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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홉킨스 대학 조사팀과 법륜 스님팀의 북한 인구 변동 조사, 그 충격의 결과보고; 숫자는 말한다- 북한동포 3백만 아사설의 통계적 고찰
3년간 함북(咸北)인구 손실 13%, 최저 1백50만~최고 3백50만 아사(餓死) 추정, 민족사-20세기 최대의 비극, 어린이와 노인들이 가장 큰 떼죽음, 임철·임소연 남매의 증언(證言)은 북한 판 안네 프랑크의 일기(日記). 남한 지도층은 동포 수백만의 죽음을 가축의 떼죽음 정도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동포를 구출하는 일은 결국 우리를 돕고 우리의 격(格)을 높이는 행위이다. 흡수 통일(북한동포 구출)을 두려워하는 3류 국가·3류 국민이 될 것인가, 아니면 동포의 고통을 책임지는 1류(流) 국가·1류(流) 국민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1999년 9월 월간조선> 방글라데시-캄보디아 어린이와 비슷한 영양수준 ▲1997년 8월 세계식량계획(WFP= World Food Programme)은 북한의 5개 지역에 있는 42개 탁아소와 유치원 학생 가운데 7세 이하 어린이 3천6백9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6.5%의 어린이가 쇠약 증세를 보이고 있고, 38.2%가 영양실조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1998년9~10월유니세프(UNICEF =United Nations Children’s Fund), WFP, EU(European Union=유럽공동체), 그리고 북한당국은 합동으로 3천6백 가구(家口)에서 선정한 1천7백62명의 어린이(생후(生後) 6개월~7세 사이) 건강상태를 조사했다. 15.6%는 쇠약증세, 62.3%는 영양실조, 60.6%는 체중미달이었다. ▲이상의 통계를 방글라데시 및 캄보디아 어린이와 비교하면 북한 어린이들의 건강상태가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90~97년 사이 5세 미만 방글라데시 어린이들 가운데 18%가 쇠약증세, 55%가 영양실조 상태였다. 같은 기간 5세 미만 캄보디아 어린이 가운데 13%가 쇠약증세, 56%가 영양실조 증세를 보였다. 함북(咸北)출신 탈북자(脫北者)가 최다(最多) ▲1998년 7~9월 사이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내(內) 난민 및 재난 공중보건 연구소는 중국 연변 지역에서 탈북자(脫北者) 4백40명을 상대로 면접 조사를 실시했다. 면접원들은 조선족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2~3일간 면접조사 기법(技法)에 대한 훈련을 받은 뒤 10회 이상의 연습 면접을 했다. 탈북(脫北) 응답자들 가운데 78%가 함경북도에 살던 사람이었고 12%는 함경남도 거주자였다. 65%는 도시, 30%는 농촌 및 광산촌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평균연령은 32.5세, 64%는 남자, 36%는 여자, 46%는 기혼자, 50%는 中卒者(중졸자), 15%는 高卒者(고졸자), 6%는 大卒者(대졸자). 前職(전직)은 29%가 공장 노동자, 農夫(농부)와 鑛夫(광부)가 각 9%였다. 78%는 혼자서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답했다. 67%는 식량을 얻기 위해서, 15%는 돈을 벌기 위해서 탈북했다고 했다. 42%는 북한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으며 6%는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사망률 8배 증가 ▲이들 4백40명의 탈북자들이 속한 家口의 총인구는 1994년 7월 현재 1천7백82명. 1995∼97년의 3년간 이들 가족 중에서 55명이 새로 태어났고 2백14명이 죽었으며 91명이 轉入(전입), 1백96명이 轉出(전출)되었다. 그리하여 가구당 가족수가 4명에서 3.4명으로 줄었다. 유엔은 大飢饉(대기근) 전인 1990~95년 사이 북한의 年間(연간) 평균 출생률을 1천명당 21.8명으로 추정한다. 대기근 시기인 1995~97년 사이 이들 家口에서는 연간 1천명당 11명의 출생률을 보여 半(반)으로 줄었다. 이들 가구의 1995~97년 평균 年間 사망률은 1천명당 42.8명으로서 이는 대기근 전(1993년엔 1천명당 5.5명)의 8배이다. 사망률의 8배 증가는 물론 1995년부터 심해진 식량부족 사태 때문이다. 노인과 어린이 사망률이 평균보다 2∼3배 ▲영아 11명 중 네 명 사망=사망률이 높은 연령층은 노년층과 어린이들이었다. 1995∼97년 사이 65세 이상에서는 사망률이 연간 1천명당 1백31.8명으로서 이 기간 평균 사망률의 약 세 배나 되었다. 5세 이하의 사망률도 년간(年間) 1천명당 88.9명으로 전(全)연령층 평균의 약 두 배이며 1세 이하 영아 사망률은 더 높고 해가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 4백40명의 탈북자들이 속한 1천7백82명의 가족 가운데 1995~97년까지 3년간 55명이 출생했다. 