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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좌)와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우)

 

양화진외국인묘지공원 선교사묘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양화진외국인묘지는 1890년 설치되고, 국제간의 조약에 따라 외국기관(The Municipal Council, 租界公司 / 紳董公司)이 .... 당시에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선교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헌금을 한 많은 기독교인들과 당시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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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 8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정식 명칭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다. 1893년 10월 24일에 개설이 허가 되었으며 면적은 13,224 제곱미터이다. 무덤은 514 여기가 있으며, 최초의 피장 선교사는 존 헤론이다. 이곳에는 초대 선교사와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구미 각국의 저명인사 500여명이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 공원 묘역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성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선교정신과 숭고한 희생 봉사의 업적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후세에 전승키 위하여 1985년 1월 14일 재단법인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제 5차 총회에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한국 기독교선교회관을 건축키로 결의하였다. 이 사업이 1985년 6월 28일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 기념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1986년 8월 20일 건조물 및 토목공사가 완료되고 9월 10일 조경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선교 기념실, 자료실, 대강당, 외국인 연합교회 예배처소, 종, 소회의실 교육실, 목회자실, 부속실, 친교실,식당, 기관실, 다목적실, 야외 행사공간, 주차장, 관리인 숙소, 휴게실이 구비되어 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 한국은 미개한 상태에 놓여있었다.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복음과 또한 문명화와 근대화 사역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는데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언더우드,헤론, 감리교 의료 선교사 겸 목사 스크랜톤이 일하였다. 처음에는 알렌이 와서 일하였으나 밀려오는 환자를 혼자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가 약국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1885년 5월에 내한한 스크랜톤과 함께 같은 해 6월 헤론이 가담하였다. 부족한 약품들, 의료 재료들로서는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전염병은 창궐하였다. 한국인들은 위생관념이 희박하여서 물을 끓여먹지 않아서 온 가족과 동네가 몰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헤론은 내한한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렸다. 그는 그곳에서 그렇게 순직했다. 이러한 제중원은 후에 미국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가 1만 5천 달러를 희사하여 지금의 서울역 앞 대지를 구입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이름을 갖게되고 세브란스병원이 생겨났다. 헤론은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료 선교에 뛰어 들었고 그는 그렇게 이질에 걸려 질병으로 숨져갔다. 그는 5년간이라는 짧은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뼈를 묻었다. 그는 조국보다도 자신의 가족 보다도 더욱 한국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JOHN W. HERON, MD/who came to Korea IN  1885/MISSIONARY PHYSICIAN/ TO/ CORT ANT LEGATIONS/DERBYSHIRE ENG,1856/ DIED/  SEOUL JULY,1890/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그는 1885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1890년  7월 여름에 순교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묘비에  적어놓았다.  헤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선교에 대한 일념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죽어갔다.  한국의 복음은 이런 사명자들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들의 묘비에 적으면서  순교의 길에 들어갔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D. 언더우드,  "주님 !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G.A. 테일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B. 헐버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켄드릭-이곳에는 선교사들을 따라 왔다가 부모와 함께 순직한 가족들이 함께 있으며, 채 꽃피우지 못하고 부모도 함께 한국에 묻힌 아이들도 많다 이곳에 한국 복음의 선교를 위하여 숨진 사람들의 묘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신분별, 국적별 순교자

구분

어른

어린이

선교사

75

36

111

선교사,

군인 아닌 사람

46

10

56

미군부대와

관련된 사람

26

38

64

소속 불명

44

31

75

한국인

15

11

23

 

국명

인원수

국명

인원수

미국

265

캐나다

7

백러시아

54

스페인

4

영국

30

벨기에

4

프랑스

25

덴마크

3

한국

20

일본

1

호주

12

총계

425명

숫자에는 표지없는 무덤 80여기와 어린이는 포함되지 않았음

 

양화진 홍보관(2008.3.27 개관)


2008.3.27. 개관한 양화진 홍보관은 재)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및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그리고 마포구청이 함께 건립하였다.  "양화진홍보관’과 1층 ‘양화진홀’은  “조선의 밀알이 됐던 선교사들을 본받아 앞으로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빛으로 거듭나도록 도와 명실공히 기독교 최대의 성지가 되도록 함”에 개관 목적이 있다. 이재철(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목사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양화진홍보관에 대해 “피선교국이 선교사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00% 자비로 보존, 관리하는 세계유일의 선교사묘원이며 세계최초의 전시관”이라 소개하며 “앞으로도 100주년기념교회는 묘지기 사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입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좌)와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기념관 내부 제단       (출처- http://www.kmc.or.kr/)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후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묘지,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100주년 기념 교회)

