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통 사회는 대개 사(士), 농(農), 공(工), 상(商) 등의 계층으로 나눌수 있으나 실질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단지 사(士)와 비사(非士)의 두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사(士)는 바로 유생(儒生) 즉 지식인이다. 그들은 어려서 부터 유가(儒家)와 경전(經典)을 배우며, 과거시험이나 기타 경로를 통해 통치 계층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한다. 중국의 사(士)와 비사(非士) 두 계층은 문화적으로 각각 사(士)를 중심으로 하는 아문화(雅文化)와 비사(非士) 계층을 상대로 하는 속문화(俗文化)의 두 개의 계층을 이룬다. 중국의 종교 전통은 상하로 구별된다. 천자(天子)는 제천제조(際天際祖)하고, 지식인은 유가학설을 닦으며, 유학(儒學)에 탐닉하거나 또는 열성적으로 사회에 뛰어 들기 때문에 종교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사(非士) 계층을 주체로 하는 중국에서는 조상을 숭배하고 자연을 숭배하며 또한 유(儒), 불(佛), 도(道)의 여러 종교를 수용하는 민간종교 (통속 종교라고도 부른다)가 성행되었다.
불교 교리가 외부에서 유입된 후 아문화(雅文化)와 속문화(俗文化)의 두 단계에서 각각 중국 문화와 접촉하여 발전되었다. 장기간의 역사 발전을 거쳐 중국 사회에서 상하가 구별된 경전불교(經典佛敎)와 민속불교(民俗佛敎)로 형성되어 갔다. 불교경전는 중국의 지식층들의 열성적인 번역과 깊은 연구와 토론, 아울러 불교교리에 관한 역대 고승(高僧)들의 노력으로 도가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불교는 중국에서 중국 문화 특색을 지니고 여러 종파와 파벌을 형성하였으며 그 중심을 철학에 두었다. 불교철학은 특히 송조(宋朝), 명조(明朝) 때 유학의 흡수, 융합을 거쳐 중국 사상과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경전불교(經典佛敎)가 중국 문화 사상에 가져다 준 영향은 아주 크다. 그와 동시에 불교는 속문화(俗文化) 단계에서도 원만한 발전을 가져왔다. 불교는 중국인의 요구와 이해에 따라 발전, 개조되고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중국의 민속불교(民俗佛敎)로 형성되었으며,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어 민간 풍속의 일부분이 되었다. 중국 경전불교와 민속불교는 비록 상하가 구별되기는 하였지만 상호 협조하며 보충하였다. 경전불교는 교의(敎義)의 순수성을 유지하였고, 민속불교는 종교발전과 전파를 강조하였다. 양자는 서로 상호 보완하고 도와가면서 함께 중국 사회에서 생존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근대 중국의 기독교 도입은 두 단계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이제마태(Timothy Richard, 1845-1919)를 대표로한 일부 선교사들은 주로 중국의 지식인들과 사회 고위층 인사들을 목표로 전도하였다. 그들은 서양 과학과 문화를 소개하고, 병원과 학교를 세우며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서양의 과학, 문화, 지식에 관한 서적을 번역하며, 심지어 중국의 정치생활에 참여를 통하여 더욱 광범위하고 높은 차원에서 중국 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발전의 적합한 문화환경을 마련하여 중국에서 기독교화(基督敎化)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중국의 최초 서양식 학교와 병원은 모두 개신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것이다. 1905년 광서(光緖) 황제는 유지(諭旨)를 내려 과거를 중지하고, 학교를 보급할 것을 지시하여 서양식 학교가 전국 각지에서 잇따라 설립되었으며 전통적이며 낡은 교육제도를 점차 새롭게 바꾸었다. 현대적 교육 제도의 설립은 서양 문화를 보편적인 국민 교육에 침투시켜 외래문화를 중국문화의 일부분이 되게 하였다.
