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고비를 가다
몽골을 한 번 찾은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게 된다는 말이 있다. 몇 해 전에 다녀온 울란바타르의 지독한 매연과 시든 초원에 실망하여 나만은 그러하지 않으리라고 단단히 다짐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몽골이 슬며시 나를 불러대고 있었다. 바람이라도 불어 풀이라도 심상하니 흔들리는 걸 바라보자면,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결국 나는 다시 몽골행 비행기에 올라앉게 되었다.
여행의 안내는 국립 울란바타르 대학의 한국학 교수인 돌마 님이 맡아 주었다. 한국어에 능숙할뿐더러 문학과 우리네 민속에 관해 조예가 깊은 돌마 님은 주로 한국 작가들의 여행안내에 많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몽골의 전체 인구는 약 270만명인데,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붉은 영웅'이라는 뜻을 지닌 수도 울란바타르에 살고 있다고 한다. 8월 2일 울란타바트에 도착하여 생수를 비롯하여 여행 중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고, 시내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벌써 고비에 가 있었다. 8월 3일, 날이 밝기 무섭게 서둘러 울란바타르 시내를 떠났다. 6일간 고비 사막을 달릴 차는 6인승 랜드크루저와 DELICA라는 8인승 승합차였다. 공교롭게도 모두 일제차였는데 고비를 갈 때는 반드시 구난용으로 4륜 지프형 차를 대오에 섞어야 한다고 한다. 여름철에 사막에서 집중호우를 만나면 금세 호수가 되고 길이 패여 끊기게 된다는 것이다. 모래뿐인 사막에 비가 오는 대로 스며들 듯한데 해일처럼 물이 밀려온다니 참 알다가 모를 일이었다.
언덕을 내려서서 본격적으로 먼지가 풀풀 이는 비포장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세 시간여를 달리고 나니, 끝없이 이어지던 평원에 언덕길이 나오면서 멀리 바위투성이 산이 보인다. 암사슴이 누운 듯하다는 '암사슴 산'이 나타났다. 희끗거리는 이끼가 검은 점처럼 박힌 바위산 곁에는 게르(GER) 몇이 이어진 마을이 나타났다. 부유한 마을이라는 뜻의 바이앙가르 마을에 이르렀다.
어느 하나 오르내림이 없는 평원은 시야에 거침이 없어 무엇 하나 몸 숨길 데가 없을 듯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무언가 부지런히 기어 다니고 있었는데, 사막쥐라고 했다. 또 여기저기 뚫어진 큼지막한 구멍 속에서는 이따금 '탈후박'이라는 토끼 크기의 쥐를 닮은 짐승이 드나드는 게 눈에 띄었다.
길가에는 여기저기 흰 뼈들이 널려 있고, 뜯다 만 말의 네 다리도 놓여 있었다. 안내자의 말로는 늑대들이 잡아먹은 것이라고 했다. 다음에는 혼자서 배낭을 메고 고비를 도보로 횡단하려던 생각에 차질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잠시 걸어보니, 코를 찌르는 부추 냄새가 난다. 밑을 보니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야생 부추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구물리히'라고 한다는데 부추보다 키가 작긴 하지만 꺾어서 씹어 보니 부추 맛과 같았다. 또 어느 지역에서는 '단'이라 불리는 가시덤불류의 식물이 자라기도 했는데, 운 좋게 비를 만난 지역에서는 흡사 개나리를 닮은 노란 꽃을 피웠다.
최근에는 여행객들이 늘면서 게르 부근에도 화장실을 지었다는데 대개는 문짝도 없고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행여 속이라도 좋지 않은 이들을 곤란하게 했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차를 타야 하는 고비 여행에는 무엇보다 속이 편해야 했다. 지나친 전날의 음주를 피하고, 아이락(마유주)이라는 말젖 발효주도 지나치게 마시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하다. 오후 6시경, 언덕에 제법 큰 오워가 나타났다. 차들은 시계방향으로 그것을 돌아 잠시 멈추었다. 예전에 마을에서 손님을 맞으러 나오던 곳이라는 그곳에는 누군가 피워 놓은 가루 향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첫날밤을 보낼 '둔트 고비 캠프'(중고비 MIDDLE GOBI)로 향했다. 그런데 운전사들이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한참을 달려도 막막한 초원으로 이어졌다. 엄청나게 사나운 개가 짖어대는 외따로 있는 게르에 들러 길을 물어 길을 되짚어 돌아오느라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캠프장에 도착했다. 320km의 여정을 달려온 셈이다.
