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경의 동릉에는 청의 초대 황제인 순치제를 비롯해서 강희제, 건륭제, 함풍제, 그리고 동치제의 무덤이 있는데 청말에 권세를 누렸다는 서태후도 이곳에 잠들어 있고 살아 생전에 그녀가 권력을 다투었던 광서제도 함께 묻혀 있으며 마지막 황제 푸이의 무덤도 이곳으로 이장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유릉비원침속에 잠들어 있는 향비라는 여인인데 유릉은 건륭제의 무덤이니, 향비는 건륭제의 비인데 유릉비원침에는 36명에 이르는 건륭제의 황후, 2명의 황귀비, 5명의 귀비, 6명의 비, 6명의 빈, 12명의 귀인, 4명의 常, 모두 36명이 함께 잠들어 있고 향비도 그 중의 하나인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향비의 무덤이 이 동릉 뿐만 아니라 오늘 사진속의 신강 위그르 자치구의 서쪽 끝에 자리잡은 카슈가르에도 묘가 있다는 점이랍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무덤 두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드물려니와, 여인으로서는 더 그렇겠지요.
이 카슈가르에 있는 향비묘는 개인묘가 아니라, 이 지역의 전통에 따른 가족묘로서, 17세기 중기에 호자가에서 시작되었는데, 호자 일족 72명이 묻혀있다고 합니다. 호자는 이 지역의 종교 귀족을 가리키는바 호자 가족묘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확한 표현이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향비묘라고 부른답니다.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항상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향비는 카슈가르 지역 종교귀족 가문인 호쟈 가문의 딸이었는데, 청조가 건륭제 때 침략을 하여 청의 장군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그녀를 사로 잡아 북경에 보내어 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2살이던 그녀는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었기에 자금성에 살면서 29세에 숨을 거둘때까지 망향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도 않는 그녀를 위해 황제는 그곳지방에서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을 정도였고, 그녀가 위그르의 전통 복장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답니다.
그러나 그녀는 궁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항상 칼을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결국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불러 소원을 묻자 죽는 것 뿐이라고 말하며 결국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카슈가르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고, 향비는 그에 저항한 여성인 셈인데 그때문에 그녀의 유해는 동릉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24명의 카슈카르 사람들은 특별제작한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북경에서 향비의 시체를 운구한 다음, 호자가의 묘에 묻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위그르인들은 향비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드러내고 싶었던가 봅니다.
위와 같이 중국은 서북방에 있는 투르키스탄 지역 거주의 투르크족이나 티베트족들은 침략하여 중국에 편입시켜왔는데 이런 소수민족 침략의 역사를 감추어두고는 도저히 현재의 중국을 제대로 안다고 할수 없을것이기에 그 이야기를 좀 해드리렵니다.
투르크인들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투르키스탄은 청조의 강희 시대부터 시작해서 건륭 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청조의 침입을 받으면서 청말에 이르러 마침내 청조의 한 성인 신강성이 되었는데 지금은 거의 한족들이 차지하고 마치 한족 본거지처럼 되어 버렸답니다.
이때부터 청조는 차츰 청해로, 중가르로, 티베트로 군대를 이동시키면서 정복지를 확장해 나갔는데 티베트의 내분을 고리 삼아 그랬던 것처럼, 18세기의 한복판이었던 1750년에 중가르 내부의 분란을 이유 삼아 대군을 파견하여, 중가르의 중심지인 이리를 공격하여, 이 왕국을 붕괴시켰습니다.
당시 북경으로 잡혀온 이곳 종교 귀족 가문의 한 처녀가 바로 후일 향비라는 이름으로 하북성의 동릉에 건륭제와 같이 묻힌 처녀로, 이제 투르크인들의 비극은 한 처녀만의 문제로 끝난 일이 아니었답니다. 침략당한 그곳은 죄를 지은 한인들이 유배되거나, 범죄자들이 도망가거나, 혹은 돈 좀 벌려고 기웃거리는 한인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주변화'되고, '식민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지요.
