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선교의 역사

직업 선교는 현재의 자비량 선교의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직장 선교와 직업 선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직장 선교는 국내외의 직장과 관련된 선교라면 직업 선교는 넓은 의미의 직장 선교에 해당되지만 특히 해외에 파송된 직업 선교사들의 선교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 둘 다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복음 증거의 사명을 다하는 것은 같다고 할 수 있으나 직업 선교는 현재의 자비량 선교의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직업 선교의 내용을 그대로 직장 선교에 적용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직장 선교의 역사가 일천하며, 직업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도 직장 선교의 방향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득수 선교사가 편역한 「직업 선교의 역사」와 윌리엄 J. 댕커의 「역사 속에서 본 비즈니스와 선교」를 중심으로 직업 선교의 역사를 살펴본다.

1. 동방교회의 직업 선교사

주후 339년부터 448년까지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을 때 수십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추방당했는데 대부분은 평신도였다. 그들은 성경에 능통했으며, 자신의 직업을 갖고 자비량했지만, 그들의 주요한 임무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 분야에 관해 다년간 연구해 왔던 존 스튜어트(John Stewart) 박사에 의하면 그들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했었던 어떤 교회보다도 더 많은 선교사를 지닌 선교 지향적인 교회’를 세운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한다.

2. 동인도 회사의 사목들

동인도 회사가 건립되어 무굴제국의 초대 대사로 파견된 토마스 로우 경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현지 피고용인의 전도를 위해 목사를 동반하였다. 이후 동인도 회사는 현지 피고용인들을 위해 사역하고자 하는 사목(社牧, Chaplain)들을 지속적으로 임용했다.

3. 모라비안의 직업 선교사들

모라비안들은 이교도들을 향한 전도가 교회의 의무라는 생각을 실천에 그대로 옮긴 최초의 개신교도들이었다. 모라비안들의 선교원리는 자비량 선교와 주님을 위한 이윤 창출이었다.
서인도 제도 출신의 한 흑인 노예로부터 성 도마(St. Thomas) 섬의 원주민들이 처해 있는 영적이며 육체적인 비참상에 대해 들었던 모라비안들 중 두 사람의 기술공이 자비량 선교사로 자원하여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에 에스키모인들과 교역하면서 얻는 수입만으로 사역을 꾸며 나간 사역자등 아메리카, 수리남등 세계 여러 지역으로 직업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모라비안 교인들은 선교 임무의 크기에 비해 지원되는 헌금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직업 선교를 취해야 될 필요성을 주장했다. 모라비안 교인들은 모두가 다 선교사이며, 일상 직업 생활 속에서도 복음 증거를 해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직장에서도 그들은 신앙적인 삶을 살았다. 예를 들면 수리남의 크리스토프 켈스텐 회사는 북미보다 먼저 퇴직 연금, 근로자를 위한 의료 보험 제도의 시행, 직업 훈련 과정의 개설등 근로자들을 도왔을 뿐 아니라, 매일 작업은 예배 시간부터 시작했다. 1926년에 수리남의 모라비안 교회에는 1만 3천 명의 성도가 생겼다.
모라비안들은 선교와 경제활동이 각각 그 자체의 내적인 역동성를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의 규칙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 두 기둥 사이의 연결을 끊어 버리는 대신에 그 긴장과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를 나타내었다. 그들은 선교와 경제활동이 제대로 연합되지 않을 때에 어려움이 파생되는 것을 배웠다. 사역에 있어서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선교와 경제를 분리하지 않되 그 둘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세계 선교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4. 스위스 바젤 선교단의 직업 선교사들

18세기 초에 경건주의 신앙운동의 중심지였던 바젤에서 생겨난 바젤 선교단은 대부분 기능공이었으며 무역에 숙달한 경건한 젊은이들을 ‘선교 연구소’에 등록받아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조건 없이 베푸는 문화를 확산시키며 평안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졸업생들의 의무”였다.
바젤 선교단(the Basel Mission)은 선교부를 설치할 수 없는 지역들에서는 우선 그 사무 직원들이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무역부를 설치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바젤 교역 회사는 교역 장소에서 항상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최고 자질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을 파송하려고 노력하였다.
윌리엄 J. 댕커는 모라비안과 바젤 선교단의 특성과 조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세계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경제활동이 교육 및 의료 사역만큼이나 선교사역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모라비안과 바젤은 사람들을 단순히 기능공으로 훈련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실생활에서 선교 헌신자가 되도록 훈련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
1. 두 그룹은 경제 활동을 선교의 보조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본질적인 부분으로 보았다. …
1. 모라비안과 바젤의 상업활동에 대한 최초의 추진은 크리스천 사업가들에게서 나왔다.
1. 두 그룹은 선교와 경제활동이 완전히 분리되어선 안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밀한 연결이 있는 것도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
1. 모라비안과 바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열정적으로 따르고 경제활동의 이윤을 온전히 그분의 목적을 위해 드리려는 헌신된 크리스천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1. 두 그룹은 물품, 서비스 그리고 이윤의 생산자로서 역량 있는 평신도 크리스천들을 안수 받은 선교사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겼다. 두 그룹은 성직주의를 최소화했다.
1. 바젤은 산업 및 상업 선교사들을 위한 단기 훈련을 비롯한 공식적인 훈련을 강조했다. 모라비안은 기능공 선교사들의 공식적인 훈련은 다소 부족했지만, 모라비안 공동체의 경건한 삶 자체가 해외 선교사역에 대한 영적이고 실제적인 좋은 준비였다.”



5. 현대 선교 운동의 아버지가 된 구두 수선공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비용을 벌기 위해 구두를 만들었던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인도에서 신약 성경을 23개의 다른 방언으로 번역하는 등 현대 선교 운동의 아버지라는 불러진다. 그는 농장의 감독자, 교수등의 직업을 가지면서 복음 증거 사역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팀에도 교사인 죠수아 마쉬맨과 인쇄업자인 일리암 워드를 합류시켰다. 그는 직업 선교에 대해 자비량 정신을 선교 활동에 필수 불가결한 원리로 삼았다.

6. 학생 자원 운동을 지원한 직업 선교사들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에 의해 소집된 대회를 통해 시작된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r Movement)은 “우리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시키자.”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이 깃발 아래 모여든 2만 명 이상의 남녀들이 실제적으로 선교지로 나갔다. 1906년에는 기독교 실업인들이 모여 평신도 선교 운동을 결성하게 되었으며, 젊은이들을 파송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였다.

총신대학교 홍철희 
<출처: 중국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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