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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려인 가정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다. 이제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립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
"러시아 연해주 사역과 선교사들
1. 연해주- 가까운, 그러나 광대한 러시아의 관문
러시아는 일반적으로 먼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아주 가까운 나라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비행기로 9시간, 러시아 내의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9시간이나 걸리지만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연해주의 수도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1시간 40분이면 바로 닿는다.
한반도의 2/3에 해당하는 면적을 가진 연해주는 러시아어로 ‘쁘리모르스끼 크라이’ 라고 하여 바다의 끝, 즉 ‘땅 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연해주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한 말씀이 우리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구나!’ 라는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곳이다.
연해주는 서쪽으로 중국의 연변 자치주와 흑룡강 성, 남쪽으로 두만강, 북쪽으로는 하바로브스크주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동쪽으로 태평양을 건너서 사할린 주를 바라보고 있다.
연해주 내의 주요 도시로는 블라디보스토크시(등록인구75만, 상주인구 약 100만), 나호드까시(20만), 우수리스크시(15만) 가 있다. 한국의 동춘호가 저녁 무렵 속초항을 출발해서 이튿날 아침이면 도착하게 되는 자루비노 항도 기억할 만하다.
연해주의 수도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바이칼 호수를 끼고 대륙을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달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의 황금만에는 영하 20-30도에도 뱃길을 열어주고 있는 부동항이 있어서 인천, 속초, 일본, 영국, 미국 등지에서 오는 상선들과 군함들이 지루하지 않게 번갈아 드나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황금만에는 2차 대전 당시의 위용을 스러져가는 빛으로 자랑하고 있는 극동함대도 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미국의 뉴욕, 중국의 상해에 이어 세계적인 무역항이 될 것을 기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는 경제, 군사, 선교의 요충지가 될 것을 기도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를 향한 복음의 관문(Gateway)으로서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그 기능을 잘 수행한 예도 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의 대다수의 고려인 18만여 명이 시베리아 철도와 중앙아시아의 철도를 따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등의 중앙아시아에 뿌려졌다. 강제로 흩어진 고려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이 고려인들을 통해 중앙아시아에 복음이 빨리 확산될 수 있었다. 그 때 강제로 흩어졌던 고려인들이 이제는 이곳에 많이 돌아와서 살고 있는데 이제는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선교사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복음을 들고 이 관문을 통과해서 나아가는 날을 기도하고 있다.
2. 선교사 및 사역 소개
러시아 연해주에 별도 GMP 팀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별로 다른 선교사들과 팀을 이루며 사역하고 있다. 지금은 크게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두 지역으로 나누어서 사역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사역 -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고위경/이희선 선교사와 조상국/윤옥자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으며 이들의 사역은 다음과 같다.
고위경/이희선 선교사는 NGO '블라디보스토크 문화교류 센터'를 설립하여 2003년부터 음악을 통한 문화교류 사역을 해 오고 있다. 이 문화 교류 사역을 통해서 수많은 한국의 유명한 성악가들과 연주가들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가면서 전반적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여 주었다. 러시아인들은 예술성이 뛰어나 수준 높은 한국 음악을 금방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특별히 이희선 선교사는 한국에서 가져온 전자오르간으로 이곳에서 3일간 연주했는데, 청중들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일주일 연속 앙코르 공연을 하는 기록을 보였다.
선교지로 오면서 평생을 사랑했던 오르간을 하나님 앞에 포기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더 영광스럽게 쓰일 수 있도록 달란트를 높이 들어 올려 주신 귀한 간증이 되었다. 그 외에도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이 많은 음악인들이 와서 크리스천 음악으로 현지인들의 마음을 열고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외곽의 경관이 좋은 곳에는 청소년 캠프, 선원들 요양소, 건강 휴양소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 2005년 9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학교(Vladivostok International School)가 개교하여 선교사 자녀들 및 한국과 러시아 학생들 교육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School of Tomorrow의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러시아와 미국 정규과정을 병행해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성경에 기초한 School of Tomorrow 교육과정을 통해 학생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고 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며 신앙인으로 양육하고 있다. 영어 교육과정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고 교사들은 모두 신앙인이며 기도로서 학업을 시작하는 학교이다.