선교사는 과학자가 아니었으며, 그들이 서양의 과학과 문화를 소개했던 목적은 전도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희망과는 달리 비록 중국사회는 서양의 과학과 문화를 광범위하게 흡수하긴 하였지만 적합한 환경에서의 기독교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무엇보다 먼저 서양 선박의 견고함과 대포의 위력을 뼈저리게 경험하였기에 서양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부득불 서양 학문을 배워 산업을 진흥시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목적을 이루려 하였다. 또한 그들은 서양 정치제도에도 참고할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뒤 무술변법(茂戌択法), 신해혁명(辛亥革命) 등을 통하여 정제 개혁을 시도하였다.
중국에서는 서양문화의 부단한 신임과 중국 지식인들의 서양 유학으로 인하여 일부 서양 학문을 통달한 중국인들이 문화, 심리등 여러면에서 국민정신을 개선하여야만 근본적으로 중국을 개화시킬수 있다고 인식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5. 4 새문화 운동이 발생할 수 있었다.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이래 '태평천국(太平天國), 양무운동(洋務運動), 무술변법(茂戌択法),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부터 항일전쟁, 중국인민혁명에 이르기까지 줄곧 기독교는 지속적으로 문화적 영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영향력 있게 주도한 사상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5. 4 새문화운동에서 전반서양화(全磐西化)를 제기한 저명한 중국학자에 의하면 胡造 등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하였다. 5. 4 지식계에서는 중국에서 민주화와 과학을 토대로한 새문화, 새사상, 새도덕을 건립하며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 날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더우기 1922년에 시작된 [비기독교 운동]은 청년 지식인들 가운데서 아주 큰 영향을 일으켰으며 [기독교]란 세 글자가 일반 청년과 학생들 가운데서는 상당한 반감을 사는 단어로 인식되었다.
기독교는 유*문화 측면에서 중국 사회에 대한 영향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비록 많은 지식인 및 사회 고위층 인사들도 기독교에 귀의하고 있었고 또한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중국 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었으나 총체적으로 말해서 전반적 중국 문화에 대하여 영향을 줄 수 있는 기독교 지식인 계층이 형성되지 못하였으며, 종교적 측면에서 기독교의 영향력 있는 작품들이 매우 적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는 국외에서는 기독교 교파가 매우 많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처럼 중국의 특색을 지닌 여러 종파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똑같은 외래 종교라 하더라도 기독교는 불교처럼 중국에서 경전 기독교 (經典 基督敎)의 높은 문화현상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중국에서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Timothy Richard와 동시대의 선교사 아덕생(James Hudson Taylor, 1832-1905) 등은 전도의 목표를 사회 하층에 두었으며, 순회전도, 의료전도, 개인전도 등 직접적인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중국 내지인 변강, 소수 등 민족지구에 깊이 들어가 선교하였으며,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전도소를 세우고 선교사업을 확장하였고 심지어 제일 험난한 지역에 까지 선교를 감당하였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부터 시작하여 중국 전지역으로 기독교를 확장하였다. 이 일을 위하여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중화내지회'를 창건하였으며 서양교회에 선교사를 중국에 파견할 것을 호소하였다. 내지회는 고등교육을 받은 선교사를 받아 들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정규적 교육을 받지 않고 목사 신분을 갖지 못한 선교사를 받아 들여 중국에서 전도하게 하였다. 선교사는 국적과 교파를 따지지 않고 단지 기본적인 교의(敎義)를 지키면 곧 내지회에 가담하여 중국에 가서 전도할 수 있었다. 내지회를 제외하고 19세기 말 신교의 몇 개 종파 즉 성결교(信義宗), 장로교(長老宗), 성공회(聖公宗), (公理宗), 침례교(侵禮宗), 감리교(監理宗)등이 모두 이미 중국에 선교사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전도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건설하였다. Hudson Taylor가 말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속세의 작업은 모두 우리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며' '만약에 의료사업으로 복음 전파와 설교를 대체한다면 이것은 극히 잘못된 것일뿐 아니라 만약 학교와 교육으로 성령의 능력을 대체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개화한다면 이것 또한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의화단 운동(義火團 運動) 후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중점을 자선, 위생, 교육 사업에 두었으며 다만 내지회 선교사들만이 예전과 같이 편벽하고 낙후한 지역에 내려가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이런 지역의 신도들은 비록 경건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문화수준이 높지 못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 결국 그들의 신앙은 중국 민간 종교와의 마찰을 피할수 없었다.
