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교회 지도자 양성의 선구자 안대욱 선교사(1957-2002) |
받으시기를 원하시면 클릭하세요.(마우스 오른쪽을 클릭해서 다른 이름으로 대상저장을 선택하세요.)
Ⅰ. 들어가며
현재 중국에는 하루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2-3만명 된다는 말이 들리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부흥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처럼 급속도로 중국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좋은 점이지만, 중국교회는 이들을 수용하여 양육하고 제자로 키우며, 중국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로 키우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그 한계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중국교회를 이끌어갈 제대로 준비가 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교회의 지도자가 부족하다는 뜻은 제대로 일꾼을 키울만한 신학교가 중국에 없거나 부족하다는 뜻이다.
현재 중국에는 8천만에서 1억 명의 성도가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약 2천만은 삼자교회에 속해 있고, 나머지 절대 다수는 가정교회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나마 삼자교회는 13개의 삼자신학교를 통해서 목회자를 배출하고 있지만, 가정교회는 전혀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그렇지만 삼자교회 신학교조차도, 정말 성경이 보여주는 복음주의, 개혁주의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기 보다는 자유주의에 가까운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종교가 정부의 통제를 받는 입장 하에서 중국 삼자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가 아주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그 마저도 1년에 삼자신학교를 통해서 배출되는 목회자의 숫자가 200여명도 채 안되기 때문에, 삼자교회의 목회자의 필요마저도 다 채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가정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은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체계적으로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성도들에 의해 교회가 목양되고 있기에, 이단과 극단의 영향에 많이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중국의 성경적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선교사가 있는데, 그가 바로 안대욱 선교사(1957-2002, 본명 차영규)이다. 안대욱 선교사는 1990년 1월 19일 중국에 들어간 이후에, 중국교회에 성경적인 지도자들과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여 사역하였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2002년 4월 13일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의 사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중국 선교사들, 특히 화교들은 안대욱 선교사의 사역을 단순한 교통사고로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죽음은 ‘중국 땅에 묻힌 하나의 밀알’로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안대욱 선교사는 동아시아선교회의 설립자 및 대표로, 또한 문도신학원의 설립자 및 원장으로, 복음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순회신학 강연자로, 중국선교관련 전문 기고자로 참으로 중국을 축복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았던 선교사이다.
‘중국교회 지도자 양성의 선구자 안대욱 선교사’라는 글을 통하여, 그의 성장배경, 소명, 중국에서의 사역, 사역의 특징 등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를 원한다.
Ⅱ. 안대욱 선교사의 생애 및 선교사로의 준비
1. 출생과 한국에서의 삶 (1957-1978)
중국을 사랑하여 중국에 생명을 바친 안대욱 선교사(본명 차영규 목사)는 아버지 차석오(1914-1974) 장로와 어머니 박혜옥 전도사 사이에서 1957년 3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두 분 모두 이전에 배우자를 사별하고, 재혼을 하였다. 따라서 이미 아버지 쪽에 형제들이 2남 1녀가 있었고, 어머니 쪽에도 2녀가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두 분의 결혼을 통하여 4남 1녀가 태어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안대욱 선교사는 3남으로 태어났다.
안대욱 선교사의 아버지는 현재 신반포교회(홍문수 목사 담임)의 전신인 염광교회의 장로로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안대욱 선교사가 고등학고 3학년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또한 안대욱 선교사의 외할아버지 박기호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봉천에서 목회자로 사역하였던 분이다. 어느 날인가 안대욱 선교사의 외할아버지가 중국을 떠나기 전에 자녀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누가 나를 이어서 중국에 와서 사역할 것인가?’ 그 때 이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안대욱 선교사의 어머니 박혜옥 전도사만 ‘아버지 제가 올께요, 제가 아버지 대신 올께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안대욱 선교사는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중국선교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안대욱 선교사가 학생부를 출석하던 당시에 교역자는 김활영 전도사였다. 김활영 전도사는 후에 필리핀의 선교사로 사역을 하였으며, GMS의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분이다. 김활영 전도사가 학생부를 섬길 때에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1970년대 초 만해도 선교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관심을 많이 갖지 못할 때인데, 김활영 전도사의 선교에 대한 도전은 안대욱 선교사로 하여금 선교에 대하여 헌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안대욱 선교사는 외할아버지와 김활영 선교사의 영향으로 선교사로 헌신하였기에, 대학을 총신대학교로 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총신대학교에서 선교로 헌신한 사람들이 ‘미션 아카데미’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공동생활을 하며, 특히 매주 금요일마다 철야를 하였다고 하는데, 안대욱 선교사는 고등학생시절부터 그 금요집회에 참석하여 기타 반주를 하였다.
1976년 총신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선교 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으며, ‘미션 아카데미’에서 공동생활을 하였다. 그 때 ‘미션 아카데미’에는 종종 한국에 오셔서 사역하셨던 미국의 선교사님들과 또한 해외에 나가서 사역하시는 한국 선교사님들이 강사로 선교에 대하여 도전하였다.
당시의 총신대에는 ‘주님의 일을 하려면 총신대에 가야한다’는 말을 듣고 모여든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 동기들 30명 가운데에는 현재 전국 대학에 흩어져 교수로 사역하는 자들이 많은데, 천안대에 방동섭, 김만형, 서종대, 김경진 등이 있고, 부산대에 주광순, 평택대에 이광희, 광신대에 신은균, 총신대에 채리석, 안양대에 신현광, 강학순, 합신에 김학유, 미국 루이지애나 대학에 박혜성 등이 있다. 방동섭, ‘나의 친구 안대욱 선교사를 기억하며(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 24.
안대욱 선교사는 같은 학교 종교음악과에서 피아노 전공을 하던 안경숙을 만나 1978년 12월 21일 결혼하게 되었다. 안대욱 선교사가 이렇게 일찍 결혼을 하게 된 데에는 미국으로 가족들이 이민을 가야 했기에, 서둘러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안대욱 선교사가 안경숙 사모와 결혼하게 된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대학 1학년때부터 안대욱 선교사는 안경숙 자매를 좋아했다. 그러나 본인의 꿈이 선교였기에, 과연 저 자매가 선교에 헌신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주최했던 함께 수련회에 참석했는데, ‘앞으로 이 가운데에 해외 선교를 위하여 평생을 헌신할 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강사의 부름에 앞줄에 앉아 있던 안경숙 선교사가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 모습을 본 안대욱 선교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배필은 바로 저 여자다!’라고 생각한 이후에 계속 교제하여 마침내 결혼하게 되었다.