조상국 선교사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윤옥자 선교사는 학생식당의 책임자로 섬기고 있다. 현재 미국인 교사 2명, 한국 MK 출신 교사 1명, 현지 교사 5명으로 3개 반을 운영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개교한 이 학교는 러시아 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우수리스크 사역 -우수리스크지역에는 현재 3가정 6명의 선교사(윤영곤/송석녀 선교사 , 김기남/ 박정진 선교사, 송병주/ 김현숙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다. 이들의 사역은 다음과 같다.
피부과 의사인 윤영곤 선교사는 부인 송석녀 선교사와 함께 의료 선교의 꿈을 가지고 5년째 사역하고 있는 실버 선교사이다. 우수리스크에 병원을 설립하려고 몇 년 째 시도하고 있으나, 현지 의사 자격증을 요구하는 법규상의 문제와 개인 병원을 운영할 시스템을 갖추는 문제로 인해 현재는 NGO를 설립하여 현지의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우수리스크 시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미하일로브까 은혜교회에서 새가족 성경공부, 야체이까(목장), 전도폭발 리더 훈련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의사로서의 통찰력으로 유한한 이 땅의 생명을 통감하고, 과감하게 삶을 변화시켜 러시아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살기로 작정하여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어려움들을 이겨 나가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생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송병주/김현숙 선교사는 목사 선교사로 교회개척과 농업 기술사역 전담을 위해 파송 받아 현재 적응기간을 갖고 있다. 미하일로브까 은혜교회를 담임하고 있고, 고려인들의 정착촌에 있는 가정교회와 농업사역을 돕고 있다.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비닐하우스 농업 보급과 고려인들이 정착하도록 지원하고 있고, 문화센터를 통해서 이 지역 문화의 선도를 통한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김기남/ 박정진 선교사는 건축전문인 선교사로 초창기에 건축 관련일로 지역교회들을 돕는 사역을 했다. 현재는 현지인 교회의 영적 필요가 요구되고 있어 다차(주말 농장)교회 지원, 마약 및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홈리스들을 위한 목공소 프로젝트 지원, 노동자를 위한 쉼터 지원을 하고 있고, 민들레 영토 프로젝트를 통한 보다 심도 있는 사역을 준비 중에 있다.
3. 전략과 비전
연해주 GMP 선교사들은 다른 선교사들과 연합하여 독특한 방식으로 총체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 크게는 남서울 은혜 교회가 중심이 되어 지원하는 원동 선교사 모임이 있어서 다양하게 은사에 따라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교회개척 사역(우수리스크 미르 교회, 우수리스크 사랑의 빛 교회, 미하일로브까 은혜 교회), 고려인 정착 지원 및 북한 동포 돕기 감자 보내기 사역, 문화 교류 사역, 교육 사역으로 나누어져 상호 보완하며 사역별로는 각각 팀으로 협력 사역하고 있다.
교육 사역은 장기적인 계획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일단계로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학교(VIS) 개교이후 다음 단계로 블라디보스토크 국제대학(VIU)을 개교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 이미 블라디보스토크 국제대학의 법인은 등록되어 있고 캠퍼스를 위한 장소도 마련되어 있다. 국가의 교육 라이센스를 받는 일이 기도제목이다. 교육 사역을 위해 필요한 인력으로는 태권도 사역자와 어린이 음악 사역자들, 영어로 School of Tomorrow 교과 과정을 가르칠 선생님들이 필요하다. 이 교육 사역의 장들은 또한 한국의 젊은이들을 수련하고 동원하는 중요한 기지로 이미 사용 되어가고 있다. VIU 가 개교되면 현지 사회의 리더 뿐 아니라 바로 이웃의 중국의 영적 지도자들을 양육하게 될 것이라는 비전을 품고 노력하고 있다.