또 이곳은 러시아와 카자흐 등의 영토 확장 계획을 저지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청 정부는 이 지역을 단순한 유배지가 아니라,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로 건설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이를 위해 둔전을 두어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문관을 새로이 설치하는 한편, 유배 관료를 해당 지역의 관료로 임명하면서 행정 지배를 확대해 나갔고 그렇게 함으로써 중앙 정부의 직접 지배하에 두려고 한것이지요. 그러니까 소수민족에게 잘해주려고 그런게 절대 아니고 따로 속셈이 있었다는것이지요.
또 청정부는 강희제 때부터 시작되어 건륭제 때까지 계속된 티베트 침략의 결과, 駐藏大臣을 새로 두어 이곳을 통치하였지만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한 시기는 아주 짧았던 까닭에 청조의 영향력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답니다.
특히 청말에 이르러 영국과 티베트의 주권을 둘러싸고 외교전이 벌어졌을 때, 청은 내부적으로는 티베트가 자국의 지배지라고 하면서도, 외국에 대해서는 티베트의 일이기 때문에 駐藏 大臣조차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청조의 관리는 영국의 티베트 입경 목적이 四川 침입에 있다고 판단하였고 그래서 서부의 요지인 사천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티베트를 봉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티베트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청조 안전의 울타리로 인식하였던 것이지요.그래서 결국 청은 영국에 대해 티베트의 종주권은 청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1910년에 라사에 군대를 보내었던 것입니다.
신해혁명이후 중국 내에서 황제 지배 체제가 붕괴되고 티베트나 몽골과 같은 주변민족이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러나 1913년 티베트가 독립을 선언한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강서의 공산당과 싸우던 회오리 속에서도 티벳을 침략하여 강제로 합병하려 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1949년에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로 선언하면서 이곳을 침공하여 직접 지배하려 했기 때문에, 결국 티베트의 법왕 달라이 라마 14세는 1959년에 인도에 망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것입니다.
이렇게 확장된 대부분의 중국 '변경지역'은 자원이 많은 반면 인구는 지극히 적은 팽창주의자들에게 이런 지역은 하늘이 내린 축복의 땅이었고 청조 역시 인구 폭발로 삶의 근거지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던 중심부의 한인들이 인구가 희박하지만 자원이 풍부한 '변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족과는 다른 원주민들이 먼저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족 관료나 군인들이 먼저 가서 체제를 중국식의 체제로 바꾸어 놓았고, 또 모험적인 상인들이 교두보를 놓은뒤에 야금야금 소수민족의 터전을 침범해들어왔지요.
게다가 몽골 민족은 티베트 불교를 통해 호전성을 버리고 상당한 정도로 '순화'되어 있었는데 티벳은 가족내에 우수한 인재나 혹은 아이가 여럿 있을 경우에는 그 중 몇 명을 승려로 만드는 종교제도와 일처 다부와 같은 사회제도를 가지고 있던 탓에 인구증가가 미미했고 한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순진하여 이들 '소수민족'들은 이익에도 어둡고, 자원을 이용하는 정도 역시 원시적인 생산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때 일부 한인들이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고 유민화된 한인 노동자를 이곳에 끌어 들여 개발하기 시작하여 청조의 군사 식민지로부터 행정 식민지, 혹은 문화 식민지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지요. 그런다음에는 마치 일제가 우리에게 그러했듯이 청조는 소수 민족의 문화와 한족과의 문화적 일체감을 강조하면서 결국 소수민족 말살 정책을 펼쳤던것입니다.
이렇게 청말의 상황은 중화인민공화국 체제에서도 거의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한다고 법도 만들고 대외적으로 이들의 정체성을 존중한다며 화폐에 소수민족의 사진을 넣는등의 제스추어를 보여주고는 있으나 천만의 말씀! 실상은 그렇지 않답니다.
