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1859-1916, Horace G. Undewood)
【언더우드의 생애】
언더우드는 정치적 권한을 가진 행정가라 보다는 선교사로서 활동하였고, 한국에서 여러 가지 공로를 남겼다. 1894년 찬송가를 간행하였고, 또 성서를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1916년 9월 12일 사망하기까지 한국의 교인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언더우드의 사상】
언더우드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그가 가진 초교파 주의이다. 이것은 그가 장로교의 선교사이면서도 장로교파의 신학을 하지 않고, 화란계 개혁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한 것에서도 엿볼수 있다. 그의 초교파주의는 교파를 따지지 않은 그의 왕성한 활동에서 가장 확실하게 보인다. 그는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도 여러차례 일했다.그러나 그의 이런 초교파주의는 그의 신학사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가 선교활동을 하던 당시의 한국 국내 상황이 각 교파들을 구분하여서 진행할 정도로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 이전에 알렌이 들어와 활동하였던 당시는 선교라는 것이 엄격히 금지된 상황이었고, 알렌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교를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언더우드와 갈등을 일으킨 것을 볼 수 있다. 언더우드가 활동하던 그 시대에도 분명히 한국민들을 서양의 선교사들을 각기 다른 교파와 신학을 가진 존재들로 보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선교사들을 각 교파대로 구분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서양 종교를 믿는 외국인들로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각 교파를 구분해 따로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 효과도 거의 없을 것이고, 바람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초교파적인 분위기는 언더우드만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전체 선교사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언더우드가 초교파주의라고 해서 그의 신앙이나 그의 선교가 개방적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의 선교의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그는 조금의 융통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알렌과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렌은 언더우드나 헤른이 내한하기 이전 이미 자신의 신분을 공사관 공의로 감추고 입국하였고, 갑신정변이라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부상한 민영익을 치료함으로서 제중원을 차렸다. 알렌을 한국 내에서의 선교가 드러내놓고 행해지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먼저 정치적 실권을 잡은 자들과의 교류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그러한 정치적인 교류보다는 일반 민중들에게 직접적인 선교를 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자연히 이들은 서로 갈 등을 일으킬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세력과의 연개를 볼 때에 알렌은 보수 정권과 줄이 닿아 있고, 언더우드는 이미 일본에서 개화 혁신 세력과 가까웠다는 역학 관계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 흥미있는 것은 보다 자유로운 선교적 자세로 폭을 넓히려고 했던 알렌이 보수파와 관계되고 비교적 복음주의이며 열정적 선교의 의지를 보이던 언더우드 등이 정치적으로는 개혁파와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다. 이는 전적으로 선교사들의 성향적 몫이라고 하기 보다는 당시 한국 정부의 정치 환경에 좌우된 측면이 아닐 수 없다. (순간의 빛 흩어진 이야기, 서정민 124)
언더우드의 보수적인 측면은 헤른과의 갈등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언더우드가 신혼여행차 의주에 갔을 때, 세례 지원자 33명에게 압록강에서 세례를 베푼 일이 있는데, 이는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는 말로 널리 전하는 일화이다. 그러나 분명히 1889년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공개적인 기독교 세례는 국법이 금하는 일이었다. 이에 서울의 헤론은 정동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한국인 신앙 공동체를 해산 시키는 조치를 취해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을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이 일에 대해서 유동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과 같이 일하고는 있지만 선교사로서 자신이 감당하여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양보하는 입장을 전혀 취하지 않고 있다.
선교사들 간의 갈등은 우선 알렌과 헤른 사이에 일어났다. 우선 헤른은 테네시 주립대학을 졸업하여 한 때 이 의학부에서 교수를 하였다. 이 때문에 헤른은 알렌이 제중원에서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알렌이 자신의 위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헤른보다 9개월 먼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갈등 속에 언더우드가 끼어든 것이다. 언더우드는 자의식이 강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지배욕이 강했으므로 명령이나 남의 충고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 오직 하나뿐인 칼빈주의 목사라하여 다른 이들과 의견이 맞지 않을 때에는 자기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고 떠들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볼 때 언더우드의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선교방식은 그의 성격과도 잘 들어맞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목사였지만 한국 정부에 대한 공식 입장은 교사였다. 때문에 그들의 선교는 영어를 배우러 찾아 온 사람들에게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학교를 건립하였다. 언더우드는 고아원 형태로 교육사엽을 시작했다. 제중원에서 역시 영어를 배우러 찾아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던 언더우드는 1886년 1월부터 고아원 설립에 대한 구사을 가졌는데, 고아나 극빈자 아동들을 수용해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술학교 형태를 구상했다. 이것이 소위 '언더우드학당'이라고도 불리는 고아원 학교였다. 이 학교는 '예수교 학당', '민로아 학당', '구세학당'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에 경신학당으로 정착하여 오늘의 경신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선교 초기 그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그는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시 기독교 전파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언더우드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북한지방으로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가서 그 곳에 있던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의주에서 세례문답을 통과한 33명의 남자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땅에 가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에비슨, 무어, 레이놀즈, 테이트, 리 등이 언더우드의 영향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국선교사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언더우드 타자기의 소유자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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