그들중 대기근(大飢饉)이 시작된 1995년에 태어난 23명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다음해에 태어난 21명 가운데 5명이 죽었고 1998년 출생자 11명 가운데서는 4명이 죽었다. 남자의 사망률은 年間 1천명당 49.8명으로서 여자의 1천명당 35.4명보다 높았다. ▲배급체제 붕괴=존스 홉킨스 대학의 조사팀은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을 때 어떻게 식량을 조달했느냐도 알아보았다. 大飢饉이 시작되기 전해인 1994년의 경우 하루 1인당 1백50g의 식량을 북한당국으로부터 공급받았는데 이는 공식 배급량의 약 40%에 해당했다. 1997년 말 이들은 1인당 하루 30g을 배급받을 뿐이었다. 이는 공식 배급량의 약 8%에 불과했다. 북한정권은 사실상 배급을 포기한 것이고 배급체계가 붕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생산수단과 배급수단을 독점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배급기능이 마비되었다는 것은 이미 사회주의가 아니란 뜻이다. 붕괴된 배급망을 대신하는 것은 장마당이라 불리는 암시장이다. 북한당국은 이젠 암시장을 단속하지 않는다. 북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장마당에서 생필품을 조달하므로 북한체제는 급속히 시장경제화되고 있는 것이다. 조사대상 탈북자의 4백40家口중 24家口만이 당국의 배급에 의존하여 식량을 얻었다고 답했다. 이들은 아마도 黨(당)간부나 고위층에 속할 것이다. 조사대상 가구의 약 40%는 먹을 것을 주로 풀, 나무뿌리, 나무껍질 같은 데서 구한다고 했다. 정상적인 인간의 식량 채취법이 아니라 동물적인 식량 채취법이라 하겠다. ▲탈북자 가족이 더 열악(劣惡)=존스 홉킨스 대학 조사팀은 탈북자 가족들의 사망률과 출생률을 非(비)탈북 가족들과 비교하기 위해서 탈북자들로 하여금 가장 가까운 친척 2백59家口의 상황을 증언하도록 했다. 그 결과는 탈북자 가족과 대차가 없었다. 1995∼97년 사이 연간 출생률은 1천명당 8.8명이었고 사망률은 1천명당 43.4명이었다. 탈북자들이 형제 사이인 가족을 북한에 갖고 있을 경우, 그 재북(在北) 가족의 상황을 증언하게 한 결과는 在北 가족의 출생률이 1천명당 15.9명(탈북자 가족은 9.3명), 사망률은 1천명당 39.7명(탈북자는 48.9명)으로 북한에 남은 사람들이 좀 나았다. 3년간 함북(咸北)인구의 13%가 사라지다 ▲5∼14세층의 비극=탈북자 가구와 在北가족을 합쳐서 통계처리를 한 결과 1995~97년 사이 사망률은 1993년(大飢饉 이전)의 1천명당 5.5명의 7배였다. 노년층과 어린이층의 사망률 증가가 심했고 특히 5∼14세층의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 ▲咸北인구의 손실률 13%=존스 홉킨스 대학 조사팀은 이번 조사에서 발견된 사망률과 출생률을 함경북도에 적용하려고 했다. 1993년 咸北주민은 2백6만7백25명. 1994년의 인구증가율이 북한의 공식발표대로 1.4%이고 1995~97년 사이엔 연간 출생률이 이번 조사에서 나타났듯이 1천명당 16명이고 사망률이 1천명당 40명이라면 이 3년간 咸北에서의 사망자는 24만5천명으로 추정된다. 출생자는 약 9만명. 만약 1993년의 출생률(1천명당 21.8명)과 사망률(1천명당 5.5명)이 1995~97년의 3년 사이 그대로 계속되었다면(즉, 大飢饉이 없었다면) 함북의 이 3년간 출생자는 약 14만명, 사망자는 약3만5천명이 되었을 것이다. 즉 大飢饉으로 인해서 3년간 사망자는 21만명이 늘었고 출생자는 5만명이 줄었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높아진 사망률과 줄어든 출생률로 해서 3년간의 인구 손실은 26만명. 이는 1993년 咸北인구의 약 13%나 된다. ▲북한 전체의 餓死者 추정=만약 3년간의 인구손실률 13%를 북한인구 2천3백만에 적용하면 2백99만의 인구감소로 나타난다. 그런데 존스 홉킨스 대학 조사팀은 咸北지역이 북한에서 식량부족이 가장 심한 지역이란 주장이 있다는 점을 소개했다. 康仁德(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평양, 평안도, 황해도는 식량 사정이 함북처럼 나쁘지는 않다. 함북지역은 교통망이 未備(미비)되어 식량난이 가장 심하다. 나는 1995년 이후 식량난으로 인한 餓死者(아사자)를 최소 1백만명으로 보는 편이다』고 말했다. 불교운동본부의 추정=3백50만 사망 ▲불교운동본부의 조사=우리 민족 서로 돕기 불교운동본부(집행위원장 법륜 스님, 서울시 서초구 서초3동 1585-16호, 전화 02-587-8996, 팩스 02-587-8998, e-mail : kbsm@jts.or.kr, 인터넷:http://ns.jts.or.kr/kbsm)도 존스 홉킨스 대학과 비슷한 조사를 비슷한 시기에 실시했다. 작년 12월에 불교운동본부가 발표한 「북한 식량난의 실태-북한 식량난민 1천6백94명 면담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32명의 조사팀이 1997년 9월30일부터 작년 9월15일 사이에 압록강, 두만강변 중국 지역에서 탈북자들을 면담했다는 것이다. ▲3년간 28.7% 사망=1995년 8월말의 대홍수 이후 1998년 7월말까지 약 3년간 이 면담 조사자들이 속한 가족 구성원 9천2백49명 가운데서 발생한 사망자는 28.7%인 2천6백53명이다. 