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리칼럼/손성은
성령강림주일을 기다리면서(I)
-성령이 오신 이유-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교회생활이 역동적이기 위해서 하시는 성령의 활동과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성령에 대한 관심은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관심이 구체화되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저변에는 언제나 성령에 대한 근원적인 호소와 관심이 깔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종교개혁이나, 청교도들의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쩜, 이런 성령에 대한 관심이 근세기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교회사에 대한 왜곡이다.
지난 세기 들어와서 성령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는 것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성령에 대한 관심이 아니고, 성령의 은사에 대한 관심이다. 이 성령의 은사에 대한 관심은 성령의 활동과 역사 가운데서 눈에 띄이는 방언, 예언, 치유 등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정당한 관심의 수준을 넘어서서 변형되고 왜곡되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눈에 띄이는 현상에 대한 관심은,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이 시대사조와도 맞물려 더욱 강화되는 것 같다. 어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당한 관심을 촉구하는 바가 없쟎아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은사에 대해서건, 그 분의 인격과 역사 자체에 대한 관심이건, 성령님은 여전히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생명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교회의 절기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성탄절보다도, 부활절보다도, 어쩜, 성령강림절이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지자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제 곧 다가오는 성령강림주일을 우리가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성령오심의 근원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나타내시고자 함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도 “임마누엘”을 증명하시려 하심이고, 승천하신 뒤, 이제 성령님께서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내어 보여주신다. 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우리가 어떻게 나타내는가 하는 것이, 그러므로, 성령강림절기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을 나타내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령강림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나타내심을 보여주어야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요한일서4장12절이 이런 맥락에서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사랑하면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어떻게 당신을 나타내시는가? 사랑으로 나타내신다.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고, 성령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실제적인 것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내어 보이신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나타내어 보여야 한다면, 사랑과 관계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성령강림주일 때, 사랑의 릴레이를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의 릴레이…벌써 몇년 째 실시되어 오는 운동이다. 그 동안도 많은 형제들, 자매들이 이 사랑의 릴레이를 통해서 도움을 받았다.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자는 이 운동. 그저 내어놓고 그저 가져가는 운동…..이번에 좀 더 대대적으로 실시를 하자. 이제 더욱 분명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이것을 실시하자. 봄도 지나고…여름이 다가오려는 이 싯점에서 그 동안 미뤄둔 집안청소를 지금쯤 해 보면 어떨까? 쓰지도 않으면서 아깝다고 쳐박아두고 있는 것, 결국 곰팡이가 피어서 버려버릴 그런 물건들은 혹시 없을까? 이번 성령강림주일때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보이는 이 행위로 인해서 우리 가운데 드러내셨으면 하고 기도를 하는 마음이다(손성은).
양무리칼럼
성령강림주일을 기다리면서(II)
-성령님은 지금도 오신다!-
교회절기로 치자면, 성령강림주일이, 성탄절이나 부활절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성탄의 의미나 십자가나 부활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바로 나에게 적실한 의미를 가지고 적용되어지는 사건은 바로 성령의 오심으로서 말미암아 가능하다. 물론, 12제자들은, 성령강림사건이 있기 전에 “중생”했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강림이 있기 전에 “믿었던”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없쟎아 있다. 하지만, 그 본문들을 엄밀히 살펴보게 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곧, 성령의 강림하심은 이미 역사를 통해서 성취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성육, 십자가, 부활)의 사건이 한 개인에게 적용되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의미있는 사건이다. 이것 없이는 성탄의 의미도, 십자가의 의미, 부활의 의미가 우리에게 유효하게 적용되어서 깨달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식으로, 머리로, 그것을 헤아려 본다고 한들, 성령님의 오심을 통한 그 역사가 없다면, 마땅히 깨달아야 할 만큼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12제자와 같이 다시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를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12제자들이 중생하고 그 다음에 성령강림을 체험했던 것과 같은 체험의 구조를 가질 수가 없다. 만일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들 보는데서 죽으시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강림사건 이후에는, 각 개인에게 유효하게 그 구속의 사건을 적용시켜지는 사건들이 만천하에서 가능하도록 시작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삼위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할 때, 성령하나님을 “나오시는” 분이라고 한다. 어려운 말로는 “발출”(procession)이라고 한다.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오시고, 성자 하나님에게서도 나오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나오심은 역사상 한 순간에 완료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삼위 하나님의 내적인 관계이다. 