2. 미국에서의 삶(1978-1990)
1)펜셀베니아 주립대학교에서의 삶(1979-1984)
안대욱 선교사는 결혼하기 전에 이미 미국으로 이민을 간 상태였고, 문경숙 선교사도 결혼 이후 1979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안대욱 선교사는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언어학과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안대욱 선교사가 언어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앞으로 성경번역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에는 중국본토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 들을 집에초청하여 함께 교제하며 복음을 전했던 안선교사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고 한다. 당신들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인간개조’라고 하였다. 이어서 ‘인간개조를 무엇으로 합니까?’라고 물으니 그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안대욱 안경숙 두 선교사의 마음속에는 ‘너희가 중국에 선교사로 가라’는 주님의 소명을 받게 되었다. 이후 펜스테이트에서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학교 내에 개설된 모든 중국어 수업도 함께 받았다.
또한 당시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이 자리 잡고 있던, State College에는 한인교회가 없었다. 따라서 초기에 안선교사는 미국인 교회에 나갔다. 이후에 유학생들을 집에 불러서 성경공부를 인도하였다. 그런데 이 유학생 성경공부 모임이 점차 확대되어 20명에 이르게 되었다. 원래 안대욱 선교사의 계획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바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학생 모임이 자꾸 확대되었고, 또한 언어학 공부에도 흥미를 들여 대학원 공부도 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Teaching Assistant로 직접 미국의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경험도 하였다.
유학생 모임을 교회로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안선교사는 자동차로 5시간 떨어진 필라델피아에 가서 김정우 강도사(현 총신 신대원 구약학 교수)를 만나 펜스테이트 한인교회의 사역자로 청빙을 하였다. 이후 김 강도사가 매주 토요일에 필라델피아에서 펜스테이트까지 와서 하루를 보낸 뒤에 주일 사역을 마치고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갔다. 이후 ‘펜스테이트 한인교회’에는 당시 펜스테이트 교수였던 함인영, 한경택과 그의 가족들도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 지역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알투나 지역에서도 오윤용 교수와 권종득 의사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교회에 주일학교, 성가대 등이 세워졌으며 많이 부흥하게 되었다.
펜스테이트 교회의 초대 담임목회자였던 김정우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필라델피아에서 펜스테이트까지 왕복하며 교회를 돌보고, 유학생으로 공부를 하는 일은 내게 너무나 힘들었다. 처음에는 반쯤 낭만으로 시작하였지만, 매주 왕복 고속도로와 산악 길을 합하여 10시간을 달리며 교회를 돌보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에어컨도 없는 십 년 된 중고차를 몰고, 아이들과 함께 한 여름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은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였다. 어떤 날은 나의 잇몸이 부어오르고 고열이 올라, 도무지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안대욱 선교사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한 주일도 포기하지 않았으며, 내가 어떤 일이 었어도 교회로 오게 하였다. 내가 운전을 할 수 없다고 하자, 그는 나의 친구 유기연 강도사가 헤리스버그까지 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헤리스버그까지 태워오게 하였으며, 그곳에서 나를 그의 차에 태우고 교회까지 데려가 ‘설교를 시킨 적’도 있었다. 물론 그는 그 다음 날, 병들어 누워 있는 나를 나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1983년 12월 셋째 주에는 한 주 내내 눈이 내렸으며, 고속도로는 거의 마비가 되었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또 눈이 더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가야 했지만 두려웠다. 그 때 안대욱 선교사는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와야 한다’. 그 고집을 누가 꺽을 수 있을까? 나와 나의 식구들은 목숨을 걸고 갔다. 그 때, 펜실베니아 턴파이크로 접어들자, 고속도로에는 차선조차 없었고, 차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험한 아팔라치아 산맥으로 이어지는 국도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사히 도착하였고, 그 해 매섭게 추웠던 성탄절은 참으로 아름다운 날로 여전히 기억된다. 김정우, ‘안대욱 선교사와 함께 한 펜스테이트 한인교회 개척이야기’(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p 28-29. 안대욱 선교사는 열심히 김정우 강도사를 도와 펜스테이트 한인교회를 섬겼으며, 또한 그 교회가 세워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2)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시절(1984-1987)
안선교사는 드디어 1984년 드디어 본인이 원하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보통 미국에서는 M. Div 과정을 4년 만에 마치는데 안 선교사는 3년 만에 마치었다. 특히 안 선교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원에서 그가 가장 존경하는 Harvie Conn교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에 대하여는 안 선교사의 웨스트민스터 동창생인 박상용 목사가 증언해 주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는 Harvie Conn 교수라는 선교학의 거목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1960년대 한국에서 10여년을 선교사로 보낸 분이라 한국학생들에게는 매우 친근한 분이셨습니다. 안대욱 선교사님은 이분의 강의를 빼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교학에 대한 필수 과목만 아니라 선택과목도 일일이 수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안대욱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Harvie Conn 교수 밑에서 D.miss 과정에 등록해서 다시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상용,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시절의 안대욱 교수님’(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 32.
안대욱 선교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시절에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델레웨어 한인교회 사역도 병행하여 했다. 특히 이 기간에 중요한 것은 중국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을 만들었던 것이다. ‘신학교 교정에서 1985년부터 중국학생들과 함께 기도모임을 가지다가 1986년부터는 중국 선교에 관심이 있는 한국 학생들과 함께 기도모임을 시작한 것입니다.’ 위의 글, p 32.
안 선교사는 신학교 2학년을 마친, 1986년 여름에 1달간 홍콩을 거쳐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후 안선교사는 중국선교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후 본인의 중국선교에 대한 비젼, 그리고 기도 모임의 구체적인 결과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 무렵에는 ASI(Asian Studies Institute)라는 이름의 선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ASI는 1989년 11월 13일 첫 총회를 통하여 그 동안 준비한 정관을 개정하고 이사회를 선출하고 미연방정부에 비영리기관으로 등록하며 정식 선교단체로 출발하게 되었다. 선교회라는 이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곳은 창의적 선교접근지역인 중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ASI의 창립이사로는 고인호, 은상기, 박상용, 나성균, 이원상 목사 등이다. ASI 라는 이름은 97년도에 이르러 EAM(East Asian Mission)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안대욱 선교사는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학생신분이나 아니면 교수 등의 전문직으로 위장하여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롤 졸업한 이후 다시 Temple 대학교의 영어교육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과정을 수료하게 되었다.
3)임마누엘교회에서의 영어예배 목회자 시절(1986-1989)
안대욱 선교사가 웨스트민스터 3학년 때에 그는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임마누엘교회의 1.5세 2세들을 위한 영어예배 사역자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때에 임마누엘교회 안에는 1.5세 2세 들이 7-8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제자훈련을 시킨 결과 2년 만에 40명, 3년 만에 100여명이 출석하게 되었다. 물론 필라델피아 지역이 대학들이 많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지만, 열정적인 그의 사역 또한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86년 가을 안대욱 선교사가 임마누엘교회의 영어예배 사역자로 부임했을 때, Drexel 대학 1학년생으로 임마누엘교회 영어예배에 등록하여 양육을 받았던 장승혁(Steven Chang,횃불 트리니티 신약신학 교수, 분당 할렐루야교회 영어예배 담당) 박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안대욱 목사님의 영향력은 임마누엘교회 대학부안에 있던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삶을 살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 몇 몇은 전임 사역자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안목사님은 저와 제 아내 리사에게, 자연스럽게, 사역자로의 방향을 갖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주셨습니다. 안목사님은 반드시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안목사님은 사역자의 모델이 되어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안목사님의 중국에서의 사역은 우리에게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도전을 주었습니다.