존스 홉킨스 대학 조사팀의 조사 결과보다 약 두 배나 높게 나타난 사망률이다. 이 조사에서도 60대 이상 노인과 10세 미만 어린이의 사망률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지역별 사망률은 평양이 가장 낮고 다른 지역은 거의 비슷하게 나와 함경북도가 가장 높다는 일부 주장과는 상반된다. 직업별 사망률은 무직자(45.6%, 주로 노인 층), 가사(家事)종사자(33.5%, 주로 주부), 농민(24%)이 높게 나왔다. 사망 원인은 아사(餓死)가 29.5%, 아사와 질병이 겹친 경우가 10.1%, 나머지는 폐결핵 등 기타 질병으로 나타났는데 넓게 보면 모두 영양실조로 인한 발병이 원인인 것 같다. ▲3백50만명 사망 추정=불교운동본부는 「북한인구 2천2백만에 북한의 지배층(대략 15%, 약 3백만명)과 농민층(약30%, 6백만명)을 제외한 1천3백만명에 탈북자 가족 사망률 28.7%를 곱하면 1995년 여름부터 3년간 약 3백5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황장엽(黃長燁)씨 증언:『95년에 50만, 96년에 1백만 명 아사(餓死)』 1997년 초에 망명한 黃長燁(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최근에 펴낸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측근 김덕홍씨(함께 망명)가 노동당 조직부 일꾼에게 확인했다는 통계를 소개하고 있다. <조직부 일꾼의 말에 의하면 1995년에는 당원 5만명을 포함하여 50만명이 굶어죽었고 올해(그때는 1996년 11월 중순)에는 벌써 1백만명 가량이 굶어죽어 간다고 했다. 김덕홍은 이 말을 전하면서 金正日(김정일)은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이를 갈았다. 군수공업 담당 비서의 말도 그와 비슷했다. 군수공장 노동자가 약 50만명인데 그들 중에 기술수준이 가장 높아 보배라고 귀중히 여기던 기술공만 해도 2천명이 굶어죽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너무도 굶주려 직장에도 나가지 못한 채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황장엽(黃長燁)씨의 계산으로는 1996년 말 현재 1년 반 동안 약 1백50만명이 굶어죽었다는 것인데 그 뒤 2년 반의 아사자(餓死者)를 추가한다면 3백만 死亡說(사망설)에 근접하고 있다. 위에 예로 든 세 자료는 과학적인 통계처리와 권위 있는 情報源(정보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제는 「북한에서 1995년 이후 약 3백만명의 동포가 굶주림과 그에 따른 질병으로 죽었다」는 주장이 상당한 통계학적 근거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따져보아야 할 일은 책임문제이다. 황장엽(黃長燁)씨는 회고록에서 「대강 추산해봐도 金日成(김일성)의 屍身(시신)을 보존하는 궁전을 꾸미는 데 쓴 돈의 3분의 1만 절약해도 2백만t의 옥수수를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 정도 식량이면 인민들이 굶어죽는 사태는 당장에라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金正日은 수단과 방법이 없어서 인민들의 떼죽음을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민을 굶주림으로부터 구출할 수단을 最少(최소) 세 가지 이상 갖고 있다. 첫째는 생산성이 엉망인 집단농장을 중국 鄧小平(등소평)식으로 개혁하여 개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私有(사유)농토를 가진 인민들이 죽기살기로 경작하여 1∼2년 안으로 식량을 획기적으로 增産(증산)할 것임이 틀림없다. 金正日은 농토를 개인이 소유하면 당(黨)이 인민을 통제할 수가 없다고 하여 1980년대 초부터 양심적인 북한 기술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어 온 집단농장의 個人農化(개인농화) 개혁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군사비를 줄이면 餓死者(아사자)를 구제할 수 있다. 셋째, 金日成·金正日 우상화 작업을 중단한다면 餓死사태를 막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구제 수단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정권유지와 安樂(안락)을 위해 개혁을 거부한 金正日은 미필적 고의(또는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반(反)인류적 살인행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金日成·金正日 父子(부자)에 의한 최다(最多) 6백만명(6·25전쟁에 의한 3백만의 죽음과 大飢饉에 의한 3백만 죽음) 대학살을 히틀러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나 스탈린에 의한 대숙청, 그리고 폴 포트가 지휘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버금가는 악마적 행위로 기록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백만명이 죽었다면 1차적인 책임은 아사자(餓死者)에 있다. 