 

외국인 묘지 배경

 

양화진 이야기

 

100주년 기념교회 봉헌석

 

최초 매장자 헤론 선교사

 

존 헤론 선교사 묘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선교 120주년 기념비

 


한국 감리교 최초 선교사 아펜젤러 추모비

 


아펜젤러 선교사 아들 묘(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 추모비(배재동문)

 


아펜젤러 소개

 


아펜젤러 추모비 뒷면

 

아펜젤러 추모비 제막식, 서천앞바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장소가 그동안 알려졌던 군산 앞바다가 아니라 서천 앞바다에 있는 오세이도라 불리던 어청도 부근이라는 최근 교회사가들의 주장에 근거해 2006.6 아펜젤러 순직 104주년을 추모하며 감리교 충청연회 주관하고 서천군기독교연합회와 서천군이 공동으로 진행 중인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마량진에서 48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어청도는 1914년 이전에는 행정경계상 충청남도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세대 아펜젤라관, 사적 277호


스크랜튼 선교사(이화여대)

 


스크랜튼 소개

 


언더우드 선교사 일가의 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일가 묘역

 


언더우드 선교사 묘

 


언더우드 소개

 


헐버트 선교사 묘

 


헐버트 선교사 묘비

 


헐버트 선교사 소개비

 

대한제국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우다 강제추방까지 당했던 호머 헐 버트 박사(1863∼1949) 는 미국 버몬트주 태생으로 대한제국 초청으로 1886년 23세 나이로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해 교육분야 총책임자와 외교 자문관으 로 고종황제를 보좌했다. 헐버트 박사는 1907년에는 이준 열사 등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참석 할 수 있도록 면밀히 지원하는 등 항일운동을 벌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됐다. 그는 그 후 40여 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우리 정부 초청으로 8ㆍ15행사에 참 석하기 위해 내한했다 일주일 만인 같은 해 8월 5일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울 선교사

 


셔우드 홀 선교사

 

베텔 선교사

 

루비 켄트릭 선교사  묘지

 

"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 Korea should have them all ."

- Ruby Kendric -

"내게 줄 수 있는 천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루비 켄트릭

 

클라크(곽안련)선교사

 

클라크 묘지

 

캠벨 선교사(배화학당, 종교교회, 자교교회 설립자)

 

캠벨 선교사 묘지

 

테일러 선교사 묘지

 

감리교 하디 선교사 기념비 (윤춘병 감독, 신경하 감독 등)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의 남감리교 의료선교사로 1898년부터 함경남도 원산을 거점으로 강원도 북부에서 의술을 베풀며 전도를 시작했다. 그는 5년 동안 선교에 매진했으나 뚜렷한 열매를 남기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1903년 8월 24일부터 일주일 동안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 연합기도회를 인도하다가 ‘아무리 수고해도 성령의 임재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그는 8월 30일 원산감리교회에서 열린 주일예배에서 자신의 교만과 한국인들을 멸시했던 죄를 공개적으로 자복했고, 그의 회개는 곧 한국인들의 가슴에도 회개의 불을 붙여 원산 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그는 그 후에도 개성과 서울, 인천 등지를 순방하며 집회를 인도했고, 특히 1906년 8월 평양에서 그가 인도했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 연합기도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의 기폭제가 됐다. 그는 1935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한국에서 선교할 당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두 딸이 서울 양화진 묘역에 묻혀 있다

 

선교사 자녀들 묘역

 


선교사 묘지들

 


선교사 묘지들

 


선교사 묘지들

 

양화진 외국인 묘지 공원 (한국 기독교 선교기념관)

 