만일 내가 안목사님을 몰랐더라면, 지금쯤 제가 어디에 있게 되었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제가 만약 안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현재 저는 아시아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학교에 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풍성히 열매 맺는 찬양사역의 경험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의 아내인 리사와 결혼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에서 제가 확신하기로는 만약 제가 안목사님을 알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저는 제가 지금 있는 곳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Steven Chang 'If I had not known Pastor Ahn?' (동아시아연구 제18호), 2003년 8월, pp 43-44. 당시에 안대욱 선교사가 임마누엘교회에서 영어예배 사역자로 사역할 때 그 교회에서 교육부장으로 섬겼던 유택상 장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안대욱 선교사는 뛰어난 영어실력과 미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주일설교와 금요성경공부 등에 큰 은혜가 쏟아져다. 처음에 대학부를 위한 독립예배가 7-8명으로 시작되었으나 모임의 열기가 점차 높아져 갔고 믿음이 연약하던 자녀들이 날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진정으로 주님께 감사했다. 그 당시 2년 사이에 40여명의 사역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곳에 있는 것 같으니 2세 영어 목회의 선구자로서 마음을 굳히도록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초지일관하여 중국의 사역자로 준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1989년 12월 그는 그가 원하던 곳으로 파송을 받았다. 그 때 교회 영어 사역은 이미 100여명에 이르렀으며 독립교회로의 초석이 닦여져 있었다. 그 후 안선교사님의 선교 Vision을 따라서 우리 교회는 그 후 최초의 단기 해외 선교를 영어예배부에서 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영어예배는 Paul Kim 목사님과 5명의 부교역자가 섬기는 400여명의 모임이 되었으며, 2부 예배와 개척교회를 준비 중인 교회로 부흥 발전하였다. 유택상, 필라델피아 임마누엘교회 영어 목회 시절의 안 목사님(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p 46-47.
안대욱 선교사는 1989년 여름에 안경숙 선교사와 함께 한 번 더 1달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아마도 여성 선교사로 아내에게 중국을 미리 경험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중국으로 들어 갈 날이 얼마 안 남았기에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후 임마누엘교회에서 영어예배 사역자로 남으라는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설립한 단체인 ASI를 통하여 중국으로 파송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90년 1월 19일 그의 아내인 안경숙 선교사와 제인(당시 4살), 제이슨(당시 2살) 두 자녀를 데리고 선교현지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3. 중국에서의 삶 (1990.1.19 - 2002.4.13)
안대욱 선교사는 북경공업대학의 영어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선교제한지역인 중국에 ‘외국인 초빙교수’라는 신분을 이용해 창의적인 방법으로 중국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원래 안대욱 선교사는 하얼빈의 대학으로 갈려고 하였지만, 당시 남서울교회 담임인 홍정길 목사의 조언을 받고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수도 북경을 선교지로 정하게 되었다.
이후 1996년 8월부터 1997년 7월까지 미국에서 안식년을 한번 갖은 것 외에는 계속해서 중국선교사로 캠퍼스 전도, 제자훈련, 조선족 사역, 문도신학원 사역, 교회개척 사역 등을 하였다. 그리고 2002년 4월 13일 선교현지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Ⅲ. 중국에서의 선교사역
1. 캠퍼스 전도
북경공업대학의 영어교수로 중국에 입국한 안대욱 선교사는 먼저, 그의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추수감사절, 성탄절 같은 시기를 중요한 접촉점으로 하여, 중국의 대학생들에게 미국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아울러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특히 성탄절 같은 시기에는 대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함께 성탄절 행사를 하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캠퍼스 전도는 북경공업대학에서 북경연합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계속해서 하였으며 이후 에는 안선교사의 사역이 확장되면서 대학에서의 교수직을 사임할 때 까지 지속되었던 초기의 중요한 사역이었다.
2. 제자훈련
안선교사의 가장 큰 장점은 제자훈련에 있었다. 안선교사는 제자훈련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사역자로, 미국에 있을 때부터 펜스테이트 한인교회와, 임마누엘교회 영어예배에 이 방법을 사용하여 이미 부흥을 경험했던 사역자이다.
안선교사가 중국에 들어가고 몇 개월 되지 않아, 조선족 청년이었던, 차철, 김명일 두 형제가 안선교사의 소문을 듣고 조용히 찾아와서, ‘선생님 우리들을 키워주세요.’라고 하였다. 당시 김명일 형제는 북경대학의 학생이었고, 차철 형제는 은혜를 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후 안선교사의 제자훈련은 그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하게 했으며, 이후 이들은 중국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사역을 하게 된다. 후에 김명일 형제는 안선교사가 세운 문도신학원과 또한 남경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도신학원과 남경신학원의 교수로도 사역을 하였으며, 특히 북경에 있는 삼자교회중 하나인 강와시 교회의 조선족 예배 담임 사역자로 사역을 하게 되었다. 강와시 교회의 조선족 모임에는 200명 이상의 조선족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그 들 중에는 북경대, 청화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대학생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 있는 많은 목회자들과 중국에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현재는 미국 Fuller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또한 차철 형제는 안선교사의 제자훈련 이후, 동북신학교 조선족 반에 들어가 공부하여 졸업하였다. 현제는 흑룡강지역의 조선족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다.
안대욱 선교사의 제자훈련에 대하여는 동아시아선교회의 이사장인 박은조 목사가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짧지 않은 시간을 안대욱 선교사님과 교제하면서 제가 이 형제와 평생 동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주로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그의 진실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둘째는 사람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는 그의 사역 방향 때문이었습니다. 1991년 쯤 그의 사역을 둘러보기 위해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단 두 사람의 조선족 형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제 자신 또한 제자훈련을 하면서 소그룹으로 사람을 양육하는 비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역 방향에 전적인 동의가 가능했고, 그리고 중국 땅에서 열매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선교지 중심으로 일하자는 그의 철학이 평소의 제 생각과 일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박은조, ‘내가 만난 안대욱 선교사님’(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 15.
3. 동북신학교 조선족반 교수요원 훈련 사역
중국의 삼자신학교중 유일하게 동북신학교에는 조선족반이 있다. 그들은 조선어로 신학교육을 받는다. 동북신학교 조선족반이 시작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안대욱 선교사와 오애은 목사(서탑교회 담임)가 함께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오애은 목사는 어렸을 때, 안선교사의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던 교회에 출석하였다. 이후 안선교사가 중국에 선교사로 가서 그를 만났을 때, 오애은 목사는 ‘안선교사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하면서 아주 반가워했다.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동북신학교내에 조선족반이 설립되게 되었다.