배낭을 메고 차 한 대로 여행 중인 사람들은 캠프장 울타리에 천막을 치고 야영을 했다. 캠프장 이용료도 아끼면서 초원 한가운데서 홀로 노숙하는 어려움을 피하는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면 찬 바람이 불고, 기온이 떨어져 게르 지붕의 열린 창을 닫는다. 전통적인 게르는 고라니 가죽 150장 정도로 짓는다는데, 요즘은 양가죽털로 짓는데 천막 밑을 열어 두어 바람이 드나들어 밤이면 선뜩선뜩했다. 내일은 350km를 남쪽으로 내려가 남고비인 줄친 고비로 이동할 예정이다. 별이 반짝이는 초원에 누워 잠이 잔다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어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순도 높은 몽골의 칭기스 보드카에 취하여 잠을 청해 보았다. 몽골에서 물건을 고를 때, 무조건 칭기스칸 이름이 들어간 것을 고르면 최상품이라는데, 우리 돈으로 8000원 가량하는 칭기스 보드카는 기름진 몽골식 음식과 잘 어울리는 술이었다. 별들이 까물거리며 밤바람에 흩날릴 무렵에 나를 잠들게 한 것은 술이 아니라, 순전히 초원의 별들이었다. |
고비의 캠프장에는 유럽인들이 많아서인지, 몽골 전통음식보다는 서양 음식이 많았다. 아침부터 빵에 버터를 발라 먹자니 목이 메어 입안이 깔깔했다. 나이 지긋한 서양 노인들은 편의시설이 갖춰진 큰 버스로 여행을 다녔다. 온천 등지만 찾아다니는 우리 노인들의 관광과는 류가 달랐다. 저녁이면 캠프장 탁자에 앉아 지도를 펴고 그날의 행적과 앞으로의 여정을 메모하는 진지한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독수리계곡 욜린암을 향하다
1시간을 달리자, '달랑자드가드(Dalanzadgad)'라는 꽤 큰 도시가 나온다. 비행장까지 있었다. 줄친 고비는 '구르반 싸이한(Govi Gurvan Sayhan)' 국립공원에 속하여 주변에 아름다운 관광지가 많아 예부터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다 한다. '줄친 고비(Juulchin Govi)'의 뜻이 '여행자들의 고비'라는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체로 고비를 자동차로 횡단하는 여정이 부담스러운 여행자들은 울란바토르에서 달랑자드가드까지 오는 비행기를 타고 와서 주변을 여유있게 둘러본다고 한다. 항공료는 대략 20만원 정도 든다 한다. 임시로 바꾸었던 타이어를 교체하고, 차마다 기름을 넣었다. 길을 잃을 경우에 대비해 차들은 비상용 기름통을 차에 추가로 싣고 다녔다. 주유기를 눈여겨보니 기름값은 우리의 절반 정도 수준이었다. 주변 마을을 둘러보던 일행들은 십자가가 걸린 집 한 채를 발견했다. 마침 아프가니스탄 피랍 문제로 심상히 여겨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칭기즈칸 때부터 다른 나라 종교의 유입에 너그러운 편이라는 몽골은, 전통적인 라마교와 함께 최근 들어 기독교의 전파도 증가하는 추세라 한다.