서울 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 8/ 명칭은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되어있다. 1893년 10월 24일에 개설이 허가 되었으며 면적은 13,224 제곱미터이다. 무덤은 514 여기가 있으며, 최초의 피장 선교사는 존 헤론이다. 이곳에는 초대 선교사와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구미 각국의 저명인사 500여명이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 공원 묘역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성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선교정신과 숭고한 희생 봉사의 업적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후세에 전승키 위하여 1985년 1월 14일 재단법인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제 5차 총회에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한국 기독교선교회관을 건축키로 결의하였다. 이 사업이 1985년 6월 28일 선교기념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86년 8월 20일 건조물 및 토목공사가 완료되고 9월 10일 조경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선교 기념실, 자료실, 대강당, 외국인 연합교회 예배처소, 종, 소회의실 교육실, 목회자실, 부속실, 친교실,식당, 기관실, 다목적실, 야외 행사공간, 주차장, 관리인 숙소, 휴게실이 구비되어 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 한국은 미개한 상태에 놓여있었다.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복음과 또한 문명화와 근대화 사역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는데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언더우드,헤론, 감리교 의료 선교사 겸 목사 스크랜톤이 일하였다. 처음에는 알렌이 와서 일하였으나 밀려오는 환자를 혼자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가 약국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1885년 5월에 내한한 스크랜톤과 함께 같은 해 6월 헤론이 가담하였다. 부족한 약품들, 의료 재료들로서는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전염병은 창궐하였다. 한국인들은 위생관념이 희박하여서 물을 끓여먹지 않아서 온 가족과 동네가 몰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헤론은 내한한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렸다. 그는 그곳에서 그렇게 순직했다. 이러한 제중원은 후에 미국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가 1만 5천 달러를 희사하여 지금의 서울역 앞 대지를 구입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이름을 갖게되고 세브란스병원이 생겨났다. 헤론은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료 선교에 뛰어 들었고 그는 그렇게 이질에 걸려 질병으로 숨져갔다. 그는 5년간이라는 짧은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뼈를 묻었다. 그는 조국보다도 자신의 가족 보다도 더욱 한국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JOHN W. HERON, MD/who came to Korea IN  1885/MISSIONARY PHYSICIAN/ TO/ CORT ANT LEGATIONS/DERBYSHIRE ENG,1856/ DIED/  SEOUL JULY,1890/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그는 1885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1890년  7월 여름에 순교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묘비에  적어놓았다.  헤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선교에 대한 일념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죽어갔다.  한국의 복음은 이런 사명자들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들의 묘비에 적으면서  순교의 길에 들어갔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D. 언더우드

"주님 !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G.A. 테일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B. 헐버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켄드릭-

 

이곳에는 선교사들을 따라 왔다가 부모와 함께 순직한 가족들이 함께 있으며, 채 꽃피우지 못하고 부모도 함께 한국에 묻힌 아이들도 많다 이곳에 한국 복음의 선교를 위하여 숨진 사람들의 묘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봉의 높이도 높지 않다.  마치 예수님께 책망받던 바리새인들의 비유와 같이 평토장한 무덤같아보여 쓸쓸하다. 화려하지 않게 잠들어 있는 이들의 영혼은 아름답기만하다. 그러나, 이들의 휴식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이 땅에서의 안식이다. 그러나 이들의 안식이 평온하지 만은 않은 듯 싶다. 전쟁과 그 포화의 흔적들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비석을 대신한 돌 십자가들이 모진 세월속에서 십자가 조차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파손되어 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렇게 받았으며 또한 우리보다 더욱 한국을, 한국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주어졌다. 이 사랑의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도표들은 우리가 누구이기에 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며 복음의 빚진 자임을 느끼게 해 준다.


신분별, 국적별 순교자

구분

어른

어린이

선교사

75

36

111

선교사,

군인 아닌 사람

46

10

56

미군부대와

관련된 사람

26

38

64

소속 불명

44

31

75

한국인

15

11

23

 

국명

인원수

국명

인원수

미국

265

캐나다

7

백러시아

54

스페인

4

영국

30

벨기에

4

프랑스

25

덴마크

3

한국

20

일본

1

호주

12

총계

425명

숫자에는 표지없는 무덤 80여기와 어린이는 포함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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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성지

 


절두산 성당

 


절두산 내부

 


절두산 내부 강단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부활의 집(납골당)

 


박해시대의 형구들

 


박해시대 형구틀

 


절두산

 


마리아 상

 

1858년 성모님이 프랑스 루르드 동굴(마사비엘)에서 발현하신 것을 기념하여 세계 각국에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이 만들어졌다. 절두산의 성모동굴은 1978년 만들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 한국 방문 기념상

 


순교자 기념상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예쁜(마리아), 아들 봉익을 형상화한 듯한 이 순교자상은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몸통 위에 받쳐놓은 모습으로 처절한 순교광경을 연상시키고 있다. 1972년 최종태 교수가 제작하였다.