안선교사의 주된 임무는 교수요원을 훈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경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매 주말 등을 이용하여, 십수시간 기차를 타고 북경에서, 심양까지 왕복하며 교수요원들을 훈련하였다. 그리고 93년 가을에는 동북신학원의 교수와 학생 대표단을 ASI 주관으로 한국으로 초청하여 한국의 신학교를 참관하고 신학자들과 교제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북신학원 사역은 후에 한국 장로교 통합측 교단에서 이 사역의 중요성을 보고 맡아서 하게 되었다. 따라서 안선교사는 이 사역을 그만두게 되었다.
4. 문도신학원 사역
안선교사의 중국 교회의 이해에 의하면 중국교회는 체계적인 신학교육이 가장 부족한 곳이었다. 따라서 그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중국에 바른 개혁주의 신학사상을 전할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었고, 또한 그러한 사상에 따라 성경적 중국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안선교사는 1993년 9월에 정식으로 중국인들을 위한 3년제 전임 신학교인 문도신학원을 세웠다. 그 당시 학생들은 모두 북경 내에 있는 몇 몇 삼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자들인데, 삼자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던 자였다. 그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었으며, 또한 박사학위를 소유한 자들도 있었다. 또한 이미 삼자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삼자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던 자들도 있었다. 이지니, ‘안선교사님과 그가 세운 신학교’(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 48.
서안대학을 졸업한 기자출신으로, 문도신학원의 제1기 학생으로 졸업하였으며 후에 교무처장으로 5년간 안선교사를 도왔던 이지니 교수(현재 미국 Logos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 수학)는 안선교사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다.
내가 생각할 때, 안선교사님의 가장 큰 공헌은 그가 엄격하게 성경해석을 한 것과 조직신학 사상을 중국에 가지고 온 것이다. 그를 통하여 나는 각각의 신학파와 성경해석 방면의 비교를 알았고, 중국 농촌교회에서 나타나는 성경해석과 설교의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또 특별히 스스로 앞으로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 분명한 방향을 잡게 되었다. 위의 글, p 49.
문도신학원의 설립자인 안선교사는 제1기를 훈련할 때에 성경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등 본인이 매주 20여 시간을 가르쳤다. 또한 한국과 미국에 있었던 가장 저명한 신학교수 들을 중국으로 불러들여 1주간씩 집중 강의를 통하여 신학교를 운영해 나갔다.
그 동안 문도신학원에서 강의했던 객원교수들은 한국의 합신에 신복윤, 윤영탁, 박형룡, 오덕교, 성주진, 김성수, 유영기, 박영선 교수 등이고, 총신에는 김의환, 김정우, 권성수, 황성철, 김지찬 등이 며, 고신에 양낙홍, 미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 박성일, 황규명 교수 등이 있다. 또한 목회자로 박은조, 심이석, 박삼영, 구자우, 송영재 목사 등이 있으며, 화교 가운데에는 조나단 차오, 린츠신 등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있다.
안선교사는 중국에서 지하의 개혁주의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크게는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다. 먼저는 중국교회가 개혁주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중국교회의 신학은 대부분이 ‘세대주의 사상’, ‘오순절파 사상’, ‘워치만니 사상’ 등이 혼합되어, 정확한 세계관과 신학관의 부족으로 반지식적, 반이성적, 반신학적인 경향이 있다.
이러한 중국의 신학경향에 대하여 그의 제자 중 한 명으로, 문도신학원의 제4기 졸업생인 친광러는 이렇게 증언한다.
14년전 중국에 있는 수천만의 그리스도인 중,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개혁주의 신학’과 ‘칼빈’이라는 말에 대하여 들었으며, 또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경에 합한 신학사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비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을 알았지만, 대부분은 자세한 내용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과 사역자들은 모두 ‘체계적 신학공부’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이런 현상은 여전히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친광러, ‘보고싶은 안대욱 교수님’(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70.
두 번째로 안선교사가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바로 보안문제였다. 이로 인하여 문도신학원은 여러 차례 옮길 수 밖에 없었으며, 또한 매년 신입생을 10명 정도 밖에 받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지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중국의 신학교육을 위해서 그는 정부의 핍박을 이겨내야 했다. 한 번은 학기 중에 여러 차례 공안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 때 학생들은 대단히 긴장해서 조속히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안교수님은 수업을 계속하는 것을 고집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의 중국의 상황에서 신학교육을 위해서는 핍박 받는 것은 피할 수 없고, 장기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하시며 학생들을 다 자신의 집으로 다 데리고 와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며 마지막 수업까지 마치고 시험까지 다 치루었다. 이지니, 앞의 글, p 50.
안선교사는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지식적으로만 그들을 가르치지 않았다. 특히 그는 경건훈련과 신앙인격의 훈련을 위한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였다. 안선교사는 학생들에게 Q.T하는 것을 강조하여 가르쳤다. 그 자신이 먼저 엄격하게 매일매일 Q.T를 하였는데, 그는 한 번 Q.T 할 때 마다 그의 공책에다 받은 은혜와 적용 등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기록했다.
또한 그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오랜 시간 신학교육을 받아왔던 그의 학생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써야만 했다. 문도신학원은 1년 3학기제로 운영이 되었는데, 1학기에 9주씩 수업을 하였다. 그런데 한 번 학기가 시작되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꼼짝없이 학교안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며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학교래야 허름한 가정집을 약간 개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밀폐된 공간 안에서 생활하던 학생들의 스트레스는 아주 많았을 수 밖에 없었기에 안선교사는 그들을 위로하며 격려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썼다.
이에 대하여 이지니 교수가 증언하고 있다.
중국의 10여년의 사역중, 그는 아주 힘들고 무거운 행정의 일과 많은 신학 강의와 교회를 목회하는 일을 맡았었다. 그리고 그는 학생들을 위하여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돌아가신 후, 학생들은 그의 개인적인 그리움에 대하여 잊지 못했다. 시간만 있으면, 그는 먹을 것을 학교에 사 가지고 와서 학생들과 함께 먹고, 함께 탁구를 치고, 함께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예기하곤 했다. 농촌에서 온 학생들과 열등감이 있는 학생은 그의 격려를 받아서 점점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는 열정적으로 손을 내밀어 각 사람에게 아주 세게 악수하였고, 눈에는 진실함과 사랑이 흘러나와서, 여러 학생들의 굳어졌던 마음들이 그에 의해 온화해지곤 하였다. 그를 사랑함으로 인해 학생들은 점점 더 그의 강의를 듣는 것을 좋아했고,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이지니, 앞의 글, p 50.
