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윌리암 케리의 좌우명이다. 검소한 집안 출신인 영국의 침례교 목사 윌리암 케리는 개신교에서 근대 해외 선교의 아버지로 널리 인정되는 사람이다. 케리 이전에도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 인도가 가서 복음을 전했으나 케리 자신의 비전과 그의 놀라운 근면성, 그리고 그가 창립한 기관들의 성격이 19세기의 선교 운동을 실제로 주도했다. 그의 업적이 영어를 사용하는 선교의 중추적인 출발점이 되었고 그가 손을 댄 모든 것들이 그의 열성과 인내에 의한 지워지지 않는 영향력이 의해 변화되었다.
케리의 초년 생활에서는 그가 미래에 얻게 될 명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그의 일생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신실한 믿음, 근면과 순종을 사용하셔서 엄청난 반대를 극복하게 하시는 지를 보여 주는 훌륭한 예이다. 케리는 영국 노스앰튼사이어에서 자랐으며 어렸을 때에는 구두수선공의 기술을 배웠다. 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대부분 스스로 학습한 것이며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다. 세상의 길을 따라 방황하는 시기를 거친 후 17세에 케리는 변화를 받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죄의 용서와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구세주께 의존”하게 되었으며 곧 침례교인이 되었다. 집에서 자랄 때에 케리는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지녔었으며 구두 수선 가게에서 일하면서 그는 신약 성경을 헬라어로 읽을 수 있도록 스스로 학습하게 되었다. 그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미게 되었으나 가난했고 종종 굶주리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는 구두 수선공의 일 외에도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에게 세계 지리를 가르치면서 세계에 대한 케리의 비전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가 쿡크 선장의 항해에 대한 책들을 읽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전세계에서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라.” 케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목회 사역뿐만 아니라 선교를 위해 자신이 부름 받았다고 느끼게 되었으며 인근 침례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인관계가 확장됨에 따라 그는 다른 목회자들과 외국 선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해외에 선교하기 위해 나가는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는 조직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믿음으로 가득차었다. 케리는 겸손하고 친절한 평민이었으며 그가 사역하고 설교를 할 때 종종 선교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 했으며 열심히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것들을 주시리라고 기대했다. 수년간의 학습기간과 많은 기도, 그리고 단체를 하나 세우자는 지속적인 간청이 있은 후에 마침내 그는 침례교 목사들의 지원을 얻게 되었으며 1792년에 해외선교협회를 세우게되었다. 그러나 케리는 침례교 선교협회에 대해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 형성된 협회의 지원 하에 해외로 나가는 첫 선교사가 되고자 희망했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 케리의 믿음과 비전은 용감한 담대성과 근면과 희생에 대한 헌신과 연결되었다. 그는 1793년 1월 17일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에서 “거룩한 용도를 위해 희생양처럼 헌신하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위대한 임무입니다. 저는 힌두인들을 위한 선교사로서 동인도의 벵골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1793년 가을, 협회의 첫 선교사로서 인도를 향해 출발했으며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기서도 그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속적인 직업을 병행해야만 했다. 케리는 세부적인 것들을 다 기록한 일기를 썼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내면적인 생각에 대해 알 수 있다. 그의 일기 속에는 다양한 고난들이 후렴구처럼 반복된다. 그는 그가 섬기기 위해 온 사람들의 죄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복음이 열매 맺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는 선교사로서 자신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생각들을 하기도 했다 ”나는 보다 영적인 삶을 살 필요가 있다“라고 그는 기록하고 있으며 ”보다 복음적인 정신 상태가 내게 필요하다. 나는 진실한 믿음이 내게 충만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내게는 가르칠 수 있는 능력과 준비가 너무도 필요하다.“ 마지못해 그와 함께 인도로 동행했던 그의 부인은 그의 사역에 대해 협조적이지 못했으며 정신 질환을 앓게 되어서 마침내 시설에 수용되어야만 했다. 케리는 “온유하고 나와 마음이 맞는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며 참으로 좋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역경과 실망들이 그의 사역을 방해하지는 못했으며 그는 즉시 언어를 습득하는 일에 착수했다. 케리는 창의적인 사고의 소유자가 아니었으며 교사나 설교자로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일에 열중하는 능력을 지녔었고 뛰어난 관찰력과 세부적인 상황을 잘 기억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비전에 대한 순종과 주어진 임무를 끝까지 마무리하고자 하는 그의 강한 결심에 있었다. 그는 매일 그의 모든 힘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활용했으며 열심히 일하는 것에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행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선정했으며 이는 종종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일시적인 만족을 거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윌리암 케리가 이룬 업적은 무엇인가? 그는 아시아에서 최초의 기독교 대학을 창설했다. 세람포르 대학은 오늘도 건재하다. 세람포르 대학에서 케리의 지도 하에 약 수심만 권의 성경과 복음서가 인도에서 여러 언어와 방언으로 출판되었다. 벵골어로 된 성경 이후에도 마라타어와 타밀어로 된 성경이 출판되었다. 모두 합해 그는 스물여섯 개의 언어와 방언으로 된 번역서를 출판했으며 그 과정 가운데 그는 수많은 문법서, 사전, 그리고 언어 학습서를 출판했다. 케리 자신은 1801년에 포트 윌리암 대학의 산스크리트, 벵골어, 그리고 마라타어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사망한 인도인의 과부를 화형시키는 인도의 관습인 수티 제도에 대한 그의 반대는 그 관습을 폐지시키는 데에 공헌했다. 무엇보다도 사역에 대한 그의 헌신은 후세에 온 수많은 선교사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우리가 받은 보잘 것 없는 은사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힘을 다해 이 은사들을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루실 수 있겠는가? 윌리암 케리의 인생은 달란트의 비유를 연상케 하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가 아닌 두 달란트를 받은 자를 생각하게 한다. 이 사람은 효율적으로 투자했으며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두 달란트를 더 돌려드릴 수 있었다. 케리는 그가 받은 특별한 은사를 솔직히 인정했으며 그의 온 정성을 다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믿음, 기도, 그리고 비전의 인물로서 케리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기대했었다. 순종의 사람으로서 그는 그의 제한된 능력과 엄청난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했다. 그리고 충성된 종으로서 케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위대한 일들을 성취했으며 이러한 업적의 바탕에는 순종과 근면이 있었다. 