1989년 3월5일 1만명의 티베트인들이 티베트 라싸 인민광장에 몰려들어 티베트 국기인 '설산사자기(雪山獅子旗)'를 들고 "달라이라마가 돌아와 티베트를 통치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외쳤는데 이는 지난 1959년 3월10일 티베트인들이 중국의 티베트의 강제점령에 반발하여 무장봉기하다가 무려 10만여명이 사망한 사건의 30주년을 앞둔시점 이었던것이죠.
무장봉기 30주년을 앞둔 3월5일 흥분한 티베트군중들은 중국 무장경찰과 충돌했고 20여대의 소방차와 경찰차가 불에탔으며 다음날 시위대에는 화염방사기와 기관총이 난사됐고 300여명의 시위자들이 중국경찰 진압 곤봉에 맞아죽었고 그 다음날 라싸에는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이날 철모를 쓰고 중국 계엄군을 진두지휘하며 라싸거리를 피로 물들였던 당시 티베트공산당 서 기가 바로 후진타오 였습니다. 그는 3개월뒤 6.4 천안문 사태로 1400명이 사망했을때에도 중앙당을 적극 지지한다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지요. 1989년은 중국 공산당에게는 최대위기의 시절이었습니다. 10월에는 달라이라마가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11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요.
이런 와중에 50세의 후진타오는 티베트 강경진압처리한 덕택에 승승장구하며 한꺼번에 3계단을 뛰어올라 중국 정치의 최고 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명 안에 들어갔고 97년 15회 당 대회 때는 5위로 올라섰으며 2002년 16차 당 대회 때는 공산당 총서기, 2003년에는 국가 주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티베트의 경우, 1964년부터 1982년 사이의 티베트족의 인구증가율은 73.44%인데, 한인은 121.2% 증가하여 순수 티베트의 사회에서 민족혼합의 사회로 바뀌고 있답니다. 더구나 중국 당국은 티벳으로 한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있고, 또 한인과 티베트인과의 결혼을 권장하고 있으며, 티베트인들에게 중국어와 한족의 문화를 강요하면서 동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지요.
이렇게 중국정부가 소수민족지역을 민족 융합이라는 이름 아래 식민화한 예는 티베트에서만 그치지 않고 1884년부터는 신강이 된 동투르키스탄에서, 또 내몽골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인들은 동투르키스탄에서 1949년에 단지 20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늘날 이곳 인구 1,300만 명 주민 중에서 그들은 무려 700만 명으로 늘어나 규모에서 원주민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근대란 숫자가 무게를 갖는 시대라고 한 브로델의 말을 상기해 보면, 대규모 한인이 갖는 중압감을 금방 느낄수 있으며 도시 내의 행정이나 거주지 구조를 보면 한인들의 지배적 위치와 소수민족의 피지배적 위치가 금방 드러납니다.
이른바 비단길의 천산 남로와 서역 남로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신강 서부의 야르칸드(샤처)와 같은 도시의 한인 거주 지역은 도로와 가로수가 말끔하고 정부 기관 등이 이곳에 모여 있는데다가,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번영하는 모습이 눈에 뜨일 정도로 분명합니다만 반면 위그르족 지역은 작은 민가들이 복잡하게 밀집해 있는데다가, 포장된 도로도 거의 없고 외국인 관광객이 보기에도 민족 차별은 눈에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소수민족이 사는 변방 식민지는 본국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장소또는 감당하기 어려운 방탕아나 범죄자, 빈민, 그 밖의 바람직하지 않은 과잉인구를 보내는 장소로서 이용해오고 있는것입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등 조선족과 관련된 여러 술수가 계속되는 지금 우리나라도 절대 제 3자일수 없기에 두눈 똑바로 뜨고 보다 본질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응방안을 준비해서 더이상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텐데 요즘 정치인들 하는 꼬락서니 보면 더 답답하기만 하네요..ㅠㅠ
출처 : 하면된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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