또한 친광러도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안대욱 선교사님의 우리를 향한 교육, 관심, 보살핌, 섬김은 우리가 전부 목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낙담할 때 그는 격려했고, 우리가 어려울 때 그는 가르쳐 주었고, 우리가 죄지을 때,그는 잘못을 고쳐주었고, 우리가 겁이 날 때 그는 위로하셨습니다. 학교가 위치했던 지역 어디서든 그러셨습니다. S라는 지역에 학교가 있었는데, 그 때, 우리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는 W라는 곳으로 이사했습니다. W에서 몇 몇 학생들이 다시 S로 이사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의견들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님은 바로 학생들과 상의해서 결론을 얻었는데, S로 돌아가면 모두 다 두려워할 것 같으니 3학년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가게 하였고, 2학년은 Y집으로 이사하게 하였습니다. 조금도 번거로움을 귀찮아하지 않으셨고, 우리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매 번 우리가 긴장할 때, 그는 곧 바로 오셔서 위로하시고, 우리가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얼마나 큰 대가를 치루셨는지 모릅니다. 친광러, 앞의 글, p 71.
안선교사는 비록 문도신학원이 작은 신학교였지만, 학사관리 만큼은 그 누구 보다도 철저하고도 엄격하게 하였다. 그 증거는 매년 신입생들이 10명 정도 오지만 졸업식 때에는 5명 안팎이 경우가 대부분이며 심지어는 2명 만이 졸업할 때도 있었다. 이러한 엄격한 학사관리는 후에 그의 졸업생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게 하였으며, 또한 졸업생들이 해외 유학을 가게 될 때에 문도신학원의 학위과정을 어느 정도 인정 받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현재 문도신학원 출신의 해외 유학생들은 영국의 Oxford, 미국의 Fuller, Logos 등에서 목회학 박사(D.Min), 혹은 신학석사(Th,M)등의 학위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
5. 지방순회 신학교육 사역
안선교사는 문도신학원의 방학기간을 맞아 여러 차례 중국의 농촌지역을 다니면서 순회신학강의 사역을 하였다. 특히 이러한 사역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문도신학원에서 그에게 신학훈련을 받은 제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선교사가 주로 방문했던 지역은 안휘성과 산동성이였는데, 앞으로 이들 지역은 문도신학원의 분교가 세워질 가능성이 많아지게 되었다.
안선교사의 지방사역에 대하여 이지니가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이지니, 앞의 글, p 51.
학교 방학 기간에 학생들은 특별히 그를 청하여 자신들이 일하는 지방에 모시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없는 시간을 내어 가장 덥고, 추운 계절에 전국 10여개 성과 시에 가서, 몹시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그 모든 상황을 극복하며 가장 외진 중국의 농촌에 가서 섬기고 일하였는데,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큰 감동을 남겼다.
안선교사의 지방순회사역은 지방의 목회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안선교사 자신에게도 중국교회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2002년 4월 7일 오후부터 12일 오후까지 산동지역 순회 신학강의를 다녀왔는데, 그 때 그가 그의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하나님께서 나를 중국에 불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해, 이번에 가서 또 많은 은혜 받고 돌아왔어.’
또한 지방순회 사역을 통하여 지방에 있는 목회자들이 그들 중 신학교육을 받을 만한 사람들을 추천하여 문도신학원에 보내었다. 중국에서의 신학교 사역을 하려는 선교사들이 많이 있는데, 가장 큰 어려움 중에 하나는 신학생들을 모집하고 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도신학원은 늘 학생들이 서로 오고 싶어하는 학교로 입학시 최소한 3:1 이상의 경쟁률을 통과해야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안선교사와 문도신학원 졸업생들로 구성된 교수들의 강의를 들은 지방교회 목회자들은 그들에게 분교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따라서 안선교사는 그에 따라 2010까지는 최소한 5개 지역에 문도신학원 분교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6. 교회개척 사역
안선교사가 문도신학원을 통하여 배출한 그의 제자들을 도와 시작한 사역이 바로 북경 내에 가정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안대욱 선교사의 가정교회 개척 사역은 크게 초기 사역과 후기 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초기 사역은 그가 안식년을 가기 전인 1996년까지 했던 방법으로, 그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왔던 간접적인 방법이었다. 가끔씩,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성찬식이나, 세례식 등을 인도하기도 하고, 말씀도 전했지만, 그래도 제자들이 직접적으로 교회를 하도록 했던 시절이다. 이 시절의 대표적인 교회로는 천광교회, 시온교회, 임마누엘교회 등이 있다.
그러나 이후 안선교사는 보다 직접적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제자들에게 목회자로의 본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교회와 분리된 것은 신학이 아니라 종교학일 뿐이므로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에 봉사하고, 또 철저하게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만약 중국 가정교회에서 지식인들을 섬길 수 있다면, 그들을 헌신케 하여 중국 교회를 섬기도록 한다면 아주 큰 희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까오전, ‘중국 현지 사역자가 본 안대욱 목사님의 목회’(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p 53-54.
안선교사는 문도신학원의 제4기 신입생이었던 북경출신의 까오전 전도사와 함께 1999년 ‘복음교회’라는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안선교사의 신학원 제자이면서, 복음교회에서 전도사로 동역했던 까오전 전도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복음교회를 세우기 전에, 그는 많은 준비를 하였는데, 목회철학을 쓰셨고, 교회의 장소를 확정하셨고, 평신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헌당하셨다. 우리들의 신학과정 중의 목회학은 안선교사님의 목회 지침이었다. 그는 강의실에서는 교수였지만, 목회하는 중에는 자신 스스로 그것들을 실천하셨고, 또한 그것들을 가지고 강의실에서 다시 강의하셔서, 우리들에게는 더욱더 생동감이 있었다. 그는 교회의 기능을 중시하였고, 사람이 적을 때에도 교회의 기능이 건전하게 실행되고, 예배, 양육, 선교, 교제, 봉사 등의 일에 사람들이 책임지고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는 체계를 갖춘 교회질서와 성경에 일치하는 교회의 인도방법을 세웠다. 앞의 글, p 54.
안선교사가 중국에 세우고자 한 교회는 해외교회를 단순히 중국에 이식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중국 상황에 맞는 즉 다시 말해 상황화가 잘 된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주 “나는 외국에 있는 교회를 가지고 오려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맞는 중국교회를 세우려는 것이다.” 앞의 글, p 55.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교회에 제자훈련 사역을 도입하였으며 거기에 집중하였다. 복음교회에서 2년여의 시간 동안 8명의 제자들을 직접 훈련하였는데, 이 8명의 제자들은 모두 현재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사역자들 앞의 글, p 56.
로 설교, 제자훈련, 학습, 세례반 인도, 새가족반 인도 등의 사역을 하고 있다.
안선교사의 제자훈련에 대하여 그의 동역자 까오전 전도사는 이렇게 정리하였다.
안대욱 선교사의 제자훈련 인도 방법은
먼저, 그는 인도하려고 하는 선택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둘째, 제자훈련의 목표를 정하고 목표달성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교재를 사용한다.
