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4년은 한인의 러시아 이주 14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또한 조선과
러시아의 통상조약이 체결된 지 정확히 120주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최근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학술행사 및 고려인
동포를 위한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한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원년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1863년 혹은 1864년으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러시아측 자료는 대체로 1863년, 한국(한인)측의 자료는 1864년이라는 주장이 우세한 편이지만 어느 한쪽도 통일된 입장을 보여주지 못하는 형편이다. 러시아 내 고려인단체들 사이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2003년 10월 연해주에서는 1998년에 발족한 전국 규모의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측이 주관하는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축하하는 다양한 한민족(고려인, 조선족, 재일교포, 남과 북의 한인들)이 어우러진 '문화의 날'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한국의 한 TV방송사는 이를 특집으로 방영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에서 최대 규모를 가진 고려인 단체는 1993년 성립된 '고려인협회'를 모태로 하여 1999년에 확대 발족한 '전러시아고려인협회'이다. 동 협의는 1864년을 고려인 이주 원년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러시아의 푸틴 정부가 이를 수용하여 2004년을 '고려인의 해' 로 선포하였다.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브르그, 연해주뿐만 아니라 남부 러시아의 로스토프-나-돈누, 시베리아의 학문도시 톰스크 등 전국적으로 행사가 기획되어 있다. 이로써 작년 140주년 행사를 가졌던 연해주의 고려인사회는 올해 다시 140주년 행사를 갖게 되었다.
2. 1863년부터 목숨을 건 한인들의 이주는 20세기에 이르러서도 계속되었고, 특히 연해주를 중심으로 거대한 한인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1880년대 중엽까지 연해주의 다수 민족은 한인이었을 정도로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는 성황을 이루었다. 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1914년에 이르러 연해주에만 64,309명(귀화자-20,109, 비귀화자-44,200)의 한인들이 있었다. 물론 이 수치는 공식적으로 러시아 당국에 등록된 한인들의 수일 뿐이며, 거주증을 소지하지 못한 채 실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의 수를 더하면 훨씬 많은 수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7년 강제이주 당시 18만에 이르는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한 이후, 55년이 지난 1992년 중앙아시아의 타직스탄에서 발발한 내전은 고려인들을 거의 빈 몸으로 정든 터전을 떠나 유랑하게 만들었다. 우즈벡에서도 1991년 말 소련해체 이후, 우즈벡 정부가 우즈벡어르 국어로 회복하자 우즈벡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소수민족들은 공직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많은 고려인 동포들도 부모의 땅 연해주로 떠났다. 연해주는 또한 1988년 서울올림픽, 1990년 한소수교,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개별공화국과의 국교수교의 과정에서 그들의 새로운 모국으로 등장한 남쪽의 대한민국과 지척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해주는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었다. 중앙아시아와 비교하여 너무 추웠다. 풍토도 너무 달랐다. 대한민국의 교회와 많은 시만단체가 도움을 주었으나 체계적이지 못했고 그들의 자존이 상처받기도 했다. 특히 볼고그라드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고려인 난민들에게 희망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먼저 이주하여 정착한 고려인 사회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선한 의지를 갖고 찾아온 한국의 민간단체(교회)도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신중하게 접근했다. 당장 거처 할 곳을 마련해주면서 나중에 꼭 갚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 그 돈으로 또 주택을 구입하여 다른 고려인들을 또 이주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주 고려인들은 한국의 민간단체가 현지 고려인협회의 이름으로 땅을 장기 임대하여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높은 고리대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3. 볼고그라드뿐만 아니다. 우크라이나 남부(장코이, 헤르손, 니콜라예프등 )의 경우는 필자가 직접 방문했다. 필자가 속한 외대 역사문화연구팀이 확인한, 소련선교회 이소현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남부 우랄의 일렉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새로운 이주지이다. 농사일만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검문이 적은 시베리아의 도시마다 연고자를 찾는 고려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연해주가 대표적인 경우이지만, 시베리아 열차가 닿는 곳마다 밀려드는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족 동포들이 도시별로 1,000명에서 5,000명까지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지난 해 10월 우랄과 서시베리아의 고려인 사회를 방문하는 가운데, 필자는 부산에 있는 러시아선교회가 파송한 서지태 선교사의 사역지 예카테린부르그에서 월요일 오전11시 조선족 동포를 위한 예배에 참여했으며 이르쿠츠쿠에서도 주일 저녁에 조선족 동포를 위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소련/러시안 선교에서 어려움에 처한 코리언 디아스포라에 대한 사랑이 새삼스럽다. 기아를 벗어나기 위해, 일제의 침략을 피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두만강을 건넜던 선조들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철의 실크로드가 열리는 새로운 유라시아 시대에 한민족의 공동 번영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원년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1863년 혹은 1864년으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러시아측 자료는 대체로 1863년, 한국(한인)측의 자료는 1864년이라는 주장이 우세한 편이지만 어느 한쪽도 통일된 입장을 보여주지 못하는 형편이다. 러시아 내 고려인단체들 사이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2003년 10월 연해주에서는 1998년에 발족한 전국 규모의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측이 주관하는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축하하는 다양한 한민족(고려인, 조선족, 재일교포, 남과 북의 한인들)이 어우러진 '문화의 날'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한국의 한 TV방송사는 이를 특집으로 방영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에서 최대 규모를 가진 고려인 단체는 1993년 성립된 '고려인협회'를 모태로 하여 1999년에 확대 발족한 '전러시아고려인협회'이다. 동 협의는 1864년을 고려인 이주 원년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러시아의 푸틴 정부가 이를 수용하여 2004년을 '고려인의 해' 로 선포하였다.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브르그, 연해주뿐만 아니라 남부 러시아의 로스토프-나-돈누, 시베리아의 학문도시 톰스크 등 전국적으로 행사가 기획되어 있다. 이로써 작년 140주년 행사를 가졌던 연해주의 고려인사회는 올해 다시 140주년 행사를 갖게 되었다.