아사자들의 무능과 게으름을 먼저 탓한 뒤 정부의 책임을 논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사회주의체제下에선 다르다. 북한은 모든 생산수단과 배급기구를 노동당이 독점하고 있다. 따라서 인민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은 당(黨)에 있지 개인에게 있지 않다. 北의 餓死者는 책임을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사정이다. 김정일(金正日) 거세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 金正日과 노동당은 수백만의 죽음을 방치한(또는 유도하고 강요한) 살인범들이다. 이런 도덕적 판단은 오늘날 모든 대북(對北)정책의 大前提(대전제)가 되어야 한다. 수백만의 죽은 생명(그리고 앞으로 더 죽어나갈 생명들)과 金正日 한 사람의 생명은 숙명적인 대치·代替(대체)관계에 놓여 있다. 그것은 수백만명이 죽는 상황을 막으려면 한 사람이 제거되어야 하고 한 사람이 건재하도록 방치하면 수백만명의 생명이 地上(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관계인 것이다. 탈북자와 북한 주민들을 돕고 있는 두 聖職者(성직자)가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金正日 암살이 가장 인도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그리고 가장 정의로운 북한동포 구출법이란 데 생각이 일치했다는 것이다. 북한 사람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일 경우 목사와 승려라도 이런 강경한 이야기를 주저 없이 하는 것은 그들이 느낀 분노가 체험에서 우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헌법상 반(反)국가단체의 수괴인 김정일(金正日)이 2천만 북한주민들을 인질로 잡고서 자신의 일신상 편의를 위해서 식량공급까지 중단하고 있고,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하여 중국으로 달아나는 인민들까지 막고 있다면 이 인질범인 金正日을 물리적으로 去勢(거세)함으로써 2천만을 구출하는 것은 국내법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도 정당화되는 것이란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피학살자 수가 수만명 수준인 코소보에서의 인종청소를 저지하기 위해서 나토(NATO) 국가들이 세르비아에 대해서 벌인 전쟁이 정당하다면, 세르비아의 독재자 밀로셰비치를 국제전범으로 고발한 국제사회의 행동이 정당하다면, 金正日에 대한 암살이나 金正日 정권을 무력화시킴으로써 2천만 주민을 구출하는 전쟁행위는 인질범을 사살하는 경찰행위처럼 정당화된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런 물리적 응징이 전쟁을 불러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 가능성이다. 도덕적 판단은 당위론에 입각하므로 金正日에 대한 암살이나 전쟁이 가능한 것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도덕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 부당한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북한동포 3백만의 아사설(說)은 우리나라 주요 언론에 의해 제대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 우선 金正日의 책임을 배제한 채 「1995년 대홍수 이후 대기근(大飢饉)으로 북한주민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식의 보도를 되풀이함으로써 마치 자연재해로 인한 불가피한 떼죽음인 것처럼 알려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많은 종교단체도 金正日의 책임에 침묵한 채 「무조건 도와주자」는 식으로 나옴으로써 우리 사회의 主流(주류)인 反共(반공) 보수세력의 반발을 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부 보수층은 「金正日이가 잘못한 것에 대해 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나. 그들을 도울 돈이 있으면 남한의 缺食(결식) 아동을 먼저 돕겠다」는 식이다. 북한 인민에 대한 일방적 동정과 金正日 정권에 대한 일방적 증오를 뛰어넘는 새로운 균형잡힌 對北觀(대북관)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은 金正日 정권에 대한 증오심과 굶어죽고 있는 인민에 대한 동점심을 한 덩어리로 묶는 「정의로운 대북관(對北觀)」이다. 