셋째,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반드시 평가한다.
넷째, 제자 구성원 가운데 함께 헌신하여, 함께 놀고, 함께 밥을 먹으며 삶을 나눈다.
다섯째,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십자가를 함께 진다. 앞의 글, p 56.
현재 안선교사가 개척한 복음교회는 모두 4개의 교회로 분립 개척되었다. 또한 중국문도신학원의 총 소요 경비에 3분의 1 가까운 비용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복음교회의 구성원들 대다수가 청년, 지식인, 전문인들 그리고 외국에서 들어온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앞으로 그 교회의 영향력은 상당할 것이다.
특히 이들은 안선교사의 제자훈련을 받은 자들고, 그의 인격과 신앙을 직접 눈으로 본 자들이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중국교회에 줄 수 있을 것이다. 안선교사의 제자훈련을 받았던 란징이라는 복음교회 자매는 안선교사를 추모하며 이렇게 고백하였다.
선교사님, 비록 당신의 우리들의 선교사님이었고, 우리들의 목자였지만, 한 번도 우리들 보다 높이 계시지 않았어요, 또한 변치 않는 웃음으로, 열정적인 손을 내밀어 각 사람을 영접하셨고, 각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셨지요. 노인이든, 청년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지식인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당신은 동일한 사람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그들을 사랑하셨지요. 제가 기억하는 건, ‘이혜혜’라는 아이들 두 다리가 없었는데, 그 아이는 단지 무릎으로만 걸을 수 있었어요. 그 아이가 일어섰을 때, 그는 단지 1미터가 조금 넘는 아이였어요, 우리들은 허리를 굽혀서 그 아이에게 말하곤 했지여, 그런데 한 번은 당신이 무릎을 꿇고 그 아이에게 예기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 광경은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었지요. 당신은 자기의 신분에 대한 돌봄이 없었어요, 무릎을 꿇고 이처럼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아이와 평등하게 대화를 한다는 것은 당시의 우리들이 볼 때, 얼마나 부끄러운 느낌이었는지, 선교사님! 당신은 항상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섬기는 마음을 갖도록 가르쳐 주셨고, 또 그날 당신 스스로 실제적인 행동으로 우리를 위해 생생하게 가르쳐 주셨죠, 당신의 사랑, 연민의 마음, 목양하는 마음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었습니다. 란징, ‘존경하는 안대욱 목사님께’ (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 75.
안선교사의 교회 개척을 보고 배운 제자들은 후에 밀알교회(문도신학원 제4회 졸업생 샤오전도사 담임), 부흥교회(문도신학원 제2기 졸업생 료전도사 담임) 등을 개척하기에 이르렀는데 모두들 건강한 교회로 잘 성장하고 있다.
7. 연구 및 문서사역
안대욱 선교사는 중국선교 전문가로 <동아시아연구>라는 선교지를 창간하여 15호가 되도록 지속적으로 집필과 문서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중국을 주께로>라는 중국선교전문 잡지에도 여러 차례 글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신학생들과 중국선교 헌신자들을 위해서도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중국선교 세미나와, 중국선교학교 등을 통하여 그의 사역경험과 중국에서의 사역 정보 등을 제공해 주었다.
중국선교전문가로 안선교사를 중국선교연구원 원장인 인병국 목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안선교사는 탁월한 중국선교전문가였다. 그가 중국선교전문가로서 사역을 하고 기여한 것은 그만의 독특한 경험과 달란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12년간 선교사로 다양한 영역 (주로 제자훈련, 지도자교육 및 신학교육 교회사역 문서사역) 등에서 사역을 한 경험은 중국선교전문가로서 큰 자산이었다. 학자적인 두뇌와 끊임없는 학구열 그리고 통찰력과 분석력, 대안을 모색하는 능력은 중국선교전문가로서 사역을 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이 되어 있다. 인병국, ‘중국선교전문가로서의 안대욱 교수’(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 60.
또한 인병국 목사는 안대욱 선교사의 중국선교 연구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안대욱 선교사는 나름대로 중국선교를 연구하는 방법론을 터득하여 확립하였다. 그의 연구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그의 문헌을 통한 연구가 돋보인다. 영어,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선교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을 접하고 연구할 수 있었다. 문헌에 의거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소지를 최소화 하였다.
둘째, 인터뷰와 참여자 관찰을 활용한 중국선교의 제 문제에 대한 접근은 선교학적으로도 타당한 조사 방법이었다. 그는 중국의 주요한 지방들을 방문하면서 접하게 된 중국교회와 선교에 대한 정보들을 취합하고 조사하고 분석하였다. 특히 10여개 성 이상에서 온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정보도 중요한 연구의 자료가 되었다.
셋째, 자신의 사역경험을 근거로 하여 중국선교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였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초창기의 조선족사역으로부터 학원사역, 신학교사역, 교회개척 사역 등은 중국선교 연구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자신이 사역한 경험을 근거로 하여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앞의 글, p 61.
안대욱 선교사의 글은 주로 <동아시아연구>와 <중국을 주께로>에 실려 있다. 그의 글들은 주제가 다양하며 내용 또한 상당한 수준의 깊이가 있다.
인병국 원장은 다음과 같이 그의 글들을 내용상으로 9개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첫째, 동아시아연구를 창간하면서 쓴 권두언 - 믿음의 사람이 필요한 시대
둘째, 중국선교 전반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전망도 하고, 중국선교 현황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며 중국선교의 과제를 제시하는 글 - 21세기 중국선교 그 전망과 우리의 과제, 오늘날의 중국선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한 현지 사역자가 본 중국선교 현황
셋째, 중국교회의 신학교육과 신학사상에 대한 글 - 사회주의 중국에서의 신학교육과 신학 사상, 삼자교회의 신학사상, 중국독립가정교회의 신학사상
넷째,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에 있어 네비우스 선교방법에서 배우고 활용할 점을 다른 글 - 네비우tm 선교방법과 근래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다섯째, 중국선교의 집중사역인 신학교육에 대한 글 - 한국교회 21세기 중국선교에 있어서의 지도자 양육과 신학교육, 중국교회 지도자 교육과 문도신학원의 역할
여섯째, 중국신학의 상황화 등에 대한 시도를 담은 글 - 중국신학의 토착화 및 상황화 작업의 역사
일곱째, 가정교회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다룬 글 - 대륙의 중국인 현지교회 일꾼들이 말하는 중국가정교회의 문제점
여덟째, 중국 도시에서의 가정교회 개척과 도시 가정교회의 잠재역량에 관한 글 - 한국선교사의 중국도시 가정교회 개척 직접인도, 중국의 도시가정교회 어떤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가?
아홉째, 중국선교 헌신자들의 준비를 위한 조언 - 신학 전공자들의 중국선교 사역과 그 준비 앞의 글, p61-62.
