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들 산다는 게 참으로 간고하단 말입니다.

중국 농가에서 4년째 살고 있는 노부부를 만나다

- 계속되는 탈북자 강제 송환 … 끌려가는 버스에는 조선8도 사람이 다 있더라
- 늙은이들에게 이 쌍간나 개간나를 예삿말처럼 한다
- 조선에서 라디오를 갖고 있다는 것은 ‘정치적인 대상’
- 국가의 승인 하에 백도라지(양귀비)를 키운다


조선족 농부가 자신의 먼 친척 뻘 되는 북한 사람들을 숨겨주고 있는 소식을 들었다. 인근 마을에 사는 조선족의 소개로 저녁 무렵 그 집을 찾았다. 택시에서 내려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옷차림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때가 없었다. 누추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화려해서. 조그만 시골마을이다 보니 이방인이 찾아오면 모두 ‘누군가’하고 쳐다보는데, 그런 차림으로 탈북자들이 머무르는 집을 찾아간다는 것은 살인행위나 다름없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마을을 몇 바퀴 돌았다. 가로등도 없는 이곳은 해가 지자마자 한치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고 대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부부였다. 이제 환갑을 넘긴 노부부. 아주머니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필자를 반겼고, 누워있는 아저씨는 애써 몸을 일으켰다. 좁은 방안에 부뚜막이 있고 세면시설도 있는 전형적인 중국 농가의 풍경이다. 이들은 중국에 온지 4년째 되었다. 고향은 함경북도 길주군. 그곳 과수농장에서 일했다. 주로 배를 기르는 농장이라고 한다.

인터뷰 내내 아주머니는 혹시나 옆집에 얘기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고, 그럴 때마다 아저씨는 “일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처음에는 필자를 경계하는 기색도 역력했으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곧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중국으로 나왔으나, 혹시라도 친척들이 화를 입을까봐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렸다. 아저씨는 꽤 오래 전부터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몰래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남한 실정을 어느 정도 알고, 정치적인 견해도 청산유수처럼 이야기했다.

“조선이라는 게 말이야, 정치가 무서운 나라야. 다른 나라는 잘못을 하면 본인만 처벌을 받는데 조선에서는 대를 이어, 그 친척들까지 처벌을 받는단 말이지. 내가 잘못하면 내 친척은 당 일꾼으로 못쓰고, 자식도 대학교 같은 것도 못 가지…. 조선의 16호, 거 정치범 수용소라는 것 말이야, 거기선 사람이 개 돼지나 같지. 오직 일할 권리밖에 없단 말이야.”


- 요즘 탈북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간다는데 여기는 어떻습니까?
“이번 4월에만도 우리 곁에서 5명 잡혀갔습니다.” (아주머니)
이때 옆에 있던 조선족 친척이 거들었다.

http://www.dailynk.com/korean/keys/2002/26/04.php
“내가 버스로 다섯 대 빽빽하게 실려 가는 것을 바로 옆에서 봤습니다. 중국공안이 끌고 갔다가, 온성 국경에서 북한 보안원이 나와서 차를 바꿔 타고 데리고 갑디다. 거기에 조선 8도 사람이 다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함경북도나 양강도 사람이 가장 많습니다.”
아주머니가 “요새는 탈북자들도 저절로 자수하면 다 용서해 준다는 소문이 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개소리지. 조선 정치라는 건 변할 수 없어. 다 개소리야.”라고 딱 잘라 말했다.

- 잡힐 뻔한 적은 없었습니까?