人道(인도)와 人權(인권) 개념이 正義(정의)란 보다 높은 가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金正日과 그 부하들을 한없는 증오심으로 바라보면서 압박하고 경계하는 자세, 다른 한편으로는 굶어죽어 가는 동포들을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주는 자세를 겸해야 하고 모든 정책과 행동은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金正日의 反인류적 죄상을 法理(법리)에 따라 정리하여 국제 戰犯(전범)으로 고발하는 운동을 펴고 다른 한편으로는 南風(남풍)이 부는 여름철에 맞추어 「1家口 1풍선 보내기 운동」을 펼쳐 남한 주민이 북한 주민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행동양식, 이것은 상호모순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행동이 된다. 일부 북한동포돕기 운동은 원조물자를 중계하는 북한당국자를 우선적으로 배불리고 살찌우는 사실상의 북한공산당 돕기 운동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남한국민이 직접 북한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도와 통로가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남한 사회의 외면 북한동포 3백만이 굶어죽었다는 주장들은 신문의 1면 머릿기사는커녕 1면의 주요기사로 취급된 적도 없다. 떼죽음의 경우 사망자의 多少(다소)와 원인이 기사의 크기를 좌우한다. 북한 동포의 떼죽음은 因果(인과)관계와 책임소재의 명백한 규명 없이 보도되어 왔을 뿐 아니라 철저한 反인간주의의 관점에서 무시되고 축소되었다. 3백만 동포의 아사설(說)은 그 1만분의 1.7인 5백여명의 사망자를 낸 삼풍 아파트 붕괴사건보다 작게 취급되었다. 피학살자 수에 있어서 그 3백분의 1인 코소보 사태보다도 작게 취급되었다. 머나 먼 아프리카에서 벌어졌고 사망자수에 있어서는 북한의 5분의 1 정도인 르완다 학살 사건보다도 훨씬 작게 취급되었다. 황새 한 마리가 독약을 먹고 죽으면 사진과 함께 1면 머릿기사로 보도하던 신문들은 동포 3백만의 죽음 기사를 1면에서 밀어내고 있다. 수만 마리의 가축이 떼죽음하는 사건보다도 동포 3백만의 죽음은 작게 취급되고 있다. 기자뿐이 아니다. 그 나라 사람들의 話題(화제)와 國政(국정)의 主題(주제)를 설정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동포들의 떼죽음을 단 한번도 제대로 다룬 적이 없다. 북한동포의 떼죽음을 주제로 한 국회청문회도 열린 적이 없다. 옷 로비 의혹 같은 것으로 사생결단 할 듯 싸우는 정치인들은 동포들의 떼죽음에 대해선 자기 집 애완 동물의 배탈 정도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그들은 민족사적인 일대 사건을 외면하고 사소한 것에 목숨걸고 싸우려 든다. 이 정치인들은 지금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적 순간들이 눈앞에서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그래서 북한동포들을 구출할 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잡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통일은 북한동포의 긴급구출이란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사에서 평화시에 수백만이 굶어죽은 적은 한번도 없다. 20세기 어느 나라에도 평화시에 이런 비극이 펼쳐진 적이 없다. 지난 5년간 북한 주민들은 한국전쟁과 같은 규모의 전쟁을 한번 더 치른 셈이다. 전란 중 총칼에 맞아죽는 고통보다도 평화시에 굶어죽는 고통이 훨씬 강력하다. 총칼에 의한 죽음은 순간적이지만 굶어죽는 고통은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동포들의 떼죽음에 대해 우리 사회가 외면하도록 만든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진보와 민주를 자처한 세력이었다. 지식층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정치, 언론, 학원, 출판, 시민단체, 종교단체 등 여론조성기관을 장악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話頭(화두)를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중 상당수는 동구권이 붕괴되기 이전에는 무조건적인 통일, 국가나 이념보다도 민족을 앞세우는 통일을 외치더니 동구권이 무너지고 북한 정권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뒤에는 흡수통일 반대, 북한 인권문제 거론 반대, 金正日 책임론에 침묵하는 反통일세력, 反인권·反민주화 세력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다가 反共세력은 북한동포들의 떼죽음을 金正日 정권의 책임으로 돌리고 『식량문제는 그들이 해결해야지 왜 우리가 도와야 하느냐』는 냉담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북한동포의 떼죽음은 남한동포들의 외면 속에서 조용하게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북한동포의 이런 죽음과 죽임이 보스니아, 코소보 사태나 르완다, 캄보디아 사태보다도 더 작게 취급되고 넘어간 가장 큰 이유는 남한 지식층과 언론, 그리고 정치인의 침묵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해당사자인 남한이 침묵하는데 외국 사람들이 대신 떠들어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지도층은 북한 주민들의 떼죽음에 대해 金正日과 그 책임을 상당부분 共有(공유)해야 할 것이다. 