8. 선교행정가로의 사역
안대욱 선교사는 동아시아선교회의 설립자 및 실무 대표로 행정가로의 사역을 담당하였다. 그의 행정가로서의 사역은 주로 선교단체의 설립 선교사의 동원, 허입, 교육, 관리, 이사회 준비, 모금 등에 있어서 잘 나타나고 있다.
중국선교단체를 세운 안대욱 선교사는 중국대륙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보안성, 단순성, 유연성을 가지고 현지 중심의 여러 가지 총체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기관으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정은 그렇게 치밀한 편은 아니었다. 동아시아선교회의 총무로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사역했던 정갑신 목사는 행정가로서의 안대욱 선교사를 한 마디로 ‘꿈 많고 서투른 행정가’라고 표현하고 있다.
행정가의 이미지는 용의주도하다. 그러나 그는 보기보다 용의주도하지는 않았다. 행정가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보다는 덜 조직적이고 덜 체계적이었다. 오히려 그를 알면 알수록 그에게는 ‘꿈 많고 서투른 행정가’의 냄새가 짙게 배어 나왔다. 나는 그의 서투른 모습을 아직도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 이사회나 총회를 준비할라치면, 준비해야할 서류들이 많다. 그런데도 그는 사소한 이야깃거리라도 대화가 시작되면, 끝없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 결과 회의 서류들은 ‘준비하다 만 것 같은’형태로 제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볼 때, 그의 보고서 작성은 덜 섬세했고, 덜 온전했다. 그는 보고서의 기록에 신경을 크게 쓰지는 않았다. 실제적 일의 되어감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는 장기적으로는 체계적이었지만, 단기적으로는 비체계적으로 보였다. 그는 꿈과 목적에 의해 이끌림 받는 사람이었지만, 단기적으로는 작은 성패여부에 연연해 하지는 않았다. 정갑신, ‘선교행정가로서의 안대욱 선교사님’(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 58.
또한 정갑신 목사는 안대욱 선교사를 ‘사람 행정가’ 또는 ‘대화의 행정가’라고 평가했다.
어쩌면 선교행정가로서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행정, 곧 ‘마음이 통하는 동역자 세우기’로 정리될 것이다. 내가 본부 사무실의 간사와 총무로 지내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라는 마음의 일치를 확인하려는 본능적인 열망이었다. 앞의 글, p 57.
그는 일을 좋아했지만, 대화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무리 바빠도 패스트 푸드점 같은 곳을 찾아 치킨을 시켜놓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무척 사랑했다. 그래서 문도신학원을 아시아신학연맹(ATA)에 가입시키는 중대한 일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하다가도 자주 삼천포를 방문하곤 했다. 대화가 많은 만큼 구체적인 추진은 더뎠지만, 그래도 그는 대화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따라서 사무실의 간사들은 그의 사역과 삶, 가족과 일에 대한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거의 꿰뚫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말 하곤 했기 때문이다. 앞의 글, p 59.
Ⅳ. 안대욱 선교사의 사역적 특징
1. 분명한 소명
안선교사가 신학교에서 중국인 제자들에게 종종 했던 표현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나를 환영해 주어도, 나는 중국에 왔을 것이고, 환영해 주지 않아도 나는 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이 나를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많은 문제에 부딪쳐도 그 분은 낙관적이셨고, 믿음이 있으셨으며, 또한 계속 우리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친광러, 위의 글, p 72.
참으로 선교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명인데, 안대욱 선교사에게는 분명한 소명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행복한 선교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명은 그를 마지막까지 창의적 선교지인 중국에서 기쁘게 사역하도록 만들었다.
안선교사가 늘 성경에 써서 지니고 다녔던 글이 그의 사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첫째, 아무리 그 어떤 고난과 핍박과 위험이 닥쳐와도 주님이 허락하신 때가 아니면, 생명을 해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둘째, 아무리 그 어떤 고난과 핍박과 위험이 닥쳐와도 주님께서는 주의 종을 복음 전파하는 곳에 가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셋째, 필요시에는 국가 사회의 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넷째,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르시지 않았던 사도바울을 내가 배워야 하겠다. 안대욱, ‘창의적 선교 접근지역에서의 사역자세’ (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 6.
그가 이 글을 늘 가지고 다니던 성경책 맨 앞장에 붙여 놓은 이유는 아마도 고난과 핍박과 위험 있는 사역의 현장에서, 사역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 가를 되새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글은 창의적 접근지역 선교사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철저한 준비
안대욱 선교사는 중국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할 때에나 사역을 할 때에나 늘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미국으로 이민 간 이후 미국에서의 12년간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그를 중국선교사로 훈련시킨 기간이었다.
또한 그는 늘 강의나 제자훈련 등도 철저하게 준비해서 하였다. 이점에 대하여 그의 제자이자 목회 동역자인 까오전 전도사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평상시 제자훈련 때와 매번 있는 강의나 설교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을 즉흥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었고, 매번 빽빽이 쓴 강의원고나 설교문을 준비하셔서 말씀하셨다.’ 까오전, 앞의 글, p 53.
3. 개척자로서의 은사
하나님은 안대욱 선교사를 중국에서 신학교육을 담당할 자로 선택하셨기에 여러 가지로 개척자적인 은사를 주셨다. 펜스테이트 한인교회가 개척되도록 한 일이나, 기도모임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식선교단체인 동아시아선교회를 설립한 일이나, 임마누엘교회 영어 예배부를 시작한 일 등은 개척자로의 그의 은사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러한 은사는 마침내 중국에서 문도신학원과 여러 도시 가정교회들을 설립하는 데에 잘 드러났다.
4. 집중력
안대욱 선교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집중력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건망증도 심해서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에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은 후 차에다가 키를 꽂아놓고 그냥 내려서 어려움을 당했던 적이 많다고 한다. 또한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의 그의 가방을 살펴보면 흘리고 가는 돈도 꽤 있었다.
그의 이러한 집중력을 정갑신 목사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안 선교사님의 이미지 폴더에는 ‘야무진 탱크’라는 이름의 파일이 있다. 그 탱크는 앞만 보고 달리는 탱크다. 그 탱크는 목표물에 포탄을 명중시킬 때까지는 결코 옆이나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사역을 가능하게 했고,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또한 그것이 그의 매력이었다. 나는 나에게 현저하게 부족했던 그의 탱크 이미지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정갑신, 위의 글, p 58.
또한 안대욱 선교사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 3년 후배로, 동아시아선교회의 미주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한요 목사는 웨스터민스터 시절의 안선교사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중국으로 답사여행을 가신다는 예기에 당시 여자친구의 용돈까지 빼앗아 몰래 헌금을 학교 메일박스에 꽂아 놓았던 기억이 난다. “차차차, 중국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 가십시요.”라고 메모를 남겼던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이 난다. 그 작은 체구에서 엄청난 추진력을 내는 안대욱 목사님의 인상은 말 그대로 ‘차차차’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도 중국선교를 꿈도 꾸지 않았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단기선교여행을 하고, 기도회를 조직하는 모습들이 상당히 낯설게만 여겨졌었다. 총신을 다닐 때부터 기도회를 시작하셨다고 하더니, 하나만 바라보고 있으면 뚫리는 비젼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때 배웠다. 김한요, ‘나의 선배 안대욱 목사님을 그리워하며’ (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p 35.