1949년 중국대륙이 해방된 후 외국의 선교사들은 모두 중국을 떠났으며, 중국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와 완벽한 단절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기독교는 독자적으로 중국 사회에서 발전하였다. 몇십년 동안의 정치운동, 특히 1957년 후 기독교는 큰 발전이 있을 수 없었고, 특히 문화 대혁명 가운데서는 완전히 소멸되다 싶이 하였다. 각 지역에 흩어진 평신도들은 장기간 각종 조건의 제한으로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심도있는 연구와 토론을 할 수 없었다. 무신론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회환경에서 기독교 지식인들은 보다 높은 문화, 공개적 장소, 학술 논단 등에서 기독교 신학을 변론, 연구, 토론하여 통속적 기독교 신앙을 인도하여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릴 능력과 조건이 되지 않았다. 객관적 역사와 현실적 상황이 중국 기독교를 다만 민간문화에 의지하여 보존되어 발전되도록 방치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 기독교는 몇십년의 소강상태를 거쳐 개혁과 개방 이후 주목할 만한 발전을 하고 있다. 세례받고 입교하는 신자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고 일부 가정 모임도 나타났다. 한족(중국인) 농촌 지역에서 기독교 발전은 매우 빨랐다. 운남의 소수민족 가운데서 귀주 서북부의 묘족(苗族), 이족(邇族)의 경우 원시종교는 급속히 쇠퇴되고 기독교가 모든 종교중에서 가장 발전이 빨랐으며 사회적 영향도 날로 뚜렷하게 전개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중국 기독교 신자 80%가 농촌에서 생활하며, 그 중 절대다수는 여성 신자들이다. 기독교 - 이 순수한 외래종교는 중국에 전수되어 비록 중국사회에서 [경전 기독교]와 같은 높은 단계의 문화현상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중국에 정착하여 민간에서 발전하였다. 필자는 이것을 [중국 민간 기독교]라 호칭한다.
중국 민간 기독교는 근 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수많은 신도를 갖고 있다. 전문가의 의견에 의하면 중국의 기독교는 수년내에 획기적인 성장을 도모하리라 본다. 하나의 순수한 외래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중국 사회에서의 끼친 영향은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기독교가 중국의 지식 계층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고 또한 중국적 신학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는 기독교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불리하다고 볼 수 있으며 전체 기독교의 신앙을 북돋우는데도 상당히 부정적인 요소로 자리 잡을수 있는 것이다. 어쩌며 이것이 중국 기독교의 가장 부족한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에서는 기독교가 문화수준이 낮은 민간에 편중되었는데, 이는 특수한 역사적, 현실조건에 기인한 것이다. 세계의 기독교와 비교하여 볼 때 중국 기독교는 뚜렷하게 저급하고, 거칠며, 그리고 미신적이고, 낙후되었으며 그 발전 또한 맹목성을 띄고 있다. 만약 이것이 민간 봉건 미신과 결합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선교사로 자칭하는 자들과 불순분자들에게 의하여 대중을 미혹시키는 역할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강권(强勸), 포함, 불평등 조약등이 수반되었다. 아편전쟁부터 의화단 운동(義和團)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지에서 수백차례의 교란이 일어났으며 (그 중 천주교로 일어난 교란이 다수를 차지함) 사건의 결말은 모두 중국 사람들의 심령에 치욕과 상처만을 남기고 말았다. 근대에 있어서 서양의 침략은 중국으로 하여금 국민이 궁핍해지고 국가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였으며 기독교의 사랑의 교리는 현실 생활에서 증오와 아픔만을 남기게 되었다. 여기에 대한 역사를 회고하면 중국 지식층이 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냉담하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 당시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왔올 때 중국의 전통문화는 거대한 보수적 기질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기독교 문화와 중국 문화 사이에 얼마간 충돌점이 있었다. 기독교는 평등한 태도와 대등한 입장에서 중국의 위대한 문화전통을 대하지 않았고, 그들의 국력을 바탕으로 높이 앉아 내려다 보듯이 하였으며, 기독교 문화로 중국 전통 문화를 대처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중국 지식층의 배척을 받게 되었고 양자간에 상호이해 또는 나아가서 상호수용, 흡수, 융합은 근본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 결과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중국 유문화 단계에서 경전기독교 (經典基督敎)의 높은 단계의 종교 문화현상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는 중국 기독교가 분명하게 반성해야 할 점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대단히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각종 사상과 문화가 상호간에 깊은 영향을 행사할 뿐 아니라 상호 연합되고 흡수되는 추세에 있다. 