웅장한 바위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자니, 물이 소리 내어 흐른다. 돌마님 말로는 예전에는 한여름에도 협곡 사이에는 얼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는데, 최근 들어 온난화 현상으로 얼음이 다 녹아 개울물로 흐르는 것이라 했다. 한여름에 얼어붙은 골짜기의 풍경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도 컸지만, 날로 심해져 가는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 더욱 걱정스러웠다. 시간상 협곡 끝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바위산에는 독수리뿐이 아니라 표범류의 맹수도 살고 있는 걸로 안내표지판에 그려져 있었다. 그런 포식동물들이 무얼 먹고 사는가 궁금했는데, 산자락 밑에 무수히 뚫린 구멍 속에서 쉴 새 없이 쥐들이 드나드는 게 보였다. 고산쥐라고 하는데, 꼬리가 짧고 유난히 큰 눈이 흡사 햄스터를 닮았다. 독수리계곡 욜린암을 향하다
사나흘 전에 내린 비로 길들은 상당히 넓은 폭의 개울로 바뀌어 있었다. 개울은 벌써 말라 있었지만, 물이 흐르며 깎아낸 일, 2m 깊이의 골짜기가 깊게 패여 있었다. 원래는 'Dund Sayhany Nuruu'와 'Zuun Sayhany Nuruu' 산 사이의 골짜기로 질러가는 길로 가려 했지만 비로 인한 변수로 'Baruun Sayhany Nuruu' 쪽으로 상당한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허브류의 키 작은 풀들에 덮인 산봉우리들은 거대한 청회색의 고분을 연상시켰다. 동행한 분이, 칭기즈칸의 무덤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저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닐까 물었다. 돌마님의 말로는 행여 발견되어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평지에 아무런 표식도 없이 평장했다는 설이 있다고 했다. 일세를 구가한 제국의 영웅치고는 참으로 조용한 안식이 아닐 수 없다.
멀리 게르 한 채가 보인다. 산마루까지 올라와 별을 지키는 이는 누구일까. 한창 상상에 잠겨 산마루를 넘어서자니 골짜기 아래로 한 떼의 차들이 보인다. 누군가 용감하게 이 높은 산정에서 별잠이라도 자려고 숙영을 하려나 보다고 부러워 여기는데, 산 능선 아래 한 떼의 사람들이 모여 분주히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차를 세우고 다가가니, 경계의 빛이 역력하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거부하는 손짓도 완강하다. 무언가 땅을 파고 있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합법적이지 않은 사금 채취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차 한 대가 쏜살같이 올라온다. 창을 열고 눈매가 날카로운 몽골 남자가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넨다. 사인 바에 노. 우선 인사부터 건넸지만 사내의 눈은 풀어지지 않는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자꾸 말을 걸며 내게 오라고 손짓하기에 나는 '주게르(괜찮아)'라는 말만 했다. 그리고는 차에서 물통을 뒤적거려 한 모금 마시는데, 사내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몽골에서 처음 보는 살기등등한 눈빛이었다. 그때야 운전사가 다가와 무어라 사내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비로소 사내의 얼굴에 웃음이 감돈다. 운전사 '부저'의 말에 따르자면, 사내는 나를 몽골 사람으로 보고 혹 술 가진 게 있으면 팔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주게르(괜찮다)'라고 하며 차를 뒤져 술 비슷한 것을 꺼내 혼자만 마시니 기분이 언짢았던 모양이다. 몇 마디 배운 몽골 말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 '주게르'였는데 자칫 낭패를 볼 뻔했다. 나를 비롯해 몇몇이 몽골 사람과 외모가 닮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귀화하면 정부에서 땅 0.07㏊와 양이나 말 같은 가축도 준다고 했다. 몽골 운전사 '미가'가 아까 우물가에 온 아가씨들도 소개해 준다는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술보다 도수 높은 고비 바람