이 기사 뒤에 붙어 있는 탈북(脫北) 오누이 임철(10세)·임소연(8세)의 육성증언은 오늘의 북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자료이다. 열 살짜리가 뭘 알겠느냐고 남한식으로 생각하여 얕잡아 보는 이들은 우선 이들의 육성테이프를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남한 어른들이 겪은 고통이나 위험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체험하고 살아남은 이 男妹(남매)의 눈에 映像(영상)처럼 남아 있는 장면 장면과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붕괴되고 있는 북한 사회의 실상과 그 원인에 대해서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자료는 더구나 인간의 감정이 담긴 육성이기에 단순한 정보 이외에 활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그 무엇을 전해주고 있다.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의 숨결을 느끼면서 써놓은 일기(日記)가 세계의 양심을 향하여 고발한 것 이상의 절박한 상황을 임철·소연 남매는 말하고 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유태인 학살이 끝난 2차세계 대전 후에 발견되었지만 임철·소연 두 남매의 증언은 진행중인 비극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더 깊은 도덕적 각성과 의무를 지우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임철·소연이 어록(語錄) 임철·소연이 오누이의 육성 證言(증언)에는 북한의 실상을 짐작하게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내가 석탄을 메지 않으면 집에 땔 것이 없고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에너지 위기) 『우리 집에 외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오셨는데 어머니 혼자 있으니 먹을 게 없어서 모두 굶어죽었습니다』(노인층의 사망률이 가장 높다) 『병원엔 약이 없고, 棺(관)이 있어야 어머니를 내가는데 관 짜려면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물자 부족) 『풀 계속 먹어서 몸이랑 발이랑 부어서 다 죽었습니다』(사망 직전의 공통현상) 『꽃 제비를 꼬여서 집에 데려가 죽인답니다. 칼로 베서 시장에 국수꾸미로 얹어 판답니다』(이런 소문은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도 맥이 없으니까 아이를 학교에 보낼 생각을 안 합니다. 아이들이 데리러 와도 누워서 말 한 마디 안 합니다. 그래서 이젠 데리러도 안 갑니다』(배가 고파서 학교에도 안 나가는 학생들이 많아 사실상 교육도 마비상태) 『김진혁이란 아이는 똑똑하단 말입니다. 똑똑해도 먹을 게 없다보니 어떻게 합니까. 먹을 게 없으니 머리 쓸 힘도 없었습니다』(식량난은 북한 주민들의 열등화를 초래하고 있다) 『통통 붓다가 움직이지 못하니 덤치려 해도 덤치지 못하고 일하려 해도 일할 수 없고 심부름하재도 심부름할 수 없고 주워먹는 일밖에 못한다 말입니다. 그래가지구 죽습니다』(어린이 거지들의 죽어가는 과정.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체력이 떨어지거나 병들면 죽는다. 임철·소연이는 서로 돌봐주었기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걔네 둘 죽은 걸 어른들이 한 마대에 넣어 가지고 내갔습니다. 돼지새끼 두 마리 넣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영화에서 본,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 시체 치우는 장면과 비슷하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신 다음 나도 딱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생각해보니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불쌍한 걔도 죽게 됐습니다』(극한상황에서 피어나는 피붙이 사이의 정이 그래도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있다) 『고생이란 고생 다 겪어봤습니다』(이것이 10세 된 어린이의 말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기자는 임철·소연이 肉聲(육성) 녹음테이프를 갖고 다니면서 차안에서 여러 번 들어보았다. 