“없기는…, 여러 번 잡힐 뻔했습니다. 작년 6월에는 집에서 밥 먹는데 밖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나 조용히 내다보니 우리집 앞에서 공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재빨리 뒤로 나와서 변소에 숨었습니다. 우리 집으로 공안이 들어 닥쳤는데, 휴….” (아주머니)

“작년에 호구 검사한다고 색출을 쎄게 했지. 한 개 마을을 포위하고 토끼잡이 식으로 했어. 그때 우리도 파출소에 간 적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보증해 줘 다행히 풀려났어.” (아저씨)

아주머니는 “그래도 함경도 사람들은 연변 말투를 쉽게 배울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한국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중에 연변말투를 흉내내는 개그맨이 있는데, 사실 그의 말투는 연변보다는 평양 쪽에 가깝다. 연변 말은 북한 말과 상당히 다르다. 연변 사람들 틈에 북한 사람이 끼어서 이야기하면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함경도 말은 그런 대로 비슷한데, 평안도 말은 서울 지하철에서 부산사람이 핸드폰 통화를 하는 식이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중국에서 언어문제로 2중고를 겪는다. 한족말(중국어)을 배워야 하고, 말투도 연변 식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뒤이은 인터뷰에 등장하지만, 그래서 탈북한 지 5-6년 정도 된 사람들은 완전히 연변사람이 되어 있다.

- 조선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조선에서 일하셨던 농장은 어느 정도 규모였습니까?”
“상당히 큰 농장이죠. 한 2000정보 정도 된다 말입니다. 한 정보는 가로 세로 100미터 정돕니다.” (아저씨)

- 배를 길렀다는데, 북한에서도 배를 먹는 사람들이 있나요?
“다 수출하고, 도내 각 기업소에 보내고…. 거기는 배가 간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배를 주고 기름 받고 비료 받고 그럽니다. 6월말부터 감자가 나는데 그거 한달 먹으면 떨어집니다. 그때부터 옥수수 날 때까지, 그간에는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손가락 두 마디 만한 크기를 내보이며) 그때 배가 이만하단 말입니다. 그 배를 밤에 몰래 뜯어다가 삶아서 먹습니다. 그것도 숨어서 먹어야 하는데, 맨날 배 삶아낸 물만 먹다보니 나중에는 혓바닥이 갈라져서 먹지도 못합니다.” (아주머니)

“조선에 나무껍질 성한게 없지.” (아저씨)

“그럼, 그건 사실입니다. 나무껍질이라는게 아무리 삶아도 딱딱합니다. 그럼 두꺼운 부분을 돌에다 대고 두드리면 솜처럼 부드러워 집니다. 거기에 옥수수 가루 섞어서 먹습니다. 그걸먹은 아이들은 똥이 돌처럼 굳어져 나오는데, 우리 손주가 영감에게 ‘할아버지 나 똥 누는데 걸려서 안나와’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주머니)

“풀을 끓여 먹어도 곡식을 조금이라도 섞어 먹어야해. 아니면 된장이나 소금이라도 좀 풀던지. 그런데 그것도 없는 집이 많단 말입니다. 우리 마을에 평양에서 추방되어 온 집이 있었는데, 그 집도 굶어 죽었습니다. 그 집 딸이 있었는데 1년 8개월 된 게 서지도 못했단 말입니다. 한번은 도대체 이 집이 뭘 먹나해서 살펴보니, 물에 땅콩 껍질, 두부 찌끼 조금 넣고 휘젖고 있더란 말야…. 그렇게 끓여서 아이를 먹였으니 영양실조 걸려 안 죽었겠나. 우리도 먹을 것이 없으니 어찌 도울 방도가 없었지.” (아저씨)

“우리는 우리 손주, 개구리 먹여 키웠습니다. 조선에서는 인민군대 지원하느라고 세대 당 1마리씩 돼지 키우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돼지 줄게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개구리 잡아 뒷다리 잘라서 껍질 벗겨 그거는 아이 주고, 개구리 앞부분은 돼지 먹였습니다. 그거 먹이니까 애가 좀 나아지고 일어서더란 말입니다.” (아주머니)

“그런데 개구리도 못잡게 합니다. 개구리가 논밭에 벌레를 잡아먹는 이로운 동물이니까 보호해야 한다고….” (아저씨)

“혹시 옥수수를 대패로 깎아 먹는단 말은 들어 봤습니까? 옥수수 채 익기 전에, 바로 먹을 수 없으니까 대패날로 밀어 엷게 깎아서 풀 넣고 죽 쒀 먹습니다. 옥수수 통째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잘 갈리지 않아 고생합니다.” (아주머니)

지면에 다 옮기기 곤란할 만큼 이들은 식량난 시기의 어려웠던 삶에 대해 쉼 없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잠깐 쉬며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면 다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라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저씨는 “조선 사람 사는 게 이렇게 간고합니다”라고 하면서 천장을 보며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아저씨는 병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다. 북한에 있었으면 딱 그대로 죽었을 판인데 중국에 와서 치료를 받아 그래도 좀 나아진 것이라 한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 도중 간간이 긴 한숨을 쉬었다.

