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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인이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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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치불안과 빈곤으로 인한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되었던 1863년, 양치해, 지신허 등 하산지역 남쪽을 중심으로 최초의 한인촌이 생겨났다. 1870년대에 8,400명으로 집계된 연해주 한인 이주민의 수가 1923년에는 12,000명까지 이르게 되었다. 1929년 하산지역 북부의 포세에트구 한인마을은 한인극장과 문화회관은 물론 한인자치기관을 두고 있었으며, 행정기관에서는 한글을 사용하는 등 한인정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1937년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강제이주 명령에 의해 2차례에 걸친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가 집행되면서 현재 러시아․CIS국가에 산재해 있는 고려인 동포들의 한과 설움의 역사가 시작된다. 구소련 와해 후에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연해주로 고려인 동포들이 재이주해오고 있어 새롭게 고려인 사회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
< 고려인 약사>
o 1830-40년대 한인, 계절 영농이민으로 연해주 체류 o 1860년대초 경제적 목적 연해주 정착이민 시작 -1860년 연해주 포세트 지역 한인 13가구가 이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음 o 1867년 185가구 999명 o 1869년 한반도 북녘 대기근으로 이주 급증. 1만 명 급증 o 1902년 한인 이민자 수 32,380명 o 1905년 을사보호조약 전후 정치적 목적 연해주 이민 급증, 이후 의병 기지화 o 1908년 의병 건수 1,451건. 참가 인원 6만 9천 8백여 명. -일본의 항의와 이에따른 연해주 총독의 박해로 의병 활동 만주로 대거이동. o 1910년 경술국치 후 한인 이민 급증 o 1910년 약 4만명 거주, 블라디보스톡 시내 신한촌 형성 o 1914년 교민 수 6만 3천 명으로 신한촌 건설 (블라디보스토크) o 1918년 4월 일본군 연해주 점령 o 1919년 삼일운동이후, 항일 이민 배증 o 1922년 10월 일본군 연해주 철수, 친일 거류 민단 5천 명과 함께 귀국 o 1923년 재소 한인 공식 10여만 명 거주. 실제 25만 명 이상 거주 o 1932년 연해주 한인 학교 380개. 잡지 등 6종, 신문 7종, o 1937년 극동거주 한인 약 19만명을 중앙아시아(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로 강제이주 o 1953년 스탈린 사망 이 후 중앙아시아 등지로부터 한인들의 개별적 연해주 이주 시작 - 블라디보스톡과 두만강 접경지역 등 군사지역으로 이주는 실제로 불가 o 1989년 소련 인구통계상 연해주거주 한인 8,455명 o 1991년 소련 와해 전후, 중앙아 지역으로부터 연해주로 귀환 증가 o 1993년 기준 연해주거주 한인 11,552명 o 2001년 말 기준 약 30,000명 거주 추정 o 2004년 약 40,000명 거주 추정
(1937년 9월 21일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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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37년 9월 21일에서 11월 15일까지 두 달간에 걸쳐 연해주 한인들 전원을 중앙아시아(6천㎞)로 강제 이주 시켰다. 한인들의 조직적인 반발을 예상해 사전에 한인 지도자 약 3000여명을 일제의 간첩, 혹은 트로츠키주의자란 누명을 씌워 알 수 없는 곳으로 끌고가 소리없이 처형하고 일반인들에게는 불씨에 집에 들이닥쳐 명령서를 전달하고 역으로 끌고나갔다. | 한인들은 행선지도 모른 채 화물차 짐칸에 짐승처럼 실려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고 있었다. 결국 도착한 곳은 물설고 낮선 중앙아시아 한 겨울 들판이었다. 우즈베키스탄 (16,272가구 76,525명), 카자흐스탄 (20,170가구 총 95,256명)으로 대부분 이주되었으면 (총 36,422가구. 총 171,781명 이주)이주 전 한인 지식인들은 대부분 약식 재판을 통해 총살형에 처해졌다. 한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 수용 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허허벌판에 내 몰려 대부분 토굴을 파고 살았으며 그 무서운 겨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38년도의 러시아 인구 표본 조사를 보면 그당시 한인들은 1천 명 당 4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 사망률은 20%나 되었다. 강제 이주 이후에도 한인들은 적성민족이란 낙인이 찍혀 거주 이전은 제한되었다. 한인들은 일정한 거주 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적어도 1953년까지 약 16년 간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 교육이 금지되었음은 물론 국가 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 사회․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제한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하였고, 한인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벼농사를 시작 중앙아시아를 주요 쌀 농사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한인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나갔다. “ 고려인들은 바위에 올려놓아도 풀이난다”는 속담이 이런 한인의 끈질긴 생명력과 근면성 농업기술에 기인한 것이다. 전후 한인은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키며 노동 영웅이 되어갔고 소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모두 한인들의 콜호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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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임을 알수 있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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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89년 당시 소련 내 한인은 43만 9천명으로서, 전체 120여 민족 가운데 29번째에 해당하였다. 이들 한인 대부분은 중앙아시아 각국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한인은 1% 미만의 적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며, 회교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소수 민족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현재 약 35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극동 지역에 고려인의 분포는 연해주에 1993년에 약 8,500명 정도로 추정하며 현재는 약 40,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그리고 사할린 주에 약 36,000명, 캄차카에 약5,000명, 하바로프스크 주에 약 9,6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전역에 거주하는 고려인의 총 수는 약 45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
고려인 마을의 풍경 |
1991년 12월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중앙아시아 C.I.S 국가들이 독립하였다 독립 후 각 국가들은 그동안 공용어로 쓰던 러시아어 대신 국가 고유의 자민족 언어를 공식어로 채택하고 자민족 우선 정책을 펼쳐나간다. 소수 민족에 대한 회교 민족주의, 민족 분쟁, 언어, 교육, 경제 환경 등의 문제로 상당수의 고려인이 C.I.S를 떠나고 있으며 대부분 원거주지였던 극동 러시아, 그 중에서도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는 실정이다. 연해주의 인구는 약 220만 명으로 순수 슬라브 계통이 약 50%, 나머지 50%는 120여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 소련 와해 전에는 슬라브 민족 비율이 90%에 다다랐으나 와해 후 서쪽으로 이주하는 경향을 보였고 그 자리를 기타 소수민족들이 들어와 채움으로써 현재의 50대 50 구성 비율이 되었다. | 언어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각 민족 공화국이 독립 이후 자기 민족의 언어를 러시아어 대신 공화국내 공식 언어로 채택함에 따라 여타 소수 민족들은 러시아어와 공화국 민족어, 그리고 자기 민족어를 습득해야 하는 3중 언어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의 차원을 넘어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다. 한인과 같은 소수 민족은 거주국의 민족어를 배우지 않을 경우 모든 면에서 차별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한 회교도의 확산으로 인해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인은 여타 소수 민족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수가 이 지역을 떠났으며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주자 다수가 러시아로 향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가 연해주로 재이주하고 있다. 나라별로는 타지키스탄 한인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이 지역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한인이 많이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연해주 재이주자 중에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연해주 정부는 1990년 이후 약 3만 명 정도의 한인 동포가 중앙아시아로부터 연해주로 재이주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공식적인 주민 등록을 하지 않은 숫자를 포함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고려인이 연해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경제적 위기. 언어의 문제, 정치 사회적 불평등 문제 등이 계속 존재하는 한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는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 | | <위 자료는 동북아평화연대 홈페이지에서 발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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