강권을 믿고 한 문화를 다른 문화에 이식하고 대체하려는 시도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현재 세계의 각종 문화들은 모두 세계무대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려고 애쓰고 있다. 긍정적으로 말해서 생명력 있는 종교란 우수한 문화들을 능숙히 수용, 흡수해야만 강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증언함과 동시에 나아가서 독특한 그들의 전통문화도 보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도 대단한 변화를 가져 왔다.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중국사회의 물질, 생활방식, 문화형태, 지식구조 등의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중국 문화는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장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중단되지 않은 문화체계이다. 비록 근 300년 사이에 뒤떨어졌기는 하였으나 백년간의 노력을 걸쳐 이미 점차적으로 서방 선진국들의 발걸음을 따라 잡았다. 개혁과 개방후 중국 사회는 더욱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으며, 경제와 문화 역시 세계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세계로 나아가자]는 것은 현재 중국사회의 조류이며 시대적 요청이다.
기독교 세계도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다. 20세기 40년대 말부터 50년대에 이르기 까지 중국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의 주류에서 이탈되어 단독으로 중국 사회에서 발전하고 있을 때 세계 기독교 신학에는 이미 여러 가지 새로운 사조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신정통 신학, 위기신학, 변증신학, 존재주의 신학, 과정신학 등이다. 일부 저명한 신학자들은 모두 그들 나름대로의 신학의 정상을 정복하고 있었다. 20세기 60년대에 일종의 급진, 세속적인 기독교 신학이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른바 급진적 세속신학 혹은 사신신학이라 불리웠다. 세속신학의 핵심은 당대의 세속적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의 가치는 절대적으로 내세만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현세를 가르킨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도 역시 현세의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만약 종교가 직접적으로 사회문제를 관심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미신적인 것이며 위험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세속적이며 현세적 생존이야말로 인간이 유일하게 관심 또는 주목할 대상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인식과 판단기준이 반드시 인간이 생존하고 있는 세상의 체험에서 오는 것이지 단순히 성경의 계시를 바탕으로한 교회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급진적인 세속 신학가들은 신으로서의 예수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지 않고 역사적, 인간적 예수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았고 이웃을 위한 봉사 역시 그의 중요한 사역중 하나였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삶을 따른다고 하면 반드시 이웃의 고난과 고통을 자기의 고난과 고통으로 승화하여야 할 것이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젊은 기독교 신학자와 일반 신자들은 한결같이 세속신학의 관점에 동조하고 기독교의 가치관을 반드시 현세적 삶에 돌려야 하며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중국이 변화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계도 변화하고 있다. 중국 문화와 기독교 문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양자는 모두 적극적으로 사회에 뛰어들어 세계를 아름답게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국 기독교가 이러한 측면에서 현대 기독교 신학과 맥을 같이 할 수 있을까? 중국 기독교가 만약 자원하는 마음으로 당대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흡수하여 자체의 경전 기독교화 한다면 중국 민간 기독교를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 시킬수 있으며, 또한 자아 완성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위대한 작업은 반드시 중국의 신도들에 의하여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