- 식량난이 심화되고 인심이 흉흉해지면서 ‘조선에는 3가지가 없다’ - 즉 국정가격, 예의, 배급이 없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나이 든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고 막 대하고 그럽니까?
“일단 군대 애들이 너무 날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느 노(老)당원이 김정일에게 군대의 만행을 바로 잡아 줄 것을 건의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김정일이가 ‘나의 군대에는 그런 군대가 없다’고 말했다 합디다. 그러니 군대가 제일 날칠 수 밖에요.” (아저씨)

“일단 기차를 타보면 압니다. 나도 한번 라남에 간 적이 있는데 앉는 건 생각도 못합니다. 앉는 게 다 뭡니까. 머리고 뭐고 밟고서 막 기어올라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서로 쌍욕을 하고…, 그런 아수라장이 없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악밖에는 남지 않아서 보통 말하는 게 이 새끼 이 간나 이런 말밖에 하지 않습니다. 여행증 없이 다니다 붙잡히면 안전원이 ‘이 쌍간나 새끼 어디를 나다니냐, 집에 가만히 엎드려 있을 것이지’하면서 개간나 쌍간나 별난 욕을 다 퍼부어요. 웬 아매(할머니)가 여행증 없이 기차 탔다가 단속 됐는데, 안전원에게 사정을 해요. ‘아, 좀 가기요…, 가기요”하면서. 그래도 사정없이 잡아서 끌려가는데… 아… 그 늙은 아매에게 손주뻘한 놈들이 그러는데… 원. “ (아주머니)

“이제는 사람들이 상하(上下)라는 게 없어졌다 말입니다. 늙은이고 젊은이고 고저… 지금은 60동창이라고 합니다. 참 허…, 사회가 우리가 자랄 때하고 거꾸로 됐습니다.” (아저씨)

- 배급은 언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까?
“95년부터 영 아니 줬습니다. 94년도까지는 그래도 얼마씩은 줬습니다. 한 달에 열흘 분치만 배급을 줘도 일없겠는데 하나도 안주니 굶어 죽는 겁니다.” (아저씨)

“조선에 아주머니들이 말하는 게, 가마 안에 뭐 넣을 것만 있으면 걱정할게 없겠다고 합니다. 사정이 그렇습니다.” (아주머니)

- 굶어 죽는 사람을 봤습니까?
“나는 청진역에서 많이 봤습니다. 청진역에서 하도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으니까 한때는 국가에서 돈주고 시체 치워 가는 일을 하는 사람을 썼습니다.” (아주머니)

- 두 분이 사시던 마을은 몇 가구나 되었고, 그 중에 몇 명이 굶어 죽었나?
“우리는 한 부락에 30호가 삽니다. 그런 마을이 4개 모여 농장을 이룹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한 가족이 죽고, 건너 마을에서도 식구가 무리로 죽고… 6명이라던가? 아무튼 그래도 농촌이 낫단 말입니다. 농촌은 그래도 풀이라도 뜯어먹고, 훔쳐먹을 것이라도 있습니다. 그런 게 없는 도시나 공장에서 많이 죽었습니다. 내 아는 사람이 광산에서 일하는데 거기선 한달 어간에 21명이 죽었다고 합디다.” (아저씨)