또한 중국에서도 신학교 강의안이나 설교문 등을 준비할 때에는 그는 엄청난 집중력을 가지고 준비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까오전 전도사가 회고한다. 매번 사무실에 가면 안선교사님이 일에 몰두하여 계심을 보았는데, 고개를 들어 나에게 인사를 나누곤 바로 머리를 숙여 그가 하시던 일에 다시 집중하시고, 식사 때가 되어서야 나오셔서 식사하시면서 우리들과 대화를 나누셨다. 까오전, 위의 글 p 53.
5. 헌신적 자세
안선교사의 사역에 있어서 헌신적인 자세는 한국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가 사역했던 중국의 현지인들에게서 더욱더 생생하게 증언되고 있다.
그는 돌아가시기 전 몇 년 전부터 당뇨병을 앓으셔서 몸이 여위었으며, 기력도 없어지셨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정성은 약해지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신학교의 강의들을 담당했으며 교회를 목회하였다. 한국과 미국으로 분주히 뛰어나녔고, 그는 그가 소천하시는 주까지도 산동의 농촌에서 강의하셨다. 돌아가시기 한 시간 전 마지막 식사도 북경의 한 형제와 만나서 한 것이었다. 사역자가 부족하다는 중국인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답하는 자리였다.
중국의 신학교육, 중국인들의 영혼구원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위해서 그의 모든 것, 특히 생명까지도 지불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생명의 감화 때문에, 그의 아내와 딸은 계속 그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을 중국을 위해 헌신하기로 하였다. 또 그가 대가를 지불함으로 인해, 그를 본 아주 많은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과 좋은 직장들을 포기하였으며, 헌신하여 전도자가 되었다. 더욱 더 그의 희생과 사랑으로 인하여, 그가 세운 복음교회는 헌금액이 항상 어느 교회보다 넘치고 있다. 크리스천 기엄가들은 자신들의 물질을 헌금하며 안대욱 선교사가 행했던 여러 사역들에 동참하며 지원하기를 원한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생명을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안대욱 선교사가 중국에 보냄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중국을 사랑하시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지니, 위의 글, p 51.
위와 같은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 있는 동역자들에게 안대욱 선교사와 같은 칭찬을 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그는 행복한 선교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나오며
안대욱 선교사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종, 주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 내가 원하는 바 나의 생명을 중국에 바칩니다.’ 이 글은 그의 15살난 아들 제이슨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며 묘비에 적은 글이다.
참으로 안선교사의 사역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었고, 중국사역에 더욱 열심을 내게한 원동력이 되었다. 안선교사가 소천한 후 그의 장례식장에서 동아시아선교회의 박은조 이사장은 아래와 같은 말로 마무리를 하였다.
‘안선교사님 땅 끝까지 복음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들고 머나먼 이 곳 중국 땅까지 와서 너무 큰 수고를 오랜 기간 동안 감당해 왔습니다. 당신이 꿈꾸고 기도하던 건강한 중국 교회 건설은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당신을 천국 문 앞에서 만날 그 날까지 우리 주님 앞에 그리고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 모두 손을 맞잡고 열심을 다해 섬기며 당신이 걸어간 길을 따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그 곳에서 편히 쉬십시요’ 박은조, ‘안대욱 선교사 영전에 드립니다’ (동아시아연구 제16호) 2002년 5월, p 3.
안대욱 선교사는 참으로 중국에서의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 개인전도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통해서 일꾼을 배출하는 일은 참으로 중국과 같은 신학적 토양에서, 그리고 선교제한지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이 안대욱 선교사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그의 헌신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역자들에 의해서 앞으로 이 일은 계속 될 것이다.
또한 안선교사는 중국의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 생명을 바쳤다. 그가 세운 교회는 아주 건강하게 급성장하고 있다. 특히 이 교회들은 평신도가 주도적으로 사역을 하는 교회이다. 앞으로 안선교사가 세운 교회는 중국의 교회에 모델이 될만한 건강한 성경적 교회이다.
그가 이처럼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분명한 소명 때문이었고, 이에 대한 분명한 순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안선교사가 대만을 신학서적 구입 차 방문한 이후에 이처럼 간증하던 기억이 난다.
왜 하나님이 중국말도 안 되고 중국도 잘 모르는 저 같은 사람을 중국에서 사용하시는지 몰랐습니다. 대만에 가니까 그렇게 중국어가 능숙한 목회자 신학자들도 많고, 또한 미국의 화교 가운데에서도 중국어가 능통한 신학자 목회자가 많았습니다. 중국어뿐만 아니라 본래 언어구사에 은사가 없는 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왜 사용하시는지 몰랐는데, 이제야 그 답을 발견했습니다. 중국에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니까 사용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참으로 선교사의 삶은 위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준비하며, 집중하여 사는 삶이다. 안대욱 선교사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계속해서 안대욱 선교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제2, 제3의 안대욱 선교사 같은 일꾼을 한국교회에 일으키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참고자료 *
- 동아시아연구 제19호, 2003년 8월 발행, “중국을 축복한 안대욱 선교사의 삶과 사역”에 실린 글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
박은조, 내가 만난 안대욱 선교사님
방동섭, 나의 친구 안대욱 선교사를 기억하며 김정우, 안대욱 선교사와 함께 한 펜스테이트 한인교회 개척 이야기 박상용,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시절의 안대욱 선교사님 김한요, 나의 선배 안대욱 목사님을 그리워하며 장승혁, 내가 만약 안 목사님을 몰랐더라면 유택상, 필라델피아 임마누엘교회 영어 목회 시절의 안대욱 목사님 이지니, 안대욱 선교사님과 그가 세운 신학교 까오전, 중국에서 안대욱 선교사님의 목회 정갑신, 선교행정가로서의 안대욱 선교사님 인병국, 중국선교 전문가로서의 안대욱 선교사님 친광러, 보고 싶은 안대욱 교수님 란 찡, 존경하는 안대욱 목사님께 합신 Th.M 선교신학전공 문요한 |
'† CHINA > 중국선교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알려지지 않은’ 신에 대한 기원 (0) | 2007.07.11 |
---|---|
안대욱선교사 (0) | 2007.07.10 |
중국선교의 전망 (0) | 2007.07.08 |
중국선교, 이대로는 안된다!~ (0) | 2007.06.30 |
중국 신장 자치구, 중국인과 미국인 그리스도인 다수 체포 (0) | 2007.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