산 아래는 며칠 전에 내린 물에 쓸려 돌밭길이 되었고, 드문드문 낙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 풍경은 급속도로 황량해지며, 저물어 가는 저녁 해에 멀찌감치 모래 언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홍고린 엘스(Hogoryn Els)'라는 사구 지역이었는데, 알타이 산자락을 눈앞에 두고 초원과 초원 사이에 누군가 부어놓은 듯한 모래 언덕이 무려 180㎞나 이어져 있다고 한다. 돌마님도 그것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내일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쪽의 사구를 오를 계획이다. 눈앞에 뵈는 사구를 끼고 북쪽으로 차가 달렸다. 금세 나타날 듯한 줄친 고비 2캠프장은 사방이 어두워진 뒤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길이 험하여 어둠 속을 더듬으며 느린 속도로 달리는 차에서 바라보는 어둠 속의 초원은 더욱 막막했다. 서너 시간을 더 달린 뒤에 멀리서 까물거리는 불빛 하나가 보인다. 누구의 게르에서 흘러나온 불빛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반갑기 그지없었다. 몽골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의리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황막한 초원에서 홀로 떨어져 생활하는 그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힘이 바로 외로움에서 오는 것이며, 서로서로 소중히 여기며 배려하게 되는 미덕을 이해하게 되었다. 차는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캠프장에 도착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별은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내일 비가 오지 않을까 돌마님이 걱정했다. 뒤늦은 식사를 마친 후, 술을 나누노라니 전등이 꺼졌다. 태양열을 모아 발전기로 돌려 저녁 두어 시간만 불을 켜는 탓에 늦게 도착한 우리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어둠과 만나게 되었다. 간신히 게르로 돌아가 촛불을 켜고, 지나온 길들을 돌아보자니 천막 밖에서 울어대는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그 유명한 고비의 모래 바람이었다. 심한 경우에는 안경 유리에도 긁힌 흔적이 남을 정도라는 바람이었다. 별들도 다 날려간 벌판에 서서 사람들은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어떠한 큰 소리도 바람에 날려가 바로 곁에서도 잘 들리지가 않았다. 술보다 바람에 취한 사람들은 가슴에 켜켜이 쌓아 두었던 속내 깊은 이야기들을 울음처럼 모랫바람 속에 쏟아내었다. 사람이 술보다 더 도수 높은 바람에 취하는 걸 처음 보았다. |
초원의 아침은 유난히 부지런했다. 캠프 요원들이 배웅을 나와 자동차 바퀴에 우유를 뿌려 주었다. 여행의 무사 안녕을 비는 뜻이란다. '이크덴달라이' 솜이라는 조금은 번화한 마을에 이르렀다. 우리의 읍 정도에 해당하는 '솜'은 고비에서 만나게 되는 큰 마을이다. 그곳에서 자동차 기름도 넣고, 못이 박힌 자동차 바퀴도 갈아 끼웠다.
마을에서 나이 어린 소녀들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아이들 뒤에는 좀더 나이 먹은 여자와 개들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양털로 만든 인형들이 때가 꾀죄죄한 채 내밀려졌다. 삼천 원이라는 한국어 발음도 정확하다. 뒤에 선 언니라는 여자가 아이를 자기 우리 쪽으로 밀어댔다. 소녀의 눈망울은 초원의 별처럼 맑았다. 사탕을 주고, 볼펜을 주고, 마음이 약한 누군가가 낙타 인형 하나를 팔아 주었다. 나중에 그 행위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아이를 향한 동정심이 행여 지난 날 우리에게 던져지던 초콜릿이나 츄잉껌이 아니기를 바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별로 팔지 못했지만 생글거리며 "바이, 바이"를 외치는 소녀의 표정은 티 없이 맑기만 했다.
며칠 전에 비가 내려, 다니던 길이 물에 잠긴 것이다. 누런 황토물이니 바닥을 알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용감한 한국인 한 명이 걸어 들어가 깊이를 몸으로 헤아려 준 뒤에 드디어 차들이 한 대씩 물구덩이를 건넜다.
자동차 그늘에 기대어 라면을 끓여 요기를 하는 중에 얼굴을 천으로 휘감은 여자 둘이 우물로 물을 길러 왔다. 몽골에서는 양떼를 보면 누구든 물을 길어 주어야 한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에게야 어떠할까. 친절한 한국인이 그 여자들에게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주었다. 울란바타르의 대학에 다니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여자들은 얼굴이 탈까봐 눈만 내놓은 채 천으로 가린 것이라 했다.
차를 놓고 무작정 걷자니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나무 밑에는 소들이 여유롭게 누워 있었다. 그 풍경이 흡사 성경에 나오는 시내 산을 방불케 했다. 어느 나무 그늘에 잠시 앉아 있으려니 돌마님이 주의를 주었다. 더운 날씨에 갑자기 나무 그늘에 들어가 몸을 식히면 몸살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고 했다. 게다가 이 바위산에는 늑대들이 많다고 했다.