이 말은, 2천년전 예루살렘교회에서 “강림”하셔서 “나오신”일이 있다고 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에게는 그런 “강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곧, 그때에 나오셨던 성령님이 지금도 나오시게 되는 것이다. 영원토록 나오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문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셔서 어디로 임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때에는 120명의 다락방문도들에게 임하셨고, 그 아침에 3천명의 사람들에게 임하셨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임하실 것인가? 물론이다. 그 스타일과 방식은 다르고, 패턴도 다르고, 그 드러나는 현상과 효과가 다를 수는 있어도, 바로 우리들에게 임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기본 역사이시다. 임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증거해 주신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바로 내 옆에서 동행하시는 분으로, 실감있게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성령강림주일의 의의가 무엇인가? 이 임재와 현존을 돌아보며 다시 소망하고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은사들을 다시 일깨우는 일이며, 우리 가운데 그 분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면 기대할 것인가? 우리를 비워야 한다. 우리의 욕심을 비워야 하고, 우리의 자아중심적인 사고를 비워야 한다. 그런 비움을 시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릴레이운동”이다. 값없이 얻은 우리의 구원을 값없이 우리의 물질들을 내어놓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성령의 오심은 곧 자유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물질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욕심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이다. 바로 나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이다. 이런 자유를 누리고 싶지 않으신가? 바로 이번 성령강림주일을 통해서, 아니, 그 이전, 바로 오늘, 누리길 기원한다.
양무리칼럼
성령강림주일을 기다리면서(III)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까?-
성령강림주일을 기다리면서 쓴 이 글의 제목을 교회홈피에 올릴 때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까?”라는 제목을 달아서 올렸다. 이번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성령강림의 첫번째 목적과 그 이유, 그 현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그 현존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얼굴”을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니….? 하나님에게 도대체 얼굴이란 것이 있기나 하단 말인가?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 불경이 아닌가? 여러 가지 질문이 생긴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형상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일 뿐이다. 인간의 어떤 모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은, 이미 프로이드가 비판했다. 우리의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모양을 따라서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한 바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투사되어진 존재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얼굴”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상징이고, 비유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도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에 대한 아주 중요한 한 측면을 깨닫고 체험하고 그것을 강렬하게 맛본다는 것이다. 꿀에 대한 이론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맛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는 것과도 같이,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의 실제, 그 지식이 가르키고 있는 바 그 현실(reality)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의 족장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만났었다. 그 만남을 강렬하게 묘사한 것이 바로 모세의 하나님 만남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의 떨기나무체험도 아니고 열가지 재앙이나 홍해도하를 통해서 체험하게 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출애급기 33장에 묘사된 “하나님의 등”을 뵙는 체험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은 출3장의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체험”보다 더한 것이며, 열가지 재앙, 홍해도하, 그 이후의 시내산에서 나타났던 신현의 체험보다도 더한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단지 “등”만을 보았다고 한다. 가장 절정의 체험인 듯 한데, 하나님의 “등”만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내가 지금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싶느냐”고 묻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오해하지 말라. 어떤 체험의 강약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육체로 이 땅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이심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다.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귀에 딱지가 앉은 셈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다니….만일, 사람이 개가 되었다면, 신문기삿감이다. 온통 세상이 떠들석할 것이다. 사람의 유전자의 배합을 어떤 조작을 통해서 사람을 클로닝(Cloning)할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가 많다. 같은 사람에서 사람이 나올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사람이 소가 되었다고 하자. 동화적인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놀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놀랄 얘기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 얘기를 듣고 놀라지 않는다.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자들도 놀라지 않는다. 식상해 버렸다. 복음에 대해서 식상해 버린 것이다. 그 식상해 버린 생각들에 어떻게 충격을 줄 수 있을꼬! 하나님께서 친히 “번개”를 던지시지 아니하시면 그 식상함에서 깨어날 자들이 없을 뿐인데….