좌대 1.7m, 본상 2.2m

 


십자가의 길 묵상비(제 1처)

 

2001년 11월 1일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이 십자가의 길에는 교회에서 통용되는 기도문의 첫부분을 새겨넣었으며, 이곳에서 순교한 신앙의 선조들이 바쳤던 옛 기도문 '셩노션공'의 머리부분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절두산 순교성지

 

오성바위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김대건 신부 정원

 

김대건 신부 동상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 맞아 기념 제작된 것으로, '애국선열조상 건립위원회‘가 건립한 것으로 홍익대 전뢰진 교수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뒤에 가톨릭 대학교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 지금의 동상이 자리하게 되었다.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

 

순교성지 안내판

 

순교자 기념탑

 

순교자 기념탑은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이의송 가족을 비롯한 28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2000년 9월 20일 세워졌다. 순교기념비 주탑에는 형틀을 상징하는 조형물 아래 16명의 순교자들 모습이 새겨져 있고, 우측탑에는 절두된 머리가 올려져 있어 절두산의 지명을 암시하며, 주탑과 함께 33명의 순교자 모습이 새겨져 있다. 좌측탑은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절두산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형구 돌

 

1976년 연풍 성지를 개발할 때 두 개가 발굴되어 하나는 그 자리에 두고 다른 하나는 절두산 순교성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그 후에 또 하나가 발굴되어 현재 연풍 성지에 형구돌이 두 개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 절두산에 있는 형구돌의 크기는 둘레3m, 앞구멍 지름 30Cm, 뒷구멍 지름 6Cm, 구멍의 앞뒤 거리 30Cm로 원추형이다. 형구돌은 교수형을 집행했던 형구로 가운데 구멍으로 밧줄 올가미를 만들어 넣어 죄인의 머리에 올가미를 씌우고 반대편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머리가 돌에 부딪쳐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곳에서는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는데, 이곳 연풍에서는 형구돌을 사용해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은언군 묘비


정조의 이복형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은언군이 강화도로 귀양가 있는 동안 강완숙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왕족이면서 사학에 빠졌으며 주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순교하였다(1801년 3월). 이후 신자가 아닌 은언군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송마리아의 손자가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사면되었고, 은언군의 묘비도 세워졌다.

 

박순집 성인 묘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현양비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로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범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자기 문중 산인 관악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바오로는 10월 17일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을 이어 부친 일가족 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고개에 안장, 순교자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후 박해가 잦아들자 선교에 앞장서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부친 순교자 박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박순집에 의해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중앙성당이 세워져 있다.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하다

 

성 남종삼 동상

 

남상교는 남종삼 성인의 부친으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진사에 급제하여, 현풍현감, 충청 목사를 역임하고 퇴관 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남종삼은 남상교의 아들로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영향아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지속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프랑스인 성직자를 통해 막아보려 하였으나 대원군이 급선회함에 따라 병인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남종삼 순교사적비

 

해운당대사의 징지비(주어사)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천진암 주어사를 순례하던 중 발견-1960년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프란치스코)에 의해 발견됨-한 주어사 터 표지 비석으로, 海雲堂大師義澄之碑(해운당대사의징지비)라 새겨져 있다. 이 비가 새워진 연대는 1698년이며, 비신 높이는 91cm, 폭은 33cm이다.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척화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박물관  전시실 내부

 

박물관 입구 모자익

 

제 1전시실


1구역 ..... 천주교 수용과 자생적 신앙공동체 (1602~1801년)

외국 선교사들은 16세기부터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하였지만, 조선에는 아직 신앙이 전해지지 않았다. 17세기에 들어와 중국을 왕래했던 조선의 사신들이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서양 종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조선에서는 남인계열의 유학자들이 서양 학문과 서양 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이 싹터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생적 교회로 출발하였다.