일종의 간접 북한체험이었다. 임철군의 말은 어른처럼 성숙되어 있었다. 그 나이에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생각이 깊어진 때문이리라. 어휘력이 풍부한 것은 이 소년이 경험한 喜怒哀樂(희노애락)이 너무 절박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을 스스로 찾아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북한 사람들이 쓴 수기(手記)에 대해서 일부 독자들이 『북한 사람들이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 문장력이 좋다』란 지적을 할 때도 있다. 그렇다. 많은 탈북자들의 글은 명문이다. 표현이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그 글에 담겨진 사연과 사건들이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바깥으로 드러내고 싶고 외치고 싶고 터뜨리고 싶은 수많은 사연들이 쌓여 있다. 북한 사람들은 모두가 소설감을 갖고 사는 것이다. 선택의 문제-3류 국민과 1류 국민의 길 임철·소연이는 시련을 뚫고 살아남았다. 이들은 이미 엄청난 단련을 겪은 것이다. 어리광 부리는 같은 또래의 남한 아이들과 비교해 보라. 북한의 대기근(大飢饉)은 한편으로는 강인한 인간들을 量産(양산)하고 있다. 「빌어도 먹어보고 훔쳐도 먹어보고 주워도 먹어보면서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게 된」 이들 북한 사람들이 앞으로 북한 변혁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 처절한 생존투쟁을 치르면서 저절로 관념과 狂信(광신)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들은 언젠가는 한 방향으로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기자는 임철·소연이의 말이 귓전에 쟁쟁하기에 그 뒤로는 음식을 남기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기자가 북한 사람들의 고통을 머리에 넣고 다니기 때문에 일어난 작은 긍정적 변화였다. 결국 북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 사람들의 고통을 늘 생각한다면 남한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다. 더 근검 절약하게 될 것이다. 사소한 일에는 관대하고 중요한 일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정치인이 북한 사람들의 고통을 잊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치는 보다 책임 있고 당당해질 것이다. 노동자와 사용자도 변할 것이다. 그리하여 노사분규의 모습도 바뀔 것이다. 남한 사람들의 이런 변화는 못사는 동생에 대해 잘사는 兄(형)이 책임지는 자세이다. 그런 자세의 연장선상에서 대한민국이 책임지는 통일로 나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통일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많은 논리의 개발은 국민들을 왜소하고 치사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이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떠 안을 때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존재이다. 막대한 통일비용이 아까워서,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이 싫어서, 그리고 자기 집 앞에 북한에서 내려온 난민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상상하면서 『어쨌든 내 당대에는 통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비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통일비용이 얼마라도 그 비용을 지불하여 12만㎢의 국토와 2천만의 인간을 얻을 수 있다면 싸게 치는 것이다』란 자세로써 『지금이 바로 역사가 선물한 흡수통일의 適期(적기)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 세대는 민족사의 비겁자로 욕을 먹는다』면서 북한동포 구출이란 大義(대의)의 길을 갈 것인가. 前者(전자)는 3류 국가, 3류 국민의 길이고 後者(후자)는 1류 국가, 1류 국민으로 가는 선택이다. 오늘의 한반도에는 천박한 인간이 되는가, 고귀한 인간이 되는가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있다. 정의로운 대북관(對北觀)과 統一觀(통일관)을 가졌느냐의 여부가 그 기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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