우수리스크는 북한 노동자들이 달러벌이를 위해 러시아로 진출하기 위해 거쳐 가는 곳으로 이들이 장기간 체류하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들을 위한 필요와 도움이 요청되고 있다. 또 이곳은 중국인들이 진출하여 다방면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상당수의 조선족들이 합류하여 있고 이들이 모이는 교회도 몇 군데 있다. 이들을 위한 선교 프로젝트를 마련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4. 그간의 열매들
그 동안 문화교류 사역을 통해 많은 음악회가 열려서 한-러 간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복음을 위한 접촉점과 공감대가 많이 준비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교육 사역은 개교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4년여를 보냈는데 이제 개교하여 날마다 살아 있는 영혼들을 두고 기도할 수 있어서 큰 보람을 느낀다. 어린 영혼들을 통해 이 사회의 상류층인 학부형들이 미적지근하고 명목적인 그리스도인에서 회심하여 변혁을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을 기도하며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큰 열매라고 하면 그 동안 함께 기도하고 수고한 우리 팀 구성원 간에 이해와 사랑의 깊이가 더해 진 점이다. 궁극적으로 선교는 선교하는 사람이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체험하는 복을 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연해주 면적은 1659 평방 킬로미터(러시아 총면적의 1%이하)이고 이곳에는 240만명 (러시아 인구의 1.5%)의 인구가 살고 있다. 연해주의 겨울은 길지 않지만 춥다. 1월달의 평균기온은 해안지역 쪽이 영하 13도이고 대륙내부쪽은 영하27도이다.여름에는 장마가 찾아오고 7월의 평균기온은 14-21도이며 가장 더운 계절은 8월이다. 10월 중순에는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이 찾아온다. 다양한 아름다움이 고요함과 맞물려 연해주에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안도로로 부터 서쪽 바다 건너에는 아무르스키만 언덕이 보인다. 또한 바다와 중국 국경 사이에는 좁고 긴 하산지대가 위치한다. 이곳의 풍부한 자연은 신이 연해주에 주신 선물이다. 해안가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 북한으로 가는 철도길이 통과한다. 해안가 지역에는 거의 나무가 없으나 하산 지대 중심에는 러시아에서 오래 된 "삼나무숲"이라는 자연보호구역이 있다. 여기에는 동만주지역의 특징을 나타내주는 동물계와 식물계가 잘 보존되어 있다. 심지어 표범까지도 서식하고 있다. 가모프 반도의 남쪽 바위 해안가에는 러시아의 유일한 해양 자연 보호구역이 위치하고 있다. 해양 자연 보호구역에는 278 종류의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다 산속의 평평한 분지 지역에는 발해, 요나라, 여진족 등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1937년까지 이곳에 한인촌들이 밀집했었다.포시에트만이 끝나는 두만강 하구쪽에 북한, 러시아, 중국 국경이 접한다.
삼국을 연결하는 시베리아 철도가 우수리스크를 통과한다. 오늘날 두만강 하구에 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지역에 대규모의 국제항을 개발할 계획이 있다. 현재 한국의 속초항에서 자루비누항으로 여객선이 들어오고 있다. 이 길을 통해 중국 훈춘을 거쳐 연길,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관광항로가 열려있다. 하산 지역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만나는 경계이다.
브라디보스토크 동쪽의 넓은 우수리스키만을 지나 티하야 내만쪽에서 "나호드카" 자유무역경제 지대가 잘 보인다. 이 지역 발전에 한국의 사업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국제공항이 건설예정인 파르타잔스카야 강 분지를 "황금평야"라 한다. 이곳은 살구 농장과 양봉 농장으로 유명하다. 1937년까지 이 지역에는 몇개의 한인 마을들이 있었다. 강 하구에는 누나와 동생이라는 두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고대 연해주 문명의 파멸을 몰고온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연해주의 주요 사업은 어업, 기계제작, 설비제작, 석탄, 목재 등 이며 석탄 산지 중 가장 오래 된 도시인 빨찌산스크시가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접하고 있는 또 다른 장소에는 광부와 전기 기술자들의 도시인 아르춈시가 있다.그리고 이 횡단철도는 우수리스크시를 거쳐간다. 우수리스크시는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했던 곳이며 이곳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초,중,고등학교 및 사범학교가 있었다. 만약에 브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브스크로 기차를 타고 여행한다면 연해주의 광할함을 볼 수 있다. 곡식들이 잘 자라고 있는 밭과 평야는 예전부터 한인들이 농사를 지어 온 곳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고려인 이주민들에게 고향을 회상시키게 한다. 이곳에는 중국으로 가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우수리스크시부터 루체고르스크까지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가면 연해주의 제3공업지대를 볼 수 있다. 이 지대에 스파스크 라는 도시와 레소자보스크 시, 달린네레첸스크 시가 위치하고 있다. 이들도시에서는 식품, 임업, 목재가공 산업이 발전되어 있고 비킹과 파블롭스크라고 불리는 연해주에서 제일 큰 석탄 산지가 있다.
