노동을 해야 했다. 하루에 지급되는 식량은 300 그람 정도의 옥수수 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쥐와 뱀, 개구리, 두꺼비까지 잡아 먹어야 했다.
내가 있을 동안 5명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사형당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복면을 쓰고, 무릎을 꿇린채 뒤에서 총알 세발을 맞고 살해되었다. 김태진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갖게 되었다. 아주 특별한 날 비록 극소수이지만 특사로 석방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이 특사를 받기 위해 최고의 모범수로 생활했다.
"캠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삼엄한 감시 아래서도 7명의 기독교인이 은밀하게 만나 예배의 모임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임에 참석해 그들이 해주는 성경 이야기를 든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그들처럼 감히 스스로 나의 죄를 고백하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나에게 죄를 고백하기를 권했지만, 선뜻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간수들은 죄수들 가운데 몇 사람을 정보원으로 쓰고 있었다. 그들 정보원들이 간수들에게 수용소 내의 은밀한 신앙인의 모임이 있음을 제보했다. "그들은 모두 끔찍한 고문을 받고 다른 수용소로 옮겨졌다. 아마도 요덕보다도 더 삼엄하고 처절한 수용소로 옮겨졌음에 틀림 없었다. 이후 나는 요덕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1992년 4월 1일, 그러니까 그가 요덕에 갇힌지 4년이 지난 시점에서 김일성의 생일을 앞두고 간수들은 모든 죄수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대개 그런 자리에서 수령의 생일을 기념하여 특별 석방될 사람을 호명하곤 하는데,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내 이름이 불렸다. 기뻐 미칠 지경이었다." 그로부터 9일 후 그는 기차로 요덕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가족을 찾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요덕을 다녀온 그의 전력 때문에 그를 만나기 조차 꺼렸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북한을 뜨는 일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덕 출신은 나가서도 늘 보위부 요원들의 감시를 받기 때문에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대의 대기근이 몰아치면서 감시도 훨씬 느슨해 졌고, 그의 탈출에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강을 따라 국경지대로 가서 언 강을 넘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는 은신처를 마련하고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고, 그 와중에 다시 기독교인들과도 접하게 되었다. 1997년 그는 한국어로 된 성경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은 나를 찾으셨고, 나는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천천히 나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 숨어 있는 북한 출신 기독교인들의 성경공부 모임의 리더까지 되었다.
그러나 탈북자들에게 중국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다행히 탈북자들을 돕는 몇몇 사역자들을 만나 몽골루트를 통해서 남한으로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함께 몽골로 넘어가던 사람들 중에 6명이 붙잡혔다. 그들은 아마도 죽었거나 요덕 정도의 수용소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는 결국 남한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그는 지금 한국 국적으로 다시 당당하게 중국으로 들어가 탈북자들을 돕는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북한의 견고한 진을 깨뜨리실 수 있다. 그 방법은 모른다. 전쟁일 수도 있고, 자연재해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어떤 유혈사태나 연약한 생명의 희생 없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세계의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북한과 한반도 전체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 우리는 모든 성도들의 관심과 기도가 필요하다"(출처:매일선교소식)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시61:1-3) 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려 함이니라(신29:2-13)
하나님, 주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 시온에서 기뻐 노래 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과 감사의 고백으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피난처시요 견고한 망대가 되시는 여호와께서 탈북자들을 주의 날개 아래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한 백성으로 자기 백성 삼으사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아바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끝까지 주를 향한 신앙을 지키며 주의 말씀을 붙들며 믿음으로 주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