그의 삶에서 중심 되는 성격을 적절히 설명한 케리 자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나는 꾸준히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어느 분명한 목적을 위해 인내할 수 있다. 이에 내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제임스 E, 브래들리 / 풀러 신학교 교회역사학 교수 세계 선교의 문을 연 윌리엄 케리 구두 수선공이 위대한 Vision의 선교사로 1761년 햇볕이 따사로운 8월의 어느날 영국의 노스햄프턴셔의 작은 마을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렸습니다. 캐리는 어려서 꽃과 나무와 새 그리고 곤충을 벗하며 자라난 전형적인 촌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주특기는 나무타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 대한 욕구도 강했습니다. 당시 문맹률이 매우 높던 시절, 그는 끈질긴 도전으로 글을 깨우쳤습니다. 고교를 졸업한후 캐리는 아버지의 압력으로 구두수선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의 팔자를 고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는 이 한 말씀을 통해 그동안의 세상과 타협하여 살던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에서그리스도와 함께 고난과 능욕을 받고자하는 분명한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그는 다른 어떤 학문보다 성경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그 당시 영국은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가 이끄는 영적 부흥운동이 전 영국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캐리가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 라는 책을 읽고있을 때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인생을 바꾸어 놓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문명의혜택을 못받아 옷도 없이 코난과 포비처럼 살아가는 부족, 사람을 맛있게 먹는 풍습을 지닌 부족등... '아무도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해 주려고 하지않습니다. 거기에는 명예도 유익도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책을 읽고 있던 청년 캐리의 가슴은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냐인의 끈질긴 외침을 들었습니다. 18세기 영국교회는 캘빈주의의 영향으로 선교운동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선교는 예수님이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사명으로 국한 시켰습니다.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 된 캐리는 교회안의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야겠다고 방향잡았습니다. 그러자 한 원로목사가 일어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선교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습니다. 캐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유언적 명령이 곧 우리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1792년 봄 그는 '이교도 개종에 대한 크리스챤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책은 루터의 95조항과 함께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세계선교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 캐리는 침례교회연합회 모임에서 이사야서 54:2,3 '네 장막터를 넓히라.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항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곳이 되게 할것임니라' 말씀을 전하며, 간절한 기도가운데 여러목사들에게 하나님의 비젼을 심었습니다.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통해 위대한 그의 비젼이 넘치는 메시지에 감동을 받은 목사들이 당장에 그 다음날로 유명한 침례교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7년동안 아무도 그를 이해하거나 도와주지 않고 배척했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으로 현실에 절망치 않고 끈질기게 도전하였을 때 18세기의 타락한 영국을 구원하였을뿐 아니라 세계각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였습니다. 위대한 시도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러자 그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 였습니다. 둘째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캐리에게 '여보, 인도는 절대로 안돼요, 제발 우리 아기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엉엉엉'. 그러나 캐리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셋째는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인도땅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선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힌두과부들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함께 불에 타야했고, 갠지스 강가에선 'Gunga mai kai jai (갠지스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그런 미신이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또, 당시 인도는 동인도 회사의 점령아래 있었고, 선교를 절대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캐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캐리는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습니다. 1년후부터 그의 위대한 시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인도 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르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승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캐리와 워드와 마쉬만, 그들은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불리웠는데 23년간 팀을 이루어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의 교제로 힘을 얻으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대형화재로 인해 수년간 작업하여 완역한 성경원고와 두권의 문법책,다국어 사전들이 소실되었습니다. 캐리는 편지에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유익이 될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다시 시작했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 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이처럼 그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캐리는 1834년 73세의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던 인도 세람포에 묻혔습니다.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학적 업적, 교육적인 공로, 목회사역뿐 아니라 과부의 화형이나 유아살해 같은 인도의 나쁜 관습을 폐지하고 좋은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는데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도 국외적으로도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 공회가 창설되어 오늘날 선교의 기틀이 되게 한 중요한 업적이 있습니다.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댕긴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인도의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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