스파스크의 높은 언덕으로부터 밝은 석양빛 아래 멀리 반짝이는 한카 호수를 볼수 있다. 거의 원형의 모습이고 수심이 낮고 연해주에서 제일 큰 호수다. 국경 곁에 위치한 순가치 강의 물은 우수리 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우수리 강물은 또한 아무르 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또 다시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우수리 강 서쪽의 중국 땅을 바라 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저녁에 열차를 타면 우수리스크 시를 거쳐 다음날 아침에 하바로브스크 시에 도착한다. 그런데 하바로브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철도 뿐만 아니라 자동차 도로로도 연결되어 있다. 연해주의 다른 자동차도로를 예를 들면 우수리스크->아르센에프->카바렐로보->달린네고르스크->테른에이 도로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카호 저지대와 우수리 계곡부터 동쪽으로 시호테-알린 산맥이 위치하고 있다. 우수리스크 타이가에 야생목들과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호트카에서 졸로토이 갑(岬)까지 굴곡진 내만(內灣)들이 있다. 이 지역에는 대략 50여종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능금나무, 까치박달, 주목,보리수,소나무,낙엽송 등이다. 나무들과 얽혀 머루와 오미자들이 자라고 있고 이곳에 오갈피,인삼 등 거의 1000여종에 이르는 약용 식물이 번식하고 있다. 동물계도 또한 그만큼 다양하다. 북방계 사슴, 멧돼지, 시베리아 흑담비, 호랑이, 우수리스크 사슴, 티베트 곰, 아무르스키 영양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이 지역의 임업, 목재 가공, 관광, 사냥등 여러 산업이 자연의 풍부함으로 발달되고 있다. 비킹 강과 사마라 강의 타이가 지대에서는 연해주 지역 원주민 후손들인 우데게, 나나이, 오로치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1860년에 이 지역이 러시아로 편입되기 전까지 그들은 포시에트 만에서부터 아무르 강 하류, 우수리 강변을 따라 살아왔다. ▶ 한국인과 연해주
기원후 5-6세기 무렵에 고구려는 연해주의 모해족과 국경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고구려는 모해족과 전쟁을 하였고 그들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668년에 당나라는 고구려를 격퇴시켰다. 전쟁시 고구려의 동맹자였던 모해족의 많은 수가 당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30년후에 모해족의 일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모해족 일원과 예전부터 살아온 모해족 일원과 고구려사람들이 새로운 모해족 연합체의 집권 계층이 되었다. 새로운 모해족 연합체는 당나라군을 공격하는데 성공하였고 698년에 이 연합체의 지도자인 대종중이 채쟁국을 세웠고 이 나라는 713년에 발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발해국은 만주지역 대부분과 연해주, 북한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발해국의 영토는 5개의 수도와 15개 주로 이루어졌다. 연해주 남쪽에 발해의 15개 주 중의 하나인 수아이빈이 있었는데 이 주의 행정중심은 현재의 우수리스크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산지역 크라스키노에서 발굴된 유적은 크라스키노 마을이 옛 발해의 동쪽 수도인 양경의 중심임을 말해주고 있다. 발해인은 터키 룬 문자를 사용하였고 고구려인들은 한자, 불교, 고전문학 등을 발전시켰다. 유적에서는 네스트리우스교(5세기에 비잔틴에 나타난 크리스트교의 한 분파, 8세기경에 중국의 위구르 한국(汗國)에 전파 )의 흔적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생활에서는 샤머니즘이 우세하였다. 10세기 중반 발해족의 서남쪽 이웃인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웠다. 이 왕국은 전국적인 군사통치를 하였다. 20년 이상 거란족은 발해와 전쟁을 하였고 926년에 발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발해인들은 그대로 굴복하지 않고 그해에 거란족에 대항하여그해에 거란족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대립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거란족의 왕은 거란국에서 복종하지 않는 발해인들을 강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결과로 전체 발해족의 70%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고 20% 가량이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갔다. 발해국의 멸망부터 1215년까지 연해주는 먼저 거란국의 영토이었고 그 다음에는 여진족(후에 금나라)의 영토였다. 