“부지런한 사람들은 풀이라도 뜯어먹고 산단 말입니다. 내 친척네 같은 경우에는 12살짜리가 온 식구를 살렸습니다. 식구가 다 드러누워 있는데, 그 어린것이 혼자 나무를 해서 내다 팔아 식구들 먹였습니다. 30리길을 걸어서 키 만한 나무를 매오고…. 그렇게 움직여야지, 맥없다고 누워 버리면 그 자리에서 굶어 죽는단 말입니다. 며칠 굶으면, 아침에 일어나면 팔다리가 방바닥에 딱 달라붙은 느낌이 듭니다. 나도 여러번 경험했습니다. 그럴 때 일어나 움직여야지, 그냥 누워 있으면 죽는단 말입니다.” (아주머니)

“처음에는 집 울타리를 뜯어서 관을 만들었단 말입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없어서 그냥 갖다 묻었습니다. 무산 같은 데는 관이 없어서 작업반마다 관을 만들어서 그거 가지고 갔다가 시체만 묻고, 관은 다시 가지고 온다 합디다.” (아저씨)

- 배급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는지?
“사람들이 생각이 뻔해도 말을 못한단 말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안전부 보위부 끄나풀이 어디에 있을 줄 모르니까,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이 7, 80 먹은 노인들이 ‘이때까지 살면서 이렇게 살아본 적은 없다’고 말합니다. 왜정 때도 살아보고, 해방도 맞아보고, 전쟁도 겪어 봤지만 사람 굶어 죽는 건 처음 봤다고 혀를 찹니다. 소문으로는 미국놈, 한국놈들이 조선에 쌀 들어오는 걸 막는다고 합디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조선에서 1958년도에 나온 트럭이 ‘승리58호’입니다. 뜨락또르(트랙터)는 1962년에 나온 것을 ‘천리마 뜨락또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온지 40년이 넘도록 별로 개량되지도 않고 부속이 그 모양 그 꼴이란 말입니다. 과학이 이런데 인민생활이 어떻게 발전하겠나. 과학이 어떻게 발달하는지 세상이 변하는지, 이런걸 가르쳐 주지 않고 맨 날 허위 선전만 하고, 낼모레면 사정이 풀린다 풀린다 말만 합니다. 이젠 사람들이 그거 믿지 않습니다.” (아저씨)

- 그럼 조선 형편이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김정일이 말한게 있습니다. 나라를 개방하면 남의 노예가 된다고. 그래서 자기가 죽을지언정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저씨)

- 외국에서 식량지원을 한 후 배급상황을 확인한 적은 있습니까.
“함흥에 왔다고 들었습니다. 유엔식량기군가 하는데에서 화성군에 배급주는가 보자고 왔습니다. 배급소에서 배급 줬는데 나중에 다시 걷어 갔다고 합니다.” (아저씨)

설 명절, 4·15 같은 때에 하루분씩의 배급을 준다고 한다. 하루 분이라야 입쌀 한 킬로그램이 채 못된다. 필자는 그것을 며칠에 걸쳐서 아껴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북한 사람들은 “하루분 주면 한끼에 다 먹어 버린다”고 말했다. 속이 빌대로 비었기 때문에 일단 생기는 것만 있으면 한꺼번에 다 먹어 치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돌을 보고도 “옥수수 저만한 게 있었으면, 찰떡이 저만한 게 있었으면…” 말한다고 한다. 북한 대학생들은 그것을 ‘입말식사’라 한다. 말로 식사를 다한다는 뜻이다. 아주머니는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마냥 먹는 소리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속에서도 정치에 대해 말하면 잘못되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다. 화제를 주민생활에 대한 부분으로 바꿔보았다.

- 사시던 농장에 텔레비전은 몇 집이나 있었습니까?

“우리 농장에서 채색(컬러) 텔레비전을 갖춘 집이 3가구입니다. 당 세포비서랑 무슨 간부들 집이었습니다. 흑백 텔레비전을 포함하면 한 10여 가구 됐을 겁니다.”

- 냉장고는 있는가?
“전혀 없다.”

아저씨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아주머니가 “마을에서 소련 갔다온 한 집이 있는데 그 집에만 냉장고가 있다”고 거들었다. 보았냐고 물으니 “그냥 소문으로만 들었다”고 했다.