2. 1863년부터 목숨을 건 한인들의 이주는 20세기에 이르러서도 계속되었고, 특히 연해주를 중심으로 거대한 한인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1880년대 중엽까지 연해주의 다수 민족은 한인이었을 정도로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는 성황을 이루었다. 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1914년에 이르러 연해주에만 64,309명(귀화자-20,109, 비귀화자-44,200)의 한인들이 있었다. 물론 이 수치는 공식적으로 러시아 당국에 등록된 한인들의 수일 뿐이며, 거주증을 소지하지 못한 채 실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의 수를 더하면 훨씬 많은 수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7년 강제이주 당시 18만에 이르는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한 이후, 55년이 지난 1992년 중앙아시아의 타직스탄에서 발발한 내전은 고려인들을 거의 빈 몸으로 정든 터전을 떠나 유랑하게 만들었다. 우즈벡에서도 1991년 말 소련해체 이후, 우즈벡 정부가 우즈벡어르 국어로 회복하자 우즈벡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소수민족들은 공직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많은 고려인 동포들도 부모의 땅 연해주로 떠났다. 연해주는 또한 1988년 서울올림픽, 1990년 한소수교,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개별공화국과의 국교수교의 과정에서 그들의 새로운 모국으로 등장한 남쪽의 대한민국과 지척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해주는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었다. 중앙아시아와 비교하여 너무 추웠다. 풍토도 너무 달랐다. 대한민국의 교회와 많은 시만단체가 도움을 주었으나 체계적이지 못했고 그들의 자존이 상처받기도 했다. 특히 볼고그라드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고려인 난민들에게 희망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먼저 이주하여 정착한 고려인 사회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선한 의지를 갖고 찾아온 한국의 민간단체(교회)도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신중하게 접근했다. 당장 거처 할 곳을 마련해주면서 나중에 꼭 갚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 그 돈으로 또 주택을 구입하여 다른 고려인들을 또 이주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주 고려인들은 한국의 민간단체가 현지 고려인협회의 이름으로 땅을 장기 임대하여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높은 고리대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3. 볼고그라드뿐만 아니다. 우크라이나 남부(장코이, 헤르손, 니콜라예프등 )의 경우는 필자가 직접 방문했다. 필자가 속한 외대 역사문화연구팀이 확인한, 소련선교회 이소현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남부 우랄의 일렉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새로운 이주지이다. 농사일만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검문이 적은 시베리아의 도시마다 연고자를 찾는 고려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연해주가 대표적인 경우이지만, 시베리아 열차가 닿는 곳마다 밀려드는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족 동포들이 도시별로 1,000명에서 5,000명까지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지난 해 10월 우랄과 서시베리아의 고려인 사회를 방문하는 가운데, 필자는 부산에 있는 러시아선교회가 파송한 서지태 선교사의 사역지 예카테린부르그에서 월요일 오전11시 조선족 동포를 위한 예배에 참여했으며 이르쿠츠쿠에서도 주일 저녁에 조선족 동포를 위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소련/러시안 선교에서 어려움에 처한 코리언 디아스포라에 대한 사랑이 새삼스럽다. 기아를 벗어나기 위해, 일제의 침략을 피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두만강을 건넜던 선조들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철의 실크로드가 열리는 새로운 유라시아 시대에 한민족의 공동 번영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출처 : 미라클
글쓴이 : 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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