그러나 역사의 장에서 징기스칸의 출현은 이 지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215년 금나라의 왕은 몽고의 위협으로 인해 수도를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요동의 군대 지위관인 푸산 반누는 금나라로부터 독립해 나라를 세우고 자신을 대정국의 통치자로 자청했다. 그후 얼마 안지나서 푸산 반누의 군대는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푸산 반누는 이곳 개원이라고 불리는 도시에 동요 나라를 세웠다. 이 도시는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여진족은 만주의 동쪽 지역, 한반도 북부, 연해주의 중앙과 남쪽 지역을 차지하였다. 1216년 요나라의 부흥을 내세운 거란국은 고려국으로 침입하였다. 고려의 지도자 최충현은 몽고에 도움을 오청하였고 려-몽 연합군과 동요의 군대가 연합하여 연해주 일대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1233년 몽고군은 고려 침공 이후 동요의 남쪽 수도를 공격하였고 동요의 통치자인 푸산 반누를 포로했다. 그 다음에 몽고군들은 개원시를 침공하였다. 뒤늦게 몽고군들은 루시국(옛 러시아)과 전쟁을 시작하였고 1270년 대부터 루시국에 몽고의 압제가 시작되었다. 13세기 몽고인들의 출현은 연해주에 큰 위협이었고 이는 곧 연해주의 황폐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황페로 해서 루시국과 연해주는 고려와 역사상 처음으로 연관을 맺게 되었다. 몽고 제국은 흑해로부터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많은 민족을 복종시켰고 동-서양문명의 연결자가 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 역할을 러시아가 했다. 러시아인들이 최초로 연해주에 나타난 때는 1655년이다. 이때 러시아아인들은 처음으로 조선인들과 아무르 강과 순가리 강 유역에서 만났다. 스테파노프의 지휘아래 카자크 군인들은 청나라의 평곱(1654년), 신류의 군대 (1658년)와 충돌하였다. 청나라 전란시기에 카자크 군인들이 연해주에 농경 지역을 찾던 중 우수리 강 근처에 있는 신비의 니칸 왕국에 황금산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카자크 부대에 복종을 하였는데 모스크바의 짜르 정권은 이 하안 지방을 보호하지 않았다. 1658년 스테파노프부대는 괴멸되었다.1689년 청-러 사이의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인들은 아무르 지역 인근으로부터 철수하였다. 카자크 군인들이 조선의 영토에 도달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조선에 대한 소식은 중국을 거쳐 러시아와 서유럽에 도달하였다.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와 한국이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양국의 직접적인 접촉은 러시아 탐험대가 연해주 남쪽 해안을 탐사하는 첫해에 시작되었다. 1854년 한국에 푸따틴 탐험대가 도착하였다. 탐험은 두만강 하구와 포시에트만에서 진행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 미국, 프랑스가 극동 지역에서 영토 확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었던 "태평양시대" 초반에 있었다. 그들의 영토 확정 정책의 길에는 항상 러시아 제국이 서 있었다. 그해 푸따틴 탐험대는 이미 영국이 먼저 점유하고 있는 아무르강 하류(전체 극동과 중국을 북쪽에서 콘트롤 할 수 있는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전략적 장소)로 돌아왔다. 6년이 지난후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세웠고 1890년대에 블라디보스토크는 이-태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에 의거 러시아로 병합된 연해주는 조선과 국경을 이루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한인들의 이주가 연해주로 시작되었다. 1863년에 까미쇼바야(파타지) 계곡, 쑤까노프까(양치해), 도조른아야(띠진해) 강, 하산지역 남쪽에 최초의 한인촌들이 생겨났다. 1870년 대에 이르러 한인 이주민들은 8400명에 이르렀다. 연해주로 이주하는 중요 이유는 배고픔과 한국 정치의 불안정이었다. 역사적으로 한인들은 중국인들과 만주인들을 믿지 않았지만 러시아와는 큰 흥미를 가지고 관계를 시작하였다. 한인 마을들은 연해주 발전에 촉진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남쪽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과 러시아 간의 통상 우호조약은 1884년 서울에서 체결되었다. 또 그와 동시에 한인 이주민들을 정리하려는 계획이 착수되었다. 그러나 연해주로의 한인 대량 이주는 월경할 경우 목을 벤다는 조선왕의 칙령과 러시아내의 카자크인들의 위협도 막을 수가 없었다. 한인 이주민들은 강가를 따라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전체 숫자의 20-30%만이 러시아 제국의 공민증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19세기말 러시아 자본이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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