- 전화는 있는가?
“전화는 개인 집에는 근본(전혀) 없고, 혹시 있다면 군당 책임비서… 그런 집들에나 있을까? 일반 기업소 지배인이나 당비서 집에도 없고 기업소에도 없는 데가 있다.”

- 라디오는 있는가?
“(어처구니없는 웃음) 라디오는 없고 녹음기는 몇 집 있다. 국가 법에 라디오를 살 수 없게 되어있다. 라디오가 있다면 중앙방송으로 고정시켜야 하고 그것도 수시로 검열을 나온다. 듣지 말라는 소리나 같다.”

북한사람들을 만나서 집에 전화나 라디오가 있냐고 묻는 것은 무식한 소리다. 특히 라디오를 갖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대상’이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라디오를 훔치거나 밀수해서 갖고 있다 적발되었다 하자.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그냥 절도죄 또는 밀수죄에 해당하겠지만, 북한에서는 만약 그 라디오가 채널이 고정되지 않은 것이었다면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다. 그래도 일부 사람들은 악착같이 라디오를 뜯어고쳐 남한 방송을 들으려고 한다. 필자가 한국에서 만난 탈북자중 상당수가 “북한에서 남한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북한방송에 너무도 들을게 없어 호기심에 들었다가, 나중에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완전히 집을 밀봉해놓고 밤새워 듣는다는 것이다.

여기 아저씨도 그런 사람이다. 아주머니 말로는 “중국에서 조그만 라디오를 가져다가 그거 듣느라고 온 가족이 들락날락 했다”고 한다. 들킬까봐 안절부절못했다는 말이다. “어느 집에서 아이들이 라디오를 들었는데 채널을 한국방송에 맞춰 놓은 채 라디오를 껐나봐. 나중에 불시에 검열이 나와서 라디오를 트니까 한국방송이 나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었겠어? 어른이고 아이고 몽땅 붙들려 갔지.”

- 그때 들은 한국방송 중에 기억이 나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케이비에스방송(사회교육방송)을 듣고 있는데 성혜림이 소련에서 망명했다고 들었어요. 그때 처음 성혜림에 대해 알게 됐지. 방송을 통해 다 들었어. 그리고 또… 어느 나라에 가서 경제 일을 하던 사람이… 대사관 직원들 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녔는데… 한국으로 뛰었단 말이지. 한국 가서 진달래꽃 어쩌고 하는 책을 썼다는 내용을 들었다.”

여기서 ‘한국으로 뛰었다’는 사람은 북한의 외화벌이 전담업체인 대성경제연합회사 영국지사장을 지냈던 최세웅 씨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기쁨조 출신의 아내 신영희 씨, 두 자녀와 함께 1995년 12월 한국으로 망명했다. 아저씨가 말하는 책은 신영희 씨가 쓴 ‘진달래꽃 필 때까지’다. 북한 기쁨조의 실상과 자신의 탈출과정을 담고 있는 ‘진달래꽃 필 때까지’는 1997년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당시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KBS 제2TV를 폭파하고 작가들과 가담자들을 살해하겠다”, “우리의 보복은 무자비하고 단호할 것이며 한국방송공사 제2텔레비전 창작단을 가차없이 폭파해 버릴 것이며 그 존재 자체를 하늘로 날려버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방영이 끝나가는 무렵까지 북한은 평양방송과 한민전 방송을 통해 위협을 계속하였으며 1998년 1월 17일에는 “도발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이라는 제목 아래 “방영을 중지하지 않을 경우 그로부터 생겨나는 후과에 대해 책임지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른 건 용납해도 김정일에 대한 언급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북한 특유의 태도다. 하긴 김정일이 그 방송을 보고 얼마나 길길이 날뛰었을까. 이 사건으로 KBS 건물에 대한 비상경계조치가 내려지는 등 한참 시끄러웠다.