제우스 얘기가 아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번개”를 맞은 사람들이 바로 사도들이고 제자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이다. 바로 나도 그 “번개”를 맞았다. 나의 회심이야기를 참고하길 바란다(최근에 대학생활 부분에 좀더 첨가를 했다). 그렇게 번개를 맞음으로서 눈에 불이 튀고 혈관에 핏줄이 튀어 오르는 그 체험 속에서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는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다. 비록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그 일이 역사의 마지막에 남겨져 있다고 하더라도, 힐끗이라도, 그 영광의 “얼굴”을 뵙고는 그 앞에서, 꼬꾸라져, 한 점 미물로 자신을 느끼는 바로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바로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하려고 하심이다. 그래서 성령강림주일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양무리칼럼
통천년왕국(統千年王國, pan-chilliasm)
-성령강림에 의한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의 영역-
저는 소위 “무천년왕국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천년왕국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pre-), 후(post)라는 말과 더불어서 “무”(a-)라는 접두사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곧 “무천년왕국”이란 “천년왕국이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그렇게 오해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이든 실제적이든 그리고 한 번 뿐이든 성경에는 이 단어(“천년, chiliasm)가 분명하게 나옵니다(계20:3,5,7). 기독교의 신학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어떤 위치를 이 개념이 차지해야 하느냐는 것은 차지하고 하여튼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기존의 신학적 개념과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통(pan-, or supra-)천년왕국”이라는 말로 저의 견해를 표현하고 싶습니다. “천년왕국”이 “없다”(“무”, “a-”)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초대교회때부터 지금도 계속 (“통”, “pan-”, 혹은 “supra-”) 현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초대교회때부터 이 지상 가운데에 “천년왕국”이 성취되었고 또한 그 왕국의 통치가 계속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이 없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고 또한 이 땅 우리의 삶 가운데에 그 왕권을 주장하면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전에도 말씀드렸던 “하나나님 나라”의 개념과도 일치됩니다. “실현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에 속해서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이 바로 “천년왕국”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올 어떤 “왕국”이 아니고, 이미 이 땅 가운데서 성취되어져서 더욱 완성되어져 가는 “왕국”이 바로 “천년왕국”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왕국”이 역사의 어떤 싯점에서 성취되어졌으며, 우리 개인에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설명은 간단하게 그리고 개인적인 설명은 좀 길게 오늘 설교를 구성하려고 합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이 “천년왕국”,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된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정점이 바로 오순절날의 “성령의 강림”이라는 것입니다(특별히 행2:33, 15:16). 이 날에 했던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종말”의 때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 말씀드렸던 것은, 성령의 강림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위 “성령세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그의 백성들과 자녀들에게 쏟아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행2:33).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입니다. 세례란 일종의 가입식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속해 있던 자들을 “하나님나라”, “천년왕국”에 속하도록 불러서 일종의 예식을 행하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이 세례는 바로 “성령으로 주신 예수님의 이 세례”를 지향합니다.
이 (성령)세례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지어지고 그 퇴락한 것이 보수되어진 것을 나타내는 일종의 사인입니다. 위대한 회복의 역사가 시작된 것을 그 정점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 이 날은 위대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시고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그 기쁘신 뜻 가운데서, 당신께서 인간과 더불어 영원하고 지복적인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그를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소교리문답1). 그래서 당신을 인간에게 창조된 자연과 역사를 통하여 계시하셔야 했고, 또는 꿈과 묵시, 현현을 통하여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승천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당신의 자녀(백성)와 더불어 당신께서 교제나누시기 위한 일종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그 교제를 위한 과정의 정점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성령의 강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도 하나님 당신이 누구시냐는 것을 보여주셨던 현현이었고, 성령강림은 바로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 지를 나타내어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 가장 주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우리 주님의 생생한 현현을 통한 교제의 체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만큼 놀라운 기적이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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