집안에서 반대하는 세 사람의 남자를 사랑하는 세 여인이 변하여 되었다는 '세 여인의 산'이 멀리서 바라보였다. 사랑이나 어머니에 관한 지명설화들이 유난히 많다는 돌마님의 설명이었다. 차는 해발 2500미터의 고원지대를 달렸다. 멀리서 높게 보이던 산들이 바로 곁에서 부드러운 융단을 덮은 듯, 연두색의 능선을 이어나갔다. 하늘 호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 초원은 곁에 있었다. 이곳에서 밤을 지새운다면 별들은 거의 손에 와 잡힐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소들이 산능선을 넘어 워낭을 울리며 나타날 듯했다. 양치기 목동은 여름내 이 산에서 머물다가 가을과 함께 마을로 내려갈 것이다. 고원지대에는 물도 흔하고, 풀도 푸르렀지만 가축이나 게르를 만날 수 없었다. 외로움이 아름다운 것일까, 아름다움이 외로운 것일까. 막막한 고원길을 지나자니, 돌마님이 몽골에서는 외로움을 말할 때, "먼지도, 구름도, 새도 없는 곳"이라는 비유를 쓴다고 했다. 먼지도 없는 곳의 외로움. 고원을 달리며 만난 외로움이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역시 이번에도 길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저녁 8시 45분경에야 목적지인 줄친 고비 1캠프장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정표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데다 비에 길이 끊기고 이리저리 돌아가다 보면, 운전자들도 보름씩이나 길을 잃고 고비에서 헤매는 경우도 있다 한다. 몇 시간 넘긴 것이야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길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는 말을 실감하는 하루였다.
길은 어디에도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끝없이 이어진 고비와, 앞만 보고 달려가는 몽골 기마병을 닮은 운전사 '모기'가 있을 뿐이었다. |
간밤에 불었던 세찬 바람에 먹구름이 흩어져 아침은 티 없이 맑았다. 아침에 속이 편치 않아, 가져간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빵과 치즈로 이어지는 캠프장의 조식은 참 견디기 어려웠다. 바람 때문에 덮어 두었던 게르 지붕을 여느라 몽골 소녀가 천막 위로 올라가 앉아 있었다. 바다를 닮은 낙타의 눈을 보다
한 곁에는 어린 낙타들만 따로 매어 놓았는데, 어미 한 마리가 맴을 돌며 울어댔다. 김영언 시인의 "인도의 타르사막에서 자욱한 별빛을 베고, 황혼녘 구슬프게 피어오르던 낙타 울음소리를 들이키며, 감미로운 모래 바람을 덮고 무념무상 몸을 누였던 때'의 그 울음소리는 아니겠지만, 그런 대로 낙타 울음소리를 드디어 듣게 되었다. '돌마'님의 말로는, 간혹 이유없이 낙타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몽골의 전통악기인 마두금을 켜주면 낙타가 눈물을 흘리며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고 한다. 모래바람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고의 운명을 짊어진 낙타에게는 바다만큼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하다.
밑에서 사진만 찍던 나도 허겁지겁 뒤를 따른다. 사구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급하고, 모래가 자꾸 흘러내려 오르는 데 애를 먹인다. 숨이 턱에 찬다. 사막을 건너는 이들은 이런 사구를 수없이 넘어야 한다 생각하니 끔찍했다. 순전히 사구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이를 악물고 오른다. 간신히 사구 꼭대기에 오르니 밑에서는 뵈지 않던 풍경이 내려다 보인다.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었다. 그렇게 바람이 어디론가 데려가고, 데려오는 세월에 몸을 맡기고, 그 자리에서 한 줌의 모래로 머무르고 싶었다. 낙타가 기다린다고 아우성치는 소리에 붙들려 달려 내려왔다. 고비를 꿈꿀 때, 끝없이 이어진 모래사막을 낙타처럼 제 그림자를 밞아가며 온종일 걸으리라 마음먹었는데, 내가 모래언덕에 머문 것은 불과 한 시간도 되지 못했다. 배낭 메고 걸어서 다시 오자며 소설가 정환과 다짐하는 걸로 아쉬움을 대신했다. 돌아오는 길에 낙타를 탔다. 말보다 편하지가 않았다. 키가 큰 데다 비죽 치솟은 등이 엉덩이에 배기고, 좌우로 흔들렸다. 황토 벌판에 혼자 서 있는 자크나무 숲
낙타와 헤어져 몇 시간을 달렸다. 창 밖으로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벌판에서 하기로 했던 점심 식사를 뒤로 미룬 채 차는 계속 앞만 보고 달렸다. 오후 2시경, '불간(Bulgan)'솜에 닿았다. 마을 거리에서는 남자들이 소형 당구대에서 열심히 당구를 치고 있었다. 차는 마을 식당 앞에 세웠지만, 우리는 바람을 막아 주는 어느 건물 벽에 달라붙어 라면과 햇반을 끓여 먹었다. 동네 개들이 아이들보다 먼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검은 곰처럼 생긴 몽골 개들은 양을 지키기 위해 늑대와 싸우기 때문에 몽골 사람들은 가족처럼 여긴다 한다. 개는 신라면 국물에 말아준 밥도 맛있게 먹었다. 개와 우리는 그렇게 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다정하게 밥을 나눠 먹었다. 고비에서는 누구든 길 가운데서 먹고, 길에서 잤다.