- 조선의 전기 사정은 어떻습니까?
“전기라는게 전혀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보게 되면 한 집에 몽땅 모이는데, 돌아다니면서 ‘전등 다 끄라’고 그래야 텔레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속에서도 텔레비전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니까, 화면이 요만해 졌다 커졌다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이없어 웃는단 말입니다.” (아저씨)

- 집에서는 어떻게 불을 밝히는가
“뜨락또르 기름을 얻어다가 불을 본다. 병 조그만 거 얻어다가 기름을 넣고 심지 꽂아 불을 밝힌다.” (아주머니)

- 그거 갖고 얼마나 불을 볼 수 있습니까?
“한 두어 달은 켭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 켜면 콧구멍이 새까매지기 때문에 오래 켤 수도 없습니다.” (아주머니)

“오래 켤 것도 없지요. 밤에 할 일도 없는데요, 뭐.” 아저씨의 이 말에 모두가 웃었다.

- 혹시 연탄을 때는 집이 있는가?
“연탄은 공급받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나무를 주로 때는데 산에 올라가서 풋나무(생나무)를 해서 땝니다. 내 동생네 보니까 남편이 직장에서 퇴근할 때마다 나무를 한 대씩 끌고 와서 그걸 팬단 말입니다. 생나무를 마른나무로 만들어내야 하는데, 밥가마에 물을 붓지 않고 그대로 나무를 넣어서 말립니다. 그래서 이튿날에 동생네 아이들… 열 다섯, 열 여섯 살 짜리들이 한 단씩 묶어 장마당에 가서 팝니다. 나무를 팔아 옥수수 가루를 사서 그날을 때운다고 합디다.”(아주머니)

“산이라는 산은 불이 나서 다 타버렸지. 불이 너무 나서 송이 밭도 거의 다 타버렸어. 모두 땅(뙈기밭)을 일구느라고 그랬는데, 그거 이제 다 어찌 살릴는지….” (아저씨)

- 군대(軍隊)는 어떻게 생활하는가.
“군대들도 통옥수수 먹으면서 생활합니다. 영양실조에 걸려서 집에 돌아오고, 돌아왔다가 회복되면 또 다시 나가고…. 그러니까 군대들이 강도가 된단 말입니다. 군대에 나가서 오래 있은 사람(고참)들은 그런 대로 나은데 신대원들은 까무잡잡하고 너무도 여위어서 견디기 어렵습니다. 훈련은 강하지, 먹을 것은 없지…, 견디지 못합니다.” (아저씨)

- 북한에서 공개총살 하는 것을 본 적은 있는가.
“물론 봤지. 청진에서도 총살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중국에서 들어온 까밸선(케이블 선)에서 구리를 파내느라고… 그걸 한 10미터 정도 파서 꺼내 팔았단 말이에요. 총살했어요.” (아저씨)

케이블 선을 꺼내 팔았다가 총살당했다는 말은 이전에도 여러 번 들었던 증언이다. 북한에서 케이블 공사는 일체가 유사시(전쟁시)를 대비하는 공사다. 케이블 공사 자체를 교도대를 위주로 군사훈련 하듯 진행한다. 그래서 이 케이블을 건드렸다는 것은 전쟁물자를 건드린 것과 다름없고, 곧 정치범으로 취급된다.

- 농촌에서도 총살을 하나요?
“농촌에서는 총살 안하고 군(소재지)에서 합니다. 나는 72년도에 무산에서 총살하는걸 직접 봤습니다. 무산 읍농장 아이들인데 중국 밀수를 하다가 총살당했다지.” (아저씨)

“나는 화성에서 총살당하는 거를 봤습니다. 자기 가시어머니(장모)를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가시어머니는 귀국동포인데, 그 노친한테서 돈 천 원을 뺏으려다가 안준다고 그러니까 가시어머니를 죽였단 말입니다. 농민시장에서 총살을 했습니다.” (아주머니)

- 총살은 어떤 식으로 하는가?
“시장 같은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거기서 총살을 합니다. 총살하기 일주일 또는 보름 전에 공시를 하지… ‘아무날 아무개를 총살한다’고 각 기업소마다 통보를 합니다. 자동보총수 3명이 나와서 한 사람에게 3발씩 쏘는데, 그러면 사람이 죽탕이 된다. 9발씩이나 맞으니…” (아저씨)