2구역 ..... 천주교 박해와 교회의 발전 (1801~1866년)

천주교가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종교로 발전하자 조선의 정치.사회.사상적으로 마찰을 빚으며 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 신자들은 교회 재건과 사제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고, 김대건 신부가 조선인 최초로 사제로 서품되면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3구역 ..... 한국의 성인.순교자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 동안 끊임없는 박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흘렀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이 땅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보이지 않는 씨앗이 되어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천주실의

 

중국 명나라 때인 1593- 96년에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 리치가 편찬한 한문으로 된 책으로 중국과 서양학자가 질문 대답하는 대화체 양식으로 기술된 천주교 교리서이다. 1603년 북경에서 간행된 후에 전 한문 문화권으로 전파되어 갔고 한국 초기 교회 창설 과정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천주실의

 

마태오 리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 교회의 창설자이다. 그가 저술한 "천주실의"를 비롯한 서적들과 그의 보유론적(補儒論的) 선교방식은 천주교의 조선 전래에 큰 힘이 되었다

 

주교요지

[주교요지]의 목판본이 간행되기 이전 박해시대 신자들은 이를 필사하여 읽었다

 

주교요지 목판본 

[주교요지]는 정약종이 한글로 쓴 최초의 교리서이다. 필사본으로 전해져서 읽혀지던 이책은 병인박해 직전인 186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그 목판본 판목들이 남아서 박해를 이긴 신앙을 증언해 주고 있다

 

강세황의 천주당 시문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은 당대의 예단(藝壇)의 총수로서 시서화(詩書畵)에도 뛰어났으며 감식에도 출중하여 정조의 아낌을 받았다. 그는 칠순을 맞이한 청국 건륭황제를 축하하기 위해 조선 왕조에서 파견한 천추사(千秋使)의 부사(副使)로 북경에 파견되었으며 북경에서 천주당을 견문하고 한편의 시를 지었다. 김상기(金庠基) 박사 기증품

 

황사영 백서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는 1801년 신유박해 직전에 가장 활동적인 교회지도자였다. 그는 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 배론의 교우촌 토굴에 몸을 숨기고 조선 교회의 박해 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을 비단에 써서 이를 북경교회로 보내려고 했다. 비단에 쓴 편지이므로 이를 <백서(帛書)>라고 한다. 황사영 백서는 북경교회로 보내기 전 사전에 압수되었다 이 문서의 크기는 가로62cm, 세로38cm 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여진 것인데 모두 13,384자에 달한다. 원본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중이다

 

이승훈의 간찰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그해 9월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는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수광의 간찰

이수광(1563-1628)은 3차에 걸쳐 사신으로 북경을 왕래하면서 서양 학술을 [지봉유설]에 소개하였으나 [天主實義(천주실의)]나 [交友論(교우론)]등 천주교 서적을 소개하였다

 

서적 및 유품들

천주교 수용과 자생적 신앙공동체 (1602~1801년)

 천주교 박해와 교회의 발전 (1801~1866년)

한국의 성인.순교자 , 김대건 신부 성광(머리털, 치아 등 신체의 일부

 

제 2전시실


4구역 ..... 한국 천주교회의 근.현대사 (1866~1984년)

조선은 19세기에 잇따른 문호개방의 격동기 속에서 1886년 한불조약으로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자유가, 1905년에는 비로소 일반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공인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 침략과 남북 분단이라는 또다른 과제를 짊어지게 되었다.

5구역 ..... 역대 서울대교구장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된 이후 임명된 역대 서울대교구장을 통해 살펴보는 한국 천주교회사

6구역 ..... 전통 인형으로 빚은 한국 천주교회사

인형 장인, 임수현이 한국 천주교회사 12대 사건을 80여종의 인형으로 형상화하였다.

7구역 ..... 200주년 기념대회와 103위 성인 시성식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대회와 103위 성인 시성식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103위 성인은 김대건 신부와 평신도 92명,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주교 3명, 신부 7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8구역 ..... 박해시대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제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 이전에는 사제와 신자가 벽면의 제대를 향하여 미사를 드렸기때문에 사제는 신자들에게 등을 보이고 미사를 집전했으며, 라틴어로 된 경문을 읽었다.

 

충남 해미 순교지 호야나무로 만든 구유, 제2 전시실 입구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방문시 사용하던 성구들, 200주년 기념대회와 103위 성인 시성식

전통 인형으로 빚은 한국 천주교회사 

 

 

절두산 성지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로서 현재 서울 양화대교의 북단쪽에 있다. 한강변에 우뚝 선 절두산 기념 성당은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되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함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9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섰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성당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성인들의 유해"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하다. 특히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하다

절두산 홈페이지

http://www.jeoldus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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