그러고는 끝없는 평원이 이어졌다. 차들이 분주히 다닌 듯 골이 깊게 팬 평원을 달리느라 차는 덜덜 떨었다. 평원에는 지평선처럼 끝없이 이어진 전신주가 전에 본 적이 없이 임립하고, 새로 가설하려고 준비를 하는 곳도 있었다. 그 넓은 평원을 연결하자면 엄청난 물자와 인력이 소요될 듯싶었다. 몽골 사람들에게는 고비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며, 또 그 어려움으로 그들을 지킬 수 있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멀리서 비를 쏟는 먹구름이 보였다. 며칠 전에 내린 비와 우박으로 양 삼천 마리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말에 서둘러 비를 피해 달아났다. 별이 쏟아지는 엉� 강가에서
폭이 십 미터쯤 되는 개울 정도였지만, 이곳에서는 강이라 불렸다. 강 이름을 물으니, '엉�' 강이라 한다. 몽골의 전통 양고기 요리인 '헐헉'이 준비된 저녁 식사 자리에는 캠프 여주인이 몸소 나와서 인사를 했다. 한국 관광객들은 잘 오지 않는다며 와인까지 따라주는 여주인은 본업이 의사라고 했다. 나무를 때어 데운 온수로 몸을 씻고 나오니, 어두운 강 위로 드디어 고비의 별들이 나타났다. 그동안 날이 흐려 제대로 보지 못했던 초원의 별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별에 취하여 망원경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붉은 모래사막을 지나, 강에 이르러 만나는 별들은 더욱 맑았다. 검은 가죽을 덮고 낮게 내려앉은 밤하늘은 손을 뻗으면 별들이 쟁그랑 소리를 내며 우르르 쏟아질 듯했다. 빈 자리 없이 하늘을 겹겹이 채워 미처 별자리마저 더듬기 어려웠다. 한 무더기 은하수가 머리 위에서 박하향을 풍기며 흘러갔다. 밤은 별빛만큼 깊어가고, 낙타처럼 누운 검은 언덕 위로 늑대의 눈을 닮은 푸른 달이 떴다. 사람들은 달에 홀려 늑대처럼 울어댔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몽골의 신화 한 도막이 생각났다. 하늘 저편에는 고비보다 더 큰 초원이 있는데, 밤이면 양치는 목동들이 모닥불을 피운다. 목동들이 몸에 덮기 위해 가죽을 펼치는데, 가죽은 오래되어 여기저기 작은 구멍들이 나 있다. 그 구멍으로 내보이는 모닥불빛이 바로 별빛이다. 자정이 되어 발전기도 멈추고, 사방은 온전한 어둠의 적요 속에 남는다. 멀리 어두운 초원 저 편으로 별 하나가 떨어진다. '별빛에 타박상을 당한' 사람들은 땅바닥에 눕거나, 서로 떨어져서, 이 황홀한 내상(內傷)을 되도록 혼자서 감당하려고 애썼다. 우리 하나, 하나가 이 고비의 밤에 뚫어진 작은 구멍 사이로 별빛처럼 반짝이는 것을 누군가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
출처 : 눈이 시린 아련한 추억 속의 사진여행
글쓴이 : 껄떡쇠 원글보기
메모 :
'† MONGOLIA > 몽골>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골의 노래 (0) | 2007.08.28 |
---|---|
몽골 대초원의 사랑가 .. Urna Chahar Tugchi album (0) | 2007.08.28 |
[스크랩] 몽골 이야기 (0) | 2007.08.25 |
몽골의 마두금(馬頭琴)음악 (0) | 2007.08.01 |
몽골의 소리 - 흐미 (Hoomii) (0) | 2007.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