“그렇게 총살 하구서는 가족에게 시체를 주지도 않는다 합니다. 죽은 다음에 가마니에 말아서 자동차에 싣고 갑니다. 그 시체를 어디로 가져가는지도 모르죠.” (아주머니)

- 북한에서 마약을 많이 수출한다는 소문이 있다.
“나라에서 승인하는데요, 뭐. 조선에는 그걸 ‘백도라지’라고 합니다. 각 기업소에 과제를 내려보내는데, ‘너희 기업소는 백도라지를 얼마 심으라’는 식으로 과업을 줍니다. 수확할 때는 해당 기업소 사로청(‘김일성주의청년동맹’의 옛 이름) 위원장이 책임지고 진을 채취합니다. 말로는 이개(약담배)를 공해 상에서 판다고 합디다. 나는 한번은 우리 영감이 아파서 칼을 들고 나가 농장 약담배를 통째로 따온 적이 있어요. 치료에 쓰려고.” (아주머니)

- 통행증은 어떻게 발급 받습니까? 일반인들의 이동은 가능한가?
“통행증은 작업반에 휴가 신청 받고, 행정위원회 노동과에 신청 받고 보위부에 허가 받고… 그래야 여행증(공식명칭은 ‘여행 및 출장증명서’)을 발급합니다. 통행증은 종업원 350명 있는 기업소에 월(月) 몇 장, 이런 식으로 규정 매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본인 결혼식과 사망 이외에는 여행증을 낼 수 없습니다. 통행증을 얻기 위해서는 사망이나 결혼을 허위로 해야 하는데, 그래서 거짓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저씨)

“여행증은 군(君) 2부에서 발행하는데, 2부에서 각 기업소에 몇 장씩 나눠줍니다. (인민보안성 군안전부내에 2부가 따로 있다. 여행증 내주는 부서를 ‘2부’라고 부른다.) 기업소들에서 여행증을 발부받으면 자기네 업무상 필요한 양을 먼저 떼낸다 말입니다. 그거 떼고 나면 일반노동자에게 돌아올 게 없습니다.” (아주머니)

“평양시는 승인번호가 떨어져도, 역전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승인번호를 다 확인하고 객차를 통과시킨다. 평양시로 들어가는 통행증은 시뻘건 줄이 두 줄인지 세 줄인지 쳐 있단 말이야. 그 다음에…, 두만강 연변 지구로 나오는 거는 퍼런 줄이 쳐있어요. 그리고 나진 선봉은 평양처럼 빨간 줄. 거기 들어가자면 10호 초소를 통과해야 하는데 10호 초소 몇 개를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단 말이에요. 국경 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저씨)

아저씨가 “시뻘건 줄이 두 줄인지 세 줄인지 쳐 있다”고 했는데 실제는 한 줄이다. 평양에 들어가는 통행증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다. 또 국경지역에 있는 도시로 가는 통행증에는 파란 줄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줄이 그어진 지역은 통행증만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통행증과 함께 ‘승인번호’를 받아야 한다. 아저씨가 “평양시는 승인번호가 떨어져도, 역전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승인번호를 다 확인하고 객차를 통과시킨다”고 한 말은, 승인번호를 받았다해도 평양역전에서 승인번호 장부를 보며 본인 여부를 한 명씩 확인한 다음에야 평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평양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다. 평생 살면서 평양구경 한 번 못했다는 북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아저씨가 말한 ‘10호 초소’는 인민무력부에서 관할하는 초소로, 북한의 주요도로마다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통행증과 자동차 운행증을 검열한다. 국경지역에는 이러한 10호 초소가 수두룩하다. 경제 특구로 알려진 나진·선봉을 들어가려고 해도 이러한 10호 초소를 몇 개는 통과해야 한다는데, 이곳도 특별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혹시 북한에서 김정일이 현지지도 온 것을 본 적이 있나?
“김정일이 우리 농장에 사냥을 왔던 적이 있지.. 현지지도를 온 게 아니고 사냥을 왔단 말이에요. 하루는 보위부에서 길을 차단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과수농장으로 빨리 올라가라’고 소리를 지릅디다. 올라가고 있는데 혹시라도 차를 볼까봐, 사람들을 (길 반대방향으로) 돌려 앉혀 놓았습니다. 한참동안 펑펑 총소리가 나더니, 부관이 가서 ‘꿩을 세 마리나 잡았다’고 하고, 그 다음에 씽 달아났단 말이에요. 그렇게 분명히 사냥을 왔다 갔는데, 나중에 김정일이 현지지도를 왔다고 하면서 비석(현지지도비)을 세우더란 말입니다. 그 비석 돌도 양강도 어디에서 만들었다고 하던데…. 총으로 꿩 쏘는걸 내가 다 바라봤는데 그걸 현지지도라고 그런단 말이야. 그게 현지지돕니다.” (아저씨)

아저씨가 “양강도 어디에서 가져왔다는 비석돌”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황해북도 봉산에서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에서는 현지지도비를 대리석으로 세우는데, 이것을 만드는 공장이 황해북도 봉산에 있다. 특각에 쓰이는 대리석도 대체로 여기서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아저씨가 살았던 함경북도의 경우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아저씨는 그 웃기는 ‘현지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와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한 게 없는데, 무슨 말을 수두룩하게 적어 놓고 ‘교시’라고 합디다. 그날 무슨 일 때문에 우리 농장에서 소를 잡았는데, 김정일이 때문에 동원되었던 군안전부 사람들이 소고기만 다 먹고 갔습니다.” (아저씨)

인터뷰 후반으로 갈수록 부부는 긴장을 풀고 북한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서로 거들어 가며, 때로는 “아니지, 그게 아니지”라고 자기 기억이 맞다면서 술술 이어갔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밤이 늦어진 관계로 그쯤에서 인터뷰를 마쳐야 했다.

- 탈북자들이 대사관에 진입하여 한국으로 망명을 요청하는 사건을 알고 있나? 그렇게 해서 한국에 가고 싶지는 않나?
“우리도 알고 있지. 그것 참 대단한 일이라고 신기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늦었지 않습니까. 그것도 처음에 해야지 성공하는 거지. 이제는 대사관 경계가 삼엄해져서 그것도 안될거란 말이야. … 내 만일 한국 갈 수 있다면 피를 물고라도 해보겠소.” (아저씨)

- 만약 대사관 진입에 실패해서 북한으로 끌려가면 어떻게 된다고 보십니까?
“그건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해야지. 그건 무조건이란 말이야. 언론에 폭로됐기 때문에 무조건 죽인단 말이야.” (아저씨)

- 그래도 한국으로 가고 싶으세요?
“아 정말… 정말 가고 싶습니다. 우린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묻힐 데도 없지 않는가. 우리 여기서 햇수로 5년을 살았습니다. 심리적 고통은 말할 수도 없어요. 하루 밤에도 몇 번씩 끌려가는 꿈을 꿉니다. 우리는 잘 때 문을 꽁꽁 닫아 놓고 잡니다. 한순간이라도 마음 편히 발뻗고 자고 싶습니다.” (아주머니)

이외에도 인터뷰한 내용이 많지만 다 옮겨 적질 못했다. 독자들이 읽은 대로, 이들의 인터뷰는 최대한 그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려 했다. 두 분의 함경도 사투리가 너무도 정겨웠다. 글 속에, 독특한 억양까지 담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들의 한숨소리와 글썽이는 눈물까지 독자들에게 또렷이 그려 보여줄 수 없는 이 짧은 필력(筆力)이 원망스럽다.

이 부부가 사는 집에는 라디오가 있지만 오래되어서 듣지 못한다. “라디오가 있으면 한국방송이라도 들으며 지낼텐데”하는 아저씨의 말에, 내게 라디오가 있었다면 건네주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돈이라도 많으면 사주고 싶지만, 그냥 돌아서기 미안해 “아저씨 약값에 보태라”며 아주머니 손에 인민폐 100원을 쥐어주었다. 고마워 어쩔 줄 몰라하는 부부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하늘의 별은 왜 그다지도 많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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